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는 기대 이상이었다. 오랜 시간 속에서 열정과 애정으로 애니메이션 작업을 해왔던 김창수, 장진열 두 사람과 실력과 뚝심으로 이제 애니메이션에 대한 열정을 발산하려고 하는 최재훈 까지 세 사람은 정해진 시간 내에 최선의 퀄리티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이들이 그려낸 원화 사이의 공백을 어떻게 채워 넣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감독은 애니메이션 동화를 내부 인력으로 구성해 진행하고 싶어했다.
물론 나 역시 연 감독의 생각에 동의한다. 작업과 관련된 소통, 시간 및 일정 관리, 퀄리티의 확보 등을 생각하면 동화 작업은 내부에서 진행하는 게 가장 좋다. 하지만 현실은 늘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동화팀을 내부 인력으로 구성할 공간, 장비가 확보될 수 없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외주업체를 선택해야만 했다. 마침 동화/칼라 외주업체인 e-grim을 소개 받게 되었는데 정해진 예산 때문에 서로 비용을 조정하는 게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쉽게 이야기가 풀렸다. 서로의 조건에 대해서는 조금씩 양보해가며 작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사랑은 단백질>의 경우 전체 동화 매수가 대략 14,000매 정도로 예상이 되었다. 여기에 한 컷 당 들어가는 인물들이 많을 경우 개별 작화를 해야 하니 실제로 작업을 진행해야 하는 매수는 더욱 늘어나게 된다. 우리는 e-grim과 상의 하에 스캔, 라인테스트, 동화, 채색, 디지털 효과까지 일련의 과정을 모두 맡기기로 하며 동화 매수를 최소화하는데 신경을 썼다.
<사랑은 단백질>의 동화 매수는 다른 작품과 비교해봤을 때 거의 극장판에 육박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모든 컷에서 캐릭터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데 이는 연상호 감독이 매 컷마다 캐릭터들의 연기와 내용의 흐름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며 공을 들였기 때문이었다. <사랑은 단백질>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감정의 흐름인데 그걸 연출하고 표현하려다 보니 매 장면에서 캐릭터들이 희로애락을 표출하며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어야 했다.
연상호: <사랑은 단백질>과 같은 작품에서 중요한 건 감정의 흐름을 어떻게 배치해 놓느냐죠. 이같은 작품에서 액션의 크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인공들의 표정, 손동작, 고개의 움직임 등 미세하지만 그들의 감정이 드러날 수 있는 연출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것 때문에 동화 작업자들을 괴롭게 하긴 했지만요.
연 감독의 말처럼 <사랑은 단백질>의 연출방식은 그대로 원화와 동화 작업에 반영이 되어 작업자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하지만 피해갈 수 없었다. 원화는 그나마 수월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동화 작업자들은 각 캐릭터들의 작은 동작, 몸과 얼굴 표정의 형태를 유지하며 초당 24프레임을 그려내야 했기 때문에 더더욱 어려움을 호소했다.
지난 번에 언급했듯이 <사랑은 단백질>의 캐릭터들은 그리기가 참 까다로운 편인데 e-grim에서도 역시 처음 동화 테스트를 할 때 형태가 연 감독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아 무척 애를 먹었다. 캐릭터가 제대로 모양새를 갖추고 별 무리 없이 진행이 될 즈음엔 미묘한 움직임을 계속 그려내야 하는 것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수 많은 한국 애니메이션 중에 시도해보지 않은 여러 방법들을 실현하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작업 과정이 어려웠던 만큼 분명 좋은 결과로 노력에 대한 대가를 보답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동화 작업자들은 보통의 경우 동작이 큰 액션장면이나 몸 전체를 움직이는 장면들이 많을 경우 동화 작업을 하기가 비교적 수월하다고 하는데 <사랑은 단백질>은 몸을 움직이는 폭이 무척 작은 반면에 표정과 같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장면들이 많아 동화 작업을 하는 사람 입장으로서는 움직임이 거의 없다시피 한 똑같은 장면을 계속해서 그리는 셈이 되어서 지루하기도 할 테고 조금이라도 선이 틀려지면 바로 리테이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여간 신경 쓰이는 작업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e-grim은 동화/칼라 외주업체라서 여러 작품을 동시에 진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작업자들이 <사랑은 단백질> 동화를 무척 부담스러워해서 기피하는 현상까지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그림자 구분선도 한 몫을 했는데 가령 일반 애니메이션의 경우 색 지정은 2단계로 해서 원래의 색과 그림자 색 두 가지로 나누어 진행한다. 그런데 <사랑은 단백질>의 경우 모든 장면에 원래의 색, 그림자 색에 하일라이트까지 첨가했으니 그 구분선 중에 어느 한쪽이라도 위치를 벗어나게 되면 리테이크가 발생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업 발주를 주는 쪽이나 일을 받는 쪽이나 모두 꼼꼼히 확인해야만 해서 신경이 몇 배 더 쓰일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럴 때는 캐릭터 형태 및 그림자, 하일라이트 등에 대해 최대한 많은 경우의 수를 예측하고 데이터를 준비해 두고 있어야만 작업 지시와 확인과정을 포함한 전 공정에서 문제가 최소화 할 수 있다.
연상호: 처음에 조금 욕심을 부린 면이 없지 않아 있어요. 퀄리티를 높여 정말 좋은 그림을 뽑아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림자 부분을 너무 복잡하게 설정한 걸 조금은 후회하고 있어요. 욕심이 과했다 싶었죠. 오히려 그림자와 하일라이트에 집중되는 시간과 노력을 줄였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번에 드러난 문제점은 차기작에서 반드시 만회할 겁니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사랑은 단백질>의 주된 배경은 반지하 자취방이다. 반지하 자취방이란 배경설정은 배경 작업 진행에 장점과 단점을 모두 안고 있었는데 장점은 공간의 변화가 많지 않다 보니 방 배경에 필요한 모든 소품들을 3D로 설계 및 설정한 후 원하는 레이아웃을 손쉽게 얻어낼 수 있었다는 것이고 단점은 공간의 제한 때문에 작품의 흐름이 자칫 단조로워질 수 있고 똑같은 공간 내에 다른 빛의 표현을 하는 게 무척 까다롭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원작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폭이 적을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연찬흠 기술감독은 원작에 근거해 자취방의 전체 구조를 설정했다.(연재 2화 참고) 3D로 설정된 배경은 이미지로 출력된 후 정현욱 배경감독에게 넘어가 선 및 칼라 작업이 다시 진행되기 때문에 전선 한 가닥조차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만화 속에서 산발적으로 보이는 배경의 모든 소도구를 하나로 조합해 3D 프로그램 안에 가상의 공간을 만들고 그 가상의 공간을 다시 현실세계로 가져오는 작업은 손에 잡힐 듯한,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한 배경을 만들어 냈고 그로 인해 캐릭터들도 그 안에서 더욱 생기를 띄게 되었다.
연상호: 3D로 설정한 배경과 만화에서 보이는 배경의 느낌을 일치시키는 게 중요했어요. 작업의 효율성을 고려해 3D로 배경 설정을 했지만 최종 결과물은 만화에서 봤던 이미지의 발전된 형태여야 했거든요. 3D지만 3D가 아닌 느낌, 게다가 3D로 작업한 결과물은 어떻게 해도 기계적인 느낌이 있기 때문에 프린트 출력한 3D 이미지 위에 연필로 다시 선을 따고 스캔을 받은 후 칼라 작업을 진행해야 했습니다.
처음에 많이 고민했던 부분은 광각 앵글이었는데요. 결국 적절한 방법을 찾긴 했지만 작업 초기엔 3D 공간 안에서 카메라를 바꿔가며 앵글을 설정해도 만화에서 보던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의 광각이 나오지 않더라구요.
3D로 추출한 이미지를 다시 라이트박스 위에서 연필로 외곽선을 따내고 그걸 다시 스캔 받아 채색하는 과정은 언뜻 보면 작업공정이 많아져 짐짓 미련해 보일 수 있지만 결코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최대한 손 맛이 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카툰 렌더링이 아니라 작업자의 손으로 다시 재가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세히 보면 손으로 빚어낸 배경 속에 3D 가상공간이 남아있음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분명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정현욱 배경감독은 배경에 색을 입혀가며 컨셉 이미지를 만들어낼 때가 가장 힘들다고 고백했다. 만화가 칼라로 작업된 것이긴 했지만 단순히 스포이드로 색을 추출해 입힌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애니메이션은 만화와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트리지는 않되 새로운 창작물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만화 안에 있던 빛을 다시 재가공하고 만화 안에 있던 공간의 기울기를 재설정하는 과정은 만화를 원작으로 했기 때문에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과도 같았다.
캐릭터의 칼라도 마찬가지였는데 지면으로 마주하던 캐릭터를 살아 움직이게 하며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으로 재탄생 시키기 위해 가장 중요했던 건 캐릭터의 흐트러짐 없는 형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칼라 설정이었다. 그림자의 크기, 얼굴의 홍조, 옷의 칼라들이 배경과 마찬가지로 만화를 보듯 자연스럽지만 그 자체로 창조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연상호: 처음에는 배경 칼라를 어떻게 설정해도 원하는 느낌이 나오지 않더라구요. 규석이와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해 이야기했던 기억이 나네요. 원작이 눈 앞에 있고, 데이터가 어느 정도 갖춰진 상황에서 새로움을 창조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번 작품 배경 설정에서 신경을 많이 썼던 건 칼라의 배치보다도 빛의 흐름이었습니다. 일본이나 미국 애니메이션에서 익숙하게 보던 빛의 흐름이 아닌 저희들이 살고 있는 공간의 빛, 만화 속의 빛을 배경에 최대한 반영하도록 노력했습니다.
로토스코핑 기법을 활용한 <지옥>의 연상호 감독은 <사랑은 단백질>에서 진일보하고 있다. 중단편 애니메이션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넘어 전작의 문제점을 해결해가며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최선의 작업 공정과 방법을 찾아 스스로 변태(變態) 중이다.
<사랑은 단백질>은 만화와는 또 다른 느낌의 칼라와 공간의 활용을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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