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성 친구 이야기 한 토막.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대충 이렇다.
친구는 대학 다닐 때 사회에 대한 의식과 인식이 충분히 깊고 꽤 많은 운동에 참여하던 남성 선배를 꽤 동경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함께 어울려 다니기도 하고 생각과 행동을 함께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다 어떤 상황이 벌어졌고 그 때 믿었던 선배에게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어떤 상황 때문에 그랬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해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당시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을 때는 친구의 선배가 평소에 하던 말이나 행동이 보여주기 위한 것에 불과했거나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이익을 쫓아 함께 하던 사람들을 배신했던 것이라 생각했다. 그 상황이 남녀평등, 여성해방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로 친구는 여성해방이나 남녀평등에 대한 남자들의 생각과 말을 믿지 않았고 남자들에 대해 냉소적이었다.
나의 경우 그 친구와 술자리에서 혹은 여러 상황에서 편하게 토론하거나 대화를 하곤 했는데 종종 결정적인 순간에 남자와 여자라는 문제 때문에 대화가 중단되거나 비약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나는 그 친구가 과거에 겪었을 아픔, 배신감으로 인한 상처를 나름 이해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 친구에게 남자들 중에는 그렇지 않은-충분히 남녀의 동일한 가치에 대해 얘기하는-남자들이 점점 많이 생겨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조차도 결국 남자가 하는 남자 이야기 정도로 치부되거나, 남자를 좋게 이야기하려는 남자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이며 친구는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 했다.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이유로 친구를 탓하거나 무시한 적은 없었다.
그런 이야기가 오가며 종종 동반되던 말이 "여자의 적은 여자의 내부에 있다"라는 말이었다. 나 역시 전에는 남자와 여자를 생식기관의 차이, 호르몬의 차이, 사고방식의 차이 정도로 구분하고 인식하던 수준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남성 안에 여성성이 있을 수 있고 여성 안에 남성성이 있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많은 상황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러한 생각을 단지 생활 속에서 부딪히는 정도의 작은 범주에만 가둬놓고 있었다. 그러나 한 편의 글을 읽고 난 후 단지 생활 속 작은 범주에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보다 폭 넓게 자리하고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즉 생식기관이 남성인 전부가 여성해방, 남녀평등을 저해하는 게 아니라 남성과 여성 둘 모두 안에 존재하는 남성성, 가부장성이 문제의 장애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릴 적 부터 세뇌당하다시피 들어 온 "남자는 이러해야 한다", "여자는 저러해야 한다"라는 말이 남성, 여성 안에 굳건한 남성성, 여성성을 심어버렸고 그로 인해 여성이 한국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성성, 가부장성을 재학습, 재복습하는 방법 밖엔 없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지하거나 편을 드는 건 100% 옳지 않다는 것이고 남성들 역시 여성의 지위가 높아졌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100% 옳지 않다. 남성들의 입장에서는 여성 생식기를 가진 남성성, 가부장성이 자신들의 울 안으로 들어온 격이 되었기 때문에 부지불식 간에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단순한 남, 여 구도로 문제를 바라볼 게 아니라 남성성, 가부장성의 문제로 인식을 전화해 문제를 풀어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성해방, 남녀평등은, 인간평등은 그저 허울좋은 구호로만 끝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기서 말하는 '여성성'이란 건 sex, gender 이상의 어떤 마이너리티 (소수)의 의미도 담고 있는 거겠지?
답글삭제그런 의미로 볼 때, 문득 우리나라의 여성부가 이름도 고치고 하는 일도 달라지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드네. 여성, 장애인, 왼손잡이, 동성애자 등의 개념을 모두 아우르는.
@써머즈 - 2006/07/09 01:54
답글삭제그렇겠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남녀-sex로만 구분해서 논쟁을 펼치고 있지만 사실 남녀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제대로 봐야 문제에 좀 더 근접하지 않을까 싶어.
소수적 의미로 본다면 네 말마따나 여성부도 좀 더 포괄적인 이름으로 바뀌고 그 안에 소수를 위한 각 부문이 개설되면 좋겠네.
저희 과에서도 마초?주의라고 하나? 아무튼, 그런 군대문화가 퍼져있어서 여자들까지도 선후배간에 깍듯이 하고 아래 위를 따지고, 억누르고 억눌리는 관계가 되어있어요. 대학의 작은 과 하나가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이렇게 작은 과에서도 있는 일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모르겠네요ㅠㅠ사슬고리가 언젠가 끊어져야 할텐데..
답글삭제@왕도비정도 - 2006/07/12 22:49
답글삭제참 문제죠. 그런 친구들이 사회에 나오면 그 이후는 불을 보듯 뻔하죠. 성품과 능력으로 대접받는 사회가 아니라, 인간 사이에 차별이 없는 수평적 사회 구도가 아니라 물고 물리는 관계, 상하 수직관계, 남녀 차별관계로 굳어지게 되겠죠. 그런 문제는 또 다른 문제들을 확산시키고 말이죠... 왕도비정도님이라면 충분히 즐겁게 상생하는 좋은 방법을 찾아내지 않을까요? :)
주제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좀 인상적인 부분은 님과 그 친구분의 인간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님이 남자라서 님 말은 듣지도 않는데 계속 친구로 지내다니.. 님이 무슨 말을 해도 님말은 씨알도 안먹힌다는 거 아닙니까.
답글삭제그리고 그 친구분께서는 님을 친구로 생각 안하는 거 아닙니까. 자신이 대단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남녀평등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남자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그 친구분도 참 대단하신 거 같구요.
제가 사람을 좀 편협하게 사귀어서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인겠지만..., 우정의 관계라는 게 사람마다 다르다는 생각은 듭니다.
@친구라.. - 2006/09/07 09:46
답글삭제제 글에 혹 오해가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어떻게 말을 해도 씨알이 안 먹힌다는 뜻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사회적 지위 문제나 남녀 평등에 대한 문제가 나오면 그 친구가 좀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뜻이었지요. 당연히 그 친구는 여전히 저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고 지금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구요. 남녀평등의 문제에 대해 아주 약간의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모든 전반적인 인식에는 잘 통하는 편입니다.(개인적인 오해일까요?-_-;)
그리고 그 친구는 오히려 제 생각에 대해 이해를 못한다기 보다는 보편적 개념으로서의 '남자'에 대한 편견이 있긴 했어요. 지금은 거의 없다고 봐도 돼죠. 사람은 그렇게 발전하고 변해가는 거니까요. 저는 그 친구가 '결혼'을 안 할줄 알았답니다.
문제는 '남자'라서가 아니라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오만함과 '여자'에 대한 편견이 문제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모든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 않습니까? 위 글에서도 설명했듯이 한 때 동지로 친구로 선배로 잘 지내던 남자라는 인간에게 실망을 한 후 '남자'를 바라보는 태도와 생각에 변화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친구와 저는 어떠한 주제도 진지하게 토론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건 여자든 남자든 성별은 상관이 없지요. 그리고 우정의 개념이 다를 수는 있지만 어떤 관계든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같은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서로에 대한 의견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있다면 충분히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요.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