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깔스러운 스토리, 매력적인 캐릭터, 아름다운 배경, 화려한 그래픽, 현란한 특수효과… 이 모든 게 애니메이션(영화)을 볼 만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임엔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보다 영상을 더 볼 만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다름아닌 편집이다.
애니메이션에서의 편집은 영화와 달라서 최종 결과물을 가지고 편집할 수 있는 여지가 그다지 충분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편집은 대개 스토리보드 단계에서 많은 부분을 해결해야 한다. 게다가 스토리보드가 충실하지 못할 경우엔 애니메이션 제작기간 및 예산 집행에 큰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여러모로 스토리보드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다.
하지만 스토리보드 단계에서 편집의 많은 부분을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크고 작은 문제들은 컷들이 완성되고 계획된 순서대로 배열하면서도 발생하기 마련이라서 이 때 다시 편집의 묘(妙)를 발휘해 완성본을 만들어야 한다.
<사랑은 단백질>의 경우 최규석 작가의 원작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흐름은 원작만화를 참고해 설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화는 지면 위에서 펼쳐지는 예술인 만큼 지면 위의 레이아웃, 대사, 의성어, 칸의 활용을 기본전제로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영상물이기 때문에 만화의 모든 레이아웃을 고정된 화면 안에 새롭게 세팅하고 각 장면이 가져야 하는 시간(타이밍)을 어떻게 배분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랑은 단백질>은 원작만화를 스토리보드로 옮기는 작업이 무척 중요했다.
연상호 감독은 스토리보드 작업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랑은 단백질> 원작만화의 칸과 칸 사이는 애니메이션에서 컷과 컷으로 나뉘어졌고 말 풍선 안에 채워져 있던 문자들은 배우들의 녹음을 통해 대사로 재탄생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만화의 칸과 칸 사이를 지나고 있는 하얀 여백은 애니메이션의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 컷과 컷 사이를 흐르고 있는 시간(타이밍)으로 탈바꿈하였다.
연상호 감독은 만화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정서를 파악한 후 각 캐릭터들의 동선을 재배치하고 대사를 재정비해 각 컷 마다 적절한 시간을 설정해 원작만화와 비슷하면서도 색다른 애니메이션 버전의 <사랑은 단백질>을 만들어 냈다.
연상호: 만화의 호흡과 정서를 놓치지 않는 게 중요했어요. 만화는 페이지를 넘기며 흐름을 쫓아가다가도 어느 순간 멈춰서 캐릭터, 대사를 한 컷 한 컷 천천히 자신의 호흡에 맞춰 읽어내잖아요? 애니메이션에서는 한 순간을 놓치면 바로 다음 컷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관객의 자유의지는 사라지는 것이죠.
그래서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말하는 대사, 표정, 정서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고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그 호흡을 따라올 수 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특별한 기교가 있다기보다 작품에 대한 통찰력이 필요했습니다.
스토리보드는 다시 애니메틱스(스토리보드 릴)로 만들어졌는데 애니메틱스를 수 차례에 걸쳐 보고 또 보면서 느낌이 부족한 부분은 Premiere나 After Effect에서 컷을 자르고 붙이고 시간을 늘이고 줄이면서 적절한 타이밍, 그리고 컷들의 유기적 연결과 움직임을 찾는데 노력했다. 이 때 기계적인 계산에 의해서 편집이 이루어지는 부분도 많지만 확실한 판단과 좋은 타이밍은 연출자의 감각에 상당부분을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연 감독은 이런 방면으로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좋은 애니메이션을 수십 번 씩 보는 습관이다. 사람마다 편차가 있긴 하겠지만 연 감독의 이런 습관은 세밀한 감각을 발휘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스토리보드(혹은 애니메틱스)를 잘 만들어놨다고 할지라도 애니메이션 제작이 마무리 될 즈음엔 다른 부분이 꽤 많은 결과물을 손에 쥐게 마련이다. 그 중 하나는 타이밍에 대한 차이인데 이는 스토리보드에 원화, 동화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타이밍 감각에 대한 오차 문제가 대부분이다. 스토리보드 역시 만화와 마찬가지로 지면을 활용하여 분할된 프레임 안에 컷을 채워가는 방식이라서 각 컷의 길이(시간)를 연출자의 감각만으로 결과물과 똑같이 정확하게 정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경험이 풍부한 연출자의 경우 초, 프레임 단위까지 표시를 해두지만 대부분의 경우 초 단위, 혹은 10단위 프레임 정도로 정하게 된다. 이를 근거해 애니메틱스로 만들어 실제 시간의 길이를 가늠하게 되는고 이 때 정하게 되는 시간은 (정확하진 않지만) 대부분 결과물과 일치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원화, 동화가 없는 상태에서는 컷의 흐름이 느리게 느껴지거나 빠르게 느껴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과정을 더 명확히 결정하고 넘어가기 위해서는 애니메이션이 보다 많이 들어간 애니메틱스가 필요했다.
연상호: 메인 프로덕션을 진행하기 전에 컷 별 동영상을 만들어 전체를 이어 붙여 확인해봐야 했어요. 더미 캐릭터 애니메이션을 활용한다면 보통 스틸 이미지로 만들어진 애니메틱스보다 더 확실한 타이밍과 연출의 흐름을 잡아낼 수 있으니까요. 정해진 시간, 정해진 예산을 계획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관문인 셈이었던 거죠.
물론 원화, 동화를 위한 준비로써 더미 애니메이션-컷 별 동영상을 만들기도 해야 했지만 감독의 작품에 대한 연출과 호흡을 정밀히 다듬기 위해 전체 분량에 해당하는 컷 별 동영상을 묶는 작업에 속도를 올려야 했다.
<사랑은 단백질> 초기 편집은 과장하자면 마치 영화 촬영 현장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방식과도 같았다. 이미 스토리보드로 연출의 감을 잡은 연 감독은 더미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캐릭터들의 동선과 위치를 보며 "컷!"과 "오케이!"를 외쳤고 그렇게 결정된 컷들은 다시 대사 사운드를 얹혀 스토리보드에 표시된 각 컷의 길이대로 편집을 했다. 그런 후 연 감독은 다시 컷과 컷의 이음새는 물론 컷 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과 프레임의 간극, 호흡들을 검토하며 결정을 하게 된다. 이렇게 결정된 컷들은 각 스태프들의 손에 의해 원화, 동화, 배경, 칼라까지 완성된 후에도 최종 마스터링을 위해 다시 한 번 연 감독의 판단을 기다려야 한다.
애니메이션의 경우 초기에 편집방향이 결정되지 않으면 프로덕션 진행이 어려워지고 복잡해질 뿐만 아니라 최종 편집을 할 때도 기준을 잡지 못하고 헤매게 된다. 그런 면에서 영화와 크게 다르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애니메이션 작품은 "스토리보드가 잘 나오면 작품의 50% 이상은 끝난 셈"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컷들이 속속 완성되고 있는 요즘, 연 감독은 매일매일 스토리보드, 애니메틱스, 완성된 컷들을 살펴보면서 작품의 정서, 흐름을 세밀하게 다듬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II. 프레임 안, 채워지는 시간이 외에 각 컷들을 완성해가는 아주 작은 범주로서의 기술적인 편집도 있을 수 있겠는데 애니메이션 <사랑은 단백질> 17번 컷과 같은 경우가 그렇다. 17번 컷은 돼지 사장이 스쿠터를 타고 배달을 나가는 설정으로 원작만화에는 없는 컷인데 앞, 뒤 컷의 맥락과 주인공들의 감정선의 완급조절을 위해 연 감독이 창작해서 삽입한 컷이다.
연상호: 없는 컷을 만들어 삽입하는 것이 어려운 건 아니죠. 중요한 것은 새롭게 만들어 삽입하는 컷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원작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관객들의 감정 흐름에 도움을 주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늘 관객들의 감정 흐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이미지를 보다 정교하게 만드는 건 그 다음 일이죠. 그래서 늘 작품의 호흡과 흐름에 대해 고민합니다. 진척이 없을 때에는 혼자 끙끙 앓죠.
만화는 독자의 자유의지에 따라 만화를 읽는 호흡을 조절할 수 있고 칸과 칸 사이의 빈 여백을 통해 독자 스스로가 상상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은 시간 위에 얹혀진 이미지와 이야기를 가지고 진행되는 방식이므로 시간이 흘러 지나가고 나면 다시 돌이켜 볼 수 없기 때문에 관객이 상상해야 할 부분을 되도록이면 영상으로 재현해서 보여줘야 한다.
원작이 있는 애니메이션이든 오리지널 창작 애니메이션이든 감독(연출자)은 원래 계획했던 이야기에 따라 애니메이션의 컷과 프레임을 요리해서 의도하는 바를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때 컷과 프레임을 어떤 레서피를 가지고 요리하느냐는 전적으로 감독의 역량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연 감독 역시 <사랑은 단백질>을 연출하면서 작품과 관객과의 소통에 대한 부분을 가장 많이 고민했고, 고민 중이다.
17번 컷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돼지 사장이 스쿠터를 타고 배달하는 장면"이란 설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앞, 뒤 컷을 보면서 최적의 레이아웃을 설정한다. 배경 작업이 진행되고 돼지 사장과 스쿠터를 3D 더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다. 후반작업에 들어갈 스쿠터 사운드 이펙트를 염두에 두고 스쿠터가 언제 골목 안으로 진입할 것인지, 빠져나가는 속도는 어느 정도가 좋은지를 정한다. 그리고 스쿠터로 인해 빛의 흐름과 반사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해 결정한 후 최종 결과물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연상호: 새로운 작업은 늘 즐겁습니다. 아니, 어떤 작업도 제겐 늘 즐거움을 줍니다. 공간을 살아 숨쉬게 만들고 캐릭터를 보내서 시간을 채운 후 그 시간을 다시 다듬는 작업은 큰 흐름을 스케치하든 디테일을 새기든 간에 재밌다는 거죠.
이로써 17번 컷은 원작만화에서도 주어지지 않았던 프레임을 확보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돼지 사장이 스쿠터를 타고 배달 가며 주인공들 사이의 시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17번 컷과 같은 꽤 많은 양의 컷들이 연 감독에 의해 새롭게 창작되거나 재해석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컷들은 편집 프로그램에서 "Render" 키를 누르기 전까지 프레임 단위로 쪼개져 잘려나가거나 다시 붙여지거나 하면서 끊임없이 최적 타이밍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과의 힘겨루기를 해야 한다.
애니메이션의 컷과 컷,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는 매 순간 애니메이터들의 고민과 노력으로 무한 확장되고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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