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 [勞動節, Labor Day]
근로자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한 휴일. 메이데이(May Day) 또는 워커스데이(Workers' Day)라고도 한다. 근로자의 노고를 위로하고 근무의욕을 높이기 위해 제정된 휴일로서, 매년 5월 1일이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9월 첫째 월요일, 유럽•중국•러시아 등에서는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8•15광복 후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했으나,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1963년 4월 17일 공포, 법률 제1326호)에 따라서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창설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 대신 근로자의 날로 정하여 기념했다. 그러나 1994년부터 다시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그 유래는 미국의 노동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성장한 독점기업은 국가권력과 결탁하여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익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미국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노동운동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869년 펜실바니아 주 필라델피아에서 전국 노동조합 연합단체인 노동기사단이 결성되고, 1886년 미국 노동총연맹이 탄생하여 노동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1884년 제 4회 대회에서 1886년 5월 1일부터 1일 8시간 노동을 법률로 정하게 하도록 노력한다고 결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미국 노동자들은 1886년 5월 1일 하루 8시간 노동을 위해 총파업에 돌입했다.
드디어 1886년 5월 1일, 시카고를 중심으로 하여 미국의 각 도시에서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파업 시위가 일제히 일어났다. 이 파업에서 경찰의 발포로 어린 소녀를 포함한 노동자 6명이 사망했다. 다음날 이에 격분한 노동자 30만 명이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해 헤이마켓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하지만 시위중 갑자기 폭탄이 터졌고, 이로 인해 경찰과 시위 군중이 심하게 충돌하여 쌍방 간에 사상자가 생기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집회를 주도한 노동운동가 8명이 폭동죄로 체포되어 재판에서 5명은 사형, 3명은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을 헤이마켓사건이라고 한다. 그러나 7년후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자본가들이 이 사건을 조작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국민을 경악케 했다.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1889년 7월 파리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설립대회에서는 미국 노동자의 8시간 노동을 위한 상황을 보고받고, 1890년 5월 1일을 '노동자 단결의 날'로 정하여 8시간 노동쟁취를 위해 세계적인 시위를 결의했다. 이렇게 메이데이는 시작되었다. 이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과시하는 국제적 기념일로 정하여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및 오픈백과를 중심으로 정리
메이데이의 유래
1) 미국 시카코 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 쟁취 투쟁
1886년 미국
놀기만 하는 자본가들이 다이아몬드로 이빨을 해 넣고,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를 말아 피울 때, 노동자들은 하루 12-16시간 장시간의 노동에 일주일에 7-8달러의 임금으로 월 10-15달러하는 허름한 판잣집의 방세내기도 어려운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5월 1일 미국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을 위해 총파업에 돌입했다. 공장의 기계소리, 망치소리가 멈추고, 공장굴뚝에서 솟아오르던 연기도 보이지 않고 상가도 문을 닫고 운전수도 따라서 쉬었다.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으면 세계가 멈춘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 날이었다. 노동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힘에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그러나 경찰은 파업 농성중인 어린 소녀를 포함한 6명의 노동자를 발포 살해하였다. 그 다음날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30만의 노동자 시민이 참가한 헤이마켓 광장 평화 집회에서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폭탄이 터지고 경찰들이 미친듯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 이후 폭동죄로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억울하게 폭동죄를 뒤집어 쓴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은 장기형 또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이 바로 세계 노동운동사에 뚜렷이 자취를 남긴 헤이마키트 사건이다.
마지막 재판에서 노동운동 지도자 파슨즈는 이렇게 최후진술했다.
"그렇다. 나는 지금은 비록 임금을 받아먹고 사는 노예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 노예 같은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자신이 노예의 주인이 되어 남을 부리는 것은, 나 자신은 물론 내 이웃과 내 동료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중에 하나다. 만약에 인생의 길을 달리 잡았다면 나도 지금쯤 시카코 시내의 어느 거리에 호화로운 저택을 장만하고 가족과 더불어 사치스럽고 편안하게 살수 있었을 것이다. 노예들을 나 대신 일하도록 부려 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을 걷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여기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이것이 내 죄인 것이다.
파업하는 노동자에게 폭탄을 던지라고 말한 것이 누구인가? 독점 자본가들이 아닌가? ... 그렇다. 그들이 주모자들이다. 5월 4일 헤이마켓 광장에 폭탄을 던진 것은 바로 그들이다. 8시간 노동 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뉴욕에서 특파된 음모자들이 폭탄을 던진 것이다. 재판장, 우리는 단지 그 더럽고 악랄무도한 음모의 희생자들이오."
그로부터 7년이 지나 당시 구속 또는 사형된 노동운동가들이 모두 무죄였던 것이 증명되었다. 그들에 대한 유죄판결은 조작된 허위였던 것이다.
2) 5월 1일 미국노동자의 투쟁을 전세계 노동자의 기념일로
1889년 7월 세계 여러나라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이 모인 제2인터내셔날 창립대회에서 8시간 노동쟁취를 위해 투쟁했던 미국 노동자의 투쟁을 전세계로 확산시키기 위해 5.1을 세계 노동절로 결정하고, 1890년 5월 1일을 기해 모든 나라, 모든 도시에서 8시간 노동의 확립을 요구하는 국제적 시위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1890년 세계 노동자들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치며 각 국의 형편에 맞게 제1회 메이데이 대회를 치렀다. 그 이후 지금까지 세계 여러나라에서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과시하는 국제적 기념일로 정하여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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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절의 역사
1) 1923년, 한국 최초의 노동절 행사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절 행사는 1923년 일제 식민지 시절, 당시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인 '조선 노동 총연맹'의 주도하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약 2000여명의 노동자가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실업방지" 등을 주장하며 전세계 노동자의 명절인 메이데이 기념행사를 최초로 치뤘으며, 그 이후 1945년 해방되기 전까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굽힘없는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해왔다.
2) 해방, 전평 깃발아래에서의 노동절
마침내 해방이 되었다. 1945년 결성된 '조선 노동조합 전국평의회'는 1946년 20만 노동자가 참석한 가운데 메이데이 기념식을 성대히 치뤘다. 전평의 깃발아래 노동자들의 힘찬 함성이 울려 퍼지는 서울운동장 야구장 바로 옆, 육상경기장에서는 대한노총이 주최한 약 1,000여명의 우익청년과 노동자가 참석한 초라한 기념식이 치뤄졌다.
3) 날짜도 이름도 빼앗긴 노동절
① 이승만 정권하에 대한노총이 주관하는 노동절
미군정과 대한노총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폭력적인 전국노동조합평의회(이후 전평) 파괴로 수많은 조합원이 해고되고 검거되었다. 게다가 미군정은 정치색을 띤 노조는 일체 정당한 단체로 인정하지 않겠다며 마침내 전평을 불법단체로 만들었다. 그 뒤를 이어 전평 타도 기수로 미군정의 비호를 받아 무럭무럭 자라온 대한노총은 1948년부터 58년까지 노동절 행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그 이후 대한노총 주도하에 진행되었던 노동절 대회는 한마디로 출세와 돈에 눈이 먼 대한노총 상층부가 노동자 대중의 뜻과는 관계없이 이승만과 자본가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날이 되었다.
② 대한노총 생일인 3.10을 노동절로
1957년 이승만은 "메이데이는 공산 괴뢰도당이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으니 반공하는 우리 노동자들이 경축할 수 있는 참된 명절이 제정되도록 하라"는 명령을 노총에 지시했다. 이승만이 지시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한 노총은 노총 결성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로 결정했다.
"3월 10일을 노동절로 기념하게 된 것은, 과거 5월 1일 메이데이를 경축하여 왔으나 이는 적색 공산 국가들간에 공통적으로 기념되는 날로서 오직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대한의 노동자 대표들은 폭압하고 잔인무도한 공산도당과 같은 날에 함께 즐길 수 없다는 의도하에 .... 대한의 참다운 민주 노동자들의 총결집체인 대한노총을 창립한 3월 10일을 한국의 노동절로 축하하고 기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한국노동운동사}, 한국노총 출판
무릇 모든 기념일에는 그 날짜에 치뤄져야 하는 특별한 이유와 의미가 있다. 설날이나 성탄절도 매년 그 날짜인 것과 마찬가지로 메이데이도 5.1에 치루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1886년 미국 시카코 노동자의 투쟁과 희생인 "피의 헤이마켓 사건", 즉 노동자의 이익과 권리는 권력과 자본에 맞선 단결 투쟁을 통해서만 지켜질 수 있다는, 세계 노동자들에 대한 생생한 역사의 일깨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른 날이 아닌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하는 의미인 것이다.
정권과 자본은 노동자의 머리속에서 메이데이라는 말조차 아예 지워버림으로서 이 땅의 노동자를 권력과 자본에 순종하는 일 잘하고 말 잘 듣는 기계로, 의식없는 노동자로 만들려고 5월 1일 노동절을 대한 노총의 생일인 3월 10일로 바꾼 것이다.
대한노총의 어용성으로 빼앗긴 메이데이. 이는 곧 일제시대 이후 끊임없이 투쟁해 온 선배노동자와 노동운동의 빛나는 전통과 정신을 박탈하는 것이며 이후 남한의 민주적인 노동운동에 암흑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남한 노동자들은 그 이후 메이데이를 까맣게 잊고 반노동자적인 어용노총의 생일을 자신의 것인양 알고 지내왔던 것이다.
③ 노동절이 근로자의 날로 이름마저 바뀌고!
4월의 함성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5.16 군사구테타 이후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박정권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여왕벌을 먹이기 위해 아무 생각 없이 꿀만 나르는 꿀벌처럼 일잘하는 '근로자'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껍데기만 남아있던 노동절마저 '근로자의 날'로 이름을 바꾸고 해마다 근로자의 날에는 산업역군이라는 사탕발림으로 열심히 일한 노동자를 '모범 근로자'로 뽑아 상을 주었다. 이제 더 이상 단결과 투쟁의 자랑스런 노동자가 아니라, 정부와 자본의 축제에 들러리 서주는 불명예스런 근로자가 된 것이다.
메이데이 기념일도, 단결을 의미하는 노동자란 이름도 박탈당한 남한의 노동자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밤낮없이 일만하고 사회로부터는 공돌이 공순이로 불리우는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
4) 아 ! 다시 되찾은 메이데이
① 1989년 제100회 메이데이 기념대회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 운동은 단위노조에서 지역, 업종을 넘어 전국으로 들불처럼 확산되어 '노동법 개정 및 임금인상 투쟁본부'를 결성하였다. 1989년 투쟁본부는 제100회 메이데이를 앞두고 근로자의 날을 노동자 불명예의 날로 규정하고 굴욕에 찬 지난날의 근로자 인생을 청산하고 한국전쟁 이후 단절되었던 5.1절 노동절의 전통을 회복할 것을 선언하였다.
1989년 삼엄한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연세대학교에 모인 전국의 5천여 노동자와 청년들은 전야제를 갖고 4월 30일 세계 노동절 기념대회를 개최했다.
② 전국의 노동자 매년 노동절 기념행사
1989년 대회 이후 오늘까지 민주노조 진영은 해마다 세계 노동절 기념대회를 개최하여, 노동절 정신을 계승하고 노동자의 생활과 권리를 개선하기 위한 투쟁을 힘차게 전개해 오고 있다.
이제 한국의 노동자들에게도 노동절은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의 숭고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애써온 선배 노동자들의 투쟁과 삶을 되새기는 기념의 날, 당면한 노동운동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날로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1990년에는 경찰의 원천 봉쇄에도 불구하고 서울대에서 3,000여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노동절 대회가 개최된 것을 비롯하여, 전국 15개 지역, 250여 노조에서 노동절 기념식이 열렸다. 1990년의 노동절 투쟁은 KBS 노조의 파업, 현대 중공업 골리앗 투쟁과 맞물려 5월 1일부터 4일까지 292개 사업장에서 연인원 34만명이 참여하는 5월 총파업 투쟁으로 발전해 갔다.
1991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3만여명이 참가한 대회가 개최된 것을 비롯해서 전국 14개 지역에서 10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세계 노동절 대회가 개최되었다. 1991년의 노동절 투쟁은 5월 9일 총파업과 강경대 열사, 박창수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촉발된 5-6월 대투쟁으로 발전해 갔다.
1992년에는 한양대에서 2만여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노동절 대회가 개최된 것을 비롯해서 전국의 13개 지역에서 세계 노동절 기념 대회가 개최되었다.
1993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3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하여 기념대회를 개최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까지 가두 행진을 벌인 것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5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노동절 대회가 개최되었다.
1994년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 우리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쟁취
1994년 정부는 3월 10일에서 5월 1일로 근로자의 날을 개정하였다. 정부의 이런 법개정 이전에도 전국의 노동자들은 이미 89년부터 이승만에 의해 빼앗겼던 5.1절을 우리 힘으로 되찾아 3월 10일이 아니라 5월 1일에 세계노동절 기념행사를 치루어 왔다.
정부가 노동절 기념일을 바꾼 것은 그 동안 노동절 대회를 힘차게 벌여온 우리 노동자들의 힘과 요구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이제 다시 되찾은 5월 1일 노동절은 우리의 지난 6년간의 소중한 투쟁 성과인 것이다.
물론 정부와 자본은 5.1절을 합법화하여 노동자들의 투쟁을 무마하고, 근로자의 날이라는 이름을 고수하여 메이데이 정신을 계승하려는 노동자 의식을 마비시키고 정부, 자본에 대한 투쟁 열기를 식히려고 하지만 그것은 한낱 헛수고일 뿐이다. 이미 우리 노동자들의 가슴속에는 수년간의 5.1절 투쟁을 통해서 지울 수 없는 노동절 정신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1994년에는 동국대학교에서 2만여 노동자가 모여 기념대회를 하고 대학로까지 행진을 전개하였다.
1995년은 서울대학교에서 약 2만여 노동자가 모여 기념대회를 했고 보라매공원까지 행진하여 마무리 집회를 개최하였다.
1996년 5월 1일 세계노동절 106주년을 맞아 서울, 부산, 대전, 광주, 전주, 청주 등 전국 6개 도시에서 동시에 노동절 기념대회를 열고 96년 임단투 승리와 노동법 개정, 민주노총 합법성 쟁취, 사회개혁을 위한 투쟁을 선포하였다. 서울은 보라매 공원에서 수도권 중앙대회를 마친뒤 여의도 광장까지 행진을 벌이며 선전물을 나누어 주자, 거리의 시민들은 박수와 환호로 답하며 노동절을 기렸다.
1997년 서울을 비롯한 13개 도시에서 10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97 임단투 승리, 재벌경제 타파 부정부패 척결, 사회개혁 쟁취, 교사•공무원 단결권 쟁취'를 다짐하였다. 장충공원에서 2만여명의 조합원이 서울중앙대회를 마치고, 마무리집회 장소인 종묘로 행진하려 했으나 경찰은 페퍼포그와 체류탄을 쏘아대며 참가자들을 구타하고 연행하기도 했다.
1998년 노동자 3만여명과 1만여명에 이르는 학생, 시민들은 '고용안정과 민중생존권 사수'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노동절 집회가 채 끝나기도 전에 금속노동자들이 모여있던 종로3가에 최류탄이 터지고 싸움이 시작되었다. 가슴에 분노를 담아 집회에 참석했던 노동자들은 이날 최루탄 가스에도 물러서지 않고 '정리해고•파견제 철폐, 고용유지 보장, 부당노동행위 척결, 공공부문 일방적 구조조정 중단, 실업자 생활보장, 재벌개혁, IMF재협상'을 요구하였다.
1999년 '세계노동절 109주년 총력투쟁 승리를 위한 전국노동자대회'가 5만여명의 노동자, 시민, 학생이 '구조조정•정리해고 중단'을 외치며 서울역에서 대회를 치뤘다. 대회가 끝난 후 명동성당으로 이어진 행진에서 자리가 없어 성당에 들어오지 못한 대오들이 신세계백화점, 퇴계로 등 곳곳에서 마무리집회를 가졌다.
2000년 세계노동절 110주년대회는 서울역에 2만명을 비롯해 전주, 광주, 포항, 부산, 양산, 구미, 원주, 경주 등 전국 9개 도시에서 6만여명의 조합원이 모인 가운데 '세계 노동절 110주년 기념 대정부 교섭 촉구 및 총파업 투쟁 결의 노동자대회'를 열었다.
민주노총은 대회에서 △주5일근무제 실시 △자동차산업 해외매각 중단과 협동조합 강제 통합 중단 △임금 15.2% 인상과 외환위기 동안 후퇴시킨 단체협약 원상회복 △비정규직 노동자 차별 철폐와 정규직 전환 △조세개혁과 사회보장 예산 GDP 기준 10% 확보를 촉구하고 이를 쟁취하기 위해 '5월 31일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집회에 이어 1만5천여명의 노동자, 학생 등 대회참가자들은 명동을 거쳐 종로2가까지 행진한 뒤 보신각 앞 도로를 점거하고 '대정부 교섭 촉구 결의대회'를 열었다.
2001년 세계노동절 111주년 대회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반대, 김대중 정권 퇴진'을 내걸고 4만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 대구, 부산, 광주, 전주, 제주, 원주, 포항 등 전국에서 열렸다.
민주노총은 김대중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이 마침내 대우자동차 1750명 정리해고라는 사상유래 없는 생존권말살로 이어지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저지! 김대중정권 퇴진!을 내걸고 힘차게 투쟁했다. 그 연장선에서 5.1절 투쟁은 대우자동차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을 시작으로 3월 민중대회 → 4월 14일 '경찰폭력•정리해고 김대중정권 퇴진 결의대회' → 4.21 전국동시다발 집회 → 노동절 기념행사 → 5.1절 투쟁 → 5월 31일 총력투쟁으로 이어지는 투쟁 한복판에서 5월 총력투쟁을 선포하고 결의하는 장이 됐다.
민주노총은 △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중단하고 정리해고 철폐 △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고 차별 철폐 △ 노동시간 단축 △ 공공의료 확충, 공교육 정상화 실현 △ 공무원노조, 교수노조 보장 △ 국가보안법 철폐 △ 민생파탄 개혁실종 김대중정권 퇴진 등을 주요 요구로 내세웠다.
이날 서울대회는 집회대오가 대학로에서 집회를 갖고 행진하던 중 종로에서 경찰이 막자 행진방향을 틀어 14년 만에 시청 앞 광장을 점거하는 등 높은 열기 속에 진행됐다.
한편, 111주년 노동절 대회는 5월 1-2일 이틀 동안 남북노동자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금강산에서도 치뤄졌다. 또한 대회 4월 29일에는 노동절 기념 마라톤 대회를 성황리에 치루기도 했다.
출처 - http://mayday.nodong.net/2005/html/info_01.php#
중국 노동절의 유래
中国人民庆祝劳动节的活动可追溯至1918年。是年,一些革命的知识分子在上海、苏州、杭州、汉口等地向群众散发介绍“五一”的传单。1920年5月1日,北京、上海、广州、九江、唐山等各工业城市的工人群众浩浩荡荡地走向街市、举行了声势浩大的游行、集会,这就是中国历史上的第一个五一劳动节。解放后,中央人民政府政务院于1949年12月将五月一日定为法定的劳动节,是日全国放假一天。每逢这个节日,举国欢庆,人们换上节日的盛装,兴高采烈地聚集在公园、剧院、广场,参加各种庆祝集会或文体娱乐活动,并对有突出贡献的劳动者进行表彰。
출처 : http://www.baidu.com 검색 후 발췌
2006년 5월 3일 수요일
중국 5.1 노동절 그리고 황금휴가, 한국은?
중국에서 가장 긴 휴일이 있다면 춘절(설)과 노동절, 국경절을 꼽을 수 있다. 춘절은 보통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게 보통인데 외지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 위주의 귀향길로 전국이 들썩인다. 반면에 노동절과 국경절은 여행을 떠나는 휴가철이라고 볼 수 있다.
춘절은 일단 추워서 여행다니기 불편한 점도 있겠지만 한국처럼 설엔 가족과 함께라는 의식이 일단 강하기 때문에 대부분 집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 노동절과 국경절은 날씨가 좋을 봄(5월 1일)과 가을(10월 1일)에 있기 때문에 여행객들이 많다. 물론 이때도 고향에 가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귀향객보다는 여행객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편이다.
중국에서 노동절이라고 하면 왠지 한국에 있을 때보다 귀에 익다. 사회주의 국가이기도 하고 노동인민을 위한 국가라는 인식이 먼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중국도 시장개방 이후 자본주의 인식의 노동방식이 만연해 있기 때문에 좀 혼란스럽긴 하다. 노동인민들의 대우도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는다.
노동절이라는 의미는 일단 퇴색된 듯 하고 1주일의 황금휴가로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절 휴가 때는 기차표도 10일 전에 구입을 해둬야 하고 돈이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모두들 어디로 놀러갈 것인지 고민한다.
그러던 차에 문득 노동절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도 궁금했고...그래서 찾아봤다.
더 자세한 내용을 보고 싶다면 '노동절' 키워드를 클릭하면 된다.
중국의 노동절은 1918년 일부 혁명 지식인들에 의해 전단지가 뿌려지고 홍보가 되면서 시작되었고 상해, 소주, 항주와 같은 공업도시 중심으로 1920년 5월 1일 정식으로 노동절 집회와 시위들이 이어졌다. 중국 역사에서는 1920년 5월 1일을 최초의 노동절 행사로 보고 있다. 이후 1949년 12월에 5월 1일을 정식 노동절로 선포하고 1일 휴가를 주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노동절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1923년 최초 노동절 행사를 갖었던 한국은 그 이후에 이승만 정권 때 대한노총에 의해 의미가 퇴색되기도 했고 근로자의 날이라고 명칭을 개명하기도 했지만 87년 민주노총에 의해 다시 노동절이란 이름을 되찾았던 한국. 지금은 노동자가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는 사회로 자리매김 한 것일까.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여전히 한국에서 노동자라면 낮은 계급을 지칭하는 말이고 근로자라는 말이 좀 더 품격(?)있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는 듯 하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자본가와 노동자의 투쟁이 있었고 이제는 어느 정도 법으로 보장도 되었지만 진정으로 노동자가 대접받는 세상은 진정 구현되었을까. 노동자의 권리는 그저 문자화 된 문서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암튼, 중국에서 노동절은 황금휴가 기간이기 때문에 많은 중국 친구들이 걱정을 해준다. 장기 휴가철인데 나는 어디 가지 않느냐, 혼자 심심하지 않겠느냐면서. 사실, 중국에서 어딜 멀리 다녀온다는 게 휴가철을 이용하면 편하긴 하지만 그건 내국인들의 문제고 내 경우엔 너무 많은 이동인구 때문에 머리 복잡해서 별 생각이 없다. 다만, 이번에 연길에 형님들도 쉬기 때문에 건너오라는 이야기를 듣고 표를 구매하긴 했다. 가서 한 며칠 있다가 와야겠다.
중국 TV에서는 노동절 특집 프로그램으로 기인열전, 요리대결 등 각종 쇼 프로그램과 영화들을 방영해 주고 있다. 장춘에서는 노동절을 맞이해 "장춘 애니메이션 만화 예술제"가 열리고 있다. 코카콜라배 China joy 코스프레 지역대회 행사를 중심으로 열리는 행사인데 애니메이션 상영은 역시 일본 애니메이션 중심으로 상영을 하고 만화 작품들이 전시된다. 입장료는 20원(약 3000원). 같이 살고 있는 중국 만화가 친구가 이 행사 심사위원이라 입장권을 줬으니 가서 구경이라도 하고 와야겠다.
오늘 날씨는 참 좋다. 여행하기 딱 좋은 날씨. 저녁 9시 30분 기차니 기차 안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연길에 도착하겠다.
춘절은 일단 추워서 여행다니기 불편한 점도 있겠지만 한국처럼 설엔 가족과 함께라는 의식이 일단 강하기 때문에 대부분 집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 노동절과 국경절은 날씨가 좋을 봄(5월 1일)과 가을(10월 1일)에 있기 때문에 여행객들이 많다. 물론 이때도 고향에 가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귀향객보다는 여행객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편이다.
중국에서 노동절이라고 하면 왠지 한국에 있을 때보다 귀에 익다. 사회주의 국가이기도 하고 노동인민을 위한 국가라는 인식이 먼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중국도 시장개방 이후 자본주의 인식의 노동방식이 만연해 있기 때문에 좀 혼란스럽긴 하다. 노동인민들의 대우도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는다.
노동절이라는 의미는 일단 퇴색된 듯 하고 1주일의 황금휴가로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절 휴가 때는 기차표도 10일 전에 구입을 해둬야 하고 돈이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모두들 어디로 놀러갈 것인지 고민한다.
그러던 차에 문득 노동절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도 궁금했고...그래서 찾아봤다.
노동절이란 근로자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한 휴일. 메이데이(May Day) 또는 워커스데이(Workers' Day)라고도 한다. 근로자의 노고를 위로하고 근무의욕을 높이기 위해 제정된 휴일로서, 매년 5월 1일이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9월 첫째 월요일, 유럽•중국•러시아 등에서는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8•15광복 후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했으나,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1963년 4월 17일 공포, 법률 제1326호)에 따라서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창설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 대신 근로자의 날로 정하여 기념했다. 그러나 1994년부터 다시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발췌)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9월 첫째 월요일, 유럽•중국•러시아 등에서는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8•15광복 후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했으나,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1963년 4월 17일 공포, 법률 제1326호)에 따라서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창설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 대신 근로자의 날로 정하여 기념했다. 그러나 1994년부터 다시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발췌)
더 자세한 내용을 보고 싶다면 '노동절' 키워드를 클릭하면 된다.
중국의 노동절은 1918년 일부 혁명 지식인들에 의해 전단지가 뿌려지고 홍보가 되면서 시작되었고 상해, 소주, 항주와 같은 공업도시 중심으로 1920년 5월 1일 정식으로 노동절 집회와 시위들이 이어졌다. 중국 역사에서는 1920년 5월 1일을 최초의 노동절 행사로 보고 있다. 이후 1949년 12월에 5월 1일을 정식 노동절로 선포하고 1일 휴가를 주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노동절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1923년 최초 노동절 행사를 갖었던 한국은 그 이후에 이승만 정권 때 대한노총에 의해 의미가 퇴색되기도 했고 근로자의 날이라고 명칭을 개명하기도 했지만 87년 민주노총에 의해 다시 노동절이란 이름을 되찾았던 한국. 지금은 노동자가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는 사회로 자리매김 한 것일까.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여전히 한국에서 노동자라면 낮은 계급을 지칭하는 말이고 근로자라는 말이 좀 더 품격(?)있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는 듯 하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자본가와 노동자의 투쟁이 있었고 이제는 어느 정도 법으로 보장도 되었지만 진정으로 노동자가 대접받는 세상은 진정 구현되었을까. 노동자의 권리는 그저 문자화 된 문서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암튼, 중국에서 노동절은 황금휴가 기간이기 때문에 많은 중국 친구들이 걱정을 해준다. 장기 휴가철인데 나는 어디 가지 않느냐, 혼자 심심하지 않겠느냐면서. 사실, 중국에서 어딜 멀리 다녀온다는 게 휴가철을 이용하면 편하긴 하지만 그건 내국인들의 문제고 내 경우엔 너무 많은 이동인구 때문에 머리 복잡해서 별 생각이 없다. 다만, 이번에 연길에 형님들도 쉬기 때문에 건너오라는 이야기를 듣고 표를 구매하긴 했다. 가서 한 며칠 있다가 와야겠다.
중국 TV에서는 노동절 특집 프로그램으로 기인열전, 요리대결 등 각종 쇼 프로그램과 영화들을 방영해 주고 있다. 장춘에서는 노동절을 맞이해 "장춘 애니메이션 만화 예술제"가 열리고 있다. 코카콜라배 China joy 코스프레 지역대회 행사를 중심으로 열리는 행사인데 애니메이션 상영은 역시 일본 애니메이션 중심으로 상영을 하고 만화 작품들이 전시된다. 입장료는 20원(약 3000원). 같이 살고 있는 중국 만화가 친구가 이 행사 심사위원이라 입장권을 줬으니 가서 구경이라도 하고 와야겠다.
오늘 날씨는 참 좋다. 여행하기 딱 좋은 날씨. 저녁 9시 30분 기차니 기차 안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연길에 도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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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29일 토요일
비 오는 날, 타령...
하루종일 멀쩡하던 하늘이 그르렁대더니 끝내 비를 뿌려댄다.
...요 근래 이 곳 날씨는 정말 '변덕' 그 자체다. 날씨가 좋아 친구에게 날씨 좋다고 문자를 보내고 나면 바로 흐려지고 비 내리고 우박 쏟아지는 날의 연속이다.
...곧 처녀총각 가슴 설레게 할 봄이 오는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다. 봄이 오는데 긴 진통이 필요한가보다. 며칠 바깥 출입을 안 해서 오늘 좀 나가볼까 했더니 흠;;; 여러모로 고민스럽게 하네. ...아니지, 날씨에 굴복해선 안되지.
...부침개에 막걸리라면 좀 어울릴까.
...자료 전송받는데 보통 3-4시간이라니 너무하는 거 아닌가?
...이래저래 동영상 강좌, 문건을 좀 읽어보고 있는데 너무 어렵다. 그간 공부하는 머리를 너무 사용하지 않은 탓이야. 잔머리만 굴리고 있었으니 기본적으로 굵직하게 돌아가야 하는 머리가 둔해졌다. 흠;;;
...낼 모레부터 5.1절(노동절) 장기휴가 기간이라 집 주인들도 집을 비울 듯. 연길가는 기차표는 있을까?
2006년 4월 28일 금요일
리마 증후군
인질범들이 인질들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어 자신을 인질과 동일시함으로써 공격적인 태도가 완화되는 현상. 리마 신드롬이라고도 한다. 1997년 페루 리마에서 반정부조직 요원들이 127일 동안 인질들과 함께 지내면서 차츰 인질들에게 동화되어 가족과 안부 편지를 주고받고, 미사 의식을 여는 등의 현상을 보였다는 데서 '리마'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인질사건은 1996년 12월 17일 페루 반군들이 일본대사관을 점거하고 400여 명의 인질을 억류하면서 시작되어 이듬해 4월 22일 페루 정부의 강경진압으로 끝이 났다. 당시 14명의 인질범은 모두 사살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인질범들은 인질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인질들을 위한 의약품류의 반입을 허용하는 한편, 자신들의 신상을 털어 놓는 등 인질들에게 동화되는 여러 가지 이상 현상을 보였다. 리마신드롬은 이러한 현상을 빗대어 심리학자들이 붙인 범죄심리학 용어이다.
즉 인질범들이 인질들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어 자신을 인질과 동일시함으로써 공격적인 태도가 완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와 반대로 인질이 인질범들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어 오히려 자신들을 볼모로 잡은 범인들에게 호감과 지지를 나타내는 납득하기 어려운 심리현상을 스톡홀름증후군이라고 한다.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은행에 침입한 4명의 무장강도가 은행 직원들을 볼모로 잡고 6일간 경찰과 대치한 사건에서 처음 관찰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 인질사건은 1996년 12월 17일 페루 반군들이 일본대사관을 점거하고 400여 명의 인질을 억류하면서 시작되어 이듬해 4월 22일 페루 정부의 강경진압으로 끝이 났다. 당시 14명의 인질범은 모두 사살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인질범들은 인질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인질들을 위한 의약품류의 반입을 허용하는 한편, 자신들의 신상을 털어 놓는 등 인질들에게 동화되는 여러 가지 이상 현상을 보였다. 리마신드롬은 이러한 현상을 빗대어 심리학자들이 붙인 범죄심리학 용어이다.
즉 인질범들이 인질들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어 자신을 인질과 동일시함으로써 공격적인 태도가 완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와 반대로 인질이 인질범들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어 오히려 자신들을 볼모로 잡은 범인들에게 호감과 지지를 나타내는 납득하기 어려운 심리현상을 스톡홀름증후군이라고 한다.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은행에 침입한 4명의 무장강도가 은행 직원들을 볼모로 잡고 6일간 경찰과 대치한 사건에서 처음 관찰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스톡홀름 증후군
인질이 인질범들에게 동화되어 그들에게 동조하는 비이성적 현상을 가리키는 범죄심리학 용어. 스톡홀름 신드롬이라고도 한다.
인질사건에서 인질로 잡힌 사람들이 인질범들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어 오히려 자신들을 볼모로 잡은 법인들에게 호감과 지지를 나타내는 심리현상을 말한다.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은행에 침입한 4명의 무장강도가 은행 직원들을 볼모로 잡고 6일간 경찰과 대치한 사건에서 처음 관찰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처음에는 인질들도 범인들을 두려워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그들에게 동화되어 자신들을 구출하려는 경찰들을 적대시하고, 사건이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강도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심리현상을 말한다.
심리학자들은 인질사건과 같은 극한상황에 처하게 되면 강한 스트레스와 두려움으로 인해 인질범들이 자신을 해치지 않는 것을 오히려 고맙게 여겨 차츰 그들에게 온정을 느끼게 되고, 결국은 자신을 구출하려는 경찰들에게 반감까지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와 반대로 인질범들이 인질들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어 자신을 인질과 동일시함으로써 공격적인 태도가 완화되는 현상을 리마 증후군이라고 한다. 1997년 페루 리마에서 반정부조직 요원들이 127일 동안 인질들과 함께 지내면서 차츰 인질들에게 동화되어 가족과 안부 편지를 주고받고, 미사를 개최하는 등의 현상을 보였다는 데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인질사건에서 인질로 잡힌 사람들이 인질범들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어 오히려 자신들을 볼모로 잡은 법인들에게 호감과 지지를 나타내는 심리현상을 말한다.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은행에 침입한 4명의 무장강도가 은행 직원들을 볼모로 잡고 6일간 경찰과 대치한 사건에서 처음 관찰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처음에는 인질들도 범인들을 두려워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그들에게 동화되어 자신들을 구출하려는 경찰들을 적대시하고, 사건이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강도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심리현상을 말한다.
심리학자들은 인질사건과 같은 극한상황에 처하게 되면 강한 스트레스와 두려움으로 인해 인질범들이 자신을 해치지 않는 것을 오히려 고맙게 여겨 차츰 그들에게 온정을 느끼게 되고, 결국은 자신을 구출하려는 경찰들에게 반감까지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와 반대로 인질범들이 인질들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어 자신을 인질과 동일시함으로써 공격적인 태도가 완화되는 현상을 리마 증후군이라고 한다. 1997년 페루 리마에서 반정부조직 요원들이 127일 동안 인질들과 함께 지내면서 차츰 인질들에게 동화되어 가족과 안부 편지를 주고받고, 미사를 개최하는 등의 현상을 보였다는 데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mov] 홀리데이 | Holiday | 假日
“有錢無罪 無錢有罪” 이 말 외에 다른 말을 덧붙이는 건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88년 10월 8일 12명의 죄수 탈옥. 그 속에 지강헌이 있었고 전국민에게 울분을 토해내듯 인질극을 벌였던 이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 후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18년 세월 속에서 과연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을까. 87년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맛봤던 것도 어쩌면 전씨의 올림픽 개최 열망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면 착각일까. 유래없이 단기간 내에 민주화를 이뤄낸 한국인들. 그 행복한 성취감은 자주 정치인들이 자신은 민주화 세대라고 떠벌리며 이용되는 영광스러운 과거의 모습이 되고 말았다.
노회찬 의원이 설문조사를 한 결과에 의하면 여전히 대한민국 헌법은 만인에 불평등하다고 느끼고 있는 이가 73%에 다다른다고 한다. 법치국가,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해괴한 설문조사 결과라니… 법이 인민을 보호해주지 않고 권력자만을 보호해 준다니… 믿고 싶지 않을 뿐이다.
삼성이나 두산 그 외 많은 대기업들은 법의 보호를 제대로 받아 자산을 불리고 영토를 넓혀가고 대추리 서민들 역시 제대로 법의 보호를 받아(?) 삶의 터전을 잃어버릴 처지에 있다. 법은 만민에게 평등하다고 말한 이 과연 누구인가. 법은 평등한 적용기준이 아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만큼은.
작년 6월에야 보호감호법이 철폐되었다니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지만 여전히 돈으로 법을 사고 파는 일이 빈번한 시대를 살고 있는 건 아직 끝나지 않는 비극이다. 작은 법리해석을 두고도 정의를 위해 몇 년씩 자비를 들여 투쟁을 한(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삼성비리를 털어내면 국내 경제가 휘청거릴까 내심 고민하고 있는 검찰도 있다. 한 개인의 권리와 삶은 별 것 아니지만 국익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권력가, 기업가는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감동까지 전달해주는 모양이다.
영화 <홀리데이>는 최민수의 오버연기와 억지스러운 허구를 삽입함으로 인해 싸구려 영화가 되어버렸다. 정작 지강헌(영화 속 지강혁)이 부르짖었던 “有錢無罪 無錢有罪” 이야기 하나만 보고 달려가고 몰아가는 바람에 좀 더 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는 사회현상들을 놓치고 말았다.
다만, 이성재의 연기는 꽤 빛을 발한다. 너무나 화려한 몸 근육 때문에 시선을 종종 뺏기곤 했지만(몸 근육이 어울리는 영화 내용이었다면 좋았을 걸…) 살이 빠진 이성재의 얼굴 굴곡과 눈빛, 표정 등은 영화와 잘 어울린다. 그러고보면 이성재는 감독의 역량부족이나 영화선택의 실수로 간혹 빛을 잃곤 해서 그렇지 꽤 연기를 잘하는 배우다. 이성재를 제외한 나머지 조역 탈주범들은 연기를 너무 못한다. 특히 장세진과 파트너는 자꾸 영화와 겉도는 느낌이다. 브로커로 나온 배우도 오버센스다. 여현수는 영화 속에 깊이 뭍어나진 못하고 이얼의 연기 변신은 아주 충격적이었지만 감정이 너무 흘러넘친다. 이얼의 파트너로 나온 배우가 조역으로 적절한 선을 유지하지 않았나 싶다.
최민수는 왜 건달 똘마니를 데리고 다니는 것일까. 그냥 감독의 의도일까? 당시 경찰, 검찰은 깡패 두목이다..라는 식의? 최민수의 배역이 너무나도 허구적이기 때문에 영화의 몰입을 자꾸 방해한다. 최민수는 <나에게 오라>, <테러리스트>, <남자 이야기> 정도에서 적절한 배역과 연기를 보여주지만 그 이후의 행보는 너무 폼만 잡는 것 같다. 영화에도 많이 개입을 한다는 소식을 접해서인지 이번 영화에도 자신의 장광연설을 늘어놓고 감독을 홀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각본이 좀 더 좋았다면 어땠을까… 배우들의 부족한 부분이나 오버연기도 잘 덮어주지 않았을까? <실미도>, <공공의 적2> 시나리오 작가 김희재가 각본을 맡았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난 이 두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가 마치 보호감호법 철폐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처럼 마지막 자막을 올리는 것이 의아했다. 결과적으로 마지막 자막에 비해 영화는 이야기를 제대로 못한 격이 되지 않았나 싶다. CGV와 마찰로 “有錢無罪 無錢有罪”가 현실화되고 이슈화되긴 했지만…
적어도 영화 <홀리데이>는 당시 현실보다도 드라마적이지 못하다. 특히 당시 인질로 잡혀있었던 고모양이 마지막 생존자였던(현재도 수감중이던) 강모씨를 위해 제출한 탄원서 내용이라던가 이를 근거해 추측해 볼 수 있는 범인과 인질들 사이에 존재했을 스톡홀름 증후군과 리마 증후군 등은 오히려 더 극적이다. 이는 오히려 유오성이 주연했던 같은 내용의 TV단막극이 더 낫지 않았나 싶다.
예전에 정태춘, 박은옥의 <아! 대한민국> 앨범을 좋아했을 때, 정식 음반으로 나오지도 않았던 걸 공연현장에서 팔던 테잎을 사서 듣고 또 들어 테잎이 완전 맛이 갔을 때 읽었던 글 한토막이 생각이 난다.
“모든 가슴을 울리는 것들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현실을 이야기 하는 것들이다.”
보호감호법
보호감호제도는 동종 또는 유사한 죄로 2회 이상 금고 이상의 실형을 받고 형기 합산 3년 이상인 자가 다시 유사한 특정의 죄를 범한 때, 보호감호시설에 수용하여 감호 및 교화하고, 사회복귀에 필요한 직업훈련과 근로를 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제도로 1980년 12월 18일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제정한 법률이다.
1980년 5.17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 직후 계엄업무수행에 있어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대통령령으로 설치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모체가 되었던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제정한 보호감호제도는 입법 제정 당시 소위 삼청교육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소급 적용하여 보호감호를 실행하였다.
그러나 집행의 현실을 보면 서신을 검열하고 동료나 교도관이 볼 수 있는 상태에서 용변을 보아야 하며, 피감호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청송 제1,2감호소는 2.6평의 좁은 공간에서 약 4-6명의 인원이 냉난방 시설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생활하는 등 시설면에서 일반 수형자가 수용되어 있는 교도소보다 열악하며, 운동시간도 제한되고 또한 선거권까지 전면적으로 제한되었다.
이와 같이 피감호자에 대한 처우가 형법의 적용을 받는 수용자와 별반 다를 것이 없고, 피감호자에 대한 처우가 사회복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보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로 인해 피감호자들이 보호감호기간을 마치고 사회에 복귀하여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으며, 사회로부터의 냉대를 견디다 못해 결국 또 다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보호감호제도는 헌법이 명시하는 이중처벌금지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이 인정되어 1991년 보호감호제도를 규정하고 있는 사회보호법에 대해 위헌판정이 내려졌고, 이 영화가 제작 중인 2005년 6월에서야 폐지되었다. 하지만 2005년 6월 이전에 보호감호에 적용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소급 적용되어 여전히 논란의 불씨를 남겨두고 있다.
1980년 5.17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 직후 계엄업무수행에 있어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대통령령으로 설치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모체가 되었던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제정한 보호감호제도는 입법 제정 당시 소위 삼청교육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소급 적용하여 보호감호를 실행하였다.
그러나 집행의 현실을 보면 서신을 검열하고 동료나 교도관이 볼 수 있는 상태에서 용변을 보아야 하며, 피감호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청송 제1,2감호소는 2.6평의 좁은 공간에서 약 4-6명의 인원이 냉난방 시설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생활하는 등 시설면에서 일반 수형자가 수용되어 있는 교도소보다 열악하며, 운동시간도 제한되고 또한 선거권까지 전면적으로 제한되었다.
이와 같이 피감호자에 대한 처우가 형법의 적용을 받는 수용자와 별반 다를 것이 없고, 피감호자에 대한 처우가 사회복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보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로 인해 피감호자들이 보호감호기간을 마치고 사회에 복귀하여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으며, 사회로부터의 냉대를 견디다 못해 결국 또 다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보호감호제도는 헌법이 명시하는 이중처벌금지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이 인정되어 1991년 보호감호제도를 규정하고 있는 사회보호법에 대해 위헌판정이 내려졌고, 이 영화가 제작 중인 2005년 6월에서야 폐지되었다. 하지만 2005년 6월 이전에 보호감호에 적용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소급 적용되어 여전히 논란의 불씨를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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