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MBC연기대상 사회를 보던 신동엽이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말을 꺼냈다. 함께 사회보던 한지혜가 우수상을 수상한 후 "하느님께 감사한다"는 수상소감을 들은 신동엽이 한국엔 다양한 종교가 있는데 한 번도 부처님께 감사한다던가 절에 함께 다니다 알게 된 오빠 이야기(같은 교회 오빠 얘기는 종종 나온다며 빗대어..)는 왜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말을 하더라. 많은 스포츠 스타, 연예인, 공인들이 대중들 앞에서 "하나님"을 들먹이는 행위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들이 있었을 텐데 신동엽이 대신 공적인 자리에서 해준 거라 볼 수 있겠다. 조금 불안하고 위험한 발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종교를 가진 모든 이들이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덧붙이고 싶은 얘기가 많지만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해야겠다. 신앙은 개인이 하는 것이다. 신앙을 강요하거나 너무 공개적이 되거나 모든 대중이 함께 같은 믿음을 같게 되면 광기로 흐를 확률이 높다.
여자 최우수상을 받은 배종옥의 말 한마디도 기억에 남는다. 연예인들도 외로울 수가 있는데 배우분들 외로우면 서로 손을 내밀고 잡아줄 수 있다는 말. 어쩌면 연예인들끼리의 연대, 소통, 교감을 말하는 것인데 정말 인간적인 정이 듬뿍 묻어나는 한마디다. 무슨 라인, 누구 사단 등으로 이합집산을 하는 세태이긴 하지만 그보다 좀 더 포괄적인 인간, 배우들 간의 관계를 역설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시 배종옥, 그녀를 좋아할 만 하다.
사족.
어제 MBC연예대상도 그렇지만 이번 MBC연기대상 역시 공동수상자가 너무 많다. 배우들을 욕먹이는 행위일 뿐 아니라 옥석을 가리는 일을 너무 쉽게 하려는 경향으로 보인다. 특히 대상 수상자가 김명민, 송승헌 두 명이라니, 말이 되나.
문소리의 그녀가 진보신당 심상정 의원을 위해 애를 썼던 걸 생각하면 별 것 아니지만 MBC 시위/집회 지지 발언 역시연예인들 사이에선 단연 돋보이는 정치발언이었다. 모든 인간은 정치적임을 감안할 때 한국의 연예인들은 너무나 정치적이지 않을 뿐더러 기회주의적 속성으로 일관되는 경우가 많다. 연예인이 정치적인 걸 눈 뜨고 봐주지 않는 팬들이 더 문제이긴 하다.
강석우의 다문화가정에 대한 이해와 화합에 대한 발언도 인상깊다. 양희은과 함께 여성시대를 진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게 많을 거 같은데 라디오에서 접하는 강석우는 세심하고 여성스럽고 눈물많고 감성적인 부분이 많다. 물론 전형적인 한국의 남성상같은 부분도 적잖이 느껴지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약자에 대한 배려가 많이 느껴진다. 그런 부분들이 수상소감으로 이어졌겠지.
박근형의 손주야 할애비 상 먹었어요...라는 수상소감은 너무 흐믓해서 좋았고 이문세의 여유있는 수상소감에 짤막한 노래 한소절이 좋았다. 하지만 많은 배우들의 여전히 빠지지 않는 자기 식구 챙기기식의 수상소감은 내겐 여전히 듣기 불편했다.
2008년 12월 30일 화요일
2008년 12월 29일 월요일
우리가 산유국이었다면...
우리가 산유국이었다면
세계최고의 유조선을 만들수 있었을까...
우리가 싸구려 제품이라는 서러움을 느끼지 못했다면
세계 최고의 TV를 만들 수 있었을까...
우리가 빨리빨리를 외치지 않았다면
최고의 디지털 강국이 되었을까...
모 광고에서 말하는 내용이다.
언뜻 들으면 우와~ 그렇지, 그렇고말고...라며 맞장구라도 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우리가 정경유착을 제대로 감시했다면
세계최고라는 대기업 삼송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교육문제에 보다 더 거시안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지금의 서울시 교육감이 선출될 수 있었을까.
우리가 보다 더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수 있었다면
지금의 대통령이 당선될 수 있었을까.
우리가 삶을 보다 더 나은 가치관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면
삶이 지금과 같을 수 있었을까.
우리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와
제대로 된 자본주의의 가치를 알고 사용할 줄 알았다면,
우리가 과거의 잘잘못을 제대로 가려내고
현재와 미래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면...
자본에 떠밀리지 않고도,
정치에 신물이 나지 않고도,
서로를 무한경쟁의 대상으로 보며 눈 부릅뜨지 않아도
삶이 더 풍요롭고 신명나지 않았을까.
삶을 어떻게 어루만지고 어떻게 키워낼까에 대한 해답은 그다지 먼곳에 있지 않다.
늘 자신과 어깨를 더불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면
그 다수의 사람들이 원하는, 가슴 깊은 곳에서 원하고 있는 삶의 모습은 대동소이하다.
지금은 그 모습을 주시하고 귀 기울여야 할 때다.
천재(天災)는 피해도 자신이 부른 화(禍)는 피하지 못한다.
天作孽,犹可违,自作孽,不可活。-孟子
천재(天災)는 피해도 자신이 부른 화(禍)는 피하지 못한다. -맹자
천재(天災)는 피해도 자신이 부른 화(禍)는 피하지 못한다. -맹자
하늘(자연)이 주는 재난이나 재앙은 그 자체로 사사로움이 없다. 인간이 좀 더 주의하고 노력하면 하늘이 주는 재난을 피할 수도 있고 자연과 더불어 화합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돌아오는 화(禍), 재앙은 반드시 돌려받게 되어있다. 자신이 지은 선업, 악업 모두 어떤 식으로든 돌려받게 된다는 건 동양의 사상이라거나, 불교의 인과설에 의한 것이라고 굳이 덧붙여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이건 과학적인 것이다. 달이 차면 기우는 것 처럼,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여름 후에는 가을이 오고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듯이 업은 그대로 돌려받게 되어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잘못된 업을 짓고 있을 때 그걸 알면서도 방관하는 건 공업(共業)을 짓는 것과 다름없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자신들만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몇 몇 개인의 명예욕을 채우기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을 힘겨운 나락으로 이끌고 있는 자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반드시 그들 스스로 부른 화(禍)에 의해 자멸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마저 자포자기하여 수수방관하는 건 암묵적 동의이기 때문에 거부하고 반대하며 공생(共生)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만 한다.
천재(天災)보다 무서운 건 인재(人災)다. 특히 인재는 감정과 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공멸(共滅)할 여지가 아주 크다. 지금 대한민국의 도처에 인재(人災)라는 시한폭탄이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다. 막아야 한다.
2008년 12월 23일 화요일
빅토르 최
빅토르 최, 오래 전 TV에서 소개해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그'의 존재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는데 그 때 본 다큐멘터리는 내게 무척 충격이었다. 위대한 한 인물을 알게 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빅토르 최"의 생애
빅토르 최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러시아어: 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 1962년 6월 21일 - 1990년 8월 15일)는 유명한 러시아의 록 가수이며, 전설적인 록 그룹 키노(КИНО)의 리더였다. 당시 소련 카자흐 공화국의 크질오르다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 1962년 6월 21일 태어났다. 1990년 8월 15일 라트비아 리가에서 버스에 치여 요절했다. 빅토르 초이는 러시아 록의 선구자로 여겨지며, 아직까지도 구소련 국가의 많은 팬들이 그를 기억하고 있다.
빅토르 초이는 1962년 카자흐 공화국의 크질오르다에서 태어났다. 17세 때부터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초기 곡들은 레닌그라드 거리에서의 삶, 사랑과 친구들과의 어울림 등을 다루고 있다. 노래의 주인공은 주로 한정된 기회만이 주어진 채 각박한 세상을 살아나가려는 젊은이였다. 이 시기에 록은 레닌그라드에서만 태동하고 있던 언더그라운드의 한 움직임이었으며, 음악차트등의 대중매체들은 모스크바의 팝스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가수들에게만 허가를 내 주었고, 집과 녹음실 등 성공이 필요한 많은 것들을 제공하여 길들였다. 그러나 록 음악은 소련 정부에게는 마땅치 않은 음악이었다. 록은 자본주의 진영의 록 그룹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외에도 젊은이들을 반항적으로 만들었으며, 의사표현의 자유 등의 가치를 중시했다. 따라서 록 밴드들은 정부로부터 거의 원조를 받지 못했고, 정부의 영향력 아래 있는 관영 매체로는 전혀 소개될 수 없었으며, 마약 중독자나 부량자라는 편견으로 그려지는 수준이었다.
빅토르 초이는 18세 때 다니고 있던 세로프 예술 학교에서 성적부진을 이유로 쫓겨나게 된다. 그러나 퇴학에도 불구하고 그는 록 음악에 계속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는 파티등의 장소에서 자신이 만든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한 연주를 록 그룹 아쿠아리움의 멤버였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가 보게 되어, 그래벤시코프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밴드를 시작하게 된다.
레닌그라드의 록 클럽은 록 밴드들이 연주할 수 있던 극소수의 장소에 속했다. 이곳의 연중 록 콘서트에서 빅토르 초이는 처음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그는 두 명의 아쿠아리움의 멤버들이 연주를 맡은 가운데 솔로로 연주한다. 그의 혁신적인 가사와 음악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가 유명해지기 전에 그는 음악하는 사람들이 도전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실험적으로 가사와 음악을 만들었다. 이런 시도는 성공을 거두고, 데뷰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멤버들을 모아 키노(러시아어 영화, 극장)를 결성한다. 그들은 빅토르 초이의 아파트에서 데모테입을 만들고, 이 테입은 처음엔 레닌그라드, 그리고 나중에는 전국의 록 매니아들에게 퍼지게 된다.
1982년 키노는 첫 앨범인 45(소록 피아트; 러시아어로 45라는 뜻)를 발표한다. 이 앨범의 이름이 45로 정해진 것은, 이 앨범의 재생시간이 총 45분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46(소록 쉐스트)라는 앨범도 냈다.) 이 앨범에서 빅토르 초이는 음악에 정치적 목소리를 내려는 의지를 내비친다. "외곽전철"이란 노래는 원치 않은 곳으로 가는 전차에 끼여 끌려가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런 가사는 분명히 당시의 소련에서의 삶을 은유한 것이었으며, 이 노래는 공연이 금지된다. 이 노래의 메시지로 노래는 반항운동을 하던 젊은이들 사이에 유명해지며 키노와 빅토르 초이는 그들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제2회 레닌그라드 록 클럽 컨서트에서 키노는 자신의 정치색을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키노는 빅토르의 반전음악인 "내 집을 비핵화지대로 선포한다."으로 1등을 차지하고, 이 노래는 당시 수만의 소련 젊은이들의 목숨을 빼았고 있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더욱 더 유명해진다.
1987년은 키노의 해였다. 7집 앨범 "혈액형"은 "키노마니아"로까지 불리는 사회현상을 불러일으킨다. 글라스노스트로 조금 더 개방적이 된 정치상황은 그의 가장 정치색이 짙은 앨범인 "혈액형"을 만들 수 있게했다. 그러나 앨범의 메시지만이 청중을 사로잡은 것이 아니었고, 앨범에 담긴 음악또한 이전에는 듣지 못하던 것이었다. 대부분의 곡은 소련의 젊은이들을 향한 외침이었으며, 능동적으로 나가서 국가를 변화시키라고 호소했다. 몇 개의 노래는 소련을 옥죄고 있던 사회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앨범은 빅토르 초이와 키노를 러시아 젊은이들의 영웅으로 등극시켰다. 이후 몇년간 그는 몇 편의 성공적인 영화를 찍었으며 영화제에 그의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몇 개의 앨범이 더 나왔으며, 대부분이 정치적 메시지를 담았으며 밴드는 인기를 유지했다. 그는 소련 젊은이 모두의 우상이었지만, 그는 비교적 보통 수준의 삶을 살았다. 그는 계속 아파트 빌딩의 보일러 실에서 살며 일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즐기고 있으며 정부의 보조를 받지 못하고 있고, 자신들의 앨범은 공짜로 복제되어 퍼지기 때문에 밴드를 유지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런 소박한 삶의 방식은 대중들이 그와 더욱 친밀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1990년 키노는 모스크바의 레닌 스타디움에서 컨서트를 열어 6만 2천의 팬들을 모았다. 1990년 8월 14일 다음 앨범의 녹음을 마쳤으며, 레닌그라드에서 다른 멤버들이 녹음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15일 아침 리가 외곽에서 빅토르 초이가 운전하던 차가 마주오던 버스와 충돌하였다. 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망가졌으며 타이어 하나는 결국 찾지 못했다. 8월 17일 소련의 유력 잡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다음과 같이 그의 의미를 간추린다.
키노가 소비에트 음악과 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들은 이전의 다른 어떤 그룹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음악과 가사로 노래를 만들었다. 키노는 모던 러시아 록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키노는 아직도 러시아 전역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레닌그라드 벽에는 그들에 대한 그라피티가 그려지고 있으며,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가에는 한 벽 전체가 그들에게 헌정되었으며, 그곳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팬들이 모인다. 사망 10주기였던 2000년에는 러시아의 록 밴드들이 모여 빅토르 초이의 38번째 생일을 맞아 빅토르 초이의 헌정 음반을 만들었다.
출처: 위키백과-빅토르 최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러시아어: 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 1962년 6월 21일 - 1990년 8월 15일)는 유명한 러시아의 록 가수이며, 전설적인 록 그룹 키노(КИНО)의 리더였다. 당시 소련 카자흐 공화국의 크질오르다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 1962년 6월 21일 태어났다. 1990년 8월 15일 라트비아 리가에서 버스에 치여 요절했다. 빅토르 초이는 러시아 록의 선구자로 여겨지며, 아직까지도 구소련 국가의 많은 팬들이 그를 기억하고 있다.
빅토르 초이는 1962년 카자흐 공화국의 크질오르다에서 태어났다. 17세 때부터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초기 곡들은 레닌그라드 거리에서의 삶, 사랑과 친구들과의 어울림 등을 다루고 있다. 노래의 주인공은 주로 한정된 기회만이 주어진 채 각박한 세상을 살아나가려는 젊은이였다. 이 시기에 록은 레닌그라드에서만 태동하고 있던 언더그라운드의 한 움직임이었으며, 음악차트등의 대중매체들은 모스크바의 팝스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가수들에게만 허가를 내 주었고, 집과 녹음실 등 성공이 필요한 많은 것들을 제공하여 길들였다. 그러나 록 음악은 소련 정부에게는 마땅치 않은 음악이었다. 록은 자본주의 진영의 록 그룹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외에도 젊은이들을 반항적으로 만들었으며, 의사표현의 자유 등의 가치를 중시했다. 따라서 록 밴드들은 정부로부터 거의 원조를 받지 못했고, 정부의 영향력 아래 있는 관영 매체로는 전혀 소개될 수 없었으며, 마약 중독자나 부량자라는 편견으로 그려지는 수준이었다.
빅토르 초이는 18세 때 다니고 있던 세로프 예술 학교에서 성적부진을 이유로 쫓겨나게 된다. 그러나 퇴학에도 불구하고 그는 록 음악에 계속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는 파티등의 장소에서 자신이 만든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한 연주를 록 그룹 아쿠아리움의 멤버였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가 보게 되어, 그래벤시코프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밴드를 시작하게 된다.
레닌그라드의 록 클럽은 록 밴드들이 연주할 수 있던 극소수의 장소에 속했다. 이곳의 연중 록 콘서트에서 빅토르 초이는 처음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그는 두 명의 아쿠아리움의 멤버들이 연주를 맡은 가운데 솔로로 연주한다. 그의 혁신적인 가사와 음악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가 유명해지기 전에 그는 음악하는 사람들이 도전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실험적으로 가사와 음악을 만들었다. 이런 시도는 성공을 거두고, 데뷰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멤버들을 모아 키노(러시아어 영화, 극장)를 결성한다. 그들은 빅토르 초이의 아파트에서 데모테입을 만들고, 이 테입은 처음엔 레닌그라드, 그리고 나중에는 전국의 록 매니아들에게 퍼지게 된다.
1982년 키노는 첫 앨범인 45(소록 피아트; 러시아어로 45라는 뜻)를 발표한다. 이 앨범의 이름이 45로 정해진 것은, 이 앨범의 재생시간이 총 45분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46(소록 쉐스트)라는 앨범도 냈다.) 이 앨범에서 빅토르 초이는 음악에 정치적 목소리를 내려는 의지를 내비친다. "외곽전철"이란 노래는 원치 않은 곳으로 가는 전차에 끼여 끌려가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런 가사는 분명히 당시의 소련에서의 삶을 은유한 것이었으며, 이 노래는 공연이 금지된다. 이 노래의 메시지로 노래는 반항운동을 하던 젊은이들 사이에 유명해지며 키노와 빅토르 초이는 그들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제2회 레닌그라드 록 클럽 컨서트에서 키노는 자신의 정치색을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키노는 빅토르의 반전음악인 "내 집을 비핵화지대로 선포한다."으로 1등을 차지하고, 이 노래는 당시 수만의 소련 젊은이들의 목숨을 빼았고 있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더욱 더 유명해진다.
1987년은 키노의 해였다. 7집 앨범 "혈액형"은 "키노마니아"로까지 불리는 사회현상을 불러일으킨다. 글라스노스트로 조금 더 개방적이 된 정치상황은 그의 가장 정치색이 짙은 앨범인 "혈액형"을 만들 수 있게했다. 그러나 앨범의 메시지만이 청중을 사로잡은 것이 아니었고, 앨범에 담긴 음악또한 이전에는 듣지 못하던 것이었다. 대부분의 곡은 소련의 젊은이들을 향한 외침이었으며, 능동적으로 나가서 국가를 변화시키라고 호소했다. 몇 개의 노래는 소련을 옥죄고 있던 사회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앨범은 빅토르 초이와 키노를 러시아 젊은이들의 영웅으로 등극시켰다. 이후 몇년간 그는 몇 편의 성공적인 영화를 찍었으며 영화제에 그의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몇 개의 앨범이 더 나왔으며, 대부분이 정치적 메시지를 담았으며 밴드는 인기를 유지했다. 그는 소련 젊은이 모두의 우상이었지만, 그는 비교적 보통 수준의 삶을 살았다. 그는 계속 아파트 빌딩의 보일러 실에서 살며 일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즐기고 있으며 정부의 보조를 받지 못하고 있고, 자신들의 앨범은 공짜로 복제되어 퍼지기 때문에 밴드를 유지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런 소박한 삶의 방식은 대중들이 그와 더욱 친밀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1990년 키노는 모스크바의 레닌 스타디움에서 컨서트를 열어 6만 2천의 팬들을 모았다. 1990년 8월 14일 다음 앨범의 녹음을 마쳤으며, 레닌그라드에서 다른 멤버들이 녹음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15일 아침 리가 외곽에서 빅토르 초이가 운전하던 차가 마주오던 버스와 충돌하였다. 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망가졌으며 타이어 하나는 결국 찾지 못했다. 8월 17일 소련의 유력 잡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다음과 같이 그의 의미를 간추린다.
빅토르 초이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다른 어떤 정치인들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한번도 거짓말하거나 자신을 팔아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빅토르 초이였고,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그를 믿지 않을 수 없다. 대중에게 보여지는 모습과 실제 삶의 모습이 다름없는 유일한 락커가 빅토르 초이이다. 그는 그가 노래 부른 대로 살았다. 그는 록의 마지막 영웅이다.놀랍게도 교통사고에서 온전하게 건질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다음 앨범에 쓰일 그의 목소리를 담은 테이프이었다. 목소리는 남은 멤버들의 나머지 녹음과 합쳐져 현재는 "블랙 앨범"으로 불리는 앨범으로 남아있다. 이 유작앨범은 밴드의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며 러시아 록 역사에 있어서 키노의 자리를 확고하게 했으며, 빅토르 초이를 최고의 영웅이자 전설로 만들었다.
키노가 소비에트 음악과 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들은 이전의 다른 어떤 그룹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음악과 가사로 노래를 만들었다. 키노는 모던 러시아 록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키노는 아직도 러시아 전역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레닌그라드 벽에는 그들에 대한 그라피티가 그려지고 있으며,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가에는 한 벽 전체가 그들에게 헌정되었으며, 그곳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팬들이 모인다. 사망 10주기였던 2000년에는 러시아의 록 밴드들이 모여 빅토르 초이의 38번째 생일을 맞아 빅토르 초이의 헌정 음반을 만들었다.
출처: 위키백과-빅토르 최
무척이나 한국에 와서 공연을 하고 싶었던 빅토르 최가 의문의 죽음(게다가 한국공연이 결정되고 한국으로 오기 전 8월 15일 광복절에 죽음을 맞이했다.)으로 떠나고 난 뒤 그를 따라 자살을 한 젊은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전설을 만들었던 빅토르 최. 다큐멘터리에서 소개되었던 내용 중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대목이 있다. 그의 공연 티켓 암표가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을 때도, 그의 앨범이 몇 백만 장씩 팔려나가고 있을 때도, 그가 출연한 영화가 큰 수익을 내고 있을 때도 그는 유명해지기 전에 하던 보일러공(火夫)으로서 일을 계속 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계속 노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그래야 노래를 계속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젊음의 이상적 삶을 몸소 살아낸 사람.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고 젊음의 자유를 완성한 사람. 러시아 정부로부터 많은 협박과 압력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은 굳건히 이뤄냈다. 미술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었던 그의 방에 남겨진 몇 점의 작품과 그가 좋아했던 이소룡 사진이 소개되었던 다큐멘터리 영상 속 그의 흔적들이 무척 그리워졌다. 그에게 부인과 어린 딸이 있었던가...
혈액형
어둡고 추운곳 그러나 그 거리는 우리의 발자국을 기다린다
군화위엔 별빛의 먼지
푹신한 소파, 십자 나사, 제때에 당겨지지 않은 방아쇠,
햇빛 비춰지던 시절이란 눈부신 꿈속에나 있을 뿐,
어둡고 추운곳 그러나 그 거리는 우리의 발자국을 기다린다
군화위엔 별빛의 먼지
푹신한 소파, 십자 나사, 제때에 당겨지지 않은 방아쇠,
햇빛 비춰지던 시절이란 눈부신 꿈속에나 있을 뿐,
치뤄야 할 댓가가 있다해도 헐값의 승리는 바라지도 않는다.
전우의 가슴을 밟고 싶지 않기에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단지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러나 하늘높이 솟은 별은 나를 전장으로 불러낸다
전우의 가슴을 밟고 싶지 않기에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단지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러나 하늘높이 솟은 별은 나를 전장으로 불러낸다
소매위에는 혈액형
소매위에는 나의 군번
전투로 향하는 내게 행운을 빌어주게
이 들판에 남게 되지 않기를
니 들판에 남게 되지 않기를
전투로 향하는 내게 행운을 빌어주게
[빅토르 최, 1962.6.21 - 1990.8.15]소매위에는 나의 군번
전투로 향하는 내게 행운을 빌어주게
이 들판에 남게 되지 않기를
니 들판에 남게 되지 않기를
전투로 향하는 내게 행운을 빌어주게
혈액형과 몇 개의 곡을 윤도현이 불렀다고 하는데 혈액형 부른 것만 들어봤다. 윤도현은 "혈액형"이란 노래를 분위기와 외피만 목소리에 두르고 노래를 하는 듯. 그러나 빅토르 최가 부르는 노래에는 묵직한 시대의 반항과 고민과 젊음의 방황과 자유가 묻어나온다.
Concert Version
English Version
2008년 12월 15일 월요일
이명박 담화문 송
정말 우왕~이다. 오바마의 "Yes, We Can" 같은 뮤직비디오가 한국에서는 나오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오바마는 흑인이기 때문에 연설도 랩처럼, 그들의 선조들처럼 몸에 밴 랩 리듬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치인 중 최초의 래퍼가 등장했다. 이런, 그럴싸하잖아. 연설문 편집하고 운율맞추고 가사 내용 재배치하느라 고생했겠다. 하지만 그 노력 이상으로 "이명박 담화문 송"은 강력한 힘을 실어 나른다.
[sense datum] - 감동적인 Will.i.am의 Yes We Can
이건 보너스~!!!
이런 걸 겹경사(?)라고 하나? 재밌는 동영상을 한꺼번에 두 개나 보게 되네. :P
그나저나 이라크 기자는 어떻게 되었을까...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이고
동영상을 보면 볼수록 느끼게 되는 건 부쒸~ 잘 피한다.-_-;;; 얄미울 정도로.-_-;;;
동영상을 보면 볼수록 느끼게 되는 건 부쒸~ 잘 피한다.-_-;;; 얄미울 정도로.-_-;;;
2008년 12월 14일 일요일
My fingers are the Shortest Link...
My fingers are the shortest link between my heart and the image I am creating - Petrov
내 손은 내 가슴과 내가 만든 이미지 사이를 이어주는 가장 짧은 연결고리다. - 알렉산더 페트로프
내 손은 내 가슴과 내가 만든 이미지 사이를 이어주는 가장 짧은 연결고리다. - 알렉산더 페트로프
Paint on Glass 기법의 대가, 알렉산더 페트로프(Aleksandr Konstantinovich Petrov). 그의 작품을 여러 편 보긴 했지만 1999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본 <노인과 바다;The Old Man & The Sea>는 잊을 수가 없다. 그 때 스크린에 선명하게 보여졌던 그의 지문과 손가락의 흔적들. 그리고 <노인과 바다>를 만들기 위해 견뎠을 오랜 시간, 자신과의 싸움이 느껴지며 <노인과 바다>를 보던 중에 몇 번을 울컥했다. 영상과 음악의 멋진 조화, 장인의 숨결과 영혼이 숨쉬는 듯한 매 프레임을 접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특히 거대한 참치와 힘겨루기를 하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듯 외치는 노인의 단발마는 온 몸의 세포를 흔들게 하는 강렬한 울림과 힘이 있었다. 지금도 그의 작품 <노인과 바다>를 보고 있으면 그 때의 감동과 설레임, 두근거림이 생각나 눈시울이 붉어지곤 한다. 어쩌면 그런 기억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그가 말하는 "My fingers are the Shortest Link..."란 말이 아주 강렬하게 다가온다.
내 가슴과 내가 만든 이미지(애니메이션)의 연결고리
내 삶과 세상과의 연결고리
나와 당신과의 연결고리
2008년 12월 7일 일요일
어쩌나
어쩌나
보고싶단 말은 부담줄까 미안하고
그립다는 생각은 들킬까봐 부끄럽고
사랑한단 말은 죄스럽다 하여
온종일 쏟아지는 햇살에
슬퍼지려는 마음조차
그러는 내가 미워라.
봄인데 잎 하나 떨어지면
가을 착각하여 우수에 젖고
비내리면 종일 속 빈 기타를 두드려
내 허한 속을 토해내다
행여나 전화올까 잠도 못자고
거닐다 마주칠까 서성거리고
그러면서도 당신께 부담줄까
걱정하는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하늘아래 행복한 사람.
보고싶단 말은 부담줄까 미안하고
그립다는 생각은 들킬까봐 부끄럽고
사랑한단 말은 죄스럽다 하여
온종일 쏟아지는 햇살에
슬퍼지려는 마음조차
그러는 내가 미워라.
봄인데 잎 하나 떨어지면
가을 착각하여 우수에 젖고
비내리면 종일 속 빈 기타를 두드려
내 허한 속을 토해내다
행여나 전화올까 잠도 못자고
거닐다 마주칠까 서성거리고
그러면서도 당신께 부담줄까
걱정하는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하늘아래 행복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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