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준혁은 왜 최고의 타자인가
최민규 기자 / 2006-06-13
한국 프로야구에는 여러 미스터리가 있다. 왜 삼성은 20년 동안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했을까? 왜 LG 타자들은 볼넷 고르기를 싫어할까? 왜 롯데에는 마무리 투수가 없었을까?(4년 뒤에 창단한 한화보다 통산 100세이브가 적다) 그리고, 왜 양준혁(37·삼성)은 과소평가될까?
양준혁은 한국 프로야구가 낳은 사상 최고의 타자다. 하지만 그에 걸맞은 평가를 받은 적은 거의 없다. 실제로 양준혁은 한 번도 MVP로 뽑히지 못했다.
지난해까지 양준혁의 통산 타율은 3할1푼9리로 장효조(0.331)에 이은 역대 2위다. 그러나 장효조는 961경기에만 뛰었다. 양준혁은 그 1.7배인 1,626경기다. 통산 타율 3할 이상인 타자 8명 가운데 양준혁 다음 경기 출전 기록은 장성호(0.310)의 1,192경기다.
양준혁은 지난해까지 통산 최다 안타, 2루타, 득점, 사사구 기록을 갖고 있었다. 올해에는 루타, 타점, 4구 부문에서 통산 1위로 올라섰다. 6월 1일 현재 통산 홈런수는 303개(3위). 올해 안에 이승엽(324개)을 넘어서고, 늦어도 내년이면 장종훈(340개)을 2위로 내려앉힐 것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발간하는 <야구연감>은 통산 타격 기록을 15개 부문에서 집계한다. 불명예 기록인 병살타, 삼진을 뺀 13개 부문 중에서 양준혁은 8개 부문 타이틀을 손안에 쥘 전망이다. 나머지 5개는 '질보다 양'인 경기 출전과 타수, '타자의 능력'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3루타, 도루, 몸에맞는공이다.
1960년대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로 꼽히는 샌디 코우팩스는 “위대한 선수는 몇 년 반짝이 아니라 야구 경력 전체에서 정상을 달려야 한다”며 자신을 역대 최고 투수 반열에 올려놓기를 주저한 적이 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코우팩스의 지론을 양준혁만큼 제대로 실천한 타자는 없다. 양준혁은 지난해까지 13년 선수 생활 동안 11차례나 3할 타율(300타수 이상 기준) 이상을 기록했다. 프로 데뷔 동기생이자 최대 라이벌이랄 수 있는 이종범의 기록은 5시즌이다. 1990년대 양준혁과 나란히 왼손 거포로 이름을 떨쳤던 김기태는 7시즌. ‘타격의 달인’ 장효조는 6시즌. 1980년대 무적함대 해태의 강타자 김성한과 김종모는 각각 4시즌이다.
타자의 기량은 크게 정확한 타격(타율), 장타력(2루타, 홈런, 장타율), 출루 능력(출루율, 4구) 등 세 가지로 평가된다. 두 가지를 꼽으라면 출루 능력과 장타력이다.
첫번째 이유. 야구는 아웃카운트 27개로 끝나는 경기다. 따라서 좋은 타자는 ‘아웃을 적게 당하는 타자’다. 당연한 말이지만 출루율이 높은 타자는 아웃을 적게 당한다. 두번째 이유. 타자의 임무는 점수를 내는 것이다. 득점은 베이스를 밟은 주자가 2, 3루를 거쳐 홈으로 들어오는 과정이다. 장타력이 높은 타자는 주자를 홈과 더 가까운 베이스로 보낼 수 있다. 통계적으로 득점과 가장 상관계수가 높은 타격 기록이 출루율과 장타율이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장타력에 관한 한 지존은 이승엽이다. 56홈런 기록과 함께 통산 장타율 6할1푼4리를 자랑한다. 양준혁의 기록은 5할4푼5리. 이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다른 타자들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현역 최고 거포로 꼽히는 심정수의 통산 기록은 5할4푼4리, 이만수는 5할1푼9리, 김성한은 4할7푼1리다.
출루 능력에서는 양준혁을 따를 선수가 없다. 13년 동안 양준혁이 출루율 랭킹 5위 안에 들지 못한 시즌은 3번뿐이다. 양준혁은 자신의 볼넷 수와 출루율 기록에 애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얼마 전까지 출루율은 국내야구계에서 ‘쓸모없는 타이틀’로 폄하된 게 현실이었다.
출루율과 장타율을 더한 OPS는 타자 능력을 재는 간편한 수치로 메이저리그에서는 일반화돼 있다. 지난해까지 양준혁의 통산 OPS는 0.964. 메이저리그 130년 역사에서 13년 이상 뛰며 OPS 0.964 이상을 기록한 타자는 모두 몇 명일까? 정확하게 15명밖에 없다. 베이브 루스, 테드 윌리엄스, 루 게릭, 배리 본즈, 지미 팍스, 미키 맨틀, 조 디마지오, 스탠 뮤지얼…. 양준혁은 과연 이들이 현역 시절 누렸던 찬사를 받아왔을까?
양준혁이 실력과 성적만큼의 대접을 받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그가 가장 오래 몸담았던 삼성은 2002년까지 우승을 하지 못했다. 선수협 파동 뒤 두 차례 이적을 감수한 것도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한 번도 MVP를 타지 못한 것도 이유다. 그러나 ‘기록에 눈이 먼’ 기자라면 적어도 1993년과 1997년 두 시즌에는 MVP 투표용지에 양준혁의 이름을 적었을 것이다. 대구구장이 타자들에게 유리하다는 점을 들어 양준혁을 평가절하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삼성에서 뛴 최근 5시즌 동안 양준혁의 홈경기 성적은 타율 3할1푼5리, 73홈런, 원정에서는 타율 3할6리, 72홈런이었다.
'국제대회에서 약하다'도 양준혁을 따라다닌 꼬리표다. 1995년 한일 슈퍼게임에서 양준혁은 11타수 1안타에 그쳤다. 1999년 대회에서는 7타수 2안타. 도합 18타수 3안타는 부끄러운 전적이다. 그러나 2004년 미일 올스타전에서 17타수 3안타를 친 미겔 카브레라를 '국제 경기에 약한 선수'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야구는 아직 국제화된 스포츠가 아니며, 양준혁은 프로 입단 뒤 두 차례 슈퍼게임과 1999년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제외하고는 대표로 뽑힌 적이 없다.
시대를 탓해야 할 수도 있다. 선수 생활 초기 그의 옆에는 이종범이 있었다. 이종범은 화려한 유격수 수비와 한 시즌 도루 기록(84개)을 세운 빠른 발을 갖고 있었다. ‘타자’가 아닌 ‘선수’로서는 이종범이 더 뛰어났을 수도 있다. 1997년부터는 후배 이승엽이 등장했다. 이승엽은 그해를 시작으로 MVP 트로피를 다섯 번 가져갔다.
확실히 양준혁은 이종범처럼 화려한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이승엽처럼 열광을 불러일으킨 적도 없다. 그러나 양준혁은 1993년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묵묵히 한국 프로야구를 지키고 있다. 13년 전 ‘괴물 신인’ 양준혁은 올해도 최고 타자다.
양준혁은 지난해 장종훈으로부터 ‘기록의 사나이’라는 호칭을 대물림받았다. 그가 도전하는 또다른 기록이 있다. 바로 나이다. 37세 이후 타율 3할 이상을 기록한 선수는 원년의 백인천(당시 39세)과 2000년 외국인선수 훌리오 프랑코(당시 42세) 2명뿐. 20홈런 이상을 때린 선수는 프랑코가 유일했다. 백인천과 프랑코는 일본 프로야구와 메이저리그에서 타격왕을 지냈다. 한국의 타격왕도 불혹의 나이에 전성기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