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8일 목요일

091008 - 9시 뉴스 관전평 (효성|4대강|K-9 자주포|정운찬)

이 글은 자유인님의 2009년 10월 8일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부패에 대한 비난에도 잘 견디는 사람들.

“People who are really corrupt can live with it, but Roh was a crusader who could not deal with the fact that he had done something wrong,” said Michael Breen, author of The Koreans. “Criminals live with their criminality – he was an honest man.”
출처: http://www.timesonline.co.uk/tol/news/world/asia/article6350518.ece

'한국인들'(The Koreans)의 저자인 마이클 브린은 "진짜로 부패한 사람은 부패에 대한 비난에도 잘 견뎌낸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던 개혁가였다"며 "범죄자들은 범죄와 함께 살아가지만 그는 결국 정직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 영국 The Times ,23일자 기사 中 -


예전에 적어뒀던 타임즈의 기사 한토막. 노무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사람들의 수 많은 비난, 혹독한 비난에도 꿋꿋하게 버텨내는 이 땅의 정치/ 경제/교육/문화계의 사람들에게 대한 이야기다. 내가 하는 행위의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꿋꿋하게 살아가려면 그 어떤 비난과 비판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내가 하는 행위에 대해 늘 고개를 돌려 살피고 앞을 향해 발전적이려면 비난과 비판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 때론 흔들리고 때론 쓰러지기도 하겠지만 중요한 건 한 걸음씩 진보하고 옳은 방향으로 변해가는 모습이다.

삶의 모든 행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잘못을 시정하고 개선하려는 사람은 비난과 비판에 아파하기 보다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경청한다. 하지만 스스로가 이미 부패하고 타락했다면 사람들의 비난과 비판은 패배자의 아우성일 뿐이며 현실과 맞지 않는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뿐이다. 귀를 닫는 게 더 편한 사회, 귀 기울이면 피곤해지는 사회는 '진짜로 부패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게 아니라 '그들을 쉽게 용서해주는 사람들', '알고도 쉽게 잊는 사람들'이 만들었음을 알아야 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은 반드시 변한다.

만약 노무현이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면, 우리는...

노무현 서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계속 머릿속에 떠돌던 화두.

노무현이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면,

게다가 연임이 가능한 상황이었다면,

사람들은 다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을까?

2년 전 노무현과 2MB가 붙었다면

사람들은 다시 노무현을 선택했을까?



이미 2년이 흐른 시간 속에서 새정부의 면면을 알게 되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있는 상태라면 어느 누구라도 "다시 노무현을 선택하겠노라"고 말할 것이다. 질문은 현재 수 많은 상황을 겪고 난 후 던지는 게 아니다. 2MB와 새정부가 이럴 줄 몰랐던 상태, 예측만 가능했던 상태, 2년 전 그 때로 돌아가 던지는 질문이다. 한가지 더, 7년 전 김대중과 노무현이 경선에 나왔다면 사람들은 누구를 선택했을까. 그들 중 한 명? 아니면 그들을 제외한 한 명?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자각해야 하는가. 김대중과 노무현은 '최선'이었을까, 아니면 '차선'이었을까. 대한민국 국민들이 바라는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대한민국 국민들이 원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 진보정당은 힘이 없으니 거들떠 보지도 않는 것일까. 정치인과 정치는 내 삶에 별로 중요하지 않고 신자유주의건 무한경쟁의 시대건 내가 원하는 걸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사람, 단체만 있으면 만족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무엇을 향해 사는 것일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투표를 하고 정치인을 선택하는 것일까.
우리가 원하는 삶은, 원하는 세상은 과연 무엇인 걸까.

2009년 10월 7일 수요일

부정부패, 비리 수사에 대한 작은 바람.

작은 바람이 있다면 한국에서 벌어지는 수 많은 비리와 부패 사건들 수사가 '끝장수사'가 되는 걸 보고 싶다.

보통 검찰이나 경찰 혹은 감시기관에 적발된 경우 비리/부패의 일부분일 경우가 많기 때문에 '수사를 확대'한다거나 '전방위 수사'를 약속하곤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국민적 관심도 시들해지고 자신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이상 그 사건은 쉽게 잊곤 한다. 그러면 수사는 소위 피래미들만 처리하고 유야무야 종결처리 되고 만다.

상처가 났을 때 치료를 하지 않으면 상처는 곪기 시작하고 점점 상처 부위가 넓어진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바로 상처가 난 부위를 치료하기도 하지만 손댈 수 없을 만큼 심각할 경우에는 상처 부위부터 차근차근 병세를 잡아가며 상처의 뿌리를 뽑게 된다. 국가, 사회도 마찬가지다. 넓어진 상처부위를 발견하면 상처를 치료하겠다고 덤비기 마련인데 진통제 몇 알 먹고 통증이 멈추더라도 치료를 늦추면 안된다. 완치되지 않은 상처부위는 반드시 재발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매일 접하게 되는 뉴스와 보도/고발 프로그램을 보며 한국 내 각종 상처와 병들이 조금씩 치료되는 경우도 보게 되지만 대체적으로 근본적인 치료는 하지 못하고(않고) 있다. 경/검찰이 '수사확대'를 약속하고 '성역없는 수사'를 선언해도 그게 그저 '쇼(Show)'에 불과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건 그간의 과정, 역사들 때문일 것이다.

한가지 더, 상처를 치료해감과 동시에 건강한 몸 만들기도 시작해야 한다. 기초를 튼튼히 다지면서 건강한 몸을 갖게 되면 가끔 생기는 상처와 병들은 그닥 걱정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조두순 영아 성폭행 사건'이라 말해야 한다.

사건을 저지른 자는 기억에서 잊혀지고 피해자는 영원히 기억되는 현실, 합리적인가?

'누구 사건', '누구와 누구 사건'이라고 미디어에서 떠들 때 그 안에는 피해자만 존재하고 피의자 또는 피고인(범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누구'가 가령 어린 아이일 경우 그 아이의 부모와 당사자는 수 십 년이 지나도 초고속 인터넷 망이 깔린 대한민국에서는 다시 과거의 상처와 대면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게다가 사건 직후나 시간이 오래 흐른 후에도 정신, 심리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 또한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 대한민국의 정서와 시스템상 피해자만 이중, 삼중으로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허술한 법(시스템)을 정비, 보완하기 위해 피해자를 기억하는 게 옳은가. 아님, 피의자, 피고인, 범인을 기억하는 게 좋은가. 개인적인 생각으론 피의자(피고인, 범인)을 기억하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조두순 영아 성폭행 사건'이라 말해야 한다.

그 외에도 'ㅇㅇㅇ 영아 유괴사건', 'ㅇㅇㅇ 초등생 성폭력 사건', 'ㅇㅇㅇ 아동폭력 사건' 등 'ㅇㅇㅇ' 안에 범행을 저지른 사람의 이름을 넣어야 한다. 아동 성폭력 관련자는 신분공개 및 특별 감호, 피해자에게 접근금지 등 엄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인권'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걸 이해못하는 바 아니지만 '한국적 상황'은 절대 다른 나라와 '똑같지 않다'. 강한 법 집행이 범죄율을 낮춘다는 보장이 없다는 등의 이야기 역시 강력한 법 집행 이후로 다시 토론하고 논의해도 늦지 않다.

특히 황당한 것은 술에 취한 게 감형의 이유가 되는 것인데 이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음주는 자신의 의지로 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자신의 결정으로 한 음주 행위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자신이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 아닌가. 그럼, 마찬가지로 본드를 불거나 마약을 한 후에 범죄를 저지르면 본드 흡입과 마약관련 처벌만 받고 나머지는 감형이 되어야 맞는 것 아닌가. 세계 최고의 음주율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음주로 인한 끔찍한 범죄행위가 용인된다는 건 이 나라가 미쳤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동기-동생과 대화 중
.................
사족1. 조두순이 예외적으로 독방생활을 한다고 한다. 감옥에서 독방생활하는 게 예외적인 게 아니라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고도 12년 밖에 형을 받지 않았다는 것과 음주로 인한 참작이 있었다는 게 예외적이고 놀랄만한 일이라 하겠다.

사족2. 대한민국은 '부녀자와 아동'이 살기 어려운 끔찍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최근 벌어지는 일련의 폭행/살인 사건을 보면 대부분 '부녀자와 아동'이다. 사회적, 신체적 약자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대한민국은 얼마나 비정상적인 사회인가.

사족3. '삼성 중공업 태안 기름유출 사건', '삼성 테크윈 군납품 비리 사건', '대한제분·동아제분·CJ·한국제분·영남제분·대선제분·삼양사·삼화제분 등 밀가루 담합 사건', '농심 신라면 이물질 발견' 등 기업이나 단체가 저지른 비리, 불법 등도 'S사', 'N사' 등의 표기가 아니라 정확하게 이름을 밝혀줘야 한다.

2009년 10월 1일 목요일

불법이 합법이 되는 과정 (반칙하는 방법)

예전에 들은 어느 농구선수가 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경기가 시작되면 선수 중 한 명이 공격이나 수비 중에 룰을 벗어날 듯 말 듯한 반칙을 한다. 또는 룰을 조금 벗어나는 듯한 반칙, 즉 누가 봐도 반칙이랄 수 있을 정도에 가까운 반칙을 한다. 그 때 심판이 휘슬을 불면 그보다 낮은 수위의 반칙을 하면 되고 휘슬을 불지 않으면 그 때부터는 반칙에 가까운 반칙은 반칙이 아니게 된다.

재밌는 이야기였다. 반칙을 하는 방법, 반칙의 정도를 정하는 방법이 있다는 게 조금은 놀라운 이야기였다. 심판이 사람이니 그가 판단하는 정도에 따라서 휘슬이 불리고 안불리고가 결정되는 것 아니겠나. 그걸 이용한 반칙에 대한 이야기였다.

대한민국이란 사회(혹은 전 세계?)에서 사는 방법도 이와 다르지 않아보인다. 특히 기득권과 비기득권의 관계가 그러하고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관계가 그러한 듯 하다. 아마도 정치권과 서민들의 관계 정도를 떠올려보면 쉽게 그림이 그려질 것 같다. 서민들이 정치인들을 감시하는 심판이라고 한다면 정치인들은 서민들에게 어느 정도 수준의 불법적인 모습을 슬쩍 흘려보낸다. 서민들의 반응이 나쁘면 사과(하는 척) 한다. 만약 서민들의 반응이 없으면 그보다 더한 불법적 행위를 강행한다. 서민들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무감각해지고 포용의 측면이 커지면서 휘슬을 불어 반칙카드를 주는 횟수보다 단지 주의를 주는 정도의 횟수가 많아지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주의를 주는 것조차도 하지 않고 그들의 불법적 행위가 마치 '그럴 수도 있는 일' 정도로 치부하거나 '사람이니 실수 정도는 하는 것'이라고 동정하게 되고 '한국에서 그 정도면 양호한 것 아니냐'고 오히려 두둔을 하기에 이른다. 자신이 그들을 감시하는 위치에 있었음을 까맣게 잊고 그들의 행위에 동화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불법이 합법이 되는 과정이다. 이젠 '위장전입' 따위는 별 흠이 되지 않고 '논문표절' 정도는 학계의 관행이며 '부동산 투기'는 정당한 돈벌이 수단이 되었다. 반칙을 잘하는 선수와 심판이 한통속이 되어 룰을 만들고 집행하는 꼴이다. 그렇게 불법은 정당성을 획득하며 합법적 관행과 관례로 굳히기에 들어간다. 그러다가 전통이 되고 세습이 된다.

모 항공사 광고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国无常强、无常弱。
국가는 늘 강하지도 약하지만도 않다.

그런데 이 글 뒤에 따라오는 글이 있다.

执法者强则国强、执法者弱则国弱。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강하면 국가가 강하고 법을 집행하는 자가 약하면 국가가 약하다.

대한민국의 국력의 강약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저 글에서 보이는 '강'하다는 뜻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법을 집행하는 것'과 '국가의 강함과 약함'이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법을 집행하는 자'는 사법기관이 될 수도 있고 '국민'이 될 수도 있다. 정당한 게임을 하고(보고) 싶다면 심판이 잘해야 한다. 선수들이 심판을 수준과 정도를 떠보는 반칙행위에 쉽게 좌지우지되어서는 안된다. 

지금 대한민국은 선수와 심판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