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5일 일요일

더 레슬러(The Wrestler), 그 어깨 너머로 들리던 환호와 야유

어릴 적 당시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에 김일을 비롯해 여권부, 그리고 신인으로 보였던 이왕표 등(그 외는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이 거대한 외국인들이 와서 '레슬링'을 했었고 어린 마음에 그들의 모습은 무척 충격적이었다. 어렸기 때문에 그들의 '레슬링'은 사실처럼 받아들였었다. 외국 레슬러가 팬츠에서 무기를 꺼내면 목청이 터지도록 '안돼'를 외쳤고 김일의 머리에서 피가 난 상태로 외국 레슬러를 박치기로 쓰러뜨릴 때면 함성을 질러댔었다. 특히 여권부의 꿀밤공격은 너무너무 통쾌했고 이왕표의 몸을 던지는 드롭킥은 표범처럼 재빨랐다.

흑백TV에서 보던 사람들이 현실로 걸어나와 육중한 몸을 움직이며, 선명한 피를 흘려가며 (쓰러질 때마다 큰 소리가 나던) 합판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링 안에서 링 밖에까지 들리도록 거친 숨을 몰아쉬며 '레슬링'하던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던 난 적어도 김일, 여권부, 이왕표라는 이름은 잊을 수 없게 되었다. 어릴 적 두 눈으로 본 시합만이 진정한 레슬링이라고, 트릭은 전혀 없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어린 나는 나이가 들며 접하게 된 미국의 레슬링에 대해선 '쇼'가 난무한 가짜라고 생각해 관심도 두지 않았었다.

후에 그들의 '쇼'는 생각 이상으로 정교하며 링 안에서의 레슬링은 오랜 훈련과 자기와의 싸움을 통해 실제로 몸을 부딪히고 합을 짜 최대한 화려한 '리얼한 쇼'를 연출하며 때론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는 레슬러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들의 '쇼'를 다시 보게 되었고 그들의 삶에 경외심이 생기게 되었다. 게다가 링 밖의 생활도 그들만의 캐릭터로 살아가길 노력해 팬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다는 걸 알게 되고서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프로페셔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레슬링'은 내게 있어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쉽게 잊혀지지 않는 기억의 한 조각, 흑백과 칼라가 오가는 뚜렷한 장면들을 남겨줬다. 그러니 '반칙왕'같은 영화에서 나오는 '타이거마스크'는 얼마나 많은 감정을 달고 오는 상징이 되었겠나. 그리고 얼마 전 내겐 '나인하프위크'의 섹시하고 '엔젤하트'의 퇴폐적인 이미지로 강하게 남아있던 미키 루크(Mickey Rourke)가 주연한 "The Wrestler"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The Wrestler"는 레슬러를 소재로 하긴 했지만 레슬러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한 '인간', 혹은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게다가 미키 루크의 굴곡많은 삶과 영화 속 랜디의 삶이 오버랩 되면서 이미 많이 알려진 것과 같이 영화 "The Wrestler"는 미키 루크의 '자전적' 영화로 비춰지기도 한다.

영화 속 랜디의 모든 비극은 스스로가 자초한 부분이 많다. 랜디의 과거가 자세하게 등장하진 않지만 딸 스테파니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 그리고 그가 사랑하게 된 캐시디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특히 한 번도 딸을 찾아나서지 않은 레슬러 아버지는 자신의 꿈을 위한 인생을 산 후 더 이상 삶의 에너지를 쏟아낼 수 없을 때에야 겨우 딸을 찾아 고해성사를 한다. 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랜디의 착각이다. 사실 랜디가 스테파니에게 '고백'하면서 우는 장면을 보며 마음은 아프지만 냉정한 시선을 둘 수 있었던 이유는 다 큰 어른의 눈물만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아버지에게 버려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스테파니의 아픔이 함께 느껴져서다. 역시 마찬가지로 캐시디도 나름대로 노력은 하지만 고집스럽고 마초스러운 랜디는 캐시디를 제대로 이해할 리 만무한 것이다. 랜디에게 있어 가정과 사랑은 자신의 삶과 이상에 비하면 그닥 중요한 게 아닌 것이다.

가정(가족)을 지키는 것과 남자(마초)가 자신의 이상을 좇는 것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경우다. 가정을 지키려면 자신의 이상을 낮추던가 일정부분 포기해야 하고 이상을 좇으려면 가족의 아픔 역시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랜디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가 아니라 랜디가 고독해하고 슬퍼하는 모습이 꿈을 잃은 한 남자의 그것이었기 때문에 보는 내내 가슴이 아팠고 내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보게 되었다. 그건 이상과 현실의 틈만큼 짊어져야 할 고통과 힘겨움이며 그로인한 갈등은 '타인'과의 갈등이 아니라 바로 '자신'과의 갈등인 것이다. 그 갈등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죽음에서도 외로움에서도 슬픔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링 위에서 저 멀리 링 아래로 몸을 날릴 수 있는 랜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보며 랜디와 미키루크가 분리되지 않았던 건 미키루크의 삶 역시 영화 속 랜디와 비슷하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내겐 영화 속 랜디가 레슬러가 아닌 우리들의 삶과도 너무나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랜디가 '미키루크'로 투영이 되던 '나'로 투영이 되던 혹은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로 투영이 되던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가 되더라는 것. 미워하지만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레슬러는 언제나 환호와 야유를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자신이 흘린 땀의 양만큼 환호를 받지만 그와 비례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바로 야유를 받으며 링에서 내려와야만 한다. 삶이 그렇다. 결코 자신이 흘린 땀은 스스로를 배신하지도 않을 뿐더러 노력을 멈추는 순간 인생의 링에서 퇴출되는 것이다. 그 어느 순간순간이 아름답지 않고 위태롭지 않을 수가 있을까. 스스로 '파이팅'을 해도 어느 순간 한계를 체감했을 때 느껴지는 공허함과 절망은 늘 주변에 고개 숙여 잠복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상을 좇는다면, 그럴 용기가 남아있다면 링 위로, 아래로 몸을 날릴 각오정도는 하고 있어야 한다.

랜디와 함께 동료 레슬러들이 쇼를 구상하고 연습을 하며 서로의 몸을 때리고 부딪힘에 있어 최선을 다하면서도 서로 존중하고 존경하는 그들의 관계와 삶은 현실에서 보기 드물정도로 이상적이고 아름다웠다. 삶이 아무리 남루하더라도 저들의 삶과 같다면 살 맛 나겠다 싶었다.

영화는 랜디가 몸을 날리면서 끝났지만 우리의 삶은 몸을 날리는 순간부터 비로소 시작이다. 언제나 삶은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지금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부터 다시 현재와 과거를 지나 미래를 열수 있기 때문이다. 참다운 삶을 찾는다는 건 그렇다. '이제야 알겠다'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유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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