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야구를 꽤 잘했던 적이 있었다. 해태 타이거즈의 유니폼이 탐났던 적이 있었고 선수들의 코팅된 조그만 사진들을 모았던 적이 있었다. 아버님이 사준 야구 글러브를 끼고 동생과 공 주고받기를 한 적도 있었다.(형이란 이유로 늘 내가 투수를 했었지만... 미안, 동생). 친구 중에 야구부 선수가 있어 연습하는 장면을 구경하기도 했다. 정식 야구 시합을 해본 적은 없지만 지금도 실내 야구 연습장 근처를 지날 때면 몸이 근질거린다.
"월드컵 시즌에 왠 야구 얘기냐고?"
'sports2.0'에 들려 어제 한국전 내용이며 여러 축구관련 기사를 읽는 와중에 눈에 확 들어와 박힌 야구관련 기사가 몇 개가 있어 소개하려고 한다. 야구관련 기사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양준혁"이란 야구 선수에 대한 심층 분석 기사인데 읽다보니 내용이 참 좋다. 특히 "양준혁"이란 인물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어서 좋다. 그저 "양준혁"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건 '괴물신인'이었고 '거포', '트레이드 불운', '삼성' 등에 관련된 단순한 내용 뿐이었는데 기사를 접하고 나서 "양준혁"이란 사람을 알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월드컵 때문에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허락된다면 링크 따라서 기사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기사1 : 양준혁 스토리 1969~1999 - 푸른 피의 정복자
기사2 : 양준혁의 진심 - 나의 꿈, 야구를 오래 하고 싶다
기사3 : 양준혁의 숨겨왔던 비기 - 전격 공개, 양준혁의 '양신타법'
기사4 : 기록으로 본 오해와 진실 - 양준혁은 왜 최고의 타자인가
출처 : sports2.0
"양준혁" 참 멋진 선수인 것 같다. 이런 선수가 많아질 수록 스포츠는 국가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참 이름을 되찾게 되지 않을까 싶다. 또 14년 동안 단 2시즌 부진했다니 정말 땀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선수가 아닌가 싶다. 그가 이승엽을 칭찬하는데도 인색하지 않은 걸 보면 스포츠 선수로서, 한 개인으로서 잘 살아온 게 아닌가 싶다. "야구를 존경하는 선수 양준혁" 그가 앞으로 갈아치우게 될 기록도 기록이지만 그의 스포츠 정신과 삶의 자세를 배우고 닮아가는 많은 후배 선수들이 생겨나길.
아래는 위 링크가 끊어져 부득이 기사를 스크랩함.(문제시 바로 삭제)
푸른 피의 정복자
푸른 피의 정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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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7세인 삼성의 지명타자는 자신이 장종훈(한화 코치)이 종전에 보유하고 있던 통산 3,172루타 기록을 깨뜨린 주인공이란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눈치였다. 오히려 지금까지 그가 기록한 통산 1,857개의 안타 가운데 그저 하나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장에 있던 삼성 기록원 허삼영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이 역사적인 순간을 어떻게든 기념하고 싶었다. 먼저 특별히 준비한 형광색 펜으로 기록지에 ‘좌전안타’를 표시하며 별표를 그렸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런, 내가 다시 이런 기록을 체크하려면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지?"
한편, 구장 전광판을 통해서야 자신이 통산 최다 루타 신기록의 주인공임을 확인한 양준혁도 잠시 회한에 잠겼다. 눈이 내린 언덕에 새겨진 자신의 발자국을 따라가듯 하나둘 숨겨왔던 추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순간, 양준혁은 뭔가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 "여기까지 오는데 정확히 14년이 걸렸군." 양준혁은 스스로를 격려하듯 짧게 되뇌였다. 그러나 실제로 양준혁이 2006년 5월 23일의 1루 베이스를 밟기까지 걸린 시간은 14년이 아니라 27년이었다.
양준혁이 배트를 손에 쥐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다. 평범한 가정에서 2남 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처음 야구장을 찾았다. “아버지는 야구라면 못말리게 좋아하는 분이셨다”. 양준혁의 회상처럼 아버지 양철식씨는 야구광이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야구에 대한 꿈을 동생과 조카에게 전수한 사람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양준혁의 사촌형은 과거 삼성의 잠수함 투수로 유명했던 양일환(45. 현 삼성 코치). 그러나 야구에 대한 첫인상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어째서 다 큰 어른들이 주먹만한 하얀 공을 두고 그토록 정신없이 뛰어다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야구장을 찾으면 찾을수록 어린 양준혁에게는 야구장이 더없이 편안한 장소가 됐다. 결국 양준혁은 마음을 굳힌다. 초등학교 3학년에 들어설 무렵. 양준혁은 자신이 얼마나 야구를 사랑하는지 고백한다. 부모는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가난하지만 나무랄 데 없이 자라는 막내아들의 다부진 표현에 감동을 받기까지 한다.
야구는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스포츠이지만 누구나 하기는 어려운, 돈이 많이 드는 운동이었다. 글러브도 사야 하고 배트도 구입해야 하며, 스파이크도 준비해야 한다. 유니폼은 말할 것도 없고 코치의 월급은 학부모들이 거둬야 했다. 한국에서 능력만으로 운동선수가 되기는 배트로 노를 저어 태평양을 횡단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부모는 걱정하기 시작했다. 혹여 운동을 시키고도 뒷받침이 없어 막내아들이 따돌림이라도 받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었다. 아버지는 아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이때 어머니가 큰 결심을 한다. 막내아들이 그토록 원한다면 무슨 희생을 해서라도 도와주겠다고.
이듬해 양준혁은 야구부가 있는 대구 남도초등학교로 전학한다. 꼬마 야구팬 양준혁이 어엿한 자세를 갖춘 야구소년으로 발전하는 순간이었다.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 양준혁의 눈빛은 충혈된 달처럼 변한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어머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듯 내 어머니도 갖은 고생을 하셨다. 어렵게 시작한 야구인 만큼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했다."
천부적인 체격 조건과 글러브가 너덜거릴 정도로 훈련을 거듭한 양준혁은 남도초등학교 시절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기도 한다. 경운중학교에 진학했을 때는 투수로서 더 빛났다. 그러나 팀의 유일한 투수였던 만큼 몸에 이상이 생겼다. 팔꿈치에 뼛조각이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 투수의 팔에 뼛조각이 돈다는 의미는 에펠탑 하단부에 박혀있는 모든 너트들이 풀린 것보다 좋지 않은 징후였다. 145g의 야구공이 145kg의 바벨처럼 느껴졌다. 양준혁은 고통을 호소하다 이내 투수를 포기한다.
그가 중학생이 되어서야 출범한 프로야구는 전국 야구소년들의 로망이었다. 야구소년 양준혁은 삼성의 푸른 유니폼을 바라볼 때마다 반드시 자신도 푸른 유니폼의 주인공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심지어는 자신의 피가 푸른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타자로 전향한 대구상고 시절, 그는 동기생 김태한, 동봉철과 함께 힘을 합쳐 분전을 거듭한다.
"양준혁이라는 인물이 전국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건 영남대 시절부터였다." 신명철(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의 회고다. 양준혁은 서울의 유명 대학을 마다하고 대구 잔류를 고집한다. 이때부터 타격에 능한 선수로 이름을 알린다.
"양준혁에 대한 오해 가운데 하나가 주력과 수비력이다. 영남대 시절, 그는 기동력 있는 타자이자 넓은 수비 범위를 책임지는 수비수였다. 프로에서 20홈런-20도루를 세 번이나 기록한 것도 우연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다. 특히나 1루 수비는 큰 키를 적절히 이용했는데 수준급이었다." 영남대 2학년생이던 양준혁을 처음 국가대표로 뽑았던 김정택(국군체육부대 감독)의 회상이다
영남대를 졸업할 무렵인 1991년. 양준혁은 88학번 선수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유망주였다. 포도밭의 오렌지처럼 유독 빛이 나는 그를 삼성이 가만 놔둘 리 없었다. 당시 야구계는 삼성이 1차지명선수로 양준혁을 선택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본인도 의심하지 않았다. 주력과 파워 모두를 갖춘 그는 삼성의 즉시 전력감이었다. 변수가 있다면 대구상고 동기생이던 계명대 투수 김태한 정도. 시속 145km를 웃도는 빠른 공을 뿌리는데다 왼손잡이인 김태한은 충분히 매력적인 선수였다. 그러나 약점이 장점보다 많았다. 제구력은 떨어졌고 결정구도 마땅찮았다. 제구력과 결정구가 없는 왼손 투수에게 빠른 공은 고작 태풍 속 우산 같은 존재였다. 누가 보나 양준혁이 1차지명에서 우위에 있었다. 양준혁은 자신의 등번호가 몇 번이면 어울릴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절친한 친구 김태한에게 미안한 감정마저 들었다.
1차지명이 있기 며칠 전. 삼성 프런트가 양준혁을 찾아왔다. 전날 악몽을 꿨던 양준혁은 어두운 프런트의 표정에 걱정이 됐다. 결국 악몽이 현실임을 알려주는 데 걸린 시간은 단 5분이었다. “1차지명이 어렵겠다고 하더라. 대신 김태한을 지명하겠다고 했다.” 순간, 그의 심장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양준혁이 꿈꾸던 1991년은 결코 이런 장면이 아니었다. 그는 삼성의 푸른색 유니폼을 입고 야구소년의 추억이 묻어있는 대구구장을 신나게 달리고 싶었다.
나의 꿈, 야구를 오래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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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 기록이 좋긴 하지만 아직까지 속단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126경기를 치러야 하는 정규시즌을 고려해야 한다. 이제 2회를 마친 상태다. 사실 홈런 25개나 타점 80개 따위보다는 팀의 우승이 중요하다.
올해 달라진 점이 많아 보인다. 특히 스윙폼이나 타격 스탠스에서도 변화가 보인다.
2006 시즌이 내게는 14번째 시즌이다. 신인들처럼 한꺼번에 변화를 주기는 어려운 일이다. 다만 달라진 점이 확실히 있긴 하다. 스윙폼이나 타격 스탠스에 변화를 준 건 사실이다.
'만세타법’에 변화를 준 것인가. 원래 오픈 스탠스였지 않나?
만세타법에서 작은 변화를 주긴 했다. 나는 야구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항상 오픈 스탠스를 유지했다. 타격을 할 때도 앞발을 잠시 투수 정면으로 향했다가 다시 오픈하는 방식을 고집했다. 일반적인 선수들은 오픈 스탠스를 유지하더라도 막상 타격을 할 때는 앞발을 안으로 들여놓지만 나는 반대였던 셈이다. 한창 때는 무릎이 살아있어 그게 가능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바깥쪽 공도 전에는 공략이 쉬웠는데 잘 맞지 않더라. 그래서 조금 변화를 줬다.
언론에는 매번 비밀이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나?
이건 비밀인데. (잠시 머뭇거리다) 앞발을 다른 선수들처럼 안쪽으로 넣고 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거의 모두 다리를 집어넣고 쳐서 별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난 한 시즌도 그렇게 쳐본 적이 없었다. 이게 그동안 비밀이라고 했던 변화의 핵심이다. 다른 선수들에게는 작은 부분이지만 내게는 큰 변화이자 모험이다.
앞발의 위치에 변화를 준 뒤 무엇이 달라졌나?
다리가 들어가니까 어깨도 들어가기 시작했다. 작년에는 어깨가 자꾸 벌어졌다. 이제는 어깨가 들어가니까 타격 밸런스가 조금씩 안정되는 기분이다.
달라진 게 또 있을 것 같은데.
코치들이나 기자들도 뭐가 바뀌긴 바뀌었는데 그게 뭔가 하는 표정이다.(웃음) 이 덕분에 테이크백도 짧아졌다. 예전에는 테이크백이 컸다. 특히나 작년 한창 좋지 않을 때는 테이크백이 더 컸다. 그러나 지금은 다리를 이동하면서 간결해졌다.
타격 자세가 자주 바뀌는 편이다. 모험을 하는 이유가 뭔가?
처음 야구를 시작할 때와 지금의 야구는 많은 변화가 있다. 1993년 프로에 입문했을 때까지도 한국 프로야구는 본격적인 성장에 들어서지 않고 있었다. 홈런 20개와 타율 3할이면 항상 톱을 달릴 수 있었다. 지금은 이승엽과 외국인 선수의 유입을 계기로 타격도 많이 바뀌었다. 기술도 옛날 생각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기술도 체력도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 역시 예전 생각만 하고 그대로 있으면 진보가 아니라 퇴보가 된다.
어느 야구팬이 한국 프로야구에서 개발한 최초 타격법이 바로 ‘만세타법’이라고 하더라. 만세타법도 그런 고민에서 나온 것인가?
그렇다. 2002년 처음으로 3할을 기록하지 못했다. 그때 퍼뜩 ‘아, 지금까지 해온 걸로는 안되겠구나’ 싶었다. 체력적으로도 그렇고 나이도 30대 중반에 접어드니까 젊었을 때랑 감이 다르더라. 한창 때는 배트가 정말 잘 돌아가지 않았나. 그때부터 실패를 거듭하면서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하루 아침에 될 문제인가. 그러다 정말 우연하게 예전 사진을 컴퓨터로 보게 됐다. 보니까 내가 한 팔을 놓으면서 마치 만세하는 자세처럼 타격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게 ‘만세타법’의 시작이었다.
타격법 고안이 힘들었을 텐데. 누가 도움을 주었나?
늘 스스로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타격에 있어서는 정말 독학생이지 않았나 싶다. 내가 타격을 배울 때 항상 듣던 말이 ‘가볍게 갖다 맞히라’는 거였다. 가볍게만 치면 홈런인데 뭐 그렇게 힘들게 타격을 하느냐는 말이었다. 그런데 말대로 가볍게 친다고 홈런이 되나? 그냥 가볍게 맞히기만 해서는 땅볼이다. 이때 혼자서 타격 메커니즘에 대해 고민했지만, 당시 내 생각을 이해해줄 타격 지도자는 없었다. 혼자 스스로 개발하고 터득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모델’로 삼은 선수라도 있지 않는가?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많이 봤다. 예전에는 메이저리그 중계가 없지 않았나. 해외에 나가면 무조건 비디오테이프를 많이 구입해왔다. 그걸 보면서 메이저리거들의 타격 자세를 연구했다. 자꾸 보고 연구하니까 공통점이 보이더라. 그들은 맞는 순간에 얼마나 임팩트를 줘 힘을 극대화하느냐에 관심 있어 보이더라. 그냥 갖다 맞히는 것이 아니라 힘을 줘 ‘팍팍’ 때리는 거다. 타격 자세는 방법의 문제지, 그것이 화두는 아니었다. 가까이는 국내 프로야구 외국인 선수였던 타이론 우즈를 봐라. 국내 선수들이랑 다르다. 굳이 인상적으로 본 선수가 있다면 켄 그리피 주니어였다.
일선 지도자들은 좋은 타격 자세가 훌륭한 기록으로 이어진다고 하는데.
고정관념이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지금은 선수의 개성과 스타일을 존중해주는 관점이 필요한 때다. 국내에선 유일하게 김용달(현대) 타격코치가 내 타격 자세를 이해해주는 편이다.
타격 자세 때문에 불이익도 많지 않았나?
내가 세운 기록이나 커리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가절하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내가 흘린 땀의 양과 고민의 깊이가 타격 자세 때문에 희석되는 것은 아쉽다.
그래도 주위에서 자꾸 뭐라고 하면 흔들렸을 법도 한데.
과거 백인천 감독이 특히 내 자세를 보며 '개폼이다, 개폼' 그랬다.(웃음) 승엽이랑 자꾸 비교하고. 그런데 내가 잘치니까 더이상 뭐라고 하지 않더라. 하지만 자꾸 그런 소리들을 하니 사실 나도 흔들렸다. 그러다 1995년인가 미국으로 전지훈련을 갔는데, 그때 다저스에 있는 코치 3명을 초빙했었다. 그 사람들이 타격지도를 해주며 하는 말이 "양준혁 치는 거 잘봐라. 이 사람이 치는 것처럼 쳐야 한다. 이게 교본이다". 국내와는 정반대였다. 그때 누가 뭐라 해도 내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잘하니까 주위에서 회춘이라고 하더라.
회춘이 돌아올 '회'자에 봄 '춘'자 아닌가?(웃음) 작년에는 정말 힘들었다. 야구는 어차피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나 역시 부진할 때가 있는 게 아닌가. 만약 작년처럼 올해도 부진했다면 나도 회춘이라는 말을 인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13시즌 동안 단 2시즌 부진했을 뿐이다. 타수로 치면 13타수 11안타를 쳤는데 그걸 보고 기록이 나쁘니까 "은퇴해라" "양준혁 한물갔다"는 식으로 말하면 그건 13시즌을 묵묵히 뛰어온 선수에게 서운한 소리다.
그렇다면 정작 작년 부진의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제 아무리 대타자라도 한 번씩 슬럼프가 오기 마련이다. 작년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더라. 배트가 '쫙쫙' 나와야 하는데 자꾸 중간에서 걸리는 기분이었다. 시즌 초부터 그랬다. ‘이거 올해는 잘안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작년에는 몸을 낮추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무엇이 잘되고 무엇이 안되는지 머릿속에 넣어두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라운드에서 뛰면서 정말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었던 적이 두 번 있었는데, 그게 바로 2000년과 작년이었다. 어쩌면 선배들이 말한 은퇴의 고비에 들어선 게 아닐까 싶었다.
그동안 미국이나 일본에서 '러브콜'이 있었을 법도 한데.
1997년인가 일본 프로야구팀 오릭스 블루웨이브(현 오릭스 버팔로스)에서 연락이 왔었다. 영입하고 싶다고. 그래서 오릭스 스카우트가 이 문제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담당 스카우트가 사망했다. 무슨 복잡한 문제에 연루돼 자살했다고 하는데 그 일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 뒤, 1999년 해태에 있을 때 메이저리그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한번 오라고 했다. 당시는 해태가 워낙 형편이 어려웠을 때다. 신원조회까지 들어왔다. 그런데 그때는 '꼭 해외에 나갈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내가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다 선수협이 한창이던 2001년 시즌이 끝나고 갑자기 FA가 됐다. 그해 타격왕(.355)도 하고 성적도 좋아서 안심을 했지만 선수협 주동으로 몰리는 바람에 아무도 오라는 팀이 없더라. 그때 이렇게 주저앉아서는 안된다고 다짐했다. 그러다 메이저리그로 눈을 돌렸다. 지금 최희섭 에이전트인 이치훈씨에게 급하게 의사를 타진했고 모 팀과 영입 문제를 논의했다.
그 팀이 어딘가?
뉴욕 메츠였다. 당시 FA 신분이라 괜히 몸값 올린다는 소리 듣기 싫어 조용히 진행했다.
성과는 있었나?
메츠에서 80만 달러를 제시했다. 그때 메츠에서 신조 츠요시가 뛰고 있었는데 메츠가 생각할 때 그보다 낫다는 결론을 내린 듯했다. 듣기로는 그쪽에서 삼진보다 볼넷 숫자가 훨씬 많다는 점에서 선구안에 높은 점수를 줬다고 한다.
구단 담합으로 오라는 팀도 없고 메츠에서 부른 조건도 나쁘지 않았는데 왜 가지 않았나?
첫번째는 어렵게 만든 선수협에서 내가 할 일이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내가 지금 미국에 가면 한국에서 다시는 야구를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만약 내가 메츠에서 부진했을 때 다시 한국에 돌아와 야구를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봤는데 절망적이었다. 이렇게 모두가 에워싸 나를 고립시키는데 과연 내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누가 반겨주기라도 하겠는가. 이종범이나 정민태는 돌아와도 갈 데가 있었지만 그때 상황에서 난 아니었다. 그래서 주저했다. 난 한국 프로야구를 동경하며 자란 세대이고, 나를 동경하며 자란 세대가 야구장에 있는데 낯선 이국땅에서 은퇴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FA 신분으로 삼성과 계약하지 않았나?
그때 모든 구단이 담합을 한 상황에서 김응용 사장(당시 삼성 감독)이 날 잡아야 한다고 나섰다. 그때 구단에서 매우 난처한 상황이었다. 담합을 깨면 배신 아닌가. 결국 구단 사장이 그룹 최고위층에게 말해 ‘OK’ 사인을 얻어냈다고 한다. 그때 최고위층에서 결정을 내려주지 않았으면 나는 매장되는 분위기였다. 당시나 지금이나 날 믿어준 삼성과 김응용 감독께 감사드린다.
일석에선 김응용 사장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했는데, 관계가 각별해 보인다.
원래 김응용 사장이 나처럼 덩치 큰 왼손타자를 좋아하신다.(웃음) 내가 또 할 때는 몸 아끼지 않고 열심히 하지 않나.(웃음)
베테랑인데도 1루까지 전력질주한다.
그게 몸에 뱄다. 안타를 기록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1루에 도착할 때까지 다리를 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메이저리그를 봐도 데릭 지터나 에이로드는 정말 열심히 뛰지 않나. 몇 억 달러를 받는 선수들도 그렇게 열심히 뛰는데 내가 어슬렁거리면 그건 부끄러운 일이다.
어느 팬은 양선수를 가리켜 ‘야구를 존경하는 선수’라고 하더라.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야구 자체가 ‘신’이라고 하더라. 베이브 루스나 루 게릭 같은 대선수들이 그 역사를 만들었다고 한다. 만약 메이저리그에서 선수가 열심히 뛰지 않으면 동료들이 ‘너는 어째서 야구를 모독하느냐’고 한단다. 한마디로 야구라는 신을 모독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 개념을 갖고 있더라. 하기야 그쪽은 루키 리그에서부터 그런 의식을 몸에 익히니까. 한국야구계도 반드시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라고 본다. 내가 야구를 존경하지 않으면 나를 존경하는 팬을 기대할 수 없다.
전격 공개, 양준혁의 '양신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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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5년이나 올해 모두 타격 스탠스는 '오픈 스탠스'. 달라진 차이점은 하나. 만세타법은 오픈 스탠스를 취하다 앞발을 투수 정면으로 슬쩍 옮겨놓은 후 다시 바깥쪽을 향한 상태에서 타격한다. 반면에 양신타법은 오픈 스탠스를 취하다 스트라이드 후 앞발을 홈플레이트 안쪽으로 집어넣은 상태에서 바로 타격에 들어간다. 대부분의 오픈 스탠스 선수들의 자세와 같다. 그러나 양준혁은 27년 동안 한 번도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2. 만세타법은 스탠스가 넓다. 하체의 힘을 최대한 이용하는데 유용한 폭이다. 그러나 양신타법은 스탠스를 좁혔다. 하체의 힘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 셈이다.
3. 임팩트 순간에 앞발 무릎을 의식적으로 튕겼고, 그러다 보니 앞발이 들렸다. 타구의 질은 좋아졌으나 자세가 무너지기 일쑤. 양신타법은 앞발을 들지 않으므로 사진처럼 발이 지면에 붙어있어 자세의 안정성이 높아졌다.
4. 넓은 스탠스에 의식적으로 앞발을 튕기려다 보니 무릎이 많이 접혀있다. 올해부터는 앞발 무릎을 의식적으로 굽히지 않으므로 타격 자세 조정에 도움이 됐다.
5. 작년에는 어깨가 자주 열렸다. 기존 타격 자세가 지닌 단점이었다. 올해는 타격시 앞발을 홈플레이트 안쪽으로 집어넣기 시작했고, 그 까닭에 어깨가 빨리 열리는 단점을 극복할 수 있었다.
6. 작년까지 양준혁이 사용하던 배트의 무게는 910g. 배리 본즈나 심정수가 사용하는 배트보다 무거웠다. 올해는 그보다 가벼운 840g 배트를 사용한다. 배트 스피드를 높이기 위해서다.
양준혁은 왜 최고의 타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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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까지 양준혁의 통산 타율은 3할1푼9리로 장효조(0.331)에 이은 역대 2위다. 그러나 장효조는 961경기에만 뛰었다. 양준혁은 그 1.7배인 1,626경기다. 통산 타율 3할 이상인 타자 8명 가운데 양준혁 다음 경기 출전 기록은 장성호(0.310)의 1,192경기다.
양준혁은 지난해까지 통산 최다 안타, 2루타, 득점, 사사구 기록을 갖고 있었다. 올해에는 루타, 타점, 4구 부문에서 통산 1위로 올라섰다. 6월 1일 현재 통산 홈런수는 303개(3위). 올해 안에 이승엽(324개)을 넘어서고, 늦어도 내년이면 장종훈(340개)을 2위로 내려앉힐 것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발간하는 <야구연감>은 통산 타격 기록을 15개 부문에서 집계한다. 불명예 기록인 병살타, 삼진을 뺀 13개 부문 중에서 양준혁은 8개 부문 타이틀을 손안에 쥘 전망이다. 나머지 5개는 '질보다 양'인 경기 출전과 타수, '타자의 능력'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3루타, 도루, 몸에맞는공이다.
1960년대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로 꼽히는 샌디 코우팩스는 “위대한 선수는 몇 년 반짝이 아니라 야구 경력 전체에서 정상을 달려야 한다”며 자신을 역대 최고 투수 반열에 올려놓기를 주저한 적이 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코우팩스의 지론을 양준혁만큼 제대로 실천한 타자는 없다. 양준혁은 지난해까지 13년 선수 생활 동안 11차례나 3할 타율(300타수 이상 기준) 이상을 기록했다. 프로 데뷔 동기생이자 최대 라이벌이랄 수 있는 이종범의 기록은 5시즌이다. 1990년대 양준혁과 나란히 왼손 거포로 이름을 떨쳤던 김기태는 7시즌. ‘타격의 달인’ 장효조는 6시즌. 1980년대 무적함대 해태의 강타자 김성한과 김종모는 각각 4시즌이다.
타자의 기량은 크게 정확한 타격(타율), 장타력(2루타, 홈런, 장타율), 출루 능력(출루율, 4구) 등 세 가지로 평가된다. 두 가지를 꼽으라면 출루 능력과 장타력이다.
첫번째 이유. 야구는 아웃카운트 27개로 끝나는 경기다. 따라서 좋은 타자는 ‘아웃을 적게 당하는 타자’다. 당연한 말이지만 출루율이 높은 타자는 아웃을 적게 당한다. 두번째 이유. 타자의 임무는 점수를 내는 것이다. 득점은 베이스를 밟은 주자가 2, 3루를 거쳐 홈으로 들어오는 과정이다. 장타력이 높은 타자는 주자를 홈과 더 가까운 베이스로 보낼 수 있다. 통계적으로 득점과 가장 상관계수가 높은 타격 기록이 출루율과 장타율이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장타력에 관한 한 지존은 이승엽이다. 56홈런 기록과 함께 통산 장타율 6할1푼4리를 자랑한다. 양준혁의 기록은 5할4푼5리. 이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다른 타자들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현역 최고 거포로 꼽히는 심정수의 통산 기록은 5할4푼4리, 이만수는 5할1푼9리, 김성한은 4할7푼1리다.
출루 능력에서는 양준혁을 따를 선수가 없다. 13년 동안 양준혁이 출루율 랭킹 5위 안에 들지 못한 시즌은 3번뿐이다. 양준혁은 자신의 볼넷 수와 출루율 기록에 애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얼마 전까지 출루율은 국내야구계에서 ‘쓸모없는 타이틀’로 폄하된 게 현실이었다.
출루율과 장타율을 더한 OPS는 타자 능력을 재는 간편한 수치로 메이저리그에서는 일반화돼 있다. 지난해까지 양준혁의 통산 OPS는 0.964. 메이저리그 130년 역사에서 13년 이상 뛰며 OPS 0.964 이상을 기록한 타자는 모두 몇 명일까? 정확하게 15명밖에 없다. 베이브 루스, 테드 윌리엄스, 루 게릭, 배리 본즈, 지미 팍스, 미키 맨틀, 조 디마지오, 스탠 뮤지얼…. 양준혁은 과연 이들이 현역 시절 누렸던 찬사를 받아왔을까?
양준혁이 실력과 성적만큼의 대접을 받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그가 가장 오래 몸담았던 삼성은 2002년까지 우승을 하지 못했다. 선수협 파동 뒤 두 차례 이적을 감수한 것도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한 번도 MVP를 타지 못한 것도 이유다. 그러나 ‘기록에 눈이 먼’ 기자라면 적어도 1993년과 1997년 두 시즌에는 MVP 투표용지에 양준혁의 이름을 적었을 것이다. 대구구장이 타자들에게 유리하다는 점을 들어 양준혁을 평가절하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삼성에서 뛴 최근 5시즌 동안 양준혁의 홈경기 성적은 타율 3할1푼5리, 73홈런, 원정에서는 타율 3할6리, 72홈런이었다.
'국제대회에서 약하다'도 양준혁을 따라다닌 꼬리표다. 1995년 한일 슈퍼게임에서 양준혁은 11타수 1안타에 그쳤다. 1999년 대회에서는 7타수 2안타. 도합 18타수 3안타는 부끄러운 전적이다. 그러나 2004년 미일 올스타전에서 17타수 3안타를 친 미겔 카브레라를 '국제 경기에 약한 선수'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야구는 아직 국제화된 스포츠가 아니며, 양준혁은 프로 입단 뒤 두 차례 슈퍼게임과 1999년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제외하고는 대표로 뽑힌 적이 없다.
시대를 탓해야 할 수도 있다. 선수 생활 초기 그의 옆에는 이종범이 있었다. 이종범은 화려한 유격수 수비와 한 시즌 도루 기록(84개)을 세운 빠른 발을 갖고 있었다. ‘타자’가 아닌 ‘선수’로서는 이종범이 더 뛰어났을 수도 있다. 1997년부터는 후배 이승엽이 등장했다. 이승엽은 그해를 시작으로 MVP 트로피를 다섯 번 가져갔다.
확실히 양준혁은 이종범처럼 화려한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이승엽처럼 열광을 불러일으킨 적도 없다. 그러나 양준혁은 1993년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묵묵히 한국 프로야구를 지키고 있다. 13년 전 ‘괴물 신인’ 양준혁은 올해도 최고 타자다.
양준혁은 지난해 장종훈으로부터 ‘기록의 사나이’라는 호칭을 대물림받았다. 그가 도전하는 또다른 기록이 있다. 바로 나이다. 37세 이후 타율 3할 이상을 기록한 선수는 원년의 백인천(당시 39세)과 2000년 외국인선수 훌리오 프랑코(당시 42세) 2명뿐. 20홈런 이상을 때린 선수는 프랑코가 유일했다. 백인천과 프랑코는 일본 프로야구와 메이저리그에서 타격왕을 지냈다. 한국의 타격왕도 불혹의 나이에 전성기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상구다 ..
답글삭제담에는 나를 모델로 함 써바바..
익산리그 MVP...
있는 동안 연락도 몬하고
암튼 잘 살고 있고 담에 또 보자...
사랑해..
@상구 - 2006/06/17 13:31
답글삭제ㅎㅎ 익산리그라..좋네.
잠깐만 보고 와서 좀 섭섭하긴 했다.
암튼, 둥지 잘 틀고 자리 잡았지?
새롭게 하는 일들 다 잘 되길 바란다.
나도 사랑해.-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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