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4일 금요일

정태춘에 대한 기억, 고맙고 미안합니다.

출처: idomin.com


중학교 때 사촌 형님의 소개로 처음 듣게 된 정태춘의 노래. 그 뒤로 줄곧 그의 노래를 좋아했던 나는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모 대학에서 열린 행사에 정태춘이 온다고 해서 그를 보기 위해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도망쳐 나와 찾아갔다.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대학생이었던 그 공간에서 사람들은 정태춘을 환호했다. 나 역시 '떠나가는 배', '촛불', '시인의 마을', '애고, 도솔천아' 등등 서정적이며 감성 풍부한 그의 노래를 좋아했기에 자리를 잡고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난 TV에서 딱 한 번 밖에 보지 못했던, TV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도 없었던 특이한 가수 정태춘.(그의 아내 박은옥은 그보다도 더 유명했던 것 같았다.) 엄밀히 말하면 소위 대중적인 스타는 아니었지만 정말 많은 팬이 있었던 '노래하는 음유시인' 정태춘.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때의 정태춘을 잊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원형극장에 둘러 앉은 대학생들이 환호를 보내며 그의 노래 제목들을 외쳐댔다. (아마도) 고무신을 신고 통기타를 맨 수수한 옷차림의 정태춘은 '촛불'의 전주부분을 연주했다. 사람들은 더욱 환호했다. 정태춘은 갑자기 연주를 멈추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런 노래도 있었지요"


사람들의 연호에 정태춘은 '떠나가는 배', '시인의 마을' 등의 전주부분을 연주했지만 모두 '이런 노래도 있었지요'라는 말과 함께 연주를 멈추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이 노래들은 여러분의 테잎으로만 들으셔야겠습니다. 앞으로 이 노래들을 부르지 않을 겁니다. 이젠 전대협을 위해, 전교조를 위해 노래하겠습니다."


100% 정확하진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의 말은 그랬다. 그리고 그는 이어 '아! 대한민국'을 불렀다. 사람들은 그 노래에 맞춰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켜 흔들며 열광했다. 난 '아! 대한민국'이란 노래에 완전히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되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사회에 대해서 별 관심도 없었지만 그 노래, 그 가사는 내 가슴을 크게 울렸고 심장이 터질 정도로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이어 부른 '그대, 행복한가' 등의 몇 곡의 노래 역시 내 정신과 마음을 심하게 흔들었다. 공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갔음에도 난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다음 날부터 그의 노래가 담긴 테잎을 구하기 위해 수소문을 했지만 구할 수 없었다. '금지곡'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저 그날 밤 들었던 멜로디와 몇 마디의 가사만 입에서 중얼거리며 잊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나서야 테잎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는데 매일 수 십 번씩 반복해서 듣는 바람에 테잎이 늘어나기도 했다. 그러면 다시 테잎을 구해 다시 들었다. 정태춘이 부르던 노래의 가사는 그렇게 살아서 내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후에도 모든 앨범을 구입했고 모든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다.  


성격상 공연같은 걸 한 번도 다녀본 적이 없었던, 누군가를 보기 위해 시간 맞춰 찾아다닌 적이 없었던 나는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정태춘이 온다고 하면 가슴 설레며 그를 기다렸고 그의 노래를 따라 불렀으며 그의 노래에 담긴 가사와 의미를 되새기려 애를 썼다. 그리고 새롭게 나온 앨범들을 꼬박꼬박 구입해서 애지중지하며 간직했고 반복해서 들었다. 누군가 내게 좋아하는 가수와 노래가 뭐냐 물으면 난 단 한 번도 망설이지 않고 '정태춘'이라 답했다. 중학교 때 처음 그의 노래를 들었던 순간부터 '서정적인 노래'를 부르지 않은 이후에도 난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정태춘'이라 말했다. 당시 내 또래 애들은 정태춘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내가 차츰 갖게 된 사회의식의 일부는 '정태춘(과 박은옥)'에게 빚진 부분이 있다.


언제부턴가 그에 대한 소식이 뜸해졌고 나 역시 개인적인 삶의 질곡 때문에 그에게 접근할 방법을 찾지 못하게 되면서 그의 공연이나 소식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챙기지 못했다. 그러다 김규항의 정태춘 인터뷰를 접하고 나서 마음이 심하게 아팠는데 청중, 대중으로서의 내가 그의 '힘들어함'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제도 아는 교수님과 이야기하던 중에 정태춘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왔는데 옆에서 우리 대화를 듣던 주점의 사장 아주머니가 몇 마디 거들게 되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자니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여전한데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로 인해 그가 다시 무대로 돌아오지 않는 걸, 다시 노래하지 않는 걸 슬퍼하는 사람이 갈수록 적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암튼, 정태춘과 박은옥이 다시 노래하지 않는다는 건 무조건 '우리'의 책임인 것 같다.


다시 그가 돌아와 노래를 불러주길 간절히 바라지만 여러 기사와 인터뷰 내용을 보니 쉽진 않을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래는 김규항의 정태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다.


- 예술가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 정치인이나 사회운동가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적인 예술가들은 90년대 이후 사회운동가, 아니 정치인의 상상력을 뒤쫓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현실 정치에서 당선 가능성이라든가 현실적 실현 가능성도 중요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상상력의 최대치가 제도정당의 그것에 머문다는 건 우리가 현재 세상을 넘어서길 포기한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나는 그런 상상력의 빈곤이 답답했어요."


- 아내이자 오랜 동지인 박은옥 선생 보시기엔 어땠는지요?

(박)"너무 힘들어하니까 보는 나도 많이 힘들었어요. 이 사람이 반복해서 말했어요. 군부독재가 물러났지만 이젠 더 공고하고 사악한 자본의 독재가 들어서고 있다, 그런데 군부독재와 싸우던 사람들이 그런 변화에 대해선 외면하고 그 질서 속에 들어가 명랑한 얼굴로 개혁을 말하고 민주화를 말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고…."


(박)"남에게 공격적이진 않았지만 서운함이나 고립감 때문에 많이 힘들었죠. 이런 일이 있었어요. (경기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인) 대추리 싸움 하다가 논구덩이에서 플래카드에 목이 졸려 경찰에 연행돼 가지고 응급실로 실려 갔는데 거기 병원에 쫓아온 후배가 그랬대요. 형님은 아직도 이러고 사시냐고, 세상 좋아졌는데 이제 그만하시라고. 그랬는데 이 사람이 그러더래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왔다고? 그 세상이 왔는데 나만 모르고 있는 거라고?' 지금도 그 이야기만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박은옥씨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via http://gyuhang.net/1692

via http://media.daum.net/culture/view.html?cateid=1003&newsid=20091023145012007&p=hani




예나 지금이나 - 2009년 안에 1987년 있다. by 행복한 자유인


2009년 11월 30일 월요일

시스템과 개인

너무 혼란스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불가(?)쪽 공부를 좀 했던 터라^^; (감히)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황대권 선생님이 말씀하신 내용도 충분히 옳은 말씀입니다. 제가 글을 썼던 것은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 속에 그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생각하며 쓴 글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시스템이 먼저냐, 개인(인간)이 먼저냐... 저는 일단 개인(인간)에 무게를 두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하나의 문제에 봉착을 하더군요. 즉, 시스템(법, 제도를 포함한)은 분명 인간이 만들어 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진 그 시스템은 나름의 생명력을 얻어버리게 됩니다. 자생적으로 성장하고 살아 숨 쉬게 된다는 것이지요.(물론 기득권층이 힘을 실어주거나 조작하는 경우가 많지만 말입니다.)

 

개인의 수양을 통해 내 안에 있는 분노와 잘못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건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곰곰히 주변을 둘러보면 한 개인이 잘 사는 것과 국가나 사회시스템이 그런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것은 아주 별개로 움직이더란 말이죠. 평생을 착하게, 남에게 피해도 주지 않고, 오히려 남을 도우며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돌연 국가 간의 분쟁에 의해, 사회 권력자들의 이권다툼에 의해 적당한 댓가도 받지 못하고 아니, 오히려 피해를 받고 사는 인민(민중)이 너무 많다는 거지요. 개인의 수양은 수양대로 끊임없이 정진해 가야 하는 건 사실이고 중요한 일입니다만, 거대 시스템에 맞선 풀뿌리 인민들의 연대도 분명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가령 한 개인이 촛불시위에 참여하거나 농활이던 어떠한 운동이던 참여하는 건 개인이 분노를 표출하는 감정적 행동이 아니라 잘못된 사회시스템을 고쳐보기 위한 소중한 움직임이라 생각하는 거지요. 그저 희망없는 넋두리 한탄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나'를 비롯한 더 많은 인민(서민)들이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황대권 선생님의 말씀이나 제가 적은 글이나(감히 비교해서 죄송합니다.)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언부언이지만 제가 6.25에 대해 적은 글은 이미 한국을 비롯한 세계 모든 국가의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20:80로 나뉘어져 있고 그건 자본에 힘입은 자본가들과 결탁한 소위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구분을 해버린 것이고 진작에 없어졌어야 했을 봉건계급사회가 여전히 다른 모습, 즉 자본계급사회로 변화해서 존재하고 있음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적은 글입니다. 특히나 전쟁이 발생한 이유에 대해서 알게 되면 (단순한 표현으로) 반미와 같은 움직임이 결코 감정에 의한 분풀이가 아닌 정확한 문제 해결을 위한 괜찮은 방편임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반미가 아니라 반자본주의, 반저질자본주의가 되겠고 집중편향되어있는 권력에 대한 항거(?), 개인이 잘 살기 위한 적정한 보장을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via 한국전쟁... 가장 추악한 범죄 - 전쟁
http://cjh6520.egloos.com/2541469 글에 달았던 답글을 옮겨 와 몇 개 단어 수정하고 생략해서 보관함.

2009년 11월 29일 일요일

내일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어.
굳이 그렇게 말을 하지 않아도 말이지.

 

하지만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시간의 흐름에 나를 잠시 맡겨두는 것.

 

그 흐름에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서
온 몸에 힘을 주고 버텨보긴 하지만
그리 쉽진 않아.

하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걸.

 

오늘 내가 설겆이를 하는데
그릇에 남겨진 흔적들이 왠지 지저분하게 느껴지는 거야.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내가 살아온 날들도 그렇게 느껴질까봐
조금은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거야.

 

하지만,
찬 물에 조금 남아있던 그릇의 온기가 사라지듯이
내 마음에 작은 불씨마저 꺼져버리게 하진 않을래.

나를 믿고 있는 마음,
나도 잘 알고 있으니
오늘보다 다른 내일이 될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2003년 11월 27일에 쓰다.

 

 

█

 

컴퓨터 하드를 뒤적거리다 오래 된 텍스트 문서를 발견했다. 문서 이름이 '내일은'이라고 되어있길래 무슨 문서인지 궁금해 열어보니 위에 적힌 내용이 있었다. 2003년 말이면 중국에 도착한 후 2개월 정도 시간이 흐른 뒤였는데 말도 통하지 않는 막막한 이국(異國)에서 답답함, 조급함, 불안함, 외로움 등이 스물스물 올라오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글을 읽다보니 당시 홀홀단신 멋모르고 부딪히며 애쓰던 내가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지금은 그 때보다 잘 살고 있나, 지금은 그 때보다 다른 오늘을 살고 있나, 그 때의 내일보다 지금의 내일이 내게 더 벅찬 희망을 주고 있나 곰곰히 지금을 돌이켜 생각한다.

 

적어도 그 때의 나에게 작은 위로 정도는 보낼 수 있겠다.

2009년 11월 28일 토요일

블로그 인테리어를 바꾸다.

(중국과 같이) 접속되지 않는 곳이 있어서 여러 불편한 점이 있던 (하지만 정들었던) 티스토리를 정리하고 텍스트큐브로 옮겼다. 물론 다음(daum)이나 티스토리에서 중국에 항의를 하거나 여러가지 방법을 모색해 본다면 접속불가 상황이 해결될 일이기도 하겠지만 그리 쉬워보이지 않는 건 사실이다.

 

결국 블로그 이사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데 여러모로 아쉽다. 나중에 티스토리의 문제가 해결이 된다면 다시 옮겨올 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주관적인 선택에 의해서가 아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 이사를 한다는 건 아무리 인터넷 상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다지 유쾌한 건 아니다. 개인의 선택과 취향이 거대 시스템에 의해 자동적으로 통제될 수 밖에 없다는 건 참 씁쓸한 현실임에 틀림없다.

 

글을 자주 올리지는 않지만 가끔씩 들러 개인적인 글, 외부에 전하고 싶은 글을 올리며 처음과 생각했던 블로그의 모습과는 약간의 변화를 겪어왔다. 나의 변화만큼이나 블로그도 변화하고 진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쉼 없는 블로그질과 더불어 스스로를 절차탁마해야겠지.

 

물론 도메인 주소는 원래 사용하던 http://jumpkarma.com을 그대로 사용하니 별 문제는 없다. 포워딩되는 주소가 티스토리에서 http://jumpkarma.textcube.com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외관은 별 문제가 없는데 인테리어가 바뀌는 정도겠지. 하지만 그렇더라도 글(들)을 옮기고 여러 세팅을 다시 해야하니 불편한 건 사실이다.

 

통제와 감시가 없는 '자유'로운 소통을 위해!

2009년 11월 18일 수요일

이데아의 그림자



불완전한 현실은 완전한 이데아의 그림자.
결코 이데아로 다가설 수 없다는 불완전한 현실을 딛고
얼만큼을 참아내면 되는 걸까.
그림자의 그림자를 통해, 현실의 현실을 통해
찬란한 빛이 가득한 이데아로 다가설 수 있을까.
내 지난 그림자여, 나를 이끌어 그림자를 넘게 하라.
내 안에 있는 이데아를 현실로 끌어낼 수 있도록.

2009년 11월 17일 화요일

몸 보수-입 진보, 광장 진보-밀실 보수... 고리를 끊는 방법은...

...‘지못미’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곳을 쳐다보면서 경제적으로 짭짤한 곳에 뿌리내린 자들, 인터넷에선 진보, 술자리에선 중도, 직장 가면 보수가 되는 자들의 탄식이다.

...그래야 ‘몸은 보수-입은 진보’, ‘생산은 보수-소비는 진보’, ‘광장에서는 진보-밀실에서는 보수’로 분열된 정치적 분열증이 개선되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 지금 한국 사회에서 진정으로 심각한 정치적 문제는 지식인 몇몇이 보수로 전향한 것이 아니라 대다수 시민이 몸까지는 진보로 전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역사적 상처에서 비롯된 의심이 깊어서 정치적 주체로 나서는 데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리라.

남재일 교수의 말과 행동의 정치적 분열증을 넘어 중의 일부다.

글 내용의 어떤 부분에 대해선 생각이 조금 다르지만 전반적인 내용에 동의를 한다. 몇 번의 곡절과 앓이를 겪으며 민주사회로 진입했다는 대한민국은 그다지 균형이 잡히지 않은 상태라 할 수 있다. 언젠가는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리라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근 1-2년 새에 젊은이들 대다수가 보수적 성향이란 쪽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대다수가 보수란 생각까지 하는 참이다.

사회의 많은 부조리와 병폐들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하다보면 결국 '교육'에 초첨이 맞춰지곤 하는데 이렇게 되면 '원론적'인 이야기만 오갈 뿐이어서 참 대책이 없기도 하다. 이보다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결국 제대로 된 소리를 들어먹을 줄 아는 젊은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수 밖에 없는데 사회적으로 유아기적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한민국에서는 그들에게 먹힐 법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부모를 제외하곤 거의 없는 듯 하다. 그들의 '선생님들' 역시 그들을 사회에서 돈 잘 벌고 성공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고용된 존재일 뿐 그들에게 사고, 사유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엔 벅차고 나름의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더라도 펼치기엔 너무 많은 '적'들이 존재한다.

그래도 역시 가장 빠른 방법은 젊은이들이 깨어나는 것이다. 그들이 의무교육기간을 마치는 순간부터 대학, 군대, 직장, 사회, 새로운 가정을 거치는 동안 세뇌당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 매몰당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관점과 소신을 가지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해야 한다. 그들에게 다가서는 방법과 그들과 소통하는 방법, 그들에게 새로운 시각과 열린 사고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렵지만 한 명씩 한 명씩 변화의 모터를 달아주어야 한다. 

몸 보수-입 진보, 광장 진보-밀실 보수... 지금 수 많은 공간, 상황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닌가. 상처를 상처로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 상처는 빠른 속도로 부패하고 결국엔 생명을 잠식한다. 사회의 많은 문제도 마찬가지다.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수 많은 문제들이 있다. 그 문제들은 결국 나의 미래와 내 자식의 미래까지 집어삼킬 것이다. 지금 그 고리를 잘라내지 않는다면 희망과 미래를 말할 기회조차 오지 않을 것이다. 

문제인지 문제가 아닌지 지금보다 더 신중한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문제를 마주하면 '문제다!'라고 소리쳐야 한다. 
옆 사람이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면 '문제야'라고 알려줘야 한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자기 내부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
그것이 집단 최면에서 깨어나는 방법이다.

피겨 문외한이 본 김연아의 특징, 그리고 예찬


김연아의 특징은...

1. 피겨 선수가 아니라 피겨 예술가다.
과거에 유명하다는 피겨 선수들의 경기 중계를 본 적도 있다. 그들의 느낌과 김연아의 느낌이 다른 건 딱 하나다. 과거(김연아를 제외한 현재의 선수 포함)의 선수들은 시합을 하고 경기를 한다. 하지만 김연아는 예술을 하고 있다. 피겨 경기를 보면서 선수의 몸짓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음악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드러내는지를 느끼게 된 건 김연아가 처음이다. 이건 무척 신비한 경험인데 지난 시절 봤던 피겨 경기들은 대부분 점프를 잘하면 잘한다고 생각했고 스핀을 잘하면 잘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던 것에 반해 김연아의 경기 대부분은 저 선수가 어떤 감정을 표현하고 있고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하는지가 보인다는 것이다. 점프나 스핀, 기타 기술들은 모두 연기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느껴지게 한다. (과장하면) 빙상 위의 발레리나와 같다고 할까. 스포츠 선수가 아닌 예술가. 김연아는 스포츠 선수로 출발해서 예술가의 경지로 달려가고 있고 이미 어느 정도 성취를 이뤘다고 생각한다.

2. 계속 성장한다.
솔직히 유명한 스포츠 스타들을 보면 갈수록 한껏 정점에 오른 후에는 갈수록 원숙해지는 느낌인데 김연아는 그냥 계속 성장한다. 몸은 계속 유연해지고 표정은 갈수록 풍부해지고 감정은 화산처럼 폭발한다.

3. 연기를 위한 점프를 한다.
위와 중복되는 이야기지만 김연아와 다른 선수를 비교해보면 다른 선수들은 점프를 위해 연기를 (대충) 한다. 점프를 잘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기는 경직되기 마련이고 점프에 대한 긴장감이 증폭되서 실수가 잦다. 하지만 김연아는 전체 연기를 위해 점프를 할 뿐이다. 물론 김연아 역시 점프에 부담이 없진 않겠지만 전체 안무를 위해 점프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착지 후에 연기로 연결되는 게 자연스럽고 전반적으로 일체감을 느끼게 한다.

4. 냉정하다. 무심하다(?)
소위 '쿨'하다는 것인데, 자신의 감정에 대해 별 숨김이 없고 실수에 개의치 않으며 성취에 대해 당당히 이야기한다. 이건 젊은 층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태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젊은 층들은 결코 '쿨'하지 않다. '쿨'하다고 불려지는 이들은 이기적일 뿐이고 무관심할 뿐이다. 선택도 빠르고 포기도 빠르다. 김연아의 행동양식은 그런 류의 것이 아니다. 발랄한 소녀가 대인배의 품을 가지고 있다랄까.

김연아는 이 외에도 많은 특징, 장점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단점도 있고 부족한 점도 많을 것이다. 위 내용은 김연아를 '신성화'하는 게 아니라 피겨 문외한이 피겨를 보며 짜릿한 감동을 느꼈기 때문에 그 감정이 신기해서 생각해 본 일부분일 뿐이다. 김연아가 한국인이라서 혹은 미디어에서 자주 등장했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이 아니다. 피겨 스포츠를 즐겨보는 것도 아니고 '애국'을 들먹이며 단지 한국인이란 이유로 쌍수를 들고 응원을 하는 건 몸서리치며 경멸하는데...어찌...(해설이 긴 것도 병인양 하여...)

아무리 생각해 봐도 김연아는 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