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 27일 목요일

묘한 낯설음.

그림일기를 써야 한다는 일종의 스트레스는 그런대로 날 자극을 주기 때문에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극이 별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니...
 
오늘은 상해를 갈 비행기 표를 예매하러 가면서 바보스럽게도 여권을 챙겨가지 못했다. 분명 집을 나서기 전에 챙겨간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으면서도 말이다. 가서 복무원이 여권을 달라는 말에 혼자 주절주절 이상한 변명이나 해대고(상대방은 모를 내용을 중얼거리며) 내일 다시 오겠다고 하고 나왔다.
 
상해를 가는 비행기 표는 한국에 가는 표 값보다 비싸다. 한 4-5만원 정도 비싼 것 같다. 하긴 장춘에서 상해를 가는 시간만도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시간보다 약 1시간 이상이 더 소요되니 당연한 일인 듯 싶다. 할인기간도 끝나서 제 값 다주고 간다는 것도 아쉬움을 배가시킨다. 혹자는 중국 국내선은 타지 말라고 불안해서 못타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그렇지만 기차로는 30시간 이상이 걸린다니 감당못할 일이기도 하고 게다가 중국 국내선을 한 번도 타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 상해는 필히 비행기를 타고 가야지.
 
돌아오는 길에 먼지 섞인 바람, 그리고 곳곳에서 도로 공사며 건축공사를 하는 먼지가 동네를 온통 흙바람으로 가득차게 한다. 짜증이 날법도 하지만 "중국이니까..."라는 위안은 사실 어떤 어려움도 견디게 해주는 묘약인 것 같다.
 
조금씩 판이 튀는 DVD를 바꾸고 다른 DVD 몇 장을 사고 집에 오면서 쌀을 샀다. 30원. 어째 가면 갈수록 쌀값도 오르는 거 같다. 아니면 여전히 내가 한국인 임을 알아채고 비싼 쌀을 파는 주인의 계략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의 쌀보다는 무척이나 싼(20kg에 30원(4,500원)) 쌀은 중국 농민들의 찢어지도록 가난한 삶, 노동력에 비하면 먹기에도 죄송스럽긴 하다. 옆에 있던 내가 자주 가던 작은 상점도 내가 자리를 비운 20여일 만에 주인이 바뀌었다. 상점을 새단장 하고 물건들을 부지런히 진열하는 이들을 보니 낯선 사람들이다.
 
한국에서 돌아온 후에 보는 장춘은 봄이어서 그런지 더더욱 활기를 띄긴 하지만 조금은 전보다 달라진게 보여서 슬쩍 낯설음에 다시 처음 장춘에 온 듯한 느낌도 있긴 하다.
 
저녁에 한국 후배들이 장춘에 돌아온 기념으로 가볍게 맥주를 먹자고 한다. 함께 하는 자리. 왠지 또 낯설다. 20여일 동안에 이 녀석들은 많은 일들이 있었고 지들끼리 잘 놀고 잘 살아서인지 자꾸 이방인 같은 생각이 든다. 하긴 전에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내가 그들과 어울리는 걸 좀 자중했었고(그들의 공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게다가 그들은 전북대학교 중문과라는 튼튼한 울타리 안에 있던 사람들 아닌가. 얘기를 하기보다 듣는 시간이 더 많아질 즈음 같이 자리했던 두 여자 후배들은 졸리기 시작한다. 자리를 파하고 일어난 시간이 11시가 넘은 시간. 복무원들도 사장도 피곤해하는 모습이다. 장춘의 밤거리가 좀 싸늘하다. 역시 북쪽은 북쪽이군.
 
일상은 일상대로 새로운 일들은 새로운 일들대로 벌어지고 있는, 장춘에서 돌아온지 4일 째 되는 오늘. 몸은 피곤함을 떨쳐내려 발악을 하면서도 마음은 피곤과 상관없이 부유하고 있다.
 
문득, 그대가 보고 싶어진다.

2004년 5월 24일 월요일

귀국?

한국에서 장춘 집으로 잘 돌아왔다.
동생이 배웅을 해줘서 짐을 좀 가볍게 들고 왔다.
 
장춘 공항에 도착했는데 날씨가 무척이나 덥다.
한국보다 더 더운 듯 싶다. 공기도 좀 건조한 듯 싶고...
검사를 다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택시기사들이 달라붙는다.
한 택시 기사가 타라고 호객행위를 한다.
택시를 보아하니 좀 비싼 택시인 듯 싶어 요금이 얼마냐고 물으니
약간 당황하는 기색이다. 중국어를 못할 줄 알았나보다.
기본요금이 10원, 흠... 보통 택시보다 2배의 기본요금이라... 내 탈리 없지.
다른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왔는데 땀이 계속 줄줄이다.
 
오자마자 빨래를 하고 가져온 옷가지, 짐들을 풀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갔을 때도 또 다시 장춘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마음은 늘 그럭저럭이다.
기쁜 마음도, 반가운 마음도 친구들, 사람들 만나기 전까지는 그저 그런 셈.
 
중국 친구 몇에게 전화를 했더니 다들 반가워 해준다.
한국 친구들의 반응과는 사뭇 다르다.
하긴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야 호들갑을 떠는 게 더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으니...비교할 바 아니다.
 
규이와 치우메이를 오라한 후 선물을 주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녀석들이 처음에 한국음식점으로 가자고 그랬다가
한국에서 많이 먹어 물렸을테니 중국음식점으로 가자고 그런다.
그런데 중국음식도 앞으로 자주 먹을테니 일식집을 가자 한다.
 
중국에서 일식집은 처음 가봤다.
한국에서야 가면 회, 초밥 등만 먹어봤지 다른 음식은 먹어본 적 없는 것 같다.
최소한 내 기억 속에서는...
 
그런데 중국에서는 회만 먹거나 그러진 않는 것 같다.
회가 비싸기도 할 뿐더러 이 친구들은 즐겨먹지 않는 듯 싶다.
양이 너무 적다고 규이는 툴툴거리고 나도 맞받아서 같이 툴툴거리고
정종에 맥주에 그렇게 즐겁게 지난 얘기를 하며 식사를 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왔으니 노래방 가자고 하고...
 
피곤함이 밀려오긴 했지만 즐겁게 얘기하고 놀다보니 좀 나은 편이다.
 
이제 또 새롭게 중국생활을 시작해야지...
애니메이션 일도 해야겠고 중국어 공부도 더 열심히 해야지...
그런 생각 밖엔 들지 않는다.
 
다른 생각은 아직은 전혀 들지 않고 있다.

2004년 5월 21일 금요일

사람들 속에서.

오마뮤 식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간만에 보는 승원 누나. 상범이, 도형이, 형준형님... 그리고 예나.
그 외 사람들은 정말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 사람들.
한독협에서 일하신다는 허경씨를 만나게 즐거운 소득이라면 소득.
 
대화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술을 취하고 올라오고
견디는 한계까지 다달아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봤으니 가지 말라 가지 말라 말리지만 더 이상 대화는 쉬이 나오지 않을 듯 했다.
 
사람들 만나 오롯한 정신상태로 대화를 하지 못한다는 건 참 괴로운 일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언제부터인가
낯선 사람들과 함께 앉는 자리가 그리 편하지만은 않게 되었다.
예전에는 그나마 처음보는 사람들과 곧잘 교류도 하는 편이었는데...
이제는 즐거운 얘기를 해주며 사람들 주목을 끌고 난 후에도
마음엔 왠지 공허함만이 남는다.
 
끈끈하게 마음을 이어내는 사람들과 오랜동안 술한잔하고 얘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그러기엔 내 이기심이 더 강하다는 걸 알기에 힘들겠지만...
 
 
 
예나야... 펜 선물 고마워.
승원 누나... 반나서 반가웠어. 중국어 공부 열심히 하길 바래.
형준 형... 이런저런 얘기 흥미로웠어요.

2004년 5월 19일 수요일

중국인 감독을 만나다.

SICAF에서 애니메이션 심사하시는 분들을 초청했는데
그 중에 중국 북경에서 오신 감독님이 계셨다.
원래 통역하시던 여자분께서 갑자기 사정이 생겨 못오신다고 해서
급하게 나를 불렀다. 내가 통역을?
 
가서 인사를 나누고 통성명을 하고...
중국 감독님 이름은 멍쥔(孟軍)이고 북경에서 애니메이션 회사를 이끌고 있으며
지금 장편 애니메이션을 준비하시는 중이라 하신다.
여전히 중국어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는 건 어쩔 수 없는 실력 탓일게다.
오후 일정은 내가 멍쥔 감독을 모시고 여기저기 구경(?)을 시켜드리는 것이었는데
애니메이션 감독이라 하니 특별히 어딜 소개 시켜줘야 할 지 막막했다.
문득 내가 알고 있는 애니메이션 회사를 소개시켜주면 좋겠다는 생각.
멍쥔 감독도 좋아한다.
 
한호흥업에 가서 예지영 PD와 함께 한호흥업 여기저기 구경하고
배경감독님 그림도 구경하고 인사도 나누고
지금 지영이가 준비 중인 TV시리즈 - 내친구 다이고로 애니메이션 데모도 보여드리고
이야기 나누고....
멍쥔 감독은 중국에 각 방면에 친구들이 참 많다면서
다이고로. 애니메이션을 자기 친구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한다.
만약 잘 되면 지영이에게도 좋은 일이겠다.
 
그런 후에 오돌또기에 가서 오돌또기 작품 구경도 했는데
아주 멋지다는 말을 계속 한다. 한국적인 느낌이 있는 그림, 작품을 처음보는 셈이라 하면서.
각 나라, 지방의 특색이 잘 드러나는 그림과 작품을 아주 좋아하신다.
지금 멍쥔 감독이 준비하는 장편도 중국적 특색이 강한 작품이긴 하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함께 저녁을 먹고 있다가 후배들 만나기로 한 약속 모임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없으면 멍쥔 감독은 대화하는 데 아주 곤란을 겪을 게다.
그래서 내 약속 모임에 같이 가자고 그랬더니 아주 좋아한다.
 
젊은 애들과의 술자리, 이야기, 즐거운 공감대들을 느끼고
또 자리를 옮겨 선배, 동기들이 있는 술자리로 갔다.
거기에서는 나이들이 멍쥔 감독과 두어 살 차이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더더욱 즐거워하는 듯 했다. 한참을 떠들고 웃으며 놀다가
마지막으로 노래방에 갔다.
중국 노래가 있는 노래방에서 서로 부르스며 흥겨운 어깨걸이 춤을 추며 열창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다.
 
새벽 3시가 되어서야 겨우 멍쥔 감독 숙소로 모셔다 드리고 돌아왔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는 통하는 게 있는가보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통역?을 하느라 땀이 삐질 나고 어려움을 느끼는 자신을 보면서
8개월간 참 게으르게 살았던 건 아닌가 하는 반성이 생긴다.
 
잘 해야하는데... 중국어를 잘 해야 하는데...

2004년 5월 8일 토요일

어버이 날.

어버이 날 아침에도 늘 여전한 늦잠.
하지만 그 늦잠도 온식구들이 다 모였을 때는 아침 8시가 가장 늦은 기상시간이다.
좀 더 어렸을 때야 이불 속에서 나오기 싫어 부비적거렸지만 이젠 그렇지 않는다.
 
아침에 케잌에 불을 붙이고 조카들이 박수를 치며 기뻐한다.
어버이 날. 다른 때와는 달리 더욱 미안한 마음 뿐.
 
어제 저녁에 사다놓은 카네이션 화분을 드리긴 했지만
뭘 해드릴 지 몰라 망설이다가 동생이 제안한다.
어머님 핸드폰이 부서져서 쓰기 불편한 상태라며 핸드폰 선물을 해드리자 한다.
아주 좋은 생각.
 
어머님을 모시고 가까운 대리점에 가서 핸드폰을 사드렸다.
카메라가 달린 카메라폰.
어머님은 카메라 필요없으시다 그러시지만 손녀들 찍어서 핸드폰에 담아두시라고 권해드렸다.
 
자식들이 핸드폰의 신기능에 헤매고 어머님은 즐거워하시고
그렇게 어버이 날은 조금씩 저물어간다.
 
또 곧 집을 떠나야 하고 동생도 그러하니
죄송스러운 마음, 그리고 고마운 마음이 교차하지만
어떤 마음도 표현하지 못하는 어리숙한 듯 자식 마음은 또 그렇게 한 겹 쌓인다.
 
어머님, 늘 건강하십시요.
언제나 어버이 날임을 알고 있습니다.
건강하시고 늘 행복하시길 염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