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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28일 목요일

'니 하오'는 경어, '니 하오 마?'는 반말?

중국어에는 기본적으로 경어가 많지 않다. '많지 않다'라고 표현도 어색하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몇 가지 정도가 어른들에게 쓰는 말, 즉 경어인데 그 중 하나가 닌(您)이다. 닌은 니(你-당신-you)의 경어인데 사실 중국인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나이 차이가 꽤 남에도 불구하고 닌(您)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걸 종종 들을 수 있다. 중국의 각 지역마다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닌(您)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지 않는다. 나이차이가 아주 많이 난다거나 아주 어려운 사람 등에게 사용하는 예외가 있긴 하다.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니(你)라고 말한다 해도 엄청난 결례까지 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외국인이 중국어를 한다면 더욱더. 중국 친구들에게 들은 얘기로는 서비스업종에서는 일반적으로 닌(您)을 사용한다. 가령, 어서오세요.(欢迎您-환잉닌)나 안녕히 가세요(请您慢走-칭닌만조우) 등이 되겠지.

아시아경제신문 기자가 소개한 "이영애 측, 후진타오 中주석에 대한 '말실수 논란' 해명"이란 기사를 보면 니 하오(你好)와 니 하오 마?(你好吗?)에 대한 언급을 하며 이영애가 후진타오 중국주석에게 반말을 해 결례를 범했다고 소개하는 웃지못할 내용이 나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어인 '니 하오' 대신에 반말에 가까운 '니 하오 마?'로 인사했다는 것이다. 기자는 한국말 중에 '야'와 '얌'라는 말도 '야'는 경어고 '얌마'는 반말에 가까운 말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많다. '마'라는 말이 반말처럼 들리니 반말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겠다. 웃긴다. '니 하오?'='잘 있었냠?' ??????

이에 대응하는 이영애 측근의 해명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인데 '몇 가지 다른 높임말 인사법'도 연습했단다. 몇 가지 다른 높임말 인사법은 어떤 것인지 무척 궁금하다. 과문한 탓에 억지를 부려보자면 중국어에 높임말 인사법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네티즌들(기자가 임의로 갖다붙인 익명의 사람들일 확률이 많겠지만)은 이 같은 상황을 '국빈에 대한 예의에 어긋난다'고 우려를 했단다. 아니, 유명한 배우가 국빈에게 상대국 언어로 인사를 한 것 자체가 노력이 가상하고 배려심이 많다고 보면 무리인가? 어른을 존경한다는 소위 '예의'라는 것이 유난히 강조되는 한국사회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사실, 경어를 썼느냐 쓰지 않았느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 자체가 코미디다. 세상에서 자국어에 경어가 있는 나라가 몇이나 될까. 한국과 일본 정도? 중국어에는 몇 몇 단어들이 반드시 어른들에게 써야 하는 단어라고 되어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경어의 수는 한국과 일본에 비하면 극히 미비하다.

후진타오 입장에서는 이영애가 중국어로 반말을 하건 경어를 쓰건 사투리를 쓰건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외국의 유명배우가 자신들의 언어인 중국어로 인사를 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았을 수도 있다. 오히려 후진타오나 부시가 한국에 와서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하지 않는 게 더 우습지 않나. 한국에 방문했으면 최소한 그 나라 인사말 정도는 해야 할 것 아닌가.

이영애가 한국어로 모든 대화를 진행하고 통역이 이를 수행해주면 될 일이고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기 위해 준비한 몇 마디 중국어를 하면 그것으로 족할 일이다. 여기에 국빈에 대한 예의가 어떻게 경어가 어떻고 왈가왈부하는 건 그저 모든 상황을 한국식으로만 보면서 생긴 해프닝에 불과하며 마치 한국인은 세계의 모든 나라의 언어를 습득해서 상황에 맞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썩어빠진) 글로벌주의를 주창하는 것에 불과하다. 기자라는 사람이 '니 하오'와 '니 하오 마'에 대한 이해도 없으면서 키보드질을 했다는 것이 일차적인 문제긴 하겠지만.



* 니 하오-你好는 일반적으로 "안녕?" 또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과 같다.
* 니 하오 마?-你好吗?는 일반적으로 "잘 지냈어?"  또는 "잘 지내셨어요?"라는 인사말과 같다.
* 그렇기 때문에 사실 이영애가 후진타오에게 니 하오라고 하던 니 하오 마?라고 하던 문제될 건 없다. 만약 경어를 쓰려고 했으면 닌 하오, 닌 하오 마?라고 했어야겠지. 하지만 굳이 닌 하오, 닌 하오 마?라고 하지 않아도 외국인이 그렇게 인사를 하면 '결례'를 들먹일 정도는 아니다.

2006년 1월 13일 금요일

오해와 진심

말(言)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나도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또한
상대방에게 위안과 행복을 줄 수 있고
나도 위안과 행복을 받을 수 있다.


내용은 옳지만
말하는 방법이 썩 좋지 않다.
내용은 그저그렇지만
방법만으론 별 문제없이 지나갈 수 있다.


사람들과 맞춰 사는 방법이 있고
굳건히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는 방법이 있다.
두 가지 모두 함께 병행이 가능하지만
분명 둘 중 하나는 점점 약해질 수 있다.


오해는 진심으로 풀 수 있지만
진심은 쉽게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지금은 틀리지만 나중엔 옳다고 느낄 수 있다.
지금 옳아도 계속 틀릴 수도 있다.


한 발을 떼면 넘어지지 않게 다른 한 발을 떼어야 한다.

2005년 11월 28일 월요일

글과 말에 대한 스치는 단상.

어디선가 읽었다고 소개 한 문장 하나.


"너희 중 죄 없는 자, 내게 돌을 던지라"고 예수가 말했다지만, 그거 요즘 말로 바꾸면 "잔말말고 입 닥치샘" 아닌가요?



정말 세상도, 생각도 많이 바뀌긴 했다.


사실 저 위 글을 읽는 순간 나도 피식거리긴 했지만 다른 측면으로 생각을 해보게 된다. 우리가 접하고 있는 수 많은 지식, 금언, 명언들, 특히 선각자들(석가모니, 하나님, 예수, 소태산, 성모 마리아, 노자, 공자, 맹자, 강증산 등등;이상 무순위)이 말한 걸 모아놨다고 일컬어지는 소위 '경전'에 등장하는 명문장들에 대해 많은 이들(나를 포함)은 오해를 하기 쉽상이다. 왜냐하면 말과 생각이라는 건 그 때 당시의 사회상황, 역사적 지점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걸 지금 현대생활에서 풀어내려고 하면 늘 앞뒤가 안맞고 아전인수격으로 곡해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가령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라고 하는 말이 있다고 하자. 그 말을 신봉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이런저런 이유와 변명을 들어가며 거짓말을 한다. 그렇다면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따르는 게 옳은가? 문제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라는 말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한 말이었는지가 중요하다. 그런 상황적 사실이 실종된 상태에서는 단지 '말(혹은 글)'일 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 많은 이들이 선지자들의 한(쓴) 말(글)에 '토'를 달 때는 꼭 개인의 실명을 밝히고 '주석'을 달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원래의 뜻과 자신의 뜻이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고 나중에 보는 이들이 원문을 읽고 난 후 자신의 글을 읽기 원했으며 이를 통한 자연스러운 토론, 토의 과정을 거쳐 보다 완성된 입체적인 '말과 글'의 함의가 드러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몇몇 경전을 제외하고는 당사자 본인이 직접 구술하고 적은 내용도 아니다. 제자들이나 직접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말과 글을 한데 모아 편집한 것일 뿐이다. (노자 도덕경이 대표적인 예다.) 그렇다면 이런 경전들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어떤 식으로든 시대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듬어지고 걸러진 내용들이기 때문에 중요한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글을 글로만 믿고, 말을 말 자체로만 믿어버릴 때 문제가 생긴다. 그 글과 말 사이의 행간에 숨겨져있는 참 뜻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누리꾼들의 살벌한 답글들이나 '우르르' 몰려다니며 설전을 벌이는 모습들에서 이런 폐해들을 느끼곤 한다.)


세상도 변하고 사고도 변하더라도 성현들의 말과 글이 담긴 참 뜻은 변하지 않는다.


변명같지만 내가 한 말과 글은 변할 것이다. 아직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내 모습은 말과 글을 토해내는 당시의 참 뜻은 그 글과 말에 오롯이 담겨있을 테지만 그 이후에 반복되는, 번복되는 말과 글에는 내가 살아가는 삶의 (나름대로) 치열함과 열정이 담겨지길, 보다 더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도록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2005년 8월 20일 토요일

말.

하지 못한 말,
하고 싶었던 말,
할 수 없었던 말,
해야 했던 말,

그렇게 수 많은 말들은
어떻게서든

가슴을 할퀴고
기쁨을 주고
한(恨)을 남기고
깊은 이해를 준다.

다시 들을 수 없는 말,
다시 할 수 없는 말,

언젠가 기회가 오면 하리라 벼르고
그래도 기회가 되지 않으면 속에서 앓아 풀고
조금 더 깊은 과거로 돌아간다.

여전히 아쉬운 사람,
여전히 서글픈 내 삶,

잠깐 동구 밖에 다녀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