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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13일 토요일

인도영화 <진다;zinda>는 <올드보이> 표절? 리메이크? 오마쥬?

<올드보이>가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긴 했나 보다. 헐리우드에 버금가는 발리우드(일산에서 진행하는 한류우드는 이름 좀 어떻게 고치면 좋겠다.-_-;)에서 <올드보이>를 100%(? 보지 않아서 모름;;;) 표절한 영화 <진다;zinda>(- 기사 보기)가 탄생했다. 내용을 보자니 <진다;zinda>의 감독은 유명한 영화를 표절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올드보이>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가 된 셈이다.

예전에 인도에 갔을 때 극장에서 영화를 봤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보면 인도인들은 영화를 볼 때 영화의 흐름과 맥을 함께 하며 즐긴다. 함께 탄성을 지르고 웃고 떠들며 영화를 본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데 지장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 신기하고 유쾌한 경험이었다 생각한다. 좀 긴 영화는 중간에 휴식시간을 주고 그 휴식시간에 화장실에도 다녀오고 영화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부분을 서로 이야기하며 영화 후반을 기다리는 것이다. 한국에서라면 어림도 없을 상황이지만 아주 자연스러웠던 그들만의 문화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요즘 인도영화는 예전과 달리 꽤 많은 장르와 형식이 나오고 있다는데 기회가 되면 인도영화 DVD도 구해봐야겠다.

2004년 6월 29일 화요일

[mov] 올드보이


감독 : 박찬욱
배우 : 최민식(오대수), 유지태(이우진), 강혜정(미도), 지대한(주환), 오달수(철웅)

<올드보이>는 만화로 먼저 접했었다. 박찬욱 감독이 <복수는 나의 것>을 만들고 난 후 차기작으로 <올드보이>를 만든다는 기사를 접하고 만화를 구해 읽었다. 만화는 의외로 흥미진진했고 아무런 액션도 등장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팽팽한 긴장감이 끝까지 지속되는 느낌이 있었다. 물론 결말에서 뒤통수를 얻어맞고 멍 한 느낌을 받긴 하지만 나름대로 만화의 소재나 스토리 진행 등은 맘에 들었다. 당시 만화의 결말이 시리즈 완결을 독촉받는 바람에 억지로 짜맞췄다는 떠도는 얘기를 들었었다. 그 만화를 보고 나서 거의 1년(혹은 그 이상)을 기다려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것도 중국에 있는 바람에 극장에서 못보고 DVD로 봤다.

최민식은 좀 식상하다는 느낌도 받았고 약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유지태는 기대 이상으로 잘 해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강혜정의 돋보이는 야릇한 느낌, 매력. B급의 냄새가 <복수는 나의 것>보다 훨씬 더 물씬 나고 박찬욱의 스타일이 아닐까 할 정도로 강한 이미지를 느꼈다. 결말과 과정이 원작 만화와 많이 다른 것은 참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나도 만화를 읽으면서 소재는 너무너무 좋은데 영화로 풀면 재미없겠다고 생각했었으니 더더욱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톡톡 튀어나오는 색다른 스타일이 영화를 방해하지 않아서 좋았지만 힘을 더 실어주지 못한 게 참 아쉽다고 느껴졌다.

영화를 보기 전에 스포일러(?)를 다 봤기 때문에 감안은 하고 봤지만 한국에서 논란이 되는 근친상간이란 문제는 나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애초에 인간의 시작은 근친상간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사회가 발달하고 정복의 역사를 거치면서 우수한 인종을 발굴하기 위해 적을 회유하기 위한 정책 때문에 근친상간이 금기시 되고 있긴 하지만 심리학에서도 분명 근친상간에 대한 본능은 존재한다고 들었던 것 같다.

난 이우진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되고 혀를 잘라낸 오대수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어쩌면 이우진은 오대수로 말 한마디로 인해 죽은 누이의 복수보다는 자신의 사회적 자존심 때문에 오대수를 감금한 게 아닌가 싶었다. 영화에서도 그렇게 느껴졌다. 뭐랄까. 자신의 속내를 들켰을 때 낯뜨거움, 부끄러움, 수치심 - 모두 사회가 만들어낸 감정들 - 등이 오대수를 15년씩 가두게 한 동기는 아니었을까? 오대수의 말 한마디로 이우진의 삶이 달라졌듯이 이우진의 한 웅큼의 마음이 오대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그리고 둘은 서로 비겼다. 아니, 내가 볼 때는 이우진이 졌다. 스스로의 마음을 통제하지 못한 그 분열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했으니 말이다. 반면에 15년이나 갇혔던 오대수는 미칠 법도 한데 잘 견뎌냈고 살아남았고 사랑을 찾았다. 사회적으론 용납되지 않는 사랑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결말에 대해 말이 많다고 하지만 나 스스로 확신있게 말하자면 오대수도 최면이 풀렸고 미도도 최면이 풀렸다고 생각한다. 오대수도 앞으로 미도가 자기 딸임을 알면서도 사랑하며 살테고 미도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난 미도가 오대수에게 '아저씨~'라고 부르는 마지막 대사에서 아저씨와 아빠라는 호칭 두 개 중에 뭘 불러야할지 망설이는 표정을 보았다. 감독이 아니라고 우겨도...! 그리고 약간은 체념한 듯 하지만 정말 사랑하는 듯 오대수를 끌어안고 울먹이는 미도를 보았다.

난 그 둘의 사랑은 인정하련다. 이런저런 윤리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면 결국 내 생각도 용납되지 못할테지만 사랑만큼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리고 최면에 깨어났을 때도 모른 척 하고 살아갈 그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힘겨울지 미루어 짐작은 된다. 하지만 어쩌라고.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은 자신들이 스스로를 서로를 인식하지 못했던 때부터 시작된 것인걸.

박찬욱의 복수 시리즈 3탄이 벌써부터 기다려지고 있다. 애정과 복수의 줄타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는 건 결코 즐거운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큰 범주 내에서의 애정과 복수의 줄타기가 아니더라도 애정과 애증의 줄타기는 늘 하고 살지 않는가. 애증이 눈처럼 굴려지면 복수를 달고 오는 법. 그 복수는 넓고 깊은 애정의 시선으로 봐줘야 그런 마음으로 대해줘야 풀려지는 법. 영화가 많은 화두를 던져주면 던져줄수록 나에겐 생각할 기회도 공부할 기회도 많아지니 좋다.

그런데 솔직히 난 <올드보이>보다 <복수는 나의 것>이 훨씬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