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언젠가 앞으로 최소한 10년-20년 동안은 이 나라에서 살기가 참 퍽퍽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상위 5%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구조 때문만은 아니다. 국민의 95%가 보수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물론 정확한 통계가 나오지도 않았고 근거를 댈 만한 것도 없다. 그냥, 주변을 살펴보면 그렇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그 보수가 과거처럼 정치적, 사상적으로 극명하게 표시가 나는 보수 또는 우파, 극우와 같아 보이진 않는다.
인간의 존엄, 삶의 가치, 평등, 자유 등등은 이젠 절판이 된 책에서나 나올 법한 가치없는 메아리가 되어버렸다. 대신 자본(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고 그를 쟁취하기 위해 무한경쟁으로 내몰려진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세상이 되었다. 그 세상의 가치를 부정하고 철지난 가치를 들먹이면 바로 감각없는 사람이 되고 무능력한 사람이 되고 마는 세상에서 소통하고 의견을 나누며 함께 어깨걸이를 한다는 건 허황된 꿈이 되고 말았다.
김규항의 '사람의 일이란'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건 알게 모르게 오랜동안 몸과 마음을 겪어왔던, 체험했던 지난 날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이미 그렇게 변해버렸다. 언제부턴가 급속도로 좌우의 균형도 잃어버렸고 상하의 격차는 심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함께 '돈'과 '권력'에 올인을 하며 만들어놓은 사회구조에서는 개인발언이 쉽게 묻혀버리기 일쑤고 올바른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한다며 무시당하기 일쑤인 세상이 되었다. 더 자극적이지 않으면 타당한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사실, 이보다 더 걱정스러운 일은 늘 거부하던 사회,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거품물고 비판하다가 점점 자신도 모르게 그 사회에 동화가 되어가는 것이다. 사회, 인간에 대한 문제의식은 단 몇 개월, 몇 년을 유지하면 선방한 셈이 되고 시간이 흘러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않아도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며 동화되어서는 결국 앞장서서 변한 세상의 선봉에 서 '돈'과 '권력'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의 대결이 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지금은 상식과 비상식의 대결이라고 한다. 상식을 부르짖는 사람들끼리도 '자본'과 '권력' 앞에서는 다시 '상식(현실)'과 '비상식(비현실)'로 나뉘어 대립한다. 상식은 시대에 따라 늘 바뀌기 마련이다. 그래서 상식과 비상식이라는 말로 대립한다고 해도 세상이 더 나아지게 될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능력없는 자신을 탓하기도 하면서 고민 중이고 또 고민 중이다.
2009년 1월 18일 일요일
2009년 1월 17일 토요일
미네르바는 21세기 홍길동
한국사회에 여러가지 면에서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던 '미네르바'. 그런데 신동아가 인터뷰한 '미네르바'와 검찰에 구속기소된 '미네르바'가 다르단다. 아, 재밌어진다. '미네르바'는 가히 21세기의 홍길동이라 할 만 하다. 홍길동은 탐관오리들을 혼내줄 때 직접 일일이 혼내지 않았다. 분신술을 쓰거나 홍길동을 가장한 수 많은 가짜 홍길동들이 대행을 했다. 게다가 그는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허(許)하지 않는 사회'에 '호부호형을 허하도록' 일갈하지 않았던가.

미네르바는 그 어떤 비관적 전망도 불허하는 이 시대에 비관적인 상황을 비관적이라 말하고, 바보를 바보라 말하며 진실을 전했다. 게다가 실명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저 넓은 네트에서 오로지 진실을 전하는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수 많은 추종자를 만들어냈다. 그 추종자들은 다시 '미네르바'를 대신하고 그 이름을 사용해 암흑에 가려 자칫 빛을 읽을 뻔 했던 진실을 만방에 알리는 역할을 자임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탐관오리들을 조롱하고 풍자하며 모든 백성들에게 진실을 알리고자 했다.
서자로 태어나 천대를 받던 홍길동은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고 신분차별에 괴로워하다 스스로 '활빈당'을 만들어 의적이 된다. 검찰에 구속된 '미네르바'는 엘리트 교육을 받지 못한 비전문가라며 사회의 엘리트들에게 조롱을 받고 있다. 학벌사회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법은 학벌을 숨기고 신분을 숨기는 '둔갑술'을 사용하는 수 밖에 없다. 지금 광활한 네트에는 '둔갑술'로 세상을 구하려는 수 많은 '의적'들이 활동을 하고 있다. 사회에 차별이 극심하고 나라가 어지러워져 부정부패가 심해지면 과거엔 종종 의적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하긴 뭐,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의적들은 바로 '어'장수 일당들이나 '검'찰님들에게 토벌당할 확률이 너무 많아 쉬이 만들어지지도 못하겠다.
암튼, 홍길동이 세우려했던 '율도국'이 '미네르바 공화국'으로 탄생될 것인가, 아니면 미네르바만의 '유토피아'가 건설될 수 있을 것인가 궁금하다. 이보다 더 관심이 가는 건 얼마나 많은 '미네르바' 분신들이 넷상에서 '활자당'을 만들어 거꾸로 가는 시대에 대한 건전한 불응활동을 하는 가이다. 21세기 홍길동의 탄생은 자발적이라기 보다 높으신 분들이 만들어 놓은 분위기에 떠밀려 태어났다. 어떤 시대에서나 자발적 영웅은 존재하지도 않을 뿐더러 자발적 영웅이 탄생된다면 그건 미친 사람일 확률이 많다. 저 어딘가에서 스스로가 난세를 헤쳐나갈 최고의 리더, 영웅인 것처럼 떠들어 대는 이(李)씨를 보면 그렇다.
* 지금 상황에서는 두 '미네르바' 중 한 쪽은 거짓이 확실할 테니 신동아던 검찰이던 쪽팔리게 생겼다. 사실 일개 블로거가 쓴 글들을 가지고 '구속'을 하고 '처벌'할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무엇이 진실이건 간에 검찰이 이미 자충수를 둔 건 확실해 보인다. 그 검찰 뒤에 서서 목 빳빳이 들고 있는 사람들도 똑같긴 마찬가지고.

미네르바는 그 어떤 비관적 전망도 불허하는 이 시대에 비관적인 상황을 비관적이라 말하고, 바보를 바보라 말하며 진실을 전했다. 게다가 실명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저 넓은 네트에서 오로지 진실을 전하는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수 많은 추종자를 만들어냈다. 그 추종자들은 다시 '미네르바'를 대신하고 그 이름을 사용해 암흑에 가려 자칫 빛을 읽을 뻔 했던 진실을 만방에 알리는 역할을 자임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탐관오리들을 조롱하고 풍자하며 모든 백성들에게 진실을 알리고자 했다.
서자로 태어나 천대를 받던 홍길동은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고 신분차별에 괴로워하다 스스로 '활빈당'을 만들어 의적이 된다. 검찰에 구속된 '미네르바'는 엘리트 교육을 받지 못한 비전문가라며 사회의 엘리트들에게 조롱을 받고 있다. 학벌사회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법은 학벌을 숨기고 신분을 숨기는 '둔갑술'을 사용하는 수 밖에 없다. 지금 광활한 네트에는 '둔갑술'로 세상을 구하려는 수 많은 '의적'들이 활동을 하고 있다. 사회에 차별이 극심하고 나라가 어지러워져 부정부패가 심해지면 과거엔 종종 의적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하긴 뭐,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의적들은 바로 '어'장수 일당들이나 '검'찰님들에게 토벌당할 확률이 너무 많아 쉬이 만들어지지도 못하겠다.
암튼, 홍길동이 세우려했던 '율도국'이 '미네르바 공화국'으로 탄생될 것인가, 아니면 미네르바만의 '유토피아'가 건설될 수 있을 것인가 궁금하다. 이보다 더 관심이 가는 건 얼마나 많은 '미네르바' 분신들이 넷상에서 '활자당'을 만들어 거꾸로 가는 시대에 대한 건전한 불응활동을 하는 가이다. 21세기 홍길동의 탄생은 자발적이라기 보다 높으신 분들이 만들어 놓은 분위기에 떠밀려 태어났다. 어떤 시대에서나 자발적 영웅은 존재하지도 않을 뿐더러 자발적 영웅이 탄생된다면 그건 미친 사람일 확률이 많다. 저 어딘가에서 스스로가 난세를 헤쳐나갈 최고의 리더, 영웅인 것처럼 떠들어 대는 이(李)씨를 보면 그렇다.
* 지금 상황에서는 두 '미네르바' 중 한 쪽은 거짓이 확실할 테니 신동아던 검찰이던 쪽팔리게 생겼다. 사실 일개 블로거가 쓴 글들을 가지고 '구속'을 하고 '처벌'할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무엇이 진실이건 간에 검찰이 이미 자충수를 둔 건 확실해 보인다. 그 검찰 뒤에 서서 목 빳빳이 들고 있는 사람들도 똑같긴 마찬가지고.
** 미네르바 공화국(영어: Republic of Minerva) 또는 미네르바 공국은 오세아니아의 인공 섬에서 시도했던 초소형국민체이다.
** 초소형국민체(超小型國民體, Micronation)는 기본적으로 서류상에서나 또는 인터넷, 또는 창시자들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유사 국민 주체 또는 유사 국가 주체이다. 초소형국민체 중 몇몇은 물질적인 기반을, 예를 들어 통화나 깃발 또는 우표 등을 만들었다.
"초소형국민체"라는 용어는 1990년대에 출현한 신종어이다. 이 시기에 작은 유사 국가 주체들이 수천 개 생겨나게 되었다. 일단 용어가 자리잡게 되자 19세기부터 존재했으나 인정받지 못했던 몇 가지 정치적 주체들에게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 초소형국민체(超小型國民體, Micronation)는 기본적으로 서류상에서나 또는 인터넷, 또는 창시자들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유사 국민 주체 또는 유사 국가 주체이다. 초소형국민체 중 몇몇은 물질적인 기반을, 예를 들어 통화나 깃발 또는 우표 등을 만들었다.
"초소형국민체"라는 용어는 1990년대에 출현한 신종어이다. 이 시기에 작은 유사 국가 주체들이 수천 개 생겨나게 되었다. 일단 용어가 자리잡게 되자 19세기부터 존재했으나 인정받지 못했던 몇 가지 정치적 주체들에게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2009년 1월 16일 금요일
신경민 앵커, "무엇을 위한 중립이고 객관인가"
새로운 세기에는 진실이 아닌 것들이 너무 많이 유포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진실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 <저널리즘의 기본요소>
즐겨 들었던 MBC라디오 <뉴스의 광장>에서 흘러나오던 건조하면서도 힘있고 날선 멘트의 뉴스앵커가 어느 날 MBC뉴스데스크에 등장을 했다. 엄기영 앵커가 사장으로 취임한 후 그의 후임으로 모 앵커(이름을 모르겠음)가 나왔는데 새로 온-어색한 옷을 입은 듯한 앵커를 보면서는 저렇게 인상좋은 아저씨가 뉴스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뉴스가 너무 생동감이 없는데?..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뉴스의 광장>의 카랑카랑한 신경민 앵커가 떠올랐다.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신경민 앵커가 MBC뉴스데스크에 얼굴을 내밀었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신경민 앵커의 멘트 하나하나에 가끔씩 쾌감도 느꼈고 저렇게 편파(?)적인 멘트를 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거침없는, 자신감에 찬 멘트에 속이 후련했었다. 그가 TV앵커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의 날카로운, 저널리스트다운 멘트를 다시는 들을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기우였다. 처음에 마무리멘트에서 슬쩍슬쩍 이야기를 풀어놓는가 싶더니 요즘은 그 멘트가 듣고 싶어서 뉴스를 본다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신경민 앵커만의 "마무리 멘트 코너"로 자리를 잡았다.
김 화제의 클로징멘트 이야기를 해볼까요. 일단 신경민 앵커 클로징멘트의 특징은 “여야 모두 각성이 필요합니다”류의 주례사적 멘트가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단순치 않은 정보를 담을 때가 많다는 점인데요.
신 공자, 맹자, 예수님, 부처님 말씀 같은 말을 싫어해서 되도록 피해요. 그런 말은 교회나 절에 가도 들을 수 있고, 서점에 처세술 알려주는 책이 산더미인데 제가 할 필요가 없죠. 불과 20, 30초지만 나만이, 아니 기자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자로서 내가 알거나 접근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되 팩트와 논리, 관점을 취재기자나 정보를 가진 사람에게 더블 체크받고 모자라면 다시 객관적 인물한테 검증받습니다. 때로는 내 독선을 배제하기 위해 남이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기도 합니다. 가령 내가 대운하를 반대한다고 해서 뉴스에서 “나, 대운하 반대합니다”라고 하면 누가 귀기울이겠습니까? 어느 정치인이 이야기할 때를 기다렸다가 이러저러한 것을 검토해야 한다고 멘트를 하죠. 정치인이 아닌 기자이기 때문에 그것이 어떻게 보면 한계죠.
출처: 클로징멘트 30초, 혼을 담은 '독자 꼭지'
신 공자, 맹자, 예수님, 부처님 말씀 같은 말을 싫어해서 되도록 피해요. 그런 말은 교회나 절에 가도 들을 수 있고, 서점에 처세술 알려주는 책이 산더미인데 제가 할 필요가 없죠. 불과 20, 30초지만 나만이, 아니 기자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자로서 내가 알거나 접근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되 팩트와 논리, 관점을 취재기자나 정보를 가진 사람에게 더블 체크받고 모자라면 다시 객관적 인물한테 검증받습니다. 때로는 내 독선을 배제하기 위해 남이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기도 합니다. 가령 내가 대운하를 반대한다고 해서 뉴스에서 “나, 대운하 반대합니다”라고 하면 누가 귀기울이겠습니까? 어느 정치인이 이야기할 때를 기다렸다가 이러저러한 것을 검토해야 한다고 멘트를 하죠. 정치인이 아닌 기자이기 때문에 그것이 어떻게 보면 한계죠.
출처: 클로징멘트 30초, 혼을 담은 '독자 꼭지'
신경민 앵커에는 다 이유가 있다. 위도 쳐다보지 않는다. 옆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저 독자들과 시청자들에게 전해야 할 진실과 진실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에 대해서 말할 뿐이다. 진실을 위한 올곧음이랄까. 그가 저널리스트라고 불려지길 원한다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그가 너무 주관적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기자가, 앵커가 너무 주관적이 되면 진실을 왜곡, 호도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서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앵커로서 주관적 시각을 담는 편인데?
= 앵커는 객관·중립적이어야 하고 정치적으로 무색무취여야 한다는 게 교본처럼 통용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다? 무엇을 위한 중립이고 객관인가. 무색무취가 지고지순한 가치가 될 수 없다. 70년대부터 지금과 같은 뉴스제작시스템이 정착된 이래 삼십여년 동안 앵커의 자율권을 침해한 적은 거의 없었다. 앵커가 상층부와 은밀한 거래를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가끔 편집 라인에서 멘트에 대한 제안을 할 때가 있지만 사전검열은 없다. 사후 시비가 붙는 경우는 있다. ‘뉴스데스크’ 진행 9개월 동안 몇차례 불평이 있었다. 부장 후배들이 불평을 하면 수긍이 가는 부분도 있고 내가 지나쳤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클로징 멘트에 우려를 하는 것은 보도국이 집합체라서 그렇다. 종일 협의를 하면서 뉴스를 만들고 데스킹을 거쳐서 리포트가 나가게 되는데, 앵커가 다른 목소리를 내면 불만이 터질 수 있다.
출처: 신경민 앵커 "방통위원장이 정명 찾으라 공갈 칠 일 아니다"
= 앵커는 객관·중립적이어야 하고 정치적으로 무색무취여야 한다는 게 교본처럼 통용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다? 무엇을 위한 중립이고 객관인가. 무색무취가 지고지순한 가치가 될 수 없다. 70년대부터 지금과 같은 뉴스제작시스템이 정착된 이래 삼십여년 동안 앵커의 자율권을 침해한 적은 거의 없었다. 앵커가 상층부와 은밀한 거래를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가끔 편집 라인에서 멘트에 대한 제안을 할 때가 있지만 사전검열은 없다. 사후 시비가 붙는 경우는 있다. ‘뉴스데스크’ 진행 9개월 동안 몇차례 불평이 있었다. 부장 후배들이 불평을 하면 수긍이 가는 부분도 있고 내가 지나쳤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클로징 멘트에 우려를 하는 것은 보도국이 집합체라서 그렇다. 종일 협의를 하면서 뉴스를 만들고 데스킹을 거쳐서 리포트가 나가게 되는데, 앵커가 다른 목소리를 내면 불만이 터질 수 있다.
출처: 신경민 앵커 "방통위원장이 정명 찾으라 공갈 칠 일 아니다"
무엇을 위한 중립이고 객관인가. 정치인들이 개거품을 물며 입에 가장 많이 올리는 단어는 '국민'이다. 그들이 말하는 국민과 내가 생각하는 국민이 다르다. 그들이 말하는 대한민국과 내가 생각하는 대한민국은 이미 주관적인 견해와 해석차이 때문에 다를 수 밖에 없다. 세상에 100% 중립이 있을까. 100% 객관이 있을까. 뉴스를 전하는 앵커가 사실만을 읽어내려간다면 뉴스데스크 의자에 굳이 사람을 앉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사를 읽어주는 로봇이 있으면 된다. 사람의 얼굴을 보며 뉴스를 보고 듣는다는 것 자체만으로 이미 그 사람이 주는 인상과 그 사람이 속해있는 미디어에 대한 주관적 판단이 개입한다.
흔히들 중립을 지키는 사람을 도덕군자처럼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중립'을 이도저도 아닌, 이쪽 편도 아니고 저쪽 편도 아닌 '회색분자'를 일컬을 때가 많다. 그렇다고 황희정승이 말하는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를 '회색분자'의 말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중립 혹은 중용은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걸 말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명확한 입장표명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시대를 읽어내는 눈과 마음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단, 진실을 왜곡하거나 자신의 기호대로 변형하지 않는 것. 이것이 중립이며 중용이다.
신경민 앵커가 MBC뉴스데스크 앵커를 언제까지 하게 될지, 또 그의 이런 태도들이 언제쯤 진정한 저널리스트로 평가받게 될지 궁금하다. 많은 논란 속의 신경민 앵커가 보여주는 일련의 멘트와 행보들은 어쩌면 언젠가 대한민국에서 참언론인, 저널리스트의 표준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신경민 앵커는 진실이 쉽게 가려지는 세상에서 진실을 어떻게 발견할 것이며 진실을 어떻게 들여다 볼 것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도대체 진실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매일 밤 9시에 치열하게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
허드슨 강의 기적과 부산 영도구의 악몽
불이 난 노래방에서 종업원이 손님들의 대피를 소극적으로 유도했다면? 그 종업원들에게 어디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허드슨 강에 불시착을 유도한 에어버스 A320기 기장은 모든 승객이 탈출을 하고 난 후에도 남은 사람이 있는지 두 번이나 확인을 하고 나왔다는 기사를 읽으며 부산 영도구의 비극이 떠올랐다.
부산 영도구의 한 노래방에서 일어난 화재의 경우 불이 난 이후 안에 있던 사람들 중 먼저 화재를 발견한 종업원들은 안전하게 대피해 살아남았고 손님들은 질식사를 했다는 건 무척 아쉬운 부분이다. 문을 열고 불이 났으니 대피하라고 말을 건네는 데 10초도 걸리지 않을 일인데 급한 마음에 자신들만 몸을 피했다니 생각할 수록 아쉽기만 하다.
허드슨 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기장과 부산 영도구의 일을 결부시키는 건 무리인 줄 안다. 비행기 기장과 노래방 종업원을 단순비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며칠 간격으로 상반된 내용을 접하다 보니 문득 직업의식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직업윤리, 직업의식에 대한 그 어떠한 규정도 사회적 합의도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위급상황에서 똑같은 행동을 하진 못한다.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직업, 위치에 맞는 행동양식과 규범 정도는 제대로 숙지를 해야 하고 인지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만약 노래방 따위에 무슨 규범, 의식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런 이유로 인해 많은 직업과 직장에서 직업의식과 직업윤리 실종이 자주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흔히 말하는 손님에 대한 예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부심, 열정같은 것 말이다.
작은 차이가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쉽게 방심하거나 가볍게 무시해서는 안 될 일들이 많다.
부산 영도구의 한 노래방에서 일어난 화재의 경우 불이 난 이후 안에 있던 사람들 중 먼저 화재를 발견한 종업원들은 안전하게 대피해 살아남았고 손님들은 질식사를 했다는 건 무척 아쉬운 부분이다. 문을 열고 불이 났으니 대피하라고 말을 건네는 데 10초도 걸리지 않을 일인데 급한 마음에 자신들만 몸을 피했다니 생각할 수록 아쉽기만 하다.
허드슨 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기장과 부산 영도구의 일을 결부시키는 건 무리인 줄 안다. 비행기 기장과 노래방 종업원을 단순비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며칠 간격으로 상반된 내용을 접하다 보니 문득 직업의식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직업윤리, 직업의식에 대한 그 어떠한 규정도 사회적 합의도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위급상황에서 똑같은 행동을 하진 못한다.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직업, 위치에 맞는 행동양식과 규범 정도는 제대로 숙지를 해야 하고 인지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만약 노래방 따위에 무슨 규범, 의식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런 이유로 인해 많은 직업과 직장에서 직업의식과 직업윤리 실종이 자주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흔히 말하는 손님에 대한 예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부심, 열정같은 것 말이다.
작은 차이가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쉽게 방심하거나 가볍게 무시해서는 안 될 일들이 많다.
2009년 1월 5일 월요일
노예들의 세상, 대한민국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삼성, 현대, LG 등 국내 30대 기업끼리 다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건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서로 친인척 관계거나 사돈을 맺거나 사돈의 사돈을 맺는 식으로 그들의 공화국은 건설되었다. 삼성과 현대, LG가 서로 경쟁을 한다고 하더라도 혹은 조중동이 서로 경쟁을 한다고 해도 엄밀한 의미에서 제대로 된 경쟁은 아닐 것이다. 경쟁을 가장한 협업이라고 해도 될까.
문득 이 나라 대한민국에 사는 국민들은 그들의 노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제외하곤 중상층이라는 사람들은 노예들의 대장, 관리감독급이고 그 밑으로는 죄다 노예의 몸값으로 줄세워지지 않았나 싶다. 많은 이들이 열심히 일해서 가정을 이루고 자신의 소박한 꿈을 이루겠다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들이 열심히 일한 노동의 댓가와 피와 땀의 결실은 결국엔 대한민국의 족벌체제인 30대 기업들의 손으로 들어가는 것 아닌가.
도덕이 바로 서지 못하고 교육이 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정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사는 국민들은 족벌들을 위해 일생동안 피와 땀을 바쳐야 하는 노예와 다를 바 없다. 물론 노예들 중에 가끔씩 특출난 노예들이 있어 서울대 나와 유학도 다녀오고 변호사, 의사가 되고나면 족벌 중의 어느 누구와 일가를 이루게 되는 그야말로 주인에게 간택되어 삶을 활짝 펴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 그마저도 안되면 주인에게 배운대로 자신보다 힘없고 빽없는 자들을 2중, 3중으로 옭아서 자신들의 노예로 삼고 작은 어르신 흉내를 내면서 살겠지. 계산기 두드려봐도 그렇게 살게 되는 사람보다 노예로 평생을 살다 가는 사람들이 수십, 수백곱절은 많을 게다. 그런데 그 많은 이들은 이 세상이 자신들의 세상이라고 믿지 않는 것 같다. 이 세상을 송두리째 주인들에게 넘기는 것만이 노예로서 충실한 본분을 다하는 것이라 믿는 것 같다.
말이 좋아 민주고 말이 좋아 대의정치라지, 말이 좋아 공교육이고, 말이 좋아 주공아파트라지. 언제 단 한 번이라도 국민들이, 서민들이 살 집 걱정하지 않고 입고 먹는 것 걱정하지 않고 살아온 적 있던가. 꼬박꼬박 건강보험료를 내도 병원비 때문에 병원문턱에 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도 제 집도 아닌데 전세사는 것만으로도, 지하 단칸방에 고단한 몸 하나 뉘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께 감사하고 나랏님에게 감사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 국민 아니었나. 못 배워서 세상이 이모양 이꼴은 아닌 것 같고 아마도 잘못 배워서 그런 걸 테지.
이 세상은 주인들의 것인가, 노예들의 것인가. 이 나라를, 이 땅을 주인들이 소유할 권한이 있던가. 그들이 과연 노예들의 주인이 맞는가. 이 나라 주인행세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노력봉사하는 사람들의 배를 곯리고 심지어 착취를 하고 하소연을 해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세상이 달라졌는데도 주인행세하는 자들은 여전히 이 세상이 자신들의 것인양 오만을 부린다. 정상인 세상을 되찾아오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알면서도 지금 이 상태가 여전히 익숙하고 편해서 모른 척 눈감고 있는 걸까.
(씁쓸한 소식만 들려오는 날들이라...)
문득 이 나라 대한민국에 사는 국민들은 그들의 노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제외하곤 중상층이라는 사람들은 노예들의 대장, 관리감독급이고 그 밑으로는 죄다 노예의 몸값으로 줄세워지지 않았나 싶다. 많은 이들이 열심히 일해서 가정을 이루고 자신의 소박한 꿈을 이루겠다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들이 열심히 일한 노동의 댓가와 피와 땀의 결실은 결국엔 대한민국의 족벌체제인 30대 기업들의 손으로 들어가는 것 아닌가.
도덕이 바로 서지 못하고 교육이 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정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사는 국민들은 족벌들을 위해 일생동안 피와 땀을 바쳐야 하는 노예와 다를 바 없다. 물론 노예들 중에 가끔씩 특출난 노예들이 있어 서울대 나와 유학도 다녀오고 변호사, 의사가 되고나면 족벌 중의 어느 누구와 일가를 이루게 되는 그야말로 주인에게 간택되어 삶을 활짝 펴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 그마저도 안되면 주인에게 배운대로 자신보다 힘없고 빽없는 자들을 2중, 3중으로 옭아서 자신들의 노예로 삼고 작은 어르신 흉내를 내면서 살겠지. 계산기 두드려봐도 그렇게 살게 되는 사람보다 노예로 평생을 살다 가는 사람들이 수십, 수백곱절은 많을 게다. 그런데 그 많은 이들은 이 세상이 자신들의 세상이라고 믿지 않는 것 같다. 이 세상을 송두리째 주인들에게 넘기는 것만이 노예로서 충실한 본분을 다하는 것이라 믿는 것 같다.
말이 좋아 민주고 말이 좋아 대의정치라지, 말이 좋아 공교육이고, 말이 좋아 주공아파트라지. 언제 단 한 번이라도 국민들이, 서민들이 살 집 걱정하지 않고 입고 먹는 것 걱정하지 않고 살아온 적 있던가. 꼬박꼬박 건강보험료를 내도 병원비 때문에 병원문턱에 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도 제 집도 아닌데 전세사는 것만으로도, 지하 단칸방에 고단한 몸 하나 뉘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께 감사하고 나랏님에게 감사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 국민 아니었나. 못 배워서 세상이 이모양 이꼴은 아닌 것 같고 아마도 잘못 배워서 그런 걸 테지.
이 세상은 주인들의 것인가, 노예들의 것인가. 이 나라를, 이 땅을 주인들이 소유할 권한이 있던가. 그들이 과연 노예들의 주인이 맞는가. 이 나라 주인행세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노력봉사하는 사람들의 배를 곯리고 심지어 착취를 하고 하소연을 해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세상이 달라졌는데도 주인행세하는 자들은 여전히 이 세상이 자신들의 것인양 오만을 부린다. 정상인 세상을 되찾아오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알면서도 지금 이 상태가 여전히 익숙하고 편해서 모른 척 눈감고 있는 걸까.
(씁쓸한 소식만 들려오는 날들이라...)
2009년 1월 1일 목요일
You can fool all the people - 새 해를 맞이하며...
You can fool all the people some of the time,
and some of the people all the time, but you cannot fool all the people
all the time. -링컨.1858.
링컨과 동시대를 살았던 유명한 흥행사 바넘(Phineas Taylor Barnum)이 먼저 이 말을 했지만 링컨이 16대 대통령이 되기 몇 해 전에 이 말을 한 뒤로 링컨이 한 말로 알고 있다고 한다. 누구 먼저 말을 했는지를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위에 소개한 문장이 의미하는 바에 생각이 많이 머문다.
2009년 올 한해는 나라의 지도자(들)가 저 말을 경구로 사용했으면 싶다. 언론을 쥐락펴락하려 하거나 언론자유를 봉쇄하려는 집단은 금새 몰락의 길을 걷게 마련이다. 그들이 여태 싸질러놓은 말에 대해 전에 그들이 한 말을 찾아내서 하나하나 알려주는 짓도 못할 짓 아닌가. 정치인은 원래가 거짓말을 잘하는 종자들이라고는 하지만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해도해도 너무한다. 물론 국민들이 좀 빨리 잊기도 하고 좀 어리숙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눈가리고 아웅하는 거짓말,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르면 다 밝혀질 거짓말, 검색엔진 돌리면 들통 날 거짓말들을 하루에도 무한도전 녹화방송 분량으로 쏟아내고 있으니 답답하지 않겠나.
정직한 정치, 충분히 가능하다. 조금 더 노력하고 발품 팔고 고생은 되겠지만 그러라고 국민들 세금 펑펑 가져다 주는 거 아닌가. 어물쩍 거짓말로 위기상황 모면하고 사리사욕 위해 국민과 국가, 공공(公共)에게 사기치지 말고 좀 더 바르게 하면 안되겠니? XX~!! You cannot fool all the people all the time이라니깐!!!
그들은 너를 미워하리라 - 한 해를 보내며...
Tell people something they know already and they will thank you for it.
Tell them something new and they will hate you for it.
그들이 이미 아는 것을 말해주어라. 그러면 그들은 너에게 감사하리라.
그들에게 새로운 것을 말해주어라. 그러면 그들은 너를 미워하리라.
Tell them something new and they will hate you for it.
그들이 이미 아는 것을 말해주어라. 그러면 그들은 너에게 감사하리라.
그들에게 새로운 것을 말해주어라. 그러면 그들은 너를 미워하리라.
유명한 저널리스트 몬비오의 블로그에 써있는 글이다.
저널리스트가 한 말이지만 저널리스트가 아닌 내 일상의 삶에서도 자주 접하는 문제긴 하다.
누군가에겐 의견을 피력하기가 쉽지 않다. 자신이 좋아하는 말만 골라서 듣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나의 진심이나 말과 언어의 본질보다는 내 태도와 외형에 더 신경을 쓰는 나머지 고민해서 내놓는 좋은 의견도 불평불만으로 받아들이며 늘상 해왔던 일상적인 내 몸짓 하나도 그 사람에겐 불쾌한 공기흐름을 만들어내는 건방진 태도에 불과하다.
그 누군가에게 정작 필요한 말을 감추게 되는 이유는 딱 두 가지다. 하나는 내가 그보다 훨씬 대단하다는 오만함에 의한 상대방을 향한 비웃음, 다른 또 하나는 반복되는 자괴감에 의해 그에게 더이상의 노력을 기울이기 싫어지는 귀차니즘이 바로 그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그가 나를 미워하는 게 싫다는 착한사람 컴플렉스의 발동일 수도 있고 또는 오랜 시간 내 진심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내 안에서도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싹트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런저런 이유들을 해결하기 힘들거나 귀찮다고 해서 그에게 그가 듣고 싶은, 그가 이미 아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진 않다. 물론 내 생각과 의견에 대한 오류가 발견되면 언제든 인정하고 수정할 자세는 되어있다. 받아들이기 아무리 아프고 힘든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많은 경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간질을 하거나 험담을 하거나 사실을 날조해 퍼트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로 인해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악화되고 때론 공멸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존재보다 더 위험한 것은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 것이며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만 가까이 하는 것이다. 스스로 진실과 객관의 세계로부터 단절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방성으로 인해 위안받고 힘을 얻으며 사실과 진실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조금 불안한 것은 나 역시 인간인지라 당장 눈 앞에 벌어지는 상황들(나를 험담하고 이간질하거나 내 의견이 전혀 통하지 않는 어떤 상황들)에 대해 인내심을 오래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가끔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굳이 "사필귀정(邪必歸正)"에 기대지 않더라도 스스로가 알고 있는 보다 나은 가치와 삶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좀 더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강해져야 하고 더욱 공부해야 하며 더욱 활동해야 한다.
돌아오는 기축년(己丑年)에는
주변의 환경에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쉽게 휘둘리지 않으며
주변의 상황에 따라 취사선택이 쉽게 번복되지 않으며
주변의 험담과 손가락질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참 마음과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을 자주 갖고
참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실천을 자주 하며
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공부를 더 해야겠다.
2009년 새해엔 이성을 더욱 냉철하게 무장하되 감정에 더욱 충실하도록 노력하자.
새해에 복 많이 짓고! 받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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