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단백질>은 삽화체 애니메이션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삽화체 애니메이션을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건 삽화체 애니메이션 원화를 그리는 사람 역시 드물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사랑은 단백질>의 원작자 최규석 작가의 그림체가 언뜻 보면 쉬운 듯 해도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정리하다 보면 (혹은 따라 그려보면) 캐릭터의 특성을 계속 유지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까지 <사랑은 단백질> 원화진행을 앞두고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원화 작업자를 섭외하는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실력이 출중하다고 알려진 사람들은 예산문제로 인해 면접기회조차도 가져볼 수 없었고 예산에 맞춰 작업자를 섭외하려고 면접을 보면 부족한 실력으로 인해 돌려보내야 했다. 결국 고민 끝에
감독은 원화경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뎃생력, 즉 그림 실력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그러나 <사랑은 단백질>에서 캐릭터들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단순 주입식으로 암기한 뎃생력으로는 한계에 부딪힐 게 뻔했기 때문에 스튜디오를 찾아온 몇 몇 사람들 역시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연감독의 요구사항은 평균 이상을 상회하고 있었지만 말릴 수는 없었다. 작품 퀄리티를 높이려는 사람에게 퀄리티를 포기하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작업 스케줄을 체크해가며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주변 사람들을 통해 사람을 소개 받고 연락한 후 포트폴리오를 받아보고 판단/결정하는 과정들이 지루하게 반복되고 있었다. 비용과 능력, 작품에 대한 열의 모두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생명을 불어 넣는 사람들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스태프를 섭외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던 중 옆 스튜디오에서 작업이 끝나가고 있던 원화맨 두 명(김창수, 장진열)을 소개 받게 되었다. 두 사람은 OEM 경험도 있지만 꾸준히 창작 애니메이션 원화를 해왔다고 했다. 물론 창작 애니메이션 중에 삽화체 애니메이션이 거의 없었음을 생각할 때 두 사람이 <사랑은 단백질> 원화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스태프 섭외에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두 사람에게 원작 만화와 스토리보드, 캐릭터 설정 등을 보여줬는데 상당히 흥미로워했고 원화 역시 재미있겠다며 열의를 보였다. 솔직히 삽화체 애니메이션 경험자가 많지 않다면 누가 원화를 하더라도 비슷한 수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했던 건 작품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있는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함께 작업을 진행하기로 뜻을 모았다.
거의 같은 시기에 한국에술종합학교 애니메이션과를 휴학 중이던 최재훈 씨를 소개 받고 포트폴리오를 보게 되었는데 그림체나 느낌들이 좋아 함께 작업하기로 바로 결정했다. 원래 원화감독 1명, 원화맨 2명을 섭외하려고 했던 계획이 원화맨 3명으로 조정되며 변화가 생기긴 했지만 더미(Dummy) 애니메이션 방식과 D.O.V.A(선녹음) 방식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고 판단은 옳았다.
연상호: 원화를 전부 체크, 감독해 낼 사람이 없다는 건 부담스럽긴 하지만 제가 스태프들과 함께 하나하나 점검하도록 해야죠. 뭐... 그런데 제가 원화 테스트를 해보니 역시 최규석 작가의 그림체는 쉽지 않네요. 원화하시는 분들이 잘 해주시겠지만 조금은 걱정이 됩니다.
캐릭터들의 움직임, 타이밍, 형태 등은 이미 더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별 다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형태가 맞는지 틀리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적절한 타이밍인지 고민해야 할 시간을 대사에 맞춰 표정을 풍부하게 만들고 립싱크를 맞추며 손(가락) 동작의 형태를 표현하는데 할애하면 되었다.
세 명의 원화맨들은 처음 시작부터 연감독과 나의 우려를 잠재우기라도 하듯 안정된 퀄리티를 보여줬고 섬세한 표정과 캐릭터 형태의 일관성을 유지했다. 감히 단언하건대 이들로 인해 <사랑은 단백질>은 진일보한 애니메이션 원화를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
김창수: 연상호 감독님의 <지옥>을 보고 난 후 언제 기회가 된다면 꼭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었어요. <사랑은 단백질>은 막상 접하고 보면 <지옥>보다는 느낌이 덜 전해지는 듯 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지옥>과 같이 작품 안에 숨겨진 많은 이야기가 읽혀졌고 감독님이 늘 얘기하는 모습이 투영된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더미 애니메이션 제작 시스템이라는 게 흥미롭더군요.충분히 경험해 볼만 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더미 시스템은 원화를 진행하는 데 있어 어려움이 없고 퀄리티 유지에 많은 장점이 있는 반면 기존의 원화 방식보다는 그림 그리는 맛이 덜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작품 속 많은 인물 중에 닭 사장에 가장 많은 애착이 갑니다. 아! 지금 제가 주로 담당하고 있는 캐릭터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장진열: 원작 만화의 그림체가 참 매력적이었어요. 그 전에 참여했던 작품들의 그림체는 비교적 단순했어요. <사랑은 단백질>같은 삽화체나 복잡한 그림은 거의 없었거든요. 그림체가 좋았긴 했지만 처음 원작을 읽었을 때는 <사랑은 단백질>을 왜 굳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려고 하는지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작업을 진행하면서 원작 만화를 자주 들여다보게 되었는데요. 자꾸 빠져 들더라구요. 여러 가지 메시지도 담겨있음을 알게 되었고 특히 사회 속의 부조리, 관계의 부조리가 느껴지면서 다시 한 번 나와 사회를 돌아보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 작품 속 재호가 가장 맘에 드네요.^^
최재훈: 작업은 생각보다 재밌어요. 원래 알고 있던 원화 제작과정과는 달리 3D 기반으로 된 더미 애니메이션을 원화로 재현한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었죠. 새로운 제작 시스템을 경험한다는 건 늘 흥미롭네요.
원작 만화는 섭외가 된 후에 읽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단백질>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다? 생각해보니 참 재밌을 것 같더라구요. 한 편으론 <지옥>을 만든 연상호 감독님이 <사랑은 단백질>을 연출한다는 게 의아하긴 했지만요.^^
그림요? 표현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어요. 캐릭터가 잘 잡혀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 속 재호가 가장 맘에 들고 홍찬이가 가장 싫어요. 게다가 홍찬이는 그림 그리기가 너무 까다롭습니다.-_-;
3D에서 2D를 추출하다.이미 더미 애니메이션 제작방식으로 인해 BG와 캐릭터 등의 레이아웃은 완성된 상태였기 때문에 원화진행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다만, 3D로 설정해 놓은 BG를 어떤 방식으로 완성하느냐가 관건이었는데 샘플링 작업이 필요했다.
정현욱 배경감독은 애니메이션 제작에 정식으로 참여한 적은 없었지만 <지옥:part 02>에서 오프닝 지옥도를 그리며 잠깐이나마 연감독과 호흡을 맞춰본 적이 있었고 개인 작업도 꾸준히 해왔던 터라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3D 배경을 캡춰해서 그 위에 바로 채색을 하는 방식으로는 적절한 효과가 나오기 어려웠기 때문에 배경 역시 3D 데이터를 프린트 한 후 그 위에 다시 연필 선으로 트레이스 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트레이스가 된 이미지는 스캔과정을 거친 후 포토샵을 통해 채색 전 과정을 진행했다. 선명한 이미지 라인에 색을 넣어 부드럽게 만드는 것과 자연스러운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 채널 및 레이어 모드를 활용하는 등 첫 완성 배경을 만들어내는 데 적지 않은 노력과 연구가 진행되었다.
정현욱: 애니메이션 제작에 정식으로 참여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사랑은 단백질>이 첫 경험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연상호 감독님과 원래 친분이 있어 <사랑은 단백질>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한 편으로는 작품의 퀄리티를 최대한 올려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쉽지가 않더라구요.
결국 제가 그림 그리는 방식은 최소화하고 감독님과의 끊임없는 조율을 통해 애니메이션 배경 제작에 적합한 방식을 최대한 빨리 습득할 수 있도록 컨트롤해야 했습니다. 색감을 만들어내는 일부터 배경 속 조명의 밝기를 조절하는 것까지 어느 것 하나 쉽게 넘어갈 수 없었지만 특히 어려웠던 부분은 애니메이션 제작 경험이 없었던 탓인지 모르겠지만 모든 장면이 나름의 특징을 가지고 있되 일관성을 유지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사랑은 단백질> 캐릭터요? 하핫, 모두 제 친구들 캐릭터입니다. 배경이 되는 자취방 역시 제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구요.^^;
문제는 원작 만화에서 보여지는 광각 앵글이었는데 원래 광각이 들어가지 않는 장면은 3D로 처리하고 광각 장면은 배경 감독의 재량에 맡길 요량이었다. 그런데 광각 앵글은 소실점의 일부분 또는 라인의 기울기가 조금만 틀어지더라도 배경 전체가 일그러져 보였다. 게다가 캐릭터는 더미로 완성된 터라 두 가지를 합성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배경과 더미 캐릭터 모두 포토샵을 이용해 광각 앵글로 전환하기로 했고 마침내 성공했다. 원작 만화에서 보여지는 미묘한 앵글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수 차례 수치를 바꿔가며 테스트 한 결과였다.
연상호: 원화가 3D 데이터 위에 연필로 작화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될 테니 배경 라인 역시 연필 느낌이 살아나야 했습니다. 작업효율을 위해 더미 애니메이션 제작방식을 택하긴 했어도 제가 원하는 애니메이션은 완벽한 2D 느낌이어야 했으니까요.
사실 배경의 경우 3D로 세팅한 후 다시 연필로 트레이스를 하는 게 작업량 증가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원하는 각도, 레이아웃을 쉽게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배경감독의 작업량을 절반 정도로 감소해주는 장점이 있는 셈이라 할 수 있죠.
캐릭터, 움직임, 배경, 색감 모든 면에서 원작 만화의 느낌과 분위기를 유지하되 <사랑은 단백질>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면서 정지된 만화의 프레임 간 유기적 관계, 내용의 행간을 영상언어와 영상연출을 통해 재창작하는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80년대 후반 몇 편의 원작 만화가 애니메이션 TV시리즈로 제작된 이후 원작 만화를 다시 중단편 또는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예가 없었음을 생각해 볼 때 더더욱 조심스러운 부분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연상호 감독은 최규석 작가와의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사랑은 단백질> 원작 만화의 느낌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영상 언어 연출의 묘미를 창조해가는데 주저함이 없으며 조금씩 그 결과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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