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최, 오래 전 TV에서 소개해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그'의 존재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는데 그 때 본 다큐멘터리는 내게 무척 충격이었다. 위대한 한 인물을 알게 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빅토르 최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러시아어: 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 1962년 6월 21일 - 1990년 8월 15일)는 유명한 러시아의 록 가수이며, 전설적인 록 그룹 키노(КИНО)의 리더였다. 당시 소련 카자흐 공화국의 크질오르다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 1962년 6월 21일 태어났다. 1990년 8월 15일 라트비아 리가에서 버스에 치여 요절했다. 빅토르 초이는 러시아 록의 선구자로 여겨지며, 아직까지도 구소련 국가의 많은 팬들이 그를 기억하고 있다.
빅토르 초이는 1962년 카자흐 공화국의 크질오르다에서 태어났다. 17세 때부터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초기 곡들은 레닌그라드 거리에서의 삶, 사랑과 친구들과의 어울림 등을 다루고 있다. 노래의 주인공은 주로 한정된 기회만이 주어진 채 각박한 세상을 살아나가려는 젊은이였다. 이 시기에 록은 레닌그라드에서만 태동하고 있던 언더그라운드의 한 움직임이었으며, 음악차트등의 대중매체들은 모스크바의 팝스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가수들에게만 허가를 내 주었고, 집과 녹음실 등 성공이 필요한 많은 것들을 제공하여 길들였다. 그러나 록 음악은 소련 정부에게는 마땅치 않은 음악이었다. 록은 자본주의 진영의 록 그룹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외에도 젊은이들을 반항적으로 만들었으며, 의사표현의 자유 등의 가치를 중시했다. 따라서 록 밴드들은 정부로부터 거의 원조를 받지 못했고, 정부의 영향력 아래 있는 관영 매체로는 전혀 소개될 수 없었으며, 마약 중독자나 부량자라는 편견으로 그려지는 수준이었다.
빅토르 초이는 18세 때 다니고 있던 세로프 예술 학교에서 성적부진을 이유로 쫓겨나게 된다. 그러나 퇴학에도 불구하고 그는 록 음악에 계속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는 파티등의 장소에서 자신이 만든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한 연주를 록 그룹 아쿠아리움의 멤버였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가 보게 되어, 그래벤시코프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밴드를 시작하게 된다.
레닌그라드의 록 클럽은 록 밴드들이 연주할 수 있던 극소수의 장소에 속했다. 이곳의 연중 록 콘서트에서 빅토르 초이는 처음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그는 두 명의 아쿠아리움의 멤버들이 연주를 맡은 가운데 솔로로 연주한다. 그의 혁신적인 가사와 음악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가 유명해지기 전에 그는 음악하는 사람들이 도전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실험적으로 가사와 음악을 만들었다. 이런 시도는 성공을 거두고, 데뷰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멤버들을 모아 키노(러시아어 영화, 극장)를 결성한다. 그들은 빅토르 초이의 아파트에서 데모테입을 만들고, 이 테입은 처음엔 레닌그라드, 그리고 나중에는 전국의 록 매니아들에게 퍼지게 된다.
1982년 키노는 첫 앨범인 45(소록 피아트; 러시아어로 45라는 뜻)를 발표한다. 이 앨범의 이름이 45로 정해진 것은, 이 앨범의 재생시간이 총 45분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46(소록 쉐스트)라는 앨범도 냈다.) 이 앨범에서 빅토르 초이는 음악에 정치적 목소리를 내려는 의지를 내비친다. "외곽전철"이란 노래는 원치 않은 곳으로 가는 전차에 끼여 끌려가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런 가사는 분명히 당시의 소련에서의 삶을 은유한 것이었으며, 이 노래는 공연이 금지된다. 이 노래의 메시지로 노래는 반항운동을 하던 젊은이들 사이에 유명해지며 키노와 빅토르 초이는 그들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제2회 레닌그라드 록 클럽 컨서트에서 키노는 자신의 정치색을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키노는 빅토르의 반전음악인 "내 집을 비핵화지대로 선포한다."으로 1등을 차지하고, 이 노래는 당시 수만의 소련 젊은이들의 목숨을 빼았고 있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더욱 더 유명해진다.
1987년은 키노의 해였다. 7집 앨범 "혈액형"은 "키노마니아"로까지 불리는 사회현상을 불러일으킨다. 글라스노스트로 조금 더 개방적이 된 정치상황은 그의 가장 정치색이 짙은 앨범인 "혈액형"을 만들 수 있게했다. 그러나 앨범의 메시지만이 청중을 사로잡은 것이 아니었고, 앨범에 담긴 음악또한 이전에는 듣지 못하던 것이었다. 대부분의 곡은 소련의 젊은이들을 향한 외침이었으며, 능동적으로 나가서 국가를 변화시키라고 호소했다. 몇 개의 노래는 소련을 옥죄고 있던 사회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앨범은 빅토르 초이와 키노를 러시아 젊은이들의 영웅으로 등극시켰다. 이후 몇년간 그는 몇 편의 성공적인 영화를 찍었으며 영화제에 그의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몇 개의 앨범이 더 나왔으며, 대부분이 정치적 메시지를 담았으며 밴드는 인기를 유지했다. 그는 소련 젊은이 모두의 우상이었지만, 그는 비교적 보통 수준의 삶을 살았다. 그는 계속 아파트 빌딩의 보일러 실에서 살며 일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즐기고 있으며 정부의 보조를 받지 못하고 있고, 자신들의 앨범은 공짜로 복제되어 퍼지기 때문에 밴드를 유지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런 소박한 삶의 방식은 대중들이 그와 더욱 친밀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1990년 키노는 모스크바의 레닌 스타디움에서 컨서트를 열어 6만 2천의 팬들을 모았다. 1990년 8월 14일 다음 앨범의 녹음을 마쳤으며, 레닌그라드에서 다른 멤버들이 녹음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15일 아침 리가 외곽에서 빅토르 초이가 운전하던 차가 마주오던 버스와 충돌하였다. 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망가졌으며 타이어 하나는 결국 찾지 못했다. 8월 17일 소련의 유력 잡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다음과 같이 그의 의미를 간추린다.
빅토르 초이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다른 어떤 정치인들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한번도 거짓말하거나 자신을 팔아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빅토르 초이였고,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그를 믿지 않을 수 없다. 대중에게 보여지는 모습과 실제 삶의 모습이 다름없는 유일한 락커가 빅토르 초이이다. 그는 그가 노래 부른 대로 살았다. 그는 록의 마지막 영웅이다.
놀랍게도 교통사고에서 온전하게 건질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다음 앨범에 쓰일 그의 목소리를 담은 테이프이었다. 목소리는 남은 멤버들의 나머지 녹음과 합쳐져 현재는 "블랙 앨범"으로 불리는 앨범으로 남아있다. 이 유작앨범은 밴드의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며 러시아 록 역사에 있어서 키노의 자리를 확고하게 했으며, 빅토르 초이를 최고의 영웅이자 전설로 만들었다.
키노가 소비에트 음악과 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들은 이전의 다른 어떤 그룹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음악과 가사로 노래를 만들었다. 키노는 모던 러시아 록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키노는 아직도 러시아 전역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레닌그라드 벽에는 그들에 대한 그라피티가 그려지고 있으며,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가에는 한 벽 전체가 그들에게 헌정되었으며, 그곳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팬들이 모인다. 사망 10주기였던 2000년에는 러시아의 록 밴드들이 모여 빅토르 초이의 38번째 생일을 맞아 빅토르 초이의 헌정 음반을 만들었다.
출처:
위키백과-빅토르 최무척이나 한국에 와서 공연을 하고 싶었던 빅토르 최가 의문의 죽음(게다가 한국공연이 결정되고 한국으로 오기 전 8월 15일 광복절에 죽음을 맞이했다.)으로 떠나고 난 뒤 그를 따라 자살을 한 젊은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전설을 만들었던 빅토르 최. 다큐멘터리에서 소개되었던 내용 중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대목이 있다. 그의 공연 티켓 암표가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을 때도, 그의 앨범이 몇 백만 장씩 팔려나가고 있을 때도, 그가 출연한 영화가 큰 수익을 내고 있을 때도 그는 유명해지기 전에 하던 보일러공(火夫)으로서 일을 계속 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계속 노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그래야 노래를 계속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젊음의 이상적 삶을 몸소 살아낸 사람.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고 젊음의 자유를 완성한 사람. 러시아 정부로부터 많은 협박과 압력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은 굳건히 이뤄냈다. 미술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었던 그의 방에 남겨진 몇 점의 작품과 그가 좋아했던 이소룡 사진이 소개되었던 다큐멘터리 영상 속 그의 흔적들이 무척 그리워졌다. 그에게 부인과 어린 딸이 있었던가...
혈액형어둡고 추운곳 그러나 그 거리는 우리의 발자국을 기다린다
군화위엔 별빛의 먼지
푹신한 소파, 십자 나사, 제때에 당겨지지 않은 방아쇠,
햇빛 비춰지던 시절이란 눈부신 꿈속에나 있을 뿐,
치뤄야 할 댓가가 있다해도 헐값의 승리는 바라지도 않는다.
전우의 가슴을 밟고 싶지 않기에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단지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러나 하늘높이 솟은 별은 나를 전장으로 불러낸다
소매위에는 혈액형
소매위에는 나의 군번
전투로 향하는 내게 행운을 빌어주게
이 들판에 남게 되지 않기를
니 들판에 남게 되지 않기를
전투로 향하는 내게 행운을 빌어주게
[빅토르 최, 1962.6.21 - 1990.8.15]
혈액형과 몇 개의 곡을 윤도현이 불렀다고 하는데 혈액형 부른 것만 들어봤다. 윤도현은 "혈액형"이란 노래를 분위기와 외피만 목소리에 두르고 노래를 하는 듯. 그러나 빅토르 최가 부르는 노래에는 묵직한 시대의 반항과 고민과 젊음의 방황과 자유가 묻어나온다.
부디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답글삭제@황성문 - 2009/05/17 03:00
답글삭제너무 빨리 떠나서 아쉬운 사람입니다.
비밀 댓글 입니다.
답글삭제@Anonymous - 2009/07/05 20:16
답글삭제동감합니다.
한국인중 자랑스러운 분이군요. 안타깝습니다. 마음이 아프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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