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뒷북을 치자니 참 부끄러운 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애니메이션이 그저 '봐줘야 하는 것'이라거나 '그 정도라면 잘 하지 않았느냐' 정도의 칭찬아닌 칭찬을 들어야 하는 현실을 돌이켜 보면 더 많은 뒷북이라도 때려줘야 하지 않나 싶을 지경이다. 늘 '절반의 실패'보다 '절반의 성공'을 이야기하며 장미빛 미래를 꿈꾸게 했던 현실은 애니메이션을 아예 '애물단지'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애니메이션 '천년여우 여우비(이하 여우비)'는 이성강 감독이 나름 야심차게 준비한 두 번째 극장판 애니메이션이다. 애니메이션을 보던 나는 스물스물 화가 치밀기 시작하더니 중반을 넘어서면서 부터는 도저히 끝까지 보기 힘들 정도로 화가 났다. 애니메이션이 재미없다는 점에 화가 났고 저런 애니메이션을 50만 정도나 되는 관객이 가서 봐준 것도 화가 났고(관객의 수준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다.) 그로 인해 '블루시걸(블루*발이라고도 한다.)' 이후에 흥행에 성공한 애니메이션이라는 말을 듣는 것도 화가 났고, 이성강이라는 이름 앞에 여전히 '작가' 혹은 '한국의 미야자키' 혹은 '애니메이션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도 화가 났다. 게다가 최근엔 이성강의 '여우비'를 오마쥬한 듯한 '종이비행기'라는 학생용 장편 애니메이션 예고편이 이슈가 되는 것 역시 답답함에 한 몫을 하고 있다. 혹자는 '종이비행기'를 미야자키의 작품과 비교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고 있기도 하지만 어쩌나.. 그게 한국 애니메이션의 현실인걸.
'여우비'는 '나 3D 이만큼 잘해요!'라고 자랑하고 있고 '화면만 이쁘면 장땡'(사실 이쁘지도 않다)이라고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왕따 아이들을 다루고 있지만 왕따의 고민이 등장하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 노총각 푼수 남선생의 원맨쇼가 자주 이어지기도 하고 왕따인 꼬마 여자아이는 공주 옷을 입고 서양 아이처럼 생겼다. 처음에 뭔가 대단하게, 요란스럽게 등장한 외계인들과 여우비와의 관계도 어정쩡하고 게다가 나중엔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생뚱맞게 등장한 곰은 여우비를 구해주기 위해 억지로 등장해서 왜 자신이 등장했는지 모르겠다는 뚱한 표정으로 앉아있고 저 세상으로 들어가보면 이상한 환타지만 나열이 되고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을 따라하면서 티내지 않겠다는 강박도 보이고 여우비는 꼬리가 9개인 여우같은 슬픔같은 건 전혀 없고 그림자 탐정의 등장과 파멸의 개연성은 고리가 너무 약해보인다. 내용만 그런가. 레이아웃, 카메라의 운용, 칼라와 빛의 활용 등 언뜻 보면 화려하지만 조금만 몸을 앞으로 내밀어 들여다보면 너무 가비얍게 만들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홈페이지에는 레이어를 10개 이상 써서 퀄리티가 높다느니 하는 말도 안되는 소리로 홍보를 하고 있다. 그럼, 레이어를 20개 써서 작품을 만들어내면 심도가 생기고 퀄리티는 세계 최고가 되나? 오히려 절반의 실패로 봤었던 '마리이야기'가 '여우비'에 비하면 더 훌륭하게 느껴질 정도다.
어쨌든 ', 마리이야기'로 실패를 맛본 이성강 감독은 굴하지 않고 '여우비'까지 만들어 냈는데 이는 이성강 감독의 작품 세계가 좋아서 혹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어서 투자받아 제작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우비' 이전에 에로의 숨소리가 가득하다는 영화 '살결'을 감독했고 정부 지원금을 받아 애니메이션 '오늘이'를 만들었는데 그 모두 '마리이야기' 덕인 셈이라 볼 수 있다. 흥행에 참패한 '마리이야기'가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발 대상의 영예를 안게 된 것 역시 작품이 정말 대단해서라기 보다 페스티벌에 출품된 장편의 수가 적은 탓도 있었고 한국 애니메이션이 상을 받을 '때'가 되어서 대상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뒷골목으로 흘러다닐 정도였으니 극장에서의 참패한 것을 떠나서라도 안시 대상이라는 이유로 작품성, (극장판으로서의) 상업성 등을 인정되기엔 무리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한국 애니메이션계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는 경력은 결코 무시할 게 못된다. 150억원을 들여 '원더풀 데이즈'를 만든 김문생 감독 역시 흥행에 참패했지만 그 이후로 억 단위의 정부 지원금을 받아 일본아이치국제환경박람회 전시장에서 상영된 3D 입체 애니메이션 '트리로보'를 만들었고 그 이후에 장편 영화를 찍겠다느니 어쩌느니 하다가 프랑스의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함께 '개미'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든다고 한다. 이성강 감독도 마찬가지다. '마리이야기'의 흥행여부에는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은 비판보다 '애썼다' 혹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신기원'이라 운운하며 성공적인 면모만 부각시켜줬으니 그 이후의 행보는 여느 감독들보다 여느 애니메이터들보다 나은 길을 걸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흥행하지 못한 감독과 작품은 나쁘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이뤄놓은 결과물이 마땅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그들 역시 자신의 공과(功過)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고 그렇게 슬쩍 넘어가도 어느 누구하나 옷자락 붙들고 따지지도 않게 된 것 아닌가. 그 공과 중에 공(功)만 치하하고 과(過)에 대해서는 반성이 없으니 많은 사람들이 한국 애니메이션은 다 그런가보다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장선우 감독은 백 몇십 억 하는 돈을 화려하게 말아먹고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사죄라도 했다.(그런다고 그의 행위가 그다지 이쁘게 보이진 않는다. 게다가 장선우 감독은 장편 애니메이션 '바리공주'를 접어버리게 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바리공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작품과 감독에 대한 피드백이 많아지면 없던 관심도 생기게 마련이고 그 관심을 통해 그 사람들의 행보 역시 예의주시하게 된다. 함량미달의 작품과 감독의 마인드에 '칭찬'을 보내는 행위가 잘잘못을 덮어버리기 위한 '카르텔'로 사용되거나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켜보겠다는 안일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혹은 정말 한국 애니메이션 논할 가치도 없어서 글 몇 줄도 평하기 아까운 거라고 생각한다면 한국 애니메이션? 희망없다. 끝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