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9일 금요일

노무현 前대통령 영결식 시청 - 몇 가지 생각의 편린(片鱗)

  • 한승수가 조사를 낭독하는 게 참 아이러니다. 조사를 읽으며 '수치'라는 걸 느끼기나 하려나. 아무리 '직책'이 '조사'를 읽게 만든다고 하지만 참 씁쓸하다.2009-05-29 11:13:20

  •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되진 않는다. 남겨진 사람들의 생각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공고한 형식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떠나지 못한다. 전체적인 것을 생각해보면 그것 역시 그 사람의 업(業) 중의 하나겠거니 싶다.2009-05-29 11:16:43

  • 영결식 내내 2MB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애도'의 마음보다는 '촛불' 걱정이 태산일 테고 틈틈이 꾸벅꾸벅 '졸거다' MB는 참 잘 존다.2009-05-29 11:19:41

  • MB이하 안상수 및 경찰청장은 '소요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을 테고 나머지 애들은 어떻게 이 '난국'을 헤쳐나갈지 방법을 고안해내느라 고민스럽겠다…..-_-;;;;;;;2009-05-29 11:21:32

  • 한명숙 전 총리가 조사를 낭독할 때 '대통령님', '영원한 대통령님'이라고 수십 번 뇌일 때 2MB는 무슨 생각을 할까 너무너무 궁금하다. 정말 궁금하다….-_-;;;;;;;;2009-05-29 11:26:36

  •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사바하…..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사바하……2009-05-29 11:33:53

  • 영결식을 보다 자꾸…자꾸…'화산님'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물을 훔친다. 뵙고 싶다…2009-05-29 11:58:50

  • 노제에서는 정태춘 노래를 듣고 싶다. 대중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더라도…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이나 '92년 장마, 종로에서', '그대, 행복한가'같은 노래를 듣고 싶다.2009-05-29 13:16:25

  • 김제동같은 연예인을 '용기있다'고 표현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참 암담하다. 개인의 정치적 자유와 사상적 자유가 공개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사회, 암담하다.2009-05-29 13:19:47

  • 과거 서슬퍼런 시절에 금지곡이었던 '아침이슬'이 조가로 불리다. 변화는 있지만 변화의 모습은 똑바로 들여다봐야 한다.2009-05-29 14:03:29

  • MBC 여자 아나운서 노제행렬이 '소란스럽다'고 말해서 참 개념없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남자 아나운서가 행렬은 그저 '노무현'을 연호하고 있을 뿐이라며 '소란스럽다'는 건 좀 맞지 않는다고 말해준다… 순발력 좋네…2009-05-29 15:12:59

  • 경찰은 방패로 두드리고 차벽을 쌓고 불심검문, 불법체포에만 '능(能)'하고 행렬의 안전한 이동과 교통정리는 전혀 젬병이다. 그러니 작은 시위가 있어도 교통에 불편을 준다고 엄살을 떨어대지…-_-;;;;2009-05-29 15:14:30

이 글은 자유인님의 2009년 5월 29일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2009년 5월 28일 목요일

진보지향 보수, 보수안주 진보

A-진보를 지향하는(했던) 보수
B-보수에 안주하는(했던) 진보
A와 B는 각각 누구일까.

진보는 왜 현실가치가 되지 못할까.
진보는 왜 이상으로서만 존재해야 할까.

나쁘게 말하면 진보의 의견 분열
좋게 말하면 진보의 열린 토론
완전히 왼쪽과 상당히 왼쪽과 조금 왼쪽들은
단 하나의 교집합되는 부분도 없나.
있다면 교집합 되는 부분부터 서로 밀어주고
섞이지 않은 부분은 서로 끌어줄 수는 없을까.

한계에 갇힌 소왕국의 가치만이 최선일 뿐
소왕국 너머의 가치는 쓸모없는 것일까.
토론은 열렸는데, 입은 열렸는데
마음은 열리지 못해 답답한 건 아닐까.

다양한 가치는 존재하지만
무엇이 보다 나은 가치인지는 알지만
자신이 원하는 가치와 이익을 위해
절대 양보 불가를 외치는 사람도 적지 않아
다양한 가치는 다양해지지 못하고
나은 가치는 더 나아지지 못하고
막힌 몸뚱아리에 갇혀 압사당하는 중이다.

숨을 딱 세 번만 골라 쉬면
조금은 정상이 될 수 있을까.
조금은 연대를 할 수 있을까.

환생경제, 목격자, 증거, alpoy, 집단은폐, 도감청

  • 한나라당의 진짜 의원들이 주연과 조연을 맡은 '환생경제'라는 연극. 이 연극의 존재를 이제야 알게 되었고 보게 되었는데 정말 가관이다. 그야말로 '정신병리학적 가치가 킹왕짱'이라 할 만 하다. 厚顔無恥(후안무치)가 따로 없다.(환생경제,한나라당,후안무치,정신병)2009-05-28 04:27:30

  • 盧투신 목격자 있었다? 이거 사실 맞아? 하긴 그 시간이면 농촌에서 그리 이른 시각도 아니고 분명 깨어있는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한 명, 두 명씩 증인들이 나오는군. 근데 기사가 사실이라면 좀 충격/심각한데…?!2009-05-28 04:31:41

  • 자살로 규정하는 것이나 타살로 규정하는 것이나 오십보 백보다. 불완전한 증거들 앞에서는… 경찰조사나 경호관의 진술이 너무나 조변석개(朝變夕改)하니 더욱 이런 논란들에 불이 붙는 거 아닌가. 경찰은 단지 '시위진압용', 검찰은 단지 '주구(走狗)/표적수사용'일 뿐인가.(논란, 경찰, 검찰)2009-05-28 04:41:03

  • 아주 간단하게 아이콘(msn이나 twitter, 그 외 기타등등)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편집도 가능하고 gif animate파일도 만들 수 있는 곳. 'alpoy' (파이어폭스 플러그인으로도 설치 가능함-설치 후 웹상의 이미지에 우측클릭 후 Create Avatar!)(alpoy, 아이콘, gif)2009-05-28 04:59:46

  • 동료 경호관들, 盧 보좌 임무실패 '집단은폐' 이것도 사실일 경우 도대체 뭘하는 경호관들이었을까. '실패'한 걸 알았으면 '부끄러운 줄 알고' 솔직히 이야기를 해야지. 무슨 철없는 초등학생도 아니고 숨기고 거짓말 할 생각부터 하나. '경호관'이라 불릴 자격이 있을까.2009-05-28 05:07:26

  • 조심스럽게 '봉화 도청설'을 제기한 분도 계시다. 100% 장담따위는 불가능하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전임 대통령의 활동반경은 주시하고 있었을 게다. 하지만 실제 도청을 했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근데 도청했다 하더라도 놀라운 사실만은 아니다. 도/감청은 보편적이라서…(도청, 감청)2009-05-28 05:26:38

이 글은 자유인님의 2009년 5월 28일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2009년 5월 27일 수요일

눈물의 변화무쌍

수 많은 사람들이 미래의 희망이라며 그를 위해 지지자로 나서고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못살겠다며 눈물을 흘리며 비난의 손가락질과 함께 욕을 해대고, 수 많은 사람들이 그가 떠난 후 부모를 잃은 자식마냥 눈물을 흘리며 대성통곡을 한다. 언론 때문이었다고 떠미는 건 비겁하다. 지켜보고 싶다. 이후에 다가오는 선거철마다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사람들의 가치관이 어떻게 변하는지. 만약 노무현 前대통령이 따뜻한 보수, 정직한 보수였다면 (한번에 유럽식 사민주의가 정착되길 바라지도 않지만) 이 사회역시 최소한 그만큼은 변화가 되어야 한다. 혹여 정화되지 않을 눈물, 기만의 눈물이라면 흘리지 않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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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좋아하는 것과 사상과 행동(정치적 포함)을 비판하는 건 다를 수 있다. 공과 사가 분별되지 않고 혼재되어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비판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는 사회, 내가 격렬하게 비판한 사람과는 술 한잔 못하고 친구도 되지 못하는 사회는 정상인가. 비난과 비판도 구별이 못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정상 비정상을 따질 수도 없겠지만 앞서 말한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한 두 가지가 공존할 수 있는 사회가 정상인 건 확실하다.

부엉이 바위에서 세영병원까지...


노무현 前대통령 서거 소식을 듣고 여러 기사를 보고 있던 중
문득 부엉이 바위에서부터 세영병원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될까 싶어 찾아봤다.
차로 약 15분이면 도착하는 거리.
언론보도에서는 약 20분 정도 소요되었다니 얼추 맞구나 싶다가
문득 부엉이 바위와 출발지점인 '1'의 지점까지는 도보로 이동해야 하고
좌회전, 우회전이 비교적 많은 걸 보면 부상당한 사람을 이송할 때
일반 승용차로는 속도를 내기 어렵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단거리와 추천거리가 동일하게 나오는 걸 보면 시골 길에서 좌/우회전을 해가며
속도를 80-90을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일까...하는 생각.

그나저나 내가 가야할 곳을 검색하지 않고
노 前대통령의 마지막 길을 이렇게 바라보고 있노라니 참 씁쓸하다.

경호관 한 사람으로 인해 놀아나는 대한민국

경호관의 진술 하나만을 가지고 보도를 했던 탓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애 마지막 작은 소망이 '담배 한 대'라고 소개되었는데
결국 경호관의 말이 거짓임이 밝혀지면서 조문 중에 '담배'를 권했던 게
집단으로 사기를 당한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많은 의혹이 생겨나고 있는 현실.
사건 당일 날 뉴스를 들으면서 엄청난 충격에
도대체 긴가민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는데
다른 건 모르겠고 사건 수습이 일사천리로 너무나 경쾌하고 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혹설을 제기하는 게 아니다.
그야말로 전 대통령이 서거하셨는데 발표/보도 못해서 죽은 귀신이라도 달라붙은 양
사건 수습과정에서 응당 증거로 수집되어야 할 많은 것들은 오히려 발표가 되지 않고
'노무현 대통령은 자살'했다는 쪽으로 굳히기를 들어가다가
경호관의 말이 거짓 진술임이 밝혀지고 말았다.
이젠 어떻게 할 것인가.
현 대통령이 죽음에 이르렀다고 할 때도
보도경쟁과 사건수습경쟁에 나서 일처리를 유야무야 할 것인가.
현 정권에 대해 분노를 표출시키자는 것도 아니고
정치적으로 이용해서 구세력들을 결집하자는 것도 아니다.
죽음의 원인을 정확하게 밝혀주는 건 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첫째, 고인을 위한 것이다.
둘째, 가족을 위한 것이다.
셋째, 고인과 인연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넷째, 고인을 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설령, 명백한 자살이었다고 하더라도
전 대통령의 죽음이라면 주변의 모든 것들을 증거로 수집해야 한다.
정확한 사건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CCTV도 공개해야 하고
컴퓨터에 남겨진 유서 뿐만이 아니라 친필 유서는 없는지 찾아봐야 하고
유서 주변의 지문은 모두 수거해서 대조해야 하고
사건 전날, 혹은 당일 모든 유무선 통신내역을 확보해야 하고
추락을 했다면 인체 더미를 이용해 비슷한 추락방법으로 실험을 해서
(하물며 '위기탈출 넘버원'에서조차 마네킨을 이용한 실험을 하는데)
두부 외상이나 손목 골절 등이 일어난 경위도 세세하게 파악을 해야 하고
사고 주변의 모든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은 수거하여 증거로 확보해야 한다.

경호관들의 문책 역시 엄중히 이루어져야 한다.
'대통령이 몸을 날렸다면 같이 투신했을 것'이라는 둥
'경호집단 및 자신의 안위가 걱정이 돼 거짓진술을 했다'는 둥의 이야기가 보도되는 게 가당한가.
'담배 있나', '사람이 지나가네'라는 말이
전 대통령 마지막 가는 길의 한 마지막 말이 되었는데
경호관의 진술 하나에 온 국민, 전 세계가 다 속아버린 꼴이 된 것 아닌가.

대통령의 모든 언행과 기록은 보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퇴임 후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은 분명히 다르겠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봉하로 내려간 후 매일매일 사진을 찍고
일정을 체크하는 등 모든 언행과 기록을 보관해오던 측근들이
당신 가는 마지막 길에 모든 기록과 증거를 확보해서 공개하지 않나.

전직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보도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인데
그에 대한 조사와 그에 대한 수습과정 역시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전직 대통령의 서거, 정치적 파장, 많은 국민들의 슬픔과 애도의 물결
현 정부에 대한 반감과 분노...
어떤 과정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불허인 현재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갖는 일이다.

'결국 견뎌내지 못하게 만든, 그런 정부가 있는 한국에는, 못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한
벗의 이야기에 많은 공감이 된다.




2009년 5월 24일 일요일

최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지나간 일, 자신의 삶과 직접 관련을 갖지 않는 역사 속의 사건에 대해 올바른 입장을 취하는 건 아주 쉬운 일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아주 진보적이라는 역사학자 한 분이 대학생 시절의 추억까지 끌어대면서 유시민 씨를 두둔하고 나서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체 게바라나 김산을 흠모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현실 속에서 체 게바라나 김산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체 게바라나 김산을 흠모한다면 그렇게 살지는 못해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 현실 속의 체 게바라나 김산을 존경할 줄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체 게바라나 김산을 흠모하는 우리는 현실 속의 체 게베라나 김산엔 관심이 없거나 그들을 비웃곤 하지요. “어리석고 비현실적이며 관념적인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광주에서 끝까지 싸웠던 사람들을 훌륭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 상황에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고뇌가 있었을까요.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늙은 어머니, 처음으로 입을 맞춘 날의 두근거림이 그대로 남은 애인, 제 목숨보다 귀한  새끼와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제시대의 독립군들처럼 죽고 나서 존경과 명예가 남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폭도요 빨갱이로 남는 것입니다. 남은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으로 인해  언제까지 어떤 고통을 겪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과연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끝까지 총을 들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게 바로 광주의 정신입니다.

광주의 정신, 민주주의의 정신(규항넷) 부분 발췌

피 끓던 젊은 시절엔 나도 목숨을 걸고 투쟁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광주에 있었다면 총들고 함께 싸울 줄 있을 것 같았다.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나의 의지와 나의 이상을 막을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가진 게 없고 미련을 둘 게 없는 시절이었다면 가능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이뤄낼 수 있는 일이 아닐 거라는 건 세월이 흐르며 보다 제대로 '역지사지'를 하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지나간 일, 내 일이 아닌 타인의 일에 대해서 입을 놀려 '말'을 꺼내고 손을 놀려 '글'을 꺼내는 건 정말 쉬운 일이다.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내지 않고서 치열하게 살다 간 사람들을 비용도 치루지 않고 빌려 쓰며 자신을 포장하는 일은 정말 쉽지만 역겨운 일이다. 현실 속에 있어서 현실을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계는 거짓과 가식으로 가득한 비현실 세계다.

최소한 양심을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하고, 최소한 겸손해질 줄 알아야 한다.

최소한 어리석고 비현실적이며 관념적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현실 속의 체 게바라와 김산을 알아보고 지지할 줄 알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반문하고 또 반문해야 한다. 사람이 되기 위해서...


[謹弔] 노무현 前대통령, 사나이 노무현

노무현 前대통령의 완전한 해탈천도를 기원합니다.

진정한 사나이
자신이 도덕적으로 청렴하다고 자신하면
차라리 말을 하지 않을지언정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절대 번복하지 않는다.
한 입 갖고 두 말하는 것을 경멸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반드시 해낸다.
친구와 가족들의 고통을 자신이 다 짊어질 지언정
절대 그들의 뒤통수를 치거나 배신을 하지 않는다.
자신이 형성한 도덕적 가치관, 삶의 가치관에 대해서
늘 고민하며 발전을 시켜가되
쉽게 말로 하지 않고 반드시 행동으로 나툰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보다 내면의 멋과 중요함을 잘 안다.
겉모습에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그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심지(心志)가 변하는 법은 없다.
자신의 뜻에 맞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비난하거나 무시하기보다 관용과 포용으로 지켜보며 함께 공존하거나
추후라도 뜻에 공감하게 되면 적극적 지지를 한다.
높은 자리보다 명예로운 자리를 원하며
재물보다 마음의 부(富)를 소중히 한다.
도시보다는 시골을, 인공적인 것보다는 자연을 좋아한다.
반려자에겐 무뚝뚝해도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고
자식들에겐 엄격해도 손님들에겐 관대하다.
사람들과의 대화에선 유머가 풍부해서 늘 웃음이 있다.
한 번 믿음을 준 사람에겐 평생 의리를 지키고 살며
어떤 일을 도모할 때는 반드시 타당한 이유가 있다.
법도와 규칙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며
혹 법도와 규칙에 어긋나는 일일 경우엔
타인에게 피해가 되는 일이 아닌 반드시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
절대 남의 것을 탐하지 않으며
절대 남에게 피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 때문에 종종 비타협적이란 얘기를 듣는다.
보수적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나와 남을 두루 살피려는 보수다.
생각한 대로 되지 않을 때는 심각하게 가슴 아파하고
반면교사하여 두 번의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때론 반려자나 자식, 친척, 측근들이
이 단순하고 의기로운 사람 몰래 일을 벌이기도 하지만
스스로가 (아주 사소한 잘못이라도) 잘못을 했다고 판단되면
바로 인정하고 그에 대한 무한책임을 진다.
사나이들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관계와 돈 흐름의 깨끗함이다.


지역을 가르자는 뜻이 아닌 태생으로서의 '경상도 사나이' 노무현 前대통령. 그의 모습은 때때로 오래 전 작고하신 선친(대구 출생)의 모습과 겹쳐지는 부분이 있었다. 선친은 그야말로 보수적인 사람이었는데 절대로 이해가 안되는 보수가 아니었다. 삶 속에서 충분히 이해가 갈 만한 보수적 자세를 견지하셨는데 정치적으로는 다른 지점에 있었다 할지라도 삶의 자세와 마음 씀씀이, 실천력 등은 나의 삶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쳤고 귀감으로 삼고 있다. 오랫동안 전라도에서 생활하셨지만 천상 경상도 사나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선친의 모습과 급작스럽게 서거하신 노무현 전대통령의 모습이 겹쳐졌던 건 위에 서술한 내용들 때문이었다.

노무현 前대통령의 정치적 공과(功過)는 역사가 가름해주겠지만 그 외에 노무현 前대통령이 가장 잘 한 것을 꼽는다면
퇴임 후 고향인 봉하마을로 돌아가 농사꾼이 된 것이라 생각한다. 역대 대통령, 혹은 알아준다는 역대 고관대작들 중에 퇴임 후 노무현 前대통령처럼 시골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지역주민들과 함께 하고 평범한 삶의 모습을 드러냈던 적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가 봉하마을에서 보여준 삶의 자세만은 (정치색을 배제하고라도)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굴곡이 있고 지지와 비판이 늘 공존하기 때문에 현재와 미래의 역사에 기대어 판단되지만 삶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반드시 '현재'에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여러가지 정치적 입장과 이해 때문에 지지도 하고 비판도 했지만 '노무현'이라는 개인이 보여 준 삶의 태도와 자세는 올곧았기에 급작스러운 그의 죽음은 애통하고 비통하며 억울할 뿐이다. 정치적인 부분에서도 그렇다. 이 따위의 나라에서 가장 하기 힘들었던 '언론과의 싸움', '청렴한 정치', '지역갈등 해소', '남북협력', '

노무현 前대통령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도록 몰아세운 '대한민국'이 끔찍하다. 그를 '자살'로 몰아세운 '대한민국'에 대해 우리는 모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미친 세상에서는 미친 자들이 정상이고 정상인 자들이 미친 자들로 취급받는 법이다. 정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과거 딴지일보와 노무현 前대통령의 인터뷰 내용([정치] 일망타진 이너뷰 제 3탄 - 노무현) 중 일부분을 옮겨와 본다.

김: 정치인 노무현의 옆엔 사람이 없다고 하는 평가가 있습니다. 노무현 옆에서는 떡고물도 없고 깨 끗한 정치를 한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또 한 편으론 정치적 리더쉽의 부재 아니냐, 혼자서 현실정치 돌아가게 할 수 있는 거 아닌데... 이건 집권 능력에 대한 의구심으로 확대할  수도 있는데..

노: (고개를 끄덕이며) 그건 이제, 표면적으로 그렇습니다. 그, 표면적으로 어떤 뭐, 드러내놓고 계보로 움직이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게 가능성이 있을 때 지지의사를 표명 할 심정적 동조자는 많다고 생각합니다. 또 실제로 그 정치 계보로써 그렇게 뭉쳐있는 것이 당내에서  이런저런 경쟁을 하는 데에는 다소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국가적 지도력을 창출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적 지도력이란 것은 많은 사람들,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어야 되고, 그리고 공정, 공정한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지, 몇몇 사람들을, 이해관계로 똘똘 뭉치게 하는 능력.. 그게 성공한 지도자다, 이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

노: 답변하기 전에, 아까 내가 좀 미흡했던 답변. 그 계보가 많다는 것이 그것이 곧바로 지도력이 아니다라고 말을 했지만, 제가 그 내놓고 계보처럼 뭉친, 이해 관계나 연고로 뭉쳐있는 사람은 없지만, 서로 존경하고 신뢰하고 힘을 합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항 상 위로, 선배를 모시고 정치를 해왔어요. 존경하는 선배를 모시고 정치를 해왔고. 그 점에 있어선  모자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요.

그 다음에 이제, 다음 꺼 말씀을 드리면, 아무튼, 요 부분에 대해선 어떻든 제가 그 게임을 하는 이상, 게임의 결과에 대해선 승복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게임을 할 땐 게임 결과에 승복해야 하고.  그 다음에 이제, 저로서는 역사성과 정통성 같은 것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정치인인데, 그럴  경우 어떻게 할 거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고민하고… 여러 가지 상황들을 가정하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뿐이지, 아직까지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긴 참 어렵다는 생각 을 하고 있습니다.

김: 근데, 궁금한 게, 왜 그렇게 조선일보는 노무현 장관님을 물고 늘어질까요? 지치지도 않고. (웃음)
노: 그거는 제가 답변을 다른 방향으로 할께요. 저, 많은 사람들이 좀 잘 지내보라고 합니다. (웃음)
김: 노장관님은 직업이 정치인인데 잘 좀 지내시지.. (웃음)

노: 저도 개인적으로 잘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 지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 그분들도,  공정하게도(웃음), 개인적 호불호와는 관계없이 그들이 옹호하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비호하고,  관철하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자기들이 양보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아무리 친한 정치인이 라고 해도. 거기에 도전하는 사람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이익은, 짧게 말해서 수구적 이익입니다.

또, 어떤 분은 이렇습니다, 그런 이익에 대해서 애착과 향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일컬어 주류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위 주류적 이익, 한국 사회에 주류적 집단이라고 스스로 자처해온 수구 기득권 세력. 멀리 올라가면 친일파의 맥이 나오고, 가까이 오면 독재정권과 항상 결탁해오고. 항상 강자와 결탁하면서 특권을  누려왔던, 부당한 이익을 누려왔던 집단이지요.

소위 한국의 주류라고 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기초가 거기 있습니다. 전쟁 나면 아들 군대 안 보내고 , 법 위에 군림해왔던 사람들입니다. (이 대목에서 목소리가 가장 높았다)

그것이 소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소수 수구 언론이 옹호하려고 하는 가치이고 이익이고, 바로 그들이 그 세력이고 그 이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양보하지 않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김대중 대 통령이 거기에 도전해서 성공했고, 겁도 없이 노무현이 초선 의원이 돼가지고 거기에 도전한 것이지 요. 

김: 달라이 라마 방한이 무산됐습니다. 연장 선상에서 질문인데,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계신 다면 어떻게 하실 건지.

노: 그건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철학이 중요하지만, 한나라의 지도자가 개인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철학대로만 행동할 수 없는 많은 제약이 있습니다.  그 제약 또한 현실적인 것이므로 그것은 때로는 그 제약을 받아들일 땐 받아들여야 되고, 때론 제약 을 깨기 위해서 노력해야 됩니다.

그런 과정에, 그 현실적 과정 속에서 달라이 라마의 방한에 대해서 선택을 내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것은 그 당시의 여러 가지 상황과 함께 판단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죠. 지도자 철학대로만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 있고, 때론 상황에 따라서는 방한을 허용하지 않는 그런 판단을 할 수도 있다.. 고  생각합니다.

김: 국가적 이익의 관점에서?

노: 그렇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론자의 입장에서 보면 보수주의자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노예제도 옹호론자들이 볼 때는 급진주의자라고 비난을 받으면서 굉장히 많이 시달렸습니다.

시달렸는데, 이 링컨이 죽고 난 뒤에, 11년 뒤, 그 목사 (보좌관쪽을 보며) 이름이 뭐지. 그 당시 흑 인 지도자, 잭슨 목사 아닌가 싶은데. (다시 고개를 김 쪽으로 돌리며) 하여튼 흑인 지도자 목사가  링컨의 조그만 초상을 만들어서 링컨의 영전에 봉헌하면서 그 얘길 합니다.

그는, 그는 정말 우리 흑인들에게 섭섭하게 했다. 왜냐면 흑인들의 요구를 너무 더디게 들어줬고, 때 로는 남부 주를 해방시킨 북부 사령관이 노예해방 조치를 했을 때 그것을 다시 취소하기까지 했다.  노예 해방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여러 가지 조치가 있었다. 그런데 대한 섭섭함을 다 얘기하면서 . 그러나 나중에, 그 사람이 죽고 난 시점에서 보니까 그가 결국엔 많은 노예를 해방시켜 놓았더라..  흑인들이 푸른 군복을 입고 군대도 가고, 행진할 수도 있었고,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렇게 이야길  하면서 링컨의 노예 해방자로서의 공을 아주 높이 기리는 그런 연설을 합니다.

그것이 정치입니다. 링컨은 노예 해방론자이지만 그는 그 시기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면서 결국 아주 합리적인 속도, 속도 조절을 한 것이거든요. 노예 해방의 속도를 아주 정교하게, 뭐라고 할까요,  아주 현명하게 디자인해냈단 말이에요. 그것이 정치입니다.


조선건국 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번도 바꿔보지 못했고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한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자손들까지 멸분지화를 당했다.
패가망신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다.

눈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면서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 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의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그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한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 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근조] 노무현의 연설 중에서...- summerz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런 고집불통의 노무현이지만, 40대의 젊은 나이에 아직도 서슬이 퍼런 전직 대통령을 향해 호통치던 성깔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들에게만큼은 한번도 성질을 부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기는커녕 너무 권위가 없어 세간의 비웃음만 당했던 대통령. 그게 인간 노무현이 추구하던 민주주의였다. 너무 앞서 갔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옳은 방향이었다...(중략)...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이 극단적인 수단을 통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해도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을 상황에서 말로는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전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이만큼 했으니 앞으로는 너희들이 해라. 하지만 너희들은 이런 나보다 더 잘 해야 된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謹弔] 인간 노무현을 보내며...- ddanzi



2009년 5월 18일 월요일

다우트(Doubt) - 수구와 보수의 대결


영화 다우트(Doubt)는 수구(Meryl Streep 분)와 보수(Philip Seymour Hoffman 분)의 대결이라 생각했다.

수구(守舊): 옛 제도나 풍습을 그대로 지키고 따름.
예) 아직도 수구 사상은 완고하게 뿌리가 박혀서 학교 직원 중에도 머리를 깎자면 모두들 질색하였다. 출처 : 이기영, 봄

보수(保守): 보전하여 지킴,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반대하고 전통적인 것을 옹호하며 유지하려 함.
예) 그 나라 사람들은 매우 보수적이어서 여자는 반소매도 입을 수가 없다.

사실 수구와 보수의 사전적 의미만 따져본다면 크게 다른 점이 보이지 않는다. 둘 다 과거의 것을 지키고 유지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수구는 보다 이기적인 면이 강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측면이 강하고 보수는 과거의 좋은 점은 보전하고 지켜가되 틀 안에서의 개혁은 받아들이고 용납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겠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보수의 기본 틀이 무너지면 종교는 종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며 보다 철학 쪽으로 기울게 된다. 종교에서 과거와 전통을 부정한다면 그건 종교의 기원, 교조를 부정하는 꼴이 되며 종교가 보다 열린 자세를 취하고 늘 변화무쌍한,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면 철학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신앙-믿음'이란 개념이 개입하면서 철학적 논의는 의미가 없어지게 되고 정도가 지나치면 광기로 흐를테지만 어떤 게 옳다 그르다를 논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모든 건 자신의 '행복'과 '안식'을 위해 취사선택을 하기 마련인데 그 자신을 '나'로 제한하느냐 보다 큰 '우리'라는 개념으로 '나'를 대치하느냐에 따라 (종교적) 보수와 수구가 나뉠 법 하다. 알로이셔스 수녀는 자신의 '의혹'에 확신을 갖게 되면서 플린 신부를 적대시하게 되었지만 본질은 자기 자신의 안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플린 신부는 수녀의 그런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 싸움 직전까지 가지만 결국 자신의 안위보다 '우리'의 평온을 위해 물러선다.

이건 작지만 아주 큰 차이다. '개인'과 '집단', '단기(短期)'와 '장기(長期)'의 차이기도 하다. 수구는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과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이익을 쫓는 반면 보수는 전체를 생각하고 장기적인 비전을 갖는다. 보수라는 게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게 가족, 사회,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생각과 행위를 하기 마련이다. 학습과 교류, 연대를 통해 보수 뿐만이 아니라 진보적 사고를 하는 것이다.

"doubt can be a bond as powerful and sustaining as certainty"

영화 시작 즈음에 플린 신부가 설교를 할 때 등장하는 문구인데 이 영화의 핵심을 담고 있달까. 알로이셔스 수녀가 마지막에 의혹에 빠졌음을 시인하고 통곡을 하는데 의혹(의심)은 확신과도 같은 견고함을 주기 때문에 의혹에 빠지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종교인의 입장에서는 '의혹'은 바로 신을 부정하고 모든 교리를 부정하는 에덴동산의 사과와 같아서 의심을 하는 순간 천국은 지옥으로 변하고 거대한 우주는 먼지로 변해 그 무엇하나 믿음을 댈 곳이 없게 된다. 의심하고 있는 자신을 제외하고.

그 의심을 거두고 물리치기 위해 올곧은 신념, 신앙을 갖기 위해 '종교'가 탄생했다. 종교의 탄생 후에 믿음의 행위가 생겨난 게 아니다. 인간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 불안함,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 모종의 행위가 시작되었는데 그 행위가 구체화되고 시스템을 갖춰가면서 종교가 만들어진 것이다. 믿음의 궁극에 서는 게 두 종류 쯤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믿음이 진리와 가까워지면 큰 틀(우주, 자연) 안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맞물려 돌아가되 무한한 자유를 얻고 영성이 밝아지고 맑아지는 반면 믿음이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욕심과 집단의 이기심으로 형성되면(우매하고 무지한 믿음) 최면에 걸린 것과 같아서 오히려 더욱 미혹해지고 타인과 나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내기 마련이다. 후자의 경우가 '종교는 아편과 같다'는 말과 일맥상통할 수 있다.

의혹이 생기는 순간(믿음이 사라지는 순간) 종교와 신앙도 사라지는 게 맞지만 믿음이 편협하게 흐르고 신앙이 수구적 형태를 띄게 될 때도 역시 종교와 신앙은 사라지거나 변질된다. 그 사이(間)라는 게 손등과 손바닥의 차이같아서 늘 참회하고 수행하지 않으면 참 종교, 참 신앙을 하기 어렵다.

다우트(Doubt)의 시대배경을 함께 생각해보면 사실 알로이셔스 수녀의 행위도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시대와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걸 한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기엔 무리가 있다. 물론 개인의 잘잘못을 이야기하고 개션해가는 과정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지만...

플린 신부와 알로이셔스 수녀의 대립이 고조될 즈음 플린 신부가 한 설교 내용은 영화의 줄거리를 압축해 놓은 부분이라 생각된다. 게다가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잘못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최근에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던 '인터넷 악플' 논란이나 과거부터 지금까지 쉽게 사용되고 있는 '좌파=빨갱이=북한'과 같은 이야기, 그 외에 수 많은 관계 속에서 쉽게 자행되는 행위들을 떠올려보면 아래의 설교 내용은 곱씹어 볼 만 하다.

한 여인이 친구와 함께 잘 알지 못하는 남자에 대해 소문(험담)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날 밤 그녀는 꿈을 꾸었다.
하늘로부터 거대한 손이 나타나 그녀를 가르켰다.
그녀는 바로 온몸 가득 죄책감으로 가득찼다.
다음 날 그녀는 고해성사를 하러 갔다.
그녀는 교구목사 O' Rourke신부를 찾았다.
그녀는 신부에게 모든 이야기를 했다.

"소문을 이야기하는 것도 죄입니까?"

그녀는 목사에게 물었다.

"나를 가르켰던 손은 전능하신 주의 것입니까?
당신께 사면을 구할 수 있습니까?
신부님, 말씀해주세요. 제가  뭔가를 잘못했습니까?"

"그래요"

O' Rourke신부는 그녀에게 대답했다.

"맞아요. 당신은 우매하고 무지하군요.
교양없는 여성이에요!
당신은 잘못된 시선으로 당신의 이웃을 봐서는 안됩니다.
당신은 그의 명성을 우롱했습니다.
당신은 마땅히 마음 속으로부터 수치를 느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여인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후 용서를 구했다.

"지금은 아직 안됩니다!"

O' Rourke신부가 말했다.

"집에 돌아가 베개를 가지고 옥상으로 가세요.
칼로 베개를 찢은 후 다시 날 찾아오세요!"

그리하여 그 여인은 집으로 돌아갔다.

침대 위 베개와 서랍 속에서 꺼낸 작은 칼을 들고서
옥상으로 간 후 베개를 찢었다.
그런 후에 단정하고 예의바르게 교구 목사에게 갔다.

"당신은 베개와 칼을 가지고 갔나요?"

목사가 물었다.

"네, 신부님"

"결과는 어땠나요?"

"깃털들 뿐이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깃털요?"

목사가 다시 물었다.

"사방이 온통 깃털들이었습니다. 신부님!"

"당신은 지금 당장 돌아가 바람에 날려 간 모든 깃털들을 주우세요!"

"아....."

그녀는 말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는 모든 깃털들이 어디까지 날아갔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O' Rourke신부가 말했다.

"바로 그것이 소문(험담)이란 겁니다!"



[record my mind] - 종교의 기본을 생각하다.
[record my mind] - 종교적 신앙과 진리적 신앙
[record my mind] - 한 목사의 막말 그리고 종교의 참과 거짓.

2009년 5월 16일 토요일

로봇다리 세진이, 한국의 팀 호이트(Team Hoyt)


MBC 휴먼다큐멘터리 사랑 '로봇다리 세진이'

엄마 정숙씨가 사지기형인 세진이를 입양하려고 했을 때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해 이혼한 남편. 지난 어린 날 치기같으면 욱-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비겁한 것 아니냐고 흥분했을 것 같다. 그런데 이젠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이혼을 선택한 남편이 나쁜 게 아니라 세진이를 입양해서 키우려고 마음을 먹은엄마 정숙씨가 대단한 것이다. 누나 은아는 어릴 적부터 영향을 받아서일지는 모르겠지만 엄마처럼 자신을 헌신해 집안의 가장 역할, 세진이의 제2의 엄마 역할을 한다니 그 역시 엄마 못지 않게 대단한 것이다. 어릴 적 걷기 위해, '사람'이 되기 위해 그 모진 세월을 이겨내고 지금은 든든한 엄마의 아들, 누나의 남동생이 된 세진이도 역시 대단하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지만 대단한, 위대한 가족들의 행복하고 즐거운 모습에 가슴이 벅차 올랐다.

(고은비님 댓글을 본 후 내용추가 - 세진이를 입양하는 과정중에 아빠랑 이혼한 것이 아니고 입양 후 살다가 사업 실패 및 여러 가지 갈등이 있어서 이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빠도 꽤 어려운 결정을 함께 했을 텐데 결과적으론 이혼을 하게 되었다니 안타깝다.)


(양정숙님 댓글을 본 후 내용추가 - 아래 댓글에 세진엄마 양정숙님께서 글을 남겨주셨다. 이혼한 분은 너무 좋은 분이고 서로 누가 될까 저어하여 방송에서 보여주지 못한 부분이 많다는 것, 게다가 오래 전 친구가 되었다는 것. 그저 흘러가듯 언급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서로를 배려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에 대한 아낌없는 응원이 있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아빠(지금은 아니지만) 역시 함께 하지 못하는 결정을 내렸을 때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 같다. 사실 어떤 결과만을 두고 보면 결과가 나오기 전 과정이나 원인들은 상대적으로 비약시키거나 과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사람마다 사연이 있고 고민이 있을 텐데... 암튼, 모든 분들의 행복을 기원한다.)

예전엔 나도 입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 정숙씨와 같은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나의 생각은 단지 생각, 이상일 뿐 그 어떤 각오와 결심은 가당찮아 보인다. 모든 엄마가 위대하지만 정숙씨는 더욱 위대해 보인다.

가진 자들이 베풀고, 나누고 입양하는 것들을 대단하다고 한다. 가진 자들은 오히려 물욕이 많아 그런 행위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 이해는 된다. 하지만 틀렸다. 가지지 않은 자들은 잃을 게 없어 쉽게 나누고 베풀고 입양하는 게 아니다. 힘들 것 뻔히 알고 고단할 줄 뻔히 알면서도 그리 하는 것이다. 그게 더 대단하다. 난 세진이 엄마 정숙씨의 결심, 각오, 용기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까. 누나 은아와 세진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까.

정숙씨와 세진이가 영국 장애인 수영대회에 참여할 때 자랑스럽게 태극기를 품에 안은 걸 보며 저들에게 국가는 무슨 존재였을까 생각해보다 부질없음을 느꼈다. 그 외로운 이국 타지에서 그들을 증명하고 의지할 수 있는 건 국가표식 때문인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국가는 저들에게 어떤 존재였던 적이 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영국 대회에서 세진이는 훌륭한 성적-출전한 전 종목에서 메달 획득-을 거뒀지만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내내 '메달권에 들지 못해도 괜찮다'고 중얼거렸다. 세진이, 엄마 정숙씨의 위대함이 메달의 획득과는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박태환이 함께 화제가 되고, 다큐멘터리 나래이션을 신애라와 박지민이 한다고 해서 화제가 되는 것 따위가 기사 꺼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세진이 가족의 존재는 그 어떤 것으로 포장되지 않아도 충분히 빛이 나고 위대한 것이라 생각했다.

다큐멘터리 내용 중에 가장 참을 수 없었던 부분은 세진이를 걷게 해주려고 찾아간 병원에서 엄마 정숙씨가 의사에게 '이 아이는 못 걸어요. 엄마 돈 많아요? 그럼 한번 걷게 해보세요.'라며 멸시에 찬 대답을 들었다는 부분이었다. 또한 겨우 세진이를 걷게 해서 보낸 수 많은 유치원과 학교에서 퇴짜를 받았고 겨우 들어간 학교에서는 세진이를 넘어뜨리고 세진이의 로봇다리를 망치로 부수고 왕따를 시켰다는 것. 게다가 엄마 정숙씨는 세진이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설이 적힌 언어카드로 아이를 가르쳤다는 부분에서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걸 느꼈다. 세진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다시는 무너지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키웠다는 것이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세진이는 스스로가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주변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서려고 노력했다며 눈물을 글썽인다. 그럼에도 정숙씨, 세진이, 은아는 미소가, 표정이 너무 맑고 밝다.

“너는 장애인이야. 너는 병신이고, 너는 바보라고 놀림 받을 거고 이보다 더한 욕도 들을 수 있어. 그럴 때는 어떻게 답해야지? ‘응’이라고 말하면 돼”  - 엄마의 인터뷰 中

“매일 하나님한테 기도했어요. 거짓말 하지 않고 착한 아이가 될테니까, 다리를 달라고,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 세진이 인터뷰 中

“자식은 내게 오는 거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세진이가 저를 필요로 했고 저는 세진이의 엄마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가 봐요.” - 엄마의 인터뷰 中

"걷고 싶었어요. 걸으면.. 걸을 수만 있으면 세상이 달라지잖아요.  제가 다가갈 수 있잖아요” - 세진이 인터뷰 中

“걷다가 넘어지면 크게 다치잖아요. 다치지 않는 연습을 하기 위해 바닥에 이불을 깔고 세진이를 수백 수천 번 밀어뜨렸어요.” - 엄마의 인터뷰 中

“수영장 영업이 끝나면 락스로 혼자 수영장 구석구석을 청소해줘야 했죠. 세진이 다리를 보고 수영장을 나가는 손님들한테는 환불도 해줘야 했구요...” - 엄마의 인터뷰 中

평생 잊혀지지 않는 말이 있잖아요.. 전 그게 가장 가슴에 남아요.. 왜 저런 애가 여기 와서 수영하냐는 말..” - 세진이의 인터뷰 中

아들아! 너의 몸이 똑바로 서있으면 너의 그림자가 흔들리지 않는단다
타고난 것으로 실망하지 마라
너의 귀한 몸으로 노력하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단다

-엄마의 편지 中

출처: MBC 휴먼다큐멘터리 '사랑'


자유민주국가에서 장애를 만들고, 가난을 조성하며, 불행을 형성하는 건 국가가 아니다.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을 뽑는 권리를 가진 우리들의 잘못이다. 나의 잘못이고 너의 잘못이며 우리의 잘못이다. 우리의 변화는 주변을 변하게 만들고 사회를 변하게 하며 국가를 변화시킬 것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비판하고 엄준하게 꾸짖을 권리 역시 우리들에게 있다. 그걸 망각하는 순간, 국가는 우리를 억압할 것이고 장애를 생산하고 가난을 양산하며 불행을 잉태할 것이다.

세진이를 보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차마 보기가 힘들었지만 끝까지 봤다. 그들에게 무한한 용기와 힘을! 그들에게 무한한 사랑과 애정이 함께 하길!

Team Hoyt가 겹쳐 떠오른다. 위대한 父子(Hoyt)와 위대한 母子(정숙-세진)들이다. 공통점이 많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Team Hoyt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 지원을 생각하면 정숙-세진 팀은 전혀 다른 지점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건 아주 큰 차이여서 다른 지점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상, 다른 출발점인 것이다. 그건 바로 '장애'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 생각의 차이만큼 큰 것이기 때문에 정숙-세진 팀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수 많은 고통을 겪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현재 진형형이다. 비록 그들이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할지라도.

출처: Team Hoyt



[record my mind] - 장애인이 살 수 있는 세상은...
[diary 03/9/3-04/9/13] - 장애.



2009년 5월 15일 금요일

도가니 마지막 회, 강인호와 서유진의 선택

90여 회까지 읽은 후 오랫동안 '도가니'를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때론 한 숨에, 때론 긴 호흡으로 겨우 읽어내려갔으나
대면하기조차 버거운, 대면하고서는 숨조차 쉬기 힘든 진실이
가슴을 조여오는 먹먹함으로 가득차 절정에 치닫고 있을 즈음엔
공지영 작가가 내 심장에 대고 속삭이는 듯한 '도가니'를 마주할 용기가 쉽게 나지 않았다.
어쩌다 인터넷에서 '도가니'라는 글자를 얼핏 봤을 때도 애써 외면했었다.


그러다 오늘 우연히 '마지막 회'라는 글자를 보고서야 심호흡 길게 하고
전에 읽다 만 회차를 찾았다.
시간이 좀 오래되어서 내용을 다시 복기라도 해야할까 싶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난 날 마지막으로 읽었던 회차를 보는 순간
90여 회가 되는 내용이 순식간에 하나로 꿰어지며 다시 손가락 무겁게 클릭해
읽어가기 시작했다.

'도가니'에 몰입할 수 있었던 건 단지,
'도가니'가 실제로 있었던 일을 소설로 엮어서가 아니다.
'도가니'에는 이 사회를 대하는 수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고
진실과 거짓, 희망과 절망, 용기와 비겁을 이야기하고 있어서다.

게다가 '도가니'는 정말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 어떤 것도 용서할 수 없되, 그 어떤 것도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희망이 무엇인지 다시 반문해 보는 것.
내가 원하는 가치가 무엇이고 그 가치를 위해 사는 것이 어떤 것임을 생각해 보는 것.

왜, 불행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찾아오는가.
돈은 불행을 잠식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인가.
이 세상에 나서 자라고 떠나기까지
왜 나서, 왜 자라고, 왜 떠나는지
무엇을 위해, 무엇때문에 고통스럽고 힘겨운 삶을 살아야하는지...
'꼬우면 성공해라', '억울하면 출세하라' 따위가 정답인 사회는 정상인가.

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도가니'는
어쩌면 아주 간단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인간다움', '인간답게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
인간은 원래 불평등한 존재였고 지배, 피지배는 어쩔 수 없었다면서
인류학, 인문학까지 들추며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인 후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면 어떨까.

'도가니'는 113회, 114회, 1115회(마지막 회)에 걸쳐
서유진과 강인호의 선택을 이야기한다.
서유진과 강인호는 다른 이유로 무진에 왔지만
같은 목적으로 함께 투쟁했고 서로 의지하며 버텨왔다.
결국 다른 이유로 헤어지게 되었지만 함께 나눴던 목적은 변함이 없었다.
서유진이 옳고 강인호가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둘 다 너무나도, 지극히도 인간적이었고
매 순간 아이들보다 고통받았고 괴로워했다.
두 사람이 각자 선택한 길은 결코 다른 길이라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누가 더 옳다고 누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누구의 선택이 더 현실적이거나 또는 비현실적이라고 구분지을 수도 없을 것 같다.

때론 서유진이, 때론 강인호가 내 모습이 아닐까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그들의 흔들림이, 그들의 나약함이, 그들의 강건함이, 그들의 끈질김이
그들의 눈물이, 그들의 분노가, 그들의 정의로움이, 그들의 절망이
사실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에 서유진이 강인호에게 쓴 편지는
공지영 작가가 나(독자)에게 쓰는 편지이기도 하지만
내가 나에게 쓰는 편지이기도 하고
서유진이 강인호가 아닌 나에게 쓰는 편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편지를 읽으며 마음이 아련했고 모니터가 흐려졌다.
아프지만 희망을, 괴롭지만 용기를, 먹먹하지만 이를 악물었다.
한  없이 슬펐지만 조금은 웃을 수 있었다.


서유진의 편지를 그대로 옮겨둔다. (문제 시 삭제)

인호
  잘 지냈어? 네가 떠나간 지도 벌써 6개월이 넘어가는구나. 아파트로 찾아가 보니까 앞집 아주머니가 네가 그날 아침 급하게 떠났다고 말해주시더라구. 그후로도 여러 번 전화를 했는데 연결이 안 되더니 어느날인가는 결번이라는 안내가 나오더라. 혹시 몰라 이메일을 쓰는 거야. 잘 지내지?
  어제 연두 아빠의 장례식이 있었어. 연두 아빠는 연두와 그 엄마의 손을 잡고 평화롭게 돌아가셨어. 연두와 연두 엄마의 곁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걱정 없다고 오히려 우리를 달래주고 가셨어. 정말 좋은 분이었는데. 무진의 바다가 보이는 묘지에 오랜만에 참 많은 사람들이 모였단다. 장례식 끝나고 밥을 먹으면서 연두가 불현듯 네 얘길 꺼냈어. 유리는 아직도 네 이야기가 나오면 울어. 뭐 연두와 유리뿐 아니라도 실은 우리 모두 그 자리에 없는 유일한 사람, 그러니까 강선생, 네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우리는 네가 왜 그 아침 아무 말도 없이 무진을 떠났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네가 참 많이 힘들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어. 협박을 받아 그랬든 혹은 피치 못할 일이 있어 그렇게 떠나야 했든 너는 우리보다 훨씬 더 힘들었을 거라고 말이야. 네 성격에, 오겠다고 해놓고 약속을 어겨야 했으니 얼마나 더 힘들었겠니.
  우리 이야기를 좀 할게. 네가 궁금해할 거 같아서 말이야. 나는 그날 도로교통법위반에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었어. 이번에는 보수꼴통이 아닌 좋은 판사를 만났지. 죄를 범했으나 그 뜻이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게 아니라며 벌금 150만원으로 봐주더라구. 받아야 할 벌로 보면 내가 이강석 형제보다 더 중한 벌을 받은 건가? 아무튼 우리 무진의 판사님들이 다 그렇게 너그러운 줄 알았는데 우리 아이들의 항소는 기각되었어. 합의서가 관건이었지. 그리고 윤자애가 아이들 30명을 고소한 사건은 아직도 지지부진 진행중이야. 절대로 용서 못한대. 절대로 말이야. 그러니 이 싸움은 기실 아직도 끝나지 않은지도 몰라.
  아이들은…… 이제 그 학교에 다니지 않아. 이젠 박보현 선생까지 복직을 했거든. 학부모들과 최목사님 모두 함께 고민 끝에 연두의 집을 빌려서 연두 어머니께 아이들을 부탁드렸어. 아이들은 근처의 학교로 전학시켰고. 다행히 그 지긋지긋한 최수희가 다른 곳으로 발령받아 가고 나서 새로 온 장학관이 특수학급을 허락해주었단다. 연두네 집에 여자아이들 6명의 기숙사를 꾸몄고 우리는 그것을 홀더라고 부르기로 했어. 홀더. 영어가 아니야. ‘홀로 더불어’라는 우리말이야. 연두 아버지의 병으로 생계가 막막했던 연두 어머니는 딸도 키우고 불쌍한 아이들 밥도 먹이고 돈도 번다며 좋아하신단다. 그리고 남자아이들은, 그 통역사 기억나니? 그 사람이 맡았고. 독지가들이 집을 하나 얻어주었어. 거긴 그러니까 남자 홀더지. 집 때문에 걱정이 많았는데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거 같아. 거기에 민수랑 남자아이들 일곱명이 산단다. 유리는 많이 건강해졌어. 심리치료도 받고 있고. 건강해진 것은 비단 유리뿐은 아니야. 민수는…… 놀라지 마. 육개월 동안 키가 15센티나 컸어. 다 이게 맛있는 저녁밥의 힘이란다. 그리고 아이들의 마음은 놀랍도록 컸어. 그 아이들은 이제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폭력을 거부할 줄 알게 된 거야. 가끔 아이들이 대견하게 변한 것을 보면 우리가 꼭 진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드는걸.
  오늘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저녁 무진에 다시 안개가 내린다. 저 지긋지긋한 안개, 또다시 모든 빛들이 희미해지고 사람들은 서둘러 문을 닫고 커튼을 내리겠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막으며 들어서는 저 뿌연 안개 속에서 또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 안개를 통과하는 유일한 것, 소리…… 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최목사님은 언제나 아이들에게 말씀하신단다. 우리의 귀도 네 소식을 그리워하고 있어. 혹시라도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우리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네가 보여준 헌신과 사랑을 기억하고 있어. 너는 우리를 잊어도 우리는 네가 늘 그리울 거야. 건강하게 잘 지내길, 그리고 행복하길 빈다.

출처: 공지영의 '도가니'

'도가니'를 다 읽은 사람은 마지막 편지에 대한 느낌이 각별할 것 같다.



[record my mind] - 불편한 진실을 대면하는 힘 -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


2009년 5월 11일 월요일

조직화와 인재

한국이 서구를 따라잡기 힘든 이유 - 거다란

빠른 한국인, 느린 미국인의 생산성의 반도 안되는 이유 - 뉴욕에서 의사하기


아침에 연이어 두 글을 읽었는데 비슷한 점도 많고 생각할 꺼리도 많다.
조직화(시스템)와 집단체제, 유능한 인재기용(등용)이 주요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글을 읽으며 내가 과거에 했던 일들이 오버랩되면서 많은 부분에 공감을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조직을 이끄는 수장이나 임원들은 대체로 무능하다.
그들은 젊은 시절 분명 유능했을 사람들이다.
학창시절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었을 테고
치루는 시험마다 좋은 성적을 받아 공무원이 되거나 조직의 임원이 되었을 것이다.
혹은 오랜 시간을 거쳐 단 한 번의 국가고시로 자리를 차지한 후
그 이후로 조직의 생리에 충실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수하의 재능있는 사람들을 발굴하고 독려하기 보다
자신의 세계를 넘보지 않는
말 잘 듣는 부하를 만드는 데 더 관심이 많다.
만약 부하가 이빨을 드러내거나 불만을 드러내며 짖으면
표시나지 않고 은말하게 바로 축출하고
다시는 그 자리에 발을 딛지 못하도록 한다.


온갖 편법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시스템을 정비하고 고수하는 건
시대에 뒤떨어진, 감각없는 사람으로 치부되기 일쑤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걸 얻어야만 한다.
수 많은 가짜 문건이 돌아다녀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권력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어떤 식으로든 바로 응징을 당한다.
문건을 보면서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있어도
누구 하나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시스템 속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만 고민을 해야 한다.
누군가 옳음을 이야기해도 그들의 시스템에서는 틀림이 되고
틀림을 공유하는 수가 많을 수록 틀림은 옳음이 된다.


유명한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 과학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
유명한 음악가, 미술가, 예술가, 문학가, 스포츠 선수가
유독 국내 시스템에서는 배출되지 않는 이유
알면서도 말할 수 없는 사회 시스템
말할 수 없는 사실이 참이고 진실로 변해버린 시스템에서는
조직화는 실현가능한 현실이 될 수 없고
유능한 인재들은 꿈조차 꿀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인류가 종말을 선택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이 망국을 선택하지 않는 한
시나브로 언젠가는 변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사람들이 먼저 현실에 맞게 변할 것이다.
무엇이 잘못인지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지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 없어진다면.

2009년 5월 10일 일요일

눈먼자들의 도시(Blindness),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줄리안 무어는 마지막에 생각한다. 혹시 내가 눈이 먼 게 아닐까.... 화려한 풍경이 보이며... (아니다)

서로 통성명을 하려하는데 이름은 알아서 무엇하냐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없는 영화 '눈먼자들의 도시(Blindness)' 시력을 가진 자들은 시력을 잃기 전까진 시력을 잃은 자들의 슬픔과 고통을 손톱만큼도 알기 어렵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의 눈을 다 멀게 해버렸다. 그런데 모두가 시력을 잃고 나니 시력이 없는 자들 속에서 시력을 가진 자가 더 괴롭다.

'본다는 행위'와 '보이지 않는 상황' 사이, 비현실 속에서 현실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볼 수 있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많은 세상'보다 과연 살만한 세상인가.
줄리안 무어만이 시력을 잃지 않은 세상은 줄리안 무어만이 시력을 잃은 세상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 남들이 모르는 걸 나 혼자만 알 수 있다는 것. 차별과 유일함.
문득 불교의 가르침이 생각난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영화를 보면서 가장 불쾌했고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씨퀀스는 음식을 얻기 위해 여자들이 자발적으로 '성(性)상납'을 하는 것이었다. 극단적인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서라고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줄리안 무어의 행동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나중에 제3동의 왕을 살해할 거면서 왜 처음엔 순순히 가서 '상납'을 했던 것일까. 나중에 불을 붙이러 갔던 여자도 마찬가지다. 줄리안 무어의 캐릭터가 심약하고 착하다는 건 알겠지만 '윤간'을 당하고 나서야 당사자를 죽일 수 있다는 건 설정이 너무 의도적이었다.

그보다 음식으로 여성들의 성을 착취하겠다는 것. 가장 기본적인 것을 무기로 가장 기본적인 것을 채우겠다는 저열한 의도가 가득 찬 화면을 보며 역겨움이 쏠렸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막장 짓. 현실이 꼭 그렇다. 먹고 사는 문제를 담보로 성을 사고 팔고, 직장을 담보로 직원을 노예로 만든다. 인간은 시스템을 많은 이들이 유용한 쪽으로 발전시키기보다 이기적인 부분을 강화하도록 발전시킨다. 그 상황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이들은 당연히 힘없고 빽없고 심약한 사람들이다. 화면 가득히 넘치는 인간의 더러운 욕망이 내 몸 위로 내 마음 속으로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것 같아 보는 내내 불편했다. 줄리안 무어가 왜 '행동'을 취하지 않는지에 대한 원망이 더해지면서.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다니지 않아 황폐해진 도시는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다시 다닌다 해도 다른 모습은 아닐 것이다. 비워진 것과 채워진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일 뿐, 그 용기자체가 달라지진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용기를 사용하는 방법, 그 용기를 채우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냐는 것이다.

줄리안 무어의 손을 꽉 쥐고 있는 사람들은 줄리안 무어가 희망일지 모르겠지만 그 희망은 유한한 것이다. 굶주림을 해결해주고 미망 속에서 헤매지 않게 해줄 뿐, 그들에게 진정한 희망이 되긴 어렵다. 줄리안 무어도 더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할 수가 없다. 끔찍한 현실을 보지 않아도 되고 극도의 공포에 몰린 타인들에게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작은 공간(집)을 찾아 들어간다. 그게 할 수 있는 전부다. 눈뜬 사람들 세상에서 눈감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결국 이 영화는 눈뜬 사람들에게 '역지사지'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뿐,
어떤 해답도 없다.
영화를 통해 지금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볼 수 있으니 행복하구나'라고 생각하던가,
'보여도 끔찍한 세상은 똑같구나'라고 생각하던가.
혹은 '눈을 뜨나 감으나 똑같이 끔찍한 세상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


...줄리안 무어를 보면서 피부가 정말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줄리안 무어가 한국에서 배우를 했으면 바로 박피수술을 받거나 성형을 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트랜스포터3에서 나오는 주근깨 투성이 여자배우도 그렇지만 피부가 좋지 않은 배우들이 배우생활을 할 수 있다는 건 여러 면에서 생각을 하게 한다. 역시 대한민국 배우들 피부가 세계 최고야!라고 말하는 건 좀 우습다.



행복을 찾아서(The Pursuit of Happiness), 현실..현실..현실...현실 속 행복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도 어릴 적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어떤 사람이 되겠다고 자신있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며 또렷한 눈망울을 반짝거리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꿈꾸는 나의 삶, 우리의 세상은 꼭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경쟁이 나와 상대를 모두 아프게 한다는 걸 조금씩 알아가게 되면서
나이가 어렸어도 남을 꼭 이겨야겠다는 생각은 못해본 것 같다.
물론 공부를 잘해 등수 안에 들고, 1등을 하고, 상을 받으면 기분좋고 우쭐했던 적은 있었지만
함께 원하는 무언가를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악다구니를 써가며 바득바득 경쟁을 하려고 하진 않았다.
그래서 내가 가진 복(福)과 재능(才能)만으로 겨우겨우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
물론 게으르긴 했지만 정말 하고 싶은 일엔 순수하게 자신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해가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마치 순수한 무엇인마냥 오해를 하겠지만
대동소이(大同小異)하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살면서 무수히 생각해 보았을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어린 시절, 혹은 지금까지 옳다고 믿어왔던 어떤 가치와 신념이 이루어지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남에 대한 배려는 고사하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당당히 이뤄내면 행복해지는 것일까.
남들은 행복한데 나만 불행한 것인가.
내가 행복하면 남들도 행복하게 보이는 것인가.
도대체 행복의 최소기준은 무엇이고 행복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인가.


이 장면은 크리스 가드너(Will Smith)가 정식 주식중매인이 된 후에 감격에 겨우 인파들 속으로 걸어나와 행복을 만끽하는 장면이다. 아내는 떠났고 아이를 홀로 키우며 도전한 주식중매 직업, 그 길이 순탄치 않았고 힘들었을 거라는 건 불을 보듯 훤하다. 월세를 내지 못해 집에서 쫓겨나고 한 푼도 없어 홈리스 생활도 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던 직업을 손에 넣었다. 아마도 다른 선택이 없었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자신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을 살려 마침내 주식중매인이 된 것이다.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인 크리스 가드너의 삶이 딱 여기에서 멈췄으면 결코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크리스 가드너는 그 이후에 '가드너 앤 리치 컴퍼니'라는 굴지의 투자사를 설립하면서 갑부가 되었고 그의 인생역정이 ABC-TV 다큐멘터리 '20/20'에 소개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면서 영화까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가 마침내 찾은 것은 '행복'이었다는 코멘트와 함께.

그가 갑부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의 인생역정을 보면서 쾌감을 느낄 수 있을까.
그가 갑부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의 행복을 보며 감동을 느낄 수 있을까.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고 해서 모든 고통이 행복해지거나 하진 않는다. 희망을 놓진 못할망정 사랑하는 가족이 겪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책임을 지는 입장으로선 죽을만큼 괴롭고 힘든 일일 것이다. 저 순간 느끼지 못했던 행복은 크리스가 정직원이 되는 순간 바로 찾아온다. 아들과 지하철 화장실에서 잠을 자거나 노숙자들이 기거하는 곳에서 힘겹게 버텨내던 시절에 꿈꾸던 가장 행복은 최소한의 생활력-매일 월급이 통장에 찍히고 집 월세 걱정하지 않고 아들 생일 날 선물 사주고, 아들이 먹고 싶은 것 지갑걱정 하지 않고 사주는 것, 아내에게 '돈돈돈'이란 잔소리를 듣지 않는 것-일 것이다.

크리스가 제대로 된 번듯한 직업을 갖게 된 후 엄청나게 감격을 하는 이유는 그 동안의 고단한 생활 속에서 (남들은 다 느끼고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이 느끼지 못하던 '행복'이 자신에게 왔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돈'이 '행복'인가. '돈'이 없으면 '행복'을 느낄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것인가. 물론 돈의 많고 적음에 대해 수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최소한의 삶의 유지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갖게 되는 건 '심리적, 물질적 박탈감'과 '악순환으로 흐릿해지는 미래(희망)'일 것이다. '최소한'은 무엇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평등'이 진리고, '격차'가 법칙인데 '최소한'을 요구하는 행위는 위법인가.

크리스의 삶에 감동을 받는 건 왜일까. 그가 주식중매인의 자격으로만 평생을 평범(?)하게 살면서 행복을 느끼는 건 그다지 큰 행복이 아닌 것일까. 물론 그렇진 않겠지. 영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극적인 것도 필요하고, 어쩌고저쩌고..하니까 이해는 된다. 다만, 일상으로 현실로 눈을 돌려보면 자신의 '적정한' 삶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남들보다 우월한' 삶 속에서, 현재보다 '더 나은' 삶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싶어한다.

언젠가 '생활 속 달인을 찾아서'라는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분야에서 최소한 10년 이상 수십년 씩 종사해 온 사람들인데 경제적으론 늘 궁핍해 마지 않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그들이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달인들이 하는 일을 좇아하진 않을 것이고 그들이 느끼는 행복보다 오히려 크리스가 느끼는 행복을 찾고 싶어할 것이다. 왜일까.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바보'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회.
남들보다 뛰어나지 못해서 주눅드는 사회.
편법을 쓰지 못하면 재능없다고 비난받는 사회.
가진 게 없으면서 평등과 분배를 이야기하면 자격지심 때문이라고 꾸중듣는 사회.
가진 게 많으면서 편법과 불법을 이야기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용인하는 사회.

크리스가 찾은 행복이 일반적인(?) 직장을 얻은 것에서 종료되지 않고(영화에서는 그렇지만)
그 이후에 그가 이룬 부와 명성으로부터 역으로 거슬러 온 행복이란 점에서 자꾸 현실에 눈이 간다.



...영화장면에서 느낀 몇 가지.


크리스 가드너가 첫 면접을 보는 날인데 이런저런 이유로 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페인트가 덕지덕지 묻은 상태로 면접장소에 나타났다. 면접관들 역시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어떤 이는 악수를 하는 것조차 불쾌하게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한국이랑 비슷할 것이다. (물론 조금 다르다. 한국이라면 면접대기자들을 부르는 직원도 크리스를 이상하게 쳐다보며 무시했을 가능성이 많다. 사전에 차단시켰을 지도...)

다음이 중요한데 물론 크리스의 넉살과 면접관 중 한 명(트위슬)과의 사소한 친분도 한 몫을 했지만 면접관들 역시 최대한 면접자의 의견을 듣는데 신중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기회를 준다. 미국도 100% 다 저럴거라고 믿진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의 관용은 열려있지 않나..라고 생각을 해봤다. 특히 크리스의 콧수염을 봐라.

한국이라면 나이먹은 구직자나 젊은 구직자나 수염은 다 밀어야 하고 반드시 양복을 입어야 하며 외형에 관련한 코멘트와 노하우가 하나 가득이지 않나. 직업마다 복장이 다르고 요즘은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외형에 치중하는 사회 분위기를 보면 머리가 아프다. 외형에 가장 목메다는 직종이 하나 있다. 국회의원.


오른쪽에 보이는 인물이 실제 크리스 가드너라고 하는데 영화의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현실과 현실을 투영한 영화 속에서 실존인물과 실존을 대체한 인물이 마주치는 장면을 다시 보며 묘한 느낌을 받았다. 크리스 가드너 역을 했던 윌 스미스의 친 아들 제이든 스미스 역시 영화 속 크리스 아들 크리스토퍼를 연기하면서 현실과 비현실이 교묘하게 얽힌 영화가 되지 않았나 싶다.


2면까지 맞춘 게 내 퍼즐인생의 최고 기록이다. 메뉴얼이라도 구해서 연습이라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팟 터치 무료 어플 중에 있어서 다운을 받긴 했는데 역시 머리가 아파서 돌려보다 포기. 퍼즐 잘하면 두뇌단련에 도움이 되려나??? 큐빅을 처음 보고 모든 면을 다 맞춰 낸 크리스는 스톡브로커가 되지 않았더라도 무언가 해냈을 인물이 되었을 것 같긴 하다.

2009년 5월 6일 수요일

삼성 이건희, 한국 5관왕, 추악한 부채

이 글은 자유인님의 2009년 5월 6일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PD수첩 목포의 눈물/제주도 강정마을, 미투데이/플리커 위젯, 이혼, 현대인, 한국인

  • '시난(sinan)'의 재밌는 me2day 위젯 . 내 '미투데이'는 누가 자주 보는 건 아닌데 한 번 달아보기로 함. 어차피 블로그에 me2day 카테고리가 따로 있어 글을 보관하고 있긴 하지만…2009-05-06 04:01:26

  • 재밌는 플리커(Flickr) 위젯, 사진이 입체로 빙글빙글 돌아가서 역시 재미로 달아 봄. 플리커를 특별히 관리하지는 않지만 핸폰/디카로 찍은 사진들 중 부담없이 공개할 수 있는 게 생기면 업데이트 할 생각. 잘 찍은 사진보다는 비교적 후진사진들이 많음.2009-05-06 04:05:13

  • 한국인은 왜 자살을 선호할까?(韩国人为什么热衷于自杀?)라는 중국인의 글(원문). 어떤 면은 고개가 끄덕여지고 어떤 면은 고개가 갸웃거려짐. 다른 이야기지만 한중일(韩中日) 3국의 국민들의 극단적인 대치, 비방은 어디부터 시작된 것인지 궁금함.(중국인, 한국인, 일본인,)2009-05-06 04:11:48

  • 현대인들의 생활방식은 모순 투성이다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과학과 도덕을 병행하고 이성과 감성을 함께 품으며 영(靈)과 육(肉)을 두루 아울러야 하지 않겠나. 개발과 발전의 본질, 주체와 대상을 잃어버린 사회는 일엽편주와 같이 표류하기 마련이다.(현대인, 생활방식, 모순,)2009-05-06 04:20:19

  • 선후본발경중(先後本末輕重)의 문제. 현실에서 경계를 대할 때는 에둘러 가도 되지만 마음에서는 본질을 꿰뚫어 곧바로 가는 게 낫다. 표리(表裏)가 부동(不同)해 보일 뿐, 본질은 흔들리지 않고 변함이 없다. …없도록 해야 한다.(선후본말경중, 표리부동, 본질)2009-05-06 04:25:38

  • 엄마 아빠 제발 이혼하지 마세요를 보다보니 기억이 가물하지만 외국동화책 중에 “엄마 아빠 이혼시키는 방법”이란 골자의 책을 본 기억이 난다.(이혼)2009-05-06 04:33:20

  • 대한민국은 이혼이 두려운 게 아니라 이혼 후 시선이 두려운 나라다. 그 시선 때문에 이혼을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혼이 정말 필요한 사람들도 있다.(봤다. 들었다.) 이혼에 대한 편견 뿐인가. '남의 눈치, 편견'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사회이지 않나.(편견, 눈치)2009-05-06 04:36:39

  • PD수첩 '목포의 눈물'편. 인터뷰에 나온 소위 '힘있는 사람'들의 대답과 태도는 과연 '후안무치(厚颜无耻)'할 뿐이다.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는 무소불위의 토호세력(목포수협 조합장 일가). 그래서 상식이 혼란스러운 사회, 본말이 전도 된 사회라는 거다. 이 나라는.(PD수첩, 토호세력, 후안무치, 조합장, 목포수협)2009-05-06 04:43:59

  • 정부 측 '분열은 좋은 상황' , '걸림돌은 제거하고 가야 한다', PD수첩 '제주도 강정마을, 그들은 왜 분노하는가?'에 소개 된 내용. 사실 이 정도면 그냥 대놓고 욕하고 주먹질 하는 거와 다를 게 없다. 진행목표가 세워지면 무조건 달성해야 한다는 알량난 추태들.(PD수첩,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추태)2009-05-06 04:48:20

이 글은 자유인님의 2009년 5월 6일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2009년 5월 2일 토요일

어른이지만 어른 아닌 사람들의 세상

타이틀이야 거창하지만 별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국내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를 들여다 보고 있으면 어른이 되는 걸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유아기를 벗어나는 걸 두려워하는 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드라마를 보면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성인이 되었는데도 결혼은 반드시 부모의 동의를 거쳐야 하고 사랑도 직업도 때론 자신의 진로조차도 부모와 어른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 이미 부모가 된 주인공들일지라도 시어머니와 친정 어머니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남자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아버지로부터 성인의 기능을 거세당한다.

드라마 속에서만 그런가. 드라마와 현실은 100% 다른 것일까. 부모들이 자식들에 대해 손을 떼는 게 점점 늦어지고 있고 자식들에 대한 부모들의 욕망은 갈수록 커져간다. 자식들은 법으로부터 성인인증을 받아도 스스로가 성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다른 나라의 드라마들은 본 게 많지 않으니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부모가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하더라도 자녀들과 인격적으로 동등한 상태로서 등장한다. 다른 나라 역시 드라마와 현실은 100%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되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들. 어른이 되려고 하는 이들을 단호히 막아서는 또다른 어른들. 그게 드라마 속에 보여지는 대한민국의 얼굴이며 현주소가 아닌가 싶다.

드라마 속에서 혹은 현실에서 부모와 자식, 어른과 아이 간에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공경'의 문제와 별개다. 오히려 '동방예의지국'이나 '바른생활', '예절'등을 이용해 통제하고 가두는 경우가 많았으면 많았지 결코 '공경'과 '예절'의 문제가 어른이 되지 못하는 못하는 상황과 어른이 되지 못하도록 막는 상황과 연결될 수 없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나보다 연배가 많은 사람이 하는 말에 토를 달거나 반항을 하면 '싸가지 없는' 사람이 되고 '버릇없는' 사람이 된다. 나보다 연배가 아래인 사람은 '상명하복'으로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곤 한다. 세상은 많이 변했고 달라졌다는 걸 안다. 하지만 사회의 어른들, 관계 속의 어른들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한 사회로 변한 것일 뿐 본질이 변한 건 아니라 생각한다. 본질이 변해간다면 결코 이중적 잣대를 들이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른이지만 어른 아닌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다 보니 대한민국이 점점 유치해져가는 게 아닐까.

디파이언스(Defiance) - 선택과 결정



비엘스키 형제들의 실제 사건을 영화화 한 작품. 비엘스키 가문의 영웅담은 그것이 영웅담이기도 하면서 인간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적극적 행위(Defiance)를 해 수 많은 목숨을 지켜낸 또다른 쉰들러 리스트라고 할수 있을까.

투비아 비엘스키(Daniel Craig)의 이야기가 중심에 있긴 하지만 주스 비엘스키(Liev Schreiber)는 투비아보다 과격하기만 하고 호전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을까. 처음에 자신의 부모를 죽인 자를 찾아가 세 사람을 죽인 건 투비아였다. 투비아와 주스는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투비아가 얻게 된 '리더'의 위치는 그가 '장남'이었고 유약한 심성 때문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주스가 투비아를 이해하면서 투비아가 주스보다 더 옳은 결정을 내렸다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영화를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투비아와 주스는 단지 노선에 대한 '선택'의 문제였을 뿐 '누가 옳고 그른가'에 대한 문제는 결코 아니었다고 느꼈다.

투비야의 인간적인 규칙이 더 좋을지 몰라도 투비야가 생존할 수 있었던 건 주스와 같은 이들의 강력한 투쟁들이 함께 존재했기 때문이다. 어느 한 가지 방법'만'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무엇이 '옳다'고 말하는 건 '결과'를 중시하기 때문이고 누적되어 온 역사적 사실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과거나 미래에 존재하는 것 따위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저항'과 '협력'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고 '개인'과 '집단(커뮤니티)' 역시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누가 더 옳으냐를 따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없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택과 결정에 대해 보다 강력한 확신을 갖는 것, 그리고 그 확신에 대해 매 순간 반문하고 반문하며 더 나은 선택과 결정을 해 나가는 것. 현재를 미래에 대한 씨앗으로 만드는 과정이 아닐까.

'영웅'은 탄생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 시대상황과 대중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영웅인데 사실 그 영웅의 실체는 여러가지 이유로 가려지게 마련이다. 그건 대중들의 심리와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안과 공포가 저항력을 앗아가기도 하지만 자신들이 보고 싶은 영웅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닌가 싶다. 투비아가 현실적으로 느껴졌던 건 그가 본의 아니게 리더를 맡게 되면서 조금씩 권위적으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권위도 힘을 잃기 마련이고 좌절을 겪게 되지만 릴카 틱틴(Alexa Davalos)의 사랑으로 다시 마음을 다잡기도 하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동생인 아사엘 비엘스키(Jamie Bell)의 리더쉽과 주스의 등장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결국 다른 이들의 눈에는 영웅일지는 몰라도 영화를 지켜보던 나같은 3자나 투비스의 형제들은 영웅, 메시아 따위에 운운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불안하고 두려운, 때론 무능하고 어리석은 대중들이 만들어 낸 영웅, 그리고 그 영웅으로부터 스스로도 구원받길 원하며 그 영웅과 함께 어깨를 함께 하며 스스로의 힘을 찾아간다는 건 시대가 변하고 세월은 흐르지만 언제나 같은 게 아닌가 싶다.

이유야 어쨌든 비엘스키 형제들이 1200여 명의 목숨을 지켜낸 일은 그 무엇보다 값진 것이다. 그들이 '영웅'이 되거나 혹은 하느님이 보내 준 '구원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마땅한 일일 수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 저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영화 엔딩에 보면 비엘스키 형제들은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에 그 어떠한 보답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이 사람들을 지켜내려고 했던 건 '상황이 그랬을 뿐'이고 '어쩔 수 없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적극적이고 의협심이 강했겠지만 그들 스스로가 영웅이 되길 자처했던 게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의 현실이 오버랩되었다. 대한민국에서 70-80년대에 이루어졌던 '민주화'가 민주당, 열린우리당, 한나라당의 많은 의원들의 입과 386세대들의 입을 오르내리며 자신들의 훈장이 되고 특별한 업적이 되는 현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영웅이고 참여하지 못한 이들은 비겁한 자들이었을까. 독재정권의 압잡이 노릇을 하지 않았으면 모두들 상황은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시대가, 상황이 그들을 민주화 투사로 만들었지만 지금의 그들은 그 시대와 상황을 자신들만의 것으로 특수화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영화처럼 누군가가 총을 들었다면 누군가는 땔감을 구했어야 했고 누군가는 신발을 수선하고 누군가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주스처럼 총을 들고 전장에 나가야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요(要)는 끔찍하리만큼 교활한 정치인들, 정치적인 인간들이 당시 대중들과 함께 건너온 공동의 시간, 역사를 자신들만의 것으로 만들어 대중을 현혹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유태인과 러시아인을 대놓고 조롱(?)하는 장면이 있는데 특히 유태인들을 무능하고 싸울 줄도 모르며 죽어 마땅한 자들처럼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유태인들은 지금 전세계의 핵심을 쥐고 흔드는 모종의 권력이 되어버렸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는 걸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것일까.


영화 엔딩에 소개된 내용.

In their new camp they built a school, a hospital, and a nursery.

Always hunted, their number continued to grow.

By war's end, 1200 had survived.

Asael Bielski joined the Russian army and was killed in action six months later.

He never lived to see the child he fathered with Chaya.

Zus emigrated to New York City where he started a small trucking business.

Tuvia followed soon after. He and zus worked together for thiry years.

Tuvia and Lilka remained married for the rest of their lives.

The Bielskis never sought recognition for what they did.

The children and grandchildren of those they saved now number in the tens of thousands.




 

박쥐(Thirst), 채워지지 않는 갈증

먼저 쓴 박쥐(Thirst)에 대한 '초간단 줄거리'는 농담이다. '박쥐'를 보며 너무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몇 가지 생각을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적어본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영어 제목이 참 잘 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영화가 끝난 후 영화 제목처럼 갈증이 (심하게) 났다. (이하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갈수록 상징과 은유가 많아지기 시작하더니 '박쥐'에 이르러서는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상징과 은유를 사용하는 바람에 영화를 보면서 머리가 좀 복잡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계속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줘서 나름 행복하기도 하지만, 뇌리에 부유하는 수 많은 생각들, 단어들, 말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갈증을 느끼는 바람에 약간은 탈진의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상현(송강호)과 태주(김옥빈)는 고아(孤兒)고 강우(신하균)는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라여사(김해숙)는 자식에 대한 끔찍한 사랑 혹은 소유욕이 있지만 술에 찌든 알콜중독자며, 승대(송영창)은 퇴직한 꼰대 형사고, 영두(오달수)와 이블린(메르세데스 카브랄)은 국제결혼한 부부다. 상현의 부모와 같은 노신부(박인환)은 장님인데다 걷지도 못한다. 이 외에도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가 '정상'인 사람들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가 현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껍데기를 살짝만 걷어내고 그들의 캐릭터를 조금만 과장하면 영화 속 인물들보다 더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면서 영화 속 캐릭터들을 반사적으로 현실에 투영하려고 버둥대는 내가 보였다.

상현과 태주가 가장 갈증(Thirst)을 느꼈을 것 같다고 생각한 건 단지 그들이 뱀파이어가 되어서가 아니다. 뱀파이어가 되더라도 '톰 크루즈'나 '브래드 피트'와 같은 뱀파이어도 있고 '웨슬리 스나입스'나 '게리 올드만'과 같은 뱀파이어도 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배우들이 각각의 특징있는 뱀파이어로 분해 뭇 여성들 혹은 남성들의 목덜미를 물며 빨간 선혈(鮮血)을 섭취해 왔었다. 그런데 상현과 태주는 그들보다 더 갈증을 느꼈고 그들과 비교해 더 원초적이고 본능적으로 행동했다. 영화 전편에서 상현과 태주가 섭취한 피의 양은 여태 소개되었던 뱀파이어 영화 속에서 섭취한 피의 양을 훌쩍 넘어서는 듯 하다. 게다가 너무나 맛있게 '쪽쪽' 빨아대며 먹는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갈증나게 만들었을까. 게다가 그들이 피를 빠는 모습은 흡사 갓 태어난 아이가 엄마의 젖을 빠는 것처럼 보인다. 그 행위는 그 자체로 순결하고 고귀할 뿐이다.

왜 신부였던 상현이 뱀파이어가 되었을까. 상현은 왜 태주를 뱀파이어로 다시 태어나게 해놓고 죽게 만들었을까. 강우의 정신분열(처럼 위장한 듯한 느낌)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 걸까. 노신부는 평생을 수도사의 길을 걷고도 단지 눈을 뜨고 일출을, 석양을 보고 싶어 뱀파이어가 되려고 했던 것일까. 승대는 태주를 한 번도 건드리지 않았을까. 영두와 태주의 섹스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끝까지 살아남은 라여사는 왜 반신불수가 되어 상현과 태주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나. 너무나 많은 상징이 보여 힘겹다고 투덜 댈 즈음 오히려 내 자신이 상징을 덧붙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곰곰히 생각해 봐야겠다만, 오히려 쉬울 수도 있겠다 싶다. '갈증'과 '구원', '넘치는 갈증'과 '비틀린 구원'

상현의 고뇌가 가장 극에 다달았을 때 병원 앞에서 텐트를 치고 상현의 은총을 기다리던 호각처녀(황우슬혜)를 강간하려 했던 건 이해가 되더라. 그들을 죽여줄까...라고 생각하던 내 예측을 깨고 가볍게 '강간' 포즈 한 번으로 그들이 상현에게 걸었던 모든 기대와 소망들을 한 줌의 잿더미로 만드는 것이란... 그러니 보여줄 거 다 보여줬어야 했을 거다. 대단했다. 근데 태주가 첫 경험이었던 상현은 어쩌면 그렇게 '섹스'가 가진 긍정의 힘과 부정적 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일까.

등장했던 배우들의 캐릭터가 모두가 강해 힘들이 서로 충돌되는 게 느껴질 정도로 팽팽했다...고 기억한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는 감독 스스로가 만든 틀을 최대한 드러내도록 하면서 그 안에 캐릭터들을 가두고 캐릭터들이 그 틀에 압사당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도록 만드는 것...같다.
반면에 봉준호 감독은 그 누구못지 않게 틀을 견고하게 짜고 있지만 최대한 일상(日常) 속에 감추어 두고 캐릭터들의 잠재의식을 건드려 튀어나오게 한 후 자신의 틀에 맞추도록 하는 것....같다.
'박쥐'도 재밌게 봤지만 그래서 '마더'도 기대하고 있다.

영화의 촬영이나 편집이 꽤 좋다고 기억된다. 음악도. 배경과 미술은 '친절한 금자씨'에서 화려함의 정점을 찍었다면 '박쥐'부터는 '간결함'의 정점으로 향하고 있는 듯 하다. 사운드도 절제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조명이 좀 독특하다고 느껴졌는데 잘 모르겠다.

박찬욱의 승리? 혹은 김옥빈의 투쟁?


'김옥빈의 발견'이라고 할 만하다. 귀엽고 섹시하고 퇴폐적이고 광년이 같고 무섭고 지랄맞고 보호본능 자극하는... 특히 피를 묻히고 눈동자 초점을 살짝 놓은 후 예쁘게 웃으며 이쁜 척 할 때 가장 예쁘게 보였다.
'송강호의 정체'라고 할 만 하다. 한 거 또하고 본 거 또 보고. 나아진 건 o|o(불사파)를 과감히 '드러냈다'는 것.
신하균은 그런 반 미친상태의 연기를 너무 잘한다. 그가 가진 눈빛이 그렇고 마스크가 그렇다.
김해숙, 박인환, 송영창, 오달수는 딱 그들의 장점을 잘 표현했다.
황우슬혜가 송강호의 바지가랑이를 잡을 때 순간 '미스 홍당무'에서 러시아어로 '라이터'를 부르짖던 얼굴이 오버랩되어서 혼자 웃었다.

처음에 나오던 간호사 최희진. 마스크가 너무 깨끗하던데... 박찬욱 감독이 밀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카메라에 아주 잘 잡혀있더라. '박쥐' 속 그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어서 옛날 사진으로 대체.



'박쥐'가 불쾌하다거나 지루했다거나 어쨌다거나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재미있었다'. 코믹한 요소도 많다면 많은 것이다. 뱀파이어들이 웃기고 귀여운 장면들이 한 두군데가 아니다. 게다가 도로에서 승용차를 향해 달려가는 김옥빈의 모습과 송강호를 뒤에서 잡아채던 신하균의 모습이 제대로 '무서웠다'. 여러모로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라 생각한다. 두 번 보라고 하면 '쩝쩝, 후루룩 거리는 장면들' 때문에 조금은 지루해할 수도 있겠지만.

** 추가
많은 사람들이 쓴 글에는 상현이 500명 중에 살아 돌아 온 사람이라고 적는데 내 기억에는 노신부가 '50명 중에 살아 돌아 온 사람'이라고  말을 한 후 병원 밖에서 기다리면 환자들과 라여사가 '500명 중에 살아 돌아 온 사람'이라고 말을 한 것 같은데... 그래서 어떤 상황은 부풀려지게 마련이고 그 부풀려진 것으로 인해 사람들의 희망과 기대가 부풀려지고 왜곡되는 게 아닌가 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노신부가 한 이야기를 잘못들었던 것일까...


[mov. or ani.] - 박쥐(Thirst) 초간단 줄거리

박쥐(Thirst) 초간단 줄거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성부와 성자와...중얼중얼중얼....후루릅후루릅쩝쩝....아..아..아앙아..아....후르릅..쩝쩝...쪽쪽..쪽..쪽쪽쪽쪽..쪽쪽...쪽..후 릅...후르릅..후르릅..쩝쩝...쪽쪽..쪽..쪽쪽쪽쪽..쪽쪽...쪽..후 릅...후르릅....아..아아아..아앙..아..앙..아아아..아앙...후루릅후루릅..쩝쩝...쪽쪽쪽쪽..쪽쪽...쩝쩝...후르릅후르릅...후루릅..쩝쩝...쪽쪽쪽쪽..쪽쪽...쩝쩝...후르릅후르릅....아아아 아...아앙..아아..아흥....쩝쩝쩝...후르릅후르릅쩝쩝...쪽쪽쪽..쪽쪽..후르릅쪽...쩝쩝...흐흐흑..흐흑. (끝)




김옥빈: "실은......"





[mov. or ani.] - 박쥐(Thirst), 채워지지 않는 갈증

2009년 5월 1일 금요일

김상곤 경기교육감, 조승수 의원의 의미있는 승리를 축하합니다.

김상곤 경기교육감을 비롯해 조승수 의원의 원내 입성까지 작지만 의미있는 '승리'들을 지켜봤다.

진보세력의 승리, 그것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승리를 보며 앞으로 계속 진보세력, 진보인사들이 더 많이 활약해주길 바라는 마음과 더불어 2MB와 한나라당에 대한 거센 반발심에 의해 얻게 된 승리가 아닌지 조금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전자가 가지는 의미는 무척 크다. '세력'이 되기 위해서 한 걸음, 한 사람이 소중하기 때문에 조금씩 범위를 넓혀간다는 의미로 본다면 김상곤, 조승수 두 사람이 가지는 의미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김상곤이던 조승수던 간에 진보세력들이 주장하는 정책의 방향, 미래비전을 보며 공감하고 뜻을 같이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면 세력을 키워가는 데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후자가 가지는 걱정스러움 역시 크기는 작지가 않다. 만약 2MB와 한나라당에 대한 반발심에 의해 반사이익을 얻은 것이라면 이들의 의미는 오래지 않아 바로 퇴색될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의 이동이야 숨을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것일테지지만 그 이동이 '반발력'에 의한 것이라면 진정성을 확보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남이 못하기 때문에 내가 얻게 되는 '기회'는 당연한 것이지만 내가 실력이 없는 데도 그걸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내가 얻은 기회는 기회가 아니다. 물론 김상곤 경기교육감과 조승수 의원은 실력이 있는 사람들이고 당연한 승리를 얻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기회를 노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그렇지 못한 이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상대방 비방에 열을 올리고 실질 정책보다 말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다. 반발력에 얻게 되는 기회를 경계하고 반발심에 기대는 선동을 경계해야 한다.

(늦었지만) 김상곤, 조승수 두 사람의 값진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하고 응원한다.
또한 지속적인 진보세력, 진보인사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