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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12일 토요일

경쟁은 필요없다.

우연히 TV채널을 돌리다 시선이 멈췄다. 호흡이 느려졌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EBS의 지식채널e에서 화면에 뎐져지고 있던 글귀들 때문이었다. 다시보기를 찾아 2부작으로 된 '핀란드의 실험'을 봤다. 아주 평범하고 단순한 사실인데 그 평범하고 단순한 사실 앞에서 '울컥'했다. 아래는 프로그램에서 나왔던 텍스트의 일부를 옮겨 적은 내용이다.

교실에서의 경쟁은 필요없다. 협동이 살길이다.
교실에서의 협동을 위해 성적표에서 사라지는 등수
오늘은 못하지만 내일은 잘할 수도 있고
수학은 못하지만 언어는 잘할 수도 있는 건데
몇 번의 시험으로 우열을 매기는 것이
학생 개인에게나 사회 전체에게나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학교에서 경쟁만을 배우고 협동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사회의 미래를 책임진다면 과연 그 사회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

 

가정환경, 부모의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 출발점
학교에 입학한 모든 아이들이 같은 출발선에 서지 못한다
그러니 공정한 경쟁이란 있을 수 없다.
학교에서의 경쟁을 금지하는 국가.(핀란드)
성적표는 있다. 하지만 등수는 없다.
등수 대신 각자의 수준에 맞게 설정한 목표를 얼마나 달성했는지가 표시되는 성적표
경쟁 대상은 친구가 아니라 내 자신.

 

일제고사를 통해 더 못하는 아이, 더 못하는 학교가 받는 차별은 다름아닌
더 많이 책정되는 1.5배의 예산이었다.
그들에게 차별은 차이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좁히는 도구였다.

 

경쟁은 경쟁을 낳아 결국 유치원생까지 경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설득시켰다. 학교는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한 교양을 쌓는 과정이다. 그리고 경쟁은 좋은 시민이 된 다음의 일이다. -에르끼 아호, 핀란드 전 국가교육청장

 

via EBS 지식채널e 중

핀란드의 실험 제1부 탈출구
핀란드의 실험 제2부 더 많은 차별

 

대한민국의 교육이 문제라고 열을 낸다. 교육정책이 엉망이라고 한탄한다. 교육정책이, 교육관련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면 실컷 비난하고 욕을 하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한다. 그리고 잠시 담배 하나 피고 올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래도 제 자식은 잘 키우고 싶어 등 떠밀어 학원에 보낸다. 학원에 가지 못한 아이는 자살을 생각하기도 하고 다른 아이들과 다른 삶 때문에 힘겨워 한다. 자식을 학원에 보내지 못한 부모는 아이에게 평생의 미안함을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

 

누구나 다 학원에 가고 누구나 다 경쟁을 하고 누구나 다 상대를 짓밟아야 하는 냉정한 경쟁사회에서 '교육문제'를 거론하고 '바른 교육'에 대해 고민하는 건 왠지 뒤쳐지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교육이 문제라고 열을 올리면서도 지금은 때가 아니라 생각하는 거다. 지금 뒤쳐지면 평생을 '루저'로 살아야 하고 인생 전체가 망가지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괜찮은 대안학교가 생기면 '경쟁적'으로 학교에 입학을 시켜야 하고 그 학교를 나온 학생이 대학도 잘 가더라, 공부도 알아서 잘 하더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번진다. 공교육을 강화하자고 입을 모아 외치고선 과외선생님을 집 안으로 모시고 따로 선생님을 찾아뵙고 입소문과 인터넷을 뒤져 가장 좋은 학원으로 아이를 떠민다. '교실에서의 경쟁은 필요없다. 협동이 살길이다.'는 말은 '이상적 답안'일 뿐 '현실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제 자신 혼자서 '이상적 답안'을 좇아 사는 건 무척 두렵고 힘겨운 삶이다. '이상적 답안'을 좇는 게 둘이어도, 열이어도, 백이어도 어차피 이 세상에선 소수일 뿐이다. 다수가 하자는 대로 살지 않으면 피곤만 가중될 뿐이다.

 

세상이 이렇기에 '학교는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한 교양을 쌓는 과정'이고 '경쟁은 좋은 시민이 된 다음의 일'이라 말하는 에르끼 아호의 말이 더 가슴을 울리는지 모르겠다. 내 어릴 적 '전인교육'에 대한 뜻을 배우고 '배움은 평생' 지속되어야 한다는 말을 배웠는데 그건 단지 교과서 안에만 있는 말일 뿐이고 현실에선 전혀 쓸모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 학교를 통해 좋은 시민이 되었는가. 좋은 시민으로 살고자 하는 욕구는 존재하는가.

 

경쟁은 소수의 지배자가 세상을 다스리기 가장 손쉬운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그들의 노예로 만들게 하기 위해선 '경쟁'만큼 좋은 도구가 없다. 혹 경쟁을 통해 그들의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한들 그것은 단지 그들 사회의 가장 하층계급이 되는 것일 뿐 그들이 정해놓은 룰을 벗어나 그들과 같은 레벨로 설 수는 없다.

 

경쟁을 거부하면 당장은 나의 삶이 힘겨워질 것이다. 남에게 짓밟히고 이리저리 채일 것이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고 그렇다고 착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경쟁을 거부한다고 해서 그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질 확률은 생각보다 적다. 오히려 그런 노력들이 세상을 바꾸는 발판이 될 수도 있다.

 

세상에 공정한 경쟁이란 존재할 수 없음에도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다고 부추기는 특권층과 사회 분위기. 평등이란 말 자체가 이미 성립될 수 없는 사회임에도 평등을 이루겠다고 주장하고 부추기는 사회. '아랫것'들이 머리 터지며 출혈경쟁을 하는 것이, 평등해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윗분'들의 레벨로 상승할 수 있다고 맹신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깨닫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교육의 미래에 대해 밤낮으로 이야기한들 공염불에 불과할 것이다.

 

** 지식채널e 동영상에 나온 내용 중 핀란드는 1985년 우열반을 폐지했다고 한다. 그 때부터 학교에 경쟁이 아닌 협력과 협동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나 싶은데 그 때부터 지금까지 대략 30년이 흘렀다. 어떤 정책이던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이 바뀌는 시간 대략 30년, 한 세대 정도의 시간. 그 시간이면 충분하다.

 

 

▣ 함께 읽기

비장(悲壯)한 수능(修能)현장을 보며...

via 규항넷

행복이란 무엇인가
학원을 없애자

2009년 5월 10일 일요일

행복을 찾아서(The Pursuit of Happiness), 현실..현실..현실...현실 속 행복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도 어릴 적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어떤 사람이 되겠다고 자신있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며 또렷한 눈망울을 반짝거리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꿈꾸는 나의 삶, 우리의 세상은 꼭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경쟁이 나와 상대를 모두 아프게 한다는 걸 조금씩 알아가게 되면서
나이가 어렸어도 남을 꼭 이겨야겠다는 생각은 못해본 것 같다.
물론 공부를 잘해 등수 안에 들고, 1등을 하고, 상을 받으면 기분좋고 우쭐했던 적은 있었지만
함께 원하는 무언가를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악다구니를 써가며 바득바득 경쟁을 하려고 하진 않았다.
그래서 내가 가진 복(福)과 재능(才能)만으로 겨우겨우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
물론 게으르긴 했지만 정말 하고 싶은 일엔 순수하게 자신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해가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마치 순수한 무엇인마냥 오해를 하겠지만
대동소이(大同小異)하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살면서 무수히 생각해 보았을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어린 시절, 혹은 지금까지 옳다고 믿어왔던 어떤 가치와 신념이 이루어지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남에 대한 배려는 고사하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당당히 이뤄내면 행복해지는 것일까.
남들은 행복한데 나만 불행한 것인가.
내가 행복하면 남들도 행복하게 보이는 것인가.
도대체 행복의 최소기준은 무엇이고 행복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인가.


이 장면은 크리스 가드너(Will Smith)가 정식 주식중매인이 된 후에 감격에 겨우 인파들 속으로 걸어나와 행복을 만끽하는 장면이다. 아내는 떠났고 아이를 홀로 키우며 도전한 주식중매 직업, 그 길이 순탄치 않았고 힘들었을 거라는 건 불을 보듯 훤하다. 월세를 내지 못해 집에서 쫓겨나고 한 푼도 없어 홈리스 생활도 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던 직업을 손에 넣었다. 아마도 다른 선택이 없었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자신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을 살려 마침내 주식중매인이 된 것이다.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인 크리스 가드너의 삶이 딱 여기에서 멈췄으면 결코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크리스 가드너는 그 이후에 '가드너 앤 리치 컴퍼니'라는 굴지의 투자사를 설립하면서 갑부가 되었고 그의 인생역정이 ABC-TV 다큐멘터리 '20/20'에 소개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면서 영화까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가 마침내 찾은 것은 '행복'이었다는 코멘트와 함께.

그가 갑부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의 인생역정을 보면서 쾌감을 느낄 수 있을까.
그가 갑부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의 행복을 보며 감동을 느낄 수 있을까.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고 해서 모든 고통이 행복해지거나 하진 않는다. 희망을 놓진 못할망정 사랑하는 가족이 겪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책임을 지는 입장으로선 죽을만큼 괴롭고 힘든 일일 것이다. 저 순간 느끼지 못했던 행복은 크리스가 정직원이 되는 순간 바로 찾아온다. 아들과 지하철 화장실에서 잠을 자거나 노숙자들이 기거하는 곳에서 힘겹게 버텨내던 시절에 꿈꾸던 가장 행복은 최소한의 생활력-매일 월급이 통장에 찍히고 집 월세 걱정하지 않고 아들 생일 날 선물 사주고, 아들이 먹고 싶은 것 지갑걱정 하지 않고 사주는 것, 아내에게 '돈돈돈'이란 잔소리를 듣지 않는 것-일 것이다.

크리스가 제대로 된 번듯한 직업을 갖게 된 후 엄청나게 감격을 하는 이유는 그 동안의 고단한 생활 속에서 (남들은 다 느끼고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이 느끼지 못하던 '행복'이 자신에게 왔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돈'이 '행복'인가. '돈'이 없으면 '행복'을 느낄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것인가. 물론 돈의 많고 적음에 대해 수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최소한의 삶의 유지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갖게 되는 건 '심리적, 물질적 박탈감'과 '악순환으로 흐릿해지는 미래(희망)'일 것이다. '최소한'은 무엇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평등'이 진리고, '격차'가 법칙인데 '최소한'을 요구하는 행위는 위법인가.

크리스의 삶에 감동을 받는 건 왜일까. 그가 주식중매인의 자격으로만 평생을 평범(?)하게 살면서 행복을 느끼는 건 그다지 큰 행복이 아닌 것일까. 물론 그렇진 않겠지. 영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극적인 것도 필요하고, 어쩌고저쩌고..하니까 이해는 된다. 다만, 일상으로 현실로 눈을 돌려보면 자신의 '적정한' 삶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남들보다 우월한' 삶 속에서, 현재보다 '더 나은' 삶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싶어한다.

언젠가 '생활 속 달인을 찾아서'라는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분야에서 최소한 10년 이상 수십년 씩 종사해 온 사람들인데 경제적으론 늘 궁핍해 마지 않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그들이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달인들이 하는 일을 좇아하진 않을 것이고 그들이 느끼는 행복보다 오히려 크리스가 느끼는 행복을 찾고 싶어할 것이다. 왜일까.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바보'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회.
남들보다 뛰어나지 못해서 주눅드는 사회.
편법을 쓰지 못하면 재능없다고 비난받는 사회.
가진 게 없으면서 평등과 분배를 이야기하면 자격지심 때문이라고 꾸중듣는 사회.
가진 게 많으면서 편법과 불법을 이야기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용인하는 사회.

크리스가 찾은 행복이 일반적인(?) 직장을 얻은 것에서 종료되지 않고(영화에서는 그렇지만)
그 이후에 그가 이룬 부와 명성으로부터 역으로 거슬러 온 행복이란 점에서 자꾸 현실에 눈이 간다.



...영화장면에서 느낀 몇 가지.


크리스 가드너가 첫 면접을 보는 날인데 이런저런 이유로 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페인트가 덕지덕지 묻은 상태로 면접장소에 나타났다. 면접관들 역시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어떤 이는 악수를 하는 것조차 불쾌하게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한국이랑 비슷할 것이다. (물론 조금 다르다. 한국이라면 면접대기자들을 부르는 직원도 크리스를 이상하게 쳐다보며 무시했을 가능성이 많다. 사전에 차단시켰을 지도...)

다음이 중요한데 물론 크리스의 넉살과 면접관 중 한 명(트위슬)과의 사소한 친분도 한 몫을 했지만 면접관들 역시 최대한 면접자의 의견을 듣는데 신중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기회를 준다. 미국도 100% 다 저럴거라고 믿진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의 관용은 열려있지 않나..라고 생각을 해봤다. 특히 크리스의 콧수염을 봐라.

한국이라면 나이먹은 구직자나 젊은 구직자나 수염은 다 밀어야 하고 반드시 양복을 입어야 하며 외형에 관련한 코멘트와 노하우가 하나 가득이지 않나. 직업마다 복장이 다르고 요즘은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외형에 치중하는 사회 분위기를 보면 머리가 아프다. 외형에 가장 목메다는 직종이 하나 있다. 국회의원.


오른쪽에 보이는 인물이 실제 크리스 가드너라고 하는데 영화의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현실과 현실을 투영한 영화 속에서 실존인물과 실존을 대체한 인물이 마주치는 장면을 다시 보며 묘한 느낌을 받았다. 크리스 가드너 역을 했던 윌 스미스의 친 아들 제이든 스미스 역시 영화 속 크리스 아들 크리스토퍼를 연기하면서 현실과 비현실이 교묘하게 얽힌 영화가 되지 않았나 싶다.


2면까지 맞춘 게 내 퍼즐인생의 최고 기록이다. 메뉴얼이라도 구해서 연습이라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팟 터치 무료 어플 중에 있어서 다운을 받긴 했는데 역시 머리가 아파서 돌려보다 포기. 퍼즐 잘하면 두뇌단련에 도움이 되려나??? 큐빅을 처음 보고 모든 면을 다 맞춰 낸 크리스는 스톡브로커가 되지 않았더라도 무언가 해냈을 인물이 되었을 것 같긴 하다.

2009년 2월 14일 토요일

공동으로 키워낸 괴물 MB

(중략)...문제는 이것입니다. 한나라당 대신에 민주당이 다시 권좌를 차지한다 해도, 그 민주당의 보수성도 바뀐 게 하나도 없지만 이 사회의 "주류" 집단들의 수준도 전혀 향상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만의 하나에 진정한 의미의 "진보" 세력 (즉, 사회주의적, 사민주의적 세력)들은 권력을 잡는다면 사회 분위기가 워낙 크게 일신되기에 사법부나 대학가들도 압력을 받아 차츰 바뀌겠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 "대중적인 진보정당", 즉 철지난 통일지상주의나 노조 관료들과의 유착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러면서도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그런 진보정당은 아직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중략)..."보수주의자 A"대신에 '보수주의자 B"가 올 경우에는, 북한을 자극시키고 미네르바를 감옥에 보내는 미친 짓을 그만두더라도 거기부터 거기까지일 걸요... 여전히 희망이 없는 사회일 것입니다.

박노자 - MB만 없어지면 우리가 과연 행복해질까? 중 발췌

사회전반의 패러다임이 뒤집혀서 (긍정적으로) 바뀌려면 적어도 두 세대 쯤은 지나야 하지 않을까. 50-60년대를 살아오신 분들은 전쟁을 겪고 군부독재를 겪으며 자유의지와는 상관없이 보수화가 되었고 70-80년대를 살아오며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실현(할 뻔)한 분들은 자본주의의 거센 물결 앞에 무릎을 꺾고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의 선봉에 서 있는데 그 분들의 자녀들이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10대, 20대, 30대가 아닌가.

젊은 층의 보수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데는 내 부모님 세대, 그 아래 세대들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경쟁에서 이기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해야 하며 그 모든 것의 첩경에 있는 것이 돈(자본)이라는 사실을 온 몸으로 깨달아버린 상황에서는 그 어떤 가치도 쉽게 수면으로 떠올릴 수 없을 뿐더러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을 적대화하는 지경까지 와버린 것이다.

지금 모든 문제의 원흉을 2MB로 설정하고 있지만 엄밀히 살펴보면 2MB는 우리가 공동으로 키워낸 괴물일 뿐이다. 그 괴물은 우리 안의 또다른 MB를 숙주로 해 탄생했을 뿐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이는 총체적 난국인 것이다. 어느 것 하나를 손댄다고 해서 다른 하나가 영향을 받아 함께 개선되는 게 아니라 하나를 개선하려고 해도 다른 하나로 인해 개선의 희망이 꺾이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면 이 희망없는 10년, 혹은 20년을 그냥 살아갈 수 밖에 없는가. 세대가 두 번 정도 바뀔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아니면 혁명만이 필요한 것인가.

보수가 나쁜 게 아니라 지금의 비뚤어진 보수를 견제할 건강한 보수나 진보가 없다는 게 문제고 그로 인해 모든 가치가 한 곳으로 과열양상을 보이며 집중되어 있는 게 문제다. 희망없이 살아가느냐, 희망을 만들어보겠는가. 하긴...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고 그에 따른 판단이 완전히 다르다면 이런 소리조차 뜬구름 잡는 헛소리로 들리겠다.

조소(嘲笑)하던 숨결을 따라 그 밥에 그 나물인 사회가 되버린 것이다.

2006년 6월 19일 월요일

내 행복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내 행복만을 보고 살지는 않았는지, 남이 잘 되면 겉으론 웃으면서 속으론 배아파 하진 않았는지. 모든 사람의 평균 행복지수가 내게도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지만 남이 행복하다고 해서 내가 느끼는 행복의 크기는 절대 줄어들지 않는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건 그만큼 마음이 가난한하다는 증거고 스스로가 누리는 행복에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 행복지수는 경제지표로 설명할 수 없다. 행복은 내가 소유한 물질의 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종종 그 둘을 같은 것으로 보고 판판단하지만 옳지 않다. 삶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누리는지에 대한 가치관의 문제, 태도에 대한 문제일 뿐이다. 내 행복을 타인의 고통과 불행 위에 올려놓고 살지는 않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2005년 12월 25일 일요일

따스함, 가볍다.

손 안 가득 만져지는 햇살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덩어리 채 나를 눈부시게 하는 느린 낮을 보내는 게
아주 오랜만인 '오늘'
TV소음과 전화하는 소리,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오히려 현실에서 나를 멀리 격리시킨다.


아무리 가슴에 담고 눈시울을 붉히더라도
행동없는 삶 변두리엔 스러지는 사연들이 즐비하고
그저 지금 이 순간만은 햇살에 송두리 채 무너져
현실 위를 부유하는 영혼, 가볍다.


해가 지지 않을 것 같은 이 몽롱함은
사실 오래가지 않아야 좋을 것 같긴 하다.
그래도 여전히 매혹적으로 아름답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