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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18일 월요일

다우트(Doubt) - 수구와 보수의 대결


영화 다우트(Doubt)는 수구(Meryl Streep 분)와 보수(Philip Seymour Hoffman 분)의 대결이라 생각했다.

수구(守舊): 옛 제도나 풍습을 그대로 지키고 따름.
예) 아직도 수구 사상은 완고하게 뿌리가 박혀서 학교 직원 중에도 머리를 깎자면 모두들 질색하였다. 출처 : 이기영, 봄

보수(保守): 보전하여 지킴,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반대하고 전통적인 것을 옹호하며 유지하려 함.
예) 그 나라 사람들은 매우 보수적이어서 여자는 반소매도 입을 수가 없다.

사실 수구와 보수의 사전적 의미만 따져본다면 크게 다른 점이 보이지 않는다. 둘 다 과거의 것을 지키고 유지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수구는 보다 이기적인 면이 강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측면이 강하고 보수는 과거의 좋은 점은 보전하고 지켜가되 틀 안에서의 개혁은 받아들이고 용납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겠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보수의 기본 틀이 무너지면 종교는 종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며 보다 철학 쪽으로 기울게 된다. 종교에서 과거와 전통을 부정한다면 그건 종교의 기원, 교조를 부정하는 꼴이 되며 종교가 보다 열린 자세를 취하고 늘 변화무쌍한,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면 철학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신앙-믿음'이란 개념이 개입하면서 철학적 논의는 의미가 없어지게 되고 정도가 지나치면 광기로 흐를테지만 어떤 게 옳다 그르다를 논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모든 건 자신의 '행복'과 '안식'을 위해 취사선택을 하기 마련인데 그 자신을 '나'로 제한하느냐 보다 큰 '우리'라는 개념으로 '나'를 대치하느냐에 따라 (종교적) 보수와 수구가 나뉠 법 하다. 알로이셔스 수녀는 자신의 '의혹'에 확신을 갖게 되면서 플린 신부를 적대시하게 되었지만 본질은 자기 자신의 안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플린 신부는 수녀의 그런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 싸움 직전까지 가지만 결국 자신의 안위보다 '우리'의 평온을 위해 물러선다.

이건 작지만 아주 큰 차이다. '개인'과 '집단', '단기(短期)'와 '장기(長期)'의 차이기도 하다. 수구는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과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이익을 쫓는 반면 보수는 전체를 생각하고 장기적인 비전을 갖는다. 보수라는 게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게 가족, 사회,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생각과 행위를 하기 마련이다. 학습과 교류, 연대를 통해 보수 뿐만이 아니라 진보적 사고를 하는 것이다.

"doubt can be a bond as powerful and sustaining as certainty"

영화 시작 즈음에 플린 신부가 설교를 할 때 등장하는 문구인데 이 영화의 핵심을 담고 있달까. 알로이셔스 수녀가 마지막에 의혹에 빠졌음을 시인하고 통곡을 하는데 의혹(의심)은 확신과도 같은 견고함을 주기 때문에 의혹에 빠지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종교인의 입장에서는 '의혹'은 바로 신을 부정하고 모든 교리를 부정하는 에덴동산의 사과와 같아서 의심을 하는 순간 천국은 지옥으로 변하고 거대한 우주는 먼지로 변해 그 무엇하나 믿음을 댈 곳이 없게 된다. 의심하고 있는 자신을 제외하고.

그 의심을 거두고 물리치기 위해 올곧은 신념, 신앙을 갖기 위해 '종교'가 탄생했다. 종교의 탄생 후에 믿음의 행위가 생겨난 게 아니다. 인간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 불안함,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 모종의 행위가 시작되었는데 그 행위가 구체화되고 시스템을 갖춰가면서 종교가 만들어진 것이다. 믿음의 궁극에 서는 게 두 종류 쯤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믿음이 진리와 가까워지면 큰 틀(우주, 자연) 안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맞물려 돌아가되 무한한 자유를 얻고 영성이 밝아지고 맑아지는 반면 믿음이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욕심과 집단의 이기심으로 형성되면(우매하고 무지한 믿음) 최면에 걸린 것과 같아서 오히려 더욱 미혹해지고 타인과 나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내기 마련이다. 후자의 경우가 '종교는 아편과 같다'는 말과 일맥상통할 수 있다.

의혹이 생기는 순간(믿음이 사라지는 순간) 종교와 신앙도 사라지는 게 맞지만 믿음이 편협하게 흐르고 신앙이 수구적 형태를 띄게 될 때도 역시 종교와 신앙은 사라지거나 변질된다. 그 사이(間)라는 게 손등과 손바닥의 차이같아서 늘 참회하고 수행하지 않으면 참 종교, 참 신앙을 하기 어렵다.

다우트(Doubt)의 시대배경을 함께 생각해보면 사실 알로이셔스 수녀의 행위도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시대와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걸 한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기엔 무리가 있다. 물론 개인의 잘잘못을 이야기하고 개션해가는 과정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지만...

플린 신부와 알로이셔스 수녀의 대립이 고조될 즈음 플린 신부가 한 설교 내용은 영화의 줄거리를 압축해 놓은 부분이라 생각된다. 게다가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잘못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최근에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던 '인터넷 악플' 논란이나 과거부터 지금까지 쉽게 사용되고 있는 '좌파=빨갱이=북한'과 같은 이야기, 그 외에 수 많은 관계 속에서 쉽게 자행되는 행위들을 떠올려보면 아래의 설교 내용은 곱씹어 볼 만 하다.

한 여인이 친구와 함께 잘 알지 못하는 남자에 대해 소문(험담)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날 밤 그녀는 꿈을 꾸었다.
하늘로부터 거대한 손이 나타나 그녀를 가르켰다.
그녀는 바로 온몸 가득 죄책감으로 가득찼다.
다음 날 그녀는 고해성사를 하러 갔다.
그녀는 교구목사 O' Rourke신부를 찾았다.
그녀는 신부에게 모든 이야기를 했다.

"소문을 이야기하는 것도 죄입니까?"

그녀는 목사에게 물었다.

"나를 가르켰던 손은 전능하신 주의 것입니까?
당신께 사면을 구할 수 있습니까?
신부님, 말씀해주세요. 제가  뭔가를 잘못했습니까?"

"그래요"

O' Rourke신부는 그녀에게 대답했다.

"맞아요. 당신은 우매하고 무지하군요.
교양없는 여성이에요!
당신은 잘못된 시선으로 당신의 이웃을 봐서는 안됩니다.
당신은 그의 명성을 우롱했습니다.
당신은 마땅히 마음 속으로부터 수치를 느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여인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후 용서를 구했다.

"지금은 아직 안됩니다!"

O' Rourke신부가 말했다.

"집에 돌아가 베개를 가지고 옥상으로 가세요.
칼로 베개를 찢은 후 다시 날 찾아오세요!"

그리하여 그 여인은 집으로 돌아갔다.

침대 위 베개와 서랍 속에서 꺼낸 작은 칼을 들고서
옥상으로 간 후 베개를 찢었다.
그런 후에 단정하고 예의바르게 교구 목사에게 갔다.

"당신은 베개와 칼을 가지고 갔나요?"

목사가 물었다.

"네, 신부님"

"결과는 어땠나요?"

"깃털들 뿐이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깃털요?"

목사가 다시 물었다.

"사방이 온통 깃털들이었습니다. 신부님!"

"당신은 지금 당장 돌아가 바람에 날려 간 모든 깃털들을 주우세요!"

"아....."

그녀는 말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는 모든 깃털들이 어디까지 날아갔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O' Rourke신부가 말했다.

"바로 그것이 소문(험담)이란 겁니다!"



[record my mind] - 종교의 기본을 생각하다.
[record my mind] - 종교적 신앙과 진리적 신앙
[record my mind] - 한 목사의 막말 그리고 종교의 참과 거짓.

2009년 2월 23일 월요일

김수환 추기경 선종에 대한 다른 기억, 다른 생각

* 아래의 글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에 깊은 애도를 표하고 김추기경이 주님의 품에서 영생을 얻길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아래는 생각나는 감상을 적은 글일 뿐이다. 또한 아래에 링크로 소개한 글 중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선적(善積)을 소개한 글이 없어 형평성에 어긋나는 듯 하지만 그 분의 업적과 긍정적 평가는 지금도 여전히 신문, 방송매체에 넘치도록 소개가 되고 있으니 충분히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 소식을 들으며 그 분이 민주화를 위해 애썼었다는 생각과 더불어 그 분이 과거에 민심에 역행하는 발언들을 했다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런데 모든 매체에서는 김수환 추기경 선종 소식을 전하면서 민주화의 선봉, 대부, 양심이라는 수 많은 수식어를 동원하기만 했지 추기경의 지난 날에 대한 재조명은 이뤄지지 않았다.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도 역시 좋은 부분, 훌륭한 부분만을 집중 조명하더라. 어제(2월 23일)는 MBC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스페셜 특집 프로그램을 제작해 방송했는데 약간 한 편으로 치우친 감이 없지 않아 그 분을 이해하는데 썩 만족할 만하지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에 대해 흠을 잡기 위해 억지로 그러는 것도 아니고 지난 날 내 눈으로 본 신문기사, 귀로 들은 방송 등이 떠올라 김수환 추기경 열풍이 왠지 찜찜했기 때문이다. 시대의 한 어른이 남긴 발자취는 그 나름으로, 자체로 큰 의미가 있는 건 사실이고 추기경에게 크고 작은 사랑과 보살핌, 지원을 받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닌 걸 생각하면 김수환 추기경의 유해를 보기 위해 명동성당으로 발길을 옮긴 40만 여명의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작금의 대한민국 경제는 너무 힘들고 위정자들은 너무 무능해서 사람들의 마음은 기댈 곳 하나 없이 거센 풍랑에 일엽편주(一葉片舟)처럼 흔들리는데 김수환 추기경같은 시대의 어른이 선종에 임하셨으니 마음을 그곳에라도 귀의시키고 싶은 심정 또한 이해가 된다. 

그런데도 찜찜한 마음은 계속되었다. 방송3사, 신문매체, 인터넷 매체, 블로거 할 것 없이 그 분의 아름다웠던 생애와 위대한 삶에 대해서 '찬양'을 할 뿐 지난 날에 대한 실수(혹은 과오)와 잘한 것에 대한 해석, 재조명 등은 없었기 때문이다. 추기경의 선종에 대해 보통은 매일 밤 뉴스의 꼭지로 내보내며 10분, 혹은 그 이상을 할애하는 경우는 다반사고 그 분의 장례절차를 전국에 생중계하며 추기경의 장례가 마치 국장(國葬)같다고 감동스러워하는 멘트들이 흘러나왔다. 

또한 안구를 기증한 추기경을 따라 장기기증서약이 평소보다 300배 가까이 증가했다며 추기경의 영향력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추기경의 장기기증과 그 분의 영향력에 대한 것 보다는 불같이 일어나 장기기증서약이라는 또 하나의 센세이션을 만들어버린 일반 사람들에 대한 불편함이 생겼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건 알지만 스스로가 존경하는 사람의 행위를 본받고 싶어하는 마음도 이해가 되지마는 지난 날 헌혈, 골수이식, 각막이식, 장기기증 등이 세계 국가들 중 하위권에 속한다는 방송, 신문 보도가 한 두차례가 나간 것도 아닌데 추기경의 선종으로 인한 장기기증서약의 폭발적인 증가를 정상적으로 받아들이기엔 불편한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억지춘향으로 뒤집어 생각해보면 앞으로도 추기경만큼 위대한 인물이 돌아가시지 않는 한, 장기기증을 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에서 장기기증이나 골수이식, 헌혈과 같은 일들은 다시 감소할 것이고 사람들의 기억과 관심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라는 거다.

암튼, 추기경의 선종 소식에 온 나라가 떠들석 하지만 그 속에서 자꾸 지난 날 불편한 사실들이 뇌리에 스치듯 떠오르긴 했지만 알아보진 못하던 차에 몇 가지 글들을 접하게 되었다. 여기에 소개하는 글이 100% 믿을 수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사람들을 호도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고 단지 언론매체에 등장했던 내용만을 가져와 본다. 아래에 언급된 내용들이 스스로가 찜찜하다고 느껴지는 감정을 뒷받침하는 기억들의 부분적 사실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1970-80년대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 정권에 저항하면서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다. 이 사실만으로도 존경받을 수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정착하고, 더 나은 진보를 이루어가야 할 시기인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 이후 보여주었던 보수적인 행보는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그의 죽음 앞에서 무조건 칭송만 할 수 없는 이유다...

-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두 모습

...그가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사학법 개정 반대'의 입장을 내걸고 강경발언을 지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전까지 국가보안법 폐지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시국선언을 직접 낭독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2004년 개혁입법을 둘러싼 공방에서 그는 국보법 '폐지'를 반대하고 '개정'을 주장하는 쪽으로 전향했다. 그의 폐지반대 이유는 "“우리 사회의 친북 반미 풍조는 주체사상을 확대 전파하면서 국가안보를 위험한 지경으로 몰고 있기 때문에 국보법 폐지는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 김수환 추기경을 진정으로 추모하기 위해 알아야 할 역사

...시대의 양심으로 민주화와 약자를 위해 헌신한 공로는 인정하지만 일본군 장교전력과 친일파와 친일행위에 대한 침묵, 친일청산 반대,영남정권 인정을 바탕으로한 민주화,약자를 사랑한다면서도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약자였던 호남에 대해서는 냉정했던 점에 대해서는 가감없이 평가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본다...

김추기경 대국민 고해성사 아쉽군요

...김수환 추기경은 13일 "국보법 폐지는 아직 시기상조지만 개정은 필요하다"고 국보법 폐지 반대 의사를 밝혔다고 한나라당이 밝혔다. 그러나 김 추기경은 과거 여러 차례 국보법 폐지를 주장한 바 있어, 그의 이날 폐지 반대 발언을 놓고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 김수환 추기경, '국보법 폐지 시기상조' 논란

...김 추기경은 4일 발행된 ‘고대신문’과의 인터뷰에서 “1000여명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은 이제 내전 현관문까지 봉쇄해서 출입하는 사람들은 자기 집에 살면서도 숨어살듯 지낸다”며 “예배와 미사는 물론 교무처 일도 거의 볼 수 없을 지경”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물리적인 힘을 일절 사용할 수 없는 명동성당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성지를 사유물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항하기 위해 공권력에 호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밝혔다...

김수환 추기경 "명동성당 공권력투입 불가피"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서는 지극한 애정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한없는 비판정신을 보였다. 최근 두 차례의 대통령선거 때 이회창씨를 열심히 지지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치인들처럼 언론에 거론되지 않으면 심심한가 봅니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발언도 그런 차원 같아요. 김 추기경은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

- "김추기경은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국보법 폐지'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나라 전체가 반미-친북으로 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국보법 폐지 반대로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6.15 남북공동선언에 대해서도 "북한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하고 무익한 것"이었다며 폄훼했습니다. 사학법 개정에도 그는 적극 반대했고, 강정구 교수 파문이 일었을 때는 "그를 국보법으로 다스려야 하는데 정부가 '인권' 운운하며 그것을 막는 것이 참으로 혼란스럽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미국의 강압에 따른 이라크 파병 지지까지...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까지 이용해먹는 보수신문들

...“김수환 추기경께 편지를 써서 불의에 저항하도록 촉구해달라고 말씀드렸죠. 박형규 목사 등 개신교 사람들은 감옥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에 저항했지만 당시 천주교는 비교적 조용했습니다. 지학순 주교 외에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분들이 별로 없었죠.”...

- 미국인 신부, 인혁당을 기록하다


한 개인은 분명 평생을 살면서 잘잘못을 모두 저지르게 된다. 실수도 하게 되고 때론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얽히게 되기도 하며 사상의 변화를 겪기도 하고 생각과 마음이 변하기도 한다. 그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양태일 뿐이며 한 인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근거가 된다. 김수환 추기경이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다거나 사회의 여러 약자들을 위해 노력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이 때론 어떤 사람들에겐 왜곡된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때론 그 사실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사실만을 가려내지 않고, 진실만을 바라보지 않고 그 위에 어떤 감정과 사상과 이념을 덧씌워 판단하는 것이다.

위대한 인물은 전 생애가 하나의 흠결도 없이 깨끗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과(過)보다는 공(功)이 훨씬 더 많은 사람일 수도 있다. 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인물에 대한 공과를 정확히 기록하고 판단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도, 사회 구성원들에게도 이롭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안에서 잘잘못을 반추해보며 반면교사할 수 있다면 억지로 몰아가는 긍정의 힘보다 더 큰 힘이 발휘될 것이라 믿는다. 잘못은 덮고 잘한 것만 드러내려고 하는 한국 사회이기 때문에 위로부터 아래로 이르기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 참 드물다. 종교를 가지신 분들은 참된 '참회'가 어떤 것인 줄 알 것이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모든 종교의 교조들은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빈곤하고 약하고 힘없고 낮은 자들을 위해 당신들의 몸을 움직이셨다. 그것을 외면하는 순간 그것은 종교, 종교인이 아니다. 하지만 이 땅은 교조들의 정신을 외면하는 말과 행동에 대해 유난히도 관대할 뿐이다.


** 별개의 이야기. 자료 검색하다가 읽게 된 구절.

...호 신부는 성직자들의 이런 태도에 대해 평신도의 책임도 크다고 말한다. 성직자를 똑바로 세우는 것은 평신도의 몫인데, 평신도들이 ‘어리석은 백성’으로 남아 성직자의 말에 충실히 따르기 때문이다. 평신도가 신학을 제대로 알아야 성직자가 엉뚱한 소리나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호 신부는 믿는다....

종교 내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관계만 그럴까. 이는 정치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2008년 12월 30일 화요일

2008 MBC 연기대상 중 신동엽과 배종옥의 말말말...

2008 MBC연기대상 사회를 보던 신동엽이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말을 꺼냈다. 함께 사회보던 한지혜가 우수상을 수상한 후 "하느님께 감사한다"는 수상소감을 들은 신동엽이 한국엔 다양한 종교가 있는데 한 번도 부처님께 감사한다던가 절에 함께 다니다 알게 된 오빠 이야기(같은 교회 오빠 얘기는 종종 나온다며 빗대어..)는 왜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말을 하더라. 많은 스포츠 스타, 연예인, 공인들이 대중들 앞에서 "하나님"을 들먹이는 행위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들이 있었을 텐데 신동엽이 대신 공적인 자리에서 해준 거라 볼 수 있겠다. 조금 불안하고 위험한 발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종교를 가진 모든 이들이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덧붙이고 싶은 얘기가 많지만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해야겠다. 신앙은 개인이 하는 것이다. 신앙을 강요하거나 너무 공개적이 되거나 모든 대중이 함께 같은 믿음을 같게 되면 광기로 흐를 확률이 높다.

여자 최우수상을 받은 배종옥의 말 한마디도 기억에 남는다. 연예인들도 외로울 수가 있는데 배우분들 외로우면 서로 손을 내밀고 잡아줄 수 있다는 말. 어쩌면 연예인들끼리의 연대, 소통, 교감을 말하는 것인데 정말 인간적인 정이 듬뿍 묻어나는 한마디다. 무슨 라인, 누구 사단 등으로 이합집산을 하는 세태이긴 하지만 그보다 좀 더 포괄적인 인간, 배우들 간의 관계를 역설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시 배종옥, 그녀를 좋아할 만 하다.


사족.
어제 MBC연예대상도 그렇지만 이번 MBC연기대상 역시 공동수상자가 너무 많다. 배우들을 욕먹이는 행위일 뿐 아니라 옥석을 가리는 일을 너무 쉽게 하려는 경향으로 보인다. 특히 대상 수상자가 김명민, 송승헌 두 명이라니, 말이 되나.

문소리의 그녀가 진보신당 심상정 의원을 위해 애를 썼던 걸 생각하면 별 것 아니지만 MBC 시위/집회 지지 발언 역시연예인들 사이에선 단연 돋보이는 정치발언이었다. 모든 인간은 정치적임을 감안할 때 한국의 연예인들은 너무나 정치적이지 않을 뿐더러 기회주의적 속성으로 일관되는 경우가 많다. 연예인이 정치적인 걸 눈 뜨고 봐주지 않는 팬들이 더 문제이긴 하다.

강석우의 다문화가정에 대한 이해와 화합에 대한 발언도 인상깊다. 양희은과 함께 여성시대를 진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게 많을 거 같은데 라디오에서 접하는 강석우는 세심하고 여성스럽고 눈물많고 감성적인 부분이 많다. 물론 전형적인 한국의 남성상같은 부분도 적잖이 느껴지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약자에 대한 배려가 많이 느껴진다. 그런 부분들이 수상소감으로 이어졌겠지.

박근형의 손주야 할애비 상 먹었어요...라는 수상소감은 너무 흐믓해서 좋았고 이문세의 여유있는 수상소감에 짤막한 노래 한소절이 좋았다. 하지만 많은 배우들의 여전히 빠지지 않는 자기 식구 챙기기식의 수상소감은 내겐 여전히 듣기 불편했다.


2008년 8월 26일 화요일

한 목사의 막말 그리고 종교의 참과 거짓.

장경동 목사의 막말이 논란이 되고 있다. 불교가 들어간 나라는 다 못산다거나 스님들이 빨리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등의 막말을 한 것이다. 또 "내가 경동교(장경동교)를 만들면 안 되듯이 석가모니도 불교를 만들면 안되는 것이었다"라고 발언했다는데 자신을 석가모니와 동급으로 올려놓고 판단하는 억지스러움도 함께 보여줬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다. 아니, 대한민국의 헌법을 이야기 하기 전에 모든 종교는 배타적이어서는 안된다. 기독교사 공부를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은 예수의 말씀 중에 혹은 하나님의 가르침 중에 자신과 다른 무리들을 배척하고 무시하라고 한 적이 없음을 알 것이다. 혹여 있더라도 그건 상황논리에  따른 것이고 무지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 뿐이지 예수는 원수도 사랑하고 자신의 왼쪽 뺨도 내어주라며 무한한 포용과 사랑을 가르쳤을 뿐이다. 작금의 기독교, 소수(혹은 좀 더 많은)의 목사들은 그 가르침을 배반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예수의 대리자라고 혹세무민하고 있다. 장경동 목사가 딱 그렇다.

가끔 케이블 TV를 보다보면 정규 채널보다도 많은 기독교 채널을 보게 되는데 장경동 목사와 최일도 목사(다일공동체 목사)가 종종 나온다. 둘의 신앙간증을 비교해보며 들으면 누가 가짜고 누가 진짜인지 알 수 있다. 진짜 목사는 신도(청중)을 배려하며 설교를 한다. 그리고 한 면만을 강조하지 않고 다양한 면을 보여주고 열린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 자신의 신앙체험을 통한 설교를 주로 한다. 진짜 목사들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신앙하며 간증하기 때문에 신도(청중)들의 마음을 울리게 하는 힘이 있다. 가짜 목사들은 흥미와 재미위주로 설교를 하고 예수의 말씀 역시 부분부분 잘라서 자신의 입맛에 맞게 편집해서 이야기한다. 자신의 신앙체험은 갈수록 빈약해지기 때문에 세치의 혀만을 가지고 간증을 한다. 신도(청중)가 누구냐에 대해 고려하지 않으며 자신은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결국 신도(청중)들에게는 자신을 믿고 따르라고 강요한다.

사실, 세상에 나쁜 진리는 없다. 나쁜 시스템과 나쁜 전달자만 있을 뿐이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 이슬람교, 증산교, 원불교 등등 수 많은 종교의 가르침은 결코 나쁘지 않다. 종교 서적(경전)을 제대로 읽어보고 자신의 앎과 삶으로 조금이나마 반추해보기만 하더라도 알 수 있다.

모든 종교의 교조들은 스스로 종교(宗敎)를 만들지 않았다. 시대의 부름에 따라, 자신들의 깨달음과 신념에 따라 상황을 개선하고 참된 진리를 알려주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그 교조들을 따르던 제자들이 그들의 말씀과 행동을 채록하고 모아서 경전을 만들고 교조들을 존경하던 자들이 모여 집단(종교)을 만든 것이다. 교조들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해. 하지만 종교라는 껍데기, 허울이 생기면서 교조들이 말했던 진리는 자취를 감추게 되고 제자(전달자)들에 의해 왜곡되거나 재해석되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이 만든 종교 속에서 진리를 억지춘향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이들이 만들어내고 전파하고 있는 진리와 가르침은 참이 아니다. 그래서 종교를 믿는 신앙자들은 반드시 "종교적 진리"와 "진리적 종교"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내 앞에 있는 목사, 스님, 교무, 스승님들을 계속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한다. 그 의심은 그 사람에 대한 의심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가 경전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은지를 의심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 스스로가 신앙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더 넓은 마음과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장경동 목사 앞에서 설교를 들었던 수 많은 신앙인들은 스스로의 앎이 참인지 허상인지 질문하고 또 질문해야 한다. 맹목적인 받아들임이 곧 신앙이라 말하는 자들은 100% 가짜다.

맹목적 믿음과 찬양은 낭떨어지로 질주하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와 같다.


[record my mind] - 종교의 기본을 생각하다.

추가 - 新장경동이라 부르짖는 자...

2008년 3월 25일 화요일

종교의 기본을 생각하다.

예전에 느낌표!에서 얼굴을 비췄던 장 모 목사를 TV에서 자주 마주치게 된다. 기독교 채널을 고정시청하는 건 아닌데 TV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보면 거의 매일 TV에 출연해 설교를 하는 것 같다. 언제가는 설교하는 말폼새가 재밌어서 지켜본 적이 있었는데 나이 지긋하신 분들을 대상으로 걸죽한 입담을 자랑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다. 가끔 예로 드는 내용들이 내가 듣기엔 불편할 정도로 수위를 오락가락했지만 어르신들이 듣기엔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다 싶었고 인신공격성 발언 비슷한 내용들 역시 듣기에 따라서는 귀여운 애교쯤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장 목사의 설교를 오랫동안 듣는 건 너무 힘들었다. 어쨌든 그는 재담가임엔 틀림없어 보였다.

오늘, 아침에 TV에서 다시 그를 마주쳤다. 공교롭게도 "거부(巨富)" 야곱에 대한 이야기와 2mb의 근면성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요즘 화제가 되고 있었던 고.소.영, 강.부.자. 내각들이 떠올랐고 새벽형 인간이라고 나팔을 불어대며 몇몇 언론들이 소개하던 2mb의 일상이 떠올랐다. 거부에 대해 설명할 때 단팥죽 장사에 대한 약간 비아냥 섞인 말투와 웃음이 있은 후 자신의 잘못을 느꼈던지 그 분들을 비하하려는 게 아니라며 해명했지만 "거부(巨富)"에 대한 "거부(拒否)"감을 희석시키려 애를 쓰는 모습이 보였다. 게다가 2mb의 새벽형 인간형, 부지런함을 '극찬'한 후 그걸 힘들어하거나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정신차리라며 호통치고 그 분을 위해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힘을 모아 협조하면 좋겠다고 호소하며 야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아멘"이 족히 3-4번은 등장했다. 내가 민감한 건가? 장 목사가 혹세무민을 하는 것인가?

어느 한 편에만 서서 오랫동안 사고하고 행동하다보면 건너편의 입장은 잘 들리지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반성하고 회개하며 수양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 인간을 찬양하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어느 집단, 어느 개인의 행위를 찬양하더라도 그와 대척점에 서있는 이들도 함께 둘러보고 살펴야 하는 게 종교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애초 종교가 불안을 종식시키기 위해 절대자를 "달래기" 위한 원시형태로부터 시작했다면 최소한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불완전함과 그로 인한 불안감을 위로하고 달래주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게 종교인의 도리일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 부처님 그 누구도 자신이 말하고 행한 바를 종교로서 가둬놓은 바 없기도 하지만 제자들로 인해 그 분들의 말씀과 행동을 종지로 하는 종교가 만들어졌다면 그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하나님 행세를 하고 부처님 행세를 하는 건 안될 말이다. 그저 그 분들의 말씀과 행동을 자신이 따라 행하고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면 될 뿐이다. 종교에 귀의하는 이들 역시 "종교적 사실"과 "사실적 종교"의 차이를 잘 받아들여야 한다. 분명 오늘 내가 받은 느낌은 아주 일부분일 수도 있고 종교인의 도리를 못하는 이들 역시 아주 극소수일 수도 있을 것이다.(그렇게 믿고 싶다.)

대부분의 종교는 기본적으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난한 자, 병든 자, 핍박받는 자들을 위해 시작되었고 각 종교의 교조들은 그들을 위해 삶을 버리셨다. 그 기본을 저버리는 순간 종교는 없다.


[record my mind] - 한 목사의 막말 그리고 종교의 참과 거짓.
[record my mind] - 종교적 신앙과 진리적 신앙
[sense datum] - 그(GOD)는 당신과 돈 중에 어느 쪽을 더 사랑하나.
[record my mind] - 음식과 종교인

2007년 7월 24일 화요일

종교적 신앙과 진리적 신앙

신앙은 인류가 이 땅에 존재하면서부터 시작된 주술적 행위이다. 주술적 행위는 이상하거나 신비한 주문을 외우는 행위가 아닌 우주의 신 앞에 자신을 오롯이 드러내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 행위의 시작은 '달램의 포즈'이다. 천지가 뒤흔들리고 자연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인간은 그 자연과 천지(우주) 앞에 두 손을 모으고 빌기 시작했는데 그건 다시 말해 자연과 우주를 달래보려는 행위였던 것이다. 그건 자연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진솔한 종교적 행위였던 것이다. 이후에 수 많은 종교가 생겨났지만 추구하는 건 대동소이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속여 자신의 잇속을 채우는 사이비 집단만 아니라면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종교는 나쁜 게 아니지만 처음 발을 떼던 초발심을 잃고 진리와 사실을 추구하지 않을 때 "종교의 틀"이 생기며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 종교적 신앙을 할 것인가 진리적, 사실적 신앙을 할 것인가. 자신이 섬기는 신 혹은 절대자는 자신만의 것인가, 초월적 존재로서 우리 모두의 것인가. 자신은 절대자의 부름에 소명을 다하여 주어진 사명을 수행해 내는 구도자인가 아니면 자신의 만족과 안위를 위해 절대자의 부름을 자신의 뜻대로 해석하고 곡해하며 신을 핑계삼는 거짓 구도자인가.

종교의 역할에 다하지 못하는 종교는 그 간판을 내림이 마땅하다. 그건 종교의 힘을 빌어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겠다며 남을 기만하고 속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종교가 진정한 종교로 서기 위해서는 종교적 신앙이 고취되는 대신 진리적 신앙으로서 절대자와 신 앞에 최소한의 행위로서 나와 타인에게 영혼의 안식을 줄 수 있도록 해야한다. 작금의 종교들은 (상당부분) 종교를 위한 종교로 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 그들이 섬기는 신과 절대자를 위한 참된 신앙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종교 행위가 퍼포먼스로만 존재하는 한 인간의 영혼은 구원받지 못할 게 뻔하다.

2005년 3월 29일 화요일

예수 이야기로부터의 생각의 끈.

늘 무시되는 사실이지만, 예수는 단 한번도 ‘원죄’ 따위는 얘기한 적이 없다. 그는 오로지 ‘회개’를 촉구했다. 예수가 말한 회개란 종교적 결신(교회에 나가고 계명을 지키는)이 아니라 ‘삶의 완전한 전복’을 뜻한다. 나밖에 모르던 사람이 남을 섬기며 살게 되며, 신분이나 세속적 조건으로 사람을 구분하던 사람이 모든 인간을 똑같은 형제자매로 여기게 된다. 그런 극적 변화가 회개이며 그로 인한 삶이 바로 구원이다. 그리고 그 구원을 통해 “양과 사자가 함께 뛰노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예수는 그렇게 말했다.

하느님은 교회에 '안치'되어 있는 게 아니다. 하느님은 골방에도 시냇가에도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에도 슬픔과 비탄이 있는 어디에도 있다. 회개와 구원은 골방에서도 시냇가에서도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에서도 슬픔과 비탄이 있는 어디에서도 가능하다. 하느님을 볼모로 잡고 회개와 구원의 독점권을 주장하는 제도 교회는 오히려 회개와 구원이 어려워 보이는 유일한 공간이다.

- 김규항


'예수 이야기'처럼 블로그의 글들은 가끔 사고를 할 여유가 없는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던져준다. 짧은 시간동안 훑고 지나갈 뿐이긴 해도 어떤 경우엔 여운이 길게 남는다.

'늘 무시되는 사실'이지만 종교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상적 관계 형성을 가로막고 있다. 서로를 분리하고 심지어는 자신조차도 성속(聖俗)을 분리해 살게 한다. 애초의 종교적 가치가 삶의 안식과 정신적 풍요를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그 안식과 풍요가 자신의 영성의 샘에서 샘솟는다기 보다 상대의 가치와 비교우위를 점거하며 생긴다는 것일테다.

(이 글을 믿는다면)기독교에 '원죄'가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원죄'는 기독교의 사상을 구축하는 기본 골조였다는 걸 상기해 본다면 참으로 새로울 뿐이다. '원죄'를 풀기 위한 '회개'가 아니고 '죄를 사함'을 위한 '회개'가 아니라면 참 아름다운 '회개'일 법하다. 자신의 사상의 틀을 깨고, 삶의 틀을 깨고, 행동의 틀을 깰 수 있는 것이라면 진정 구원을 받을 수 있겠다 싶다.

기독교를 비판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원불교 공부를 했던 사람으로서 종교를 공부했던 사람으로서 (여전히 비전문가지만) 종교에 대한 생각은 이미 새롭게 고쳐먹은지 오래기 때문이다. 다만, 위에 있는 글은 기독교, 비기독교를 떠나 내 삶 속에서 사유하고 사고하는 데 또 한단계의 계단을 준 것에 다름 아니다.

여전히 난 종교의식이 행해지는 공간에 대해 (종교에 대해) 나름대로 확고한 결단을 가진 후로는 거부감이 있지만 그 거부감은 그 곳에서 안식과 평화와 은혜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은 아니다. 종교가 권력이 되지 않고 낮은 곳에 임하기만을 바랄 뿐이고 성직자가 권위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을, 부처님을, 사은님을, 알라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분도 서로를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지도 않으셨거만 세상의 모든 곳에서 함께 차마시고 대화하며 어깨를 걸고 술 한 잔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인데 그 분들 보이지 않으니 계시지 않으니 점점 잊어가는 지도 모르겠다.

자유와 생명가치에 반하는 권위와 권력은 재미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