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그렇다면 거짓말이란 건 '건너 마을 바보 삼룡이'도 다 아는 것. 그건 문득 '당신'이 보고 싶다는 것 일 겁니다. 하도 마음을 누르고 쳐내고 비우고 차갑게 해 놓은 후라 '보고 싶음'도 여러 가지 이유와 판단과 생각들이 허용해 준 최소한의 '교집합'입니다만, 오히려 맹목적인, 말도 안되는 이유들로 인해 달콤하지도 않은 거짓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보다는 훨씬 바람직하게 느껴지긴 합니다.
바램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도 '현실의 벽'은 어떻게 하냐구요? 다행인 건 그 '벽' 때문에 지레 질리거나 고민스럽진 않네요. 다만, '당신'을 통해 보았던 또 다른 삶의 형태의 '이쁨'이 환상이 아니었길, 또는 개인적 욕심에서 비롯된 왜곡된 판단이 아니었길 바랄 뿐입니다.
사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장단점들은 받아들이는 자의 판단에 의해, 혹은 소유자의 선택에 따라 상당히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죠. 소유자와 수용자의 협의와 공유를 통해 새로운 에너지의 형태를 띄기도 하구요. 태어나면서 주어진 선택권이 없었듯이 살면서 어떤 상황에 대해 미리 포기하거나 안될 거라는 생각을 하는 건 이미 세상의 풍파에 많이 흔들려 봤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늘 초발심을 잃지 않는 게 참 중요한 거죠. 그렇게 살아보려 합니다.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말이예요.
제 판단이 옳고 그름은 저 혼자만의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렇다고 수 많은 사람들에 의해 흔들릴 것도 아닌 거죠. 판단 옳고 그름을 함께 수용하고 그것에 따른 오류를 수정해야 할 상대방과 함께 용단을 내리는 것이겠죠. 지금으로선 '그렇지 않을까...'하고 조심스레 생각을 들춰보고 있는 거죠.
2005년 4월 4일 월요일
2005년 4월 3일 일요일
'위협'의 의미
...사회주의적 기획의 결핍을 인정하는 일과, 현재성을 뛰어넘는 진리는 없다는 믿음은 늘 공존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좀더 방점을 둔다. 아무 것도 위협하지 않는 현자보다는 시시한 것 하나라도 위협하는 활동가가 백배 낫다고 생각한다. 위협하지 않는 건 의미 없는 것이다.
- 김규항
위협한다는 것. 내 생각 하나하나가, 내 세포 움직임 하나하나가, 내 육근 동작의 모든 것이 세상의 안일함과 일상성을 위협하는 것. 그게 비로소 활동이 되고 에너지로 충만해질 때 이 삶에 툭 던저져 치열하게 살다가 가는 작은 의미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 것도 위협하지 않는 현자'는 남들의 모든 말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초월하지 않았으면서 세상을 초탈한 듯 사는 흉내를 내는 것일 테지. 지금 주어진 삶, 시간 속에서 불안한 현재 진행형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민하며 조금이라도 나아지려는 발버둥이라도 있어야 삶의 틀도 확장되고 매일 갖게 되는 범주를 뛰어넘는 일들이 생길 테지. 작은 것일지라도 위협한다는 게 얼마나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는 두 말하면 잔소리다.
현재를 보지 않고 미래를 보는 자는 몽상가에 다름 아니고 미래를 기획하지 않고 현재만을 보는 자는 일상성에 아무런 의심을 품고 살지 않는 자에 다름 아니다. 지금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은 지금 당장 확보하기 힘들겠지만 기획과 활동, 노력이 수반되면 가능하다. 지금을 뛰어넘겠다는 나름의 꿈은 삶이 내게 주어진 의미와 삶의 마무리를 위한 고민과 상호 관계를 갖지 않을 경우 공허해질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위협하지 않는 건 의미 없다는 말 이전에 삶의 존재 이유에 대해 고민을 한다는 건 너무 공허한 되돌이표가 될까? 어쨌든, 조금씩 해결해가고 부딪혀 가며 '시시한 것 하나'에도 위협을 하고 싶은 마음이 꿈틀대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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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2일 토요일
밥벌이의 활용 방법
가장 아름다운 헌신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바로 자신의 밥벌이로 하는 헌신입니다.
가장 용감한 도전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바로 자신의 밥벌이를 걸고 하는 도전입니다.
가장 용감한 도전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바로 자신의 밥벌이를 걸고 하는 도전입니다.
- blog 탐방 중에...
밥벌이로 헌신하고 밥벌이를 걸고 도전하는 것. 쉬운 일이 아닐 터. 다 걸고 하는 도박보다는 다 걸고 하는 도전이 더 어려워 보인다. 반면 후회는 적을 것 같다. 내가 하고 있는 일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건 과연 무엇일까. 부끄럽지만 생각조차 나지 않아 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챙기는 일이 먼저겠다. 아직 프로가 아니면서 프로리그에 뛰어든 느낌. 내 사고의 틀이 충분히 깨지는 일이 급선무다. 내게 오래 앉았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일은 쉬우나 한 자리에서 계속 즐거움을 쏟아내는 건 지루하거나 어렵다고 느껴질 때가 있으니...
약속 :: -329
슬쩍 눈 감고 지나가도 될 날인데 눈 감으면 떠오르는 모습. 때론 허상인지 실상인지 구분조차도 되지 않으면서도 한 이미지만은 간혹 선명하게. 느낌은 회상의 선율을 타고 피부까지 직접 느껴지고. 보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볼 수 있는 것일까. 편안한 마음으로.
이제 내가 죽을만큼 외롭다는 걸 아는 자는 없다.
내가 죽을만큼 외롭다는 걸 아는 자는 없다.
그대의 전화번호를 지우고 짐을 챙긴다.
밖으로 통하는 문은 잠겼다 더 이상
좁은 내 속을 들키지 않을 것이다.
한잔 해야지
나처럼 보이는 게 전부인 사람들과
정치를 말하고 역사를 말하고 비난하면서
점점 길어지는 밤을 보내야지
한 재산 만들 능력은 없어도
식구들 밥은 굶지 않으니
뒤에서 손가락질 받지 않고
변변치 않은 자존심 상할 일도 없다.
남들 앞에서 울지만 않는다면
나이 값하면서 늙어간다 칭찬받고
단 둘이 만나자는 사람은 없어도
따돌림 당하는 일도 없겠지
멀 더 바래
그저 가끔 울적해지고
먼 산 보면서 혼잣말이나 할 테지
이제 내가 죽을만큼 아프다는 걸 아는 자는 없다.
전윤호 詩 "절교" 전문
*시인 전윤호, 64년생. 동국대 졸업. 91년 등단. 역사와 철학에 많은 연구를 한 재능있는 시인. 인접 예술에도 빼어난 조예를 갖고 있고 하체가 부실한(?) 시인들을 위해 시인. 축구팀을 만들어 연락책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는 마당발. 시인들의 장례식장에서 운구를 도맡아 하는 마당쇠. 시집으로 "순수의 시대" "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가 있음.
내가 그렇다면, 남도 그렇다는 걸 알아야 한다. 아니, 세상 모든 '남'이 그렇다는 걸 알지 못해도 내 마음에 두어지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건 알아야 한다. 세상과 그대와 '절교'를 하기에는 내 욕심이 참 많다. 내 욕심은 이미 세상과 그대에게 발을 담근 상태다. 하지만 치졸한 욕심은 거부하고 살아온 지 오래다. 나의 '욕심'이라 표현되는 마음의 일단은 '함께'라는 삶의 소중함으로부터 파생되어져 나온 것이지 내 것으로의 '소유'의 개념은 아니다. 물론 어떻든지 간에 어떤 모든 욕심은 '이별'을 해야 하겠지. 그럴싸한 멋진 소유의 상위 개념은 '무소유'일 수 있으니까.
하고 싶은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없는 시의 행간. 담백하면서 짙은 향이 느껴지는 시인의 고백이 있다.
라벨:
외로움,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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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1일 금요일
약속 :: -330
결과가 어떻게 될지, 진행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겠지요. 그런데 지금부터 안 될 거라는 생각이나 무조건 잘 될 거라는 생각은 갖지 않는 게 좋지 않겠어요? 다만,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래도 나은 삶 아니겠어요? 기대가 부풀어지지 않도록 힘을 빼고 하기 힘든 일이라는 한 숨을 들 숨으로 돌려 세울 때 현재의 삶에 의미있는 방점을 찍는 일은 시작되는 거라 생각하죠.
사람에 대한 환상? 기대? 그런 건 없어요. 어쩌면 지난 시절 다 깨져버렸는지도 모르고 사람에 환상과 기대는 직접 맨얼굴, 맨마음으로 만나기 전에는 갖지 않는 게 좋죠. 그런데 말이죠. 살다보면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환상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대를 품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어떤 상황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기대. 상대방에 대한 능력을 과대 평가하거나 아전인수격으로 내가 생각하고 싶은 방향대로 몰아가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면 어떤 상황이든 '어떤 가능성'이 있겠구나 싶은. 그건 환상과 기대의 차원이 아니라 단지 '가능성'이겠죠. 그런데 그런 가능성은 어느 누구에게나 다 있지 않나요? 또 어느 누구에게나 있는 그 가능성은 본인조차도 모르는 경우도 많지 않나요? 뭐,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을 수는 있겠죠.
잘 살고 싶다는 거죠. 그 가능성의 출발은.
만나고 또 만나도 사람들 사이에서 부유하는 정체성이지만 그래도 알고 싶고 만나고 싶은 건 저 또한 사람이어서 그런 거겠죠. 박노해 시인은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절절히 노래했지만 그 희망은 스스로 발견할 때 더욱 가치가 있는 법일 테고 서로가 그 희망을 볼 수 있다면 더더욱 좋은 일이겠죠.
그냥 제 생각일 뿐인 거예요. 아직도 치기 어린 느낌이 가시지 않은 부분도 있고 아직도 부족한 생각 투성일테지만 그저 제 생각일 뿐인 거죠. 생각의 공유는 먼저 열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나름의 상처도 받은 적이 있지만 이젠 상처받지 않을 수 있고 많이 편해졌죠. 여전히 공유를 할 수 있다고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살아가면서 점점 제 생각을 강요하거나 우기는 짓 따위는 하지 않게 되네요. 물론 꼭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분명 있지요. 그 느낌조차도 또 전하고 다르니까요. 물론 이건 생각을 잘 못 진행시키면 보편적 보수성에 함몰되는 경우가 생길테지만 늘 나를 바라보는 노력을 게으르게만 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자유를,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거겠죠.
공부를 더 해야겠어요. 마음이든, 몸이든, 지식이든, 기술이든, 글이든, 생각이든 공부를 더 해야겠어요. 부족한 걸 채워가면 채워갈 수록 채워갈 그릇이 예전에 보지 못했던 크기로 느껴지곤 하니까요.
해야죠.
사람에 대한 환상? 기대? 그런 건 없어요. 어쩌면 지난 시절 다 깨져버렸는지도 모르고 사람에 환상과 기대는 직접 맨얼굴, 맨마음으로 만나기 전에는 갖지 않는 게 좋죠. 그런데 말이죠. 살다보면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환상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대를 품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어떤 상황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기대. 상대방에 대한 능력을 과대 평가하거나 아전인수격으로 내가 생각하고 싶은 방향대로 몰아가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면 어떤 상황이든 '어떤 가능성'이 있겠구나 싶은. 그건 환상과 기대의 차원이 아니라 단지 '가능성'이겠죠. 그런데 그런 가능성은 어느 누구에게나 다 있지 않나요? 또 어느 누구에게나 있는 그 가능성은 본인조차도 모르는 경우도 많지 않나요? 뭐,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을 수는 있겠죠.
잘 살고 싶다는 거죠. 그 가능성의 출발은.
만나고 또 만나도 사람들 사이에서 부유하는 정체성이지만 그래도 알고 싶고 만나고 싶은 건 저 또한 사람이어서 그런 거겠죠. 박노해 시인은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절절히 노래했지만 그 희망은 스스로 발견할 때 더욱 가치가 있는 법일 테고 서로가 그 희망을 볼 수 있다면 더더욱 좋은 일이겠죠.
그냥 제 생각일 뿐인 거예요. 아직도 치기 어린 느낌이 가시지 않은 부분도 있고 아직도 부족한 생각 투성일테지만 그저 제 생각일 뿐인 거죠. 생각의 공유는 먼저 열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나름의 상처도 받은 적이 있지만 이젠 상처받지 않을 수 있고 많이 편해졌죠. 여전히 공유를 할 수 있다고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살아가면서 점점 제 생각을 강요하거나 우기는 짓 따위는 하지 않게 되네요. 물론 꼭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분명 있지요. 그 느낌조차도 또 전하고 다르니까요. 물론 이건 생각을 잘 못 진행시키면 보편적 보수성에 함몰되는 경우가 생길테지만 늘 나를 바라보는 노력을 게으르게만 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자유를,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거겠죠.
공부를 더 해야겠어요. 마음이든, 몸이든, 지식이든, 기술이든, 글이든, 생각이든 공부를 더 해야겠어요. 부족한 걸 채워가면 채워갈 수록 채워갈 그릇이 예전에 보지 못했던 크기로 느껴지곤 하니까요.
해야죠.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종일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근데 손뼉을 칠만한 이유는 좀체
떠오르지 않았어요
소포를 부치고
빈 마음 한 줄 같이 동봉하고
돌아서 뜻모르게 뚝,
떨구어지던 누운물
저녁 무렵,
지는 해를 붙잡고 가슴 허허다가 끊어버린 손목
여러갈래 짓이겨져 쏟던 피 한 줄
손수건으로 꼭 꼭 묶어 흐르는 피를 접어 매고
그렇게도 막막히도 바라보던 세상
그
세상이 너무도 아름다워 나는 울었습니다.
여림 詩,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전부
*뒷글: 시인 여림에 대하여......
본명, 여영진. 66년생. 서울예전 졸업. 2002년 서른여섯에 생을 반납하고 떠남. 그를 보낸 후 양수리 가까운 그이 집을 방문했을 때 노트북 속에서 북한강 안개를 잔뜩 머금은 100편이 넘는 보석들을 발견함. 이듬해 유고 시집 "새들이 안개속으로 걸어간다" 가 작가출판사에서 나옴.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는 내게도 좀체 떠오르지 않는다. 살아야 할 자질구레한 이유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을 하지만. 그런다고 손목을 바라보며 섬뜩한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근사하게 살아야 한다는 이유는 온데 간데 없고 오래 살아야 할 이유를 만들기 때문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 시지만 고개 돌려 삶을 바라보게 한다.
2002년 한국을 벗어나 중국 땅을 밟았을 때 난 어떤 마음이었는지. 삶의 절망도 아니고 도피도 아니면서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막막함이 있었나. 돌파구를 찾아 뚫고 나온들 내 눈에 비친 색깔들 조차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역시 세상 속에 나를 묻고 살아가는 수 밖엔.
"그렇게도 막막히도 바라보던 세상 그 세상이 너무도 아름다워 나는 울었습니다" 시인처럼은 아니지만 어렴풋이는 마음에 닿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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