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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12일 화요일

개새끼

개는 먹을 걸 주면서 길들일 수 있다. 만약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면 된다. 심하게 맞아 본 개는 때린 사람의 무서움을 기억한다. 먹을 것과 채찍을 병행하면 개들은 충분히 길들일 수 있다. 말을 잘 들으면 먹이를 던져주고 잘못하면 때린다. 아주 단순한 행위의 반복이지만 시간이 오래될 수록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충성스러운 개가 된다.

내 맘에 들지 않으면 짖고 물어 뜯다가도 조금만 잘해주면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꼬리를 흔들어 대는 건 개들의 전매특허다. 경기(經氣)가 조금만 좋지 않으면 아우성을 보내고 내가 살고 있던 집 가격이 치솟으면 환호를 보낸다. 정작 변화가 필요한 곳, 정작 개선이 필요한 곳에는 눈도 돌리지 않는 건 왜일까. 잘못한 건 잘못한 것이고 개선해야 할 것은 개선해야 한다. 잘잘못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한다.

당장 눈 앞의 '내 이익'에만 쌍심지를 켜고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은 정부가, 권력이 아주 좋아하는 조련 대상일 뿐이다. 가령 세종시 원안에 찬성을 하던 사람이 수정 안이 나오면 반대를 하다가 수정안이 자신이 유리한 쪽인 것 같으면 다시 찬성으로 돌아선다. 이 뿐인가. 좋아하는 정부, 지도자건 싫어하는 정부, 지도자건 잘하는 일이 있고 못하는 일이 있는 건 당연하다.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에 대한 살핌과 통찰없이 그들이 던져주는 먹이에 일희일비한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지조없는 이들의 양심엔 털이 수북하게 날 거다. '울다가 웃으면 똥구멍에 털이 난다'는 말은 진실이다.

개가 되느냐, 사람이 되느냐를 선택하는 건 약간의 불편함이 수반될 뿐 어려운 결정은 아니다.


2010년 1월 8일 금요일

소문

 

갑자기 '김연아 소문'이란 검색어가 보였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내 블로그에도 이 정도로 들어오는 걸 보면 많은 사람들이 검색을 하고 있다는 뜻일 거다.(내 블로그 글은 "김연아, 소문, 무료배송, 대마초, 서경석, 외국어, 미국, 종부세, 선진국, 후진국"인데 모두 낚인 거다.-_-;)

 

무슨 내용인지 기사를 봤더니 "일본의 압력에 의해 4대륙대회에 출전한다"는 요지의 내용이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을 25일 앞두고 컨디션 조절을 해야해서 불참을 원했는데 일본의 압력과 강요로 인해 출전한다...는 뭐 그런 내용이다.

 

기사를 읽으면서 김연아 선수는 인터넷을 자주 하는 것 같던데 이런 기사를 읽으면 어떤 마음이 생길지 궁금했다. 혹 이런 기사들이 김연아의 심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유명해지는 만큼 루머도 많아지고 유명세에 시달린다고는 하지만 대놓고 '소문'이라는 기사가 너무 많다.

 

'소문'의 진원지는 어디의 누구일까. 혹은 그 '소문'을 확대, 재생산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만약 그 소문이 단지 소문일 뿐이라면 소문에 대한 '주의'와 '경고'의 메시지도 함께 돌아다녀야 할텐데 '소문'은 '진실'이 되거나 진실이 아닌 소문은 그냥 연기처럼 사라질 뿐이다. 한 번 전파되기 시작한 '소문'은 사람들에 의해 키워지고 부풀려져서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거대한 괴물이 되곤 한다.

 

소문은 소문 자체로 전파되기도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는 속담처럼 진실을 품어안고 소문이 탄생되기도 한다. 이는 진실을 진실대로 말하지 못할 경우에 자주 일어난다. 마지막 하나는 진실을 감추기 위해 소문이 탄생되는 것이다. 추악한 진실을 감추기 위해 완전히 다른 내용의 소문을 퍼트리면서 진실을 감추는 것이다.

 

매체와 기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소문(이슈 또는 '~설')'를 만든다. 사람들은 '소문'을 쫓고 소문을 쫓는 사람들에 의해 때론 엉뚱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기도 하고 반드시 처벌되어야 할 범죄자들이 몸을 숨긴다. 소문 그 자체로 피해(또는 이득)를 보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가 계속 소문을 확대재생산하기 때문에 피해(이익)를 보는 것이다.

 

수 많은 검색어가 난무하고 실시간 검색어가 중요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밀물처럼 몰려드는 정보들에 '부회뇌동(附和雷同)'해서는 안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완전한 사실로 증명되지 않은 정보들에 대해서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는 여유도 필요할 것이다. 특히 기사들의 행간(行間)을 읽는 법을 키워야 한다. 행간에 보이지 않는 활자로 적힌 내용은 기사 전체를 다시 읽을 수 있는 묘미를 주기도 하고 '진실'을 전하는 '키(key)'가 된다.

 

죽도록 미워하면 닮아간다고 했던가. 찌라시 기자들, 양심없는 기자들이 써내는 기사와 사이비 언론들이 쏟아내는 정보에 날 선 비판을 하던 사람들이 스스로가 '기사'를 생산해 내는 위치를 갖게 되면서 그들과 닮아가는 꼴을 보게 된다. 일반인들이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정보'와 '소문'을 받아들이는 피동적 위치에서 '소문'과 '정보'를 능동적으로 생산해 내는 위치가 된 것이다. 자신의 손가락을 통해, 키보들 통해 써진 글들이 대중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때 느껴지는 쾌감이나 달콤함의 유혹은 떨쳐내기 힘들다. '기자윤리'를 강요하던 시대에서 '네티즌윤리'가 중요해진 시대로 바뀐 것이다.

 

누군가가 맛있는 뼈다귀를 던져주길 기다렸다가 눈 앞에 떨어진 뼈다귀를 향해 미친듯이 달려들어 물어뜯는 개가 되기 보다는 스스로의 입맛과 취향에 맞는, 스스로가 원하는 양질의 음식을 찾기 위해 'explore'하는 '사람'이 되는 게 더 낫다.

2009년 9월 27일 일요일

1박2일과 패밀리가 떴다, 그리고 무한도전의 차이점 하나?

TV를 보면서 '1박2일'과 '패밀리가 떴다'와 '무한도전'의 차이점이 뭘까 생각해 봤다. 워낙에 각 프로그램들에 대한 평가도 많고 팬들도 많기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말 할 거리가 있는 건 아닌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프레임 안에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

다시 말하면 '1박2일'은 연기자들이 만나는 일반인, 그들과 함께 동행하는 스태프들이 자주, 적극적으로 '프레임 안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반면 '패떴'은 프레임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최대한 막으며 절제한다는 것이다. '무한도전'은 '1박2일'과 '패떴'의 중간지점 정도가 될 텐데 바로 이 차이, '프레임 안에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가 '리얼'의 지점을 가르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시청자들은 누구나 다 연기자들은 연기를 할 거라고 생각을 한다. '리얼'을 표방하더라도 '대본'의 존재를 인지하며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은 일종의 '합'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연기자들이 만나는 일반인들은 짜여진 각본(대본)에서 자유로울 뿐 아니라 스태프들 역시 모든 스태프들이 대본을 숙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카메라 프레임에 연기자 외의 사람들이 등장할 경우 '리얼'의 효과와 주문은 상당한 시너지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건 비단 이런 오락프로그램 뿐만은 아닌 것 같다. 정치인들의 행보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정치인은 자신의 '각본'을 일반인들에게 노출시키며 의도되지 않은 '리얼'을 맞닥트리고 극복해가지만 어떤 정치인은 자신과 일반인들을 최대한 자신이 원하는 '각본'안에 가둠으로 인해 가식적이란 비난과 서민을 기만한다며 욕을 얻어먹는 것이다. 똑똑한 정치인이라면 자신의 정치행보라는 프레임 안에 어떻게 '사람'들을 등장시켜 최대한 자연스러운 '리얼'을 연출할 것인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당연히 그러한 '리얼'은 많은 신체적 괴로움과 정신적 피로감을 동반한다. 하지만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보람과 즐거움으로 채워질 것이다.

다시 오락프로그램으로 돌아오면... 그렇기 때문에 '패떳'은 갈수록 재미가 없고 가식적일 수 밖에 없으며 '1박2일'은 가끔씩 따뜻한 정서를 담은 화면들을 선사하는 것이다. '무한도전'은 감독의 각본이 탄탄하지만 감독 역시 때론 적극적으로 프레임 안에 개입하고 일반인들도 조금씩이지만 프레임 안에 등장함으로 인해 '다큐'같은 '오락'을 만들어낸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거기에서 '강호동'과 '유재석'의 갈림길이 생긴다. 유재석은 일반인들과 소통할 때 거리를 두는 반면, 강호동은 일반인들과 소통하는 데 비교적 자연스럽다.(하지만 난 강호동의 시끄러움이 싫다.)

어차피 미디어에서 보이는 대다수의 것들 중 진정한 '리얼'과 '다큐'는 거의 존재하지 않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런 '자연스러움'을 즐기려는 수요가 늘어가는 만큼 '프레임 안과 밖의 사람'이 중요해지고 그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이 머문다.

2009년 1월 1일 목요일

그들은 너를 미워하리라 - 한 해를 보내며...

Tell people something they know already and they will thank you for it.
Tell them something new and they will hate you for it.
그들이 이미 아는 것을 말해주어라. 그러면 그들은 너에게 감사하리라.
그들에게 새로운 것을 말해주어라. 그러면 그들은 너를 미워하리라.

유명한 저널리스트 몬비오의 블로그에 써있는 글이다.

저널리스트가 한 말이지만 저널리스트가 아닌 내 일상의 삶에서도 자주 접하는 문제긴 하다.

누군가에겐 의견을 피력하기가 쉽지 않다. 자신이 좋아하는 말만 골라서 듣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나의 진심이나 말과 언어의 본질보다는 내 태도와 외형에 더 신경을 쓰는 나머지 고민해서 내놓는 좋은 의견도 불평불만으로 받아들이며 늘상 해왔던 일상적인 내 몸짓 하나도 그 사람에겐 불쾌한 공기흐름을 만들어내는 건방진 태도에 불과하다.

그 누군가에게 정작 필요한 말을 감추게 되는 이유는 딱 두 가지다. 하나는 내가 그보다 훨씬 대단하다는 오만함에 의한 상대방을 향한 비웃음,  다른 또 하나는 반복되는 자괴감에 의해 그에게 더이상의 노력을 기울이기 싫어지는 귀차니즘이 바로 그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그가 나를 미워하는 게 싫다는 착한사람 컴플렉스의 발동일 수도 있고 또는 오랜 시간 내 진심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내 안에서도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싹트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런저런 이유들을 해결하기 힘들거나 귀찮다고 해서 그에게 그가 듣고 싶은, 그가 이미 아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진 않다.  물론 내 생각과 의견에 대한 오류가 발견되면 언제든 인정하고 수정할 자세는 되어있다. 받아들이기 아무리 아프고 힘든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많은 경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간질을 하거나 험담을 하거나 사실을 날조해 퍼트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로 인해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악화되고 때론 공멸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존재보다 더 위험한 것은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 것이며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만 가까이 하는 것이다. 스스로 진실과 객관의 세계로부터 단절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방성으로 인해 위안받고 힘을 얻으며 사실과 진실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조금 불안한 것은 나 역시 인간인지라 당장 눈 앞에 벌어지는 상황들(나를 험담하고 이간질하거나 내 의견이 전혀 통하지 않는 어떤 상황들)에 대해 인내심을 오래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가끔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굳이 "사필귀정(邪必歸正)"에 기대지 않더라도 스스로가 알고 있는 보다 나은 가치와 삶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좀 더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강해져야 하고 더욱 공부해야 하며 더욱 활동해야 한다.

돌아오는 기축년(己丑年)에는
주변의 환경에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쉽게 휘둘리지 않으며
주변의 상황에 따라 취사선택이 쉽게 번복되지 않으며
주변의 험담과 손가락질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참 마음과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을 자주 갖고
참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실천을 자주 하며
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공부를 더 해야겠다.

2009년 새해엔 이성을 더욱 냉철하게 무장하되 감정에 더욱 충실하도록 노력하자.
새해에 복 많이 짓고! 받도록! 하자.



2005년 1월 21일 금요일

사람과 사람들...

어제 알고 지내던(?-자주 만나지는 않았으니...현재 진행형은 옳지 않다.) sicaf 분들이 왔다. 와서 북적북적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술고픈 눈빛을 주고 받은 후 (극구 사양하던 사람도 결국 다 마시더라.-_-;)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와 얘기를 안주삼아 시간을 보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흐르는 기운이란 건 확실히 세월을 지내봐야 확연해지는 것 같다. 어색한 기운들이 사라지고 편한 기운이 느껴지는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건 어쩌면 그 자체로서 생명과 생명, 혹은 같은 개체끼리의 해후로 인해 유전인자나 호르몬이 반응하는 건 아닐까.

사람이던 동물이던 사물이던 자신의 손길이 닿고 때가 묻으면 마치 자신의 세계(우주) 안으로 흡수되는 것 같다. 만약 상대방도 그렇다면 우리들의 관계는 벤다이어그램의 교집합과 같은 상태에서 수많은 교집합 군을 만들어내며 살아가는 것 같다. 그 부분이 많아지고 가득차면 자신의 공간을 잃게 될까 두려움에 또 훌훌 털고 벗어던지고 떠나기도 하면서...

그리 오래 만나지 않은 사람들이면서도 편하게 얘기할 수 있다는 건 그네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인 것 같다. 한참을 이런저런 소소한 얘기들을 하고 또 한참을 심각한(?) 얘기들을 하고는 지하철 시간 때문에 자리를 떴다. 어떤 때는 시간의 관계없이 삶의 스케줄에 얽매임 없이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건 어떨까.

하긴 내 자신이 깊지 않으면 얘기할 꺼리도 바닥을 보일테고 관계가 깊지 않으면 말 없음을 지루하게 느끼겠지. 그래도 편한 느낌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는 건 무척 좋은 일이다. 얼마전 벗과 함께 오랜 시간을 있으며 적은 술과 많은 얘기를 나눌 때의 느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