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 12일 수요일

고려인, 조선족 그리고 한국인이 중국어로 대화하며...

한국인인 나, 중국인이면서 조선족인 리용, 우즈베키스탄인이면서 고려족인 씨얼와. 중국 장춘에서 만난 셋이 간단한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마음 속에 묘한 감정이 일렁인다. (내가 민족주의자는 아니지만) 같은 민족인 세 사람이 중국에서 만나 '중국어'로 소통하고 있다는 현실이 왠지 묘한 서글픔(?정확한 표현은 아니다)을 느끼게 한다. 중국에서 200만명 정도 되는 소수민족으로 살아 온 리용, 그리고 고려인 2세인 부모에 우즈베키스탄 국적을 가지고 91년 소련의 해체를 직접 몸으로 겪은 고려인 3세 씨얼와(현재 우즈베키스탄엔 약 20만 명의 고려인이 거주), 그리고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

 

리용은 조선어(한국어)를 할 줄 알지만 나를 만날 때는 늘 중국어로 대화를 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내 중국어 공부를 도와주기 위한 배려와 그가 중국 땅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며 필히 구사해야 할(했던) 언어(중국어)의 습관화, 그리고 연변에서 듣고 접한 한국인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 등의 이유 때문에 그는 내 앞에서 99% 중국어로 대화를 시도한다. 씨얼와는 조선어를 구사할 수 있는 부모와는 달리 여러 환경적 이유로 조선어를 배우지 못했고 러시아어가 자신의 모국어가 되었다. 물론 후에 한국어를 잠시 배웠는데 너무 어려워 제대로 습득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난 현재까지도 내가 구사하는 한국어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고 있으면서 새롭게 배운 중국어를 가지고 이 친구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

 

사실, 세 사람이 앉아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모두 부모님의 어쩔 수 없는 선택, 혹은 국가 간 분쟁의 원인, 자연적인 잔류 등의 이유로 인해 각각의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 아닌가.


그들의 대화를 듣던 중 문득 한국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조선족들에 대한 인식이 지금은 많이 좋아진 편에 속하지만 예전에 정말 같은 민족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들에 대한 대접이 박했다. 대접이 박했던 것 뿐만이 아니라 이들이 중국에 살면서 조선어를 구사할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무식한 한국의 졸부들이 가서 돈질을 해대며 사람들을 농락했고 악덕 기업주들악덕 중개업자들이 한국에 가서 일을 하겠다는 이들을 속여 돈을 갈취해 냈다. 이로 인해 조선족이 한국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지게 되었고 (순박했던) 그들도 점점 약아지게 되었다. 분을 삭이지 못한 조선족, 혹은 한국인의 습성을 나름 파악한 조선족들이 한국인에게 해꼬지를 하거나 사기를 치고 금품을 갈취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일들은 한국인들이 저지른 일에 비해 더 빠르고 폭 넓게 확산되었고 한국인들 사이에서 조선족을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태도가 비일비재 해 온 것이다. 물론 내가 단순 묘사한 내용이 조선족에 대한 편애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이곳 중국에서 돈 좀 있다는 한국인들이 하는 꼴을 보면 그다지 편애도 아니다.

 

지금은 나름대로 서로 조심하고 신뢰를 회복하는 중이기 때문에 큰 문제들은 발생하지 않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인의 눈에 조선족은 이방인이며 외국인이며 중국인일 뿐이다. 아시아에 살고 있는, 그것도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에 살고 있는 (소위)'한민족'에게는 '~족'이란 이름을 붙이고 미국, 일본, 유럽 등지에 살고 있는, 역시 한국보다 잘 사는 나라에 살고 있는 '한민족'에게는 '교포'며 '동포'며 심지어는 국적이 한국인이 아닌 이들(하인즈 워드, 미셸위, 다니엘 헤니 등)에게까지 '한국'의 국적을 선사해 '한국인'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대주의에 자본에 눈이 먼 사람들의 작태다. (난 하인즈 워드나 미셸위에게 아무런 반감도 없고 관심도 없다.)

몇 개월 전 한 조선족이 내게 한 말이 생각난다. "그래도 한국이 잘 사니까 다행인 것 같아요. 우리같은 사람들이 그래도 한국에 가서 돈도 벌 수 있고 참 좋은 것 같아요. 한국이 참 고마워요." 난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왜 그리 부끄러웠던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었다.

 

우즈베키스탄인 씨얼와의 경우도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다. 작년에 개봉했던 <나의 결혼 원정기>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촬영되었는데 그 내용은 KBS 다큐멘터리 '인간극장-노총각 우즈벡 가다'를 모티브로 했다. 한국 내에서도 한국인 대접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결혼할 대상을 구하기 위해 혹은 농촌의 일손을 충당하기 위해 한국보다 가난한 나라로 가서(그럴 수 밖에 없다) 여자를 공수해 오는 것이다. 정말 웃기지도 않은, 슬픈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영화는 그나마 유종의 미를 거두었지만 씨얼와에게 이 영화 얘기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씨얼와는 한민족이면서 한국어(조선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는 것에 크게 개의치는 않는 것 같지만 그의 표정에는 말 못할 사정들이 꽤 있어 보였다. 씨얼와와 취업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이야기 하며 그에게 한국어를 배워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구사하는 그가 한국어를 배운다면 동북아시아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더욱 많아지게 될 것 같았음으로. 다만, 그렇게 말하는 내 자신이 왠지 부끄러웠다.

 

과연 우리 셋이 느끼는 민족은 무엇이고 국가는 무엇일까. 대체 핏줄은 무엇이고 역사는 무엇이고 현재는 무엇인가. 과거의 역사를 겪어 보지 않는 나로서 어떤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긴 하지만 최소한 출생부터 같은 언어를 쓰는 부모, 자신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한 터전에서 살아왔던 가족이라는 점에서 이들과의 합석은 기쁘면서도 애잔한 감정을 갖게 하며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술자리는 기분 좋게 끝났고 서로의 우정을 다짐하며 각자 집으로 향했지만 여전히 내 속은 복잡하고 미묘하기만 하다. 어쨌든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된 것만은 확실하다. 리용, 씨얼와 그리고 그의 여동생 아료나.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표현하고 소통해야 하는 점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지금은 많이 좋아졌긴 했지만) 과거 한국이 이들을 소홀하게 대했던 점만 아니라면 오늘 자리는 보다 기쁨이 넘치는 자리가 아니었을까 막연한 생각도 해본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에 살고 있는 한민족들은 한국이 부모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반면 아시아의 끝 편에서 살고 있는 일부분의 한국인들은 이들은 외국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싶어한다.)



약간 옆길로 새는 이야기일 수는 있겠지만 문득 김규항씨가 질문했던 "이건희와 나는 같은 민족인가?"라는 말이 생각난다. 옆길로 새는 이야기 하나 더. 나는 요즘 중국에서 종종 "나는 세계인이다"라고 말한다. 세계인의 기준치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국가, 민족, 성별, 나이, 직위, 자본간의 차별을 반대하는 차원에서 농반진반 이렇게 말하고 있는 중이다.

댓글 4개:

  1. 저도 덧글쓰다가 약간 옆길로 새서 학벌문제에 관한 글을 써버렸요;ㅁ; 참, 사람들 정서가 왜 저렇게 야박한지 위에 사람들한테 억압받는 사람들은 또 자기보다 아래있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이 글만으로도 나눌만한 이야기가 많은 것 같네요. 나중에 옆길로 샌다고 쓰신 김규항선생님의 글이나 차별에 반하는 말씀들에 관한 얘기도 나누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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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왕도비정도 - 2006/07/13 00:35
    자주 하는 얘기 중에 이런 얘기가 있죠 아마?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폭력적인 어른이 될 확률이 높다" 그걸 보상심리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어릴 적 받은 트라우마의 영향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고 별별 많은 경우가 있겠지만 어쨌든 간에 억압을 받다가 억압이 풀리면서 억압을 하는 처지로 자리를 옮겨 앉으면 그 자유로움과 권력의 맛을 쉽게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 같아요. 군대가 특히 그렇죠. 군대에서 저는 나름대로 그 사슬을 끊어버렸지만 쉽지 않은 문제인 것 같아요. 그런 '윤회'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면 늘 '고해'에서 허덕이게 될텐데 말이죠.



    차별에 반하는 대화는 기회가 되면 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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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어떤 일이나 사안들이란 특정한 한가지만을 가지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시간적 개념으로도 수직적인 요소와 수평적인 요소들 모두... 말하자면 세대와 세대에 의한 어떤 것들, 또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공간적 편차에 의한 차이 또는 서로 다른 경험에 의한 오해 등등



    한때 조정래 선생님의 아리랑부터 한강까지의 서른권이 훌쩍 넘는 그 책 속의 이야기를 통해서... 저는 민족주의적인 생각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라는 개념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문득,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마치 닭과 달걀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되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 언젠가 유럽으로 출장을 갔던 때의 제 기억 속에 만났던 조선족 분과의 일은... 지금도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사실 당시 전 같은 동포라는 생각에 그 개념이 혼재되어 같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지니고 있던 때였는데... 우연히 말을 하다가 그 분께서 당당히 표현한 "나는 중국인이요"라는 말에 몹시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이제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그 구분의 격차는 줄어들 것이고 지나간 시간과 역사 속의 아픔도 잊혀짐과 치유의 병행이 이루어지리라 생각은 합니다.



    어느 것 하나 쉽게 나쁘다고 할 수 없는데... 또한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현실도그렇고... 언젠가는 우리가 모두 함께 행복할 수 있기를... 그러기 위해 작은 것 어느 하나라도 좋은 것이라면 내가 먼저 해야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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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그별 - 2009/12/09 15:08
    과거 아픔에 대한 치유와 미래 희망에 대한 공유는 반드시 이루어져야겠죠. 그별님의 말씀대로 모든 일들이 특정한 한가지만을 가지고 단정짓지 말아야 하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관점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며 '과거치유'와 '미래비전'을 이야기합니다. 답답한 일이지요.



    중국동포가 스스로를 중국인으로 생각하건 한민족으로 생각하건 그건 그가 태어나 살아온 역사에 대한 가치판단이기 때문에 옳다 그르다를 강요할 수는 없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국내의 시선들은 편향된 가치판단이 작용되어 오히려 그들을 타자화하고 내몰아 세웁니다. 그런 행위들이 기준점 없이 표류하며 열등민족과 우수민족을 갈라 우수민족만을 '자신들의 품 안'으로 안으려는 행동이기에 더욱 답답한 거죠.



    하지만 그별님처럼 '내가 먼저 해야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니 우리 모두가 함께 행복할 날들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국가개념과 민족개념, 영토개념과 생활범위개념에 대해 게다가 계급개념까지 생각해보면 복잡할 것도 같지만 다가오는 세상의 급류를 타고 넘으려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나름 정리는 해야지 않나...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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