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29일 토요일

추석, 기업 담합, 정치

  • 장춘에서 추석을 보내고 돌아왔다. 이미 그쪽은 한국보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날씨였지만 한국 역시 오늘부터 기온이 떨어진다. 옷깃을 여민다는 말이 튀어나올 즈음이다. 오전 11시 8분
  • 서민들 경제사정이 어렵다는 건 다 음모로 인한 결과다. MBC에서 보도한 기업들의 담합 때문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오늘 인터넷 news 어느 곳에도 소개되지 않고 있다. 늘 그렇다. 이 땅에선. 오전 11시 38분
  • 17세 여고생이 차기 총선에 출마한다. 한국에서라면 어떤 반응들을 보였을까. 괜찮은 정치인을 보기 힘든 한국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수 있겠다. 오전 11시 59분

이 글은 jumpkarma님의 미투데이 2007년 9월 28일 내용입니다.

2007년 9월 28일 금요일

예술'계'??...

수사팀의 한 관계자는 “신 씨가 변 전 실장의 도움 없이 기업체를 찾아갔다면 그 기업에서 일개 큐레이터를 쳐다보기나 했겠느냐”라고 말했다.... 대부분 유명 미술관의 관장은 재벌가의 안주인이 맡고 있고...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미술관이) 큐레이터 선발부터가 엉망인데, (기업 후원금 횡령 등) 도덕성은 기대하기도 힘들지 않겠느냐”고 비판...

인터넷 신문기사를 검색하다가 보게 된 내용들이다. 기업은 일개 큐레이터의 기획력이든 능력이든 상관없이 쳐다보지도 않는다. 결국 권력에 휘둘리거나 타협하는 정도가 되어야 겨우 쳐다볼 정도다. 일개 큐레이터는 권력을 등에 없었으니 보이는 게 없었을 테고 그런 기회를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순수미술이던 뭐든 미술, 예술 한다는 사람들은 다 아는 것 아닌가? 한 번쯤 들어봤을 미술계의 고질병. 썩어 문드러져 가도 어느 하나 개선해보려고 하지 않는 고질병. 그림으로, 재능으로, 능력으로 평가받고 담론을 형성하고 비판발전해가는 게 아니라 권력의 끈을 잡고 권력의 입을 빌어 권력의 하수인이 되거나 권력을 희롱해 등치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겠나. 큐레이터 선발이 엉망이란 건 미술관 관장들이 엉망이란 것이고 그저 그들만의 테두리 안에서 북치고 장구치며 자신의 그늘 아래서 충성하는 심복을 키우는 경우가 많다는 것 아닌가. 그건 미술'관' 뿐만이 아니라 대학은 더 엉망이란 얘기를 수 없이 들었고 미술'계' 역시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허위사실 유포 정도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다 알면서 쉬쉬하고 있는 건 모두가 지켜야 할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얽히고 섥힌 그물망에서 혹은 양심의 폭 안에서 100% 자유로운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이들이 더 우세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의식을 갖고 작품활동을 하며 예술인으로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그들과 달리 예술이 미술이 권력으로 치환되고 돈으로 환산되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결코 그 수렁을 벗어날 생각도 없거니와 오히려 보다 더 끈끈한 유대관계를 형성해서 자신의 밥그릇을 돈독히 해나갈 뿐이다. 자신의 밥그릇 지키는 건 나쁜 게 아니다.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정당한 방법을 부정하고 자신들만의 룰을 만들어 영속시키고자 하는 게 문제다. 사회는 결코 평등해질 수 없겠지만 권력과 권위가 평등을 집어 삼키고 있는 한 피해를 보는 건 늘 평범한 인민들 뿐이다.

2007년 9월 15일 토요일

한 줌의 희망도 없는 한국 언론

한국은 거의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신문, 방송, 잡지 등 수많은 매체에선 유명했거나 유명하거나 앞으로 유명해지려고 하는 사람들의 속살이 보여지고 있으며 그 속살들을 보며 잠시동안 남자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확연히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다. '몸을 팔아서 뜨고 싶냐'는 비아냥이 존재해도 유명인 되고 싶은 많은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의건 고의가 아니건 간에 거의 모든 매체에 자신의 '성(性)'을 노출시킨다. 그들을 비아냥 거리는 사람들도 역시 꾸준히, 열광적으로 그들을 환영하고 소비해주기 때문에 그 방면에서만큼은 어떠한 도덕적 해이도 쉽게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처음엔 남성이 소비의 주체였다가 지금은 여성 역시 그 소비에 동참하는 중이다.

하지만 아무리 '성'이 '상품'이 되고 어떤 이에겐 '무기'가 되는 세상이지만 문화일보가 신정아씨의 누드 사진을 만천하에 공개한 것은 해도 너무했다. 물론 문화일보가 말한 '국민이 알 권리'라는 주장이나 '가릴 것 다 가리고' 사진을 공개했다는 이야기, 또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충분히 고민했고 노력했다'는 자기들 멋대로의 주장은 사실 그들만의 문제 이상의 문제가 있다. 즉, 적정 수위를 건드려가며 조금씩 시도해오던 행위들-운동경기에서 심판이 보는 앞에서 정도껏 파울을 해본다. 심판이 휘슬을 불지 않으면 그 정도는 파울로 인정하지 않는 셈이 되기 때문에 그 '정도껏'의 파울은 마음대로 범할 수 있다- 차츰 수위를 높여 시도하다가 이번 사건이 터지게 된 것이다. 그 전에 꽤 많은 언론의 기능이나 '성'과 관련한 노출수위들이 오가긴 했지만 사실 유야무야 넘어가기 일쑤였고 오히려 그로 인해 부가이득을 취한 부류들이 꽤 많았었다. 이걸 문화일보가 보기엔 주목받기 가장 쉬운, 그러면서도 파격적인 행위 정도로 인식했나 보다. 연예오락프로그램이나 X데이서울과 같은 잡지들이 해오던 걸 아무런 주저함없이 질러버렸으니 말이다.

물론 이미 제 기능을 완벽하게 잃어버린 언론이 블로거나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기사로 '카더라'통신을 내보내거나 이제는 이도저도 안되니까 충격적인 방법들을 찾아다니고 제멋대로의 언론으로 자리한지가 꽤 되기에 이젠 언론이 뭘한다 해도 믿기가 어려운 판국이 되었다. 어쨌거나 문화일보는 이번에 제대로 한 건 올린 셈이 됐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언론의 정의'를 껍데기 삼아 어떻게든 주목받고 껀수를 올려 배를 불리려고 하는 양아치적인 생각 밖엔 없는 듯 하다. 한 개인의 알몸을-가릴 것 다 가렸다고 해도 알몸은 알몸이다-한국 국민 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두 취재원들, 그리고 전세계 네티즌들이 접할 수 있도록 공개한 걸 보면 정말 기도 안 찬다. 그러면서 언론인것 처럼 생색내고 폼 잡고 있으니 어찌 역겹지 아니할까. 문화일보 때문에 한국 언론은 동시에 사망을 했고 한국 국민들도 쪽팔리게 되었다. 저런 상황이 벌어지도록 꾸준히 언론에게 휘둘려 온 게 드러나 버린 셈이 되었으니.

문화일보가 말한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해 반문하고 싶다. 난 '왜 전두환이 여전히 국가와 모종의 세력의 비호를 받고 있는지' 알고 싶고, '언론사 사주들의 머리 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알고 싶고, '국회의원들이 어떤 비리를 퍼질러놓고도 잘 살고 있는지' 알고 싶다. '사회의 소외계층이 더 이상 소외받지 않을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싶고 '한국에서 집 한 채 사지 못하는 이유와 부동산을 쥐락펴락 조장하는 이들의 행태가 어떤지' 알고 싶다. 난 그런 게 알고 싶다. 한 여성의 알몸 사진이 궁금해서 밤 잠 못자고 설치는 게 아니라 정말 알고 싶은 걸 언론들이 까발려주지 않아 답답해서 잠을 못 잔다.

문화일보 뿐이겠나. 이 기회에 덩달아 문화일보를 까대는 언론 중에 제대로 된 언론이 있을까. 그냥, 언론 간판은 내리고 기업 간판을 내건 후에 본격적으로 장사나 해보시라. 어차피 돈 벌어 자기 배 불리자고 신문사 차린 거 아닌? '말'은 있는데 '논'이 없고 '글'은 있는데 '정신'이 없으니 그들에게 '언론'이란 이름은 당치도 않다.

임대와 절대 섞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임대와 절대 섞이고 싶지 않습니다.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학구열이 떨어진다구요.
아마 제 아이가 그쪽으로 가게 되면 임대아파트 아이들이 위화감을 느낄게 틀림없어요."

이게 한국의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들이다. 젠장맞을.
부(富)는 부(富)를 낳고 가난은 가난을 낳는다. 절대 바뀌는 법이 없다.
그 부는 다시 권력을 낳고 권력은 상하를 가르고 계급을 만든다.
그런 사람들이 자녀를 낳고 아주 괴물딱스러운 마음가짐과 흉물딱스러운 뇌구조로
아이들을 키워내면서 이 나라를 원망하고 이 나라를 증오해 외국으로 외국으로 나간다.

다시 말하면 젠장맞을 인간들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천한 것들과 섞여서 품위가 손상되기 싫다는 소리고
천한 것들은 공부도 못하고 아주 바보, 병신이라는 소리며
내 귀한 왕자, 공주가 그쪽으로 가면 그 애들은 모두 찌그러져 있어야만 한다는 소리다.

젠장, 이런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네들의 아이들은 "난 17평에서 사는데 넌 14평에서 살잖아"라는 말을 주고 받으면서
17평 아이는 14평 아이를 무시한다. 그럴 수 밖에... 보고 배운 게 그것 밖에 없는데.

그런 사고 방식이 아주아주아주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나라에서 살다보니
없는 사람들끼리도 계급을 나눠서 신분상승을 꾀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고
정말 있는 사람들끼리는 계급을 내놓지 않기 위해 더 높이 성을 쌓는다.
그래서 없어도 있는 척, 있으면 많은 척, 많으면 더더더 많은 척을 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엔 최대한 경멸을 담고
위를 올려다보는 시선엔 질투와 부러움, (가상의) 동질감을 담고나면
자신은 절대로 임대와는 섞일 수 없는 귀하디 귀한 신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새벽 1시, 뉴스를 보다가 하도 '기'가 차서 '어이'가 상실된 느낌이다.

2007년 9월 12일 수요일

CCL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reative Commons License)

저작자들이 자신들의 저작물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자유이용을 허락하면서 붙이기를 원하는 최소한도의 조건을 조사해보니 저작자의 표시, 영리적인 사용의 금지, 저작물의 수정금지, 수정된 저작물도 함께 나누기 등이 제시되었다.

그 후 법률가들의 검토를 거쳐 원저작자표시(attribution), 비영리(noncommercial), 변경금지(nonderivation), 동일조건변경허락(sharealike)의 조건들로 개념화되었고 이를 조합한 6종류의 이용허락계약서가 만들어졌다. 저작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이용허락계약서를 선택한 후 이를 저작물에 적용하고 이용자들은 적용된 이용허락계약서를 보고 부여된 이용조건을 확인한 후 저작물을 자유롭게 이용하게 된다.

이것이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즉 CCL이다. 저작권법에 의한 저작물의 이용허락이 기본적으로 저작자에게 배타적인 모든 권리를 부여하되 특정한 경우에 한해서 이용을 허락하는 방식인 반면, CCL은 기본적으로 저작물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용을 허용하되 저작자의 의사에 따라 일정 범위의 제한을 가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즉 ‘all right reserved"가 아닌 ‘some rights reserved"이다. CCL에서의 commons는 公有가 아닌 共有의 개념이다. 여전히 배타적인 권리를 갖고 있지만 그에 대한 독점적인 이용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CCL의 목적은 자유로운 창작과 리믹스를 위한 소스를 서로 마련해줌으로서 진정한 문화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데에 있다. 따라서 CCL은 단순한 법적 라이선스의 제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open culture를 위한 문화운동이다.

물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저작물과 그렇지 않은 저작물에 대한 확실한 구분을 가능하게 하여 올바른 정보 공유의 이해와 함께 저작권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갖게 하는 것도 목표로 한다.

자세한 내용은 www.creativecommons.or.kr을 참고하기 바란다. 진정한 정보공유의 가능성을 살리면서 그 부작용을 최대한 억제하려는 자발적 움직임은 이미 다양한 사례를 낳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있어 창의적인 저작권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발상의 전환


필요한 것은 어떤 활용이 저작자에게 유리한 것인지, 저작자의 의사가 무엇인지에 따라 저작물이 구분되고 이를 다르게 취급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이러한 구분은 저작자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함은 물론이다. 결국 저작자가 자신의 의사를 나타낼 수 있는 좀 더 편리하고 확실한 수단이 법이 제공하여야 할 시스템이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자신의 저작물에 대한 권리를 완전히 보호받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이를 명시적으로 밝힐 수 있고 남들도 쉽게 알 수 있는 공시 수단을 제공하고 이를 택한 경우에만 all rights reserved를 인정해주는 제도이다. 예를 들어 저작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등록이 요구되는 저작권등록제이다. 하지만 베른협약의 1908년 베를린 개정규정에서 저작권의 성립에 있어 방식주의를 버리고 무방식주의를 채택한 이래 현재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 다수의 입법례가 무방식주의를 채택하고 있어 현행법상 그러한 등록의무를 법으로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국제조약과 입법의 개정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역으로 자신의 권리를 일부 행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따로 표시하는 방법이 효율적이다. 그러나 적절한 의사표시를 위해서는 수고와 비용이 소요될 수밖에 없고, 법적으로 하자 없는 의사표시를 하기 위해서 법률전문가의 조력을 받아야 하는 부담이 생긴다. 결국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행 저작권법 체계와 모순되지 않으면서 저작권자의 자유의사를 좀 더 간편하게 표시할 수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이런 시스템을 통칭하여 ‘자유 라이선스’라고 부른다. FSF(Free Soft Foundation)의 GPL(GNU General Public License)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저작권분야에서 나타난 최초의 자유 라이선스가 바로 2002년 미국에서 시작되었고 국내에서도 2005년부터 도입된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reative Commons License)이다.



기술의 발달과 법의 대응

디지털기술과 인터넷의 발달은 정보, 즉 저작물의 그러한 본질적 특성을 극대화 시켰다. P2P가 대표적인 예이다. 자발적인 공유를 통한 최고의 배포수단이면서 권리자들에게는 한없이 위험한 불법무기인 셈이다. 게다가 기술의 발달은 창작수단이나 창작력의 대중화, 정보의 보편화를 통해 새로운 창작문화를 탄생시켰다. Cut and Paste, Remix 등으로 특징되는 기존의 저작물의 인용, 변형, 융합 등에 의한 창작방식과 UCC라는 새로운 범주의 창작물들이 대거 등장한 것이다. 사실 그와 같은 창작행위나 창작물은 이전에도 늘 존재했다. 다만 한정된 범위나 사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법이 개입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디지털과 인터넷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참여인구의 증가와 상호교류 및 창작물의 전달범위를 확대시켰다. 첨단의 미디어와 네트워크의 덕을 본 셈이다. 그야말로 문화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면서도 여태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던 open culture의 부흥이 다가오는 듯 했다. 그러나 이는 개개인의 소박했던 행위들이 본격적으로 저작권법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법의 대응이었다. 저작권법에 의한 저작권의 보호는 ① 모든 저작물의 창작자에게 저작물의 이용에 관한 배타적인 모든 권리를 일률적으로 부여하고, ② 그 저작물을 다른 사람이 이용하기 위해서는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아야 하며, ③ 그러한 허락을 얻지 않고 이용하는 행위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위법이고, ④ 이에 대한 방어적 권리를 저작권자가 갖는 것으로 정리된다. 이러한 저작권법체계를 관통하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이자 오류는 모든 저작물을 같은 수준에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작물의 창작자가 누구인지, 왜 창작을 했는지, 어떻게 활용하려고 하는지 어느 것도 물어보지 않는다. 무조건 모든 권리의 유보(all rights reserved)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실제 저작물들은 결코 똑같은 처지에 있지 않다. 즉 저작자들이 자신의 저작물에 두고 있는 의미가 서로 다른 것이다. 어떤 이는 자신이 저자임을 밝혀주기만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읽고 복사해 가기를 원할 것이고 그러다가 잡지에 실리기라도 하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다. 실력은 출중하되 아직 명성이나 인지도를 얻지 못한 어는 사진작가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고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도록 하고 싶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의 사진으로 돈을 버는 것은 막고 싶어 한다. 또 어떤 프로 뮤지션은 자신의 앨범을 발표하기 전에 대중들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하여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곡을 들어보길 원한다. 단 이를 변형하거나 상업적 목적으로 이용하지 않는 조건이다. 더 나아가 정보 공유에 의한 인류문화의 발전에 큰 뜻을 둔 사람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저작물을 모든 사람들과 나누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저작권법은 이처럼 다양한 저작자들의 의사를 수용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한 가지 룰을 모든 경우에 적용하려는 one-size-fits-all 식의 접근법을 고수하고 있다.




출처: http://blog.naver.com/hz4?Redirect=Log&logNo=20039542416

창작물과 공유(共有)

CCL(Creative Commons License)를 이야기하면서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게 '수정'이라는 부분일 것이다. 자유로운 배포, 저작자의 표기, 비영리적 목적 등을 통해 '공유(共有)'의 개념을 확산시켰던 게 CCL임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한 '수정'과 '배포'를 통해 '영리'를 획득하는 개인이나 단체들이 생겨나고 있으니 이는 라이센스 개념을 오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창작 영상물(영화, 애니메이션, 촬영물 등)을 제작한 후 마땅히 보여줄 공간을 마련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UCC나 블로그, 기타 게시판 등을 통해 상영의 기회를 얻는 듯 했으나 이 또한 창작 노동에 대한 댓가를 바라기에는 시스템과 제도가 턱없이 부족할 뿐더러 댓가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창작물을 '퍼 감'과 동시에 '왜곡'시키며 그를 통해 창작자가 아닌 '퍼간 이'들이 주목받고 이익을 취하게 되는 현실은 분명 정상적이지 않다.

듣자하니 모 인터넷 애니메이션 상영제에서 CCL이나 Copyleft 개념을 도입했던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문제는 이러한 개념이 주최측이나 컨텐츠를 제공한 창작자 모두 정확한 알지 못하거나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 남용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라이센스는 창작자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야 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창작자가 모든 개념들을 다 알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창작자들의 컨텐츠를 가지고 모종의 '행사'를 주최하게 될 때는 주최측이 창작자보다 법률적으로나 시스템적으로 더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하고 창작자들에게 사용개념에 대해 충분히 설명해 주어야 한다. 사실, 창작자건 사용자건 간에 법률적인 용어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면서도 불법을 자행하는 경우보다 모르기 때문에 불법을 자행하는 경우들이 빈번하게 생기고 있지 않나 싶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창작물이 어떻게 사용될지 몰랐던 이들이 책임을 면할 수는 없지만 역시 시스템을 주도하고 있는 쪽에서 보다 정확한 개념을 홍보하며 확산시켜가야 하지 않나 싶다.

창작물에 대한 공유의 개념, 혹은 창작물에 대한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자리가 잡을 때, 비로소 여러 창작물들이 노동의 댓가를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고 창작자 역시 창작자로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는 한 창작자가 땀흘려 만들어 놓은 영상물들은 어느 순간 '공짜'나 다른 이익을 위해 마련된 '공짜'의 개념으로만 취급될테고 그건 곧 한국에서 창작을 하는 노동자들은 배 곯지 않기 위해 창작을 하지 않는 상황까지 이어질 것이다.

물론 영상물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창작물이 대접을 받고 댓가를 지불받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엔 다른 여지가 없다.

2007년 9월 7일 금요일

잘난 사람들.

  • 박은조 목사할 말은 하는 사람인 것 같지만 생각을 좀 하고 말을 했으면 좋겠다. 이번 기회를 어떻게든 활용해보려고 하는 욕심이 보이는 듯 한데 말 바꾸는 것도 그렇고 일관성도 없는 신앙은 같은 신앙을 하고 있는 이들을 욕보이는 짓이다. 오전 11시 57분
  • 인터넷 세상에 자기'만'이 잘났다는 사람들로 넘쳐댄다. 눈살이 찌뿌려진다. 자기'만'이 정답이고 해답이다. 도대체 왜들 그러는 거냐? 오후 12시 41분
  • 뱉어내는 게 다 말이 되는 건 아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치는 건 자유지만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글과 말은 그 자체로 큰 해악이 될 수 있다. 오후 6시 30분

이 글은 jumpkarma님의 미투데이 2007년 9월 6일 내용입니다.

2007년 9월 6일 목요일

간디의 예수사랑

  •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 간디 오후 12시 42분
  • 한국 애니메이션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다가 답답해지고 말았다. 결국 그 문제를 야기하는 이들에겐 중지(中指)를 곧추 세우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대로 된 작업을 해야 한다고 중지(衆智)를 모았다. 오후 5시 28분
  • 어떤 사람들은 모두 제 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그러면서도 그게 타인에게 어떤 어감으로 들리게 될지, 상처가 되지는 않을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이다. 오후 7시 7분

이 글은 jumpkarma님의 미투데이 2007년 9월 5일 내용입니다.

2007년 9월 5일 수요일

가을, 그리고 Musical Moment No.3 in F minor

불쑥 찾아온 가을에 Franz Peter Schubert의 Musical Moment No.3 in F minor를 듣다. 클래식 애호가는 아니지만 피아노 선율에 가을이 묻어오는 듯 해 귀를 기울여 본다. 귀를 통해 들어온 가을은, 그리고 Schubert의 선율은 마음에 착상되어 깊은 곳까지 시리게 한다.

 


2007년 9월 4일 화요일

애니메이션은 공산품

적어도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은 문화예술로 구분되지 않고 공산품으로 분류되는 게 옳다. 문화예술이라는 마인드가 없는 OEM은 그저 물건을 찍어내는 OEM일 뿐이다. 동급 매체인 영화에서는 도제시스템은 있되 OEM은 없지만 애니메이션은 도제시스템 역시 OEM 시스템과 같을 뿐이고 뜻있고 재능(능력)있는 이들은 절대 공산품을 생산하는 시스템에서 수장 노릇을 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쫓거나 돈을 위해 산다는 건 결코 비루하지 않다. 하지만 아주 단순하게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애니메이션(마인드)을 OEM과 엿 바꿔 먹는 행위나 그걸로 자신의 배를 불리고 물을 흐려놓은 사람들은 아무리 겉모습이 화려하고 대단하게 보일지라도 스스로 그 악취를 맡지 못할 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고약한 악취를 맡고 현기증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에게 악취를 풍기는 게 미안했던지 물 건너 많이들 가는 것 같더라만.

어쩌면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현존하는 한국 애니메이션 중에서 가장 애니메이션다운 애니메이션은 <홍길동>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홍길동> 안에는 세상을 향한 외침이 있거나 호부호형을 하지 못한 서자의 설움이 있고 부패한 이들을 혼내주는 서민의 영웅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홍길동을 만든 신동헌 감독은 장사치들의 농간에 애니메이션을 접게 되고 신동헌 감독과 함께 진로소주CF를 만들었다던 넬슨 신은 도미 후 미국인이 되어 한국에 OEM을 전수해주며 하청 브로커로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다 한다. 이 두 사람의 행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 애니메이션은 <홍길동> 이후로 OEM만 남은 상태가 되어 꾸준히 엄청난 양의 공산품 애니메이션을 찍어내고 있는 것이다.(끔찍하지만 제대로 된 오리지널 한국 애니메이션 <홍길동>을 1995년에 <돌아온 홍길동>으로 만들면서 저패니메이션 OEM 수준정도로 격하시킨 경우도 있었다.) 세계의 모든 공산품 중 90% 정도가 메이드 인 차이나라면 그 중 5%정도는 메이드 인 코리아가 찍힌 애니메이션 공산품일 것이다.

물론 그 후로 젊은 창작자들에 의해 창작 애니메이션에 불이 당겨지는가 싶었는데 작금의 현실은 또 다시 OEM만 해도 괜찮은 분위기가 되어버린 것 같다. 9시 뉴스에서도 한국의 애니메이션 OEM에 대한 칭찬이 쏟아지고 OEM을 진두지휘했던 사람도 애니메이션 시장을 개척한 위인으로 소개되니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창작을 한다는 이들 역시 자신의 입신공명만 이루면 그걸로 끝인 한국 애니메이션. 비평할 가치가 있는 애니메이션도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나마 비평하려해도 애니메이션 시장축소를 두려워하며 절반의 실패보다는 절반의 성공만을 봐야하는...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도 없는 저잣거리에서 떨이로, 도매급으로 인식되고 있는 한국 애니메이션. 공산품이라도 제품의 때깔이 좋거나 약간의 성능만 좋다면 사서 써보기라도 하련만.

사람도 있고 테크닉도 있고 산업도 있다. 그런데 애니메이션 산업을 위한 시스템은 해가 바뀌어도 줄지 않고 있고 그 시스템을 위해 막대한 세금 들이대지만 결국 제대로 이루어지는 산업은 없었으니 애니메이션 산업이 아니라 애니메이션 주식 시장이었단 말인가? 실체는 보이지 않고 숫자로만 거래가 되는...

해가 갈수록 오리무중인, 답이 보이지 않는 한!국! 애니메이션.

사실, "적어도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은 문화예술로 구분되지 않고 공산품으로 분류되는 게 옳다"라는 문장만 쓰고 닫으려고 그랬는데, 두서도 없이 글을 쓰게 되서 쪽.팔.린.다. 요즘은 뭘해도 이렇게 정리가 안되냐...-_-;

잡담-드라마, 영화의 흥행?

문득 드라마나 영화 중에 흥행하는 것은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을까 라는 다소 범위가 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머리를 스치는 '가설' 하나가 머문다. 분석할 능력도 안되고 자료를 찾아볼 시간도 안되기 때문에 그냥 가설에서 시작해 가설로 마무리 하는, 잡담 정도로 적어본다.

사실, 써머즈의 <음모론적 시간에서 본 드라마 24>라는 포스팅을 보다가 생각한 건데 드라마나 영화가 흥행하는 배경에는 '삶에 아주 익숙한 것'들이 등장하지 않나 싶다. 예를 들어 남자는 마초로 단장하고 가장 남성적인 걸 드러내거나 여자는 역시 순종적이거나 주변인으로 그려질 때, 정치인들 나쁘거나 바보처럼 그려질 때, 테러리스트는 늘 아랍계일 때(이 외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 기타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 등등... 이런 이야기가 끼지 않으면 드라마, 영화는 대중적으로 크게 흥행하지 못한다. 물론 그것'만' 있을 때 역시 흥행하지 못하겠지. 다만, 그런 부분들 즉 익숙한 코드가 재생산되지 않으면 흥행하는 건 크게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새롭게 성격을 부여해도 원래 캐릭터가 가진 범주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법이다.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드라마, 영화조차도 극이 진행되면서 차츰 본색을 드러내고 결말은 여전히 제자리를 답습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영화에 사상을 담고 철학을 담는 일 따위는 돈과는 크게 상관이 없어보인다. 그래서 좋은 드라마, 영화라고 하는 건 아주 익숙한 것들 위에서 새로운 것을 영리하게 올려놓거나 아주 익숙한 것을 새롭게 해석해 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익숙함'과 '새로움'을 분리하거나 재조합하는 방법이 알고 싶다.

혼자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본 것에 지나지 않지만 정말 흥행하는 드라마나 영화의 속내가 궁금하다.

2007년 9월 3일 월요일

"심슨 더 무비" 그리고 할 말 없는 한국 애니메이션

우석훈 박사 블로그에 갔다가 혼자 두고 읽기 아까운-특히 애니메이션 종사자들에게는 더욱 더- 글을 접하게 되었다. 특히 아래 부분에 한국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세 편에 대한 짧은 소회나 애니메이션 만들기에 대해 반성하라고 지적하는 글이 있는데 100% 동감한다. 애니메이션이 자신의 생각과 삶의 자세를 반영하는 문화예술이라고 한다면 한국의 수 많은 애니메이션 중에는 딱히 가슴에 묻어두고 볼 만한 작품이 없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운동'을 하는 도구로서 뿐만이 아닌 '삶'을 담아내고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있어 그 어떤 매체보다도 자유로워야 할 애니메이션이 유독 한국에서만은 사회의 향기로운 냄새나  똥 냄새도 풍겨내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음이 정말 안타깝다. 그건 결국 만드는 사람의 철학, 사상이 부재하다고 밖엔 생각할 수 없는데 그럼에도 아티스트, 작가라는 꼬리표가 달리는 걸 보면 참..;;;

그럼, 나는 그런 작업들 해왔는가?라고 반문한다면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은 없지만 최소한 그렇게 타락?하지 않으려고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는 민망한 자기고백으로 반성하는 것으로 대답할 수 밖에.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한다면 믿는 사람이 있을까?.... 있겠지...?

한국 애니메이션이 가지고 있는 답답함을 풀어내기 위해 우석훈 박사의 글로 화두를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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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가을이 소리도 없이 성큼 코 앞에 섰다. 한 여름 무더위에 흐느적 녹아내리던 마음이 주춤하며 긴장하는 듯 하다. 삶이 보다 풍요로워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전에 내 삶이 좀 더 뜨거워지고 세 치 앞 정도는 내다볼 수 있었으면 했다. 모든 감성이 소름처럼 일어서지만 마음은 한 없이 깊어지는 그런 날들이 많아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가을을 향해 악수를 청했다. 사뭇 비장하게. 그리고 가슴은 열어 두었다. 한동안 불어가지 못한 바람이 구석구석 휘감고 가길 바라면서.

왜 같이 살까? - 스캔들

가끔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짤막하게 보게 되는 tvN의 스캔들이란 프로그램이 있다. 처음 봤을 때는 한국에서도 저렇게 리얼한 방송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나 보다 했는데 알고보니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든 재연 프로그램이더라. 재연배우들 연기에 물이 올랐다.-_-;

대부분이 남자건 여자건 불륜을 저지르게 되어 가정파탄이 나는 에피소드로 꾸며져 있는데 오늘도 역시 한 가정이 파탄나는 이야기가 방송되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쌍이 이혼을 한다니 이 프로그램은 소재 고갈로 인해 프로그램이 중단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장수할 프로그램일지도.-_-;

그건 그렇고 사실을 기반해서 이야기를 짜내는 것이니 현실에서도 저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텐데 문득 저런 상황까지 다다른 부부에게 도대체 어떤 미련이 남아서 절대로 이혼을 못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것일까 싶다. 아이를 위해서? 사회의 눈초리가 따가워서? 만약 서로 불륜을 저지르고도 헤어지지 않고 살아간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왜 같이 살까. 함께 산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고 함께 삶을 공유한다는 건 어떤 노력을 해야 가능해지는 것일까. 자신은 로맨스고 남은 불륜이라는 생각 때문에 자기 합리화가 되어서 살 수 있는 것일까. 무촌인 사람 둘이 만나 하나의 소공동체를 이루고 평생을 기약하며 살아간다는 결혼생활. 사실 그만큼 드라마틱한 일이 어디있을까 마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말이 안되지만 말이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부모님 세대에는 살아온 인생이 억울해서, 자식들을 위해서 이혼도 못하고 꾹꾹 참아내며 살아왔다고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고3을 둔 어머니는 참고 또 참다가 자녀가 대학입학을 함과 동시에 이혼을 하는 등 자녀에 대한 눈치도 최소한의 경우까지만을 염두에 두고 자신들의 뜻대로 갈라서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 그래, 어차피 몸도 마음도 다 떠난 사람과 같이 사는 게 진정 산다고 할 수 있겠나. 그런 상황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도 하고 배려도 하고 살아야겠지만 최후의 수단은 참고 견디며 삶을 소진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분리수속을 밟아내는 것이다. 그게 더 현명한 일일 것이다. 외국의 동화책 중에는 부모의 이혼을 돕는 어린 자녀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도 있다고 하더라. 합리적 가치관으로 보면 오히려 서로가 행복해질 수 있는 수순을 밟고 교육도 미리미리 시켜주는 게 좋겠다. 여진히 감성적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일 수도 있겠지만.

주절대다가 문득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무엇 때문에 함께 살고 무엇 때문에 헤어짐의 수속을 밟아야 하는지 인간사 세상만사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로 가득하지만 사실 그보다 더 시급한 건 '나'라는 존재다.

2007년 9월 2일 일요일

Bon Jovi - Thank you for loving me

창을 모두 열고 서늘한 초가을 바람을 안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때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가슴이 아리고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주책일지 몰라도 참 오랜만에 온 몸에 풋내나는 감성이 가득 들어찼다.

 

 

It's hard for me to say the things I want to say sometimes
때때로 너무 하고 싶은 말인데도 해주기가 힘든 말들이 있어요

 

There's no one here but you and me And that broken old street light
이 곳엔 당신과 나뿐, 방해꾼들도 없고 깨지고 오래된 가로등밖엔 없으니

 

Lock the doors We'll leave the world outside
자 문을 닫아요 저 밖의 세상은 제멋대로 돌아가게 놔두어요

 

All I've got to give to you Are these five words when I
내가 그대에게 주어야만 할 것은 그저 이 다섯 마디랍니다

 

Thank you for loving me
사랑해줘서 너무 고마워요

 

For being my eyes When I couldn't see
내가 볼 수 없을 때 나의 두 눈이 되어주어서

 

For parting my lips When I couldn't breathe
숨쉬지 못할 때는 내 입술을 떼어 주어서

 

Thank you for loving me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I never knew I had a dream Until that dream was you
내가 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어요 그 꿈이 당신이 되기 전까지는

 

When I look into your eyes The sky's a different blue
그대의 눈을 들여다 볼 때면 하늘의 푸른색마저 다르게 빛나네요

 

Cross my heart I wear no disguise
자 내 마음을 펼쳐 보여 드릴게요 그 어떤 가식도 없답니다

 

If I tried, you'd make believe That you believed my lies
설사 내가 거짓말들을 하려 했다고 해도, 당신은 아마 내 거짓말들을 믿는 체 하려고 했겠지요

 

Thank you for loving me
사랑해줘서 너무 고마워요

 

For being my eyes When I couldn't see
내가 볼 수 없을 때 나의 두 눈이 되어주어서

 

For parting my lips When I couldn't breathe
숨쉬지 못할 때는 내 입술을 떼어 주어서

 

Thank you for loving me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You pick me up when I fall down
내가 힘들어 쓰러질 때면 당신이 날 일으켜주고

 

You ring the bell before they count me out
사람들이 날 따돌리기 전에 미리 경고도 해 주었지요

 

If I was drowning you would part the sea
내가 물에 빠져 익사하고 있었다면, 그대는 바다라도 갈라주었을 거예요

 

And risk your own life to rescue me
그리고 나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렸겠지요

 

Lock the doors We'll leave the world outside
자 문을 닫아요 저 밖의 세상은 제 멋대로 돌아가게 놔두고

 

All I've got to give to you Are these five words when I
내가 그대에게 주어야만 할 것은 그저 이 다섯 마디랍니다

 

Thank you for loving me
사랑해줘서 너무 고마워요

 

For being my eyes When I couldn't see
내가 볼 수 없을 때 나의 두 눈이 되어주어서

 

For parting my lips When I couldn't breathe
숨쉬지 못할 때는 내 입술을 떼어 주어서

 

Thank you for loving me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When I couldn't fly
내가 날 수 없었을 때는

 

Oh, you gave me wings
내게 날개를 주었지요

 

You parted my lips When I couldn't breathe
숨을 쉴 수 없어 헐떡일 땐 내 두 입술을 떼어 주었구요

 

Thank you for loving me
사랑해줘서 정말로 고마워요.

2007년 9월 1일 토요일

꾸준함

  • 그림은 너무 어렵다. 잘 그리고 싶다는, 잘 그릴 수 있다는 마음과 달리 손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게으른 머리는 자꾸 펜과 종이로부터 몸을 분리하려고만 한다. 오후 3시 24분
  • 가장 힘든 건 "꾸준함"인 듯. 볼 것도 많고 즐길 것도 많은 흥미로운 세상에서 한 가지만 오롯이 끈기있게 해나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들이 나오고 있는 걸 보면 "꾸준함"은 절대적으로 내게만 부족한 개념일 뿐이다. 오후 5시 38분

이 글은 jumpkarma님의 미투데이 2007년 8월 31일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