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14일 목요일
아바타 기술력은 2000억 원?
문득 '쥬라기 공원'이 흥행을 하고 있을 때 흘러나오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쥬라기 공원'의 흥행수익이 자동차 몇 십만대, 몇 백만대 수출효과와 맞먹는다느니 '쥬라기 공원'같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정부가 손을 걷어부치고 달려들었다는 이야기들.
영화 뿐만이 아니다.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였다. 꿈에 부푼 장미빛 미래들을 거론하며 헐리우드에 버금가는 영화와 애니메이션 제작만이 미래의 희망인 것처럼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눈 먼 돈들은 쏟아졌고 누군가는 그 돈으로 몇 년을 넉넉히 먹고 살았고 누군가는 돈 냄새도 맡지 못하고 제작 현장을 떠나갔다. 그러는 사이 국민들이 낸 세금은 그 누구도 모르게 여기저기에서 소모되었고 허공에 뜬 채 사라졌다.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영화/애니메이션은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으로만 생각한다. 정말 2000억 원만 투자하면 몇 년 사이에 미국 CG기술의 90%를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인가. 가까운 일본과 중국은 2000억 원을 투자 못해서 CG기술이 헐리우드만 못한가.
한국의 기술력이 많이 발전했다는 건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애니메이션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방법이 글러먹었다. 90년대 초반부터 20여 년 동안 지원방식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그냥 돈을 가져다가 쏟아 붓는 거다. 누구 좋으라고?
2000억 원이 아니라 2조 원을 들이 부어도 지금과 같은 투자/양성 방식이라면 희망을 품기 어렵다. 시간이 약이고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는 것은 이 나라 위정자들에겐 공염불에 불과한 이야기일 뿐이다.
2007년 9월 4일 화요일
잡담-드라마, 영화의 흥행?
문득 드라마나 영화 중에 흥행하는 것은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을까 라는 다소 범위가 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머리를 스치는 '가설' 하나가 머문다. 분석할 능력도 안되고 자료를 찾아볼 시간도 안되기 때문에 그냥 가설에서 시작해 가설로 마무리 하는, 잡담 정도로 적어본다.
사실, 써머즈의 <음모론적 시간에서 본 드라마 24>라는 포스팅을 보다가 생각한 건데 드라마나 영화가 흥행하는 배경에는 '삶에 아주 익숙한 것'들이 등장하지 않나 싶다. 예를 들어 남자는 마초로 단장하고 가장 남성적인 걸 드러내거나 여자는 역시 순종적이거나 주변인으로 그려질 때, 정치인들 나쁘거나 바보처럼 그려질 때, 테러리스트는 늘 아랍계일 때(이 외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 기타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 등등... 이런 이야기가 끼지 않으면 드라마, 영화는 대중적으로 크게 흥행하지 못한다. 물론 그것'만' 있을 때 역시 흥행하지 못하겠지. 다만, 그런 부분들 즉 익숙한 코드가 재생산되지 않으면 흥행하는 건 크게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새롭게 성격을 부여해도 원래 캐릭터가 가진 범주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법이다.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드라마, 영화조차도 극이 진행되면서 차츰 본색을 드러내고 결말은 여전히 제자리를 답습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영화에 사상을 담고 철학을 담는 일 따위는 돈과는 크게 상관이 없어보인다. 그래서 좋은 드라마, 영화라고 하는 건 아주 익숙한 것들 위에서 새로운 것을 영리하게 올려놓거나 아주 익숙한 것을 새롭게 해석해 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익숙함'과 '새로움'을 분리하거나 재조합하는 방법이 알고 싶다.
혼자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본 것에 지나지 않지만 정말 흥행하는 드라마나 영화의 속내가 궁금하다.
2006년 6월 3일 토요일
더운 주말을...
잠을 자도 또 자도 졸리기만 한 날에 친구와 약속을 해 밖으로 기어나왔다. 일산에 라페스타라는 곳-처음 와보는 이곳에서 '아이스 에스페라소'를 한 잔 마시고 영화를 보기 위해 티켓팅을 한 후 남는 시간을 위해 PC방에 왔다.
라페스타-파스타 이름같은 이 곳에서는 가족들, 어린이들, 젊은이들이 북적이고 고기집, 식당들은 지금부터 불을 지펴대며 손님 받을 채비가 한창이다.
오늘 볼 영화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짝패'. 류승완을 좋아하기 때문에, 정두홍을 좋아하기 때문에 더욱 보고 싶었던 영화. 액션키드라 스스로를 칭할 수는 없지만 액션에 관한한 꽤 많은 영화를 봐왔던 터라 더욱 기대가 된다.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면 실망도 하겠지만 모든 이유를 불사하고서라도 또 다른 한 가지 이유. 한국 극장에서 몇 년만에 보게 되는 영화라는 이유만으로도 기분은 좋다. 이렇게 말하니까 외국에서 오래 산 느낌을 솔솔 풍기게 되는군.-_-;
영화평은 차후에 하기로 하고... 나른하고 뜨뜻한 주말을 맘 편히 보내보도록 하자. :)
2006년 4월 28일 금요일
[mov] 홀리데이 | Holiday | 假日

“有錢無罪 無錢有罪” 이 말 외에 다른 말을 덧붙이는 건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88년 10월 8일 12명의 죄수 탈옥. 그 속에 지강헌이 있었고 전국민에게 울분을 토해내듯 인질극을 벌였던 이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 후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18년 세월 속에서 과연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을까. 87년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맛봤던 것도 어쩌면 전씨의 올림픽 개최 열망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면 착각일까. 유래없이 단기간 내에 민주화를 이뤄낸 한국인들. 그 행복한 성취감은 자주 정치인들이 자신은 민주화 세대라고 떠벌리며 이용되는 영광스러운 과거의 모습이 되고 말았다.
노회찬 의원이 설문조사를 한 결과에 의하면 여전히 대한민국 헌법은 만인에 불평등하다고 느끼고 있는 이가 73%에 다다른다고 한다. 법치국가,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해괴한 설문조사 결과라니… 법이 인민을 보호해주지 않고 권력자만을 보호해 준다니… 믿고 싶지 않을 뿐이다.
삼성이나 두산 그 외 많은 대기업들은 법의 보호를 제대로 받아 자산을 불리고 영토를 넓혀가고 대추리 서민들 역시 제대로 법의 보호를 받아(?) 삶의 터전을 잃어버릴 처지에 있다. 법은 만민에게 평등하다고 말한 이 과연 누구인가. 법은 평등한 적용기준이 아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만큼은.
작년 6월에야 보호감호법이 철폐되었다니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지만 여전히 돈으로 법을 사고 파는 일이 빈번한 시대를 살고 있는 건 아직 끝나지 않는 비극이다. 작은 법리해석을 두고도 정의를 위해 몇 년씩 자비를 들여 투쟁을 한(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삼성비리를 털어내면 국내 경제가 휘청거릴까 내심 고민하고 있는 검찰도 있다. 한 개인의 권리와 삶은 별 것 아니지만 국익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권력가, 기업가는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감동까지 전달해주는 모양이다.
영화 <홀리데이>는 최민수의 오버연기와 억지스러운 허구를 삽입함으로 인해 싸구려 영화가 되어버렸다. 정작 지강헌(영화 속 지강혁)이 부르짖었던 “有錢無罪 無錢有罪” 이야기 하나만 보고 달려가고 몰아가는 바람에 좀 더 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는 사회현상들을 놓치고 말았다.

다만, 이성재의 연기는 꽤 빛을 발한다. 너무나 화려한 몸 근육 때문에 시선을 종종 뺏기곤 했지만(몸 근육이 어울리는 영화 내용이었다면 좋았을 걸…) 살이 빠진 이성재의 얼굴 굴곡과 눈빛, 표정 등은 영화와 잘 어울린다. 그러고보면 이성재는 감독의 역량부족이나 영화선택의 실수로 간혹 빛을 잃곤 해서 그렇지 꽤 연기를 잘하는 배우다. 이성재를 제외한 나머지 조역 탈주범들은 연기를 너무 못한다. 특히 장세진과 파트너는 자꾸 영화와 겉도는 느낌이다. 브로커로 나온 배우도 오버센스다. 여현수는 영화 속에 깊이 뭍어나진 못하고 이얼의 연기 변신은 아주 충격적이었지만 감정이 너무 흘러넘친다. 이얼의 파트너로 나온 배우가 조역으로 적절한 선을 유지하지 않았나 싶다.
최민수는 왜 건달 똘마니를 데리고 다니는 것일까. 그냥 감독의 의도일까? 당시 경찰, 검찰은 깡패 두목이다..라는 식의? 최민수의 배역이 너무나도 허구적이기 때문에 영화의 몰입을 자꾸 방해한다. 최민수는 <나에게 오라>, <테러리스트>, <남자 이야기> 정도에서 적절한 배역과 연기를 보여주지만 그 이후의 행보는 너무 폼만 잡는 것 같다. 영화에도 많이 개입을 한다는 소식을 접해서인지 이번 영화에도 자신의 장광연설을 늘어놓고 감독을 홀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각본이 좀 더 좋았다면 어땠을까… 배우들의 부족한 부분이나 오버연기도 잘 덮어주지 않았을까? <실미도>, <공공의 적2> 시나리오 작가 김희재가 각본을 맡았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난 이 두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가 마치 보호감호법 철폐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처럼 마지막 자막을 올리는 것이 의아했다. 결과적으로 마지막 자막에 비해 영화는 이야기를 제대로 못한 격이 되지 않았나 싶다. CGV와 마찰로 “有錢無罪 無錢有罪”가 현실화되고 이슈화되긴 했지만…

적어도 영화 <홀리데이>는 당시 현실보다도 드라마적이지 못하다. 특히 당시 인질로 잡혀있었던 고모양이 마지막 생존자였던(현재도 수감중이던) 강모씨를 위해 제출한 탄원서 내용이라던가 이를 근거해 추측해 볼 수 있는 범인과 인질들 사이에 존재했을 스톡홀름 증후군과 리마 증후군 등은 오히려 더 극적이다. 이는 오히려 유오성이 주연했던 같은 내용의 TV단막극이 더 낫지 않았나 싶다.
예전에 정태춘, 박은옥의 <아! 대한민국> 앨범을 좋아했을 때, 정식 음반으로 나오지도 않았던 걸 공연현장에서 팔던 테잎을 사서 듣고 또 들어 테잎이 완전 맛이 갔을 때 읽었던 글 한토막이 생각이 난다.
“모든 가슴을 울리는 것들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현실을 이야기 하는 것들이다.”
[mov] 야수 | Running Wild | 野兽

많은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보면 한국보다 못한 사회가 더 많다고 입을 모은다. 그래도 한국이 살기 좋은 나라라고 말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행복은 상대평가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즉, 절대평가 속에서 느껴지는 행복, 삶의 가치만이 한 개인에게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한 개인은 절대 다른 국가사회(혹은 문화) 속에 흡수될 수 없다. 그렇게 보이더라도 그건 그저 표면 위에서 부유하고 있을 뿐이며 정교하게 모방하거나 흉내만 내고 있을 뿐이다.
그럼 한국은 어떤 나라일까. 어떤 사회일까. 어떤 삶들이 부벼지는 공간일까. 각자 모두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국가사회일까. 불만은 있되 그래도 살만한 곳일까. <야수>에 등장하는 장도영과 오진우는 공권력에 속하면 그 힘을 남용하거나 지켜가되 비교적 자신의 행복지수, 성공지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그 공권력의 반대편에 서 있지만 결국 사회권력, 국가권력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유강진이 있다. 그 과정 속에는 권력과 권력이 맞부딪히며 묘한 공명을 일으킨다. 이후에는 공권력 따위도 필요없다. 물고 할퀴는 처절한 싸움만이 남을 뿐이다.
<야수>가 다른 형사영화 혹은 권력을 다룬 영화와 차별점이 있다면 비교적 직설화법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따.위 ㅈ같은 사회가 우리가 사는 사회고 국가다”라고. 그리고는 덜 길들여진 두 마리 야수를 내키는대로 행동하도록 방치한다. 지치고 지칠 때 알아서 쓰러지도록. 거대 권력사회라는 조련사가 야수를 길들이려고 하지만 야수들은 길들여지지 않는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아리지만 한편으론 카타르시스를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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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강진은 폭력배 출신 국회의원이지만 우리나라 국회의원 중에 폭력배 아닌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얼마나 많은 국회의원이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국민들에게 깡패 짓을 하고 있는가. 국민의 세금과 피와 땀을 먹고 사는 국회의원들의 하는 짓이라곤 민의를 악용해 자신의 배만 불리려 하고 있으니 깡패와 다름없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건 내키지 않지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세상에 그 법칙이 적용되면서 변질되었다. 동물도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인간은 마치 온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듯이 착복을 하고 남이 가진 최소한의 권리마저도 유린한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건 진리다. 장도영은 불행한 가정출신이고 오진우는 부모는 등장하지 않지만 부인에게 이혼요구를 당한다. 유강진은 깡패지만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맞다. 세상은 아주 정상적으로 지극히 ‘불공평’하다. 그러나 그 불공평한 세상 속에서도 최소한 지켜야 할 룰은 있다. 최소한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는 말아야 한다. 이 룰이 궤도를 이탈하기 시작하면 힘없는 인민은 사는 게 그저 괴로울 따름이다.
영화 한 편을 보고 별 생각을 다 하고 있지만 <야수>가 말하고 있는 방법이 너무 직설적이라 반응도 그런듯 싶다.
<야수>에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르겠지만 내 판단으론 장점이며 독특한 시도라 생각한다.)
첫째, 불안하게 흔들리는 카메라를 통한 인물 심리의 표현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핸드헬드처럼 다른 영화에서도 자주 접하는 부분이다. 눈에 띄었던 장면은 인물에게 짧고 빠른 크로즈업/아웃이 종종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인물에의 몰입을 유도하고 있다. 영화가 시간을 더해갈수록 카메라와 몰입도는 괜찮은 간극을 유지해간다.
둘째, 인물의 분장이다. 몇 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인물들의 분장이 억지스러울 정도로 과장되어있다. 처음엔 조명의 문제인가 싶었는데 분장을 의도적으로 두드러지게 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확실히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는 느낌이 강하다. 몇 장면만 그랬다면 분장사나 조명기사의 실수라고 생각했을 텐데 오히려 몇 장면을 제외한 모든 장면에서 분장이 과장되었다. 인물의 컨트라스트가 강해지고 현실과 비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느끼게 된다. 눈에 거슬리고 어색했을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 오히려 난 새로운 느낌이라 좋았다.

셋째, 마지막 장면을 아예 드러내 놓고 시작한다. 주인공이 어떻게 되리라는 걸 미리 짐작하고 영화의 흐름을 쫓는 건 극히 위험한 방식이긴 하지만 오히려 이 영화는 그럼으로 인해 주인공들에 대한 답답한 심정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어떤 기대감없는 무력감에서 비롯되는 동질감이랄까.
넷째, 비극적 결말이다. 일단 장도영이 같은 경찰들에게 영웅본색의 주윤발처럼(붕대를 붙인 느낌도 비슷한) 엄청난 총알 세례를 받고 죽는다. 주인공을 저렇게 죽이는 건 홍콩 영화에서나 흔히 볼 수 있었던 ‘홍콩 느와르’식이지만 홍콩 영화의 많은 영향이 남아있는 <야수>에는 어울리는 장면이다. 게다가 한국영화에서는 비극적 결말을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점에서 격려를 보내고 싶다. 특히 오진우가 장도영식 머리 스타일(똑같진 않지만)로 변해서 유강진에게 한 두발도 아닌 여러 발의 총알세례를 퍼붓고 허탈하게 웃는(우는) 마지막 장면(관객을 똑바로 쳐다보며)은 반전 아닌 반전이었달까. 최소한 내게는 일말의 카타르시스가 되었다. 두 야수가 덤벼들어 수 많은 피들 중에서 겨우 하나의 피만 솎아냈지만 그건 오로지 비극이라기 보다는 일말의 거친 희망을 느끼게 한다.
물론 <야수>는 여러모로 미흡한 점이 많다. 장도영 여자친구 역이었던 엄지원은 비중이 너무 작아 아쉽기만 하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거슬렸던 건 다름아닌 장도영이 오진우에게만 깍듯이 반말을 한다는 것이다. 거친 놈의 야수라면 아무에게나 반말을 지껄여야 상황에 맞을 터인데...왜 그랬을까.(억지로 짜맞춰보자면 장도영은 이복동생이 있었지만 불안한 자신을 기댈 형같은 존재가 없었다. 그런데 오진우는 왠지 그에게 형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호랑이처럼 굴다가 꼬리내린 강아지가 되었던 것일까?라고 추측...-_-;), 장도영의 잦은 눈물도 역시 분위기를 흐리는데 일조를 한다. 아무튼 그저 71년생 감독이 받았을 홍콩영화(느와르)의영향이나 20대 사회에 가졌을 법 한 비관적인 시선, 젊은 치기들이 왠지 반가웠기 때문에 큰 불만은 없다.
유강진 역의 손병호를 제외하고 권상우나 유지태는 연기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긴 하다. 그나마 유지태는 낫다. 올드보이에서 보여준 차가우면서도 고민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의 연장선상으로 보이긴 하지만 검사역에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권상우는 왜 그렇게 어설프게 보일까. 발음의 한계일까? 유지태도 발음이 부정확하긴 하지만 그래도 음색이라도 좋지. 개인적으론 권상우가 발음과 목소리 음색을 좀 다듬어서 거친 역할을 하는 게 잘 어울릴 것 같다. 꽃미남 권상우는 별로다.

문득, 장태산 만화의 <야수라 불리운 사나이>가 생각난다. 영화처럼 거친느낌의 펜터치와 길들여지지 않은(을) 주인공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2006년 3월 10일 금요일
[mov] 霍元甲 | Fearless | 무인 곽원갑
아무튼 그런 이연걸의 마지막 영화라며 <곽원갑>이 등장했다. 많은 사람들은 영화가 재미있는지 여부를 떠나 이연걸의 ‘마지막 영화(라며?)’라는 사실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다. 영화는 순조롭게 개봉을 했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양분화되었다. 재미있다, 그리고 재미없다.(당연한 소리-_-;) 솔직히 나는 재미있었다. 한국에 개봉하기 전 중국에 있을 때 봤는데 <곽원갑>은 딱 이연걸‘식’ 영화였고 난 그게 좋았다.

중국 CCTV6 영화채널에서는 이연걸과 우인태 감독, 원화평 무술감독, 그리고 손려, 동용 등 감독 및 주연 배우들이 출연해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곽원갑>의 개봉을 1-2일 앞둔 시점에서 <곽원갑 상영 기념회>를 준비한 것이었다.
우인태 감독은 이미 이소룡의 아들 이국호(브랜드 리) 주연의 <용재강호>나 장국영, 임청하 주연의 <백발마녀전>, 장국영, 오천련의 <야반가성> 등으로 유명한 감독이다. 미국에서는 <프레디 vs 제이슨 / Freddy Vs. Jason>, <51번째주 / The 51st State>, <처키의 신부 / Bride of Chucky>등과 같은 영화의 감독을 맡기도 했었다.
중국 일부 비평가들은 우인태 감독이 B급(?) 영화로 쏠쏠한 재미를 보는 화교 감독으로 보면서 <곽원갑>을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 기억에는 미국에서 촬영한 영화를 제외하고(보지 않았다) <용재강호>나 <백발마녀전>같은 경우는 꽤 의미도 있고 촬영기법이나 진행에서도 당시 꽤 괜찮은 영화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나 싶다. 특히 내게 <백발마녀전> 1,2는 아주 인상적인 영화다. <곽원갑> 역시 그다지 세련된 맛은 없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나 전체적인 흐름에 있어서 우인태 감독 영화 중 베스트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이연걸은 이번 영화를 찍고 난 후 더 말이 많아진 듯 하다. 물론 그 전 인터뷰를 보더라도 꽤 말하기를 좋아하는 배우기는 했지만 이 영화가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역설하고 또 역설했다. 기자가 이번 영화가 정말로 마지막이냐고 물었다. 이연걸은 씨-익 웃으며 영화를 보면 알 거라고 대답했다. 무슨 뜻이었을까. 하지만 기자와의 문답 속에서 이연걸은 <곽원갑>이 자신의 마지막 영화라는 이야기를 끝까지 하지 않았다. 거듭 중요하게 한 이야기는 ‘때려 부수고 죽이는’ 그런 영화는 이제 자기에게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곽원갑>이 여태 자신의 찍은 영화들 중 ‘무술’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하고 있다고 피력했다. 그것은 바로 이연걸이 ‘무술’에 대해 갖는 의식의 변화를 뜻하기도 한다.

9살부터 무술을 시작한 이연걸은 12세 때 ‘전 중국 최고 무술대회’ 첫 우승을 거머쥔 이후 연이어 우승을 독식하며 5연패를 달성한다. 그 이듬해 1979년 이연걸은 영화 <소림사>를 시작으로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딛는다. 이연걸은 CCTV1 <예술인생>에 출연해 자신의 무술인생에 대해 회고한다. 무술신동이란 소리를 들으며 ‘중국 무술대회’ 5연패를 하는 동안 전 세계를 돌며 무술시범을 보이고 이후에 영화계에 진출하는데 이 때부터 이연걸은 무술계, 북경시민들의 관심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많은 부담을 안고 활동을 한다. 영화계 진출한 후 세계에 진출할 때도 역시 젊은 나이였을 텐데 그 때 역시 전 13억 중국인들의 명예를 위해 살았다고 할 만큼 부담을 느끼고 산 흔적이 역력했다. 이연걸은 정식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북경대학에서 강연회를 할 때도 자신은 똑똑하지 못하고 배운 게 없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했다. 자신이 살아 온 인생역정에 대해 말을 할 뿐이고 그 안에서 배울 게 있으면 배우고 받아들이기 싫으면 받아들이지 말라 한다.(이 점은 성룡과 비슷하다)

이연걸이 서장불교(밀교)를 믿으며 깨달음이 쌓여가는 동안, 그리고 무술수련을 계속 해가는 동안 그 자신 스스로 ‘무술’에 대해 혹은 '무술(과)인생'을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갖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에 <곽원갑>을 만나게 되었고 하고 싶은 얘기를 모두 쏟아내기 위해 애를 쓴다. 역시 영화 속에서 그런 교과서적(?)인 내용을 많이 접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관객은 바보가 아니라면서 그런 시시콜콜하고 구구절절 옳은 얘기는 길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비평하지만,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에서 <곽원갑>이 전해주는 얘기는 (적어도 내게) 그리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맹인으로 등장하는 여주인공 손려가 이연걸과 함께 모내기를 하며 하는 말이 있다.
이연걸은 <예술인생>에서 이렇게 말한다.
Sina.com과의 인터뷰에서는
실존했던 곽원갑의 삶을 통해 이연걸은 이번에 많은 깨달음을 얻은 듯 하다. 그 동안 꾸준히 추구해왔던 무술인으로서의 삶, 종교적인 삶의 굵은 매듭을 <곽원갑>에서 보여주고 있다. 중국인들 마음 속의 영웅이던 아니던,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던 말던 그는 그 나름대로 바른 길을 가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곽원갑>에서 이연걸의 얼굴 표정은 참 다양하다.(그래봐야 몇 개 되지도 않는다) 모든 영화에서 나온 표정들을 다 보여주는 듯 하다. 한 3시간 짜리로 만들어도 되었을 텐데…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얘기를 풀어내려고 한 점이 아쉽다.
아직 성룡보다 10년 정도 젊지만 이연걸도 참 많이 늙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귀여운 미소와 태산도 가라앉힐 만큼의 침묵은 여전하다. 어릴 때 돈과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꾸준히 무술인의 삶을 살아온 그에게, 현재 중국에서 前부인에 대한 여전한 애정과 우정의 과시로 칭송을 받는 그에게, 이제 남은 인생 불교와 무술로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되길 응원한다.

그런데 이연걸 말처럼 태극권 경지에 오르면 정말 신선(神仙)이 될 수 있는 걸까?
그 외,
이연걸이 영화를 그만둔다는 설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곽원갑> 이후로는 무조건 치고 받는 영화는 찍지 않겠다”는 말이 와전된 것이고 또 하나는 “<곽원갑> 이후로는 과거 의상(황비홍, 방세옥, 태극장삼풍 등)을 입고 무술영화를 찍지 않겠다”는 말이 와전된 것이다. 영화를 찍지 않는다는 말은 중국 기자가 추측해서 쓴 게 아닌가 싶다. 그 예로 이미 이연걸 주연의 2007년 개봉 예정작 ROGUE가 인터넷에서 소개되고 있다.
원화평과 이연걸은
너무도 오랫동안 함께 작업을 해와서 이번 영화에서도 호흡이 잘 맞았다고 한다. 이연걸은 원화평을 “동작이 없는 액션을 만드는 세계 유일의 무술감독”이라 극찬하고 원화평은 이연걸을 “무술대가”라고 존중한다. <와호장룡>에서 이연걸 캐스팅 이야기가 오고 갔다고 하는데 이연걸의 <와호장룡>은 어땠을까. 어쩌면 <곽원갑>보다 더 깊은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기회는 아니었을까?
우인태 감독은
한쪽 발을 저는 지체장애자다. 어릴 때부터 체력도 약하고 다리도 불편해 하고 싶은 걸 맘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이유로 인해 자신의 생각과 꿈을 펼칠 수 있는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게다가 실제 곽원갑도 신체가 허약한 인물이었다고 하니 <곽원갑>은 우인태 감독의 삶과도 잘 어울리는 영화가 된 셈이다.
곽원갑은 이소룡의 <정무문>이나 이연걸의 <정무영웅>에서
음독살해 당한 사부로 등장하는데(실제 곽원갑도 일본인이 장기간에 걸친 음모에 의해 음독살해 당했다.) 그렇다면 이소룡과 이연걸이 연기한 “진진”이란 인물 역시 실제 인물일까? 곽원갑이 <정무체육관>을 만든 건 사실이지만 직계제자는 단 한 명 뿐 인걸로 알려지고 있다. “진진”은 영화를 위해 가공되어 만들어진 인물이다. 또한 실제로는 외국 무도인들과 실제로 맞붙어 싸우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외국인들은 곽원갑의 이름만 듣고도 도망갈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 영화 내용이 실제 곽원갑의 삶과 달라 소송에 휘말린 상태다. 영화는 딱 세가지만 진실이라 한다. “시대배경”, “곽원갑의 정무정신”, “곽원갑이 죽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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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2일 화요일
[mov] 커커시리 / 可可西里 / Kekexili

커커시리(可可西里)
제목 : 커커시리(可可西里)
감독 : 루 촨(陆川)
출연 : 뚜어부지에(多不杰), 장 레이(张磊), 치 리양(亓亮), 자오쉐잉(赵雪莹) 등
<‘커커시리’는 ‘천당’이고 ‘지옥’이다. 그리고 생명과 신앙의 성지임을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커커시리의 이야기는 하소연하기도 어렵고 다만 진짜로 걸어본 사람만이 체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커커시리, 중국 국경 내 최후의 원시황야. 평균해발 4700미터. 이곳은 장링양(藏羚羊) 최후의 서식지. 1985년 이후, 밀렵꾼들의 대규모 장링양 도살이 시작되었다. 유럽과 미국의 장링양 털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짧은 몇 년 동안 100만 마리의 장링양의 수가 급감하여 1만 마리도 되지 못하게 되었다. 1993년 현지 정부는 무장 산악 순찰대를 조직하였다. 대장은 장족이며 직업 군인 출신의 르타이(日泰)였고, 이들은 밀렵꾼들과의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는 곧 중국내외 미디어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커커시리(可可西里) 감상평 더 보시려면_클릭
평균 해발 5000m에 다다르는, 사람이 생존하기 어려운 곳 ‘커커시리’. 세계에서 3위, 중국 1위인 ‘무인(無人)구역’. 감독은 체험을 통해 얻은 사실적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처럼 풀어내고 있다. 비와 눈과 우박과 바람 그리고 맑은 날들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커커시리’는 영화를 촬영하기엔 가장 최악이었을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촬영을 하다가 돈도 마다하고 돌아갔다고 하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결국 감독의 마지막 생각은 영화 찍는 사람들을 데리고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되고 말았다. 영화는 제 41회 금마장 영화제에서 최우수 영화상을 받았다.
영화는 ‘커커시리’에서 장링양(藏羚羊; 커커시리에 살고 있는 야생양의 일종)을 밀렵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저지하고 ‘커커시리’를 지켜내는 산악 순찰대원들의 이야기이다. 순찰대원 한 명이 피살되면서 북경에서 기자 한 명이 이곳으로 취재를 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대장인 르타이를 동행하면서 ‘커커시리’에서 발생하는 밀렵의 현장 고발과 이들을 쫓는 이야기가 기록된다.
어쩌면 이들 순찰대에게 가장 힘든 적은 밀렵꾼들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황량한 넓은 땅,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사막과 같은 땅과 수시로 급변하는 날씨,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유사(流沙), 가난, 배고픔 등의 수많은 악재가 이들의 전투대상이었을 것이다. 밀렵꾼들을 쫓으며 습격을 당하고 해발고도가 높은 그곳에서 폐수종으로 고생하고 유사에 빠져 죽음을 맞이하는 등 순찰대원의 삶은 그 자체로 ‘지옥’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들이 포기하지 않는 건 자신들의 ‘장링양’을 보호하는 것. 영화에서 기자가 르타이 대장에게 가장 부족한 게 뭐냐고 묻자 르타이는 “사람도 부족하고 총도 부족하고 먹을 것도 부족하고 돈도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어 “정부에서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않고 각자가 자원으로 순찰대에 들어와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밀렵꾼과 밀렵 현장을 적발해 압수한 양 가죽은 매매가 불법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취하지 않고 바로 정부에 상납을 한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매매를 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것으로 감옥에 가는 것은 두렵지 않고 다만 대원들이 죽지 않게 살아가기만 하면 좋겠다”고 말한다.
난 그곳의 삶에 대해, 중국의 현실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처음에는 왜 ‘장링양’을 보고하기 위해 목숨을 거나 싶었다. 어쩌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장족의 평범한 삶이 밀렵에 의해 흐트러지고 어긋나면서 자신들의 삶을 보호하고 자신들 삶의 터전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유럽과 미국에서 ‘장링양’을 원한다는 자본의 생리 앞에 그리고 중국 정부의 대책없는 서민정책 앞에 밀렵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들을 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단지 그것이다. ‘자본’의 힘으로 자신의 작은 즐거움을 만끽하려는 욕심으로 인해 ‘자본’ 앞에 무릎 꿇은 평범한 사람들이 있는 것. 정말 먹고 살길이 없어 밀렵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과 밀렵꾼을 도와주는 사람들, 그리고 밀렵을 막으려는 순찰대원들은 왜 이 지경까지 몰리게 되었던 것일까. 세상 곳곳에서 이와 비슷한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지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이유와 원인은 간단하게 귀결이 되지 않나 싶다.
지금은 중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환경보호를 위한 기관과 순찰대를 운영하며 '장링양' 매매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어서 만 마리 정도로 줄었던 '장링양'의 수가 3만 마리까지 늘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존 자원입대로 운영되었던 민간 순찰대는 해산되었다 한다. 순찰대원 중에 불법 매매를 하다 적발된 네 명은 공안에 붙잡혔으나 바로 석방되고 아무런 형사소송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적 다큐멘터리와 다름없는 영화를 보며 나 또한 마음이 텁텁해지고 힘겨워졌다. 언젠가 꼭 시장(西藏 | Tibet)에 가보고 싶었기 때문에 각별한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초반과 마지막에 장족의 전통 장례 모습은 “천장(天葬)”이 나온다. 죽은 이를 갈기갈기 분해해서 독수리에게 먹이고 자연으로 돌려 보내는… 자세히 묘사가 되지는 않았지만 ‘노커팅의 인디아고고’에서 읽어본 적이 있었던 터라 눈에 익다.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자연과 더불어 죽는 장족들의 삶을 보게 되니 여러 감상이 든다. 언젠가는 꼭 시장(西藏)에 가리라. 꼭.
'커커시리 장링양 보호 운동 사이트"
'천장'에 더 알아보기_클릭
* 참고로 이 영화의 감독은 <총을 찾아서(寻枪)>라는 영화의 감독이기도 하다. <총을 찾아서>에는 "지앙원(姜文) / 영화-<귀신이 온다(鬼子来了>"이라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온다. 영화가 참 독특하고 재밌었는데 이 영화는 색깔이 무척 다르다. 감독은 <총을 찾아서>를 찍기 훨씬 전부터 이 영화를 구상했다고 한다. TV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커커시리' 얘기를 접하고부터 몇 년을 준비했다고 하니 이 영화에 대한 감독의 열정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2005년 8월 1일 월요일
[mov] 청홍 / 青红(曾用名:我十九) / Shanghai Dream

청홍 / 青红(曾用名:我十九) / Shanghai Dream
제목 : 청홍 / 青红(曾用名:我十九) / Shanghai Dream
감독 : 왕 시아오쏴이(王小帅)
출연 : 까오 웬웬(高园园), 리 빈(李滨), 친 하오(秦昊), 야오 안리엔(姚安濂), 왕 쉐양(王雪洋)
<북경 자전거>와 <둘째 동생>을 찍은 왕 시아오쏴이 감독이 <청홍>을 들고 나타났다. 58회 칸느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왕 시아오쏴이의 감독 작품의 특색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재밌는 것은 <북경 자전거>의 경우 원래 제목이 <17세의 자전거>, 즉 북경에서 일어나는 일을 담고 있긴 하지만 17세 나이 또래 아이들의 눈을 통해 북경을 바라보고 자본주의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었다면(물론 사랑도…) 이번 작품 <청홍>은 <내 나이 19세>라는 또 다른 제목을 빌어 19세 나이 아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여주인공 이름이 ‘청홍’이지만 그와 친구들의 나이는 19세인 것이다. 20세가 되기에 한 살 부족한, 그래서 아직 완전한(?) 성인이 되지 못한 나이 19세. 그들을 통해 삶과 사랑, 가족, 그리고 중국 정부 정책을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본다. 또 하나, <북경 자전거>와 <청홍>은 나이가 관련되어 있는 것 말고도 주인공이 같다. <북경 자전거>에서 남자 주인공이었던 ‘리 빈’은 <청홍>에서 ‘청홍’을 좋아하는 19세 아이로 등장한다. 그리고 <북경 자전거>에서 여자 주인공이었던 ‘까오 웬웬’은 <청홍>의 주인공이 되어 열연한다.

청홍 아버지 '라오우', '청홍'(붉은 옷), 그리고 친구 '전전'
이 영화는 지난 세기 8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19세 소녀 ‘청홍’은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지만 아버지의 반대와 감시에 괴롭다. 아버지는 보수적인데다가 60년대 중반에 상해에서 이 곳 “꾸이조우(귀주)"로 이주해 고생을 많이 해서 딸이 상해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기를 바라고 모든 가족이 상해로 다시 돌아가길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서부의 경제개발 정책의 실패, 희망 없는 삶의 탈출구로 상해行을 꿈꾸는 것이다.(이 영화의 영문제목은 “Shanghai Dream”이기도 하다.) 상해를 떠나온 지 벌써 20여 년이 흐른 지금 상해로 간다는 게 또 다른 형태의 모험이자 도박일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들에게 상해는 “꿈의 도시”인 것이다.
왕 시아오쏴이 감독은 <둘째 동생>에서 “American Dream”을 통해 중국의 현실과 자본주의로 재편되어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얘기를 했는데 이 영화에서는 “상해”가 곧 “미국”과 동등해진 자본의 땅, 꿈의 땅, 희망의 땅이 되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 대해 물어볼 때 그 넓은 땅, 많은 사람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일반적 질문을 던지기 일쑤인데(예를 들어, 중국 사람들은 어떠한가? 중국음식은 어떠한가? 물가는 어떠한가?) 대답하기 곤란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상해”는 서울보다 더 발전된 곳도 있고 낙후된 곳도 있고 물가가 더 비싼 곳도 있고 엄청나게 싼 곳도 있다. 외국인도 많고 높은 빌딩도 서울보다 많으며 경제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 중에 하나다. 그렇기에 중국인에게는 이곳 “상해”에서 산다는 것은 어쩌면 신분상승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실제로 많은 외지인(중국인)들이 상해로 몰려드는데 예전엔 상해“후코우(주민증)”가 없으면 불법체류와 같은 개념으로 잡혀갔기 때문에 몰래 들어와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현재도 상해의 정확한 인구는 계산이 불가능하다.
영화의 마지막은 주인공 ‘청홍’ 가족이 상해로 떠나기 전 ‘청홍’의 남자친구가 ‘청홍’을 겁탈하게 되면서 급류를 타게 된다. 여전히 사형제도가 있는 중국에서 ‘청홍’의 남자친구는 어떤 처벌을 받게 될 것인가. 영화는 ‘청홍’ 식구들이 ‘전전’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지프 차에 올라 먼 “상해行”에 오르는 것으로 막이 내린다.
1992년 한국과 수교를 맺은 후 중국은 엄청난 속도로 자본주의 반열에 오르고 있다. 짧은 시간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충돌하며 생기는 사회문제가 많이 생기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게 “빈부의 격차”가 아닐까 싶다. 한국도 빈부의 격차가 심하긴 하지만 중국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이런 상황에서 왕 시아오쏴이 감독은 끊임없이 급변하는 중국의 자본주의화에 침식되어가는 중국 서민들의 삶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다. 이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면 중국 정부에 대한 비판보다는 세계적으로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원초적 고민을 하게 된다. 게다가 영화 곳곳에는 과거 한국에서도 봤음직한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눈 돌려 피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지금 한국은 ‘Seoul Dream’이나 ‘서울대 Dream’정도가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여전히 ‘America Dream’에서 못 벗어나고 있나? 근래엔 ‘China Dream’이 거세지고 있는 것 같긴 하다. 중국에 대한 생각은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바라보는 우월감에서 비롯된, 중국에 대한 꿈보다는 기회를 잡으려고 하는 ‘열풍’정도겠지만…

내 나이 열아홉
2005년 5월 13일 금요일
[mov] 누구나 비밀은 있다. / Everybody has Secrets / 谁都有秘密

누구나 (정말) 비밀이 있나?
비밀을 간직하게 하고 그 비밀의 크기만큼 행복을 주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바람둥이의 이야기. 하긴 이걸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바라보면 주인공 남자는 어떤 욕망과 욕구가 의인화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남녀관계에 섹스 이외에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라는 질문에 “사랑은 섹스 이외의 것들도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는 정석적인 대답은 어떨까? 남녀관계에서 섹스 빼고 대화와 삶의 공유라는 건 좀 삭막하기도 하다. 섹스가 훌륭한 대화이며 소통의 창구 역할을 하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 단, 이건 남자들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섹스가 아니라 남녀공통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섹스여야 한다. 일방적 소통일 경우엔 어떤 식으로든 폭력의 형태가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예전에 어디선가 봤던 내용인데 희대의 바람둥이 돈 쥬앙이 일반 바람둥이와 다른 점은 “만나는 여자들마다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점이라고 한다. 이것도 남자들의 시각에서 미화하기 좋은 말꼬리이긴 하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장난으로 만나는 것보단 훨씬 낫다.
수현은 미영, 선영, 진영과 아슬아슬하고 짜릿한 관계를 형성해가는데 결과는 “해피엔딩”이다. 그 누구도 수현이 다른 이를 좋아하는 걸 탓하지 않는다. 어쩌면 많은 남자들은 수현의 완벽한 조건 때문에 질투는 할지언정 세 자매와 관계를 갖는 것에 대해선 욕지거리를 하지 않을 것만 같다. 게다가 여자들은 상황의 황당함에도 불구하고 백마 탄 왕자와 같은 이병헌의 멋진 모습에 마음이 수그러들 것만 같다. 감독이 관객과 이런 식의 유희를 즐기며 사람들의 심리 이면에 있는 이중적인 모습을 끌어낼 목적이 아니었다면, 그저 단순히 관계의 복잡미묘함 때문에 선택한 내용이었다면 불쾌한 마음까지도 든다.
뭐, 어쨌거나 영화적으론 그리 완성도도 없고 배우들의 연기도 형편없었지만 결말이 어찌 될까 궁금한 마음에 마지막까지 봤다. 마지막 결말도 어이가 없었지만 마지막에서 수현이 다른 커플을 바라보며 새로운 “작업(?)”을 준비하는 걸 보면서 “완전 픽션”이란 생각이 강하게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영화보고 속은 듯한 느낌. 싫다.-_-
2005년 5월 12일 목요일
[mov] Danny the Dog / 狼犬丹尼

이연걸은 개(?)다(?)
대니로 분한 이연걸이 주인공이긴 한데 왠지 찝찝한 기분이다. 대니는 한 서양인의 애완견처럼 묘사되어 나온다. 이 서양인(Bob Hoskins 분)마치 투견을 데리고 다니면서 돈을 벌어들이는 것과 같은 이미지가 강하다. 물론 대니도 나름대로 삶의 굴곡이 있을 테고 사연이 있겠지만 동양인이 서양인의 충실한 투견이 되어 살인을 하거나 폭력을 자행하는 걸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계속 불편하다. “이연걸의 액션”만 아니었다면 굳이 볼 필요도 없는 건데…
초반을 좀 지나 대니는 맹인인 샘(Morgan Freeman 분)을 만나는데 동양인이 봉사 흑인을 만나고 그 흑인은 (순수 백인 혈통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백인 여자아이를 거두어 키우고 있다. 헐리우드의 만연한 인종차별적인 구조도를 보고 있는 듯 했지만 이 역시 좋은 뜻으로 해석하면 다른 인종들에게도 관심과 사랑을 가져달라고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정말?!! 절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제작자, 감독이 뤽 베송이라니 프랑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종차별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다지 기분 좋은 영화는 아니다. 단지, 설정만으로도!! 하긴 좋은 얘기를 하기 위해 이런저런 무리한 설정들을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동양인을 이런식으로 묘사한다는 것 자체가 기분 좋은 일이겠는가. 리쎌웨폰4에서 이연걸이 악역으로 출연한다는 것 자체로도 많은 말들이 오갔는데... 뭐...어쨌든 인간성을 회복하고 억울하게 삶을 송두리째 뺏긴 이연걸의 삶을 나중에 다 드러내긴 한다.
이연걸의 액션은 여전하다. 성룡은 나이 들어 힘들어 하지만 이연걸은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한다. 역시 여전히 카메라는 이연걸의 액션을 쫓아가지 못해 버벅대는 아둔함을 보여주긴 하지만...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이연걸의 좀 더 나은 "황비홍"의 모습을 만나보길 기대해본다. 액션, 카메라, 배역 모든 면에서...
2005년 1월 11일 화요일
[mov] 내 형제자매 / Roots and Branches / 我的兄弟姐妹

내 형제자매 / Roots and Branches / 我的兄弟姐妹
감독:위종
주연 : 량용치, 지앙우, 시아위, 추이지엔
제목만 봐도 뻔한 내용임을 짐작할 수 있다. 형제자매들의 이야기. 역경과 고난을 헤쳐가는 이야기겠지. 보고 나니 역시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장춘에 있을 때 TV에서 방영을 해줬었는데 그 때는 마지막 장면만 봤던 기억이 난다. 아니, 중간중간 기억도 난다. 중국은 워낙에 재방송을 자주 해주니까. 언젠가 봤겠지.
마지막 결말은 지극히 상투적이어서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고 량용치(양영기)의 발음도 중국식이 아니라 홍콩식이어서 조금 거슬리기도 했다. 하긴 설정은 미국에서 살다가 20년 만에 중국에 돌아온 것이었으니 괜찮긴 했지만...하지만 다른 배우들에게서 오랜만에 듣는 동북 사투리는(그리 심하진 않았지만) 내가 그곳에서 살았던 짧은 기간의 향수를 자아낸다.
이 영화의 미덕은 뭐니뭐니 해도 아역들의 공이 크다. 량용치가 꽤 유명한 배우이기 때문에 그가 주연처럼 여기저기에서 인터뷰를 했지만 주역은 당.연.히. 아역배우들이다.
오래 전에 본 '일곱개의 숟가락'이나 '해피 투게더'같은 드라마가 오버랩 되기도 했지만 중국에서 일어나는 과거형의 사건들은 흥미를 유발하기 충분했고 중국 상황을 조금이라도 아는(?) 내겐 더더욱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급작스러운 부모의 별세, 돌아가시기 전에 큰 형(오빠)에게 동생들을 부탁하는 장면 등은 뻔한 흐름이지만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과 닭 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장면에서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형제도 여2, 남2인 상황인지라 좀 더 느낌이 와 닿았다고나 할까? 이 아이들만큼 내 어린시절은 누이, 동생들과 살갑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공감이 남을만 하다.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 질문을 던지지 않아도 영화에서 나오는 대사처럼 '형제자매는 처음에는 모르는 사이었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눈처럼 내리고 난 후에 얼음으로도 얼고 물로도 변하듯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지 않은가. 부모 역시 마찬가지고.
요즘 세상이 각박해져 형제자매가 있어도 남처럼 사는 경우도 많고 걸치적 거리는 존재가 되버리기도 하지만 때로 혹은 종종 서로에게 힘이 되는 존재가 되는 건 확실한 듯 하다. 간혹 친구가 가족같고 아는 인연이 더 가족같은 경우도 많이 생기는 이유는 세상살이가 복잡해지고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경우가 적어지기 때문일 게다. 아무러면 어떨까. 친형제자매든 나중에 맺은 의형제자매든 혹은 친구든 '가족'이란 느낌을 받을 수 있다면 다 내 인연 안에 속해 있는 '친가족'과 진배 없는 것을...
내 뿌리는 '현재'의 가족이기도 하겠지만 크게는 '영원'의 가족이겠다는 생각. '祖국'라고도 하고 '母국'이라고도 하듯 근본과 가지의 연결성을 살펴보지 않고서는 결코 내 '자신'을 모를 일이다. 그것이 이기적인 범위를 만들거나 보수적인 굴레를 형성하지 않는다면 참 나를 찾는 꽤 괜찮은 방법이 되지 않을까. 하긴, 아무리 그렇게 해도 내 존재의 근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오리무중이긴 하다.
다시 한 번 아역배우들의 연기에 박수를 보낸다.
2004년 10월 24일 일요일
[mov] 아는 여자 / Someone Special / 认识的女人

아는 여자 / Someone Special / 认识的女人
감독 : 장진
출연 : 정재영(동치성), 이나영(한이연), 오승현, 장진, 임하룡
사실, 그렇게 기대한 영화는 아니었다. 특히나 장진 감독의 영화는 극장에서 보기엔 좀 아깝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드는 스케일(?)로 아기자기하게 꾸려나가는 영화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엄청난 감동을 받길 원한 것보단 작은 웃음과 싱그러운 유머를 보는 것이라면 충분히 만족할 만 했다.
설정이나 이야기 흐름이 조금 억지스러운 면이 있는 영화이긴 했지만 하고 싶은 말, 보여주고 싶은 장면을 다 보여주며 얘기를 풀어가는 장진 감독의 뚝심에 박수를 보낸다.
그냥 오래 전부터 알아오던 사람, 속칭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게 되는 건 관계가 그렇게 깊지 않다는 것의 반증임과 동시에 심중에 두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간혹 나는 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나를 '아는 사람' 정도로 치부해 소개할 때는 화가 나거나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겠지. 그런데 나의 경우엔 별로 그런 상황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모르게 나를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을까? 퍽이나~
만약 이나영같은 사람이 '아는 사람'이었다면 나도 그 사람을 부담없이 사랑했을 것 같다. 얼마나 쿨하면서 감성 넘치는 캐릭터란 말인가. 물론 TV 미니시리즈 '네 멋대로 해라'에서 나온 캐릭터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변주였겠지만 이나영표 사랑, 애정표현은 거부감없이 담백하고 깔끔하게 다가온다. 난 마지막 장면에서 정재영이 사랑고백을 위해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바뀌며 '이름'이며 '취미'며 80년대에나 유행했을 법한 멘트를 날리는 장면이 사랑스럽다. 닭살 돋을 만큼 어색하지만 그 만큼 사랑의 첫 시작은 풋풋한 것. 난 그 둘이 그런 식의 사랑을 되도록 오랫동안 해가길 바랬다.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시작된 짐짓 철학적인 주제의식은 생각보다 가볍고 쉽게 결론으로 마무리 지어졌지만 별 아쉬움은 없다. 감독도 딱히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다른 식으로 말을 해봐야 이 영화만큼 효과적이지도 않았겠지. 적정한 타협은 때로 피차 적당한 즐거움을 가져온다. 적당한 건 적당한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기 때문에 아쉽다.
영화 속에서 가끔 만나는 임하룡은 반갑다. 그리고 그의 자연스러운 연기도 반갑다. 난 코미디언일 때의 임하룡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연기하는 그의 모습은 참 좋아보인다.
2004년 10월 17일 일요일
[mov] 둘째 동생 / Drifters / 二弟

둘째 동생 / Drifters / 二弟
감독 : 왕 시아오쏴이
출연 : 두완 롱(둘째 동생), 수 앤(여자친구), 자오 이웨이(큰 형), 탕 양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작품 중에 하나가 <북경 자전거>다. <북경 자전거>를 본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특히 북경에 가본 사람이라면) 상당히 사실적인 영화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 같은 느낌. 그게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다. <둘째 동생>도 역시 사실적인 느낌을 담아내는데, 그다지 많은 정보를 전달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영화 내용에 공감할 수 있다. 중국인의 “아메리카 드림”이랄까? 아니면 “가난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몸부림”이랄까. 아무래도 후자가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밀수선을 타고 가다가 해안 경비대에 걸려 잡혀 되돌아오거나 죽거나. 하지만 많은 이들은 수 차례 배를 갈아타고 가는 긴 여정에 동참한다. 밀입국을 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딱히 어떤 희망도 없는 그들의 고향, 작은 시골에서는 밀입국 말고는 더 좋은 방법은 없나보다.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 풍요를 가져다 주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물질적 풍요는 일정 수준의 정신적 풍요를 담보한다는 것이다. 충만한 정신세계를 누리고 있는 사람도 금전적인 부분이 해결되지 않으면 현실생활은 정말 힘들지 않은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급속하게 뒤섞이고 있는 중국에서는 이런 문제들이 더욱 큰 화두로 다가올 법 하다. 한국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겠지. 어차피 사람 사는 곳에 발생되는 문제는 대부분 비슷하니까.
물질에 얽매이지 않는 삶은 그 물질을 소유해보고나 해야 할 소리는 아닐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유하고 있지 못한 사람이 무소유를 말하면 스님들이나 하는 소리가 되고 일반인들이 그런 얘기를 하면 현실감각이 없다고 비난을 받기 쉽상이다. 참 어려운 문제.
영화를 보고 난 후 느낀 감상 또 하나, 평탄한 인생은 결코 없다는 것. 본인 스스로 만들어 내는 일들도 무척 많지만 인연들에 얽혀서 많은 일들이 우연, 필연으로 발생한다. 그러다가 때론 자기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모르게 되고 결국 자신이 원하지 않는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그랬거나 어쨌거나 결국 사람은 희망과 목적이 있지 않은가. 방황도 하고 좌절도 하지만 잘 추스리고 일어서면 다시 궤도에 오를 수 있고 다시 정상적인 삶을 살 수도 있다고 믿는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 생각이 났는데, 중국 영화를 보면 영웅들이 나오는 홍콩 느와르 풍의 영화 말고도 상당히 많은 영화에서 표현되는 중국인은 죽음에 대해 상당히 초연하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 영화에서만 더더욱 두드러지겠지만 한 나라의 영화는 그 나라 사람들의 삶과 정서의 반영이지 않는가. 이 영화에서도 목숨을 거는 일이 위험하다는 걸, 두렵다는 걸 알지만 대면하는 모습은 처절하도록 초연하다.
2004년 10월 4일 월요일
...촬영 현장
![]() 제법 그럴싸~ | ![]() 무슨 내용일까? |
촬영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 스텝들은 지나가는 차들도 통제하고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느라고 정신이 없다. 문득 예전에 "ANYWAY"를 무대에 올리려고 준비하던 중에 라이브 액션 부분을 시청 앞에 가서 촬영하던 때가 생각이 났다. 조명기와 반사판, 카메라 등이 왠지 낯설어 보이진 않는다.

혹시 주인공?
장춘과 상해에 영화 제작소가 있는데 장춘은 이제 정부를 위한 홍보영화 등만 촬영한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촬영하는 것도 아마 그런 차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장춘이 상해보다 영화 쪽에서는 먼저 시작을 한 도시이건만 왜 지금은 아무런 힘도 못쓰고 있는지... 아마도 영화 산업이라는 게 자본과 불가분의 관계여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상해는 국제 도시로써 외국의 자본이 수시로 투입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가만 보면 상해가 중국의 남북으로 볼 때 중간 정도 위치에 있긴 하다. 날씨도 장춘보다는 낫지. 장춘은 겨울에 관련 된 영화나 찍으면 모를까.-_- (가을 날씨도 내가 느낄 때는 좋은데...)
어쨌든, 한국에서건 외국에서건 영화, 드라마, 광고 등의 촬영 현장을 보는 건 참으로 흥미롭다. 장춘에서도 종종 영화 촬영 좀 하지 그래? 그냥, 내가 해버릴까 보다.-_-;;;
2004년 10월 2일 토요일
[mov] 연인 / House of Flying Daggers / 十面埋伏

연인 / House of Flying Daggers / 十面埋伏
감독 : 장이모
출연 : 리우더화(리우), 진청우(진), 장쯔이(시아오메이)
스포일러 있습니다!!!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뭐 사랑이란 주제로 수많은 철학자, 종교가, 영화감독, 소설가, 화가 등등이 오랜 시간 동안 설왕설래 해도 막상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느끼는 것과 다른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때론 오랜 시간 탐구해온 통계처럼 진행되기도 한다. 사랑을 단한 마디로 정의 내린다는 것은 아마도 내 정체성에 대해서 딱 한마디로 잘라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난 20대 초반에 아는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이 내가 하는 사랑에 어느 정도 지침이 되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돌이켜 본다. 그 분이 해주신 말은 “사랑은 이해”였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 집착이 생기고 원망이 생기고 상처가 생긴다는 것. 그 이해의 폭에는 그 어떤 것도 다 담을 수 있다고 믿었었고 지금도 상당부분 내겐 유효하다.
사랑은 시간이 오래되었다고 더 깊어지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짧다고 해서 깊이가 얕은 것도 아니다. 사실 이해라는 것도 이와 비슷하긴 하다. 간혹 오래 만나야 상대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경우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도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 일 수 있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결국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접촉한 시간의 장단에 의해 익어가는 사랑이 아니라 그 접촉할 때의 각자의 마음가짐(마음이 열어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리우와 시아오메이의 3년의 사랑(?)과 진과 시아오메이의 3일(?)의 사랑은 쉽게 속단할 수 있을까? 3년 동안이라도 서로 마음을 열지 못하고 만나왔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될 터. 사실 진과 시아오메이의 3일도 마음이 서로 통하고 이해하게 된 시간은 거의 하루 정도의 시간 뿐이지 않았던가. 과정을 무시할 순 없어도 마음이 열리고 닫히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지속해가는 노력, 그게 바로 이해라는 틀에서 생각해 봄 직 하다. 영화 속 세 사람의 사랑은 아마 그들만이 제대로 알 것이다. 다만 객관적인(?) 입장에서 본 나의 생각은 리우의 마지막 행동은 약간의 집착이 가미되었고 진의 사랑은 남성의 전형적(?)인 표현이 슬쩍 비춰진다. 그런 면에서 시아오메이의 고민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결과적으로 진 쪽으로 마음이 더 기울긴 했지만 그녀의 고민은 타당하다. 게다가 그 멋진 두 남성 사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않겠는가.-0-;;;
내 관점으로 영화는 한국 인터넷에서 악평을 쏟아내는 것과 달리 꽤 괜찮게 봤다. ‘영웅’보다는 훨씬 좋다고 느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색감과 사운드였다. 색감이야 뭐 말할 것도 없겠지만 사운드는 정말 잘 입혀졌다. 사운드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등장인물들의 거친 숨소리였는데 난 이게 어떤 성적 표현의 방법으로 쓰인 게 아닌가 싶었다. 특히 진과 시아오메이가 관군에 쫓겨 도망갈 때 숨소리가 더 거칠고 크게 들렸는데 이 둘의 성적 묘사를 하지 않고도 숨소리만으로도 이들 둘의 관계가 점점 깊어진다는 상징적인 효과를 전달하지 않았나 싶다. 하긴 중국에서 찐한 성적 표현은 할 수 없었을 테니 이런 편법을 썼을 수도. 그런데 편법이건 아니건 그 효과는 영화 내내 상당한 효과를 전달해 준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장쯔이의 춤 씬. 장쯔이가 원래 무용을 전공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진가가 나타난다. 그 유연한 몸놀림이라니.-0- TV에서 영화 촬영기가 좀 소개되었었는데 사실 그 춤 씬을 찍으면서 고생을 무척 많이 했다고 한다. 특히 손에 감은 천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등…하긴 영화는 편집의 예술 아닌가. 그렇게 찍고 찍은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을 모아놨으니… 연주와 춤의 싱크도 끊어지지 않고 잘 연결되어서 참 멋지다는 생각 밖엔. 장쯔이의 장님 연기가 역시 장이모 영화 “행복한 날들/happy time/幸福时光”에 나온 둥제(董潔)의 연기와 비슷한 게 보였다. 이 둥제라는 배우도 장이모에게 발탁된 신인이었는데 장쯔이를 많이 닮았다. 기회가 되면 영화를 한 번 보시길.
영화 중에 가장 이해가 안되었던 장면은 갑자기 눈이 내린 장면이 아니었다. 칼에 맞고 한참을 쓰러져 있던 시아오메이가 리우와 진이 한참을 싸울 때는 죽은 듯 있더니 나중에 서로 결정적인 상황이 되니까 벌떡 일어나서 칼을 뽑겠다고 악을 쓰는 장면이었다. 아무리 상식적으로 이해를 하려고 해도 그것만큼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눈이 내리는 것이야 그들의 사랑싸움이 하늘을 움직일 정도 그랬다던가, 혹은 장이모의 욕심으로 설경에서 싸움을 하는 걸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겠지. 게다가 중국은 워낙에 넓으니 그런 기후변화 정도는 감안이 된다. 그런데 시아오메이의 벌떡 일어섬이란!!! 영화 보다가 내가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다.-_-;;; 그것만 빼고는 이해를 충분히 하고도 남는 이야기였다.
잡설 하나; 한국에서 중국영화를 볼 때는 자막에 의존해서 보기 때문에 어떤 내용인지 자막 번역을 한 사람의 뜻대로 해석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중국에 와서 느낀 건데 중국어를 들으며 중국어 자막을 보며 영화를 보면 한국 자막 중에 상당부분 제대로 된 전달을 못하는 부분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중국 애들의 감수성을 조금이라도 이해한 지금이라면 내 경우에 ‘연인’의 경우에 내용도 그렇게 형편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시작 전에 알려주는 큰 역사의 흐름은 삼각관계를 만들기 위한 장치였을 뿐(그러니 마지막 관군이 비도문을 포위해 들어갈 때도 전투 씬이 등장하지 않는다.)이고 장이모가 TV인터뷰에서도 말했듯이 무협형식을 빌린 세 사람의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보면 난 충분히 이해를 하고 몰입을 할 수 있었다.(절대 중국어 좀 한다고 잘난 체 하는 게 아님.-_-;;;) 아마 영어를 좀 하는 분들도 영어권 영화를 원어로 보려고 하는 이유 중에 이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잡설 둘; 장이모가 상업적으로 돌아선 두 번째 영화(내 기억으론) ‘연인’. ‘영웅’ 다음으로 찍은 영화인데 중국 내에서 관심이 정말 어마어마했다. 제작비를 빼고 약 30억 원을 들여서 중국 CCTV에서 ‘연인’의 성공을 기원하는 축하 쇼를 했으니 말이다. 이런 경우는 중국 정부(공산당)의 지지가 있지 않고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TV에서 그 쇼를 보는데 중국의 유명한 가수들, 연기자들이 모두 출연해 영화의 성공을 기원했다. 게다가 이 영화는 불법 DVD가 나오는데도 시간이 한 참 걸렸다. 중국 정부에서 단속을 열심히 했겠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장이모 띄워주기 행사를 했던 이유는 아무래도 ‘아테네 올림픽 폐막식 8분 중국편’과 ‘북경 올림픽 개폐막식’의 감독 장이모를 세계에 알리려고 했던 수단이 아니었을까 싶다. 장이모는 지금 영화계에서도 중국을 대표하는 거장 감독이니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그에게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중국 영화계(애니메이션 포함)가 뛰어넘어야 할 벽임을 감안하면 일종의 희망을 주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아, 그런데 제목이 '연인'이 뭐냐고-_-; '십면매복'이라고 하면 이상한가? '연인'은 너무 직설적이잖아. '십면매복'은 뭔가 2-3중의 복선이 있는 것 같고...나만 그런가?-_-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