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와 소통이 되는 관계. 그건 반드시 같은 목표와 같은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되는 관계가 아니다. 자신과 완벽하게 다른 상대와도 대화를 할 수 있고 소통을 할 수 있는 관계, 그것이 대화와 소통이 되는 관계다. 이는 자신과 상대방을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가능하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하는데 주저하고 대면하기 싫은 부분들은 애써 피하고 외면한다. 게다가 상대방의 장점은 비하하고 약점은 침소봉대 해 비난한다. 대화를 핑계로 우열를 가르고 소통을 핑계로 배척과 단절을 도모한다. 최소한의 대화와 소통이 되는 관계, 사회에서는 그 어떤 일도 실현가능하다.
2009년 8월 20일 목요일
2009년 3월 27일 금요일
임창용, 공무원과 월급, 고래의 노래, 새학기 증후군
- 재밌고, 고개가 끄덕여지고, 여러 면을 생각할 수 있는 임창용을 위한 변명 ….. 글 내용 중 한 귀절 '태어나지 않았으면, 죽지도 않았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세밀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결과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임창용, WBC, 결과, 태어나지 않았으면 죽지도 않았다)2009-03-27 13:41:25
- 블로그에 공무원 월급을 공개한 시장… 일본큐슈 아쿠네市에서 일어난 상황. 부럽다. 공무원의 월급을 낱낱히 공개한다는 걸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을지언정 난 공개에 찬성한다. 공무원의 월급은 국민 모두의 세금으로 지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공무원, 월급, 공개, 일본, 큐슈, 아쿠네)2009-03-27 13:43:52
- 정치인을 포함한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누구나 기피해야 할 지극히 투명하고 힘든 직업이 되어야 한다. 얼렁뚱땅 철밥통을 꿰차고 앉을만한 직업이 아니라 정말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싶은 사람만이 자원해서 업무를 수행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공무원, 철밥통, 봉사, 자원)2009-03-27 13:45:48
- 고래의 노래는 무척 감동적이다. 호주의 광고라는데 마지막 문구가 가슴을 울린다. 'When it comes to comunication, Anything is possible : 소통이 되는 순간, 무엇이든 가능하다' 소통없는 세상에서 산다는 건 얼마나 외롭고 힘든가.(Whale song, 호주, 광고, 소통)2009-03-27 14:29:44
- 10세 미만 아이들의 “새학기 증후군”, 복통을 호소하여 꾀병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실은 학업, 학원, 과제로 생긴 스트레스성 복통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은 '애들'을 잡는 나라임에 틀림없다.(새학기 증후군, 스트레스, 복통)2009-03-27 21:37:13
이 글은 자유인님의 2009년 3월 27일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2009년 3월 3일 화요일
미디어법안의 폐해를 막아낼 수 있을까?
미디어법안은 조중동, 삼성 등의 대기업 또 한나라당, 보수진영(또는 신자유주의)에서는 오랫동안 지금과 같은 미디어법안이 통과가 되어 이 나라의 자신들의 공화국으로 만들고 싶어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자신들이 무엇을 하던 딴지걸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큰 힘이 되어줄 것은 다름아닌 언론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있다한들 정상적인 저널리즘이 존재하는 세상이라면 재산과 권좌는 언젠가 흔들리기 마련이고 자주 흔들리다 보면 모래성처럼 흔적도 없이 무너질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불안하다. 검찰이나 그 밖의 힘있는 자들이 알아서 편이 되주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일반인들, 지식인들, 언론인들이 진실을 전달하고 진실을 폭로하기 시작하면 다수의 대중이 움직이게 될 테고 그 다수의 대중이 원하는 걸 해주지 못할 경우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퇴출당하기 쉽상이며 정치인들이 물갈이가 되면 결국 그들과 함께 공생/기생하던 재벌이던 모종의 권력들 역시 힘 받기가 버거워진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미 꽤 많은 보수신문, 보수권력, 대재벌(+친일파, 뉴라이트)로부터 의식개조를 당했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상당부분 따라가 주고 있다지만 이조차 언젠가 진실이 드러나면, (그들에겐) 별 볼 일 없이 보이던 대중들이 의견을 모으고, 의견을 낼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지금껏 하지 못했던 것을 이루고자 '미디어법안'이나 '언론장악'이나 닥치는 대로 해낼 가능성이 많다.
경우에 따라 절대로 틈을 보여서는 안되기도 하고 때론 조금씩 틈을 넓혀가야 한다. 이건 진보든 보수든, 우파든 좌파든 모두 똑같다. 또한 누가 말을 먼저 꺼내느냐, 즉 선빵이 중요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대부분 그 선빵은 위협용으로만 쓰일 확률이 많기 때문에 그 다음 어떻게 대응할지를 고민하는데 시간을 더 할애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한나라당은 조금씩 틈을 넓혀가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사이버모욕법, 마스크착용 금지법 등을 시중에 흘리기 시작한 것을 필두로 더 나아가 '미디어법안'을 막무가내로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 이미 선빵을 날렸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언론', '미디어'에 관한한 보수진영에게 '절대' 틈을 보여서는 안될 영역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들이 이따위 법안을 내놓아도 경제만 살린다면, 일자리만 늘린다면 별 반항없이 그들의 의견을 따를 대중들이 대다수기 때문에 '감히' 선빵을 날릴 수 있었다. 이 땅의 '임금'이란 사람도 보수(라기보다는 '무한경쟁무조건올인삽질로애국주의자(者)兼모두가시장주의자(者)')였으니 뭘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있을까.
사실 생각해보면 MB정권이 1년 정도를 보내면서 해볼 수 있는 '선빵'은 다 날려보지 않았나 싶다.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금씩 틈을 넓혀 온 셈인데 그 '선빵'에 제대로 반응을 보였던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쇠고기'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나머지 '실험'들은 모두 양측의 팽팽한 대립(달콤한 이익과 힘없는 대안)에 맞섰는데 오히려 MB를 지지하는 측이 더 넓고 많이 포진되어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 그들은 용감하게도 '언론도 한 번 건드려보자'는 속셈으로 선빵을 날렸는데 의외로 반항이 없다. MBC 따위나 한겨레, 경향 따위가 반항을 하지만 그들은 이미 우습게도 '빨갱이'정도로 낙인이 찍혔으니 말빨이 먹힐 리 만무하지 않은가. 게다가 문제는 그들의 '선빵'에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들은 속수무책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야당'을 (부득이) 자청하는 자들도 입에 무는 건 '국민'이고 속에 담는 건 '잇속'일텐데 미디어법안, 언론악법이 어떻게 되든 별 관심이 없었을 확률이 많다. 다만 어떻게든 이번 기회를 표심 얻는 기회로 삼고자, 자신들의 발언권을 좀 더 확보하고자 하는데만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늘 '굴욕적인 협상을 했네, 어쩌네' 하며 우는 소리 따위는 할 수 없는 거다. 정말 '언론악법'이고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 법안이라고 판단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지시켜야 했고 그 이전에 철저히 '대비'라는 걸 했어야 했다.
암튼, 절대로 틈을 열어줘서는 안되는 부분에 틈을 열어줬으니 그 틈은 방죽에 금이 간 것처럼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올 확률이 높다. 처음에 틈을 만들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그 틈이 확보되면, 최전선이 형성이 되고나면 그 이후부터는 '그냥 간다.' 삼성(과 같은 재벌들)도 권력과 처음 동침하기가 어려웠지 일단 동침을 하고 난 후에는 상대의 욕구에 맞게 대응해주면서 원하는 '짓'을 맘대로 할 수 있게 된 걸 보면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득권과 대항해 싸움을 해보건 돌팔매질이라도 해보려면 자금이 필요한데 나름 괜찮은 언론매체라는 것들은 조금만 튀는 행동을 하면 바로 자금줄(광고)이 끊기게 되고 개인들은 자본논리, 현실논리 앞에 바로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다. 그건 대한민국의 자본시장이라는 게 너무너무 작아서 생기는 슬픔이자 현실이다. 자본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면 시스템을 활용하는 수 밖에 없는데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는 자들은 위에서 말한 '그들'이 대부분이니 그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확실히 '투표'를 하는 것과 어떻게든 '담론'을 만들어내는 것 뿐이다. 서로 싸우고 이간질하고 비난하는 게 아니라 (설령 부족한 게 있더라도) '맞장구'도 쳐주고 '보안'도 해주고 '대안'도 제시하면서 사이버 공간이던 현실 공간이던 '담론'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4년이 문제가 아니라 10년, 20년 정도는 별다른 꿈/희망 꾸지 말고 살아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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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20일 금요일
소통의례
소통, 그 멀고도 험난한 과정. 하지만 꼭 지나쳐야 하는 통과의례.
오히려 소통이 되지 않은 상태로 따로라면 더 편할 수 있다.
보기 좋은 한 판의 형식적 연극을 하는 것보단
걸죽하고 끈적하지만 숨 냄새 엉키는 삶이 되게 하는 게 낫다.
비록 힘들고 또 힘들지라도 삶은 현재로만 읽히는 단문이 아닌
오래두고 곱씹으며 읽어야 할 서사기 때문에.
자신감 결여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잘 보여주는 프리즘이다.
사실 투과시키지도 못하면서 고고한 척 해왔던,
흐리멍텅한 프리즘을 안고 우쭐대진 않았는지 흘겨 돌아본다.
소통에 머리, 마음 모두 뒤집어 탈탈 털어 살펴보다가
문득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몇 가지나 될까,
두렵다.
오히려 소통이 되지 않은 상태로 따로라면 더 편할 수 있다.
보기 좋은 한 판의 형식적 연극을 하는 것보단
걸죽하고 끈적하지만 숨 냄새 엉키는 삶이 되게 하는 게 낫다.
비록 힘들고 또 힘들지라도 삶은 현재로만 읽히는 단문이 아닌
오래두고 곱씹으며 읽어야 할 서사기 때문에.
자신감 결여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잘 보여주는 프리즘이다.
사실 투과시키지도 못하면서 고고한 척 해왔던,
흐리멍텅한 프리즘을 안고 우쭐대진 않았는지 흘겨 돌아본다.
소통에 머리, 마음 모두 뒤집어 탈탈 털어 살펴보다가
문득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몇 가지나 될까,
두렵다.
2006년 10월 20일 금요일
나의 행위, 작업 그 모든 것의 이유.
아는 형님 홈페이지 자기 소개란에서 이런 글을 봤다.
형님은 글을 참 맛깔나게 쓴다. 그의 소망이 담긴 글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난 형님의 글을 읽으면서 여러번 감동을 받거나 눈물을 찔끔거린 적이 있었다. 문득, 내가 만드는 작품, 내가 쓰는 글, 내가 하는 모든 행위들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너무 '투쟁'적이진 않았는지, 너무 '비겁'하게 숨기고 있지 않았는지, 너무 '엄숙'하진 않았는지, 너무 '메마른' 감정이진 않았는지...타인을 들여다 볼 때, 그리고 자주 나를 들여다 볼 때 너무 닫힌 사고와 시선으로 대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본다.
따뜻한 시선은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법이고 따뜻한 마음은 따뜻한 시선을 통해 사물을, 사람을, 세상을 바라볼 때만이 형성된다. 아픈 곳을 도려내고 들춰내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지만 아픈 곳을 어루만지면서도 충분히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어릴 적 배가 아프면 굳이 억지로 약을 먹이기 전에 어머니가 배를 쓰다듬으며 어린 아이를 어르고 달래 아픔을 멈추게 했던 것 처럼.
한 때 세상이 빨리 변화해서 보다 나은 삶을 살아내길 갈구한 적이 있었다. 물론 현재도 참세상이 오기 위해 시간 싸움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전에 나를 살피고 주변을 살피며 하나하나 감동을 담아낼 수 있는 몸짓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다. 울면서도, 웃으면서도, 감동을 받으면서도 충분히 세상과 소통하고 사람과 소통하는 행위, 작업이 된다면 나 역시 더 바랄나위가 없겠다. 내 행위, 작업이 그런 일련의 소통을 위한 창구가 되면 참 좋겠다.
감았던 눈을 다시 뜨고, 닫았던 감정의 문을 다시 열게 되길. 스스로의 노력과 변화가 쉼 없이 계속되길. 그렇게 바라고 또 바랠 뿐이다.
글을 쓰는 순간 나에겐 세 가지 소망이 있다. 누군가가 내 글을 읽으면서 울거나, 웃거나, 감동을 받거나... 그렇게만 된다면... 그럴수만 있다면...
형님은 글을 참 맛깔나게 쓴다. 그의 소망이 담긴 글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난 형님의 글을 읽으면서 여러번 감동을 받거나 눈물을 찔끔거린 적이 있었다. 문득, 내가 만드는 작품, 내가 쓰는 글, 내가 하는 모든 행위들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너무 '투쟁'적이진 않았는지, 너무 '비겁'하게 숨기고 있지 않았는지, 너무 '엄숙'하진 않았는지, 너무 '메마른' 감정이진 않았는지...타인을 들여다 볼 때, 그리고 자주 나를 들여다 볼 때 너무 닫힌 사고와 시선으로 대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본다.
따뜻한 시선은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법이고 따뜻한 마음은 따뜻한 시선을 통해 사물을, 사람을, 세상을 바라볼 때만이 형성된다. 아픈 곳을 도려내고 들춰내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지만 아픈 곳을 어루만지면서도 충분히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어릴 적 배가 아프면 굳이 억지로 약을 먹이기 전에 어머니가 배를 쓰다듬으며 어린 아이를 어르고 달래 아픔을 멈추게 했던 것 처럼.
한 때 세상이 빨리 변화해서 보다 나은 삶을 살아내길 갈구한 적이 있었다. 물론 현재도 참세상이 오기 위해 시간 싸움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전에 나를 살피고 주변을 살피며 하나하나 감동을 담아낼 수 있는 몸짓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다. 울면서도, 웃으면서도, 감동을 받으면서도 충분히 세상과 소통하고 사람과 소통하는 행위, 작업이 된다면 나 역시 더 바랄나위가 없겠다. 내 행위, 작업이 그런 일련의 소통을 위한 창구가 되면 참 좋겠다.
감았던 눈을 다시 뜨고, 닫았던 감정의 문을 다시 열게 되길. 스스로의 노력과 변화가 쉼 없이 계속되길. 그렇게 바라고 또 바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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