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 23일 월요일

봄인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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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인줄도 모르고,
껴입은 옷 더운 줄도 모르고,
그대 나 빤히 바라보는 줄도 모르고,
얼굴에 열꽃이 피는 줄도 모르고,
창 밖에 개나리가 노랗게 웃고 있는 줄도 모르고,
눈에 먼지가 들어갔나
눈물인지 눈꼽인지 자꾸 눈이 가려워
부비고 부비다 눈에 빨개졌는데
개나리는 그냥 계속 노랗다.

봄인줄도 모르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부터 내 기억은 내 것이 아닌 듯 했다.

봄인줄도 몰랐었으니까.


버지니아 공대 다중총기살해사건을 보며 느끼며...

버지니아 공대에서 벌어진 사건을 두고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연일 시끌시끌하다. 처음 중국인일 가능성이 제기되었을 때 각 포털에 올라온 기사 아래 댓글은 그야말로 한 국가의 인민들을 마구잡이로 사냥하는 듯한 글이 계속 올라왔었다. 24시간도 채 되지 않아 한국계로 밝혀졌을 때는 한국 인민들 전체가 미국에게 머리 조아리고 사죄를 빌어야 한다는 식의 애도와 자기비판과 반성의 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FTA와 결부시켜 생각하는 사람들, 미국과의 관계를 걱정하는 사람들, 재미동포 및 해외 동포들의 입지를 걱정하는 사람들 그야말로 버지니아 공대에서 사건을 벌인 한 사람으로 인해 6-7천만에 가까운 국내외 동포들의 걱정과 탄식은 이 나라를 바로 두동강 낼 것처럼 무겁고 무거웠다. 모 포털사이트에는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으로 숨진 미국인들을 위해 추모하는 카페가 생겨났고 한국민들 모두가 국가이미지를 다시 곧추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뭇 비장하고 진지한 글들이 여기저기 도배되고 있었다. 엊그제 뉴스를 통해 본 미국 내 한인상점에서는 직원들이 버지니아 공대 뱃지를 달고 근무를 하며 그들을 추모한다고 했고 총기사건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미국인들을 돕자는 제안에 세계 각지의 재외한인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자발적으로, 거국적으로 성금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한국인들은 정말 착하다. 착하고 착해서 그 먼나라에 있는 인민들의 희생과 가족들의 슬픔에 자신들이 석고대죄를 하며 죄사함을 청하고 있다. 또 자신들의 핏줄이 잘하건 잘못하건 자신의 품으로 싸안고 한 마음 한 뜻으로 기뻐하거나 슬퍼한다. 정말이지 내 나라, 내 민족, 내 동포를 위하고 생각하는 마음은 지극정성이다.

그렇다. 지극정성이다.

그 지극정성이 미국, 미국인들을 당황하게도 만들었다. 미국 시민인 한 개인이 사고를 쳤는데 왜 국가(한국)가 나서냐고 당황했다. 그 마음이 FTA가 한 개인의 사건과 결부되어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공과 사를 친밀하게 연결시켜 한국 정부를 뒤흔들었다. 그런 한민족 자세가 세계 각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에게 피해가 갈까봐 애닳아 하고 있다.

물론 충분히 이해한다.

미국과 사이가 틀어지면, 미국에게 밉보이면 미국비자 받기 어려울 테고 재외 동포들 역시 한국인이 그런 정신이상자가 있는 민족이라며 눈 밖에 나면 그 멀고 먼 타지에서 살기 힘들고 고단할 것이다. 지구촌에서 한국의 대외 이미지가 추락한다면 많은 외국인들은 한국인을 볼 때마다 이 번 다중총기살해사건을 떠올리며 한국인을 멀리하거나 두려워하고 혐오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범인의 누나의 사진을 공개해가며 그 집안을 정확하게 사람들에게 까발리는 짓도 하는 것일테다.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도록, 애국과 한민족이라는 이유를 앞세워 자신에게 피해가 되지 않도록 무던히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누가 탓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지고 생명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될 수도 있는데... 그래서 이해가 된다.

이해가 된다고 아무리 스스로에게 말을 해보지만 그 사건으로 간접피해를 당할 수 있는 혹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한 편으론 웃음도 나고 한 편으론 역겹기도 하더라. 그 호들갑이, 그 무서운 이기심이, 그 뜨겁디 뜨거워 모든 걸 삼켜버릴 수도 있을 애국심이, 그 막강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사실 그러면서 또 금새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는 이유들을 만들어가며 자신들의 행위에 면죄부를 주기도 하고 또 그 많은 수의 끼리들은 그 결속력을 단단히 하며 안도의 미소를 징그럽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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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 이라크가 폭격을 당하며 무고한 인민들이, 아이들이 죽어나갈 때 파병하자고 목을 매며 달겨든 사람들이었나? 국내에서 살인, 실종, 납치사건들이 벌어져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매일, 매달, 매년 일어나는, 늘상 있는 일이라며 치부했던 사람들이었나? 어떤 식으로든 조기유학을 보내고 성공만 하면 된다고 윽박지르던 사람들이었나? 미국인과 한국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국인보다 열등한 민족이라고 믿던 사람들이었나?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이 국내에서 일하고 착취당하다가 죽어나가도 열등한 민족 운운하며 이 땅에 발 들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던 사람들이었나? 잘 모르겠다. 그런 사람도 있었을 것 같고... 그저 미국과 관련된 일이라면 집안 어른 모시듯 깍듯하기만 한 사람들도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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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의 완전한 해탈천도를 염원한다.


그러고 보면 인과(因果)라는 것은 세상이 복잡해지면 해질수록 더더욱 복잡해지는 걸까...
공업(共業) 또한 짓지 않으려면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지...

2007년 4월 20일 금요일

소통의례

소통, 그 멀고도 험난한 과정. 하지만 꼭 지나쳐야 하는 통과의례.
오히려 소통이 되지 않은 상태로 따로라면 더 편할 수 있다.
보기 좋은 한 판의 형식적 연극을 하는 것보단
걸죽하고 끈적하지만 숨 냄새 엉키는 삶이 되게 하는 게 낫다.
비록 힘들고 또 힘들지라도 삶은 현재로만 읽히는 단문이 아닌
오래두고 곱씹으며 읽어야 할 서사기 때문에.

자신감 결여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잘 보여주는 프리즘이다.
사실 투과시키지도 못하면서 고고한 척 해왔던,
흐리멍텅한 프리즘을 안고 우쭐대진 않았는지 흘겨 돌아본다.

소통에 머리, 마음 모두 뒤집어 탈탈 털어 살펴보다가
문득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몇 가지나 될까,
두렵다.

2007년 4월 15일 일요일

녹음...

하루종일 진행된 녹음, 다섯 배우분들과 함께 작업에 필요한 선녹음을 했는데 오전 11시 반 정도부터 시작된 작업은 저녁 11시가 다 되어야 끝이 났다. 두 캐릭터는 시간이 너무 늦는 바람에 녹음도 끝내지 못했는데... 게다가 내일은 보강에 모레, 글피는 모두 수업이 있어 일 진행이 조금 빡빡하게 느껴진다. 조금 바짝 조여야겠다.

요즘은 한국 단편 애니메이션에서도 선녹음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역시 그렇게 보편화되진 않았다. 그래서 이번 작업은 애니메이션의 퀄리티를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고 이로인해 얻게 되는 것도 많을 것이다.

늘 기본을 강조하게 되는 건 어떤 일에서든 마찬가지인 듯 하다. 애니메이션 제작에 있어서도 일의 진행에 있어서도 기본을 강조하는 건 역시 모자람이 없다. 오늘 조금 부족한 준비상태였지만 나름 만족스런 소득이 있었던 작업이었다.

다섯 배우들도, 이번 작품의 감독도 이번 협업이 서로들 좋은 결과를 얻어내는 과정이 되었길 바랜다.

한 끼 짜장면으로 때운 하루. 배고프다.

2007년 4월 9일 월요일

여유를 배울 마음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피부가 울긋불긋 해졌다. 의사 말로는 스트레스나 피로 때문일 수 있다고 했고 원인불명이기 때문에 그냥 앓고 지나가야 한다고 했다. 일년에 한 번 년중 행사로 앓던 감기 외에는 어떤 질병도 앓아본 적 없었는데 이런 상태가 되니 마음이 무척 조급해진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면서 조급한 마음은 늘어갔지만 기다리는 여유는 점점 줄어든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이런 상태가 며칠 째 지속되는 걸 스스로 못견뎌 하고 있다. 단 한 번도 환경이 달라져 몸에 이상반응이 온 적도 없고 어떤 스트레스가 밀려와도, 어떤 피로한 상태가 되더라도 한 번도 이런 이상반응이 온 적이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더 급해지는 것 같고 얼굴엔 화기만 오른다.

앓고 지나가길 바라는 차분한 여유는 쉽게 찾아오질 않는다. 좀 더 빨리 치료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만이 머리 속, 마음 속에 가득하다. 왜 이렇게 급한 마음자세가 되어버렸을까. 기다리는 여유, 인내하는 자세는 세상에 굴복하거나 타협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을까. 물론 생활이 완전히 변해버린 탓도 있긴 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시 들여다 보고 다시 반문해 보고 다시 호흡을 가다듬는 시간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여유가 사라진 세상에서 여유롭지 못하다는 건 흠이 될 수 없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지난 발걸음과 앞으로의 발걸음을 더더욱 반조해 보며 삶이 영글어 갈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지 싶다.

각각의 세포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유, 우주의 큰 삶 속에 맞물려 살아가는 내 삶을 살피는 여유. 몸 상태가 이렇게 되고서야 여유를 배울 마음이 작게 움튼다. '나'는 최대한 작게, 내 '마음'은 최대한 크게.

2007년 4월 6일 금요일

<빼꼼의 머그잔 여행>을 봐야 하는 이유..?

Mug Travel / 빼꼼의 머그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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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회장은 여느 애니메이션 시사회장보다는 조촐한 느낌이었다. 6년 전(?) 쯤 있었던 태권브이 제작발표회나 그 이후에 있었던 원더풀데이즈 시사회에 비한다면 <빼꼼의 머그잔 여행(이하 머그잔 여행)>은 작은 규모로 단단하게 열리는 시사회라는 느낌을 받았다. 김광회 PD에게 티켓과 빼꼼과 그의 친구들이 새겨져 있는 머그잔을 받아 들고 주위를 살펴보니 처음 느꼈던 것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예전 한 워크숍에서 인사를 나누게 된 임아론 감독님께 축하드린다는 말씀과 좋을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전한 후 시사회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잠시 후 RG스튜디오가 오랜 시간 동안 땀 흘린 결과물이 스크린에 영사되기 시작했다.

<...머그잔 여행>이 호평과 악평 사이에서 선전하고 있는 가운데 이 작품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어른과 아이의 감수성 차이를 느끼려면 당장 표를 끊어 극장으로 향해라.

그 동안 3D 애니메이션은 PIXAR를 선두로 하여 미국의 메이저 애니메이션 회사가 독점하다시피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PIXAR와 드림웍스의 3D 애니메이션은 퀄리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내용면에서도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코드들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관객들에게 호평을 받아냈다.

그런 작품을 아직 만들어내지 못하는(혹은 만들어내지 않는) 한국 상황에서는 그들의 작품이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을 수요하는 사람들이나 제작하는 사람들은 그 작품들이 3D 애니메이션의 표준규격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3D 애니메이션을 비견하고 평가의 잣대를 가져다 대곤 한다. 이런 행위들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최고를 다투는 상품에 비교하며 부족한 부분들을 개선해 간다는 건 당연한 일이며 필요한 일이다. 그렇게만 말한다면 <...머그잔 여행>은 많이 부족해 보일 수 있고 엉성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머그잔 여행>이야말로 어떤 새로운 시도가 시작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사회장에서 애니메이션을 보고 난 후 스스로 평가를 내리며 혼란스러웠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바로 누구의 시선으로, 누구의 잣대로 애니메이션을 바라봐야 하는가 하는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원론적인 질문 때문이었다.

애니메이션 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머그잔 여행>의 퀄리티나 스토리의 흐름 등에 대해 부족한 부분을 느낄 것이고 소소한 단점들을 뽑아내라면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쏟아낼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그잔 여행>을 쉽게 혹평하지 못하는 이유는 시사회장에서 함께 본 아이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그들의 웃음소리가 계속 귀에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내내 조카들이 떠올랐고 조카들을 데리고 애니메이션을 본다면 조카들이 분명 즐거워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내가 애니메이션을 봐야 하는 이유와는 분명 다른 것이다. 그 전에 어른의 시각, 속칭 애니메이션 전문가라는 시선을 버리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런데 왜 <...머그잔 여행>이 보다 특별한 것일까. 그건 다른 애니메이션들은 아이들의 시선에 눈높이를 맞췄다는 흉내를 냈던 부분이 많았다면 <...머그잔 여행>은 그야말로 아무런 가감없이 솔직히 자신을 드러내고 아이들과 함께 웃고 즐길 수 있는 진심이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만 신나고 나는 즐겁지 않다고 해서 재미없는 애니메이션인가? 내가 재미있다고 판단되는 애니메이션만 아이들에게 보여준다고 해서 잘 하는 것인가? <...머그잔 여행>은 이런 시각 차이를 느끼게 해주면서 미취학 아동들과 이미 성인이 된 자신들의 묘한 유대관계를 묶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 속에서 어떻게 그 어린 꼬마친구들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라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집에 조카들이 있는 삼촌, 이모, 고모들 혹은 이미 결혼해서 이미 아이가 있는 부모들, 솔직히 망설일 것 없다. 표 끊어서 아이들 손 잡고 영화관으로 향하면 된다. 함께 보고 즐길 수 있다면 금상첨화지만 그럴 수 없다면 웃고 즐기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스스로를 돌아보면 된다. 그 아이들과 자신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


작품성? 상업성?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이잖아.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나 종종 어린 학생들에게 질문을 받았던 건데 그건 바로 상업 애니메이션과 예술 애니메이션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런데 완전한 상업성과 예술성으로 애니메이션을 구분 짓기도 어려울 뿐더러 구분 지어봐야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거나 관람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난 어차피 이쪽으로는 이론적으로 무장도 되어 있지 않으니 슬쩍 넘기고 다른 얘기를 해야겠다.

임아론 감독님을 한 워크숍에서 만났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난 그 때 들었던 임아론 감독님의 한 마디가 잊혀지질 않는다.

"사람들이 즐겁고 웃고 즐길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다."

뭐, 특별한 문장도 아니다. 그런데 그 때 임아론 감독님은 무겁고 어려운 주제, 혹은 아트 성향이 강한 애니메이션 역시 나름의 충분한 의미와 가치가 있지만 자신은 모두가 즐겁고 신나게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 함께 즐길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고 지금도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 내용과 임아론 감독님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았던 건 역시 그 말에 담긴, 표정에 담긴 진실성 때문이었다. 상업도 예술도 저 말 속에 어떠한 의미도 차지하지 못한다.

그런데 사실, 즐기며 신나게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백지에 점 하나 찍어 그럴듯한 제목 붙여 놓는 식의 엉터리 예술이 아닌 바에야 관객들이 좋아하는 작품이란 얼마나 만들기 어려운가. 임아론 감독은 그런 자세로 열정으로 애니메이션을 기획하고 만들고 있었고 만들어왔고 만들어냈다.

빼꼼의 인터넷 공개 버전은 성인들도 보며 웃을 수 있는 코드들이 있었고 EBS에서 방영되고 있는 빼꼼은 어린 친구들을 위한 버전이라고 본다면 <...머그잔 여행>은 임아론 감독도 밝혔듯이 분명 미취학 아동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다. 세계 어느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미취학 아동만을 타켓으로 한 극장용 장편은 없었던 것 같다. 한국적 상황에서 이런 타켓 설정은 새로운 시도이면서도 가능성 있는 시도가 아닌가 싶다. 여가생활도 전무하다시피 한 삶 속에서, 삶의 공간 속에서 순수하게 웃고 즐기는 애니메이션을 보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극장을 갈 수 있다는 것, 그 때만큼은 극장을 찾는 발걸음의 주인공이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라는 것. 어린이 전용관이 없어 시민회관 등지를 전전하는 애니메이션도 있었긴 했지만 암튼 <...머그잔 여행>은 그렇게 애니메이션의 좋은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고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 아닌가 싶다.


소란스럽지 않았던 제작 진행 과정, 하지만 유쾌한 슬랩스틱 <...머그잔 여행>

보통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은 아주 짧다면 2년 정도, 보통 평균 3-4년 정도 제작을 하게 된다. 물론 기획 및 후반작업까지 포함해서다. <아치와 씨팍>이나 <원더풀데이즈>가 더 오랜 세월 제작을 했던 이유는 중간 과정에서 문제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랜 제작기간 때문에 홍보하는데도 애로사항이 있을 수 있다. 제작발표회를 한 시점부터 극장에서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기까지 3-4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제작발표회나 작업 개시부터 소란스럽게 작품을 했던 경우 보통 좋지 않은 결과를 맞았다.

그걸 우려해서는 아니었겠지만 <...머그잔 여행>은 내가 알고 있는 한 제작발표회도 없었고 중간 진행과정에서도 소란스러운 적이 없었다. 장편제작이 된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한 시점이 아마도 전제 작업 공정의 70-80%정도 진행된 다음이었던 것 같다.

감독 및 이하 스탭들이 숨죽이며 몇 년의 세월을 투자하며 작품 제작에 매달리던 사이 <...머그잔 여행>을 수식할 수 있는 문구는 몇 개 되지 못했을 것이다. '초호화 스탭진'도 아니고 '사상최고의 제작비'도 아니며 '21세기 새로운 기술혁신을 일궈낸'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꾸준히 손에서 놓지 않고 한 프레임 한 프레임 <...머그잔 여행>을 만들어온 것이다.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으로 승부한다는 자세였다. 화려한 미사여구도 아닌 여러 매체에 화려하게 실리게 되는 것도 아닌 애니메이션 결과물 자체로 평가 받고 싶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솔직히 이런 태도를 견지하는 것 그리 쉽지만은 않다. 이제 그간의 침묵들, <...머그잔 여행> 속에서 확실한 슬랩스틱과 유쾌함으로 발산하고 있다.

이제 남은 건 <빼꼼의 머그잔 여행>의 선전을 지켜보는 것. :)





막 봄 기운이 움트고 있는 요즘 아이들에게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주고 싶다면 바로 극장으로 향하시길.
그리고 해 맑게 웃고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며 봄 기운 담아내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