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30일 월요일

시스템과 개인

너무 혼란스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불가(?)쪽 공부를 좀 했던 터라^^; (감히)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황대권 선생님이 말씀하신 내용도 충분히 옳은 말씀입니다. 제가 글을 썼던 것은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 속에 그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생각하며 쓴 글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시스템이 먼저냐, 개인(인간)이 먼저냐... 저는 일단 개인(인간)에 무게를 두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하나의 문제에 봉착을 하더군요. 즉, 시스템(법, 제도를 포함한)은 분명 인간이 만들어 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진 그 시스템은 나름의 생명력을 얻어버리게 됩니다. 자생적으로 성장하고 살아 숨 쉬게 된다는 것이지요.(물론 기득권층이 힘을 실어주거나 조작하는 경우가 많지만 말입니다.)

 

개인의 수양을 통해 내 안에 있는 분노와 잘못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건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곰곰히 주변을 둘러보면 한 개인이 잘 사는 것과 국가나 사회시스템이 그런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것은 아주 별개로 움직이더란 말이죠. 평생을 착하게, 남에게 피해도 주지 않고, 오히려 남을 도우며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돌연 국가 간의 분쟁에 의해, 사회 권력자들의 이권다툼에 의해 적당한 댓가도 받지 못하고 아니, 오히려 피해를 받고 사는 인민(민중)이 너무 많다는 거지요. 개인의 수양은 수양대로 끊임없이 정진해 가야 하는 건 사실이고 중요한 일입니다만, 거대 시스템에 맞선 풀뿌리 인민들의 연대도 분명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가령 한 개인이 촛불시위에 참여하거나 농활이던 어떠한 운동이던 참여하는 건 개인이 분노를 표출하는 감정적 행동이 아니라 잘못된 사회시스템을 고쳐보기 위한 소중한 움직임이라 생각하는 거지요. 그저 희망없는 넋두리 한탄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나'를 비롯한 더 많은 인민(서민)들이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황대권 선생님의 말씀이나 제가 적은 글이나(감히 비교해서 죄송합니다.)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언부언이지만 제가 6.25에 대해 적은 글은 이미 한국을 비롯한 세계 모든 국가의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20:80로 나뉘어져 있고 그건 자본에 힘입은 자본가들과 결탁한 소위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구분을 해버린 것이고 진작에 없어졌어야 했을 봉건계급사회가 여전히 다른 모습, 즉 자본계급사회로 변화해서 존재하고 있음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적은 글입니다. 특히나 전쟁이 발생한 이유에 대해서 알게 되면 (단순한 표현으로) 반미와 같은 움직임이 결코 감정에 의한 분풀이가 아닌 정확한 문제 해결을 위한 괜찮은 방편임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반미가 아니라 반자본주의, 반저질자본주의가 되겠고 집중편향되어있는 권력에 대한 항거(?), 개인이 잘 살기 위한 적정한 보장을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via 한국전쟁... 가장 추악한 범죄 - 전쟁
http://cjh6520.egloos.com/2541469 글에 달았던 답글을 옮겨 와 몇 개 단어 수정하고 생략해서 보관함.

2009년 11월 29일 일요일

내일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어.
굳이 그렇게 말을 하지 않아도 말이지.

 

하지만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시간의 흐름에 나를 잠시 맡겨두는 것.

 

그 흐름에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서
온 몸에 힘을 주고 버텨보긴 하지만
그리 쉽진 않아.

하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걸.

 

오늘 내가 설겆이를 하는데
그릇에 남겨진 흔적들이 왠지 지저분하게 느껴지는 거야.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내가 살아온 날들도 그렇게 느껴질까봐
조금은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거야.

 

하지만,
찬 물에 조금 남아있던 그릇의 온기가 사라지듯이
내 마음에 작은 불씨마저 꺼져버리게 하진 않을래.

나를 믿고 있는 마음,
나도 잘 알고 있으니
오늘보다 다른 내일이 될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2003년 11월 27일에 쓰다.

 

 

 

컴퓨터 하드를 뒤적거리다 오래 된 텍스트 문서를 발견했다. 문서 이름이 '내일은'이라고 되어있길래 무슨 문서인지 궁금해 열어보니 위에 적힌 내용이 있었다. 2003년 말이면 중국에 도착한 후 2개월 정도 시간이 흐른 뒤였는데 말도 통하지 않는 막막한 이국(異國)에서 답답함, 조급함, 불안함, 외로움 등이 스물스물 올라오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글을 읽다보니 당시 홀홀단신 멋모르고 부딪히며 애쓰던 내가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지금은 그 때보다 잘 살고 있나, 지금은 그 때보다 다른 오늘을 살고 있나, 그 때의 내일보다 지금의 내일이 내게 더 벅찬 희망을 주고 있나 곰곰히 지금을 돌이켜 생각한다.

 

적어도 그 때의 나에게 작은 위로 정도는 보낼 수 있겠다.

2009년 11월 28일 토요일

블로그 인테리어를 바꾸다.

(중국과 같이) 접속되지 않는 곳이 있어서 여러 불편한 점이 있던 (하지만 정들었던) 티스토리를 정리하고 텍스트큐브로 옮겼다. 물론 다음(daum)이나 티스토리에서 중국에 항의를 하거나 여러가지 방법을 모색해 본다면 접속불가 상황이 해결될 일이기도 하겠지만 그리 쉬워보이지 않는 건 사실이다.

 

결국 블로그 이사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데 여러모로 아쉽다. 나중에 티스토리의 문제가 해결이 된다면 다시 옮겨올 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주관적인 선택에 의해서가 아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 이사를 한다는 건 아무리 인터넷 상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다지 유쾌한 건 아니다. 개인의 선택과 취향이 거대 시스템에 의해 자동적으로 통제될 수 밖에 없다는 건 참 씁쓸한 현실임에 틀림없다.

 

글을 자주 올리지는 않지만 가끔씩 들러 개인적인 글, 외부에 전하고 싶은 글을 올리며 처음과 생각했던 블로그의 모습과는 약간의 변화를 겪어왔다. 나의 변화만큼이나 블로그도 변화하고 진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쉼 없는 블로그질과 더불어 스스로를 절차탁마해야겠지.

 

물론 도메인 주소는 원래 사용하던 http://jumpkarma.com을 그대로 사용하니 별 문제는 없다. 포워딩되는 주소가 티스토리에서 http://jumpkarma.textcube.com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외관은 별 문제가 없는데 인테리어가 바뀌는 정도겠지. 하지만 그렇더라도 글(들)을 옮기고 여러 세팅을 다시 해야하니 불편한 건 사실이다.

 

통제와 감시가 없는 '자유'로운 소통을 위해!

2009년 11월 18일 수요일

이데아의 그림자



불완전한 현실은 완전한 이데아의 그림자.
결코 이데아로 다가설 수 없다는 불완전한 현실을 딛고
얼만큼을 참아내면 되는 걸까.
그림자의 그림자를 통해, 현실의 현실을 통해
찬란한 빛이 가득한 이데아로 다가설 수 있을까.
내 지난 그림자여, 나를 이끌어 그림자를 넘게 하라.
내 안에 있는 이데아를 현실로 끌어낼 수 있도록.

2009년 11월 17일 화요일

몸 보수-입 진보, 광장 진보-밀실 보수... 고리를 끊는 방법은...

...‘지못미’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곳을 쳐다보면서 경제적으로 짭짤한 곳에 뿌리내린 자들, 인터넷에선 진보, 술자리에선 중도, 직장 가면 보수가 되는 자들의 탄식이다.

...그래야 ‘몸은 보수-입은 진보’, ‘생산은 보수-소비는 진보’, ‘광장에서는 진보-밀실에서는 보수’로 분열된 정치적 분열증이 개선되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 지금 한국 사회에서 진정으로 심각한 정치적 문제는 지식인 몇몇이 보수로 전향한 것이 아니라 대다수 시민이 몸까지는 진보로 전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역사적 상처에서 비롯된 의심이 깊어서 정치적 주체로 나서는 데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리라.

남재일 교수의 말과 행동의 정치적 분열증을 넘어 중의 일부다.

글 내용의 어떤 부분에 대해선 생각이 조금 다르지만 전반적인 내용에 동의를 한다. 몇 번의 곡절과 앓이를 겪으며 민주사회로 진입했다는 대한민국은 그다지 균형이 잡히지 않은 상태라 할 수 있다. 언젠가는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리라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근 1-2년 새에 젊은이들 대다수가 보수적 성향이란 쪽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대다수가 보수란 생각까지 하는 참이다.

사회의 많은 부조리와 병폐들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하다보면 결국 '교육'에 초첨이 맞춰지곤 하는데 이렇게 되면 '원론적'인 이야기만 오갈 뿐이어서 참 대책이 없기도 하다. 이보다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결국 제대로 된 소리를 들어먹을 줄 아는 젊은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수 밖에 없는데 사회적으로 유아기적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한민국에서는 그들에게 먹힐 법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부모를 제외하곤 거의 없는 듯 하다. 그들의 '선생님들' 역시 그들을 사회에서 돈 잘 벌고 성공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고용된 존재일 뿐 그들에게 사고, 사유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엔 벅차고 나름의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더라도 펼치기엔 너무 많은 '적'들이 존재한다.

그래도 역시 가장 빠른 방법은 젊은이들이 깨어나는 것이다. 그들이 의무교육기간을 마치는 순간부터 대학, 군대, 직장, 사회, 새로운 가정을 거치는 동안 세뇌당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 매몰당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관점과 소신을 가지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해야 한다. 그들에게 다가서는 방법과 그들과 소통하는 방법, 그들에게 새로운 시각과 열린 사고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렵지만 한 명씩 한 명씩 변화의 모터를 달아주어야 한다. 

몸 보수-입 진보, 광장 진보-밀실 보수... 지금 수 많은 공간, 상황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닌가. 상처를 상처로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 상처는 빠른 속도로 부패하고 결국엔 생명을 잠식한다. 사회의 많은 문제도 마찬가지다.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수 많은 문제들이 있다. 그 문제들은 결국 나의 미래와 내 자식의 미래까지 집어삼킬 것이다. 지금 그 고리를 잘라내지 않는다면 희망과 미래를 말할 기회조차 오지 않을 것이다. 

문제인지 문제가 아닌지 지금보다 더 신중한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문제를 마주하면 '문제다!'라고 소리쳐야 한다. 
옆 사람이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면 '문제야'라고 알려줘야 한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자기 내부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
그것이 집단 최면에서 깨어나는 방법이다.

피겨 문외한이 본 김연아의 특징, 그리고 예찬


김연아의 특징은...

1. 피겨 선수가 아니라 피겨 예술가다.
과거에 유명하다는 피겨 선수들의 경기 중계를 본 적도 있다. 그들의 느낌과 김연아의 느낌이 다른 건 딱 하나다. 과거(김연아를 제외한 현재의 선수 포함)의 선수들은 시합을 하고 경기를 한다. 하지만 김연아는 예술을 하고 있다. 피겨 경기를 보면서 선수의 몸짓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음악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드러내는지를 느끼게 된 건 김연아가 처음이다. 이건 무척 신비한 경험인데 지난 시절 봤던 피겨 경기들은 대부분 점프를 잘하면 잘한다고 생각했고 스핀을 잘하면 잘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던 것에 반해 김연아의 경기 대부분은 저 선수가 어떤 감정을 표현하고 있고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하는지가 보인다는 것이다. 점프나 스핀, 기타 기술들은 모두 연기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느껴지게 한다. (과장하면) 빙상 위의 발레리나와 같다고 할까. 스포츠 선수가 아닌 예술가. 김연아는 스포츠 선수로 출발해서 예술가의 경지로 달려가고 있고 이미 어느 정도 성취를 이뤘다고 생각한다.

2. 계속 성장한다.
솔직히 유명한 스포츠 스타들을 보면 갈수록 한껏 정점에 오른 후에는 갈수록 원숙해지는 느낌인데 김연아는 그냥 계속 성장한다. 몸은 계속 유연해지고 표정은 갈수록 풍부해지고 감정은 화산처럼 폭발한다.

3. 연기를 위한 점프를 한다.
위와 중복되는 이야기지만 김연아와 다른 선수를 비교해보면 다른 선수들은 점프를 위해 연기를 (대충) 한다. 점프를 잘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기는 경직되기 마련이고 점프에 대한 긴장감이 증폭되서 실수가 잦다. 하지만 김연아는 전체 연기를 위해 점프를 할 뿐이다. 물론 김연아 역시 점프에 부담이 없진 않겠지만 전체 안무를 위해 점프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착지 후에 연기로 연결되는 게 자연스럽고 전반적으로 일체감을 느끼게 한다.

4. 냉정하다. 무심하다(?)
소위 '쿨'하다는 것인데, 자신의 감정에 대해 별 숨김이 없고 실수에 개의치 않으며 성취에 대해 당당히 이야기한다. 이건 젊은 층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태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젊은 층들은 결코 '쿨'하지 않다. '쿨'하다고 불려지는 이들은 이기적일 뿐이고 무관심할 뿐이다. 선택도 빠르고 포기도 빠르다. 김연아의 행동양식은 그런 류의 것이 아니다. 발랄한 소녀가 대인배의 품을 가지고 있다랄까.

김연아는 이 외에도 많은 특징, 장점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단점도 있고 부족한 점도 많을 것이다. 위 내용은 김연아를 '신성화'하는 게 아니라 피겨 문외한이 피겨를 보며 짜릿한 감동을 느꼈기 때문에 그 감정이 신기해서 생각해 본 일부분일 뿐이다. 김연아가 한국인이라서 혹은 미디어에서 자주 등장했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이 아니다. 피겨 스포츠를 즐겨보는 것도 아니고 '애국'을 들먹이며 단지 한국인이란 이유로 쌍수를 들고 응원을 하는 건 몸서리치며 경멸하는데...어찌...(해설이 긴 것도 병인양 하여...)

아무리 생각해 봐도 김연아는 괴물이다.

루저(Loser)의 원래 뜻이 변한 건가?

los·er  [lúːzər] 
1. 실패자; 손실자, 분실자 a loser at marriage 결혼에 실패한 사람 You shall not be the loser by it. 그것 때문에 너에게 손해를 끼치지는 않겠다.
2. 진 편 (경기에서), 진 말 (경마에서); 패자 Losers are always in the wrong. 속담 이기면 충신, 지면 역적.
3. 영 [당구] HAZARD 3
4. (구어) 전과자(前科者) a two-time loser 전과 2범자
5. 전혀 쓸모가 없는 것[사람]

실패[失敗]
 [명사] 일을 잘못하여 뜻한 대로 되지 아니하거나 그르침.
실패하다 [동사] 1 찾아보기: 실패.  2 어떤 일에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하거나 완성하지 못하다.

패배[敗北] [명사] 1 겨루어서 짐.
패배감[敗北感] [명사] 싸움이나 경쟁 따위에서 자신이 없어 무력해지는 느낌. 또는 싸움이나 경쟁 따위에서 진 뒤에 느끼는 절망감이나 치욕스러운 감정.
패배자[敗北者] [명사] 싸움에 진 사람.

출처: Daum 사전

'루저' 열풍은 나중에 알았는데 내막을 알고 난 후에도 별 관심은 없다. 그보단 왜 '루저;패배자 혹은 실패자'라는 말을 쓴 것일까. 실패는 하던 일이 잘못되어 그르치거나 완성되지 못할 때 쓰는 말이고 패배는 경쟁 따위에서 진 것을 말하는 것 아닌가. 아마 루저라는 말을 한 사람의 뜻은 키가 작은 사람은 (모종의) 경쟁에 조차 나갈 수 없는 상태가 안 된다...라는 생각에 루저라는 말을 쓴 것 같다. 하지만 '키 큰 사람 선발대회'도 아니고 '우수 신랑감 선발대회'도 아닌데 키를 가지고 루저라는 표현을 썼다. 시합 출전을 하기도 전에 패배자가 되었다고 하니 루저의 범주에 들어 간 사람들이 흥분할 만도 하겠다. 혹은 맨 아래처럼 전혀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말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이해는 되지 않는다. 노자의 '무용지용'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키가 작다는 이유가 전혀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는 조건이라니.

하지만 만약 그의 발언이 통용되는 사회라면 '실패'와 '패배'라는 게 경쟁과 겨룸을 통해, 혹은 자신의 노력을 통해 어떤 일을 진행한 것과는 별개로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버린 '운명적 사회'라는 뜻이 아닌가. 태어나면서부터 신체적, 교육적,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사람은 바로 위너(Winner)가 되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바로 루저(Loser)가 되는 사회. 키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취업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고 이성의 선택권 밖에 있다는 것이며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이 되는 사회. 이는 못생기면 서비스나 잘해야 하고(모 국가 대표가 한 말) 못생기면 반드시 성형해서 이뻐져야 하는 사회. 자신들이 만든 규칙 속에서 조건 충족이 되지 않으면 경기조차도 할 수 없도록 추방시키는 사회. 공정한 기회는 고물상에서 엿 바꿔 먹고 평등한 출발은 쓰레기통에 버려버린 사회. 이런 사회가 과연 살 만한가. 희망을 품고 뭔가 해볼 만한 사회인가. 보아하니 택도 없는 것 같고 그렇게 변하려면 수 많은 '인고'의 세월을 견뎌야만 할 듯 하다.

루저 발언을 한 사람이 사고하는 방법, 사유하는 방법 조차 많이 부족한 상태가 아닌가 싶은데 언제부턴가 사회 분위기가 한국어를 한국어대로 쓰지 못해도 별로 개의치 않게 된 건 말할 것도 없고 사고(思考)를 제대로 하지 못하더라도 외형과 조건만 좋으면 대체적으로 인정하고 떠받드는 분위기가 팽배해진 것 같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외형과 조건이 좋지 않으면 개무시하고 깔보는 분위기가 팽배해진 것이며 한국어를 제대로 쓰지 못해도 외국어 하나 잘 하면 최고로 대접받는 사회가 된 것이랄까. 그렇다보니 루저 발언에 거품을 물고 흥분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발언자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 날 밖에.

발언자 역시 교육과 사회의 피해자일 터인데 루저 발언을 듣고 흥분하는 사람들은 발언자만을 붙잡고 '사냥'을 할 게 아니라 그런 발언을 만들어 낸 교육 시스템, 사회 시스템 그리고 언론과 대한민국 정부를 향해 비판을 하고 스스로의 모습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가 '마녀'가 되거나 '사냥꾼'이 되거나 밖에 할 수 없다. '마녀' 자체가 없는, '사냥'할 필요가 없는 사회가 더 낫지 않은가. 

사람은 '감정'만으로 이루어진 동물이 아니고 '이성'이란 것도 존재한다. 두 가지를 함께 써 먹어야 할 때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 루저(Loser)의 사전적 의미를 생각해보다 생각의 가지가 또 뻗어나갔다......-_-;

** 091118|01:00 일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