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무어(Michael Moore) 감독의 <SICKO>를 보며 너무 통쾌하고 재미있어 웃다가 울컥 눈물이 날 뻔 했다. 캐나다, 영국, 프랑스, 쿠바에서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인간대접을 받는 삶을 누리고 있구나 싶어 부러워 눈물이 날 뻔 했고, 미국 뒤만 졸졸 쫓으며 잰 척하고 싶어 안달난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가난한 나는 도저히 큰 병에 걸려서는 아무런 희망도 없겠거니 싶어 두려워 눈물이 날 뻔 했고, 건보를 민영화하겠다는 새정부의 움직임이나 사람 목숨을 돈으로 환산해 자신의 배를 불리려는 의사들이 꽤 많은 현실이 답답해 눈물이 날 뻔 했다.
함께 일하고 있는 미술감독의 친구가 쿠바로 놀러갔다가 겸사겸사 이빨치료(새로 해 넣었다던가?)까지 받고 왔다는 이야기가 황당하고 어이없게 들리기는 커녕, 방법을 잘 알아놨다가 나도 나중에 중한 병이라도 걸리면 쿠바로 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병원에서 그 많은 치료를 받고도 치료비용 지불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던 캐나다, 영국, 프랑스, 쿠바인들의 어리둥절한 표정과 해맑은 웃음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얼마 전 뉴스 후 <병원진료비 알고보니...>에서 소개된 전체 치료비의 약 10%밖에 내지 않는 일본의 의료서비스를 보면서도 부러워 몸둘 바를 몰랐었는데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100% 국가가 책임지는 나라가 있었다니 신천지를 알게 된 느낌이다. 그들은 되는데 왜 우리는 되지 않는 것일까.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인들은 사회주의를 비난하면서도 공교육, 도서관, 경찰, 소방서, 우체국과 같이 국가가 공공의 이익을 지켜주고 대변하는 사회주의와 닮은 모습들에 대해선 함구한다. 이미 자본주의 땅에서 저렴하거나 무료인 많은 공공 서비스가 실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건복지는 왜 무료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지 마이클 무어 감독은 묻는다.
부자들에게만 있었던 모든 권력이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중하층 사람들에게 이양되었는데 이를 "금고에서 투표함으로"라고 부른다. 전 영국의회 의원 토니 벤은 "1930년대 시절엔 실업자 천지였다. 하지만 전쟁 중에 실업은 없었다. 독일 놈들 죽이는 짓으로 전원 취업할 수 있다면 병원 건설, 학교 설립, 간호사는 선생 고용으로는 전원 취업 못할 게 뭐냐. 돈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그 돈으로 사람을 살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라던 당시의 이야기를 전하며 민주주의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을 위한 국민건강보험이 오는 (1948년) 7월 15일 시행됩니다. 이것은 무엇이고 또 어떻게 얻을까요? 이 보험은 여러분이 필요한 모든 질병치료, 치아치료 및 간호를 보장합니다. 빈부와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의료 전 분야를 지원합니다. 몇 가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요금은 필요없습니다. 가입조건은 없지만 이것이 자선활동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이 보험은 납세자 여러분들의 혈세로 운용되며 아플 때 그 부담을 덜어드릴 뿐입니다."
- 다큐멘터리 내용 중(영국이 국민건강보험을 시작하며 발표한 성명)
국민건강보험 납입금 액수를 늘리더라도 100% 무상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국민건강보험이 자선활동이 아니고 국민의 혈세로 운용되니 잘 지켜봐달라고 호소하는 영국정부와 나누는 만큼 자신에게도 n분의 1의 혜택이 돌아올 것이라는 걸 믿는 영국국민, 그렇게 서로의 약속을 지켜냈던 영국이 세계2차대전이 막 끝난 후 국가 정비를 해야 할 시점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국민건강보험이었다. 영국의 사례가 현재 대한민국에서 실현될 수는 없는 일인가?
마이클 무어: 만약 대처 수상이나 블레어 수상이 의료복지를 서서히 없애겠다고 발표했다면...
전 영국의회 의원 토니 벤: 그게 나라 뒤집힐 일이지요.- 다큐멘터리 내용 중
우리는 2mb 정부의 복지정책을 들으며 국민들이 나라 뒤집는다고 해도 눈하나 꿈쩍하지 않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살고 있다. 행여 정말로 국민이 나라 뒤집는다고 하면 정부에서 바로 공권력을 투입해 잡들이를 하고 있으니 의료복지는 커녕 그 어떠한 합리적 제도나 정의로운 법의 구현조차도 이루어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우리는 과연 정작 분노할 대상과 시기를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과연 정의롭게 분노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있는 것일까.
전 영국의회 의원 토니 벤: 민주주의야 말로 그 어떤 것(사회주의 혁명 등)보다도 세상에서 제일 혁명적인 것입니다. 주권이 있으면 그걸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에서 흔히 말하는 이 선택이라는 개념은 늘 같습니다. "뭐든 하나 골라라"라는 거죠. 하지만 이 선택이란 건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고 볼 일입니다. 만약 누가 빚꾸러기가 되면 그 사람에겐 선택의 자유가 없지요.
마이클 무어: 평범한 직장인이 빚에 몰리면 체제는 이득을 볼 텐데요?
전 영국의회 의원 토니 벤: 맞습니다. 빚을 진 사람은 희망을 잃고 절망한 사람들은 투표하지 않으니까요. 자, 그들은 늘 온 국민이 투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보기에는 만약 영국이나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서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후보들에게 표를 던지면 민주투쟁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그런 일이 없도록 국민들이 계속 절망하고 개탄하도록 하는 거죠. 국민을 통제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공포를 주는 것이고 둘째는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육받고 건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국민은 휘어잡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을 대하는 특별한 자세가 있지요. ‘저 사람들은 배워도 안 되고 건강해도 안 되고’ ‘사기충천해도 안 된다’ ‘망치가 가벼우면 못이 솟는다’라고요. 인류의 상위 1%가 세계의 80%의 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은 사람들이 그걸 참는다는 겁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어지럽고, 겁을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최선이란 시키는 대로 일하며 소박한 꿈이나 꾸고 사는 것이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 다큐멘터리 내용 중
지난 10년 무엇을 쟁취했고 무엇을 얻었는가. 무엇을 뺐겼고 무엇을 잃었는가. 그리고 앞으로 5년 무엇을 얻고 잃게 될 것인가. 내 자신도 모르게 시스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일들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계속해서 가진 자들의 배를 불려주는 일은 정말 하고 싶지 않다. 비합리적이고 부당한 방법으로 배를 불리지 말란 소리다. 한국이란 나라에 태어난 게 내 자유의지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 그런 국민들의 권리를 이양해 준 정치인들은 국민들을 대신해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모든 국민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게 상식이고 민주주의다. 그게 지켜지지 않으면 바로 끌어내리고 혼을 내야 한다. 잘못을 뉘우치니 한 번쯤 봐주자는 나약한 생각은 집어쳐야 한다. 그런 생각들이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들을 만들어냈고 그들을 배불리게 하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냈다.
다큐멘터리 <SICKO>를 보는 내내 너무 많은 생각들이 뒤엉키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확장되고 있어 좀 더 시간이 지나야 정리될 것 같지만, 한가지 이건 알겠다.
"바보야, 복지가 문제야!"
복지는 비단 의료복지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교육, 주거, 문화, 예술, 식생활 등등의 삶의 여러 방면에서의 복지를 아우른다. 삶의 질을 높이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은 복지 밖에 없어 보인다. 언젠가 "복지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한국 애니메이션에 희망은 없다"며 쓴 웃음을 지은 적이 있는데 같은 맥락이다. 여러 생각을 하면서도 문득문득 "대한민국의 국민성"에 대한 여러 이면들이 떠올라 과연 실현가능한 일일지 막막한 마음이 앞서지만, 역시 다른 방법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새정부의 수장이 말하는 "복지정책이 곧 고용확대이며 빈곤층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나눠주기식 복지보다는, 안정적인 소득을 낼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 자립을 돕고 가난의 대물림을 막아야 한다"는 따위의 이야기를 들으면 숨이 턱 막힌다. 현재 부와 가난이 대물림이 되는 건 사실상 맞지만 그렇다고 가난은 사라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부자가 있으면 가난한 사람이 있는 건 필연이다. 복지는 빈부, 신분, 나이,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혜택이어야 한다. 부와 가난을 들먹이며 복지를 곡해하며 욕보일 일이 아니란 거다.
워낙에 유명한 다큐멘터리라 많은 사람들이 봤을 거라 생각하지만 아직 보지 않은 사람들은 꼭 봤으면 좋겠다. 이 영화 안에는 의료복지에 관한 이야기만 담겨있는 게 아니다. 개인, 시스템, 법, 정치, 국가가 모두 등장한다. 그 상관관계를 잘 살펴가다 보면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된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작품은 모두 재미있는데 이번 <SICKO>는 재밌으면서도 슬프고 감동적이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도록 슬픈 다큐멘터리다.
비밀 댓글 입니다.
답글삭제@Anonymous - 2009/11/30 01:13
답글삭제그래, 오랜만이네. 우리나라의 현실이 비극적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그렇게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 노숙자라면 거의 갈 곳 없이 마지막에 몰렸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들에 대한 처우가 그렇다니 다행이지만 이도저도 아닌 상황에 있는 일반적인 다수의 국민들을 생각해보면 아직 좀 멀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그래도 긍정적으로 보도록 해야겠지?)
세금을 많이 내건 적게 내건 간에 중요한 건 그 세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큰 것 같아. 그런데 보통은 세금의 크기로 주의를 돌리고 판단을 하도록 호도하지. 지금의 대한민국이라면 영국처럼 세금을 33% 낸다고 했을 때 시스템도 없고 공무집행에 대한 윤리의식도 부족한 데 엄청난 혼란이 오지 않을까. 무상교육, 무상의료가 그렇게 요원한 일이어야 하는 걸까.
'대다수'는 이렇게 생각할 거야..라고 말해도 '소수'가 알아서 하는 경우가 많은 사회니... 뭐랄까. 반항은 하지만 전세가 기울면 쉽게 적응하고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나 할까. 희망적인 사회가 올 거라고 믿어(야지)...^^
* 오른쪽에 답글이 뜨질 않아서 삭제하고 다시 적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