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27일 월요일

영하 22도, 장춘에 도착하다.

상해에서 비행기로 대련을 거쳐 3시간 여만에 도착한 장춘. 공기가 일단 상해하고 확연히 다르다. 비행기장엔 쌓인 눈이 보이고 비행기에서 내리자 코가 시큼할 정도의 매서운 차가움. 옷을 단단히 입고 목도리에, 빵모자에 장갑까지 꼈으니 그나마 괜찮았지만 얼굴에 닿는 공기는 그야말로 얼음장같다.

택시를 타고 먼저 후배네 집으로 갔다. 인터넷으로 확인할 일도 있었고(집에 인터넷 끊었다.) 간만에 만났으니 지난 얘기라도 해야지. 오는 길에 택시는 빌빌빌 기어가듯 다니고 거리에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들 술집이나 노래방이나 집에 숨어서 이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겠지.

영하 22도, 내가 오기 전엔 영하 28도라고 그러던데 장춘의 겨울은 정말 춥다. 하지만 나도 여기에서 겨울을 지내봤기 때문에 그다지 놀라움이 생기지 않는다. 쉽게 적응하고 몸에 밴다. 이보다 더 추운 곳일지라도 사람이 어찌 살 수 없을까.

얼어붙은 장춘, 그런데 반갑다. 날씨는 아무리 추워도 반가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날씨에 관계없이 얼어붙지 않는다.

이제 짐정리도 하고 처리할 일들을 해야지.

한국에서 눈을 보지 못하다가 장춘에서 눈을 보니 겨울같다. :)

2004년 12월 26일 일요일

상해에 오다.

상해에 왔다. 8월에 온 후로 처음이니 4개월 만이다. 원래 장춘에만 들어가서 나머지 짐을 정리해 한국으로 완전 철수를 할 생각이었는데 상해에 볼 일이 생겨 겸사겸사 들어왔다.

중국어에 자신이 있는 건 아니지만 간단한 중국어에 주눅이 들 정도는 아니니 상해에 도착해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도착한 오늘,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요 며칠 상해는 무척 추웠다고 하는데 한국의 겨울 날씨로 치면 좀 서늘한 냉기가 드는 정도랄까? 공기가 습하고 바람이 좀 불면 꽤 서늘하긴 하다. 낮에는 상해 온도가 영상 17도였다고 하는데 밤이 되니 온도가 꽤 많이 떨어진다. 듣자하니 지금 장춘은 영하 28도까지 내려갔다는데...이걸 무척 추운 날씨로 생각하다니...역시 상해는 상해다.

오자마자 아는 분들에게 전화를 하고 소식을 전했다. 주홍수, 조승현 감독님은 여전히 바쁘게 작업 준비와 진행을 하고 계시고 김호는 휴일인데도 집에서 번역 일을 애써 하고 있다. 창광시 감독님께 전화를 걸었더니 너무도 반갑게 맞아주신다. 내일 쑤조우로 갈 일이 있으시다 해서 저녁에 만났다. 오늘만큼은 내가 식사 대접을 하려 했는데 상해에 온 손님에게 그럴 수 없다며 감독님이 사신다.

앉아서 한국, 중국의 애니메이션 상황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지금 내가 소속되어 있는 회사의 방향에 대해서도 설명을 드렸다. 감독님의 부인 건강이 좋지 않아 요즘 옆에서 보살피고 함께 돌아다닌다는 얘기부터 29살의 하나 밖에 없는 딸의 근황까지 시시콜콜한 얘기부터 한,중 양국의 애니메이션 상황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얘기 꽃을 피웠다.

언제 뵈어도 겸손하시고 유쾌하시고 표정이 따뜻하신 감독님을 뵙고 있노라니 내 마음도 한결 편해짐을 느낀다. 자기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을 하라는 말씀도 빼놓지 않으신다. 하지만 내가 능력이 되면 감독님을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이 난다. 기분 좋은 저녁 한 때.

감독님을 만나기 전에 시간이 좀 남아 근처 디비디 상점에 가서 몇 장의 디비디를 구입했다. 한장에 장춘보다 2원 비싼 8원. 내가 일본 애니메이션 쪽을 고르고 한국 영화는 거들떠도 안보니 직원이 내가 일본인인줄 알았다고 한다.-_-; 장춘 단골집에서 살 요량으로 몇 장만 구입했다. 저녁에 시간이 되면 일도 할 겸 디비디를 좀 봐야겠다.

오늘은 조승현 감독님 댁에서 하루 밤 신세지기로 했다. 그런데 고맙게도 김호도 내가 불편할까봐 동생인 자기 집에 와서 묵으라고 몇 번 전화를 준다. 고마운 녀석.

상해에서의 밤은 깊어가고 낯설지 않은 중국에서의 느낌이 묘한 느낌을 준다. 언어가 더 늘고 귀가 더 트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중국관련 일들이 더 많아져서 자주 왕래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내일은 장국강, 정대파 선생을 만나 일 처리를 하고 비행기표를 예매해 장춘으로 떠나야 한다. 아쉬운 상해에서의 짧은 시간.

아까 창광시 감독님과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들리던 "丁香花" 노래가 이상하리만치 내가 타국의 이방인이란 느낌을 부추기더니 마음이 고요하고 차분해진다. 그런데 난 이런 "이방인" 느낌이 참 좋다.

2004년 12월 22일 수요일

내 안의 '적'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징기스칸이 되었다.

- 징기스칸 -

상대평가를 하며 자신을 위로하는 방법은 전형적이긴 하지만
꽤 나름대로 자신에게 용기를 주기도 하고 자부심을 갖게 한다.

어쨌든 "적"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음에 동감한다.
"나"를 이기는 자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가 아니겠는가.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들, 내가 살며 해결해야 할 것들에게 대한 고민이 지지부진하다면 언제나 그렇게 목 매달고 끌려가는 삶이 될 터. 하루에도 몇 번씩 스러질 마음 일으켜 세우는 게 어려워도 해야하겠지.

죽기밖에 더 하겠어?라는 말이 폼잡는 말이 아닐 때...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오롯한 "내"가 될 것이다.

2004년 12월 20일 월요일

주인공은 누구...


함부로 앉기도 어렵고
앉고 싶은 욕망도 가득하면
먼 발치에서나마 의자에 앉는 상상을 해보거나
조금씩 의자로 향해 다가서거나...

그러다 앉을 수 있을 때 앉기만 한다면
내 삶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을까?

언제나 의자는 비워둔 채인데 말야.

2004년 12월 18일 토요일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기본적인 정(情)이 흐르지 않는다면 관계는 어느새 멀어지고 말테지. 정을 주고 받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 억지로 타협을 하거나 뇌물을 주고 받게 된다면 그건 본질을 훼손하는 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서로 가까워질 수 있을까.

오늘 상사(?)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으며 머리 속으로는 그 말의 잘잘못과 내 잘잘못을 순간적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누가 얼마만큼 잘하고 잘못하고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경계를 넘어서는 것. 어떻게 넘어서야 하는지가 중요하다. 어제 저녁부터 내 마음 속에 평소와는 다른 내가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었는데 그게 그러지 말아야지...하고 마음 먹는다고 해서 쉽게 사라지는 건 아니다. 원인결과를 끊임없이 반추하고 살펴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어떤 경우엔 실수를 수 백번하다가 한 번 잘해도 이해받는 경우가 있고 어떤 경우엔 수 백번 잘하다가도 한 번 잘못하는 경우로 인해 완전히 틀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 두 가지 경우는 어떻게 판단하고 이해해야하는 것일까. 아마 내 20살 때 아는 분에게 들었던 "일의 경중(輕重)", "일의 선후(先後)"에 대한 문제일게다. 그리고 중용에서 말하는 "시중(時中)"의 개념. 이게 완전히 내 것으로 체화되지 못한다면 난 언제나 "틀어지는" 편에 서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런 경우 모든 게 나로부터 인한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다. 상대방의 오해, 곡해 혹은 성격 때문에 내가 잘못 이해되고 무시되는 경우도 있을테니. 하지만 어쨌든 간에 그것 또한 내가 "보여지는" 것에 대한 부분이므로 나의 잘못도 있는 것이긴 할테다.

공정한 판단과 결정 후에 "어긋남의 강"을 건너간 후 다시 이야기해도 늦지는 않을 게다. 서둘러서 그 강에 빠지는 경우도 언제든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니...

일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했던 내 일 처리 방식에 한 번 더 돌아보게 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풀어가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지 다시 생각해 본다.

"연마(硏磨)"와 "취사(取捨)"하는 공부의 끈을 다시 조일 필요를 느낀다.

2004년 12월 11일 토요일

의미있게 한 걸음 떼는 방법

사무실 확보를 위해 계약을 하고 다시 한 번 사무실을 둘러보며 어떤 것들이 필요한 가를 생각해 본다. 작업 공간이 생긴다는 건 어느 작업자들에게건 약간의 설레임을 주지만 중국에서 갓 돌아온 나에게 안주(?)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는 것은 더욱 기분이 좋은 일이다.

앞으로 어떻게 사무실을 꾸려갈 것인가가 사실 더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어떤 일을 하던 간에 그 걱정은 뗄 수 없는 것 아닌가. 즐거운 마음으로 신나게 작업을 하다보면 이런 저런 일들이 하나 둘씩 해결이 되어가고 이루어지는 게 생길 것이란 믿음은 여전히 내게 유효하다.

물론, 지금 진행해야 할 일들이 바로 코 앞에 닥쳐 마음이 조급한데다가 사무실 정리도 해야하는 상황이 그다지 반가운 건 아니지만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으니 충분히 반길 자세는 되어있다.

일만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도 더 적응해가야 하고 내 스스로의 위치도 되도록 빨리 안정시켜야 한다. 여러가지 일은 한꺼번에 몰려든다는 게 여태 살아오면서 느낀 것 중 하나다. 그런 일들도 순서를 밟아 차근차근 해가다 보면 실타래 풀리듯 순소롭게 풀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 이럴 때 일수록 단전에 힘을 놓지 않아야 하는데...여전히 수행이 부족한 자신에게 마인드 컨트롤을 해본다.

언제나 시작이듯, 이번에도 또 시작이다.

2004년 12월 10일 금요일

음식과 종교인

미식가는 좋은 음식, 맛있는 음식, 멋있는 음식들을 찾아 다니고 그 맛을 즐기며 삶에 대해 알아가고 터득해간다. 하나의 취미일 수도 있고 하나의 직업일 수도 있고 그냥 삶일 수도 있다. 요리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도 잘 알지만 요리에 들어가는 재료, 요리의 역사(기원), 사람과의 관계성, 문화적 코드로서의 의미 등에 대해서도 잘 알 것이다.

어느 한 방면의 전문가는 그 일에 몰두할 때가 가장 아름답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한가지에 몰두하면서 산다는 게 그리 쉽지만도 않다. 그래서 스스로 채찍질도 하며 노력하고, 그렇게 해서 타인들에게 명예와 존경을 얻기 위해 애를 쓰기도 한다.

그런데 가끔 미식가도 아닌 종교인이(* 일반인들이나 종교인들이나 음식을 좋아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해소를 위한 노력, 또는 취미생활, 맛있는 걸 먹고 싶어하는 요구에 대해서는 100% 인정한다.) 맛있는 집을 줄줄 꿰고 있거나 먹는 것에 너무 공을 많이 들이는 경우를 접하게 된다. 내 선입견임을 미리 인정하고 말을 하자면 종교인들의 그런 모습들이 그렇게 좋아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수행을 하고, 마음을 닦아서 중생들에게, 범인(凡人)들에게 영성의 울림을 전해줘야 할 분들이 음식을 탐닉하며 겉도는 모습은 적어도 내게는 좋게 보이진 않더라.

밥 잘 먹고, 맛있고 몸에 좋은 거 많이 먹고 다니는 것도 건강을 챙기는 것이라는 건 인정한다. 정신건강도 챙겼으면 하는 거지. 정신건강도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거나 해서 건강해지고 행복해진다면 할 말 없군.-_-a

2004년 12월 9일 목요일

화산(和山)님.

미남이십니다. :)

화산 김석원 정사가 지난 9일 신동 자택에서 열반, 11일 오전 10시 중앙총부 반백년기념관에서 교회연합장으로 발인식을 거행했다. 세수 63세. 법랍 44년. 공부성적 정식법강항마위, 사업성적 정특등, 원성적 준특등이다.

左山종법사는 발인식에서 “화산 정사는 평소 성실하고 알뜰한 공심 덩어리로 남이 알거나 모르거나 50여 성상을 이 교단과 함께 하며, 가는 곳마다 창립의 주춧돌을 쌓은 거룩한 삶을 살았다”고 칭송하고 “오는 세상은 밝고 대통(大通)하리니 이 회상에 다시 돌아와 대종사님 교법 받들며 영생영겁을 함께 하자”고 법문했다.

화산 김석원 정사는 1937년 5월10일 경북 경산군 진양면 산화동에서 출생, 원기33년 5월15일 다산 김근수 종사를 연원으로 영산교당에서 입교했다. 원기41년 5월3일 하타원 정양진 대봉도의 추천으로 전무출신을 서원, 총부 산업부·만덕산훈련원·원광중고·하섬수양원·영모묘원·원광대학교 등에서 근무했다. 틈틈이 어려운 교당의 불단 조성과 건축공사, 시설 보수 등을 자상히 살펴준 공심이 있었다.

장지는 왕궁 영모묘원. 종재는 원기85년 1월 26일(수) 오전 11시 중앙총부 반백년기념관.


벌써 5주기. 6년째다. 작년엔 중국에 있어서 참석을 못했지만... 세월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흘러만 가고 있다. 올해는 동생이 호주에 있으니 참석을 못하고... 형제들의 부산한 움직임과 활동영역의 확장은 있으되 당신만큼은 늘 그 자리, 그대로 계시는 듯 하다. 조카 딸 삼총사가 온 집안 어른들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 넣고 애교가 하늘 땅 충만한데 못보시다니 참 아쉬우시겠다. "허허~ " 웃음 한 번으로 끝나실 사랑의 표현도 상상만으로 밖엔...

사실 위에 써있는 글은 너무 상투적이고 너무 형식적이긴 하다. 하긴, 몇 줄의 글로 누군가의 삶을 표현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그런데 더 아이러니하게도 난 당신의 삶 전부를 알지 못한다. 정말 아쉽고 죄송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또 끙끙거리며 힘겹게 살고 있으면 한 번쯤 찾아오시겠지. 당신과의 인연이 참 고마울 뿐이다. 음...그런데 당신만큼 잘 생기지 못해서 많이 아쉽기는 하다.^^;;; 능력(재주)도 부족하고.-_-a

아시죠? 저 계속 애니메이션 관련 일 하고 있어요. :) 더 노력할께요.

이미 완전한 해탈천도가 되셨을 거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지만
오늘 다시 한 번 "완전한 해탈천도를 하시길" 마음 모읍니다.

2004년 12월 8일 수요일

11월 20일~22일의 기록

장춘에 잠시 들어가 규이+치우메이 결혼식에 참석하고는 한국에서 해야 할 일 때문에 또 허겁지겁 귀국하는 바람에 다시 장춘에 나가야 할 상황이지만 그래도 더 주어진 기회가 더 고맙게 느껴지기도 한다. 비행기 값이건 뭐건 일의 핑계건 뭐건 차분히 그네들과 인사라도 하고 와야겠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 규이, 치우메이, 옌궈, 옌뽀


한국으로 돌아올 때 공항까지 꼭 오겠다고 바득바득 우기는 요 네 녀석들과 12월 말에 꼭 오겠노라는 다짐을 하면서 기념으로 남긴 흔적들.

지금은 규이, 치우메이야 신혼살림에 행복한 날들이겠고, 옌뽀는 여전하겠고 옌궈는 일 구해서 장소를 옮겼다니 더욱 큰 발전이 있길 바랄 뿐이다.

규이, 치우메이 결혼식 사진을 꽤 찍었는데 올릴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미루고 있는 게 마음에 걸리네. 기다려라. 친구야.

흠, 그나저나 장춘 공항도 곧 이전을 하게 되면 내가 머물던 동네까지 택시로 거의 100원이 훨씬 넘게 나온다고 그러는데 쩝~ 공항은 깨끗해지고 더 넓어지고 좋아져서 좋긴 하지만 너무 먼 것 아냐? 하긴, 서울에서 인천 공항 가는 것도 만만치 않긴 하다.

12월에 또 볼 날을 기다려라.

2004년 12월 7일 화요일

크리스마스도 아니면서...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어느 Bar에서


한달도 더 전에 어느 맥주 bar에 가서 찍은 폰카(VK-100M_32만화소)

비틀즈를 너무나 사랑하는 주인장 때문에 곳곳의 커다란 스피커에서는 비틀즈의 음악이 제 세상을 만난 듯이 쏟아지고 있다. 맥주 두 어 병에 취하지는 않았지만 음악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했던 느낌.

이상하게도 저런 줄조명만 보면 크리스마스가 떠오른다. 나도 광고효과에 이미 깊숙히 길들여지고 있나보다. 조명 바깥으로 흐느적거리며 지나가는 남녀를 보았었다. 저들에겐 언제나 축제인 것만 같은 밤.

비틀즈 음악이 듣고 싶으면 다시 이곳에 가야겠다.

2004년 12월 6일 월요일

몸뚱아리

다리의 근육통.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만약 이유가 있다면 오랜 시간 차를 타고 다녔다는 것 밖엔. 그것도 차를 내리고 한참을 걸을 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잠시 어디엔가 앉아있다가 일어나면서 그런다. 몸이 힘겨울 땐 자연스럽게 마음도 힘겨워 함을 느낀다. 그래서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은 몸과 정신, 마음 모두가 잘 살아낸다는 것과 맥이 통하는 것 같다.

몸살기운까지 슬쩍 지나간다. 문득 왜 이런 증상이 늦게 나타나나 싶다. 한국에 온 이후로 내 생활패턴으로 살지 못한 것과 적응하고 따라가느라 긴장하면서 살았던 걸 생각하면 이제야 몸이 좀 풀리면서 아플 수도 있겠다 싶다.

밤새 끙끙대며 땀을 한 바가지나 흘리고 나서야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있던 오한이 다 빠져나가고 개운해진다. 뜨거운 불덩어리가 자꾸만 안에서 빙빙 돌더니 이제야 다 수그러들고 잠잠해졌다. 그럼과 동시에 마음이 상당히 깊이 가라앉는다. 왜 그러지? 왜 그러는 것일까? 마음 한 귀퉁이에 쇠 추를 달아놓은 양 아래로 아래로 쳐진다.

이거 또 좋지 않은 버릇 나올려고 하는 모양이네.

............좀 지켜보자.

2004년 12월 3일 금요일

쑨난, 한국에서 보다.

孙楠 (쑨난; 손남)


孙楠(쑨난 - 한국어 : 손남), 오늘 TV에서 "Asia song Festival" 하는 걸 잠깐 보는데 쑨난이 나온다. 아~ 참 신기하다 싶었다. 이 가수는 중국에서 남자들에게 꽤 인기가 있기도 하고 여자들도 무척 좋아하는 가수다. 노래를 따라부르기 좀 어려워서 그렇지. 주옥같은 노래들을 쏟아내는 가수다.

이 가수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중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가수라는 건 안다. 참 아이러니 한 건 이 가수는 중국 음반시장에서 자생적으로 크지 못했다고 한다. 외국(유럽인가 영국인가...)에 나가서 한동안 음반차트 1위를 하면서 유명해져 중국으로 돌아와서 인기를 얻었다 한다. 이 얘기를 나에게 해주며 중국 친구가 어이없어 하는 표정 짓는 걸 봤다. 이런 일들이 가수들 뿐만이 아니라 영화 쪽에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중국에서 종종 보고 듣던 쑨난을 한국에 온지 1달이 지나서 한국 TV에서 보니 묘하고 반갑다. 이 친구, 한국어 연습 무척 많이 했나 보다. 한국어로 인사를 하고(물론 잊지 않기 위해 메모를 준비하긴 했지만...) 'I believe' 를 1절은 한국어로 부른다. 발음이 조금씩 틀리긴 하지만 노력하는 모습이 참 좋아 보인다. '감사합니다'라고 한국어로 말할 때는 왜 이렇게 내가 아는 중국 친구들과 발음이 비슷한 건지...:) 중국인들의 구강구조가 비슷하게 생겼나?

뭐, 어쨌든, 반갑다. 쑨난.

아~! 'i believe' 는 "엽기적인 그녀"가 중국에서 상영될 때 삽입되었던 주제곡. 쑨난이 중국어로 부른다. 

아래는 孙楠(쑨난)의 대표곡이라 할 만한 拯救(구원)이라는 노래다.

拯救(구원) - 孙楠(쑨난)

词:梁芒
曲:周笛

灯火辉煌的街头
突然袭来了一阵寒流
遥远的温柔
解不了近愁
是否在随波逐流
夜深人静的时候
我就潜伏在你的伤口
梦是氢气球
向天外飞走飞走
总化作乌有
一个人在梦游
像奔跑的犀牛
不到最后不罢休
爱若需要厮守
恨更需要自由
爱与恨纠缠不休
我拿什么拯救
当爱覆水难收
谁能把谁保佑
心愿为谁等待
我拿什么拯救
情能见血封喉
谁能把谁保佑
能让爱永不朽

2004년 12월 2일 목요일

바퀴 교체!

아는 분의 부탁으로 오토바이 뒷 바퀴를 좀 더 두꺼운 걸로 교체해야 했다. 오토바이가 50cc인데 모양은 상당히 세련된, 아기자기한 느낌의 오토바이. 많은 사람들이 그걸 보면 이쁘다고 하고, 또 작아서 자전거같다는 얘기도 종종 한다.

근처 오토바이 센터에 가서 뒷 바퀴를 교체할 수 있냐고 하니 이리저리 본 후 가능하다고 한다. 다만, 두꺼운 걸로 교체할 경우 물받이(바퀴 덮개)는 필히 제거해야 한다고 한다. 만약 여의치 않아서 다시 원상복귀할 경우 수고비로 만원을 내라 한다. 교체 비용은 3만원 정도...

한참을 기다려서 뒤바퀴 교체를 하고 보니 이제야 오토바이 모양새가 좀 난다. 바퀴가 굵을수록 코너링을 할 때 안정감이 있다는데 타보니 정말이다. 차체 뒤가 무거우니 안정감도 있는 것 같고...

어떤 사람이던 한 분야에 종사하다 보면 전문가가 되는 건 확실하다. 다만, 지속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을 경우 아는 만큼에서만 머문다는 것도 단순한 진리다. 오늘 수고해 주신 사장님은 대충대충 슬렁슬렁 작업을 하는 것 같은데 금새 일이 끝나있다. 보니 일을 대부분 그런 느낌으로 처리한다. 힘을 적게 들이고도 최선의 결과를 내는 방법을 아는 것 같다.

오토바이 폼 새도 잘 나고 새 느낌으로 시승을 해보니 좋다. 다만 바퀴가 무거워져서 힘이 조금 달리는 듯 하다. 하지만 50cc인데 뭘~ :)

2004년 12월 1일 수요일

밤을 새우고...

PT를 준비한다고 밤을 꼬박 새웠다. 밤 샌다고 일을 잘 하는 건 당연히 아니기에 뿌듯한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때론 이렇게 정신없이 지내는 것도 즐거움을 주는 것 같다.

서둘러 집을 나서고 약간 허기진 기운의 상쾌함을 느끼며 지하철을 타고 가는 아침이 왠지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그 속에 익숙한 편안함도 있네.

사실 중국에서는 영화를 보다가 혹은 TV를 보다가, 술을 마시다가 날을 샌 적은 있지만 그 때는 꼭 아침에 잠을 청해 오후에 일어나곤 했었지. 그런데 지금은 날을 꼬박 새고도 오후까지 말짱한 정신으로(조금은 졸리지만...;;;) 회의다, 뭐다 하는 일까지 버겁지가 않다. 속을 비워내며 사는 삶의 힘인가 싶기도 하다.

앞으로 정신없는 생활이 종종 있을 것 같지만 두렵다기 보다는 긴장이 된다.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무언가 이뤄낼 수(?) 있을까 하는...그런 긴장감.

조금,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