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 31일 수요일

여닫이.

2003년이 가고 2004년이 온다.
 
한해를 돌아보니
2003년 한해는 정해진 일없이 직장없이 근근히 버텨냈던 1년이었다.
 
1월에 춘천 박물관 애니메이션 만들고
양재동 사무실 나가서 동생들 모아서 애니메이션 만들었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고
뮤지컬 애니웨이 기획한다고 매주 학교가서 회의하고
아는 분 소개로 책표지 디자인 한 건 하고
부산 국제영화제 로고 필름 만드는 일 처음만 참여하다가 그만두고
음..또 무슨 일이 있었나...
 
어쨌든 금전적으로도 풍족하지 못했고
진행되는 일마다 좋은 마무리가 생기지 않아서 그리 흡족하진 못했지만
그런 일련의 과정을 겪다가, 겪고나서 중국에 와서 벌써 4개월이 지났다.
 
힘든 것은 힘든 것이로되 그 힘든 것에 그렇게 많이 매이진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에 와서는 한국에서보다 활동력도 떨어지고 하는 일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바쁘고 공부하고 지냈던 시간이었다.
하루하루가 사실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잠깐의 시간만이 흘러간 듯한 느낌들...
 
때론 버겁게 채워넣기도 한 '하루의 기록'만 개근을 했지만
지난 4개월 여의 시간동안의 지난 흔적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년에 내가 살아야 할 모습도 보이고
지금의 내가 변해가야 할, 지켜내야 할 것도 보인다.
 
그렇게 하루가 간다.
 
그리고 또 하루를 맞이한다.
 
하루가 바뀔 때마다 늘 신선한 생각, 새로운 태도로 거듭될 수 있길 바란다.
 
내 아는 모든 인연들, 알지 못하는 인연들...
모두모두 건강하고 의연한 삶이 되기를...
작은 행복, 큰 행복 골고루 누리면서
아픔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함도 갖춰가기를...
 
전쟁이 빨리 끝나고 부정부패하는 공무원들, 국회의원들 정신차리고
서민들이 평범한 소시민들이 열심히 살아 참 노동의 댓가를 아는 세상이 오기를...
경쟁보다는 협력으로 시기와 질투, 반목보다는 평화와 화해와 이해가 가득한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게 너무 꿈같긴 하지만 이런 꿈이 정말 실현될 수 있는 날이
되도록 빨리 오기를...바라며...
 
2003년의 마지막 날 문닫이를 한다.
2004년 문열이 준비해야지.

2003년 12월 30일 화요일

인연.

초급반에서 수업을 듣다가 후반부에 중급반에 며칠 나갔는데
어찌저찌하다가 중급반 회식자리에 함께 되었다.
후배가 사람들 얼굴도 익힐 겸 같이 모여 식사하고 놀자고 그런다.
 
저녁에 사람들을 만났는데 벨기에(여), 러시아(여), 미국(남), 일본(여1,남1),
그리고 한국(남3,여3)까지 각국에서 모인 친구들이다.
모두들 중국어가 그렇게 익숙하지 않은 지라 식당에서 주문을 하는데도 정신이 없다.
후배가 제일 말을 잘해서 알아서 적당한 음식들을 시켰다.
 
음식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고 술도 몇 순배 돌고 하다보니 분위기가 고조된다.
후배의 제안으로 3,6,9게임을 했는데 모두들 즐거워한다.
게임도 국경은 없는 모양이다.
 
한참을 놀다가 맥도날드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집에 먼저 갈 사람들 보내고 나머지 사람들은 노래방에 갔다.
벨기에 친구 빼고는 모두 한국 사람들이었으나
함께 팝송도 부르고 중국노래도 부르고 어우러졌다.
신나는 노래를 할 때는 춤도 추고 모두들 즐겁다.
 
노래방도 끝나고 벨기에 친구와 다른 한국 친구는 먼저 유학생 기숙사로 돌아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또 자리를 옮겨서 꼬치와 탕을 시켜놓고 술 마시며 얘기들을 나눴다.
 
중국에 온 뒤로 이렇게 많은 한국인들과 함께 한 자리는 처음이어서 그랬는지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고 조금은 편하기도 하고 그런다.
이런 자리가 많아질수록 중국어 할 기회가 없어진다는 것을
모두들 잘 알고 있어서 다들 조심하는 편이다.
 
사람들과의 관계, 인연이란 것 참 묘하고 묘할 뿐이다.
한 번 스치기도 어려웠을 사람들, 중국에서 만나 인사하고 서로 이름이라도 알게 되는
이런 인연들이 개개인마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아주 커다란 인연의 덩어리가 느껴지는 듯도 하다.
 
헤어지고 만나는 인연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버티는 일
나와 너의 보이지 않는 끈을 이해해야 가능한 일이고
나와 너를 잘 바라볼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한 일.
오늘도 고마운 인연들께 합장.

2003년 12월 28일 일요일

즐거움.

후배도 공부하는 게 힘들다고 토로한다.
혼자 살면서 재미도 없다고 그런다.
시험 준비할 때는 그 준비하는 공부도 하는데
시험이 끝난 지금은 공부도 안되고 심심하다고 한다.
 
그런 후배에게 내가 조언을 해주고 있다.
말도 안된다.
사실 나도 후배랑 비슷하면 비슷한 걸....
하지만 후배랑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나도 새삼스럽게 느끼는 게 있고
내 마음도 챙기게 되고 그러긴 한다.
 
누군들 공부가 좋아서 하겠는가.
하긴 공부가 제일 쉬웠다는 사람이 매년 등장하곤 하지만
그 몇 명을 빼놓고서는 공부가 쉽거나 재밌진 않을터...
 
예전에 사물놀이를 배울 때
장구가 양손을 움직이는 악기라 비교적 어려워서
처음에 북부터 배웠었는데 나중엔 장구가 그렇게 배우고 싶더라.
그 때 장구가 그렇게 늘지도 않고
또 어려워서 재미를 그렇게 붙이지 못하던 나에게 선배가 하던 말...
'즐기는 것만큼 잘 배우는 것 없다'
 
물론 어떤 유명한(?) 사람도 한 말이긴 하지만
그 때 장구를 즐기면서 하게 되었고 배우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는 것과 뇌를 움직여서 하는 건 분명 다르긴 하지만
즐기지 못하면 배우는 것도 더디고
재밌지 않으면 배우는 효과가 떨어지는 건 확실한 듯 하다.
 
'할 줄 안다는 것은 노력하는 것만 못하고
노력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했던가....
 
잘하던 못하던 간에 즐기면서 하고 싶다.
그 즐기는 마음을 온 몸으로 습득해서 습관처럼 내 생활처럼 하고 싶다.
 
즐겁게 살면 숨쉬는 그 순간까지도 행복하고 고마운 것을.
즐겁게 살면 어려움도 배우는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것을.

2003년 12월 27일 토요일

주말.

하루종일 집에서 영화를 봤다.
 
한 편, 두 편...
 
보다가 졸고 졸다가 자고 일어나서 보고 그러다 밥 먹고
나가서 사람들도 만나고 해야지...하는 막연한 의무감에 사로잡히다가
오늘같이 무료함이 밀려오는 날엔 영화만 보고 있다.
 
인터넷으로 기사 검색도 하고
조선족 식당에서 청국장도 시켜 먹고
 
마치 한국에 있는 듯...
문득 지금 이 시간 쯤엔 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술 한잔 하자고 할 것만 같은...
 
가뿐하게 샤워하고
상쾌하게 또 영화봐야지.

2003년 12월 26일 금요일

[ani] The Iron Giant - 아이언 자이언트


아이언 자이언트 (The Iron Giant, 1999) 
연소자 관람가/ 87분 / 애니메이션,SF,가족/ 미국


어쩌면 아이언 자이언트(철거인)가 더 사람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지막에 슈퍼맨이 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이루는 장면에선 한 편으론 어색하고 한 편으론 슬쩍 감동을 받는 이질적인 감정의 경험을 했다.
정부요원 켄트 맨슬리는 죽이고 파괴하는 일이 자신의 숙명이고 사명인 양 생각하는데 그것을 애국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 시키려 한다. 그 모습이 요즘 종종 보아오던 요즘의 상황과 오버랩이 되면서 씁쓸함과 분노가 일어났다. 애국을 위해서 나라를 지키는 일을 위해서는 몇 명의 목숨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 타인의 고통은 나라를 위해 감수해도 된다는 지극히 파시즘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는 사람들...사실 그런 사람들치고 스스로 희생하고 직접 선두에 나서는 경우는 정말 보지 못한 것 같다.
아이언 자이언트는 속에 폭력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총이라는 무기를 보거나 누군가의 공격을 받을 때는 그 폭력성이 엄청난 무기와 함께 겉으로 표출이 된다. 아이언 자이언트가 사람보다 더 사람같다고 느낀 건 이런 점 때문이었는데 사실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은 전형적으로 착하거나 나쁘거나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이 로봇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분노할 줄 알고 아픔을 느낄 줄 알며 행동할 줄 아는 것이다.
로봇의 생김새가 미야자키의 '천공의 성 라퓨타'에 나오는 로봇과 비슷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모습, 그리고 나중에 무기를 사용하는 로봇으로 변할 때 그 무시무시한 변신모습은
잘 설계된 메카닉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일본 로봇물에서 꼭 등장하는 게 변신, 결합, 합체 등의 주요장면 아닌가.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큐빅스도 그런 장면이 꼭 등장하곤 하는데 로봇물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포인트다. 그게 없으면 앙꼬없는 찐빵이랄까?

미국에서는 거대로봇물이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할 때 참 새로운 시도이기도 했고 게다가 잘 만들어진 수작이란 생각이 든다. 워너가 가끔씩 이쁜 짓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가장 웃으면서 봤던 장면은 아이언 자이언트가 호수에 다이빙을 하는 시퀀스인데 묘사가 아주 멋지다. 감독의 얘기를 들어봐도 그 장면을 가장 재미있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적중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들이지만 성우들이 흥미롭다. 주인공의 엄마인 애니는 제니퍼 애니스톤이고 주인공을 도와주는 철물점 주인 딘은 해리 코닉 주니어이며 아이언 자이언트는 생긴 것도 비슷한 빈 디젤이다.

사운드도 참 좋았고 특히 아이언 자이언트는 모두 3D로 만들었다고 알고 있는데 2D와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도 제작진이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캐릭터들의 모습은 좀 상투적(?)이랄까? 하지만 배경의 묘사, 칼라 등은 인상에 남는다.
로봇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충분히 즐겁게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라 생각한다.

착각?

내가 내 스스로를 착각하고 있는가.
 
가능한 걸 가능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가능하지 않은 걸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가끔 생활의 면면을 보면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괜한 몸부림을 하는 경우를 발견하곤 한다.
 
내 자신의 삶이기에 부득이 주관적일 수 밖에 없지만
그 주관이 지배하게 되면 아집이 생기고 독선이 생길 수 밖에.
 
나와 관계없는 일을 바라보듯 나를 바라보며
좀 더 정확하게 알아가는 세심함도 필요할 듯 하다.
 
여전히 갈길은 멀다.
 
그 먼길을 즐겁게 갔으면 싶다.

2003년 12월 25일 목요일

事後頓空(사후돈공).

성탄절이라 그런지 학교에 사람들도 별로 없다.
곧 수업도 끝나가니 그럴 수 밖에 없겠지.
 
수업 끝나고 후배가 성탄절인데 자축이나 하자고
점심이나 같이 먹자 한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다시 한 번 내 마음을 챙기는 기회가 생겼다.
사람과의 관계, 마음의 운용, 그 마음을 표출하는 방법들...
어쩌면 복잡하고 어쩌면 간단해 보이는 이 일련의 연결고리들은
평생 풀어가야 할 숙제임엔 틀림 없는 듯 싶다.
 
문득,
對境知止, 執事全一, 事後頓空 이란 말이 떠오른다.
 
경계에 대해서는 그 앎에 멈추고
결정을 한 후에는 그 일을 일심으로 오롯이 하며
일이 끝난 후에는 허공처럼 마음을 비우라...는...뜻이다.
 
살아가며 수많은 경계가 생길 때 과정과 결과부터 생각하는 경우가 왕왕있으나
일단 숨을 고르고 마음을 고르고 잠시 멈추는 방법도 좋다.
어떤 취사를 해야 하는지 지금의 상황과 나의 관계를 살펴보고
앞서지도 물러서지도 않고 그 앞에 서서 잠시 멈추고 바라보는 것.
 
물론 일을 오롯하게 하는 것도 어렵긴 하지만
하지만 일이 끝난 후 집착, 상(像)을 버리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그 상이 남겨져 있음으로 해서 자꾸 지난 일에 마음이 쓰이고
앞으로 해야할 일에 대해 오롯한 판단, 취사를 할 수 없게 됨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비운다는 건 정말 어렵다.
퍼내도 퍼내도 다시 채워지는 요술 항아리에서 물을 퍼내는 일같기만 하다.
 
성탄절,
모두 모두 행복한 마음이 들어앉아 활짝 피어나길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