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자유인
구름을 주워 호주머니에 넣었더니 온 몸에 바람이 분다. 이젠 떠날 채비를 해야겠다.
2010년 5월 12일 수요일
서호(西湖)
2002년에 처음 가본 항주 서호(杭州西湖), 그 이후 2004-5년 즈음에 한 두 번 더 가봤을까. 다시 갔을 때는 서호를 제대로 본 기억도 없는 것 같다. 여전히 내 머릿속에는 2002년에 처음 본 안개 가득한, 비가 내려 촉촉히 젖은 운치있던 서호만이 기억날 뿐이다.
그리고 2010년 항주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갔다가 없는 시간 쪼개서 저녁에 잠깐 가 본 서호는 그야말로 신천지였다. 낮의 모습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밤의 서호는 많은 사람들이 산책하기 위해 휴식을 위해 몰려드는 관광명소가 되어버렸다. 예전의 운치있는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즐비한 명품점과 찻집, 커피숍, 술집들이 즐비했다.
이번에 본 서호 물론 아름다웠다. 도로 정비도 잘 되어있었고 씨티사이클 제도이나 조경 등 전체 설계가 참 괜찮았다. 다만, 내 기억 속의 서호와는 너무 큰 변화였기 때문에 그저 신음에 가까운 감탄만 뱉어낼 수 밖에 없었다. 평생 다시는 안개 자욱한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서호를 볼 수 없다는 게 아쉽다.
아름다운 야경 속에서 기억을 더듬으며 운치있는 서호를 거닐던 모습을 떠올리는 것조차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면서 한 편으론 지금의 서호 근처에서 휴식을 취하며 자연과 문명을 향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린다.
2010년 5월 9일 일요일
중국 애니메이션 일대종사 터웨이(特伟)
CICAF 첫 인상은 무척 규모가 크다. 정말 화려하게 준비했다라는 인상이 강했다. 특히 이번엔 특별초청인사로 아바타 아트디렉터 등과 쿵푸팬더 감독 등이 방문을 하는 등 '돈 많이 들였다'라는 느낌이 많았다. 그 외 초청인사들도 대부분 국제적으로 명망이 있는 저명인사들인지라 이번 행사는 그야말로 '별들의 잔치'가 아닌가 싶을 정도 였다. 그들과 관련된 행사는 입장료만 500원-1000원(인민폐)에 육박하는지라 가서 볼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솔직히 별로 듣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일단 겉으로 보고 들은 규모만으로는 정말 중국다운 스케일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행사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느낀 감상은 그야말로 '실망'이었다. 보안 검색대는 사소한 물병하나도 지니지 못하도록 엄격한 듯 보였지만 간혹 행사장 근처에서 담배를 피거나 물을 마시는 사람들이 보였고 경비를 맡은 이들의 보안의식은 느껴지지 않았다. 매표소에는 사람들이 편하게 글을 적거나 명함을 집어넣은 곳조차 없이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어 내외국인 전문가들은 불편함을 느껴야만 했다. 행사장에는 지하, 1층, 2층으로 구분이 되어있었는데 만화, 애니메이션을 위한 페스티벌이라기 보다는 크고 작은 상점들이 가득한 장터가 된 느낌이 강했다. 앙시나 히로시마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서울의 SICAF, 부천의 PISAF를 다녀본 나로서는 실망할 수 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터웨이(特伟)' 감독에 대한 것이다. CICAF에서는 이번에 터웨이 감독 회고전을 준비했다. 터웨이 감독은 국제시사만화가로 시작했지만 후에 '피리부는 목동(牧笛)', '산수정(山水情)', '올챙이 엄마를 찾아(小蝌蚪找妈妈)', '오만한 장군(骄傲的将军)' 등 중국 애니메이션 초창기에 한국의 신동헌 감독, 일본의 데즈카 오사무 감독과 같이 중국 애니메이션의 부흥기를 주도했던 중요한 인물이다. 특히 그가 만들어 낸 '수묵 애니메이션'은 현재 그 누구도 다시 재현할 수 없을 만큼 기술적, 예술적 성취도가 높은 작품으로 당시 중국의 애니메이션 창작에 대한 열정과 기술력을 세계에 알린 중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초대 대표로 있었던 '상해미술영화제작소(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중국 애니메이션의 심장이라 불릴만큼 상징적이었고 당대에 만들어 냈던 수 많은 단편 애니메이션들은 캐나다의 NFBC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현재 '상해미술영화제작소'는 여의주 잃은 용이 되었고 여의봉없는 손오공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그 위엄은 간직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를 따랐던 수 많은 애니메이션 감독들은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창작 애니메이션을 만들며 부흥기를 이어갔지만 애석하게도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그들의 모든 재능과 미래를 앗아갔고 중국의 애니메이션은 맥을 끊기고 말았다. 다시 애니메이션에 집중하려했을 때는 이미 중국의 대부분 애니메이션 회사들은 하청업체로 전락한 상태였다. 그러다 다시 조금씩 창작 애니메이션에 대한 희망을 일으키며 전국 곳곳에 애니메이션 관련 대학들이 생겨났고 애니메이션 회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 CCTV 등이 앞장서서 애니메이션의 부흥을 외치고 있는 중이다.
이렇듯 중국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위대했던 터웨이 감독은 작년에 95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이를 계기로 CICAF에서 터웨이 회고전을 준비했는데 회고전 장소를 가보고는 질색을 하고 말았다. 지하 전시실 외진 구석에 별다른 영상물도 없이 사진과 작품 이미지만 잔뜩 붙여놓고 '중국 애니메이션 일대종사 터웨이'라고 써놓은 것이다. 문득 가슴이 아팠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감독이 자본과 정부의 '애니메이션 놀음 잔치'에 찬밥 신세가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CICAF는 항주시에서 적극적으로 투자를 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관련 행사다)
중국은 현재 전국 곳곳에서 애니메이션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애니메이션 육성기지를 건설하는 등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는데 그저 허장성세에 불과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터웨이 감독이 푸대접을 받고 있는데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을 집중하고 산업을 육성한다는 게 오히려 괴이하게 여겨졌다.
그러다 문득 한국의 신동헌 감독이 생각났다.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풍운아 홍길동'을 만들고 7개월 후에 다시 '호피와 차돌바위'를 만들었던 신동헌 감독. 애니메이션 회사들의 횡포에 견디지 못하고 애니메이션 계를 떠났던 위대한 애니메이션 감독. 일전에 모 방송국에서 방영한 신동헌 감독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그가 만든 '풍운아 홍길동' 원본 필름을 찾으로 '데즈카 프로덕션'을 방문했던 장면이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초라한 노신사 신동헌이 방문했던 데즈카 프로덕션은 데즈카 오사무 감독의 작품들로 너무도 멋지게 장식이 되어있었고 그의 명맥을 훌륭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반면 신동헌 감독은 자신의 필름을 고국이 아닌 이국타향에서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아프게 했다.
한국과 중국의 모습은 다른가. 홍길동 기념사업회도 있고 홍길동 복원프로젝트도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신동헌 감독은 중국의 터웨이 감독의 모습과 겹쳐있다. 한국의 애니메이션 정책, 산업, 교육 역시 중국의 그것과 겹쳐있다. 애니메이션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에 대한 푸대접은 서글프기만 하다.
중국 항주에서 터웨이 감독의 초라한 회고전을 보며 터웨이 감독과 신동헌 감독을 위해 뭔가 조촐하게라도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하다면.
2010년 4월 23일 금요일
외로움
'오빠, 아직도 외로워요?'
'응? 언제 내가 외롭다고 했던가?'
'아니, 그렇게 보여요.'
'아... 음...'
사실 대화하는 내내 나도 내 표정이 좀 슬픈 듯 했는데
세심한 녀석은 기어이 묻고야 만다.
'사실, 다 외로운 것 아닌가?'
'..... 그런가요?'
뻔한 답변이지만 그 대답으론 녀석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렇다고 속을 다 드러내 보일 수는 없는데
내 눈은 상대방을 속이는데 익숙하지가 않다.
입은 웃고 있어도 눈에 머문 외로움은 쉽게 떨구어지지 않는다.
'언제 외로움을 느껴요?'
'그러게... 꼭 외롭다고 느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또 언제 만날지 모르는 상황이라 꼭 듣고 싶은 시선을 보낸다.
잠시 망설이다 이윽고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
아니, 사실 어쩌면 조금은 녀석과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같은 방향을 보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쉽지 않는 것 같아.
설령 결혼한 사이라 해도 닭살이 돋을 만큼 공명을 한다는 건 쉽지가 않잖아?
물론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상대가 세상에 존재할지 어떨지 모르겠어.
가령, 과거에 어떤 사람의 글을 읽고 흥분이 된다 하더라도 실제 그 사람과 함께
삶을 공유하고 같이 생활하다 보면 스스로의 환상과 이상이 무너지기도 하는 것처럼.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기엔 버겁고 그걸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다고 느껴지는 어떤 날,
가끔이긴 하지만 외롭다고 느껴져.'
'전에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역시 함께 삶을 공유하게 되면 또다시 원점이 될지도 모를 일이지.
겪어보지 않은 일을 가지고 말을 하긴 뭐하지만...'
조금은 공감하는 표정을 짓던 녀석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그리고 마치 나비의 날개짓처럼 가볍게 하지만 의미있게 입을 열었다.
'...그 맘,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문득 녀석이 고맙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왈칵 외로움이 밀려왔다.
만약 술이라도 마셔서 취기가 오른 상태라면 눈물이 흘렀을지도 모르겠다.
취기에 그 분에게 전화했던 때처럼 소리내며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알 것 같다니, 내가 고맙다.'
어두워지만 창 밖과는 달리 녀석의 표정은 조금씩 밝아졌다.
난 계속 가슴 속을 누르는 상태가 되고 얼굴을 조금 발갛게 달아올랐다.
녀석이 고마웠고 내 자신이 힘겨워보였다.
이런 종류의 외로움과 고마움은 아주 가끔, 아무때나 찾아온다.
내일이면 표면 위로 증발해버릴 가벼운 무게 정도,
하지만 언제나 주변을 맴돌며 내 호흡기를 드나들 외로움 따위.
나를 위로하던 녀석을 눈을 바라보며 어깨를 토닥이다
다시 울컥하고 말았다.
언제부터 그랬던 것일까. 난.
2010년 4월 22일 목요일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우한에 온지도 이제 2달째 접어든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 일을 했는데 5-6년 전 정신없이 일했던 어느 해가 자주 겹쳐진다. 아직도 서툰 중국어로 강의하고 회의하고 소통하며 일하고 있는 나를 돌아보며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전보다 더 자주 생각하게 된다. 몇 번이고 중도에 그만두려고도 생각했지만 주변의 스승님과 동료들과의 대화를 통해 다시 마음을 추스리며 버텨왔던 세월의 흔적들을 지금 조금씩 다시 풀어놓고 있는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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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게 누군가는 '너무 겸손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지금도 학생들 앞에 서거나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면 '자신있음'보다 '자신없음'이 먼저 고개를 든다. 어쩌면 이런 긴장감이 나를 더 다잡게 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노력하지 않는 내가, 좀 더 공부하지 않는 내가 보일 때마다 부끄럽고 왜소하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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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잡부'라고 말할 만큼 이 판에서 안 해본 게 없지만 늘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그만그만한 정도에 머무른 능력을 생각해보면 참 용케도 버텨왔다 싶다.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끼는 건 '원리'를 아는 것 만큼 좋은 건 없다는 것. 프로그램을 다루거나 사람을 만나거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원리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정말 천지차이인 것 같다. 20대 초반에 열심히 '수행'하면서 느꼈던 그 감정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것 같기도 하다. '원리'를 향해 달려가던 젊은 날, 조금씩 알아가는 지금, 주변이 조용해지는 상황이 되면 어김없이 내 삶의 원리와 도리에 대해 화두를 품게 되는 건 고질병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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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넘겨내고 있다. 때론 즐겁고, 때론 뿌듯하며, 때론 힘겨운 날들을.
2010년 2월 24일 수요일
희망을 품으며 희망을 경계한다.
'희망'처럼 상투적인 단어도 없지만 '희망'이란 말처럼 꿈을 꾸게 하는 단어도 많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희망을 자주 말하는 걸 경계한다. 희망없는 세상에서 희망은 너무나 쉽게 나오는 말이기 때문이다. 희망이란 말을 하면서 자신의 희망을 타인으로부터 취하려는 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나와 너의 희망이 같아지려면 꽤 오랜시간을 대화하고 소통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가끔은 희망을 품는다. 조심스럽게, 급하지 않게 희망을 품는다. 그리고 너에게, 나에게 몇 번이고 묻는다. 희망이 무엇인지, 품어도 되는 희망인지. 급하게 품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경박하게 품는 희망 역시 희망이 아니다. 희망은 기다림이다. 흐르는 시간을 지켜봐야만 하고 그 시간 속에서 조금이라도 변해가려는 의지가 전보다 확고해져야 한다.
지금 당장 불만이라고 해서 희망을 품거나 희망이 금새 오지 않는다 해서 버리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어쩌면 여러 차례의 기회라고 생각되는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될 즈음, 어쩌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즈음, 꺽인 허리를 펴고 기력없는 다리를 움직일 즈음 희망은 생겨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희망을 품는 게 아니라 희망이 나를 품어 일으키는 지도 모르겠다.
무겁게 매달린 귤들이 모두 떨어져도 절대 먹지 않고 그대로 버린다는 지인(知人)의 소위 '부자 귤나무'. 눈 앞에 싱그럽게 매달린 과실을 보면서도 먹지 않아야 하고, 바닥에 떨어져도 아까워하지 않고 버려야 하는 나름의 규칙은 기다림과 인내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모든 귤들이 떨어지고 버려진 후에 다시 열매 맺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2010년 2월 22일 월요일
호수
마음의 크기와 같다면,
품어 안을 수 있는 넓이와 같다면,
큰 일렁임 없이 고요할 수만 있다면,
오랜 세월을 여여하게 지켜낼 수만 있다면,
세상을 그대로 투영해 낼 수 있다면,
하늘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저 묵묵히 흘러갈 수만 있다면,
주변을 촉촉하게 적실 수만 있다면,
깊은 색깔을 가질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2010년 2월 20일 토요일
새해엔 달콤하시라고 증지위가 권합니다.
홍콩영화의 감초, 증지위를 잘 아시지요? '첨밀밀'에서 미키마우스를 문신했던, 쓸쓸하고 비극적 최후를 맞았던 그 배우 맞습니다. 증지위가 나오지 않는 영화가 없을 정도로 참 많이도 등장하죠. 일설에 의하면 증지위가 연예인들이 자주 가는 미용실에서 일하고 있던 유덕화를 발굴해 낸 장본이라고도 합니다. 영화에서만 보던 증지위를 춘절(chūn jié;춘 지에-한국의 '설')에 마트에 갔더니 이렇게 활짝 웃으며 사탕을 권하고 있네요. 사실 한국의 연예인들의 상품광고에서 보는 거랑 별 다를 바가 없는데도 괜히 기분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왼쪽에 노란 글씨로 크게 적혀져 있는 글은 新年糖(xīn nián táng;신 니옌 탕-새해 캔디?)이고 오른쪽 분홍 글씨로 적힌 글은 酥心糖(sū xīn táng;쑤 신 탕-브랜드 이름인 듯 합니다.)이네요.
새해엔 달콤한 사탕을 먹으면 좀 더 행복해지려나요?^^
새해 복 많이 짓고 받으시고 그리고! 달콤해지세요. :)
한 가지 더,
중국에서는 새해가 되면 집 안에 전구가 들어있는 복(福)자가 적혀진 빨간 종이 등을 밤새 걸어두기도 하구요. 현관문에는 春联(chūn lián;춘 리옌) 또는 对联(duì lián;뚜이 리옌)이라고 하는 종이를 좌우로 붙이고 가운데는 뒤집어진 복(福)자를 붙여두고 위에는 역시 복이 들어오기를 기원하는 글을 붙여두는데요. 이건 춘 리롄 혹은 뚜이 리옌은 한국에서 현관이나 문기둥에 '입춘대길', '만사형통'과 같은 글을 써서 붙여두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리고 위 사진과 같이 집 안 내부 곳곳에 그 해에 맞는 띠 동물로 된 그림들을 걸어둡니다. 올해는 호랑이 해인 만큼 집 안 곳곳에 호랑이들이 넘쳐나죠. 사진 속 호랑이는 분홍색을 띠고 있는 걸 보니 여자 호랑이네요. 그림은 모두 남/여성 한쌍으로 되어있습니다. 호랑이가 들고 있는 글자는 恭喜发财(gōng xǐ fā cái;꽁 씨 파 차이-돈 많이 버세요)이라고 적혀있네요.
중국에서 춘절에 서로서로 '꽁씨파차이'라고 말하면서 덕담을 건넵니다.
집집마다 다르겠지만 춘절에 걸어 둔 그림들은 일년 내내 두었다가 새로운 해가 되면 내리고 다른 그림으로 교체해 걸곤 합니다.
중국의 춘절은 한국의 설보다 훨씬 더 북적거리는 것 같습니다. 하긴, 1년 동안 잘 모아둔 돈을 춘절에 다 쓴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중국의 경제 역시 춘절에 크게 들썩거리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춘절에 쉬는 날이 한국의 두 배 정도 되는 게 가장 부럽습니다.-_-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