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 28일 금요일

[mov] 야수 | Running Wild | 野兽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아니 나는 얼만큼 행복한 존재일까.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크고 작은 행복의 범위를 제외한 사회적 동물로서 나의 행복지수는 얼마가 될까.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와 비교해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니 자부심을 가져야 할까. 한국에서도 나보다 더 못한 사람들이 있으니 행복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보면 한국보다 못한 사회가 더 많다고 입을 모은다. 그래도 한국이 살기 좋은 나라라고 말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행복은 상대평가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즉, 절대평가 속에서 느껴지는 행복, 삶의 가치만이 한 개인에게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한 개인은 절대 다른 국가사회(혹은 문화) 속에 흡수될 수 없다. 그렇게 보이더라도 그건 그저 표면 위에서 부유하고 있을 뿐이며 정교하게 모방하거나 흉내만 내고 있을 뿐이다.

그럼 한국은 어떤 나라일까. 어떤 사회일까. 어떤 삶들이 부벼지는 공간일까. 각자 모두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국가사회일까. 불만은 있되 그래도 살만한 곳일까. <야수>에 등장하는 장도영과 오진우는 공권력에 속하면 그 힘을 남용하거나 지켜가되 비교적 자신의 행복지수, 성공지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그 공권력의 반대편에 서 있지만 결국 사회권력, 국가권력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유강진이 있다. 그 과정 속에는 권력과 권력이 맞부딪히며 묘한 공명을 일으킨다. 이후에는 공권력 따위도 필요없다. 물고 할퀴는 처절한 싸움만이 남을 뿐이다.

<야수>가 다른 형사영화 혹은 권력을 다룬 영화와 차별점이 있다면 비교적 직설화법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따.위 ㅈ같은 사회가 우리가 사는 사회고 국가다”라고. 그리고는 덜 길들여진 두 마리 야수를 내키는대로 행동하도록 방치한다. 지치고 지칠 때 알아서 쓰러지도록. 거대 권력사회라는 조련사가 야수를 길들이려고 하지만 야수들은 길들여지지 않는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아리지만 한편으론 카타르시스를 동반한다.


유강진은 폭력배 출신 국회의원이지만 우리나라 국회의원 중에 폭력배 아닌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얼마나 많은 국회의원이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국민들에게 깡패 짓을 하고 있는가. 국민의 세금과 피와 땀을 먹고 사는 국회의원들의 하는 짓이라곤 민의를 악용해 자신의 배만 불리려 하고 있으니 깡패와 다름없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건 내키지 않지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세상에 그 법칙이 적용되면서 변질되었다. 동물도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인간은 마치 온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듯이 착복을 하고 남이 가진 최소한의 권리마저도 유린한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건 진리다. 장도영은 불행한 가정출신이고 오진우는 부모는 등장하지 않지만 부인에게 이혼요구를 당한다. 유강진은 깡패지만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맞다. 세상은 아주 정상적으로 지극히 ‘불공평’하다. 그러나 그 불공평한 세상 속에서도 최소한 지켜야 할 룰은 있다. 최소한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는 말아야 한다. 이 룰이 궤도를 이탈하기 시작하면 힘없는 인민은 사는 게 그저 괴로울 따름이다.

영화 한 편을 보고 별 생각을 다 하고 있지만 <야수>가 말하고 있는 방법이 너무 직설적이라 반응도 그런듯 싶다.

<야수>에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르겠지만 내 판단으론 장점이며 독특한 시도라 생각한다.)

첫째, 불안하게 흔들리는 카메라를 통한 인물 심리의 표현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핸드헬드처럼 다른 영화에서도 자주 접하는 부분이다. 눈에 띄었던 장면은 인물에게 짧고 빠른 크로즈업/아웃이 종종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인물에의 몰입을 유도하고 있다. 영화가 시간을 더해갈수록 카메라와 몰입도는 괜찮은 간극을 유지해간다.

둘째, 인물의 분장이다. 몇 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인물들의 분장이 억지스러울 정도로 과장되어있다. 처음엔 조명의 문제인가 싶었는데 분장을 의도적으로 두드러지게 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확실히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는 느낌이 강하다. 몇 장면만 그랬다면 분장사나 조명기사의 실수라고 생각했을 텐데 오히려 몇 장면을 제외한 모든 장면에서 분장이 과장되었다. 인물의 컨트라스트가 강해지고 현실과 비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느끼게 된다. 눈에 거슬리고 어색했을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 오히려 난 새로운 느낌이라 좋았다.

셋째, 마지막 장면을 아예 드러내 놓고 시작한다. 주인공이 어떻게 되리라는 걸 미리 짐작하고 영화의 흐름을 쫓는 건 극히 위험한 방식이긴 하지만 오히려 이 영화는 그럼으로 인해 주인공들에 대한 답답한 심정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어떤 기대감없는 무력감에서 비롯되는 동질감이랄까.

넷째, 비극적 결말이다. 일단 장도영이 같은 경찰들에게 영웅본색의 주윤발처럼(붕대를 붙인 느낌도 비슷한) 엄청난 총알 세례를 받고 죽는다. 주인공을 저렇게 죽이는 건 홍콩 영화에서나 흔히 볼 수 있었던 ‘홍콩 느와르’식이지만 홍콩 영화의 많은 영향이 남아있는 <야수>에는 어울리는 장면이다. 게다가 한국영화에서는 비극적 결말을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점에서 격려를 보내고 싶다. 특히 오진우가 장도영식 머리 스타일(똑같진 않지만)로 변해서 유강진에게 한 두발도 아닌 여러 발의 총알세례를 퍼붓고 허탈하게 웃는(우는) 마지막 장면(관객을 똑바로 쳐다보며)은 반전 아닌 반전이었달까. 최소한 내게는 일말의 카타르시스가 되었다. 두 야수가 덤벼들어 수 많은 피들 중에서 겨우 하나의 피만 솎아냈지만 그건 오로지 비극이라기 보다는 일말의 거친 희망을 느끼게 한다.

물론 <야수>는 여러모로 미흡한 점이 많다. 장도영 여자친구 역이었던 엄지원은 비중이 너무 작아 아쉽기만 하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거슬렸던 건 다름아닌 장도영이 오진우에게만 깍듯이 반말을 한다는 것이다. 거친 놈의 야수라면 아무에게나 반말을 지껄여야 상황에 맞을 터인데...왜 그랬을까.(억지로 짜맞춰보자면 장도영은 이복동생이 있었지만 불안한 자신을 기댈 형같은 존재가 없었다. 그런데 오진우는 왠지 그에게 형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호랑이처럼 굴다가 꼬리내린 강아지가 되었던 것일까?라고 추측...-_-;), 장도영의 잦은 눈물도 역시 분위기를 흐리는데 일조를 한다. 아무튼 그저 71년생 감독이 받았을 홍콩영화(느와르)의영향이나 20대 사회에 가졌을 법 한 비관적인 시선, 젊은 치기들이 왠지 반가웠기 때문에 큰 불만은 없다.

유강진 역의 손병호를 제외하고 권상우나 유지태는 연기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긴 하다. 그나마 유지태는 낫다. 올드보이에서 보여준 차가우면서도 고민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의 연장선상으로 보이긴 하지만 검사역에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권상우는 왜 그렇게 어설프게 보일까. 발음의 한계일까? 유지태도 발음이 부정확하긴 하지만 그래도 음색이라도 좋지. 개인적으론 권상우가 발음과 목소리 음색을 좀 다듬어서 거친 역할을 하는 게 잘 어울릴 것 같다. 꽃미남 권상우는 별로다.


문득, 장태산 만화의 <야수라 불리운 사나이>가 생각난다. 영화처럼 거친느낌의 펜터치와 길들여지지 않은(을) 주인공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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