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26일 금요일

이소룡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유명한 스타들 중 우리들 기억 속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겨진 이들은 아마 최고의 젊음을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나 역사 속 인물이 된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팬이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 할지라도 여전히 프레임 안에서 최고의 미소와 최고의 자세를 취하며 젊음을 불태우고 있다. 또한 그들은 젊은 날 먼저 세상을 떠남으로 인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젊음을 간직한 채 팬들의 영원한 우상으로 남아있다. 물론 역사 속 인물 중에 가장 끔찍한 모습으로 기억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또한 그들이 늙지 않는 역사 속 인물이 되어 생생하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릴린 먼로, 이소룡, 히틀러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들의 늙은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면서도 가끔 그들이 여태까지 살아있다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기도 하다. 누구는 이소룡을, 누구는 말론 브란도를 3D 캐릭터로 스크린에 불러내겠다 하고 터미네이터4에서는 (아직은 살아있는) 아놀드 슈와제네거의 젊은 모습을 스크린으로 재현해 냈다. 늙은 모습은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일까. 젊은 상태로 멈춘 배우들을 나이 든 상태로 재현하는 경우보다 젊음을 유지한 그 모습대로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가 많은 걸 보면...

Andrzej Dragan이란 작가가 이들을 사진으로 불러냈다. 주름살이 선명하게 보이고 팽팽했던 살들은 늘어져 보이지만 그들이 가진 매력은 여전히 생생한 듯 하다.(물론 히틀러를 제외하고...) 히틀러는 딱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군부세력의 전형적인 모습같아서 끔찍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참 재밌는 시도같다.
 

출처: andrzejdragan.com

2009년 6월 23일 화요일

잠시 자리를 비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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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에 눈이 부시도록 화창한 날에 모든 복잡한 심경과 단촐했던 일상을 비켜선 후 한국을 잠시 떠난다. 오랫만에 찾은 인천공항은 의외로 한산하고 여유롭다. 한국을 떠나는 사람과 한국을 찾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이 곳이 오늘은 유난히 한가로움을 느낄만큼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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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워 잠시 비워두게 될 공간을 정리하고 청소하면서 과거 '떠나는 자의 태도'에 대해 견지하려고 했던 파란 젊음을 가졌던 내가 떠올랐다. 세상을 오가며 최소한 내 두 손에 쥘 만큼의 짐만 챙기겠노라 다짐했던 치기어린 생각은 점점 흐릿해졌지만 흐릿한 만큼 삶에 대한 욕심도 꽤 사라져 세속에서 말하는 '내 것'이라는 걸 맘 편히 챙겨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후회보다는 쓸쓸함에 가깝겠지만 그건 내 개인적인 삶에 대한 열정부족임을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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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착신전환을 신청하기 위해 연락했던 고객센터의 여직원은 정말 열심히 설명하며 최선을 다한다.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 진심을 다해 고마움을 표현하면 충분히 즐거운 그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사실 비슷한 계급의 사람들끼리의 충돌과 의견대립이 생기는 건 대체적으로 상위계급에 의해서 조종되고 형성되어지는 게 많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누군가와 부딪힐 때마다 그리 열내며 '이겨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슬픈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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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착신전환되어 혹여 연락이 닿지 않으면 문자로라도 소식을 남겨주길... 문자는 받을 수 없으니 전화로만 연락을 해주시길...;;;;  (착신전환은 통화가 700원인데 문자를 포함하면 1900원/월 이란다. 게다가 전화정지는 시키지도 못하고 기본료는 고스란히 지불해야 한다. 시스템을 장악한 자들이 돈을 버는 방식은 참 쉽다. 물론 공공의 규제나 관리감독이 부실한 상태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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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F의 해외로밍 서비스는 일일 대여료가 2,000원이다. 그럼, 한달을 사용하면 60,000원이란 소린데 너무 비싼 듯. 게다가 받는 요금, 거는 요금 역시 몇 천원씩 한다. 본인이 가진 show폰(3G폰)을 가지고 나가면 대여료도 없는데 너무 박하게 서비스 제공을 하는 건 아닌가 싶다.

2009년 6월 21일 일요일

기괴한 놀이

진중권 씨가 쓴 책(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에서 본 내용 중 독일에서 있었다던 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한국에서 종종 하는 놀이, "손을 잡고 오른쪽으로 빙빙 돌아라, 손을 잡고 왼쪽으로 빙빙 돌아라..(중략) 두(혹은 세, 네)사람!!" 노래하다가 이렇게 외치면 모두 우르르 사람 수에 맞춰 제자리에 앉는 그런 놀이... 아시죠? 독일에서 한국인들이 모여 그 놀이를 했는데 독일에서 태어나고 독일에서 교육받은 한국 꼬마 아이들은 처음에 (놀이의 정체를 모르고) 즐겁게 따라하다가 마지막 세 사람이 남은 상황에서 사회자가 "두 사람!"을 외치자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울먹이더라는 겁니다. 왜 그러냐고 묻자 같은 친구인데 어떻게 두 사람만 끌어안고 한 사람을 외면할 수 있겠냐고 대답하더랍니다. 처음엔 놀이인 줄 알았던 아이들이 마지막이 되서야 그 놀이의 기괴함을, 잔인함을 알았던 것이지요.

한국에선 늘 이렇게 패를 지어 몰려다니며 왕따 시키고 자신들이 잇속만 챙기도록 하는 교육을 끊임없이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사실 어릴 적 나도 꽤 했던, 지켜봤던 놀이 중 하나인데 어린 마음에 마지막까지 남아 친구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오면 마음이 그닥 편치 않았던 기억이 있다. 누구를 선택하더라도 내 마음 속에 불편함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었다.)


- 벗에게 썼던 댓글 중.(약간의 수정, 첨가)

참 '나'와 거짓 '나'

글을 읽다 한 군데서 시선이 멈춰졌고 생각을 좀 해봤어. 바로 이 부분. "지구 반대편 한 쪽에선 굶어죽어가고 있는데, 그 사람들의 아픔을 온 몸으로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런 예를 들면 이게 쉽게 전달이 안되는 경우도 많더라구. 비교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와 문제를 증명하고 해결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불가에서도 '네가 있느니 내가 있고 내가 있으니 네가 있다'고 한 말 처럼) 체득하는 게 쉽진 않지.(나 역시도.)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봤어. 가령, 먹는 문제를 비롯한 의식주에 관한 모든 문제들이 역시 남들과 비교를 하기 때문에 점점 과도한 형태로 변질되는 건 아닌가 하고. 다시 말해, 문제의 발단과 해결은 역시 일단 '나'로부터란 거지. 굳이 '남'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내가 먹는 게, 입는 게, 사는 게 오롯한 나 한 개인의 육체와 정신만을 두고 볼 때 적정한 선을 지키고 있는지. 굳이 미식(美食)을 하는 것 만이 고급생활이라고 생각하고 비싼 물건을 걸쳐야 내 품위가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생각하는 것. 물론 네가 말한 것에 반대하는 뜻에서 말하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마렴. 그저, 너처럼 전체를 관망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건강한 삶, 소박하지만 품위있고 알찬 삶을 살도록 이야기 해준다면 그들이 소비하는 것도 차츰 정상적인-본디 자리를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럴 경우 그들이 의식하진 못하더라도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삶을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뭐, 그렇게 생각을 해본거야.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 게 꼭 미국 뉴요커 생활을 흉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반박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 그들이 말하는 스타벅스는 커피 한 잔에 문화를 향유할 수 있고 자유로운 개인시간을 사용할 수 있고 오래 앉아 있어도 아무도 터치하지 않는다는 편안함을 이야기 해. 뭐, 거기에 대고 스타벅스를 가는 걸 제국주의 커피 마신다며 무작정 비난할 수는 없잖아? 그렇다면 그들은 규모는 작지만 분위기도 좋고 2-3시간 정도 앉아서 책을 읽어도 되는 커피숍은 왜 가지 않는 것일까. 도서관 같은 곳은 왜 가지 않는 것일까. 사실 피치못한 이유가 있어 스타벅스를 가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스스로의 마음 한 구석에 어떤 '묘(妙)한 마음'이 들어서 있기 때문인 건 아닐까. 도대체 그 '묘한 마음'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 '나'를 잃어버린 상태에서는 중심을 잃게 되고 판단이 흐려지며 고집스러워지게 마련이고 종종 '남'을 따라하게 마련이지. 그 '남'은 늘 나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들이야. 결코 나보다 처지가 낮은 사람들을 따라하진 않으려는 게 보편적 '(거짓)나'라고 볼 수 있겠지. 나보다 위에 있다는 것, 나보다 낮은 곳에 있다는 걸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게 하는 '나'는 어떤 '나'일가. 음...그걸 찾아내야겠다.


2006/08/14 불매운동과 관련한 이야기 중에서.(이모티콘 삭제 및 글 내용 등 약간의 수정, 첨가)

삼라만상의 의지

왜 태어났는지 궁금했던 때가 있었고,
왜 살아야 하는지 궁금했던 때가 있었다.

물론 다른 수 많은 자문(自問)들, 문제들 역시
여전히 '진리(眞理)'의 발끝자락도 다가서지 못했지만
위 두 가지 문제는 어떻게 해도 풀리지가 않는다.
그래서 그냥 살아보기로 했다.

태어난 게 내 의지가 아닌
우주 삼라만상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나 죽어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내 의지가 개입될 여지는 무척 적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살아가며 고민하고 풀어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쉽지만은 않겠지만,
천상병 시인처럼 이 풍진 세상을 소풍처럼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다만,
아직 내 마음은 여전히 빈곤하고
사고의 한계는 넓게 장막을 치고 있는 것 같다.

뭐, 말은 거창하게 풀어놓은 듯 하지만 역시 빈약한 나의 삶이라...

20대 중반의 어느 날,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수행이 부족한 탓인지 능력이 부족한 탓인지
그 느낌들을 다시 잡아내기가 어려워졌다.

이렇게 나이만 먹어가는 건 아닌지... 쩝...



- 벗에게 했던 이야기를 옮겨와 기록함(약간의 수정)

두려움, 삶에 대한 몇 가지 생각.

두려움, 그 모든 게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은 건 매 한가지다. 듀스포인트의 지리멸렬 끝에 찾아오는 건 두려움.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백척간두 진일보"하라고 했건만 그 "일보(一步)"를 내딛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걸 알았을 때 내 삶은 지리멸렬해지고 마는 건 아닐까 싶었다.

늘 생각했던 게 인생이란 저울에서 내 마음과 판단이 어느 한쪽으로 단 1g만 기울어도 기울어진 쪽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세월의 무게를 받아들일 수록 한 쪽을 선택하는 방법보단 "병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쪽으로 변해가는 내 자신을 보면 인생이 예전만큼 박진감있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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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 국민이 된 것이 내 의지 때문이 아니라 태어남과 동시에 이루어진 (내 자신의 선택이 없다는 점에서) 강제적인 것이라면 이 나라는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삶의 가치를 보장해줘야 마땅하다고 투덜댄다. 수 많은 사람들의 에너지가 현실의 (말도 안되는, 상식적이지 못해) 불합리한 상황을 개선하는 데 낭비되어야 하는 것도 슬픈 일이다. 그 모든 걸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역시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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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현실적인 타협이라고는 하지만 자격시험을 통과해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것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격에 대한 문제를 개선해보려하는 건 물리적으로 먼 거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타협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게 맞을 듯.

난 그런 기회가 몇 번 있었음에도 끝끝내 거부하고 버티다 나이를 먹어가는 즈음에 살짝 후회도 한다. 사회의 달콤한 유혹을 거부했던, 하지만 내 의지를 따르려 했던 당시의 내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그 방법이 거칠었음에 아쉽고 다른 많은 방법들을 찾아보지 못했던 게으름이 후회스럽다는 거다. 기회라는 건 한 번 지나고 나면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기 때문에 그 기회가 자신의 것인지 아닌지를 좀 더 적극적으로 열정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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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에 굴러보지 않고도 진흙 속에 있으면 옷이 더럽혀질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엔 그 진흙 속에서 굴러봐야만 또 다른 대안들을 찾아낼 수도 있다는 것이니까. 보수화가 되지 않고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서도 삶 속에서 당당하게 늙어가는 사람들이 가장 부럽지만, 그건 단지 그들의 결과만 보고 있는 것 뿐이지. 그들이 살아왔을 지난 날을 조금이나마 역지사지 해보면 지금 나는 무척이나 게으른 삶을 살고 있다고 밖엔 말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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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가 우수하다 우수하지 않다는 것은 단지 경쟁률, 비교법, 수치법 등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우수하다는 것은 삶 속에서, 진행형 속에서 빛을 발할 뿐이다. 우수하다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도 무척 중요한 것이고. 삶이 그런 것 아니겠는가, 기준에 따라서 비참해지기도 하고 행복해지기도 하는...



- 지난 날 벗과 나눴던 대화를 옮겨 와 기록해 둔다.(약간의 수정이 있음)

2009년 6월 15일 월요일

어르신들의 군복

  • 9시 뉴스를 보다 군복과 선글라스를 착용한 사람들이 모여 '김대중 타도'를 외치고 '노무현 분향소 시민들'과 싸움을 벌인다. 그들의 폭력적 행위에 대해 경찰은 '자신해산을 한다고 했다'면서 수수방관한다. 대놓고 편들기를 보는 건 무척 불편하다.2009-06-15 21:37:43

  • 부족한 '파워'를 보충하는 기능의 군복을 입은 그들이 행하는 폭력은 단지 물리적 폭력 뿐만이 아니다. '군복'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상징성을 생각해본다면 정신적, 심리적 폭력도 함께 가하는 것이다. '군국주의 망령'이 어슬렁 거리는 기분이다.2009-06-15 21:43:51

이 글은 자유인님의 2009년 6월 15일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2009년 6월 13일 토요일

마더(Mother) - 엄마 있어?

영화에 대한 평보다는 '마더'에 보며 떠올랐던 여러 생각들을 정리해두고자 하는 차원에서 기록.

영화 말미, 크레딧 올라가기 전 문득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들'과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이 떠올랐다. 한국영화 중 서스펜스와 스릴러의 정점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서스펜스 [suspense]   [명사] 영화, 드라마, 소설 따위에서, 줄거리의 전개가 관객이나 독자에게 주는 불안감과 긴박감. ‘긴장감’, ‘박진감’으로 순화. 
스릴러 [thriller] [명사] 관객이나 독자에게 공포감이나 흥취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만든 연극·영화나 소설 따위.


영화 '마더(Mother)'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바보 아들과 미친 엄마의 살인의 추억' 정도가 되려나.


영화 속 김혜자는 시종일관 불안한 눈동자를 굴리며 아들을 스토킹(하는 듯) 하고 아들에게 그녀의 눈동자 초점이 머무는 순간엔 세상의 그 무엇도 그녀에게 접근할 수가 없다.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 바보 아들을 지켜보며 자신을 온전히 내던진다. 그건 과거에 그녀가 아들에게 싸구려 농약을 마시게 해 바보로 만든 것에 대한 속죄일 수도 있고 오랜 시간 지내오며 의식/무의식을 지배해버린 습관같은 것일 수도 있다. 미치진 않았지만 미칠 수 밖에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제정신을 가지고 살기엔 쉽지 않다.

진태(진구)의 씬이 적어 아쉽기도 하고(연기가 괜찮다고 생각함) 궁금한 점도 더욱 증폭이 된다. 진태는 혜자(김혜자)와 어떤 관계였을까. 모종의 비정상적인 관계가 있을 것 같은데... 친아들은 아닌 아들? 아님, 성적인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경찰서에서 나와 웃옷을 벗고 도준(원빈)의 방에 앉아있는 모양새가 너무 자연스럽던데... 보통은 친구 어머니에게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형사처럼 '어머님(또는 어머니)'라고 부른다. 설명이 부족해 가설만 많아질 뿐이지만 설명이 없어서 긴장감은 더욱 팽팽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진태(진구)는 도준(원빈)을 이용해 먹기만 하는 듯 한데 그게 진태의 도준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 엄마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에 '어머니'가 아닌 '엄마'라는 호칭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도준이 잡혀들어간 후 혜자는 진태에게 의지하는데 그래서 더더욱 잘 도와주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세팍타크로 형사의 연기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세팍타크로'라는 운동경기를 떠올려 낸 봉준호는 참 재치있다. 언어가 주는 강한 된발음과 형사의 폭력은 아주 멋드러지게 어울렸고 송새벽은 그에 맞는 최적의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사투리가 너무 자연스러웠는데 추측이 맞다면 전라북도 사투리인 듯 하다. 전라도 사투리와 충청도 사투리가 교묘하게 섞인 듯한 사투리. 크레딧을 보니 촬영장소 중에 전라북도 익산이 있던데 그쪽 사투리를 차용하지 않았을까.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공간'이 가지는 의미가 특히 중요하게 느껴지곤 하는데 '마더'에서도 역시 공간이 주는 느낌은 다른 영화들에 비해 무척 독특하면서도 일상적이다. 장소선택(헌팅)을 정말 잘하는 것 같다. '마더'의 공간은 모든 주민들이 서로를 알고 있는 거대한 공동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모두는 각각의 사연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김혜자 주변의 인물들은 김혜자가 아들에게 농약을 먹여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알면서도 그에 대해 다른 시선을 보내지 않는 건 그 행위가 나름 타당한 것이었거나 그들이 김혜자와의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거나 일 것이다. 게다가 그와는 다르지만 비슷한, 비슷하면서도 다른 또 하나의 진실, 비밀이 된 진실 쌀떡소녀 역시 공동체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듯 싶다. 그들이 사는 동네는 마치 버려진 공동체같았다. 치외법권인 듯, 혹은 나름 체제를 갖추고 있는... 글을 쓰다보니 윤태호의 '이끼'가 떠오른다. '마더'를 보면 '이끼'는 강우석보단 봉준호가 적격일 것 같다.

영화는 박찬욱의 박쥐모다 더 많은 실마리를 풀어놓고 생각하게 하지만 그에 비해 결말은 공허하게 느껴졌다. 결말이 공허했다는 것은 영화가 나에게 던져주는 실마리에 비해 공허했다는 뜻이지 결말은 무척 아름답고 한국적이고 '엄마'적이고 슬펐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지극히 한국적이란 느낌을 갖게 하는데 말투(사투리)를 포함해 지역적 공간, 인물 간의 관계, 영화 속의 상징 등이 대체적으로 '지극히' 한국적이다. 특히 관광버스 씬은 그야말로 봉준호스러운 한국냄새가 물씬 나는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소재가 보편적이면 외국인들도 쉽게 볼 수 있지만 소재나 다뤄지는 내용, 디테일들이 보편적이면서도 국지적(한국적)이면 외국인들은 쉽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영화가 점점 진화하고 발전하면 장이모우처럼 또는 이안처럼 세계적인 거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봉준호가 '붉은 수수밭'을 찍거나 '브로크백 마운틴'을 충분히 찍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물론 오히려 그런 장르보다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나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같은 쪽이 더 가까울 것 같긴 하지만.

갈수록 영화제 감독이 되어가는 박찬욱에 비해 봉준호는 조금 더 서둘러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각각의 장단점들이 있겠지만 중요한 건 박찬욱이나 봉준호같은 감독이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흥분되고 그들의 영화가 기다려진다고나 할까. 어떤 감독의 영화를 기다린다는 것, 쉽지 않다. 그들이 촬영할 영화의 제목만 발표해도 그 때부터 가슴 설레며 기다려지지 않는가. 별개의 이야기지만 개인적인 또다른 취향(무술, 액션)으로 인해 류승완 감독도 기다리는 감독이긴 하지만 류승완 감독은 성룡이나 이연걸, 견자단과 같은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다. 물론 그의 취향이 아닐 수도 있지만 '아라한 장풍 대작전'에서 류승범의 고깃집 액션을 생각해보면 그의 재능이 사장되는 건 무척 아쉬운 일이다.

영화 '마더'는 절제된 미장센, 롱샷이 종종 등장한다. 한 마을을 관망하는 듯 하다가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엄마와 등장인물들의 얼굴 클로즈업(또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인해 영화의 원금감은 급속하게 롤러코스터를 타며 심장박동이 그에 따라 빨라지다가 느려지기를 반복하면서 결코 숨을 쉽게 쉬게 놔두지 않는다. 그로 인해 영화의 팽팽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잇다.

또한 '마더'는 사운드와 음악의 승리. 특히 사운드의 절정. 사운드가 영화의 분위기를 50% 이상 잡아준다. 특히 손작두의 소리를 포함해 사람들 때리고 맞는 소리나 폐관된 놀이공원의 쇳소리, 고물상 불타는 소리, 빗소리, 김혜자의 숨소리 등 소리들은 깔끔하면서도 때론 둔탁하게 때론 날카롭게 각 씬에 맞는 최적의 볼륨과 함께 최상의 선택을 들려준다. 한국영화를 보면서 사운드가 이토록 깔끔하면서도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영화는 별로 없지 않았나 싶다. 박찬욱의 '박쥐'에서 흡혈하는 소리를 억지로 과장되게 크게 했다면 몰라도 보는 내내 흡혈하는 소리가 감정을 돋아나게도 했지만 방해하기도 했고 불편하기도 했지만 코믹하기도 했다. 의도한 거라면 '최고' 아니면 '실패'. '마더'는 영상과 사운드가 아주 자잘한 톱니를 물고 돌아가듯 최적의 하모니를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영화 끝부분에 혜자가 도준 대신 범인으로 지목되어 잡혀들어온 다운증후군 남자아이에게 '엄마 있어?'라고 물으며 우는 장면이 있는데 혜자가 허벅지에 침을 놓는 장면과 더불어 이 장면은 마치 모든 걸 설명하는 듯 하다. 특히 혜자가 허벅지에 침을 놓는 장면은 슬프고 아름답고 씁쓸한 장면으로 한국의 여러 정치사회적 상황을 간결한 은유로 표현하고 있지 않나 싶었다. 김혜자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허벅지를 걷어올리는 장면에서 섹시함을 드러낸다. 놀랍다. 이 외에도 약간은 페티쉬같은 전미선의 엉덩이(실제라면)도 무척 섹시하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행'에서 카메라가 신민아의 목덜미를 잠깐 훑고 지나가는 장면도 마찬가지로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섹시함,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그 잠깐의 찰나를 아주 강렬하게 보여주는 장면들이 아니었나 싶다.

도준이 버스 터미널에서 침구함을 건넬 때 도준을 죽이려 했던 혜자와 도준을 살리려 했던 혜자의 모습과 5살 어린 시절을 기억해내버린 도준의 다 잊었다는 듯한 무심한 표정이 교차하면서 그들의 관계가 갑자가 주변인물들로 확장되더라. 그 어색한 표정들과 몸짓들... 모든 게 다 무너져 내리고 붕괴될 법한 지점에서 김혜자는 나쁜 기억을 잊게 해주는 신비의 경혈자리가 있는 허벅지에 스스로 침을 놓으며 현실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그녀의 춤이 왠지 어색하듯이 기억은 잊혀지지 않고 스스로 감출 뿐이며 자연스럽게 현실로 복귀하려고 해도 이미 생채기 난 상흔은 더 이상 아프진 않지만 가끔 가려워지면서 기억을 끌어올려질 것이다. 다만, 나쁜 기억조차도 징그럽게 웃으면서 추억할 정도는 되겠지. 구치소 면회실에서 도준이 5살 때의 기억을 끄집어 냈을 때 발광하며 괴성을 지르던 김혜자가 아주 신기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어떻게 그 때 일을 기억하지?'라고 묻는 장면처럼...

김혜자의, 김혜자에 의한, 김혜자를 위한 영화 마더.
예고편에서 느껴졌던 김혜자의 광기가 오히려 영화 속에서는 많이 약해진 듯 해서 아쉬웠다. 김혜자의 광기가 초반에 다 발산해버려서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약해지는...느낌이었달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더'는 철저히 김혜자의 영화였다. 하지만 그녀의 영화였기에 영화가 가지는 한계 역시 김혜자의 것이었지 싶다. 봉준호가 아무리 디테일하게 설계를 해도 김혜자가 가진 아우라는 역시 쉽게 쳐내거나 컨트롤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어쩌면 봉준호의 장점과  김혜자의 장점이 만나 시너지를 일으킨 부분도 있지만 그 둘의 조합 때문에 (-)가 된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라고 추측...

영화를 보며 느꼈던 것 중에... 자식의 생사여탈권은 엄마에게 있다...는 것. 그건 대한민국만의 특별한 권한이며 자본주의가 심화되고 사회가 미성숙한 상태에서 머문 시간이 길어질 수록 더더욱 막강한 권력이 된다. 세상 엄마는 다 똑같다...라는 말에서 한국 엄마는 꽤 큰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모성(母性)과 '대한민국 엄마의 모성'은 비슷하지만 큰 간격을 두고 다르기도 하다. 자식을 품에서 놓을 수 없는 대한민국의 엄마들에겐 어떤 원죄가 있는 걸까. 엄마를 엄마 이상의 존재로 만들게 된 원인은 사회, 우리들에게 있지는 않나. 그런 엄마들이 생겨나게 된 것에 대해 대한민국은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

영화는 또 김혜자의 '살인의 추억'이라고 할 만 한데, 등장인물들만 봐도 그렇다.
물론 송강호(박두만)와 윤제문(형사, 제문)을 동급으로 보긴 어렵겠지만 지역 토박이 형사라는 것, 그리고 김뢰하(조용구)와 송새벽(세팍타크로 형사)는 옆에서 보조역할을 하며 폭력을 쓴다는 것, 김병순(반장 역)과 진태(진구)는 김상경(서태윤)과 신재호(송반장) 정도의 역할...(?) 게다가 전미선의 신체(알몸)노출 및 영화 속에서의 역할, 여중(고)생 살해사건, 사건 관련자는 바보-박노식(백광호)와 원빈(도준), 폐쇄적인 소도시, 밥 먹는 장면(봉준호가 꼭 넣는 장면), 단란주점, 일반주점, 논두렁, 동네버스, 여학생 살인사건, 현장검증, 비, 밤길, 외딴 집(고물상과 최후의 생존자), 치료 등등...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조금은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다만,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는 것과 밝혀지지 않는 차이....랄까?

봉준호 영화는 박찬욱 영화와 마찬가지로 보면서 머리나 가슴, 심장이 끊임없이 활동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나름 즐겁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영화에 대한 부분을 곱씹게 된다. 그 과정이 너무 무겁거나 힘들거나 지치게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천만 다행이다.

2009년 6월 11일 목요일

예나 지금이나 - 2009년 안에 1987년 있다.



정말 1987년과 2009년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고 하면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뛸 사람들도 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말 끔찍하리만큼 변함이 없다. 변함없다는 게 '덕담'으로 쓰이지 않을 경우엔 그야말로 저주를 퍼붓는 '악담'이 되는 것인데 변함없음은 '정체'며 근대화 된 사회에서 '정체'는 '퇴보'며 '죽음'이다.(그렇다고 모든 걸 발전논리로만 보면 안된다)

2009년에 1987년이 느껴지고 겹쳐 보이는 기시감(旣視感-데자뷰déjà vu). 단지 어떤 기억의 착각으로 인한 것이라면 괜찮으련만 오히려 더 명확해지고 또렷해지는 과거사의 부활이라니 뜨거운 날씨에 이보다 더한 악몽은 없을 듯 하다.

90년대 초반, 정태춘(과 박은옥)이 서정성이 가득한 주옥같은 노래들을 세상 밖으로 추방시키고 팬들의 가슴 속에만 묻어둔 채 두 눈 부릅뜨고 처음 불렀던 '아! 대한민국'. 심장이 벌떡이고 가슴이 찢길 것 같았던 이 노래를 10년 후에 다시 들었을 때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고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여전히 세상은 변함이 없음을 느낀다. 강산이 두 번 변할 시간 동안, 아니, 강산이 너댓 번은 더 변했을 시간 동안 대한민국의 정치와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나아진 게 없는 듯 하다. 얼마나 젠장맞을 세상인가.

정태춘의 다른 노래, '그대, 행복한가'를 들으면서 진정한 행복을 알게 될 날이 멀지 않을 거라 염원했고 믿었고 기다렸는데 약 20여 년이 흐르면서 점점 더 멀어져 버린 꿈이 된 듯 싶다. 햇살은 따갑게 내 미간을 누르고 아랫턱이 주저않을 만큼 꽉 다문 입은 좀체로 열기가 힘들어진다.

아! 대한민국
작사|작곡|노래: 정태춘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사랑과 순결이 넘쳐 흐르는 이 땅
새악시 하나 얻지 못해 농약을 마시는 참담한 농촌의 총각들은 말고
특급 호텔 로비에 득시글거리는 매춘 관광의 호사한 창녀들과 함께
우린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나
아 우리의 땅 아 우리의 나라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기름진 음식과 술이 넘치는 이 땅
최저임금도 받지 못해 싸우다가 쫓겨난 힘없는 공순이들은 말고
하룻밤 향락의 화대로 일천만원씩이나 뿌려대는 저 재벌의 아들과 함께
우린 모두 풍요롭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모두 만족하게 살고 있지 않나
아 대한민국 아 우리의 공화국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저들의 염려와 살뜰한 보살핌 아래
벌건 대낮에도 강도들에게 잔인하게 유린당하는 여자들은 말고
닭장차에 방패와 쇠몽둥이를 싣고 신출귀몰하는 우리의 백골단과 함께
우린 모두 안전하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모두 평화롭게 살고 있지 않나
아 우리의 땅 아 우리의 나라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양심과 정의가 넘쳐 흐르는 이 땅
식민 독재와 맞서 싸우다 감옥에 갔거나 어디론가 사라져간 사람들은 말고
하루 아침에 위대한 배신의 칼을 휘두르는 저 민주인사와 함께
우린 너무 착하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바보같이 살고 있지 않나
아 대한민국 아 우리의 공화국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거짓 민주 자유의 구호가 넘쳐흐르는 이 땅
고단한 민중의 역사 허리 잘려 찢겨진 상처로 아직도 우는데
군림하는 자들의 배 부른 노래와 피의 채찍 아래 마른 무릎을 꺾고
우린 너무도 질기게 참고 살아왔지 우린 너무 오래 참고 살아왔어
아 대한민국 아 저들의 공화국
아 대한민국 아 대한민국


그대, 행복한가
작사|작곡|노래: 정태춘

그대 행복한가 스포츠 신문의 뉴스를 보며 시국을 논하시는 그대, 그대
그래 거기에도 어린이 유괴 살해 기사는 있지 있어
그대 행복한가 보수 일간지 사설을 보며 정치적으로 고무 받으시는 그대, 그대
그래 거기에도 점심 굶는 어린애들 얘기는 있지 있어
그대 알고 있나 정말 알고 있나 우리 중 누가 그 애들을 굶기고 죽이는지
정말 알고 있나 알고 있나

그대 행복한가 시장 개방 자유 경제 수입 식품에 입맛 돋으시는 그대 그대
그래 거기에도 칼로리와 땀 냄새는 있지 있어
그대 행복한가 주한 미군 기동 훈련과 핵무기에 고무받으시는 그대 그대
그래 거기에도 평화와 인도주의의 구호는 있지 있구 말구
그대 알고 있나 정말 알고 있나 우리 중 누가 그것들의 희생양이며 표적인지
정말 알고 있나 알고 있나

그대 행복한가 거듭나는 공화국마다 그 새 깃발을 쫓아 행진하시는 그대 그대
그래 거기에도 민족과 역사의 거창한 개념은 있지, 있어
그대 행복한가 막강한 공권력과 군사력에 고무 받으시는 그대 그대
그래 거기에도 보호하고 지키려는 그 무엇은 있지 그 무엇이
그대 알고 있나 정말 알고 있나 우리 중 누가 그것들의 대상이며 주인인지
정말 알고 있나 알고 있나

그대 알고 있나 끊임없이 묶여 끌려가는 사람들을 매도하시는 그대 그대
그래 거기에 그들을 가두는 법전과 감옥이 있지 법전과 감옥이
그대 알고 있나 노동하는 부모 밑에 노동자로 또 태어나는 저 아이들 아이들
그래 저들은 결국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없다는 것을
그러나 알고 있나 정말 알고 있나 그들의 숫자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정말 알고 있나 알고 있나 그대 알고 있나 정말 알고 있나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을
그대 알고 있나 정말 알고 있나 그대 알고 있나 정말 알고 있나
그들의 분노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을

최규석의 100도씨
[mov. or ani.] - 6월항쟁 애니메이션 - 잘못을 바로 잡는 힘


2009년 6월 3일 수요일

시청야구장과 광장공포증


텅빈 시청의 고운 잔디와 둘러쌓인 차벽을 보고 있노라니 야구장이 생각난다.
조만간에 야구장 개장을 선언하지는 않을까 몰라. 돔까지 씌워서 돔구장으로 개장해면 더 좋고.-_-;
동대문 야구장을 밀어버린 이유가 시청야구장을 만들려고 했던 것인지도...-_-;;;

광장공포증(Agoraphobia - 廣): 넓은 장소에 혼자 있을 때 까닭없이 두려움을 느끼는 증상.

한국에서는 의학적 증상과는 별개로 '광장'을 두려워하는 증상, 또는 '아고라(Agora)'를 두려워하는 증상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대표적으로 이명박, 오세훈이 광장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모든 광장을 폐쇄하는 중이다. 불안한 심리를 일시적으로 안정시키기 위해 폐쇄된 광장에 전경과 경찰을 채워 넣고있다. 증상이 점점 심해지면서 광장이 아닌 공간, 즉 사람이 두엇 정도 서 있을 공간만 눈에 띄어도 증세가 악화되는 바람에 공간이란 공간은 일단 막아놓고 있다. 물리적 광장을 폐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비현실적 공간-Agora 등의 네트-도 폐쇄하는데 적극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

정신분석의 이론을 따르는 정신과 의사들은 광장공포증의 기본증상은 불안이라고 보고, 이 불안을 다루는 이차적인 방어기제로 (자기과오의) 회피, (시민과의) 대치, (70년대 개발독재) 상징화 등이 사용되어 어떤 중성적 대상(촛불)으로 그 두려움이 옮겨져서 공포증이 형성된다고 하였다.



쩝....;;;


2009년 6월 2일 화요일

2MB, 최근 3연타석 홈런...

1타, 노무현 前대통령 영결식 날 용산 강제철거

2타, 역시 영결식 날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발행 사건판결 무죄 선고 - 신영철 대법관 멋진 주루 플레이

3타, 천신일 회장 구속영장 기각
뉴스 속보로 소식을 접하는 데 쓸개즙 머금은 웃음이 픽-하고 나왔다.

그야말로 화려한 성적이라 할 수 있겠다.
뭐, 그 전부터 BBK로 시작한 화려한 초반성적을 고려하면 늘 평균이상의 성적을 유지하는구나.-_-;

여/야가 방어전략을 짜는 것 같긴 한데
워낙에 MB가 강심장에다 누구 말을 들어먹는 사고체계가 아니라서
한 동안 MB의 승승장구가 지속되지는 않을까 심히 염려된다.
민주와 상식을 끝장내기 위한 2MB는 Terminator.

이제 하나씩 다 괴멸시켜 가려는가.
국민들의 미래를 위한 전쟁은 시작되는가.

조선일보 만평 (내 맘대로) 수정...

조선일보의 만평은 세태를 풍자하고 부조리를 비판하며 권력을 조롱하는 기능을 모두 버리고 자신들과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 상대들을 음해하고 조롱하고 위협하는 기능만을 남겨둔 듯 하다. 균형감각은 개에게 줘버리고 자신들을 따르는 자들을 위한 선동의 도구, 딱 그것이다.

딱 한 끗 차이 뿐일 것 같은 만평.

그래서
조선일보, 차라리 대놓고 욕을 해라!! 라는 포스팅을 보다가 그냥 슬렁슬렁 만평에 변화를 주고 싶었다.
플로닉님이 포스팅한 내용에 근거해서 수정을 해봤다.
그러고 나니 조롱만 가득하고 예의없던 조선일보 만평이 왠지 '그럴싸~' 하게 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