2006년 5월 26일 금요일

숨 고르기.

계속되는 일정. 6월 2일까지는 좀 바쁘겠다. 인터넷 접속할 시간이 없어 포스팅도 못하고 있다. 날씨는 점점 더워지고 이젠 밖에 돌아다니기만 해도 땀이 흐를 정도가 되었다. 곳곳에 선거운동이 한창이고 월드컵 개막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염원과 그 염원에 힘입은 광고, 판촉활동들도 활발하다.

여름으로 가는 뜨거운 길목에서 숨 고르는 것도 잘 사는 방법 중 하나.

2006년 5월 20일 토요일

친구의 결혼

친구가 결혼한다며 꼭 참석해 주기를 원했음에도 금전적인 부분 때문에 쉽게 그러겠노라고 대답을 못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한 번 들어갔다 오면 몇 달치 생활비가 그냥 날아가기 때문이다. 친구에겐 평생 한 번 밖에 없는 결혼이지만 미안함을 뒤로 하고 못 가겠다고 단호히 말했었다.

그런데 이틀 전, 동화학원에서 급히 나를 찾길래 무슨 일인가 해서 가봤더니 학교 몇 몇 교수님들이 한국에 가서 SICAF참석도 하고 대학 방문을 하기로 되어있는데 같이 가서 도움을 줄 수 없겠느냐고 한다. 사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딱히 통역이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고 특별히 내가 함께 갈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그래서 갈 필요가 없어 보이는 것 같다고 말하자 대표가 작년에 한국에 가서 방문했던 대학을 이번에도 똑같이 방문하는데 작년에 내가 학교 방문단을 도와주지 않았느냐며 게다가 내가 같이 가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다며 동행하길 권유한다.

마침 학교 선생들하고 몇 가지 얘기할 것도 있었고 한국쪽 소식 하나를 기다리는 것도 있었기에, 그리고! 친구 결혼식도 참석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여러 생각에 가는 걸로 결정을 했다.

나는 미리 들어가기로 하고 서둘러 비행기표를 알아보는데 안타깝게도 시간이 늦어 19일 비행기표는 구할 수 없어 20일 비행기표를 구할 수 밖에 없었다. 친구 결혼식은 참석할 수 없겠지만 뒷풀이에는 갈 수 있을 듯 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리무진으로 고향까지 직행. 친구들과 해후했다. 아침 6시부터 일어나 준비하고 오는 길이기에 중국에서 한국 고향까지 꼬박 10시간 정도 걸린 셈이다. (10시간이면 중국에서 장춘-북경 거리보다도 가까운 거리다. 한국-중국은 정말 가까운 나라임엔 틀림없다.)

도착하자 마자 만난 친구는 행복해 보인다. 결혼하기 전 이런저런 마음고생이 꽤 많았는데 이 결혼으로 인해 모두 해결이 된 듯 보인다. 친구와 신부는 내가 보기에 아주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이런 두 사람만의 어울림과 조합이 두 사람을 이 자리까지 오게 했고 고통과 어려움도 굳건히 이겨내게 해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비록 친구 결혼식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렇게라도 직접 만나 축하를 건넬 수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친구는 중국에서 날아와 준 내게 고마워하지만 난 기회가 생겨서 묻어 왔을 뿐인지라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은 여전하다.

부디 앞으로 백년해로하길. 순탄하고 행복한 가정생활 꾸며가길.




울릉도로 신혼여행을 간다는데 가면 독도도 함께 들렸다 오길 바란다. 생각해 보니 신혼여행 뿐만이 아니라 한국 사람으로서 울릉도나 독도를 다녀오는 건 참 드문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발상의 전환을 한 친구에게 박수를!!! :) 순전히 안 가봤기 때문에 신혼여행지로 선택한 거라는데. 오호라.

2006년 5월 15일 월요일

블로그, 나의 한계... 그리고 실천.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많은 블로거들의 글을 접하게 되었고 그들에 글은 젊고 당당하고 깨어있는 의식으로 갖춰있음을 알게 되었다.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내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의식 수준과 행동의 한계가 어떤 것임을 알게 되었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치없는 고백을 하자면 (노력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도) 글을 잘 쓰고 싶고 그림도 잘 그리고 싶고 음악에도 깊은 조예를 가지고 싶다. 이미 어느 정도 굳어진 습(習) 때문이겠지만 글도 그림도 음악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접촉하게 되고 보다 폭 넓은 인식, 사고체계에 관해서는 종종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곤 한다.

간혹 포털 사이트에 올라오는 소위 ‘베스트’라는 글 아래 달린 (무식한) 답글들을 보며 스스로 그들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음에 안도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알량한 안도감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각의 쇄신과 열린 사고, 실천적 행동을 나투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남보다 많이 알고 정확히 아는 것은 분명 장점이고 본받을 만한 것이지만 그보다 그 생각과 의식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해가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곧 진실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혹여 염치없는 개인적 소원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재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부분을 열정적 도전과 끊임없는 노력(아주 상투적인 표현이지만…-_-;)으로 하나씩 이루어내기라도 한다면 그게 곧 다른 이들과 소통의 도구로써 충분히 역할을 수행해내리라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지금 나는 행동하고 있는가. 여전히 의문이다. 늘 남의 그릇과 재능을 부러워하고만 있는 건 아닌가. 지난 날 작은 울타리 안에서 거뒀던 열매의 단물만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닌가.

머리 속에 수 많은 생각과 계획들이 표류하고 있으면서도 쉽게 글로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어느 샌가 직접 부딪히며 때론 쓰러지고 때론 실패하는 일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 혼자서 하기보다 여러 벗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작은 열망 때문에 준비하는 시간조차도 쉽게 할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간혹 ‘죽음’과 관련된 주제에 생각이 닿게 되면 열정이 쉬이 사라지기도 한다.

이런 자신을 아프게 인정하면서 오늘도 열려있고 발전해가는 멋진 블로거들을 만나기 위해 마우스를 클릭한다. 그리고 다시 몸과 마음을 추스린다.

대추리 사태에 대해 좀 더 알기.

대추리 사태에 관련한 몇 가지 이야기. 글들이 모두 길지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무엇이고 무엇이 근본적인 문제인지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소개해 본다. 다른 좋은 글들도 많지만 일단 세 개 정도만...;;;

한국 부담 12조 이상, 미국은 3조 미만 - 읽기


(글들이 너무 길어 입력 오류가 생겨 나머지 글 두 개는 링크로 대신함)

이땅은 농투성이들의 목숨이다. - 링크 따라 읽기

제국의 역습, 이제 전 지구가 대추리다. - 링크 따라 읽기

이 내용들이 만약 100% 맞지 않다고 우기거나, 혹은 너무 한 편으로 치우쳐 생각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역시 똑같은 대답을 해주고 싶다. 극우던 보수던 진보든 간에 양 쪽을 다 바라보는 게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현재 모든 매체에서 빨갱이, 국익을 외면한 반동분자, 한총련, 범대위, 폭력집단이라 운운하며 떠들어 대고 있고, 그들 역시 한 쪽으로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글은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이런저런 자료나 글이 돌아다니면 열을 내던 사람들이 분노(?)의 방향을 살짝 바꾸는데 바로 "대추리 주민들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폭력적 시위 방법을 비판하는 거고 그들 뒤에 숨어 그들의 투쟁을 조장하는 불순세력들을 비판하는 것"이라 말한다는 것이다. 그럼, 제발 그 불합리한 부분들에 대해서만 비판하고 비판하더라도 근거와 자료를 들어 설명해주길 바라 마지 않는다.

쉽게 여론에 호도되는 것도 민중이고 여론을 뒤집을 수도 있는 것도 민중인데 확실한 근거와 설명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그저 감정에 휩쓸려 다닐 수 밖에 없지 않나.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행동할 수 밖에 없다.

그저 상상에 의한 피상적인 두려움, 그리고 부족한 사실을 전체로 인식하는 오류로 인해 놓치는 것은 없는지, 오해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생각해 보는 건 정신건강과 흔히들 말하는 '국익'에도 큰 손해는 없을 거라 생각한다.

2006년 5월 13일 토요일

인도영화 <진다;zinda>는 <올드보이> 표절? 리메이크? 오마쥬?

<올드보이>가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긴 했나 보다. 헐리우드에 버금가는 발리우드(일산에서 진행하는 한류우드는 이름 좀 어떻게 고치면 좋겠다.-_-;)에서 <올드보이>를 100%(? 보지 않아서 모름;;;) 표절한 영화 <진다;zinda>(- 기사 보기)가 탄생했다. 내용을 보자니 <진다;zinda>의 감독은 유명한 영화를 표절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올드보이>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가 된 셈이다.

예전에 인도에 갔을 때 극장에서 영화를 봤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보면 인도인들은 영화를 볼 때 영화의 흐름과 맥을 함께 하며 즐긴다. 함께 탄성을 지르고 웃고 떠들며 영화를 본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데 지장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 신기하고 유쾌한 경험이었다 생각한다. 좀 긴 영화는 중간에 휴식시간을 주고 그 휴식시간에 화장실에도 다녀오고 영화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부분을 서로 이야기하며 영화 후반을 기다리는 것이다. 한국에서라면 어림도 없을 상황이지만 아주 자연스러웠던 그들만의 문화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요즘 인도영화는 예전과 달리 꽤 많은 장르와 형식이 나오고 있다는데 기회가 되면 인도영화 DVD도 구해봐야겠다.

2006년 5월 12일 금요일

"꼭지점 댄스"에 대한 단상

조금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어느 날인가 인터넷에서 “꼭지점 댄스의 다른 버전”들이 공개되었다. 물론 한 포털 사이트가 주관하는 대학 행사의 일환으로 진행된 일이긴 하지만 그걸 떠나 젊은 친구들의 신나는 한마당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혹자는 꼭지점 댄스가 부끄러운 현상이라고 비판하기도 하고 혹자는 세계에 한국을 알릴 수 있는 좋은 춤이라 왈가왈부하지만 난 그런 것엔 별 관심이 없고 왜 이렇게 꼭지점 댄스에 열광하는지가 궁금했다.

한국에는 노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화, 음악, 연극, 뮤지컬 등의 공연을 즐기거나 미술, 사진, 조형 예술품을 관람하며 여가 시간을 보내고 문화적 소양을 쌓긴 하지만 서울을 제외하곤 간단한 기회조차도 없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문화를 향유하는 건 그 나라의 경제적 풍요와 맥을 함께 한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문화’를 얘기할 수 있겠나. 한국 경제가 불경기다 어쩌다 하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은 상당한 높아진 한국의 물질 생활 덕에 나름의 여가 활동을 계획하고 즐긴다. 여전히 서울 쪽에 집중되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등장한 ‘꼭지점 댄스’는 일방적으로 관람만 하던 문화를 직접 몸을 움직이며 동참할 수 있게 하는 문화로 전환하는 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즉, 행동하는 놀이 문화라는 특성 때문에 수면 위로 급부상하지 않았나 싶다. 몸을 움직여 노는 문화는 굳이 특별한 장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서울이라는 지역이 아니어도 무방하다. 뜻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웃고 떠들고 즐기면 그만인 것이다.

어릴 적 주먹야구나 비석치기, 오재미, 동그랑 땡과 같이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몸을 부딪히고 놀 수 있는 문화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그저 어느 공간에 앉아 정신과 마음만을 즐겁게 해주는 문화를 즐기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인지 몸 놀이, 몸 언어가 많이 부족해진 건 사실이다. 그만큼 내 몸 하나 움직이며 동참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이 사라진 것에 다름 아니다.

꼭지점 댄스의 탄생 배경이 조금 어뚱하긴 하지만 ‘라틴 댄스’나 ‘발리 댄스’, ‘스포츠 댄스’와 같이 일정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하고 전문적인 교육을 필요로 하던 춤과는 달리 몇 명만 모이면 쉽게 따라하거나 위 링크된 동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각자가 여러 형태로 변환시켜 함께 놀 수 있다는 점이 꼭지점 댄스를 유행시키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싶다.

동영상을 보며 한 편으론 씁쓸한 마음도 있었는데 그건 월드컵에 맞춰진 이벤트라는 점과 흥겹게 놀 수 있는 몸 문화가 얼마나 없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들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회들을 통해 대기업 자본이 투입되어 형식적으로 만들어지는 이벤트 말고도 각자 친구들과 어울려 즐겁게 신명나게 놀 수 있는 문화들이 더 많이 생기면 좋겠다는 바람 또한 가져본다. 몸으로 부딪히며 나누는 대화와 문화의 교류는 정신이나 마음까지도 함께 동반 교류할 수 있는 좋은 소통의 방식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2006년 5월 9일 화요일

완전한 해탈 천도를 기원합니다.

연길에서 연휴가 끝나는 대로 돌아오려고 표를 알아봤지만 역시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는 지라 8일 표를 구하지 못하고 9일 표를 끊을 수 밖에 없었다. 9일 저녁 기차. 12시쯤 용정에서 먼저 연길로 나왔다. 저녁에 기차역에서 영덕 형님을 만나기로 했다.

용이와 명호를 만나 점심을 간단히 하고 영중 형님에게로 갔다. 유치원엔 한국에서 다른분이 와 계셨고 형님과 둘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중에 영덕 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영중 형님 표정이 굳어진 채로 말한다. “영덕이 아버님 열반하셨단다.”

이번 5.1절 휴가 때도 북경에서 오자마자 아버님 병세가 어떤지 보러갔던 영덕 형님. 아버님은 3년전에 중풍으로 쓰러지신 후 호전되었다가 다시 뇌가 수축되는 병을 얻으시고 악화되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의사는 길어야 석달, 빠르면 보름 안에 열반에 드실 거라 말을 해줬다고 했다. 결국 향년 74세의 나이로 열반에 드셨다. 영덕 형님은 내가 용정을 떠나오고 나서 바로 전화를 받고 아버님 댁으로 건너갔다고 했다.

영중 형님과 부랴부랴 기차역에 가서 표를 반환하고 훈춘까지 2시간 정도 시외버스로 이동했다. 그리고 다시 영덕 형님 형수를 기다린 후 다른 친구 분 차로 금당현 안까지 40여분 정도 들어갔다. 이미 시간은 저녁 9시 반을 넘긴 상태였다.

도착 한 후 바로 집에 들어가 영전에 절을 했다. 한국은 보통 재배(再拜)를 기본으로 하는데 연변에서는 한 번이나 세 번 절을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고 한다. 연변의 풍습에 맞춰 절을 한 번 하고 영덕 형님 식구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잠시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얼마 챙기지 못한 조의금을 영덕 형님께 건네고 근처 영덕 형님 친구분 댁에 가서 잠을 청했다.

친구분과 영중 형님과 셋이 간단히 맥주를 하며 얘기를 나눴다.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에 가서 돈을 벌고 있다는 얘기며 다행이 한국이 잘 살게 되어서 조선족들에게 돈 벌 기회가 되니 좋다는 얘기며 농사 짓는 얘기 등등 서로 궁금한 부분들에 대해 조금씩 얘기하며 의견을 교환했다. 지금 마을에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얘기가 가장 씁쓸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제일 젊은 나이가 40대 초반이고 아이들의 경우엔 연길시, 용정시나 훈춘시에 나가 공부를 하고 점점 가족단위로 마을을 떠나고 있다 한다. 한 20여 년 전만 해도 300여 가구가 살던 게 지금은 80여 가구만 남았다고 한다. 돈을 주고 집을 지으라 해도 나서는 사람이 없고 살던 집도 그대로 버려두고 모두들 도시로 나갔다고 한다. 중국이야 땅을 정부에서 분배를 해 준 후 농사를 짓게 되니(그래도 조금씩 면적의 차이는 있다) 농사 지을 땅이 없어 걱정하지는 않지만 일손도 부족하고 농산물 가격이 너무 낮아 많이 힘들어 하는 모습이다.

이튿날 새벽 4시쯤, 훈춘으로 나가는 자가용이 있다고 해서 일어났는데 결국 일이 바쁜 사람들이 먼저 가고 영중 형님과 나는 일어난 김에 영덕 형님 집으로 건너가 발인에 대한, 손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나눴다.

중국의 경우 한족은 보통 사망한 다음 날 바로 장례를 치루고 화장을 한다. 조선족과 같은 소수민족의 경우엔 각 민족의 풍습에 따라 장례를 치루고 매장을 하거나 민족의 풍습을 따라 처리한다. 그래서 이번 경우는 3일 째 되는 날 발인을 하기로 했다. 오늘은 묘자리를 준비해놓고 관을 가지고 와서 입관을 한다고 한다.

이래저래 일 손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되긴 하지만 장춘에 돌아가 처리할 일도 있고 해서 오늘 떠나기로 했다. 마침 영중 형님도 연길로 다시 나가게 되어서 둘이 함께 아침 6시 버스로 훈춘으로 나가서 다시 연길로 가기로 했다.

영덕 형 형제들은 모두 넷인데 막내가 이미 38세다. 각자 시정부, 세무국, 환경국 쪽에서 일을 하고 있어 조문객들이 꽤 많이 올 것 같은데 일을 많이 도와드리지 못하고 오게 되어 미안한 마음 뿐이다.



영덕 형 아버님, 부디 완전한 해탈천도를 기원합니다.

2006년 5월 8일 월요일

2006년 5월 7일 일요일

동맹이 아니고 충성이지.

중국TV에서는 대추리 소식을 들을 수가 없다. 이번에 연길에 와서야 한국TV를 통해 대추리 뉴스 소식을 접할 수 있었는데 인터넷 신문 보도만 보다가 생생한 동영상을 보니 마음이 더 좋지 않다.

북한에 대한 공포, 미국에 대한 충성, 일본에 대한 분노 등이 한데 어울려 미국이면 간도 쓸개도 다 빼주며 극진정성으로 대접을 하고 몇 년씩 땅을 일구고 살아왔던 대추리 농민, 주민들은 국가의 명령으로 아무런 방법없이 쫓겨나야만 한다. "좁쌀, 레드 콤플렉스, 대추리 그리고 한미 동맹"이란 글에서도 말하듯 어떠한 강박관념이나 편집증에 시달리게 되면 바로 실질적 삶의 터전이 좁아지고 사고의 폭이 좁아지게 된다.

동맹이라는 건 "둘 이상의 개인이나 단체가 동일한 목적을 이루거나 이해를 함께 하기 위하여 공동 행동을 취하기로 하는 맹세"를 말하는 것. 한미동맹에선 동일한 목적이라기 보다 큰 형님의 뜻에 따라 충성서약을 하는 하는 뜻으로 변질되었나보다.

남의 나라와 한 약속은 중하고 내 나라 민중은 보호할 가치도 느끼지 못해 살아갈 터전도 뺏어 남에게 던져줘야 하는 것인가. 아니, 보호해주고 법대로 하자는 말은 난무하는데 그건 모두 법대로 살아가지 않는 자들이 하는 말 아닌가.

다치는 사람이 없길 바랄 뿐. 모두들, 인명피해 없는 진행과 결과가 되길.

시간이 흘러 세상이 변해도 개인의 탐욕은 변하지 않는 법인가 보다. 개인의 탐욕과 이기심은 변해가는 세상에 맞춰 변형을 할 뿐이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을 뿐이다. 집단의 이기심은 결국 개개인의 욕심이 모이고 모여 공고해진 결과다. 때론 집단에 현혹되어 변해가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오랜만의 회합

1> 연길은 얼마 전 겨울에 왔을 때보다 활기가 넘친다. 5.1노동절 휴가 때문에 그렇다. 거리마다 파격세일 행사를 진행하고 많은 사람들이 백화점이며 상점에서 물건을 사려고 북적인다. 지난 번 겨울에는 모두들 집 안에만 있었던 탓인지 사람구경하기 힘들었는데 이번엔 사람들에 치여 길을 다니기도 힘들다. 간혹 거리 무대에서 도우미들과 사회자가 지나가는 행인들을 대상으로 판촉행사를 하기도 하고 집에서 가지고 나온 옥수수 등으로 구워 팔기도 한다. 정말 온갖 장사 풍경을 볼 수 있다. 날씨도 풀려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 거리에서 휴일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듯 하다.

2> 영중 형님은 이번에 집을 마련해서 새단장을 멋지게 했다. 18년만에 집을 마련한 것이라니 감회가 새롭기도 하겠다. 집들이 선물로 벽시계를 하나 사드렸다. 영덕형님과 형수님도 다음 날 집들이 겸 오랜만에 모두 함께 모여 식사하기 위해 용정에서 건너왔다. 정말 오랜만에 모두들 모여 식사하고 얘기하고 그리고 노래방도 가서 목청높여 노래부르고 춤추며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요즘 있었던 많은 일들에 대해 언성 높여가며 답답함들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그 역시 오랜만의 회합이 가져다 준 편안한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3> 정말 많은 생각을 들게 하는 이야기들. 사람이건 집단이건 모두들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모순, 문제들에 대해 해결점을 이야기하기 전에 나도, 내 주변도 돌아보게 된다. 결국 내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방법론이 더욱 필요할 때인 듯.

4> 계속 날씨가 좋다가 어제 살짝 비가 내렸다. 비가 멈춘 저녁엔 여전히 동네 사람들은 공원에 나가 야식거리를 먹으며 시간을 보낸다. 용정 역시 지난 겨울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포근한 날씨는 사람들 마음과 몸의 빗장을 풀게 하고 밖으로 끌고 나온다. 자연스러운 자연현상이 보여 주는 무형의 힘이다.

2006년 5월 3일 수요일

좋은 날, 연길 갑니다. :)

오늘 저녁 9시 30분 기차로 연길에 가려고 합니다. 중국 5.1 노동절을 맞이해 7일 휴가기간이 시작되었는데 친구들도 모두 고향에 가거나 여행을 가서 무료하던 차에 연길에 있는 형님과 친구들이 놀러오라고 해서 며칠 전 급히 기차표를 샀습니다. 10일 전에 예매하지 않으면 표 구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연길가는 사람들은 그나마 좀 적은 모양입니다. 바로 구매 완료했습니다.

연길에 간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곳을 가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기차로 약 9시간이 걸립니다.-_-; 하긴 중국 친구는 부모님을 모시고 부모님 고향을 가는데 자가용으로 이동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장춘에서 하남까지. 자가용으로 가면 약 하루, 혹은 30시간 정도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0- 부모님의 요구라 친구는 부득이하게 운전을 하게 되었는데 일단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입니다. 그 시간이면 서울과 부산을 두 번 왕복할 수 있는데 말이죠.

그간 변덕스러운 날씨가 점점 제대로 된 봄 기운을 갖춰가고 있습니다. 포근하군요. 연길에 가서 한 며칠 있다가 바로 돌아와야지요. 작업 진행해야하니까요.



그나저나 공동감독하는 작품 말고 개인 작품 시나리오는 정말 잘 써지지 않는군요. 썼다가 엎었는데 영감이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신청서도 마무리 되었으니 다시 집중 좀 해야겠습니다. 으쌰.

병아리, 날 수 있을까?

<한국 문화 컨텐츠 진흥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지원 공모>에 응모하기로 했다. 중국 감독과 함께 공동감독으로 이름을 올리고 신청을 하기로 했다. 중국에서 활동하려는(하고 있는) 한국인에게 여러모로 좋은 점이 있을 거라 판단해서다.

현재 진흥원에서는 아직 외국에서 활동하는 감독에게 제작지원을 한 선례가 없다고 한다. 예전 제작지원 사업이 영화진흥위원에 있을 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제작지원 사업이 컨텐츠 진흥원으로 넘어간 후론 정책에 작은 변화가 있어 보인다. 어찌되었든 중국 제작인력을 활용해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는 건 이후의 발전방향과 제작방식에 있어서도 새로운 돌파구가 되지 않겠나.

중국과 정식 수교를 맺게 된 1992년 이후부터 중국과 합작을 하고 있는 여러 애니메이션 프로젝트가 있긴 하지만 그다지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몇 년 전 북경에 갔을 때는 한 감독이 만화가 허영만씨와 합작을 하려고 했던, 하지만 중단되었던 프로젝트를 보여주기도 했다.) 중국인들과의 사업 파트너를 맺는다는 게 생각한 것보다 어렵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고 보다 효과적인 방법론을 찾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다. 한국내 애니메이션의 어려운 상황을 어떤 식으로든 타개하려면 국제적 파트너쉽을 맺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일례로 많은 한국 애니메이션 회사들이 외국과 합작하거나 외국에서 먼저 방영, 상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만, 단편 애니메이션의 경우 외국 현지에서 관련 학과를 졸업하고 작품 활동을 하거나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런 연고가 없이 외국에서 시스템화 된 방식을 통해 제작하는 건 보기 어렵다. 단편의 경우 예산 운용이나 제작의 기동성이 더 좋기 때문에 이번의 경우 괜찮은 선례가 되리라 생각한다.

컨텐츠 진흥원에서는 선례가 없었다고 하니 이번 응모에 큰 기대는 걸고 있지 않지만 만약 성사된다면 진흥원의 정책으로든 단편 애니메이션 감독에게건 좋은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신청서를 작성하느라 시간을 좀 보냈다. 프리 프로덕션의 기본적인 개괄은 작업이 끝난 상태라 신청서 작성은 별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솔직히 말하건데 애니메이션 기획서 작성 중에 가장 머리가 아픈 '예산표' 작성에 시간이 걸렸다. 예산표는 제대로 작성되는 건 많은 경험과 노하우가 필요한 일임과 동시에 많은 애니메이터에게 두통을 가져오는 항목이다. 특히 내게는 숫자가 어렵다.(학교 다닐 때 수학도 제대로 못했었으니...-_-;)

신청서가 통과가 되든 되지 않든 제작은 분명 진행을 하겠지만 되면 좋겠다. :)



음, 진행하면서 나오게 될 이미지나 진행과정을 간혹 공개를 하겠지만 일단 맛뵈기로;

날아라 병아리; Fly for...; 小鸡想飞 이미지

파시즘

파시즘 [fascism]

1919년 이탈리아 B.무솔리니가 주장•조직한 국수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반공적인 정치적 주의 •운동. 파시즘이란 이탈리아어인 파쇼(fascio)에서 나온 말이다. 원래 이 말은 묶음[束]이라는 뜻이었으나, 결속 •단결의 뜻으로 전용(轉用)되었다. 파시즘이 대두하게 되는 일반적이고도 보다 광범위한 배경은 18세기 말부터 누적되어 온 사회적 불안과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만성적 공황 및 전승국 •패전국을 막론한 정치적 •사회적 불안에서 초래된 각종의 혁명적 기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근대사회의 위기적 양상은 모두 파시즘의 배경이 된다.

즉, 파시즘이 발생하게 되는 배경은 ① 국제적 대립과 전쟁위기의 격화 ② 대량적 실업과 공황 ③ 국내정치의 불안정 ④ 기존 정당 •의회 및 정부의 부패 •무능 •비능률 등 병리현상(病理現象)의 만연 ⑤ 각종 사회조직의 강화에서 오는 자율적인 균형 회복능력의 상실 ⑥ 정치적 •사회적 집단 간의 충돌의 격화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위기요인의 격화에 의해 정치체제의 안정과 균형이 파괴되고, 게다가 기존 정치세력이 사태를 효과적으로 수습할 능력을 상실할 경우, 무정부적 진공상태를 메우기 위하여 파시즘이 등장한다.


파시즘의 이데올로기

파시스트들 가운데는 확실한 권위를 가진 파시스트 선언은 없으나, 대개 그 공통적 이데올로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반합리주의(antirationalism)이다. 서구문명의 그리스적인 근원을 부정하며,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이성을 불신하고, 인간의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억제하기 곤란한 요인들을 강조한다. 심리적으로 파시즘은 내성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광신적(狂信的)이며, 편견이 없다기보다는 독단적이다.

② 기본적인 인간평등을 부인한다. 파시스트 사회는 인간불평등의 사실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의 이상으로서 불평등을 확신한다.

③ 파시즘의 행동규칙은 여러 국민 내의,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폭력과 기만에 중점을 두고 있다. 파시스트의 견해에서는 정치란 우호관계로서 특징지워지며, 정치는 적의 존재가능성 및 적의 전면적 섬멸로 시작하여 그것으로 끝난다. 집단수용소와 가스실 등이 이를 입증한다.

④ 엘리트에 의한 정치(government by elite)는 국민들의 자치능력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의 오류에 반대하는 파시즘의 원리이다.

⑤ 파시즘은 단순한 정치제도보다는 오히려 생활양식으로서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전체주의라는 데 그 특색이 있다. 즉, 정치적이든 아니든 파시즘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일평생 인간생활의 전국면을 통제하는 것이다.

⑥ 인종주의와 제국주의는 불평등과 폭력이라는 파시즘의 2가지 기본적인 원리를 말한다.

⑦ 국제법과 국제질서에의 반대는 불평등 •폭력 •인종주의 •제국주의 및 전쟁을 신념으로 하는 파시스트들의 논리적인 귀결이다.

⑧ 파시즘의 조직 및 관리 원칙은 경제와 관련되는 협동체국가(協同體國家:corporate state)이다. 파시스트 경제는 국가관리의 자본 및 노동연합회로 세분되며, 각 연합회는 상업이나 직업에서 독점권을 가지고 있다. 1당독재는 결국 자본과 노동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최종 중재자이다.


파시즘의 범위

독일의 파시즘연구가 E.놀테는 파시즘을 유럽적인 현상이라고 이해하여, 제1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 즉 1919∼1939년이라는 기간의 특유한 현상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입장에서는 유럽 이외의 현상인 일본의 군부(軍部) 파시즘이나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는 문제가 되지 않고, 또 네오파시즘운동이나 네오나치즘운동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편, 대중사회이론(大衆社會理論)이나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 선 파시즘론에서는 현대사회의 모든 반동적 독재정치운동을 파시즘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파시즘을 지칭한다.


이탈리아의 파시즘

제1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는 분명히 전승국의 일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적으로 좌절하고 있었다. 전리품의 배분에 있어서 푸대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확장된 영토에 있어서도 그것은 이탈리아 대다수 국민들이 원하는 바의 결과는 아니었다. 게다가 통화가치의 하락 때문에 프티부르주아는 큰 타격을 받았으며, 농민계급은 오히려 전쟁 전보다 더욱 빈곤해졌다. 이러한 형태의 국민적 좌절감은 근대 민족주의와 관계하여 권위주의적 정치형태의 기반을 쉽게 조성시켰던 것이다.

이탈리아는 자연자원이 근본적으로 부족하였다. 게다가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도시화와 산업화가 눈부신 발전을 보이고 있었으나, 대조적으로 남부에서는 후진농촌(後進農村)으로 방치되어 심각한 지역적 격차를 보이고 있었다. 또한 지주와 기업소유자로 이루어진 지배계급은 교양을 갖추고 권력을 장악하여, 재산과 교양이 없는 노동자 및 농민을 지배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계급적 불균형은 민주화의 기반을 잠식시켜 갔다. 선거권은 읽고 쓸 수 있는 자는 21세 이상, 읽고 쓰지 못하는 자는 30세 이상의 이탈리아인으로 제한되었다.

북부 산업지역에서는 조직화된 공산주의 운동이 성장해 가며 갈등을 야기시키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이러한 만성적인 위기상황은 중산계급들에게 새로운 사태에 대비하게 하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파시즘이 자리잡도록 환경을 조성시켜 나갔다. 결과적으로 이탈리아의 사회와 정치의 이러한 상황은 열성적인 민족주의자들을 각성시켰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국가를 통합할 수 있는 지름길이 이러한 분열증식적(fassiparous) 성격 속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점은 이탈리아인의 기질이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무정치적(apolitical)인 경향이 있다고 지적되는 이유이다. 이러한 지적은 특히 지주와 정치가에 의해 가치가 박탈되고 있던 농민들에게 적중하였고, 국민적 좌절감, 심리적 열등감, 경제적 혼란, 정치적 분열중식성 등에 관련되어 파시즘은 발생되었던 것이다.

1920~1922년 이탈리아 정국은 불안정하여 빈번한 내각교체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탈리아 정치의 분열증식적인 경향은, 국가적 열등감과 불확실성이 심하였던 이 기간 동안에 특히 주목된다. 단지 공산주의자들만이 그들의 행동방향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사회주의자들은 신망과 세력을 잃었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성장 때문만이 아니라, 전시에 보였던 그들의 태도로 인하여 비애국적으로 낙인 찍힌 여론 때문이었다. 산업체 소유계급들은 이러한 정국의 불안정성에 대한, 특히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확실하고도 새로운 정치적 해결책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본가 •군부 •귀족이 당의 후원자가 되고, 제대한 군인과 도시 및 농촌의 중산계급이 대중적으로 파시스트운동에 참가하였다.

파시스트당은 처음에는 사회주의적 정책을 강조하였으나 곧 국가주의적 경향을 보이게 되고, 1920년 사회주의노동자에 의한 북부 이탈리아의 공장점령이 실패한 이래, 파시스트는 사회주의 조직에 대하여 폭력을 행사하여 사회당이 우세한 각 도시의 시의회나 시청을 공격 •점령하였다. 1921년 군부 •경찰 •관리의 지지를 얻은 그들의 폭력은 대규모적으로 확대되었고, 1922년 국내가 거의 내란상태로 변하였다. 1922년 10월 27일 무솔리니는 4만 명의 병력으로 결성된 ‘검은 셔츠대’를 이끌고 이른바 ‘로마진군’을 결행하였다. 10월 29일 이탈리아 국왕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결국 로마 진군은 정권접수를 합리화하는 정치적 행사였던 것이다. 당시 왕당파(王黨派)나 자유주의자 •사회당도 안정된 정부를 조직할 만한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이탈리아의 권위의 위기와 사회혁명의 위험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상층계급이 파시스트당에 정권을 물려준 것이었다.

정권을 잡은 무솔리니는, 처음에는 국민들의 확고부동한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1924년 총선거에서 전투표의 65 %를 얻는 성과를 올렸으나, 지역적으로 볼 때에 북부지방에서는 그다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으며, 게다가 1924년 6월 파시스트에 의한 마테오티 사회당의원 암살사건은 파시스트 정권을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하였다. 그러나 점차 권력을 강화하여 비밀경찰의 확대, 언론 •출판의 통제, 심지어 법령제출권(法令提出權)까지 무솔리니의 동의하에 두게 하여 무솔리니의 정령(政令)은 그대로 법령으로 통용되었다. 1925년 파시스트당 이외의 결사를 금지시켰으며, 1930년대의 세계대공황은 무솔리니의 영토확장주의의 야망을 표면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가장 열렬히 무솔리니를 지지했던 것은 정교조항(政敎條項:concordat)의 조인을 통한 가톨릭교회의 지지였다.

무솔리니 자신은 “내가 말하는 것은 항상 옳다”라고 호언하였고, 국민들은 또한 무솔리니를 로마제국의 카이사르로 여겼다. 이 때부터 파시즘이 부르주아적 정치운동에서 탈피하여 본격적인 대중운동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1940년 6월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잇따른 군사적 패배와 전쟁으로 긴장은 결국 국내에 공황을 야기시켰으며, 히틀러에 대한 맹종(盲從) 등으로 국민적 불만은 파시즘체제를 붕괴시켰다. 1943년 무솔리니는 파시즘 대평의회에서 해임되어 왕당파에 의해 체포되고 파시스트당은 해산되었다.


네오파시즘 [neo-fascism]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나타난 유사(類似) 파시스트의 정치운동 또는 사상.

독일의 경우 ‘네오나치즘’이라고 한다. 독일 •이탈리아에서 볼 수 있는데, 양국이 모두 파시즘을 표면에 드러내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표면에 나타내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파시스트적인 경향이 짙은 우익정당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의 특징은 ① 배타적 민족주의의 경향을 띠며, ② 국권의 강화를 주장하고, ③ 옛 영토의 회복을 바라며, ④ 옛 파시스트 또는 나치스 당원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옛 파시스트 당원을 중심으로 1946년 창설된 ‘이탈리아사회운동(MSI)’이 국민의 지지를 얻었고,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에는 국회에서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주요 정당으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1990년대 네오파시즘은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더불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1994년 네오파시스트정당인 ‘민족연합’이 언론재벌 S.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새 내각에 5명(총 내각의 20% 정도)이나 참여하였고, 네오파시스트정당인 ‘이탈리아사회운동’의 M.트레마글리아는 외교위원회 위원장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서유럽 국가들의 강한 반발을 초래하였으며, 특히 유럽 의회 내 사회주의 의원들은 이탈리아와의 협력을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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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주의

국수주의 [國粹主義, ultranationalism]

편협하고 극단적인 민족주의. 극단적인 국가주의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며, 타민족 •타국가에 대하여 배타적 •초월적 성격을 지닌다. 역사적인 실례로 일본의 메이지[明治] 이후의 국수보존사상(國粹保存思想),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을 들 수 있다.

국수주의의 주장에 따르면, 종족집단은 역사적 형성과 함께 생겨난 종족(민족)문화가 외래의 이질문화에 위협받을 때, 종족문화는 스스로 ‘문화방위’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질문화의 침입을 방어하는 ‘토착주의(土着主義:nativism)’라고 하는 운동이 일어난다고 하며, 이 운동은 단순한 정신운동으로 그치지 않고 전통적 사회의 혁신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 행동은 근본적으로 자국민의 우수성을 편협한 배외사상으로써 고집하였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국가주의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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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절

노동절 [勞動節, Labor Day]

근로자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한 휴일. 메이데이(May Day) 또는 워커스데이(Workers' Day)라고도 한다. 근로자의 노고를 위로하고 근무의욕을 높이기 위해 제정된 휴일로서, 매년 5월 1일이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9월 첫째 월요일, 유럽•중국•러시아 등에서는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8•15광복 후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했으나,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1963년 4월 17일 공포, 법률 제1326호)에 따라서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창설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 대신 근로자의 날로 정하여 기념했다. 그러나 1994년부터 다시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그 유래는 미국의 노동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성장한 독점기업은 국가권력과 결탁하여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익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미국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노동운동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869년 펜실바니아 주 필라델피아에서 전국 노동조합 연합단체인 노동기사단이 결성되고, 1886년 미국 노동총연맹이 탄생하여 노동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1884년 제 4회 대회에서 1886년 5월 1일부터 1일 8시간 노동을 법률로 정하게 하도록 노력한다고 결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미국 노동자들은 1886년 5월 1일 하루 8시간 노동을 위해 총파업에 돌입했다.

드디어 1886년 5월 1일, 시카고를 중심으로 하여 미국의 각 도시에서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파업 시위가 일제히 일어났다. 이 파업에서 경찰의 발포로 어린 소녀를 포함한 노동자 6명이 사망했다. 다음날 이에 격분한 노동자 30만 명이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해 헤이마켓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하지만 시위중 갑자기 폭탄이 터졌고, 이로 인해 경찰과 시위 군중이 심하게 충돌하여 쌍방 간에 사상자가 생기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집회를 주도한 노동운동가 8명이 폭동죄로 체포되어 재판에서 5명은 사형, 3명은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을 헤이마켓사건이라고 한다. 그러나 7년후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자본가들이 이 사건을 조작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국민을 경악케 했다.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1889년 7월 파리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설립대회에서는 미국 노동자의 8시간 노동을 위한 상황을 보고받고, 1890년 5월 1일을 '노동자 단결의 날'로 정하여 8시간 노동쟁취를 위해 세계적인 시위를 결의했다. 이렇게 메이데이는 시작되었다. 이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과시하는 국제적 기념일로 정하여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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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데이의 유래

1) 미국 시카코 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 쟁취 투쟁

1886년 미국

놀기만 하는 자본가들이 다이아몬드로 이빨을 해 넣고,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를 말아 피울 때, 노동자들은 하루 12-16시간 장시간의 노동에 일주일에 7-8달러의 임금으로 월 10-15달러하는 허름한 판잣집의 방세내기도 어려운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5월 1일 미국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을 위해 총파업에 돌입했다. 공장의 기계소리, 망치소리가 멈추고, 공장굴뚝에서 솟아오르던 연기도 보이지 않고 상가도 문을 닫고 운전수도 따라서 쉬었다.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으면 세계가 멈춘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 날이었다. 노동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힘에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그러나 경찰은 파업 농성중인 어린 소녀를 포함한 6명의 노동자를 발포 살해하였다. 그 다음날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30만의 노동자 시민이 참가한 헤이마켓 광장 평화 집회에서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폭탄이 터지고 경찰들이 미친듯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 이후 폭동죄로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억울하게 폭동죄를 뒤집어 쓴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은 장기형 또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이 바로 세계 노동운동사에 뚜렷이 자취를 남긴 헤이마키트 사건이다.

마지막 재판에서 노동운동 지도자 파슨즈는 이렇게 최후진술했다.

"그렇다. 나는 지금은 비록 임금을 받아먹고 사는 노예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 노예 같은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자신이 노예의 주인이 되어 남을 부리는 것은, 나 자신은 물론 내 이웃과 내 동료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중에 하나다. 만약에 인생의 길을 달리 잡았다면 나도 지금쯤 시카코 시내의 어느 거리에 호화로운 저택을 장만하고 가족과 더불어 사치스럽고 편안하게 살수 있었을 것이다. 노예들을 나 대신 일하도록 부려 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을 걷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여기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이것이 내 죄인 것이다.

파업하는 노동자에게 폭탄을 던지라고 말한 것이 누구인가? 독점 자본가들이 아닌가? ... 그렇다. 그들이 주모자들이다. 5월 4일 헤이마켓 광장에 폭탄을 던진 것은 바로 그들이다. 8시간 노동 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뉴욕에서 특파된 음모자들이 폭탄을 던진 것이다. 재판장, 우리는 단지 그 더럽고 악랄무도한 음모의 희생자들이오."

그로부터 7년이 지나 당시 구속 또는 사형된 노동운동가들이 모두 무죄였던 것이 증명되었다. 그들에 대한 유죄판결은 조작된 허위였던 것이다.

2) 5월 1일 미국노동자의 투쟁을 전세계 노동자의 기념일로

1889년 7월 세계 여러나라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이 모인 제2인터내셔날 창립대회에서 8시간 노동쟁취를 위해 투쟁했던 미국 노동자의 투쟁을 전세계로 확산시키기 위해 5.1을 세계 노동절로 결정하고, 1890년 5월 1일을 기해 모든 나라, 모든 도시에서 8시간 노동의 확립을 요구하는 국제적 시위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1890년 세계 노동자들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치며 각 국의 형편에 맞게 제1회 메이데이 대회를 치렀다. 그 이후 지금까지 세계 여러나라에서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과시하는 국제적 기념일로 정하여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http://mayday.nodong.net/2005/html/info_01.php#




한국 노동절의 역사

1) 1923년, 한국 최초의 노동절 행사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절 행사는 1923년 일제 식민지 시절, 당시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인 '조선 노동 총연맹'의 주도하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약 2000여명의 노동자가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실업방지" 등을 주장하며 전세계 노동자의 명절인 메이데이 기념행사를 최초로 치뤘으며, 그 이후 1945년 해방되기 전까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굽힘없는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해왔다.

2) 해방, 전평 깃발아래에서의 노동절
마침내 해방이 되었다. 1945년 결성된 '조선 노동조합 전국평의회'는 1946년 20만 노동자가 참석한 가운데 메이데이 기념식을 성대히 치뤘다. 전평의 깃발아래 노동자들의 힘찬 함성이 울려 퍼지는 서울운동장 야구장 바로 옆, 육상경기장에서는 대한노총이 주최한 약 1,000여명의 우익청년과 노동자가 참석한 초라한 기념식이 치뤄졌다.

3) 날짜도 이름도 빼앗긴 노동절

① 이승만 정권하에 대한노총이 주관하는 노동절
미군정과 대한노총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폭력적인 전국노동조합평의회(이후 전평) 파괴로 수많은 조합원이 해고되고 검거되었다. 게다가 미군정은 정치색을 띤 노조는 일체 정당한 단체로 인정하지 않겠다며 마침내 전평을 불법단체로 만들었다. 그 뒤를 이어 전평 타도 기수로 미군정의 비호를 받아 무럭무럭 자라온 대한노총은 1948년부터 58년까지 노동절 행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그 이후 대한노총 주도하에 진행되었던 노동절 대회는 한마디로 출세와 돈에 눈이 먼 대한노총 상층부가 노동자 대중의 뜻과는 관계없이 이승만과 자본가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날이 되었다.

② 대한노총 생일인 3.10을 노동절로
1957년 이승만은 "메이데이는 공산 괴뢰도당이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으니 반공하는 우리 노동자들이 경축할 수 있는 참된 명절이 제정되도록 하라"는 명령을 노총에 지시했다. 이승만이 지시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한 노총은 노총 결성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로 결정했다.

"3월 10일을 노동절로 기념하게 된 것은, 과거 5월 1일 메이데이를 경축하여 왔으나 이는 적색 공산 국가들간에 공통적으로 기념되는 날로서 오직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대한의 노동자 대표들은 폭압하고 잔인무도한 공산도당과 같은 날에 함께 즐길 수 없다는 의도하에 .... 대한의 참다운 민주 노동자들의 총결집체인 대한노총을 창립한 3월 10일을 한국의 노동절로 축하하고 기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한국노동운동사}, 한국노총 출판

무릇 모든 기념일에는 그 날짜에 치뤄져야 하는 특별한 이유와 의미가 있다. 설날이나 성탄절도 매년 그 날짜인 것과 마찬가지로 메이데이도 5.1에 치루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1886년 미국 시카코 노동자의 투쟁과 희생인 "피의 헤이마켓 사건", 즉 노동자의 이익과 권리는 권력과 자본에 맞선 단결 투쟁을 통해서만 지켜질 수 있다는, 세계 노동자들에 대한 생생한 역사의 일깨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른 날이 아닌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하는 의미인 것이다.
정권과 자본은 노동자의 머리속에서 메이데이라는 말조차 아예 지워버림으로서 이 땅의 노동자를 권력과 자본에 순종하는 일 잘하고 말 잘 듣는 기계로, 의식없는 노동자로 만들려고 5월 1일 노동절을 대한 노총의 생일인 3월 10일로 바꾼 것이다.

대한노총의 어용성으로 빼앗긴 메이데이. 이는 곧 일제시대 이후 끊임없이 투쟁해 온 선배노동자와 노동운동의 빛나는 전통과 정신을 박탈하는 것이며 이후 남한의 민주적인 노동운동에 암흑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남한 노동자들은 그 이후 메이데이를 까맣게 잊고 반노동자적인 어용노총의 생일을 자신의 것인양 알고 지내왔던 것이다.

③ 노동절이 근로자의 날로 이름마저 바뀌고!
4월의 함성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5.16 군사구테타 이후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박정권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여왕벌을 먹이기 위해 아무 생각 없이 꿀만 나르는 꿀벌처럼 일잘하는 '근로자'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껍데기만 남아있던 노동절마저 '근로자의 날'로 이름을 바꾸고 해마다 근로자의 날에는 산업역군이라는 사탕발림으로 열심히 일한 노동자를 '모범 근로자'로 뽑아 상을 주었다. 이제 더 이상 단결과 투쟁의 자랑스런 노동자가 아니라, 정부와 자본의 축제에 들러리 서주는 불명예스런 근로자가 된 것이다.
메이데이 기념일도, 단결을 의미하는 노동자란 이름도 박탈당한 남한의 노동자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밤낮없이 일만하고 사회로부터는 공돌이 공순이로 불리우는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

4) 아 ! 다시 되찾은 메이데이

① 1989년 제100회 메이데이 기념대회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 운동은 단위노조에서 지역, 업종을 넘어 전국으로 들불처럼 확산되어 '노동법 개정 및 임금인상 투쟁본부'를 결성하였다. 1989년 투쟁본부는 제100회 메이데이를 앞두고 근로자의 날을 노동자 불명예의 날로 규정하고 굴욕에 찬 지난날의 근로자 인생을 청산하고 한국전쟁 이후 단절되었던 5.1절 노동절의 전통을 회복할 것을 선언하였다.
1989년 삼엄한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연세대학교에 모인 전국의 5천여 노동자와 청년들은 전야제를 갖고 4월 30일 세계 노동절 기념대회를 개최했다.

② 전국의 노동자 매년 노동절 기념행사
1989년 대회 이후 오늘까지 민주노조 진영은 해마다 세계 노동절 기념대회를 개최하여, 노동절 정신을 계승하고 노동자의 생활과 권리를 개선하기 위한 투쟁을 힘차게 전개해 오고 있다.
이제 한국의 노동자들에게도 노동절은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의 숭고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애써온 선배 노동자들의 투쟁과 삶을 되새기는 기념의 날, 당면한 노동운동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날로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1990년에는 경찰의 원천 봉쇄에도 불구하고 서울대에서 3,000여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노동절 대회가 개최된 것을 비롯하여, 전국 15개 지역, 250여 노조에서 노동절 기념식이 열렸다. 1990년의 노동절 투쟁은 KBS 노조의 파업, 현대 중공업 골리앗 투쟁과 맞물려 5월 1일부터 4일까지 292개 사업장에서 연인원 34만명이 참여하는 5월 총파업 투쟁으로 발전해 갔다.

1991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3만여명이 참가한 대회가 개최된 것을 비롯해서 전국 14개 지역에서 10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세계 노동절 대회가 개최되었다. 1991년의 노동절 투쟁은 5월 9일 총파업과 강경대 열사, 박창수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촉발된 5-6월 대투쟁으로 발전해 갔다.

1992년에는 한양대에서 2만여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노동절 대회가 개최된 것을 비롯해서 전국의 13개 지역에서 세계 노동절 기념 대회가 개최되었다.

1993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3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하여 기념대회를 개최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까지 가두 행진을 벌인 것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5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노동절 대회가 개최되었다.

1994년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 우리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쟁취
1994년 정부는 3월 10일에서 5월 1일로 근로자의 날을 개정하였다. 정부의 이런 법개정 이전에도 전국의 노동자들은 이미 89년부터 이승만에 의해 빼앗겼던 5.1절을 우리 힘으로 되찾아 3월 10일이 아니라 5월 1일에 세계노동절 기념행사를 치루어 왔다.
정부가 노동절 기념일을 바꾼 것은 그 동안 노동절 대회를 힘차게 벌여온 우리 노동자들의 힘과 요구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이제 다시 되찾은 5월 1일 노동절은 우리의 지난 6년간의 소중한 투쟁 성과인 것이다.
물론 정부와 자본은 5.1절을 합법화하여 노동자들의 투쟁을 무마하고, 근로자의 날이라는 이름을 고수하여 메이데이 정신을 계승하려는 노동자 의식을 마비시키고 정부, 자본에 대한 투쟁 열기를 식히려고 하지만 그것은 한낱 헛수고일 뿐이다. 이미 우리 노동자들의 가슴속에는 수년간의 5.1절 투쟁을 통해서 지울 수 없는 노동절 정신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1994년에는 동국대학교에서 2만여 노동자가 모여 기념대회를 하고 대학로까지 행진을 전개하였다.

1995년은 서울대학교에서 약 2만여 노동자가 모여 기념대회를 했고 보라매공원까지 행진하여 마무리 집회를 개최하였다.

1996년 5월 1일 세계노동절 106주년을 맞아 서울, 부산, 대전, 광주, 전주, 청주 등 전국 6개 도시에서 동시에 노동절 기념대회를 열고 96년 임단투 승리와 노동법 개정, 민주노총 합법성 쟁취, 사회개혁을 위한 투쟁을 선포하였다. 서울은 보라매 공원에서 수도권 중앙대회를 마친뒤 여의도 광장까지 행진을 벌이며 선전물을 나누어 주자, 거리의 시민들은 박수와 환호로 답하며 노동절을 기렸다.

1997년 서울을 비롯한 13개 도시에서 10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97 임단투 승리, 재벌경제 타파 부정부패 척결, 사회개혁 쟁취, 교사•공무원 단결권 쟁취'를 다짐하였다. 장충공원에서 2만여명의 조합원이 서울중앙대회를 마치고, 마무리집회 장소인 종묘로 행진하려 했으나 경찰은 페퍼포그와 체류탄을 쏘아대며 참가자들을 구타하고 연행하기도 했다.

1998년 노동자 3만여명과 1만여명에 이르는 학생, 시민들은 '고용안정과 민중생존권 사수'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노동절 집회가 채 끝나기도 전에 금속노동자들이 모여있던 종로3가에 최류탄이 터지고 싸움이 시작되었다. 가슴에 분노를 담아 집회에 참석했던 노동자들은 이날 최루탄 가스에도 물러서지 않고 '정리해고•파견제 철폐, 고용유지 보장, 부당노동행위 척결, 공공부문 일방적 구조조정 중단, 실업자 생활보장, 재벌개혁, IMF재협상'을 요구하였다.

1999년 '세계노동절 109주년 총력투쟁 승리를 위한 전국노동자대회'가 5만여명의 노동자, 시민, 학생이 '구조조정•정리해고 중단'을 외치며 서울역에서 대회를 치뤘다. 대회가 끝난 후 명동성당으로 이어진 행진에서 자리가 없어 성당에 들어오지 못한 대오들이 신세계백화점, 퇴계로 등 곳곳에서 마무리집회를 가졌다.

2000년 세계노동절 110주년대회는 서울역에 2만명을 비롯해 전주, 광주, 포항, 부산, 양산, 구미, 원주, 경주 등 전국 9개 도시에서 6만여명의 조합원이 모인 가운데 '세계 노동절 110주년 기념 대정부 교섭 촉구 및 총파업 투쟁 결의 노동자대회'를 열었다.
민주노총은 대회에서 △주5일근무제 실시 △자동차산업 해외매각 중단과 협동조합 강제 통합 중단 △임금 15.2% 인상과 외환위기 동안 후퇴시킨 단체협약 원상회복 △비정규직 노동자 차별 철폐와 정규직 전환 △조세개혁과 사회보장 예산 GDP 기준 10% 확보를 촉구하고 이를 쟁취하기 위해 '5월 31일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집회에 이어 1만5천여명의 노동자, 학생 등 대회참가자들은 명동을 거쳐 종로2가까지 행진한 뒤 보신각 앞 도로를 점거하고 '대정부 교섭 촉구 결의대회'를 열었다.

2001년 세계노동절 111주년 대회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반대, 김대중 정권 퇴진'을 내걸고 4만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 대구, 부산, 광주, 전주, 제주, 원주, 포항 등 전국에서 열렸다.
민주노총은 김대중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이 마침내 대우자동차 1750명 정리해고라는 사상유래 없는 생존권말살로 이어지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저지! 김대중정권 퇴진!을 내걸고 힘차게 투쟁했다. 그 연장선에서 5.1절 투쟁은 대우자동차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을 시작으로 3월 민중대회 → 4월 14일 '경찰폭력•정리해고 김대중정권 퇴진 결의대회' → 4.21 전국동시다발 집회 → 노동절 기념행사 → 5.1절 투쟁 → 5월 31일 총력투쟁으로 이어지는 투쟁 한복판에서 5월 총력투쟁을 선포하고 결의하는 장이 됐다.
민주노총은 △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중단하고 정리해고 철폐 △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고 차별 철폐 △ 노동시간 단축 △ 공공의료 확충, 공교육 정상화 실현 △ 공무원노조, 교수노조 보장 △ 국가보안법 철폐 △ 민생파탄 개혁실종 김대중정권 퇴진 등을 주요 요구로 내세웠다.
이날 서울대회는 집회대오가 대학로에서 집회를 갖고 행진하던 중 종로에서 경찰이 막자 행진방향을 틀어 14년 만에 시청 앞 광장을 점거하는 등 높은 열기 속에 진행됐다.
한편, 111주년 노동절 대회는 5월 1-2일 이틀 동안 남북노동자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금강산에서도 치뤄졌다. 또한 대회 4월 29일에는 노동절 기념 마라톤 대회를 성황리에 치루기도 했다.

출처 - http://mayday.nodong.net/2005/html/info_01.php#




중국 노동절의 유래

中国人民庆祝劳动节的活动可追溯至1918年。是年,一些革命的知识分子在上海、苏州、杭州、汉口等地向群众散发介绍“五一”的传单。1920年5月1日,北京、上海、广州、九江、唐山等各工业城市的工人群众浩浩荡荡地走向街市、举行了声势浩大的游行、集会,这就是中国历史上的第一个五一劳动节。解放后,中央人民政府政务院于1949年12月将五月一日定为法定的劳动节,是日全国放假一天。每逢这个节日,举国欢庆,人们换上节日的盛装,兴高采烈地聚集在公园、剧院、广场,参加各种庆祝集会或文体娱乐活动,并对有突出贡献的劳动者进行表彰。

출처 : http://www.baidu.com 검색 후 발췌

중국 5.1 노동절 그리고 황금휴가, 한국은?

중국에서 가장 긴 휴일이 있다면 춘절(설)과 노동절, 국경절을 꼽을 수 있다. 춘절은 보통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게 보통인데 외지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 위주의 귀향길로 전국이 들썩인다. 반면에 노동절과 국경절은 여행을 떠나는 휴가철이라고 볼 수 있다.

춘절은 일단 추워서 여행다니기 불편한 점도 있겠지만 한국처럼 설엔 가족과 함께라는 의식이 일단 강하기 때문에 대부분 집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 노동절과 국경절은 날씨가 좋을 봄(5월 1일)과 가을(10월 1일)에 있기 때문에 여행객들이 많다. 물론 이때도 고향에 가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귀향객보다는 여행객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편이다.

중국에서 노동절이라고 하면 왠지 한국에 있을 때보다 귀에 익다. 사회주의 국가이기도 하고 노동인민을 위한 국가라는 인식이 먼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중국도 시장개방 이후 자본주의 인식의 노동방식이 만연해 있기 때문에 좀 혼란스럽긴 하다. 노동인민들의 대우도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는다.

노동절이라는 의미는 일단 퇴색된 듯 하고 1주일의 황금휴가로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절 휴가 때는 기차표도 10일 전에 구입을 해둬야 하고 돈이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모두들 어디로 놀러갈 것인지 고민한다.

그러던 차에 문득 노동절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도 궁금했고...그래서 찾아봤다.

노동절이란 근로자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한 휴일. 메이데이(May Day) 또는 워커스데이(Workers' Day)라고도 한다. 근로자의 노고를 위로하고 근무의욕을 높이기 위해 제정된 휴일로서, 매년 5월 1일이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9월 첫째 월요일, 유럽•중국•러시아 등에서는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8•15광복 후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했으나,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1963년 4월 17일 공포, 법률 제1326호)에 따라서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창설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 대신 근로자의 날로 정하여 기념했다. 그러나 1994년부터 다시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발췌)


더 자세한 내용을 보고 싶다면 '노동절' 키워드를 클릭하면 된다.

중국의 노동절은 1918년 일부 혁명 지식인들에 의해 전단지가 뿌려지고 홍보가 되면서 시작되었고 상해, 소주, 항주와 같은 공업도시 중심으로 1920년 5월 1일 정식으로 노동절 집회와 시위들이 이어졌다. 중국 역사에서는 1920년 5월 1일을 최초의 노동절 행사로 보고 있다. 이후 1949년 12월에 5월 1일을 정식 노동절로 선포하고 1일 휴가를 주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노동절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1923년 최초 노동절 행사를 갖었던 한국은 그 이후에 이승만 정권 때 대한노총에 의해 의미가 퇴색되기도 했고 근로자의 날이라고 명칭을 개명하기도 했지만 87년 민주노총에 의해 다시 노동절이란 이름을 되찾았던 한국. 지금은 노동자가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는 사회로 자리매김 한 것일까.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여전히 한국에서 노동자라면 낮은 계급을 지칭하는 말이고 근로자라는 말이 좀 더 품격(?)있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는 듯 하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자본가와 노동자의 투쟁이 있었고 이제는 어느 정도 법으로 보장도 되었지만 진정으로 노동자가 대접받는 세상은 진정 구현되었을까. 노동자의 권리는 그저 문자화 된 문서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암튼, 중국에서 노동절은 황금휴가 기간이기 때문에 많은 중국 친구들이 걱정을 해준다. 장기 휴가철인데 나는 어디 가지 않느냐, 혼자 심심하지 않겠느냐면서. 사실, 중국에서 어딜 멀리 다녀온다는 게 휴가철을 이용하면 편하긴 하지만 그건 내국인들의 문제고 내 경우엔 너무 많은 이동인구 때문에 머리 복잡해서 별 생각이 없다. 다만, 이번에 연길에 형님들도 쉬기 때문에 건너오라는 이야기를 듣고 표를 구매하긴 했다. 가서 한 며칠 있다가 와야겠다.

중국 TV에서는 노동절 특집 프로그램으로 기인열전, 요리대결 등 각종 쇼 프로그램과 영화들을 방영해 주고 있다. 장춘에서는 노동절을 맞이해 "장춘 애니메이션 만화 예술제"가 열리고 있다. 코카콜라배 China joy 코스프레 지역대회 행사를 중심으로 열리는 행사인데 애니메이션 상영은 역시 일본 애니메이션 중심으로 상영을 하고 만화 작품들이 전시된다. 입장료는 20원(약 3000원). 같이 살고 있는 중국 만화가 친구가 이 행사 심사위원이라 입장권을 줬으니 가서 구경이라도 하고 와야겠다.



오늘 날씨는 참 좋다. 여행하기 딱 좋은 날씨. 저녁 9시 30분 기차니 기차 안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연길에 도착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