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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9일 일요일

중국 애니메이션 일대종사 터웨이(特伟)

4월 28일에 개막했던 제6회 항주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第六届杭州动漫展:CICAF)에 다녀왔다. 이번에 준비하는 행사(제1회우한중한일대학생디지털아트비엔날레)를 홍보차 간 건데 한 번도 CICAF에 참여해 본 적이 없어 나름 기대가 됐다.

CICAF 첫 인상은 무척 규모가 크다. 정말 화려하게 준비했다라는 인상이 강했다. 특히 이번엔 특별초청인사로 아바타 아트디렉터 등과 쿵푸팬더 감독 등이 방문을 하는 등 '돈 많이 들였다'라는 느낌이 많았다. 그 외 초청인사들도 대부분 국제적으로 명망이 있는 저명인사들인지라 이번 행사는 그야말로 '별들의 잔치'가 아닌가 싶을 정도 였다. 그들과 관련된 행사는 입장료만 500원-1000원(인민폐)에 육박하는지라 가서 볼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솔직히 별로 듣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일단 겉으로 보고 들은 규모만으로는 정말 중국다운 스케일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행사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느낀 감상은 그야말로 '실망'이었다. 보안 검색대는 사소한 물병하나도 지니지 못하도록 엄격한 듯 보였지만 간혹 행사장 근처에서 담배를 피거나 물을 마시는 사람들이 보였고 경비를 맡은 이들의 보안의식은 느껴지지 않았다. 매표소에는 사람들이 편하게 글을 적거나 명함을 집어넣은 곳조차 없이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어 내외국인 전문가들은 불편함을 느껴야만 했다. 행사장에는 지하, 1층, 2층으로 구분이 되어있었는데 만화, 애니메이션을 위한 페스티벌이라기 보다는 크고 작은 상점들이 가득한 장터가 된 느낌이 강했다. 앙시나 히로시마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서울의 SICAF, 부천의 PISAF를 다녀본 나로서는 실망할 수 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터웨이(特伟)' 감독에 대한 것이다. CICAF에서는 이번에 터웨이 감독 회고전을 준비했다. 터웨이 감독은 국제시사만화가로 시작했지만 후에 '피리부는 목동(牧笛)', '산수정(山水情)', '올챙이 엄마를 찾아(小蝌蚪找妈妈)', '오만한 장군(骄傲的将军)' 등 중국 애니메이션 초창기에 한국의 신동헌 감독, 일본의 데즈카 오사무 감독과 같이 중국 애니메이션의 부흥기를 주도했던 중요한 인물이다. 특히 그가 만들어 낸 '수묵 애니메이션'은 현재 그 누구도 다시 재현할 수 없을 만큼 기술적, 예술적 성취도가 높은 작품으로 당시 중국의 애니메이션 창작에 대한 열정과 기술력을 세계에 알린 중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초대 대표로 있었던 '상해미술영화제작소(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중국 애니메이션의 심장이라 불릴만큼 상징적이었고 당대에 만들어 냈던 수 많은 단편 애니메이션들은 캐나다의 NFBC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현재 '상해미술영화제작소'는 여의주 잃은 용이 되었고 여의봉없는 손오공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그 위엄은 간직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를 따랐던 수 많은 애니메이션 감독들은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창작 애니메이션을 만들며 부흥기를 이어갔지만 애석하게도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그들의 모든 재능과 미래를 앗아갔고 중국의 애니메이션은 맥을 끊기고 말았다. 다시 애니메이션에 집중하려했을 때는 이미 중국의 대부분 애니메이션 회사들은 하청업체로 전락한 상태였다. 그러다 다시 조금씩 창작 애니메이션에 대한 희망을 일으키며 전국 곳곳에 애니메이션 관련 대학들이 생겨났고 애니메이션 회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 CCTV 등이 앞장서서 애니메이션의 부흥을 외치고 있는 중이다.

이렇듯 중국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위대했던 터웨이 감독은 작년에 95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이를 계기로 CICAF에서 터웨이 회고전을 준비했는데 회고전 장소를 가보고는 질색을 하고 말았다. 지하 전시실 외진 구석에 별다른 영상물도 없이 사진과 작품 이미지만 잔뜩 붙여놓고 '중국 애니메이션 일대종사 터웨이'라고 써놓은 것이다. 문득 가슴이 아팠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감독이 자본과 정부의 '애니메이션 놀음 잔치'에 찬밥 신세가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CICAF는 항주시에서 적극적으로 투자를 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관련 행사다)

중국은 현재 전국 곳곳에서 애니메이션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애니메이션 육성기지를 건설하는 등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는데 그저 허장성세에 불과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터웨이 감독이 푸대접을 받고 있는데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을 집중하고 산업을 육성한다는 게 오히려 괴이하게 여겨졌다.

그러다 문득 한국의 신동헌 감독이 생각났다.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풍운아 홍길동'을 만들고 7개월 후에 다시 '호피와 차돌바위'를 만들었던 신동헌 감독. 애니메이션 회사들의 횡포에 견디지 못하고 애니메이션 계를 떠났던 위대한 애니메이션 감독. 일전에 모 방송국에서 방영한 신동헌 감독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그가 만든 '풍운아 홍길동' 원본 필름을 찾으로 '데즈카 프로덕션'을 방문했던 장면이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초라한 노신사 신동헌이 방문했던 데즈카 프로덕션은 데즈카 오사무 감독의 작품들로 너무도 멋지게 장식이 되어있었고 그의 명맥을 훌륭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반면 신동헌 감독은 자신의 필름을 고국이 아닌 이국타향에서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아프게 했다.

한국과 중국의 모습은 다른가. 홍길동 기념사업회도 있고 홍길동 복원프로젝트도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신동헌 감독은 중국의 터웨이 감독의 모습과 겹쳐있다. 한국의 애니메이션 정책, 산업, 교육 역시 중국의 그것과 겹쳐있다. 애니메이션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에 대한 푸대접은 서글프기만 하다.

중국 항주에서 터웨이 감독의 초라한 회고전을 보며 터웨이 감독과 신동헌 감독을 위해 뭔가 조촐하게라도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하다면.

2009년 12월 23일 수요일

MTV EXIT의 Intersection, 인신매매를 고발한다.

아래 소개하는 애니메이션은 2009 아티비스트 필름 페스티발에서 세계 인권 단편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된 <Intersection>(러닝타임 약 30분)이다.

 

위키피디아에 소개된 내용을 살펴보면 <Intersection>은 2009년 MTV EXIT가 처음으로 만든 애니메이션 필름임. <Intersection>은 적나라하고 스타일리쉬하며 높은 퀄리티의 저패니메이션을 닮음.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인신매매와 성착취에 대한 강도높은 표현을 보여주고 있음. 았다. 이야기는 인신매매 연결고리가 되는 다섯 명의 캐릭터-희생자, 인신매매범, 마마상(매음굴 포주), 매음굴 고객, 비밀 경찰-의 각기 다른 관점으로 이루어져 있음. 30여 분 정도의 애니메이션에 목소리를 담당한 사람은 영화배우 Ananda Everingham과 MTV VJ, Taya Rogers(영어버전)임. <Intersection>은 한국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JM Animation이 제작을 했음.(영어 원문 중에 <원더풀 데이즈>가 언급되는 걸 보면 <원더풀 데이즈>에서 2d digital coloring을 담당한 제이엠 미디어(JM Media)가 아닌가 싶음. JM Media는 1997년 창사 이래로 TV시리즈, OVA, CF 의 디지털작업과 애니메이션 작업을 해오고 있으며 대표작으로는 레스톨구조대, JOJO의 기묘한 모험, Honda와 Wow껌, 코코볼 CF, 게임타이틀 Arcturus 오프닝 등이 있음), 사운드 트랙의 음악은 영국의 록 밴드 라디오 헤드와 Thievery Corporation이 참여함.
(via http://en.wikipedia.org/wiki/MTV_EXIT) 영어 의역과 해석 실수 있을 수 있음.

 

** 아쉽게도 자막이 없음. 주인공 Mei의 복장을 보니 배경은 베트남인 듯.

 

 

 

 

엔딩 크레딧을 보고 몇 사람만 옮겨 적음.

감독 김재우 감독 / 스토리보드 감독 김재우 / 캐릭터 슈퍼바이저 정인 / 캐릭터 디자인 이혜령 / 칼라 슈퍼바이저 한문중 / 칼라 디자인 이혜령 / 프로듀서 정현 / 사운드 디자인 Lucy Media / 각본 Mark Hillman

 

사실, 연상호 감독 블로그에서 이 애니메이션에 대한 포스팅을 봤을 때는 기획, 투자, 제작 모두 JM Animation에서 한 줄 알고 정말 쉽지 않은 작품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했다. 물론 추가 정보를 찾아본 결과 MTV-EXIT에서 기획하고 스토리를 만들어 JM Animation이 프로덕션 작업을 한 걸 알고 난 후에도 JM이 좋은 작품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는 데는 변함이 없다. 다만, 조금 아쉬울(?) 뿐이다.

 

솔직히 애니메이션을 다 보고 난 후의 감상은 '보통'이다. 잘 만들어진 TV시리즈 정도? '범작'이라고 하면 제작한 팀들에게 미안해지려나. 스토리와 연출은 일반적이고 스타일은 평범하다. 더빙은 무미건조하고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오래 전의 미국 TV시리즈를 보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이 가는 건 솔직히 '작품'보다는 작품을 만들게 한 동기와 그 배경에 있는 단체(?)라 할 수 있다. 자료를 검색하다 MTV-EXIT(::End Exploitation And Trafficking) 사이트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소개는 이렇다.

 

MTV EXIT은 자유를 향한 캠페인입니다. 살 곳과 일할 장소, 친구와 사랑하는 상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를 찾으려는 움직임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자유를 당연시 여기지만 전세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은 기본적인 권리마저 박탈 당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현대판 노예제도라 불리는 인신매매의 희생양으로 범죄자들에 의해 성적 노예나 강제 노동에 동원되어 착취와 억압의 고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유엔의 국제노동기구(ILO)는 전세계적으로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약 25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중 반 이상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거주하고 있습니다.(미 국무부) 인신매매 행위를 통해 범죄 조직은 매년 미화 10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고 있습니다.(유엔) MTV EXIT은 다양한 TV 프로그램과 온라인 컨텐츠, 라이브 쇼, 그리고 반인신매매 조직과의 연계를 통해 인신매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높이고 이를 사전에 예방하는데 그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EXIT 사이트에서는 인신매매에 대한 내용과 반인신매매 운동에 참여하는 방법 또한 소개하고 있다. 특히 다양한 단편 영화 및 공익 광고, 그리고 각국의 유명 인사들이 내래이션에 참여한 다큐멘터리를 감상하거나 다운로드 할 수 있다고 한다.

 

전 세계 인신매매의 희생자가 250만 명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지만 절반 이상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고 하니 솔직히 충격적이다. 하긴 대한민국에서도 '인신매매'라는 단어가 사라진지 얼마되지 않았을 뿐더러 지금은 연예기획사를 통한 '신종 인신매매'들이 횡횡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존엄에 차별이 있을 수 없는데 경제적 약자들은 예외가 되니 참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신매매'라는 말이 솔직히 일반인들의 사고범위 안에는 잘 포착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사창가나 기타 변종 업소에 일하는 여성들은 대체로 '스스로가 원해서' 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학비, 생활비, 유흥비를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을 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인신매매'로 인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여성들도 있을 수 있다. 사회적으로 보다 많은 관심이 필요할 테고 필요하다면 제도적으로, 법적으로 도움도 줄 수 있어야겠다.

 

MTV EXIT의 <Intersection>은 MTV Europe Foundation의 프로젝트로 인신매매와 성착취를 저지하고 사람들의 의식고양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또 MTV EXIT는 USAID(United State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미국국제개발처::개발도상국의 경제적·정치적 안정을 기하고 경제개발을 촉진하며, 산업시설의 현대화를 촉진하기 위한 지원을 위하여 설립된 미국의 정부기관)와 협력관계다.

 

MTV EXIT에서 만든 작품들은 저작권 자유이니 맘껏 퍼다 나르거나 다운로드 해도 된다고 한다.



*** 이현진 기자의 말에 따르면 <Intersection>은 MTV와 JM애니메이션이 공동투자한 작품이며, JM이 기획단계부터 참여했다고 함. 국산물 판정도 받았고 조만간 MTV 코리아에서 방영 예정. 작품의 메시지를 널리 알리기위해 대한민국 여성부에 기부한다고 함.


(그런데 기부를 해도 여성부의 미디어 채널이 다양하지 못해서 작품이 방영될 수나 있을런지... 케이블 채널을 빌리면 가능할지도... 딱히 여성부에 기대는 없지만...)

 


▣ 참고 읽기

허술하게 형성돼 견고하게 굳은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식 via November Jasmine

2009년 12월 21일 월요일

IRIS와 24, 카메라의 다른 시선.

 24

 

IRIS

 

<아이리스>를 보면서 <24>가 떠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른 드라마, 영화들의 흔적들도 보이지만 영상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24>가 가장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렇기 때문에 무척 아쉬웠던 부분은 <아이리스>의 카메라 움직임이었다. (<아이리스> 예고편은 그나마 나은 편)

 

이야기가 산으로 올라가던 땅으로 거꾸러지는 건 논외로 하고 <아이리스>의 카메라는 너무 정신없이 흔들어대기만 했다. 사실 <24>나 <아이리스>가  핸드헬드로 촬영된 건 같은데 <24>의 경우엔 카메라의 무빙, 쉐이킹, 줌인/아웃과 편집시 화면분할이 비교적 주관적 시각과 객관적 시각을 철저히 분리하고 이야기 전달의 효과를 위해 활용된 게 확실히 느껴지는 반면 <아이리스>의 카메라는 초점을 잃은 눈동자처럼 화면의 불필요한 구석을 헤집고 다니고 등장인물들의 감정흐름을 방해하는데 적극적 역할을 했다.

 

핸드헬드 기법이 전면적으로 사용되었던 영화가 <쉬리>가 아닐까 싶다. <쉬리>는 마이클 만 감독,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 주연의 <히트>를 모방했지만 한국영화사상 새로운 시도-도심 총격전, 핸드헬드 촬영기법 등-라며 찬사를 받기도 했다. 물론 <쉬리> 역시 부족한 특수효과, 물량 등을 감추기 위해 카메라를 조금 더 격하게 흔들어 댄 측면이 없지 않아 있겠지만 적어도 필요할 때 흔들고 필요하지 않을 땐 가만히 두는 안전한 방식을 택했다.

 

또 이창동 감독이 <오아시스>를 촬영할 때 영화 전반에 걸쳐 핸드헬드 촬영기법을 사용했는데 당시 카메라 감독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고 한다. 호흡의 안정감이 없으면 카메라가 심하게 요동치기 때문에 호흡을 조절해야 했고 모든 장면에서 핸드헬드를 사용하니 체력적으로 힘들었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카메라가 조금이라도 더 흔들리거나 덜 흔들리면 이창동 감독의 NG사인을 받아야 했으니 핸드헬드가 감독의 의도대로 나오기가 그다지 쉬운 게 아니라는 소리다.

 

반면, <아이리스>는 주인공의 심리가 어떻든, 극의 흐름이 어떻든 줌인/아웃을 남발하며 카메라가 스스로 긴장감을 조성하려고 했다. 게다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거리거나 움직이면서 배우들의 디테일(이 있건 말건)을 다 카메라 워킹에 묻히게 해버렸다. 사실, 핸드헬드가 쉽게 생각하면 카메라를 들고 흔들면 그만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흔들어대는 정도가 심할 경우엔 감독의 의도와 별개로, 카메라 감독의 의도와 별개로 카메라 스스로가 화면을 장악하거나 헤집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 결과 긴장감을 불러오게 하는 씬과 가장 긴잠감이 고조되어야 할 씬의 구별이 사라지면서, 씬과 씬의 유기적 연결, 호흡, 리듬이 다 흐트러지고 말았고 화면은 마치 망망대해를 떠도는 부표처럼 방향을 잃은 채 허공에 뜨고 말았다. 드라마에서 서스펜스를 주기 위해 핸드헬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건 박수를 받을 만 한데 제대로 된 효과를 내지 못해 아쉽다.

 

새로운 영상표현방법을 만들어내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잘 된 드라마, 영화들의 표현방법을 차용하고 모방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쉬리>를 보고 <히트> 따라쟁이라고 욕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쉬리> 이후에 한국영화의 다양한 영상기법이 시도되고 창조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이리스>가 투자한 금액에 비하면 카메라 기법이 너무도 안쓰러운 상황인 듯 해서, 혹여 <아이리스2>를 제작하게 된다면 드라마를 보면서 눈과 정신이 어지럽지 않으면서 충분히 서스펜스를 느낄 수 있는, 카메라의 유려한 움직임만으로도 드라마의 감정과 이야기를 읽을 수 있도록 신경을 쓰면 어떨까 싶다. 다른 드라마, 영화를 무수히 모방하더라도.

 

2009년 9월 28일 월요일

Alive In Joburg - District 9 감독 Neill Blomkamp의 기발한 단편영화



'Alive In Joburg'는 'District 9'의 모티브가 된 Neill Blomkamp 감독의 기발한 단편영화다. 이 단편영화를 보고 Peter Jackson('고무인간의 최후', '반지의 제왕', '킹콩'의 감독, 제작자)이 나서 'District 9'을 제작했다고 한다. 저런 단편영화를 보고 나면 누구라도 정말 무언가 확 끓어오르고 가슴이 두근대지 않겠나.

가만히 보면 3D를 잘 다루는 사람들에겐 기술적으로 대단하다고 보여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발한 아이디어로 스케일 큰 영화처럼 잘 포장을 했고 외계인들 역시 얼굴가면만으로도 아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우주선이 떠있는 곳이 미국이 아닌 남아프리카의 요하네스버그라니... 외계인들은 늘 미국의 상공에만 나타나는 줄 알고 있었는데...-_-;;

게다가 E.T 이후로 처음 공격적이지 않은 외계인에 대한 묘사를 보는 것 같다. 단편영화에 등장하는 난민과 같은 외계인의 묘사, 남아프리카 상공에 떠있는 우주선 모함, 인간들의 정치적 폭력적 행태들...은 영화가 단순히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지극히 정치적이고 생명체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혹자는 '트랜스포머2' 제작비로 'District 9'을 10편 만들 수 있다하고 'G.I Joe' 제작비로는 6편을 만들 수 있다고 하니  'Alive in Joburg'는 SF영화, 또는 블록버스터의 새로운 장을 열지 않았나 싶다. 기발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Alive in Joburg'를 보고 있으니 문득 오래 전 사람들을 깜짝 놀래켰던 '405'라는 단편영화가 생각난다.

2009년 9월 27일 일요일

전지현의 블러드, 스타킹과 대머리 가발은 뭐냐...

전지현의 블러드(Blood: The Last Vampire)... 슬프다. 처음 예고편을 보며 뭔가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던 게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던 영화. 블로그에 예고편을 소개했기에 최소한 몇 줄은 적어둬야지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많이 흘렀다. 전지현의 블러드는 정말 최악이다. 지금 시간이 꽤 흐르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맴도는 끔찍했던 부분들을 열거해보면...

1. '전지현의 스타킹' - 왜 피부색 스타킹을 신고 나왔을까. 그것도 두툼해 보이는 스타킹. 무슨 초등학생 학예회 하나.

2. '쿠라타 야스아키(가토 역)의 가발' - 잘못 본게 아니라면 분명 대머리 가발(분장)을 하고 나왔다. 물론 허접한 영화에서 삭발투혼을 할 생각은 없었겠지. 그로 인해 참 좋아하는 배우가 '여름방학 아동용 영화'의 캐릭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3. '조악한 세트' - 실제 공간을 꾸며서 한 게 아닌 얼기설기 껍데기만 세워놓은 세트장에서 촬영... 그런다고 그 세트장의 칼라나 구조가 멋있느냐.. 그것도 아니다. 그냥 어느 동네 뒷골목에 가서 촬영했어도 그보다는 나았을 것.

4. '후지고 후진 CG' - 무슨 CG가 저리도 후지나. 386컴퓨터로 만들어도 그 정도는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은 CG. 애니메이션을 영화화할 때 가장 공을 많이 들여야 할 부분이 바로 CG인데 그냥 PASS!시킨 듯.

5. '더블 주연' - 전지현이 단독 주연인 줄 알았는데 동양인 여자애가 못미더웠던지 원작에 나오는 간호사 선생을 젊은 아가씨로 둔갑시켜 끝까지 동행하게 만들다니...

6. '후진 액션' - 키스 오브 드래곤을 연출했던 감독에 원규가 무술감독인데 액션씬이 왜 그 모양이냐고. 특히 전지현의 몸놀림은 '홍콩 여배우'들 몸놀림과 너무 차이가 나는데 촬영 중 다치고 고생하며 눈물흘릴 뻔 했다고 해서 액션씬이 이해될 수 있는 건 아님. 비천무의 김희선 액션과 비슷비슷?

써놓고 보니 뭐 하나 건질 게 없네. 아무리 중단편 애니메이션을 장편 영화로 만들면서 어려움이 많았다고 하지만 그 좋은 소재, 멋진 애니메이션을 그렇게 질 낮게 표현하는 것도 참 어려웠을 듯...

(어색하긴 해도) 전지현의 영어대사 정도만 건졌다고 해야할까?

2009년 9월 17일 목요일

영화 '해운대' 프레임과 연기 빠지고 이펙트만 남은 듯...

감독이 이런 장면을 상상했을 때 왠지 짜릿했을 것 같다.


'해운대' 중 메가쓰나미가 몰려 올 전조로 새 떼들이 몰려가는 장면이 있는데 새 떼들 프레임이 복사해서 쓴 듯 한데다(같은 그림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중간에 프레임이 하나 정도 비는 것 같던데...(화면이 깜빡거리는...) TV에서 자료화면으로 나올 때도 보니 역시 그렇던데... 마무리 이펙트 작업하는데 얼마나 촉박했으면 체크를 못했을까...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단 몇 분짜리를 작업할 때도 간혹 빼먹는 프레임이 있다거나 컷 편집에서 잘라내지 못한 한 프레임이 번쩍이는 경우도 있는데...뭘...

이펙트가 적재적소에 잘 쓰였지만 화물선이 광안대교(?)에 걸려있다 폭발하면서 컨테이너와 파편들이 날아가 빌딩에 꽂히는 장면처럼 효과를 위한 효과처럼 보이는 장면들이 곳곳에 보이더라. 사람들은 '김인권과 컨테이너' 씬을 좋아하던데 개인적으로는 재미는 있었지만 이펙트가 너무 티가 나서 어색한 장면이기도 했다. 특히 컨테이너의 중량감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고나 할까. 물의 표현들은 참 좋더라. 다만, 도심으로 바닷물이 밀려들면서 건물들이 거의 절반 이상이 잠기는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치 2m도 채 안되는 곳에서 사투를 벌이는 것 처럼 보였다. 엄정화가 같은 엘리베이터에 물이 잠기는 장면도 이해가 잘 되진 않았다. 암튼, '괴물' 이후로 다시 한 번 특수효과 측면에서 특히 '물'에 대한 이펙트는 노하우를 많이 가지게 되었을 것 같다. 효과맨들의 치열함과 근성이 장면 곳곳에 보였다.

내용은 뭐....그닥....(중국의 '超强台风'이란 영화가 연상되기도..-_-;)
근데 설경구는 왜 야구장에 가서 꼬장을 부렸던 걸까. '부산'하면 '야구'라서 넣어야만 했던 씬이었을까.
사실 캐릭터들이 사실감 있다는 말에 동감하면서도 재밌는 캐릭터들을 잘 살리지 못했던 것이 아쉽더라.

설경구는 악쓰는 연기를 박하사탕 이후로 변함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재현한다. '웩웩'거리며 악쓰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가 맡은 캐릭터에 몰입을 못하게 한다. 설경구 연기가 매너리즘에 빠진 걸까. 그의 연기가 '박하사탕'과 '오아시스' 이후로 반복재생되는 것 같다. 예전엔 그의 이름만 봐도 영화가 기다려졌는데 지금은....

박중훈은 영화계의 대선배로, 나름 월드스타로, 나름 연기 잘한다고 알려진 배우로써 참 실망인 연기를 한다. 문득문득 보여지는 괜찮은 표정과 감정들이 있는데 아쉽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라디오 스타'같은 연기라면 좋았을 걸. 혹 감독의 문제였을까.

김인권은 '송어'에서 인상적이었는데 그 이후로 너무 강하거나 뒤틀린 이미지로만 등장을 했던 것 같다. 연기는 참 잘하는 것 같은데 그의 얼굴이 연기폭을 가둔 셈이었을까. 그의 눈빛이 무척 강렬하긴 하다. 더 많은 기회들이 있길...

하지원은 사투리 연기를 애써서 하는 것 같던데 전체적으로는 많이 편해보인다. 그녀도 나이를 먹고 세월을 가슴에 담으며 성장해가는 거다.

엄정화는 설정이 너무 극과 극으로 바뀌어서 그렇겠지만 어쨌거나 그녀의 연기는 언제나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 같다. 오히려 엄정화가 설경구, 박중훈보다 낫다는 생각을...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연기가 참 좋다.

이민기는 멋지게 보이기 위한 한 장면을 위해 설정이 마구 급조되고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이랄까.

천만관객이라... 참 대~애~단...하다...라고 밖엔.


2009년 6월 13일 토요일

마더(Mother) - 엄마 있어?

영화에 대한 평보다는 '마더'에 보며 떠올랐던 여러 생각들을 정리해두고자 하는 차원에서 기록.

영화 말미, 크레딧 올라가기 전 문득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들'과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이 떠올랐다. 한국영화 중 서스펜스와 스릴러의 정점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서스펜스 [suspense]   [명사] 영화, 드라마, 소설 따위에서, 줄거리의 전개가 관객이나 독자에게 주는 불안감과 긴박감. ‘긴장감’, ‘박진감’으로 순화. 
스릴러 [thriller] [명사] 관객이나 독자에게 공포감이나 흥취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만든 연극·영화나 소설 따위.


영화 '마더(Mother)'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바보 아들과 미친 엄마의 살인의 추억' 정도가 되려나.


영화 속 김혜자는 시종일관 불안한 눈동자를 굴리며 아들을 스토킹(하는 듯) 하고 아들에게 그녀의 눈동자 초점이 머무는 순간엔 세상의 그 무엇도 그녀에게 접근할 수가 없다.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 바보 아들을 지켜보며 자신을 온전히 내던진다. 그건 과거에 그녀가 아들에게 싸구려 농약을 마시게 해 바보로 만든 것에 대한 속죄일 수도 있고 오랜 시간 지내오며 의식/무의식을 지배해버린 습관같은 것일 수도 있다. 미치진 않았지만 미칠 수 밖에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제정신을 가지고 살기엔 쉽지 않다.

진태(진구)의 씬이 적어 아쉽기도 하고(연기가 괜찮다고 생각함) 궁금한 점도 더욱 증폭이 된다. 진태는 혜자(김혜자)와 어떤 관계였을까. 모종의 비정상적인 관계가 있을 것 같은데... 친아들은 아닌 아들? 아님, 성적인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경찰서에서 나와 웃옷을 벗고 도준(원빈)의 방에 앉아있는 모양새가 너무 자연스럽던데... 보통은 친구 어머니에게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형사처럼 '어머님(또는 어머니)'라고 부른다. 설명이 부족해 가설만 많아질 뿐이지만 설명이 없어서 긴장감은 더욱 팽팽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진태(진구)는 도준(원빈)을 이용해 먹기만 하는 듯 한데 그게 진태의 도준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 엄마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에 '어머니'가 아닌 '엄마'라는 호칭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도준이 잡혀들어간 후 혜자는 진태에게 의지하는데 그래서 더더욱 잘 도와주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세팍타크로 형사의 연기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세팍타크로'라는 운동경기를 떠올려 낸 봉준호는 참 재치있다. 언어가 주는 강한 된발음과 형사의 폭력은 아주 멋드러지게 어울렸고 송새벽은 그에 맞는 최적의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사투리가 너무 자연스러웠는데 추측이 맞다면 전라북도 사투리인 듯 하다. 전라도 사투리와 충청도 사투리가 교묘하게 섞인 듯한 사투리. 크레딧을 보니 촬영장소 중에 전라북도 익산이 있던데 그쪽 사투리를 차용하지 않았을까.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공간'이 가지는 의미가 특히 중요하게 느껴지곤 하는데 '마더'에서도 역시 공간이 주는 느낌은 다른 영화들에 비해 무척 독특하면서도 일상적이다. 장소선택(헌팅)을 정말 잘하는 것 같다. '마더'의 공간은 모든 주민들이 서로를 알고 있는 거대한 공동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모두는 각각의 사연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김혜자 주변의 인물들은 김혜자가 아들에게 농약을 먹여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알면서도 그에 대해 다른 시선을 보내지 않는 건 그 행위가 나름 타당한 것이었거나 그들이 김혜자와의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거나 일 것이다. 게다가 그와는 다르지만 비슷한, 비슷하면서도 다른 또 하나의 진실, 비밀이 된 진실 쌀떡소녀 역시 공동체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듯 싶다. 그들이 사는 동네는 마치 버려진 공동체같았다. 치외법권인 듯, 혹은 나름 체제를 갖추고 있는... 글을 쓰다보니 윤태호의 '이끼'가 떠오른다. '마더'를 보면 '이끼'는 강우석보단 봉준호가 적격일 것 같다.

영화는 박찬욱의 박쥐모다 더 많은 실마리를 풀어놓고 생각하게 하지만 그에 비해 결말은 공허하게 느껴졌다. 결말이 공허했다는 것은 영화가 나에게 던져주는 실마리에 비해 공허했다는 뜻이지 결말은 무척 아름답고 한국적이고 '엄마'적이고 슬펐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지극히 한국적이란 느낌을 갖게 하는데 말투(사투리)를 포함해 지역적 공간, 인물 간의 관계, 영화 속의 상징 등이 대체적으로 '지극히' 한국적이다. 특히 관광버스 씬은 그야말로 봉준호스러운 한국냄새가 물씬 나는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소재가 보편적이면 외국인들도 쉽게 볼 수 있지만 소재나 다뤄지는 내용, 디테일들이 보편적이면서도 국지적(한국적)이면 외국인들은 쉽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영화가 점점 진화하고 발전하면 장이모우처럼 또는 이안처럼 세계적인 거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봉준호가 '붉은 수수밭'을 찍거나 '브로크백 마운틴'을 충분히 찍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물론 오히려 그런 장르보다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나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같은 쪽이 더 가까울 것 같긴 하지만.

갈수록 영화제 감독이 되어가는 박찬욱에 비해 봉준호는 조금 더 서둘러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각각의 장단점들이 있겠지만 중요한 건 박찬욱이나 봉준호같은 감독이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흥분되고 그들의 영화가 기다려진다고나 할까. 어떤 감독의 영화를 기다린다는 것, 쉽지 않다. 그들이 촬영할 영화의 제목만 발표해도 그 때부터 가슴 설레며 기다려지지 않는가. 별개의 이야기지만 개인적인 또다른 취향(무술, 액션)으로 인해 류승완 감독도 기다리는 감독이긴 하지만 류승완 감독은 성룡이나 이연걸, 견자단과 같은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다. 물론 그의 취향이 아닐 수도 있지만 '아라한 장풍 대작전'에서 류승범의 고깃집 액션을 생각해보면 그의 재능이 사장되는 건 무척 아쉬운 일이다.

영화 '마더'는 절제된 미장센, 롱샷이 종종 등장한다. 한 마을을 관망하는 듯 하다가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엄마와 등장인물들의 얼굴 클로즈업(또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인해 영화의 원금감은 급속하게 롤러코스터를 타며 심장박동이 그에 따라 빨라지다가 느려지기를 반복하면서 결코 숨을 쉽게 쉬게 놔두지 않는다. 그로 인해 영화의 팽팽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잇다.

또한 '마더'는 사운드와 음악의 승리. 특히 사운드의 절정. 사운드가 영화의 분위기를 50% 이상 잡아준다. 특히 손작두의 소리를 포함해 사람들 때리고 맞는 소리나 폐관된 놀이공원의 쇳소리, 고물상 불타는 소리, 빗소리, 김혜자의 숨소리 등 소리들은 깔끔하면서도 때론 둔탁하게 때론 날카롭게 각 씬에 맞는 최적의 볼륨과 함께 최상의 선택을 들려준다. 한국영화를 보면서 사운드가 이토록 깔끔하면서도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영화는 별로 없지 않았나 싶다. 박찬욱의 '박쥐'에서 흡혈하는 소리를 억지로 과장되게 크게 했다면 몰라도 보는 내내 흡혈하는 소리가 감정을 돋아나게도 했지만 방해하기도 했고 불편하기도 했지만 코믹하기도 했다. 의도한 거라면 '최고' 아니면 '실패'. '마더'는 영상과 사운드가 아주 자잘한 톱니를 물고 돌아가듯 최적의 하모니를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영화 끝부분에 혜자가 도준 대신 범인으로 지목되어 잡혀들어온 다운증후군 남자아이에게 '엄마 있어?'라고 물으며 우는 장면이 있는데 혜자가 허벅지에 침을 놓는 장면과 더불어 이 장면은 마치 모든 걸 설명하는 듯 하다. 특히 혜자가 허벅지에 침을 놓는 장면은 슬프고 아름답고 씁쓸한 장면으로 한국의 여러 정치사회적 상황을 간결한 은유로 표현하고 있지 않나 싶었다. 김혜자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허벅지를 걷어올리는 장면에서 섹시함을 드러낸다. 놀랍다. 이 외에도 약간은 페티쉬같은 전미선의 엉덩이(실제라면)도 무척 섹시하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행'에서 카메라가 신민아의 목덜미를 잠깐 훑고 지나가는 장면도 마찬가지로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섹시함,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그 잠깐의 찰나를 아주 강렬하게 보여주는 장면들이 아니었나 싶다.

도준이 버스 터미널에서 침구함을 건넬 때 도준을 죽이려 했던 혜자와 도준을 살리려 했던 혜자의 모습과 5살 어린 시절을 기억해내버린 도준의 다 잊었다는 듯한 무심한 표정이 교차하면서 그들의 관계가 갑자가 주변인물들로 확장되더라. 그 어색한 표정들과 몸짓들... 모든 게 다 무너져 내리고 붕괴될 법한 지점에서 김혜자는 나쁜 기억을 잊게 해주는 신비의 경혈자리가 있는 허벅지에 스스로 침을 놓으며 현실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그녀의 춤이 왠지 어색하듯이 기억은 잊혀지지 않고 스스로 감출 뿐이며 자연스럽게 현실로 복귀하려고 해도 이미 생채기 난 상흔은 더 이상 아프진 않지만 가끔 가려워지면서 기억을 끌어올려질 것이다. 다만, 나쁜 기억조차도 징그럽게 웃으면서 추억할 정도는 되겠지. 구치소 면회실에서 도준이 5살 때의 기억을 끄집어 냈을 때 발광하며 괴성을 지르던 김혜자가 아주 신기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어떻게 그 때 일을 기억하지?'라고 묻는 장면처럼...

김혜자의, 김혜자에 의한, 김혜자를 위한 영화 마더.
예고편에서 느껴졌던 김혜자의 광기가 오히려 영화 속에서는 많이 약해진 듯 해서 아쉬웠다. 김혜자의 광기가 초반에 다 발산해버려서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약해지는...느낌이었달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더'는 철저히 김혜자의 영화였다. 하지만 그녀의 영화였기에 영화가 가지는 한계 역시 김혜자의 것이었지 싶다. 봉준호가 아무리 디테일하게 설계를 해도 김혜자가 가진 아우라는 역시 쉽게 쳐내거나 컨트롤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어쩌면 봉준호의 장점과  김혜자의 장점이 만나 시너지를 일으킨 부분도 있지만 그 둘의 조합 때문에 (-)가 된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라고 추측...

영화를 보며 느꼈던 것 중에... 자식의 생사여탈권은 엄마에게 있다...는 것. 그건 대한민국만의 특별한 권한이며 자본주의가 심화되고 사회가 미성숙한 상태에서 머문 시간이 길어질 수록 더더욱 막강한 권력이 된다. 세상 엄마는 다 똑같다...라는 말에서 한국 엄마는 꽤 큰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모성(母性)과 '대한민국 엄마의 모성'은 비슷하지만 큰 간격을 두고 다르기도 하다. 자식을 품에서 놓을 수 없는 대한민국의 엄마들에겐 어떤 원죄가 있는 걸까. 엄마를 엄마 이상의 존재로 만들게 된 원인은 사회, 우리들에게 있지는 않나. 그런 엄마들이 생겨나게 된 것에 대해 대한민국은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

영화는 또 김혜자의 '살인의 추억'이라고 할 만 한데, 등장인물들만 봐도 그렇다.
물론 송강호(박두만)와 윤제문(형사, 제문)을 동급으로 보긴 어렵겠지만 지역 토박이 형사라는 것, 그리고 김뢰하(조용구)와 송새벽(세팍타크로 형사)는 옆에서 보조역할을 하며 폭력을 쓴다는 것, 김병순(반장 역)과 진태(진구)는 김상경(서태윤)과 신재호(송반장) 정도의 역할...(?) 게다가 전미선의 신체(알몸)노출 및 영화 속에서의 역할, 여중(고)생 살해사건, 사건 관련자는 바보-박노식(백광호)와 원빈(도준), 폐쇄적인 소도시, 밥 먹는 장면(봉준호가 꼭 넣는 장면), 단란주점, 일반주점, 논두렁, 동네버스, 여학생 살인사건, 현장검증, 비, 밤길, 외딴 집(고물상과 최후의 생존자), 치료 등등...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조금은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다만,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는 것과 밝혀지지 않는 차이....랄까?

봉준호 영화는 박찬욱 영화와 마찬가지로 보면서 머리나 가슴, 심장이 끊임없이 활동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나름 즐겁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영화에 대한 부분을 곱씹게 된다. 그 과정이 너무 무겁거나 힘들거나 지치게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천만 다행이다.

2009년 5월 18일 월요일

다우트(Doubt) - 수구와 보수의 대결


영화 다우트(Doubt)는 수구(Meryl Streep 분)와 보수(Philip Seymour Hoffman 분)의 대결이라 생각했다.

수구(守舊): 옛 제도나 풍습을 그대로 지키고 따름.
예) 아직도 수구 사상은 완고하게 뿌리가 박혀서 학교 직원 중에도 머리를 깎자면 모두들 질색하였다. 출처 : 이기영, 봄

보수(保守): 보전하여 지킴,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반대하고 전통적인 것을 옹호하며 유지하려 함.
예) 그 나라 사람들은 매우 보수적이어서 여자는 반소매도 입을 수가 없다.

사실 수구와 보수의 사전적 의미만 따져본다면 크게 다른 점이 보이지 않는다. 둘 다 과거의 것을 지키고 유지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수구는 보다 이기적인 면이 강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측면이 강하고 보수는 과거의 좋은 점은 보전하고 지켜가되 틀 안에서의 개혁은 받아들이고 용납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겠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보수의 기본 틀이 무너지면 종교는 종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며 보다 철학 쪽으로 기울게 된다. 종교에서 과거와 전통을 부정한다면 그건 종교의 기원, 교조를 부정하는 꼴이 되며 종교가 보다 열린 자세를 취하고 늘 변화무쌍한,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면 철학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신앙-믿음'이란 개념이 개입하면서 철학적 논의는 의미가 없어지게 되고 정도가 지나치면 광기로 흐를테지만 어떤 게 옳다 그르다를 논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모든 건 자신의 '행복'과 '안식'을 위해 취사선택을 하기 마련인데 그 자신을 '나'로 제한하느냐 보다 큰 '우리'라는 개념으로 '나'를 대치하느냐에 따라 (종교적) 보수와 수구가 나뉠 법 하다. 알로이셔스 수녀는 자신의 '의혹'에 확신을 갖게 되면서 플린 신부를 적대시하게 되었지만 본질은 자기 자신의 안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플린 신부는 수녀의 그런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 싸움 직전까지 가지만 결국 자신의 안위보다 '우리'의 평온을 위해 물러선다.

이건 작지만 아주 큰 차이다. '개인'과 '집단', '단기(短期)'와 '장기(長期)'의 차이기도 하다. 수구는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과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이익을 쫓는 반면 보수는 전체를 생각하고 장기적인 비전을 갖는다. 보수라는 게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게 가족, 사회,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생각과 행위를 하기 마련이다. 학습과 교류, 연대를 통해 보수 뿐만이 아니라 진보적 사고를 하는 것이다.

"doubt can be a bond as powerful and sustaining as certainty"

영화 시작 즈음에 플린 신부가 설교를 할 때 등장하는 문구인데 이 영화의 핵심을 담고 있달까. 알로이셔스 수녀가 마지막에 의혹에 빠졌음을 시인하고 통곡을 하는데 의혹(의심)은 확신과도 같은 견고함을 주기 때문에 의혹에 빠지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종교인의 입장에서는 '의혹'은 바로 신을 부정하고 모든 교리를 부정하는 에덴동산의 사과와 같아서 의심을 하는 순간 천국은 지옥으로 변하고 거대한 우주는 먼지로 변해 그 무엇하나 믿음을 댈 곳이 없게 된다. 의심하고 있는 자신을 제외하고.

그 의심을 거두고 물리치기 위해 올곧은 신념, 신앙을 갖기 위해 '종교'가 탄생했다. 종교의 탄생 후에 믿음의 행위가 생겨난 게 아니다. 인간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 불안함,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 모종의 행위가 시작되었는데 그 행위가 구체화되고 시스템을 갖춰가면서 종교가 만들어진 것이다. 믿음의 궁극에 서는 게 두 종류 쯤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믿음이 진리와 가까워지면 큰 틀(우주, 자연) 안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맞물려 돌아가되 무한한 자유를 얻고 영성이 밝아지고 맑아지는 반면 믿음이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욕심과 집단의 이기심으로 형성되면(우매하고 무지한 믿음) 최면에 걸린 것과 같아서 오히려 더욱 미혹해지고 타인과 나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내기 마련이다. 후자의 경우가 '종교는 아편과 같다'는 말과 일맥상통할 수 있다.

의혹이 생기는 순간(믿음이 사라지는 순간) 종교와 신앙도 사라지는 게 맞지만 믿음이 편협하게 흐르고 신앙이 수구적 형태를 띄게 될 때도 역시 종교와 신앙은 사라지거나 변질된다. 그 사이(間)라는 게 손등과 손바닥의 차이같아서 늘 참회하고 수행하지 않으면 참 종교, 참 신앙을 하기 어렵다.

다우트(Doubt)의 시대배경을 함께 생각해보면 사실 알로이셔스 수녀의 행위도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시대와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걸 한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기엔 무리가 있다. 물론 개인의 잘잘못을 이야기하고 개션해가는 과정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지만...

플린 신부와 알로이셔스 수녀의 대립이 고조될 즈음 플린 신부가 한 설교 내용은 영화의 줄거리를 압축해 놓은 부분이라 생각된다. 게다가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잘못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최근에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던 '인터넷 악플' 논란이나 과거부터 지금까지 쉽게 사용되고 있는 '좌파=빨갱이=북한'과 같은 이야기, 그 외에 수 많은 관계 속에서 쉽게 자행되는 행위들을 떠올려보면 아래의 설교 내용은 곱씹어 볼 만 하다.

한 여인이 친구와 함께 잘 알지 못하는 남자에 대해 소문(험담)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날 밤 그녀는 꿈을 꾸었다.
하늘로부터 거대한 손이 나타나 그녀를 가르켰다.
그녀는 바로 온몸 가득 죄책감으로 가득찼다.
다음 날 그녀는 고해성사를 하러 갔다.
그녀는 교구목사 O' Rourke신부를 찾았다.
그녀는 신부에게 모든 이야기를 했다.

"소문을 이야기하는 것도 죄입니까?"

그녀는 목사에게 물었다.

"나를 가르켰던 손은 전능하신 주의 것입니까?
당신께 사면을 구할 수 있습니까?
신부님, 말씀해주세요. 제가  뭔가를 잘못했습니까?"

"그래요"

O' Rourke신부는 그녀에게 대답했다.

"맞아요. 당신은 우매하고 무지하군요.
교양없는 여성이에요!
당신은 잘못된 시선으로 당신의 이웃을 봐서는 안됩니다.
당신은 그의 명성을 우롱했습니다.
당신은 마땅히 마음 속으로부터 수치를 느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여인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후 용서를 구했다.

"지금은 아직 안됩니다!"

O' Rourke신부가 말했다.

"집에 돌아가 베개를 가지고 옥상으로 가세요.
칼로 베개를 찢은 후 다시 날 찾아오세요!"

그리하여 그 여인은 집으로 돌아갔다.

침대 위 베개와 서랍 속에서 꺼낸 작은 칼을 들고서
옥상으로 간 후 베개를 찢었다.
그런 후에 단정하고 예의바르게 교구 목사에게 갔다.

"당신은 베개와 칼을 가지고 갔나요?"

목사가 물었다.

"네, 신부님"

"결과는 어땠나요?"

"깃털들 뿐이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깃털요?"

목사가 다시 물었다.

"사방이 온통 깃털들이었습니다. 신부님!"

"당신은 지금 당장 돌아가 바람에 날려 간 모든 깃털들을 주우세요!"

"아....."

그녀는 말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는 모든 깃털들이 어디까지 날아갔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O' Rourke신부가 말했다.

"바로 그것이 소문(험담)이란 겁니다!"



[record my mind] - 종교의 기본을 생각하다.
[record my mind] - 종교적 신앙과 진리적 신앙
[record my mind] - 한 목사의 막말 그리고 종교의 참과 거짓.

2009년 5월 10일 일요일

눈먼자들의 도시(Blindness),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줄리안 무어는 마지막에 생각한다. 혹시 내가 눈이 먼 게 아닐까.... 화려한 풍경이 보이며... (아니다)

서로 통성명을 하려하는데 이름은 알아서 무엇하냐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없는 영화 '눈먼자들의 도시(Blindness)' 시력을 가진 자들은 시력을 잃기 전까진 시력을 잃은 자들의 슬픔과 고통을 손톱만큼도 알기 어렵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의 눈을 다 멀게 해버렸다. 그런데 모두가 시력을 잃고 나니 시력이 없는 자들 속에서 시력을 가진 자가 더 괴롭다.

'본다는 행위'와 '보이지 않는 상황' 사이, 비현실 속에서 현실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볼 수 있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많은 세상'보다 과연 살만한 세상인가.
줄리안 무어만이 시력을 잃지 않은 세상은 줄리안 무어만이 시력을 잃은 세상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 남들이 모르는 걸 나 혼자만 알 수 있다는 것. 차별과 유일함.
문득 불교의 가르침이 생각난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영화를 보면서 가장 불쾌했고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씨퀀스는 음식을 얻기 위해 여자들이 자발적으로 '성(性)상납'을 하는 것이었다. 극단적인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서라고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줄리안 무어의 행동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나중에 제3동의 왕을 살해할 거면서 왜 처음엔 순순히 가서 '상납'을 했던 것일까. 나중에 불을 붙이러 갔던 여자도 마찬가지다. 줄리안 무어의 캐릭터가 심약하고 착하다는 건 알겠지만 '윤간'을 당하고 나서야 당사자를 죽일 수 있다는 건 설정이 너무 의도적이었다.

그보다 음식으로 여성들의 성을 착취하겠다는 것. 가장 기본적인 것을 무기로 가장 기본적인 것을 채우겠다는 저열한 의도가 가득 찬 화면을 보며 역겨움이 쏠렸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막장 짓. 현실이 꼭 그렇다. 먹고 사는 문제를 담보로 성을 사고 팔고, 직장을 담보로 직원을 노예로 만든다. 인간은 시스템을 많은 이들이 유용한 쪽으로 발전시키기보다 이기적인 부분을 강화하도록 발전시킨다. 그 상황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이들은 당연히 힘없고 빽없고 심약한 사람들이다. 화면 가득히 넘치는 인간의 더러운 욕망이 내 몸 위로 내 마음 속으로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것 같아 보는 내내 불편했다. 줄리안 무어가 왜 '행동'을 취하지 않는지에 대한 원망이 더해지면서.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다니지 않아 황폐해진 도시는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다시 다닌다 해도 다른 모습은 아닐 것이다. 비워진 것과 채워진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일 뿐, 그 용기자체가 달라지진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용기를 사용하는 방법, 그 용기를 채우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냐는 것이다.

줄리안 무어의 손을 꽉 쥐고 있는 사람들은 줄리안 무어가 희망일지 모르겠지만 그 희망은 유한한 것이다. 굶주림을 해결해주고 미망 속에서 헤매지 않게 해줄 뿐, 그들에게 진정한 희망이 되긴 어렵다. 줄리안 무어도 더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할 수가 없다. 끔찍한 현실을 보지 않아도 되고 극도의 공포에 몰린 타인들에게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작은 공간(집)을 찾아 들어간다. 그게 할 수 있는 전부다. 눈뜬 사람들 세상에서 눈감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결국 이 영화는 눈뜬 사람들에게 '역지사지'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뿐,
어떤 해답도 없다.
영화를 통해 지금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볼 수 있으니 행복하구나'라고 생각하던가,
'보여도 끔찍한 세상은 똑같구나'라고 생각하던가.
혹은 '눈을 뜨나 감으나 똑같이 끔찍한 세상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


...줄리안 무어를 보면서 피부가 정말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줄리안 무어가 한국에서 배우를 했으면 바로 박피수술을 받거나 성형을 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트랜스포터3에서 나오는 주근깨 투성이 여자배우도 그렇지만 피부가 좋지 않은 배우들이 배우생활을 할 수 있다는 건 여러 면에서 생각을 하게 한다. 역시 대한민국 배우들 피부가 세계 최고야!라고 말하는 건 좀 우습다.



행복을 찾아서(The Pursuit of Happiness), 현실..현실..현실...현실 속 행복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도 어릴 적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어떤 사람이 되겠다고 자신있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며 또렷한 눈망울을 반짝거리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꿈꾸는 나의 삶, 우리의 세상은 꼭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경쟁이 나와 상대를 모두 아프게 한다는 걸 조금씩 알아가게 되면서
나이가 어렸어도 남을 꼭 이겨야겠다는 생각은 못해본 것 같다.
물론 공부를 잘해 등수 안에 들고, 1등을 하고, 상을 받으면 기분좋고 우쭐했던 적은 있었지만
함께 원하는 무언가를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악다구니를 써가며 바득바득 경쟁을 하려고 하진 않았다.
그래서 내가 가진 복(福)과 재능(才能)만으로 겨우겨우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
물론 게으르긴 했지만 정말 하고 싶은 일엔 순수하게 자신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해가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마치 순수한 무엇인마냥 오해를 하겠지만
대동소이(大同小異)하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살면서 무수히 생각해 보았을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어린 시절, 혹은 지금까지 옳다고 믿어왔던 어떤 가치와 신념이 이루어지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남에 대한 배려는 고사하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당당히 이뤄내면 행복해지는 것일까.
남들은 행복한데 나만 불행한 것인가.
내가 행복하면 남들도 행복하게 보이는 것인가.
도대체 행복의 최소기준은 무엇이고 행복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인가.


이 장면은 크리스 가드너(Will Smith)가 정식 주식중매인이 된 후에 감격에 겨우 인파들 속으로 걸어나와 행복을 만끽하는 장면이다. 아내는 떠났고 아이를 홀로 키우며 도전한 주식중매 직업, 그 길이 순탄치 않았고 힘들었을 거라는 건 불을 보듯 훤하다. 월세를 내지 못해 집에서 쫓겨나고 한 푼도 없어 홈리스 생활도 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던 직업을 손에 넣었다. 아마도 다른 선택이 없었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자신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을 살려 마침내 주식중매인이 된 것이다.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인 크리스 가드너의 삶이 딱 여기에서 멈췄으면 결코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크리스 가드너는 그 이후에 '가드너 앤 리치 컴퍼니'라는 굴지의 투자사를 설립하면서 갑부가 되었고 그의 인생역정이 ABC-TV 다큐멘터리 '20/20'에 소개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면서 영화까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가 마침내 찾은 것은 '행복'이었다는 코멘트와 함께.

그가 갑부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의 인생역정을 보면서 쾌감을 느낄 수 있을까.
그가 갑부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의 행복을 보며 감동을 느낄 수 있을까.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고 해서 모든 고통이 행복해지거나 하진 않는다. 희망을 놓진 못할망정 사랑하는 가족이 겪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책임을 지는 입장으로선 죽을만큼 괴롭고 힘든 일일 것이다. 저 순간 느끼지 못했던 행복은 크리스가 정직원이 되는 순간 바로 찾아온다. 아들과 지하철 화장실에서 잠을 자거나 노숙자들이 기거하는 곳에서 힘겹게 버텨내던 시절에 꿈꾸던 가장 행복은 최소한의 생활력-매일 월급이 통장에 찍히고 집 월세 걱정하지 않고 아들 생일 날 선물 사주고, 아들이 먹고 싶은 것 지갑걱정 하지 않고 사주는 것, 아내에게 '돈돈돈'이란 잔소리를 듣지 않는 것-일 것이다.

크리스가 제대로 된 번듯한 직업을 갖게 된 후 엄청나게 감격을 하는 이유는 그 동안의 고단한 생활 속에서 (남들은 다 느끼고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이 느끼지 못하던 '행복'이 자신에게 왔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돈'이 '행복'인가. '돈'이 없으면 '행복'을 느낄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것인가. 물론 돈의 많고 적음에 대해 수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최소한의 삶의 유지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갖게 되는 건 '심리적, 물질적 박탈감'과 '악순환으로 흐릿해지는 미래(희망)'일 것이다. '최소한'은 무엇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평등'이 진리고, '격차'가 법칙인데 '최소한'을 요구하는 행위는 위법인가.

크리스의 삶에 감동을 받는 건 왜일까. 그가 주식중매인의 자격으로만 평생을 평범(?)하게 살면서 행복을 느끼는 건 그다지 큰 행복이 아닌 것일까. 물론 그렇진 않겠지. 영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극적인 것도 필요하고, 어쩌고저쩌고..하니까 이해는 된다. 다만, 일상으로 현실로 눈을 돌려보면 자신의 '적정한' 삶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남들보다 우월한' 삶 속에서, 현재보다 '더 나은' 삶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싶어한다.

언젠가 '생활 속 달인을 찾아서'라는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분야에서 최소한 10년 이상 수십년 씩 종사해 온 사람들인데 경제적으론 늘 궁핍해 마지 않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그들이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달인들이 하는 일을 좇아하진 않을 것이고 그들이 느끼는 행복보다 오히려 크리스가 느끼는 행복을 찾고 싶어할 것이다. 왜일까.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바보'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회.
남들보다 뛰어나지 못해서 주눅드는 사회.
편법을 쓰지 못하면 재능없다고 비난받는 사회.
가진 게 없으면서 평등과 분배를 이야기하면 자격지심 때문이라고 꾸중듣는 사회.
가진 게 많으면서 편법과 불법을 이야기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용인하는 사회.

크리스가 찾은 행복이 일반적인(?) 직장을 얻은 것에서 종료되지 않고(영화에서는 그렇지만)
그 이후에 그가 이룬 부와 명성으로부터 역으로 거슬러 온 행복이란 점에서 자꾸 현실에 눈이 간다.



...영화장면에서 느낀 몇 가지.


크리스 가드너가 첫 면접을 보는 날인데 이런저런 이유로 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페인트가 덕지덕지 묻은 상태로 면접장소에 나타났다. 면접관들 역시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어떤 이는 악수를 하는 것조차 불쾌하게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한국이랑 비슷할 것이다. (물론 조금 다르다. 한국이라면 면접대기자들을 부르는 직원도 크리스를 이상하게 쳐다보며 무시했을 가능성이 많다. 사전에 차단시켰을 지도...)

다음이 중요한데 물론 크리스의 넉살과 면접관 중 한 명(트위슬)과의 사소한 친분도 한 몫을 했지만 면접관들 역시 최대한 면접자의 의견을 듣는데 신중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기회를 준다. 미국도 100% 다 저럴거라고 믿진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의 관용은 열려있지 않나..라고 생각을 해봤다. 특히 크리스의 콧수염을 봐라.

한국이라면 나이먹은 구직자나 젊은 구직자나 수염은 다 밀어야 하고 반드시 양복을 입어야 하며 외형에 관련한 코멘트와 노하우가 하나 가득이지 않나. 직업마다 복장이 다르고 요즘은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외형에 치중하는 사회 분위기를 보면 머리가 아프다. 외형에 가장 목메다는 직종이 하나 있다. 국회의원.


오른쪽에 보이는 인물이 실제 크리스 가드너라고 하는데 영화의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현실과 현실을 투영한 영화 속에서 실존인물과 실존을 대체한 인물이 마주치는 장면을 다시 보며 묘한 느낌을 받았다. 크리스 가드너 역을 했던 윌 스미스의 친 아들 제이든 스미스 역시 영화 속 크리스 아들 크리스토퍼를 연기하면서 현실과 비현실이 교묘하게 얽힌 영화가 되지 않았나 싶다.


2면까지 맞춘 게 내 퍼즐인생의 최고 기록이다. 메뉴얼이라도 구해서 연습이라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팟 터치 무료 어플 중에 있어서 다운을 받긴 했는데 역시 머리가 아파서 돌려보다 포기. 퍼즐 잘하면 두뇌단련에 도움이 되려나??? 큐빅을 처음 보고 모든 면을 다 맞춰 낸 크리스는 스톡브로커가 되지 않았더라도 무언가 해냈을 인물이 되었을 것 같긴 하다.

2009년 5월 2일 토요일

디파이언스(Defiance) - 선택과 결정



비엘스키 형제들의 실제 사건을 영화화 한 작품. 비엘스키 가문의 영웅담은 그것이 영웅담이기도 하면서 인간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적극적 행위(Defiance)를 해 수 많은 목숨을 지켜낸 또다른 쉰들러 리스트라고 할수 있을까.

투비아 비엘스키(Daniel Craig)의 이야기가 중심에 있긴 하지만 주스 비엘스키(Liev Schreiber)는 투비아보다 과격하기만 하고 호전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을까. 처음에 자신의 부모를 죽인 자를 찾아가 세 사람을 죽인 건 투비아였다. 투비아와 주스는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투비아가 얻게 된 '리더'의 위치는 그가 '장남'이었고 유약한 심성 때문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주스가 투비아를 이해하면서 투비아가 주스보다 더 옳은 결정을 내렸다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영화를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투비아와 주스는 단지 노선에 대한 '선택'의 문제였을 뿐 '누가 옳고 그른가'에 대한 문제는 결코 아니었다고 느꼈다.

투비야의 인간적인 규칙이 더 좋을지 몰라도 투비야가 생존할 수 있었던 건 주스와 같은 이들의 강력한 투쟁들이 함께 존재했기 때문이다. 어느 한 가지 방법'만'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무엇이 '옳다'고 말하는 건 '결과'를 중시하기 때문이고 누적되어 온 역사적 사실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과거나 미래에 존재하는 것 따위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저항'과 '협력'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고 '개인'과 '집단(커뮤니티)' 역시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누가 더 옳으냐를 따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없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택과 결정에 대해 보다 강력한 확신을 갖는 것, 그리고 그 확신에 대해 매 순간 반문하고 반문하며 더 나은 선택과 결정을 해 나가는 것. 현재를 미래에 대한 씨앗으로 만드는 과정이 아닐까.

'영웅'은 탄생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 시대상황과 대중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영웅인데 사실 그 영웅의 실체는 여러가지 이유로 가려지게 마련이다. 그건 대중들의 심리와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안과 공포가 저항력을 앗아가기도 하지만 자신들이 보고 싶은 영웅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닌가 싶다. 투비아가 현실적으로 느껴졌던 건 그가 본의 아니게 리더를 맡게 되면서 조금씩 권위적으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권위도 힘을 잃기 마련이고 좌절을 겪게 되지만 릴카 틱틴(Alexa Davalos)의 사랑으로 다시 마음을 다잡기도 하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동생인 아사엘 비엘스키(Jamie Bell)의 리더쉽과 주스의 등장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결국 다른 이들의 눈에는 영웅일지는 몰라도 영화를 지켜보던 나같은 3자나 투비스의 형제들은 영웅, 메시아 따위에 운운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불안하고 두려운, 때론 무능하고 어리석은 대중들이 만들어 낸 영웅, 그리고 그 영웅으로부터 스스로도 구원받길 원하며 그 영웅과 함께 어깨를 함께 하며 스스로의 힘을 찾아간다는 건 시대가 변하고 세월은 흐르지만 언제나 같은 게 아닌가 싶다.

이유야 어쨌든 비엘스키 형제들이 1200여 명의 목숨을 지켜낸 일은 그 무엇보다 값진 것이다. 그들이 '영웅'이 되거나 혹은 하느님이 보내 준 '구원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마땅한 일일 수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 저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영화 엔딩에 보면 비엘스키 형제들은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에 그 어떠한 보답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이 사람들을 지켜내려고 했던 건 '상황이 그랬을 뿐'이고 '어쩔 수 없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적극적이고 의협심이 강했겠지만 그들 스스로가 영웅이 되길 자처했던 게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의 현실이 오버랩되었다. 대한민국에서 70-80년대에 이루어졌던 '민주화'가 민주당, 열린우리당, 한나라당의 많은 의원들의 입과 386세대들의 입을 오르내리며 자신들의 훈장이 되고 특별한 업적이 되는 현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영웅이고 참여하지 못한 이들은 비겁한 자들이었을까. 독재정권의 압잡이 노릇을 하지 않았으면 모두들 상황은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시대가, 상황이 그들을 민주화 투사로 만들었지만 지금의 그들은 그 시대와 상황을 자신들만의 것으로 특수화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영화처럼 누군가가 총을 들었다면 누군가는 땔감을 구했어야 했고 누군가는 신발을 수선하고 누군가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주스처럼 총을 들고 전장에 나가야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요(要)는 끔찍하리만큼 교활한 정치인들, 정치적인 인간들이 당시 대중들과 함께 건너온 공동의 시간, 역사를 자신들만의 것으로 만들어 대중을 현혹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유태인과 러시아인을 대놓고 조롱(?)하는 장면이 있는데 특히 유태인들을 무능하고 싸울 줄도 모르며 죽어 마땅한 자들처럼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유태인들은 지금 전세계의 핵심을 쥐고 흔드는 모종의 권력이 되어버렸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는 걸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것일까.


영화 엔딩에 소개된 내용.

In their new camp they built a school, a hospital, and a nursery.

Always hunted, their number continued to grow.

By war's end, 1200 had survived.

Asael Bielski joined the Russian army and was killed in action six months later.

He never lived to see the child he fathered with Chaya.

Zus emigrated to New York City where he started a small trucking business.

Tuvia followed soon after. He and zus worked together for thiry years.

Tuvia and Lilka remained married for the rest of their lives.

The Bielskis never sought recognition for what they did.

The children and grandchildren of those they saved now number in the tens of thousands.




 

박쥐(Thirst), 채워지지 않는 갈증

먼저 쓴 박쥐(Thirst)에 대한 '초간단 줄거리'는 농담이다. '박쥐'를 보며 너무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몇 가지 생각을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적어본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영어 제목이 참 잘 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영화가 끝난 후 영화 제목처럼 갈증이 (심하게) 났다. (이하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갈수록 상징과 은유가 많아지기 시작하더니 '박쥐'에 이르러서는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상징과 은유를 사용하는 바람에 영화를 보면서 머리가 좀 복잡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계속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줘서 나름 행복하기도 하지만, 뇌리에 부유하는 수 많은 생각들, 단어들, 말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갈증을 느끼는 바람에 약간은 탈진의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상현(송강호)과 태주(김옥빈)는 고아(孤兒)고 강우(신하균)는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라여사(김해숙)는 자식에 대한 끔찍한 사랑 혹은 소유욕이 있지만 술에 찌든 알콜중독자며, 승대(송영창)은 퇴직한 꼰대 형사고, 영두(오달수)와 이블린(메르세데스 카브랄)은 국제결혼한 부부다. 상현의 부모와 같은 노신부(박인환)은 장님인데다 걷지도 못한다. 이 외에도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가 '정상'인 사람들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가 현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껍데기를 살짝만 걷어내고 그들의 캐릭터를 조금만 과장하면 영화 속 인물들보다 더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면서 영화 속 캐릭터들을 반사적으로 현실에 투영하려고 버둥대는 내가 보였다.

상현과 태주가 가장 갈증(Thirst)을 느꼈을 것 같다고 생각한 건 단지 그들이 뱀파이어가 되어서가 아니다. 뱀파이어가 되더라도 '톰 크루즈'나 '브래드 피트'와 같은 뱀파이어도 있고 '웨슬리 스나입스'나 '게리 올드만'과 같은 뱀파이어도 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배우들이 각각의 특징있는 뱀파이어로 분해 뭇 여성들 혹은 남성들의 목덜미를 물며 빨간 선혈(鮮血)을 섭취해 왔었다. 그런데 상현과 태주는 그들보다 더 갈증을 느꼈고 그들과 비교해 더 원초적이고 본능적으로 행동했다. 영화 전편에서 상현과 태주가 섭취한 피의 양은 여태 소개되었던 뱀파이어 영화 속에서 섭취한 피의 양을 훌쩍 넘어서는 듯 하다. 게다가 너무나 맛있게 '쪽쪽' 빨아대며 먹는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갈증나게 만들었을까. 게다가 그들이 피를 빠는 모습은 흡사 갓 태어난 아이가 엄마의 젖을 빠는 것처럼 보인다. 그 행위는 그 자체로 순결하고 고귀할 뿐이다.

왜 신부였던 상현이 뱀파이어가 되었을까. 상현은 왜 태주를 뱀파이어로 다시 태어나게 해놓고 죽게 만들었을까. 강우의 정신분열(처럼 위장한 듯한 느낌)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 걸까. 노신부는 평생을 수도사의 길을 걷고도 단지 눈을 뜨고 일출을, 석양을 보고 싶어 뱀파이어가 되려고 했던 것일까. 승대는 태주를 한 번도 건드리지 않았을까. 영두와 태주의 섹스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끝까지 살아남은 라여사는 왜 반신불수가 되어 상현과 태주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나. 너무나 많은 상징이 보여 힘겹다고 투덜 댈 즈음 오히려 내 자신이 상징을 덧붙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곰곰히 생각해 봐야겠다만, 오히려 쉬울 수도 있겠다 싶다. '갈증'과 '구원', '넘치는 갈증'과 '비틀린 구원'

상현의 고뇌가 가장 극에 다달았을 때 병원 앞에서 텐트를 치고 상현의 은총을 기다리던 호각처녀(황우슬혜)를 강간하려 했던 건 이해가 되더라. 그들을 죽여줄까...라고 생각하던 내 예측을 깨고 가볍게 '강간' 포즈 한 번으로 그들이 상현에게 걸었던 모든 기대와 소망들을 한 줌의 잿더미로 만드는 것이란... 그러니 보여줄 거 다 보여줬어야 했을 거다. 대단했다. 근데 태주가 첫 경험이었던 상현은 어쩌면 그렇게 '섹스'가 가진 긍정의 힘과 부정적 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일까.

등장했던 배우들의 캐릭터가 모두가 강해 힘들이 서로 충돌되는 게 느껴질 정도로 팽팽했다...고 기억한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는 감독 스스로가 만든 틀을 최대한 드러내도록 하면서 그 안에 캐릭터들을 가두고 캐릭터들이 그 틀에 압사당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도록 만드는 것...같다.
반면에 봉준호 감독은 그 누구못지 않게 틀을 견고하게 짜고 있지만 최대한 일상(日常) 속에 감추어 두고 캐릭터들의 잠재의식을 건드려 튀어나오게 한 후 자신의 틀에 맞추도록 하는 것....같다.
'박쥐'도 재밌게 봤지만 그래서 '마더'도 기대하고 있다.

영화의 촬영이나 편집이 꽤 좋다고 기억된다. 음악도. 배경과 미술은 '친절한 금자씨'에서 화려함의 정점을 찍었다면 '박쥐'부터는 '간결함'의 정점으로 향하고 있는 듯 하다. 사운드도 절제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조명이 좀 독특하다고 느껴졌는데 잘 모르겠다.

박찬욱의 승리? 혹은 김옥빈의 투쟁?


'김옥빈의 발견'이라고 할 만하다. 귀엽고 섹시하고 퇴폐적이고 광년이 같고 무섭고 지랄맞고 보호본능 자극하는... 특히 피를 묻히고 눈동자 초점을 살짝 놓은 후 예쁘게 웃으며 이쁜 척 할 때 가장 예쁘게 보였다.
'송강호의 정체'라고 할 만 하다. 한 거 또하고 본 거 또 보고. 나아진 건 o|o(불사파)를 과감히 '드러냈다'는 것.
신하균은 그런 반 미친상태의 연기를 너무 잘한다. 그가 가진 눈빛이 그렇고 마스크가 그렇다.
김해숙, 박인환, 송영창, 오달수는 딱 그들의 장점을 잘 표현했다.
황우슬혜가 송강호의 바지가랑이를 잡을 때 순간 '미스 홍당무'에서 러시아어로 '라이터'를 부르짖던 얼굴이 오버랩되어서 혼자 웃었다.

처음에 나오던 간호사 최희진. 마스크가 너무 깨끗하던데... 박찬욱 감독이 밀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카메라에 아주 잘 잡혀있더라. '박쥐' 속 그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어서 옛날 사진으로 대체.



'박쥐'가 불쾌하다거나 지루했다거나 어쨌다거나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재미있었다'. 코믹한 요소도 많다면 많은 것이다. 뱀파이어들이 웃기고 귀여운 장면들이 한 두군데가 아니다. 게다가 도로에서 승용차를 향해 달려가는 김옥빈의 모습과 송강호를 뒤에서 잡아채던 신하균의 모습이 제대로 '무서웠다'. 여러모로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라 생각한다. 두 번 보라고 하면 '쩝쩝, 후루룩 거리는 장면들' 때문에 조금은 지루해할 수도 있겠지만.

** 추가
많은 사람들이 쓴 글에는 상현이 500명 중에 살아 돌아 온 사람이라고 적는데 내 기억에는 노신부가 '50명 중에 살아 돌아 온 사람'이라고  말을 한 후 병원 밖에서 기다리면 환자들과 라여사가 '500명 중에 살아 돌아 온 사람'이라고 말을 한 것 같은데... 그래서 어떤 상황은 부풀려지게 마련이고 그 부풀려진 것으로 인해 사람들의 희망과 기대가 부풀려지고 왜곡되는 게 아닌가 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노신부가 한 이야기를 잘못들었던 것일까...


[mov. or ani.] - 박쥐(Thirst) 초간단 줄거리

박쥐(Thirst) 초간단 줄거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성부와 성자와...중얼중얼중얼....후루릅후루릅쩝쩝....아..아..아앙아..아....후르릅..쩝쩝...쪽쪽..쪽..쪽쪽쪽쪽..쪽쪽...쪽..후 릅...후르릅..후르릅..쩝쩝...쪽쪽..쪽..쪽쪽쪽쪽..쪽쪽...쪽..후 릅...후르릅....아..아아아..아앙..아..앙..아아아..아앙...후루릅후루릅..쩝쩝...쪽쪽쪽쪽..쪽쪽...쩝쩝...후르릅후르릅...후루릅..쩝쩝...쪽쪽쪽쪽..쪽쪽...쩝쩝...후르릅후르릅....아아아 아...아앙..아아..아흥....쩝쩝쩝...후르릅후르릅쩝쩝...쪽쪽쪽..쪽쪽..후르릅쪽...쩝쩝...흐흐흑..흐흑. (끝)




김옥빈: "실은......"





[mov. or ani.] - 박쥐(Thirst), 채워지지 않는 갈증

2009년 4월 6일 월요일

南京! 南京! (Nanking Nanking) Trailer


南京! 南京! (Nanking Nanking) Trailer

영화 '난징! 난징!'은 '난징 대학살(南京大屠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는 두 갈래의 실마리를 제공하는데 하나는 보통의 일본사병, 다른 하나는 보통의 중국사병의 난징 대학살 기간동안 경험을 통해 1937년 난징에서 벌어졌던 광란의 살육과 강간, 약탈의 배후를 파헤치며 인간성에 대한 전쟁의 심각성을 고발하는 영화다.

영화는 1937년 12월 난징에서부터 시작한다. 다수의 국민당사병이 뿔뿔히 흩어져 난징을 빠져나감과 동시에 다수의 투항을 거부한 병사들이 남아 희망없는 처참한 저항을 전개한다. 하지만 마지막 저항이 실패한 후 수십만 중국인의 선혈이 장강을 물들이게 된다. 난징은 그야말로 사지(死地)로 변하고 만다.

이 영화는 기존의 역사 서적 및 문예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중국인의 존재에 대한 말살 및 무능한 중국인에 대한 잘못된 묘사 등을 깨고 세계 관객들이 난징의 역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난징 대학살 속의 중국인의 민족상을 새롭게 쓰고 있다. 새로운 경지에서 중국 역사상 새로운 역사적 사고를 제공하고 있다.

루촨 감독은 '난징! 난징!'이 사실상 하나의 군사구령이었다고 한다. 중국을 침략할 때 일본국 작전지휘부에서 난징 진공명령을 하달할 때 쓰던 지령이라는 것. 이것을 영화제목으로 사용한 이유는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의 강도를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한국에서 5.18을 소재로 만든 영화 '화려한 휴가'와 같은 맥락같다)

루촨 감독은 "진정으로 중국 전쟁 재난 영화를 찍길 원했다. 모든 복장, 도구들을 실제와 같이 준비했고 모든 물건은 반드시 출처가 분명해야 했다."고 말한다. 영화는 난징, 톈진, 쓰촨 등지에서 촬영을 했는데 1937년의 난징을 재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쓰촨에 당시의 난징성, 성벽, 강, 총통부, 거리 등을 새롭게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는 시각적인 부분에서 엄청난 사실성을 보여주리라 생각된다. (이상 인터넷에서 소개된 내용 축약)


출처: 南京!南京!

감독은 루촨(陆川)인데 '총을 찾아서(寻枪)'(2002)과 '커커시리(可可西里)'(2004) 등을 연출한 감독이며 이번이 세 번째 작품이다. '총을 찾아서'는 '귀신이 온다'의 감독 겸 주연으로 유명한 '지앙원'이 주연을 한 영화인데 내용이 독특하기도 하지만 공권력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으면서도 사람들 간의 관계를 밀도있게 묘사하고 있는 영화다. '커커시리'는 서장(西藏) 쪽 커커시리의 장링양(藏羚羊)의 보호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무장 산악 순찰대(민간수비대)'의 활약상을 그리고 있는 영화인데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어 실제 사건을 영화화했다. 이 영화를 위해 수 년의 준비기간을 거쳤고 영화화를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고 한다.

단 두 편의 영화였지만 강한 인상을 줬던 감독이었고 특히 '커커시리'에서 사실을 전하는 묘사방법이나 영화적 언어가 무척 강렬했기 때문에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 '남경, 남경' 역시 기다려진다. 중국인들에겐 '남경'이 가진 상흔이 너무나 깊고 크기 때문에 영화가 상영되면 상당히 많은 수가 영화를 관람할 것이라 생각된다.

나 역시 단 두 편만을 봤을 뿐인 '루촨' 감독의 '남경, 남경'이 기다려진다. 유태인 대학살을 공론화 했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66회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이상의 영화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쉰들러 리스트'보다는 좀 더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선이 견지될 것이라 추측이 되기도 하고 '쉰들러 리스트'보다 더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영화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출연진 ::




2009년 4월 5일 일요일

더 레슬러(The Wrestler), 그 어깨 너머로 들리던 환호와 야유

어릴 적 당시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에 김일을 비롯해 여권부, 그리고 신인으로 보였던 이왕표 등(그 외는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이 거대한 외국인들이 와서 '레슬링'을 했었고 어린 마음에 그들의 모습은 무척 충격적이었다. 어렸기 때문에 그들의 '레슬링'은 사실처럼 받아들였었다. 외국 레슬러가 팬츠에서 무기를 꺼내면 목청이 터지도록 '안돼'를 외쳤고 김일의 머리에서 피가 난 상태로 외국 레슬러를 박치기로 쓰러뜨릴 때면 함성을 질러댔었다. 특히 여권부의 꿀밤공격은 너무너무 통쾌했고 이왕표의 몸을 던지는 드롭킥은 표범처럼 재빨랐다.

흑백TV에서 보던 사람들이 현실로 걸어나와 육중한 몸을 움직이며, 선명한 피를 흘려가며 (쓰러질 때마다 큰 소리가 나던) 합판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링 안에서 링 밖에까지 들리도록 거친 숨을 몰아쉬며 '레슬링'하던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던 난 적어도 김일, 여권부, 이왕표라는 이름은 잊을 수 없게 되었다. 어릴 적 두 눈으로 본 시합만이 진정한 레슬링이라고, 트릭은 전혀 없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어린 나는 나이가 들며 접하게 된 미국의 레슬링에 대해선 '쇼'가 난무한 가짜라고 생각해 관심도 두지 않았었다.

후에 그들의 '쇼'는 생각 이상으로 정교하며 링 안에서의 레슬링은 오랜 훈련과 자기와의 싸움을 통해 실제로 몸을 부딪히고 합을 짜 최대한 화려한 '리얼한 쇼'를 연출하며 때론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는 레슬러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들의 '쇼'를 다시 보게 되었고 그들의 삶에 경외심이 생기게 되었다. 게다가 링 밖의 생활도 그들만의 캐릭터로 살아가길 노력해 팬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다는 걸 알게 되고서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프로페셔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레슬링'은 내게 있어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쉽게 잊혀지지 않는 기억의 한 조각, 흑백과 칼라가 오가는 뚜렷한 장면들을 남겨줬다. 그러니 '반칙왕'같은 영화에서 나오는 '타이거마스크'는 얼마나 많은 감정을 달고 오는 상징이 되었겠나. 그리고 얼마 전 내겐 '나인하프위크'의 섹시하고 '엔젤하트'의 퇴폐적인 이미지로 강하게 남아있던 미키 루크(Mickey Rourke)가 주연한 "The Wrestler"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The Wrestler"는 레슬러를 소재로 하긴 했지만 레슬러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한 '인간', 혹은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게다가 미키 루크의 굴곡많은 삶과 영화 속 랜디의 삶이 오버랩 되면서 이미 많이 알려진 것과 같이 영화 "The Wrestler"는 미키 루크의 '자전적' 영화로 비춰지기도 한다.

영화 속 랜디의 모든 비극은 스스로가 자초한 부분이 많다. 랜디의 과거가 자세하게 등장하진 않지만 딸 스테파니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 그리고 그가 사랑하게 된 캐시디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특히 한 번도 딸을 찾아나서지 않은 레슬러 아버지는 자신의 꿈을 위한 인생을 산 후 더 이상 삶의 에너지를 쏟아낼 수 없을 때에야 겨우 딸을 찾아 고해성사를 한다. 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랜디의 착각이다. 사실 랜디가 스테파니에게 '고백'하면서 우는 장면을 보며 마음은 아프지만 냉정한 시선을 둘 수 있었던 이유는 다 큰 어른의 눈물만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아버지에게 버려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스테파니의 아픔이 함께 느껴져서다. 역시 마찬가지로 캐시디도 나름대로 노력은 하지만 고집스럽고 마초스러운 랜디는 캐시디를 제대로 이해할 리 만무한 것이다. 랜디에게 있어 가정과 사랑은 자신의 삶과 이상에 비하면 그닥 중요한 게 아닌 것이다.

가정(가족)을 지키는 것과 남자(마초)가 자신의 이상을 좇는 것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경우다. 가정을 지키려면 자신의 이상을 낮추던가 일정부분 포기해야 하고 이상을 좇으려면 가족의 아픔 역시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랜디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가 아니라 랜디가 고독해하고 슬퍼하는 모습이 꿈을 잃은 한 남자의 그것이었기 때문에 보는 내내 가슴이 아팠고 내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보게 되었다. 그건 이상과 현실의 틈만큼 짊어져야 할 고통과 힘겨움이며 그로인한 갈등은 '타인'과의 갈등이 아니라 바로 '자신'과의 갈등인 것이다. 그 갈등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죽음에서도 외로움에서도 슬픔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링 위에서 저 멀리 링 아래로 몸을 날릴 수 있는 랜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보며 랜디와 미키루크가 분리되지 않았던 건 미키루크의 삶 역시 영화 속 랜디와 비슷하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내겐 영화 속 랜디가 레슬러가 아닌 우리들의 삶과도 너무나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랜디가 '미키루크'로 투영이 되던 '나'로 투영이 되던 혹은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로 투영이 되던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가 되더라는 것. 미워하지만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레슬러는 언제나 환호와 야유를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자신이 흘린 땀의 양만큼 환호를 받지만 그와 비례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바로 야유를 받으며 링에서 내려와야만 한다. 삶이 그렇다. 결코 자신이 흘린 땀은 스스로를 배신하지도 않을 뿐더러 노력을 멈추는 순간 인생의 링에서 퇴출되는 것이다. 그 어느 순간순간이 아름답지 않고 위태롭지 않을 수가 있을까. 스스로 '파이팅'을 해도 어느 순간 한계를 체감했을 때 느껴지는 공허함과 절망은 늘 주변에 고개 숙여 잠복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상을 좇는다면, 그럴 용기가 남아있다면 링 위로, 아래로 몸을 날릴 각오정도는 하고 있어야 한다.

랜디와 함께 동료 레슬러들이 쇼를 구상하고 연습을 하며 서로의 몸을 때리고 부딪힘에 있어 최선을 다하면서도 서로 존중하고 존경하는 그들의 관계와 삶은 현실에서 보기 드물정도로 이상적이고 아름다웠다. 삶이 아무리 남루하더라도 저들의 삶과 같다면 살 맛 나겠다 싶었다.

영화는 랜디가 몸을 날리면서 끝났지만 우리의 삶은 몸을 날리는 순간부터 비로소 시작이다. 언제나 삶은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지금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부터 다시 현재와 과거를 지나 미래를 열수 있기 때문이다. 참다운 삶을 찾는다는 건 그렇다. '이제야 알겠다'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유효한 것이다.

2009년 3월 27일 금요일

동사서독 최종판 : 东邪西毒 终极版



왕가위 감독이 15년 전 무협영화의 경전으로 불려왔던 '동사서독'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당시 장국영, 임청하, 양조위, 장만옥, 유가령, 장학우, 양가휘, 양채니 등 엄청난 스타배우들이 참여했던 '동사서독'은 중국 무협영화의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그로 인해 1994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예술성취특별상과 촬영상을 받기도 했다.

왕가위 감독은 15년 전의 낡은 필름을 4년 간에 걸쳐 수정하고 보완하여 '동사서독 최종판'을 내놓았는데 과정 자체가 엄청난 작업이었다고 한다. 작업시간도 시간이지만 이미 오랜 시간이 흘러 필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조각들을 한데 모아 수정작업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고 한다. 새로운 영화 4편 이상을 만들어 낼 시간이 걸렸다니 노력이 대단하다. 어쩌면 이미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마음 속에 남아있는 영화를 다시 손댄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다. 한 컷, 한 씬 만지고 다듬는 과정 속에서 인물들이 새롭게 재탄생되고 공간이 새롭게 열리지 않았을까. 등장인물 중에 장국영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 '동사서독 최종판'을 보게 된다면 많은 감정이 생겨날 것 같다.

'동사서독 최종판'은 화면이나 사운드의 퀄리티가 높아진 건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화면들도 새롭게 편집해서 추가했으며 프랑스의 유명한 특수효과회사 BUF를 초청해 새로운 화면효과를 디자인하고 삽입했다고 한다. 음악부분에 있어서는 화교 첼로리스트인 요요마(马友友)가 담당했으며 영화를 위해 새로운 음악들을 녹음했다고 한다. BUF도 스피드 레이서, 다크 나이트 등 굵직한 영화의 특수효과를 담당했었으니 영화를 손질해 다듬는 모양새는 잘 나오지 않을까 기대된다. 요요마의 음악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워낙 뛰어난 음악가니 음악 역시 기대된다.

4년에 걸쳐 수정, 보완 작업을 진행한 '동사서독 최종판'은 칸영화제 개막 일주일 전에 마무리가 되었으며 새롭게 수정, 보완한 화면은 마치 유화와 같은 효과를 갖게 되었고 색채 또한 보다 더 선명해지고 아름다워졌다고 한다. 유화같은 효과라니 내 기억 속 '동사서독'의 거칠고 몽환적이고 건조한 느낌과 잘 어울리는 형식이 아닌가 싶다. 사운드는 5.1채널로 재작업이 되어 감동적인 사운드효과를 전달해 줄것이라 한다.

새롭게 수정된 '동사서독 최종판'의 달라진 모습은
1. 러닝타임 93분(원본보다 조금 짧아졌다)
2. 영화 전체를 디지털 처리했으며 화면 색채는 좀 더 선명해지고 화려해졌다.
3. 영화 시작이 조금 달라졌는데 폭풍 중에 거대한 황색의 달빛을 추가했다.
4. 두 개의 전투장면을 완전히 없앴기 때문에 영화 속 마적의 등장은 이젠 볼 수가 없게 되었다.
5. 영화 시작과 끝의 타이틀이 다르다.
6. 영화 속 삽입곡도 수정을 했기 때문에 몽환반의 음악 역시 삭제되었다.
7. 2-3개 정도의 씬에 변화가 생기는데 예를 들자면 장만옥이 연기한 연인부분, 그녀의 신혼 밤 씬이 조금 길어졌다.
8. 영화 속 배경에 4계절을 집어넣었다.
9. 석양무사의 사방으로 튀는 선혈이나 탄식 등은 훨씬 더 정교해졌다.(디지털 처리를 했다)
....등등 이라고 한다.

오리지널이 15년 전 영화라니 정말 오래 전이긴 하다. '동사서독'은 독특한 세계관, 독특한 무협형식, 몽환적인 분위기, 우울한 정서, 건조한 화면, 두근거리는 인물 등의 수 많은 요소로 영화를 보는 내내 느낌이 참 좋았다고 기억한다. 새롭게 꽃단장한 '동사서독 최종판'의 내용이 오리지널과 크게 다르진 않겠지만 느낌은 많이 달라질 것 같다. 어떤 모습으로 나왔는지 궁금하다.



'동사서독 최종판 : Ashes of Time Redux'


'동사서독' 오리지널


영상을 보고 있으니 장국영이 그립다. 그의 눈빛, 그의 음성, 그의 미소. 아직도 '영웅본색'에서의 장국영과 '백발마녀전'에서의 장국영, '천녀유혼'에서의 장국영이 잊혀지지 않는다. '동사서독'의 느낌은 '영웅본색'과 '백발마녀전'의 장국영이 혼합된 느낌이랄까.




링크:

资料:影片《东邪西毒修复版》影片幕后
《东邪西毒修复版》
크리스토퍼 도일과 양조위 인터뷰 - 중국어
장국영(张国荣) 이미지

2009년 3월 14일 토요일

박종원 감독의 송어 그리고 이은주

  • 박종원 감독송어가 MBC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정말 잘 만든 작품이다. 등장하는 배우들도 만만치 않다. 인간의 욕망과 숨겨졌던 폭력과 두려움의 표출, 그리고 인한 분열, 거짓과 진실의 줄타기 등에 탁월한 묘사가 돋보이는 송어. 다시 보는 앳된 이은주가 그립다. 2009-03-14 02:51:13

이 글은 자유인님의 2009년 3월 14일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추가::

'송어'에 등장하는 배우들을 보니, 강수연, 황인성, 설경구, 김세동, 이항나, 이은주, 김뢰하, 김인권, 권태연, 박길수 등이다. 당시에는 황인성과 강수연이 주연급이었지만 설경구, 이은주의 연기도 충분히 좋았고 김인권, 김세동의 연기도 볼만했다. 그리고 사냥꾼으로 등장한 김뢰하, 권태연, 박길수의 감초연기도 잘 녹아들었다. 이항나는 시끄럽고 주책없는 아줌마 연기를 잘 해냈다.

연기는 (연극적) 과장이 없지 않고 영화가 산(山) 속 송어 양식장(무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서술하고 있어 연극과 같은 느낌을 준다. 한정된 공간, 개방되어 있으면서도 밀폐된 공간인 산(山)은 충분히 연극적 요소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영화에서 배경으로 쓰이고 있는 산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산이라는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오히려 영화에서는 일반적 느낌들을 더 강하게 끌어내어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산) 안에서 보면 확 트인 공간으로 밖을 보지만 (산) 밖에서 보면 꽉 막힌 공간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중적인 느낌을 주는 산(山)이라는 공간은 보다 쉽게 인간의 이면을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한다. 게다가 산을 벗어나는 순간 산에서의 나와 산 밖에서의 나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된다. 산을 한 번이라도 다녀 온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박종원 감독의 전작들을 떠올려 보면 '송어' 역시 다른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주제나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보여진다. 그러고 보니 박종원 감독들 작품은 다 봤는데 작품 모두 내겐 특별한 느낌으로 남아있다.

미묘한 감정의 골이 점점 커지면서 폭발하는 과정을 여러 사건과 인간관계의 촘촘한 설계로부터 잘 뽑아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송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살한다는 창현(황인성;주인공)의 대사를 통해 어떤 작은 자극에도 이성을 잃고 자멸하고 말 것이라는 영화의 핵심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배우들 개개인의 디테일한 연기와 감정변화의 표현들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병관(김세동)이 민수(설경구)에게 은행대출 좀 해달라면서 '사냥총이나 구입해서 사냥이나 좀 해야겠다'는 말에 차 안에 타고 있던 민수(설경구), 병관(김세동), 정화(강수연), 영숙(이항나), 세화(이은주) 다섯 사람이 시원하게 웃어제끼는데 가장 씁쓸하면서도 웃기고 섬뜩한 장면이라 생각한다.

특수한 상황,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여러가지 모습을 드러내며 다층적인 인간상을 보여주던 이들이 일상으로 돌아오면서 그 상황에 쉽게 적응하게 되고 자신과 분리시켜 객관적인 시각으로만 접근하면서 오히려 지난 일들과 자신들의 모습을 웃음으로 무마시키고 쉽게 잊으려는 모습 속에서 '한국인의 특질'을 가장 잘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보편적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겠지만 특별히 더 한국적인 인간군상의 모습이랄까.

세화 역을 맡은 이은주는 조연으로 등장하지만 오히려 주연들 못지 않은 연기와 스토리 장악을 보여주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첫 영화 출연이지 않았나 싶다. 이은주는 TV, 영화에서 처음보고 눈여겨 보며 점점 발전하는 모습을 보며 무척 좋아했고 기대했던 배우였는데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게 무척 아쉽다.

고귀해보이기도 하고 약간은 천해보이기도 하며 강해보이기도 하고 약해보이기도 한, 목소리마저 앙칼지기도 하고 애교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교태스럽기도 하고 섹시하기도 했던 스크린과 브라운관 속의 이은주는 정말 여러가지 모습을 동시에 드러내는 좋은 배우이지 않았나 싶다.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그녀는 '내 안에 너무 많은 나'로 인해 힘들어했을 수도 있겠지만...

가끔은 이은주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