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13일 토요일

명절

 

매번 명절이 되면 물건은 넘치고 넘치는 상품 속에 사람들이 넘실댄다.

평생을 써도 다 쓰지 못할 것 같이 쌓인 상품처럼 인간의 욕심은 끝닿는 곳 없고

욕심사이에서 방황하다 지쳐 눈을 감으면 욕심처럼 허망한 것도 없다.

저 수 많은 자본의 토악질 속에서 허우적대다 끝내 숨을 거두는 인간의 삶이

당장은 즐겁고 행복하지만 잠시 호흡을 멈춰 먼 발걸음을 두고 바라보면

내 몸에 휘감기고 내 마음에 들어앉은 현대의 삶이 꼭 어울리는 옷만이 아니었음을 알 때도 있다.

중국의 경품추첨의 규모는?

 

중국은 면적도 넓고 사람도 많다고 하잖아요?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사진 한 장 소개합니다. 중국에 장춘에 있는 欧亚;Ou Ya-오야 마트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인데 春节;Chun Jie-춘지에(설)를 맞이하여 경품추첨행사를 한다는 플랭카드입니다. 위에서 두 번째 줄에 5000이라고 숫자가 보이시죠? 그 줄에 있는 글의 내용을 보면 추첨을 통해 5000명에게 茅台;Mao Tai-마오타이 술을 증정한다고 하네요. 세 번째 줄은 IMAX 3D영화 티켓 10000장과 생활용품 50만 개를 선물로 준비했다고 하네요. 물론 복권방식 등의 추첨을 통해서 주는 것이겠죠.

 

규모가 엄청나죠? 물건을 산 영수증 대로 기회가 주어진다니 매일매일 가서 쇼핑을 하면 그만큼 확률도 높아져서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상품을 받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상품이 1인당 1개씩이라면 51만 5천 명(515,000)에게 줄 상품을 준비했다는 것이죠. 장춘시 인구는 대략 300만 명에 육박한다고 하니 장춘시 인구의 6분의 1에게 줄 상품을 준비했다는 거네요. 놀랍지 않나요?

 

물론 행사를 진행하는 欧亚;Ou Ya-오야 마트의 규모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라고 하니 그럴만도 하겠다 싶지만 한국과 규모를 비교해보니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 사실 저런 내용을 보면 놀랍기도 하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플랭카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 服饰类/钟表珠宝类/化妆品类/床品类/超市类/电器类/儿童商场

    5000瓶茅台酒滚动大抽奖发卷、投卷地点,

    10000张IMAX 3D影票 50万件适用礼品刮大奖活动地点、

    已迁至2F儿童世界旁

 

★ 5000瓶茅台酒滚动大抽奖现场、领奖地点

    已迁至-1F大西洋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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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품추천이란 말은 抽奖 [chōu jiǎng]이라고 하며 한글음독은 [초우 지앙]입니다.

중국술 마오타이주는 茅台酒 [máo tái jiǔ]라고 하며 한글음독은 [마오 타이 지우]입니다.

설이란 뜻의 춘절은 春节 [chūn jié]라고 하며 한글음독은 [춘 지에]입니다.

 

춘절에 서로 하는 인사말은 "过年好"입니다. 过年 [guò nián;꾸어 니엔]은 설을 쇠다. 새해를 맞다라는 뜻이고 好 [hǎo;하오]는 좋다는 뜻이니 "새해 잘 보내세요", "명절 잘 보내세요"라는 뜻이 되겠죠. 그러니 설을 맞이해서 이렇게 인사하면 됩니다.

 

"꾸어 니엔 하오;过年好" :)

서점이 사라진 세상의 무식한 대학생

그대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 - 홍세화 via 일상다반사 by 후박나무

 

글을 읽다 몇 가지 기억이 떠올라 적는다.

 

내가 다니던 대학 앞에는 소위 '대학로'라는 게 있었다. 크지 않은 도시였기에 젊은 대학생들은 대학로 그곳에서 대부분의 일과를 보내곤 했다. 그러니까 내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는 대학 근처에 가면 크고 작은 서점이 곳곳에 있었고 전통 주점과 당구장, (비디오를 볼 수 있는) 다방 그리고 비교적 촌티나는 상점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대학에 입학한 후에 시대가 급변했고 대학로 역시 빠른 속도로 변해갔다. 당구장은 PC방과의 경쟁에서 밀리며 가격을 점점 인하하더니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고 속칭 비디오 다방(커피숍)은 최신 시설을 구비한 비디오방으로 변해갔다. 촌티나는 상점들은 인테리어에 상당히 공격적인 투자를 하며 자리를 잡아갔고 전통주점은 '인동초'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사라졌다.

 

사실,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가끔 들렸던 서점이 점차 눈에 띄지 않더니 어느샌가 시험준비를 위한 서점을 제외하고는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었다.

 

즈음, 마지막까지 남아서 인문학 서적을 팔던 서점이 한 군데 있었는데 서점 주인아저씨(기억으로는 형님뻘)는 소아마비였다. 한쪽 다리가 유난히 가늘었던 데다가 까만 뿔테 안경을 쓰고 있어 기억이 선하다. 약간은 차갑지만 온화한 기운이 흐르던 주인아저씨는 어느 날 서점을 찾았던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건 말건 관심없는 듯 책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묶고 있었다.

 

주인아저씨에게 "어? 서점 이제 안 해요?"라고 물었다. 주인아저씨는 다른 날과는 다른 좀 더 엄숙하고 조금은 침통한 표정으로 "네"라고 짧게 답했다. "어.. 여기가 대학로에서 마지막 남은 서점인데... 이제 어디에서 책을 사야 하나..."라고 주인아저씨가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을 했는데 그 때 난 씁쓸하게 가느다란 웃음을 짓던 주인아저씨의 모습을 보았다. 난 그 쓸쓸하고 슬픔이 막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주인아저씨의 표정과 분위기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그 서점이 마지막으로 문을 닫던 날 부터 대학로는 급속히 유흥가로 변해갔던 것 같다. 그리고 더 이상 대학 교정(캠퍼스)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기타치고 노래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어느 누구도 무언가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고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것 같다. 내 기억 속에서 소위 '지성의 대학로'는 어느 짧은 시간동안 '무식한 대학로'로 부끄러움 하나도 없이 완벽하게 얼굴을 바꿔버렸다.

 

그때의 난 (지금도 그렇지만) 철이 없었고 사리분별이 명확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서점이 자취를 감췄다'는 현실에 대해서는 큰 충격을 받았었다. '대학로'에서 서점이 사라지다니 그 보다 더 큰 충격이 있을까. 서점이 사라진 후의 대학로는 돈을 쓰는 자와 돈을 버는 자 두 부류만 남아 서로 물고 뜯는 일만 가득해지게 되었다.

 

오색의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대학로의 밤거리는 나름대로 꽤 운치가 있다. 하지만 날이 밝고 아침이 되면 (좀 과장을 하자면) 정신 못차리는 술취한 대학생들과 그들의 틈에 어지럽게 방황하는 고등학생과 젊은이들이 넘쳐났다. 누가 대학로를 그렇게 변하게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세상이 그렇게 변해가니 각자 살길을 찾아,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그때가 아마도 '독재타도'와 '민주주의'를 외치던 구호가 (지금도 큰 이슈인) '등록금 인하'의 구호로 바뀔 즈음이 아니었나 싶다. 사상과 철학, 이념의 목적이 뚜렷했던 세대가 무언가를 손에 얻어 쥐게 된 후엔 누구도 그 이후에 대해 논의한 바가 없었고 마치 방향잃은 부표처럼 흥청거리진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들어온 '새내기'들은 '4.3 추모집회'를 하던 '5.18 추모집회'를 하던 이젠 철지난 이슈와 이념으로 치부하며 함께 어깨걸기를 꺼려했고 대신에 '돈'을 들여 몸치장을 하고 '돈'을 쓰며 몸에 알코올을 붓고 사랑을 나누고 젊음을 탕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방향잃은 부표, 386세대들은 지금 정치를, 경제를 쥐락펴락하고 있을 텐데 그들이 원하던 '독재타도'와 '민주주의'는 문열이만 하고서 모두 함께 '먹고 사는' 문제로 가열차게 걸음을 옮겨버렸다. 그리고 그 이후에 (여러가지 이유와 원인들이 있겠지만) 대학로에 서점은 사라지고 책은 잃지 않는 대학생만 넘쳐나게 되지 않았나 싶다.

 

홍세화씨가 말한 '무식한 대학생'이란 말은 옳다. 하지만 대학생만 무식한 게 아니다. (물론 나를 포함해) 수 많은 성인(成人)들이 무식하다. 역사적 사실을 줄줄 꿰고 있다고 해서,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해서, 수 많은 고전들을 읽었다고 해서 유식한 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성인들은 무식하다.

 

하지만 홍세화씨가 대학생을 지칭해 무식하다며 깨어나야 한다고 외치는 목소리엔 충분히 공감한다. 근래에 개인적으로 내린 작은 결론, 세상의 수 많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대학생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물론 난 꼭 학벌에 속하는 '대학생'만을 지칭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젊은이들 중 열에 아홉은 대학생이라고 해도 무방하니 꼭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다만, 홍세화씨의 외침에, 질문에 반응을 보일 대학생들이 많은가라고 반문해보면 개인적으론 무척 비관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일은 아니지만 쉽지 않은 일임은 분명하다. 이런 생각들을 종합해보면 역시 대학생이 변하면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희망 한 줌은 있다는 것이다.

 

홍세화씨의 글을 읽으며 나의 '무식'을 비수로 찌르는 듯 해서 아프고 비참했다. 무식해지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나의 유식은 금새 밑천을 드러내기 마련이라 스스로가 무식하지 않다고 항변할 수도 없다. 그래서 빨리 유식해지지 못할 바에야 스스로의 무식함을 절절히 곱씹어보고자 기억의 편린들과 몇 가지 생각을 두서없이 기록한다. 적어도 스스로 유식하다며 '자존자대'하는 우(愚)는 범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 링크 걸린 글 내용 중 '그대가 입학한 대학과 학과는 그대가 선택한 게 아니다. 그대가 선택당한 것이다'라는 말을 곱씹게 된다. 다시 말해 '내가 소신지원해서 간 대학'이 사실은 '대학들의 (줄세우기로 인한) 비열한 선택의 결과'임을 인정한다면 이 나라 교육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기괴한 시스템을 바로 잡지 않는다면 대학생들이 '무식의 굴레'를 벗어던지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2010년 2월 7일 일요일

250(二百五)은 멍텅구리, 바보, 천치!

오늘 우연히 식사를 마치고 금액을 지불하기 전에 미리 계산을 해봤는데 250원(二百五;Er Bai Wu)이 나왔거든요. 함께 식사를 한 분들은 웃으며 금액이 참 묘하다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 거리고 있었지요. 설명을 들어보니 250원은 '얼바이우'라고 발음이 되는데 이게 소위 '욕'이라고 하네요. 식사를 했는데 음식 값이 그렇게 나오면 기분이 썩 좋을리는 없겠지요.

 

암튼 푸우웬(服务员;Fu Wu Yuan-종업원)을 불러 영수증을 주고 계산을 해달라고 했지요. 아니나 다를까, 종업원이 계산을 마친 후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데 살짝 웃고 있더라구요. 종업원이 우리 테이블로 와서 웃으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음식값은 249원(二百四十九块钱;Er Bai Si Shi Jiu Kuai Qian)입니다"

 

우린 모두 웃음을 터트렸지요. 종업원도 함께 웃고 말았구요. 만약 종업원이 '얼바이우(250원)'라고 말한다면 손님들에게 '욕'을 하는 셈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영수증을 보니 음식값은 250원이 맞는데 -1원 할인이 되었다고 표시가 되었네요.^^

 

250원, '얼바이우(二百五;er bai wu)'는 멍텅구리, 바보, 천치라는 뜻(중국어 사전:naver/daum)이랍니다. 중국에서는 '바보, 신중하게 말하지 않는 사람, 일을 대충하는 사람, 웃음거리가 되는 일을 벌이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라고 하네요. 그냥 숫자인 것 같은데 '얼바이우'라고 말하면 '욕'과 같은 말이라 해서 꺼린다고 합니다. 심한 욕은 아니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심한 욕이 될 수 있겠지요? 중국에서는 '욕'이라고 하니 어디 가서 '얼바이우'라는 말은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래서 물건 값을 흥정할 때도 절충가격이 250원이라 해도 250원을 서로 말하다 보면 '욕'을 주고 받는 셈이 되니 249원이나 251원으로 가격 흥정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싸움이 날지도 모르니 조심해야겠네요.

 

250이란 숫자를 부득이하게 말할 경우에는

1. 二百五-'얼바이우'라고 하지 않고 两百五;Liang Bai Wu-'량바이우'라고 하거나

2. 二五零;Er Wu Ling-'얼우링'이라고 한답니다.

 

250이란 숫자, 즉 '얼바이우'가 왜 멍텅구리, 바보, 천치와 같은 뜻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해 볼까 합니다.

 

전국시대에 苏秦(Su Qin)이란 달변가(설득에 능한 사람)가 있었다고 합니다. 6국(六国) 모두에게 신망이 두터운 상당한 실력가며 위풍당당했지만 많은 원수를 만들게 되었다지요. 결국 후에 제나라에서 살해됩니다. 그런데 제나라 왕이 苏秦의 복수를 하겠다며 나섭니다. 제나라 왕은 苏秦의 살해범이 바로 잡히지 않자 꾀를 한가지 냅니다. 苏秦의 시체에서 머리를 베어 성문에 걸어둔 후 방을 붙이는데 내용이 이렇습니다. "苏秦은 내부의 첩자였다. 그를 살해한 자에게 황금 천냥을 하사할 테니 와서 받아가라". 방을 붙인 후 苏秦을 살해했다는 네 사람이 등장합니다. 제나라 왕은 거짓말한 자는 가만두지 않겠다며 엄포를 놓지만 네 사람 모두 자기가 苏秦을 살해했다며 확고한 태도를 보입니다. 결국 제나라 왕이 네 사람에게 묻습니다. "상으로 내릴 황금 천냥을 너희 네 사람이 어떻게 나눌 것인고?" 네 사람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답니다. "한 사람당 250냥(얼바이우)씩 나눌겁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나라 왕은 크게 노하여 소리칩니다. "여봐라, 이 네 '얼바이우(250)'들을 당장 끌고 나가 참수하거라". 

또 하나의 이야기는 민간에 전해오는 이야기라는데요. 옛날에 수재 한 명이 있었답니다.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날리고자 식음을 전폐해가며 공부에 매진했는데 단 한 번도 급제를 하지 못합니다. 결국 시간이 흘러 노년에 이르러서야 공명과 명리에 마음을 모두 접게 됩니다. 그제서야 마침 아들 둘을 얻게 되는데 수재가 일생의 성패(成败)에 대해서 생각해보니 감개가 무량하더랍니다. 그래서 아들 하나는 성사(成事), 다른 하나는 패사(败事)라고 이름을 지었답니다. 이후 수재는 집에서 아들들을 열심히 가르칩니다. 어느 날 수재는 큰 아이에게 300번, 작은 아이에게 200번 글쓰기를 시키고 아내에게 밖에 나갔다 올테니 두 아들이 글쓰는 걸 봐달라 당부하고 길을 나섭니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두 아들의 공부는 어땠는지 물어보니 아내가 대답하길, "쓰기는 썼는데 성사(成事)는 부족하고 패사(败事)는 넘칩니다. 둘 다 모두 250번씩 썼습니다."

다른 한가지는 중국 고대인들은 은(银子)을 량(两)의 단위로 구분했는데요. 보통 5백냥(五百两)이 정수였다고 하네요. 당시에는 종이에 잘 싸서 두었는데 500냥의 은을 잘 싸둔 종이 한 봉지를 '一封(Yi Feng-이펑)'이라고 했다네요. 그러니 250냥 은(银子)은 '一封(Yi Feng-이펑)'의 절반, '半封(Ban Feng-빤펑)'이 되겠지요? 그런데 이 '빤펑'이란 발음이 반쯤 미치다는 '半疯(Ban Feng)'과 발음이 같습니다. 그래서 후세인들이 실성하고 미친사람을 일컬어 '빤펑', 즉 250냥 은-'얼바이우'라고 불렀다네요.

현대에 와서는 (저도 참 좋아하는) 중국의 유명한 가수 伍佰(Wu Bai-우바이)의 노래를 배워도 잘 따라 부르지 못하면 잘해봐야 절반의 伍佰(우바이), 즉 半个伍佰라고 해서 '얼바이우(250)'라고도 한다네요.

 

혹시 중국에 가실 일이 있다면 '얼바이우(250)'는 말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

 

 

** 중국어로 금액을 말할 때는 십단위로 끝날 경우 맨 뒤 '0'은 발음하지 않습니다. 250은 원래대로 말한다면 '二百五十;Er Bai Wu Shi-얼바이우'라고 말해야 하지만 '0'은 발음하지 않기 때문에 '얼바이우'까지만 말합니다. 하지만 뒤에 돈의 단위가 붙으면 모두 말해야 하죠. 250원은 '二百五十;Er Bai Wu Shi Yuan-얼바이우스' 또는 '二百五十块钱;Er Bai Wu Shi Kuai Qian-얼바이우스콰이치앤'

 

그럼, 130과 130원, 270과 270원은 어떻게 발음하면 될까요?

2010년 2월 5일 금요일

Bobby Mcferrin의 유쾌한 실험-Pentatonic Scale

BOBBY MCFERRIN FUCKS WITH YOUR MIND

 

위 링크는  Bobby Mcferrin의  Pentatonic Scale에 대한 놀라운 영상이다.(Youtube로 보기)

 

처음 영상을 보고 나서 어떤 전율 혹은 깨달음 같은 게 마음 깊숙히 느껴졌다. 가슴이 뛰고 흥분되는 짜릿한 느낌.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나 그와 관련있는 사람들이라면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수 많은 생각과 고민, 한 편으로는 해답을 주는 영상이었다.

 

Pentatonic Scale은 오음계라고 하는데 온음(도레미솔라;궁상각치우)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영상에서 Bobby Mcferrin은 관중들에게 단 2개의 음만 일러준다. 그가 자리를 옮길 때마다 그에 맞는 소리를 내게 한 것인데 신기하게도(놀랍게도) 2개의 음을 지정한 자리를 벗어나 자리 이동을 하면 관중들은 정확히 그 자리에 맞는 음을 낸다.

 

동생은 음계라는 게 수학적으로 아주 정교한 것이고 과학적이라고 이런저런 설명을 해줬지만 솔직히 제대로 이해는 되지 않았다. 다만, Bobby Mcferrin의 유쾌한 실험은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특히 애니메이션에 관련해 어떤 생각이 순간 떠올랐는데 (거친 생각이지만) 말하자면 이렇다. 애니메이터가 원화/동화를 그린다고 할 때 사실 우리가 늘상 보고 느끼는 대로 표현하기 보다는 주입된 정보와 정해진 패턴에 의해 그림을 그린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상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2개의 음만을 정해줬지만 나머지 음을 정확히 낼 수 있는 원리처럼 첫 원화와 움직임에 대한 감정만을 정해준다면 스스로의 감각을 통해,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보고 접했던 동작들을 자연스럽게 표현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조금 다른 측면으로 생각해 본다면 '음'이란 게 어릴 적부터 알게 모르게(학습/비학습) 접하고 익혀온 것이기 때문에 어떤 기준점만 형성해주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의식/무의식을 통해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1+1=2라는 공식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있는 것과 같이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우리가 일정부분 세뇌를 당했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가 인위적으로 거부하지 않는 한 공식과 시스템 대로 따라가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 Bobby Mcferrin의 실험 혹은 재현을 다른 방식으로 이용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이들의 학습이나 성인들의 교육에 응용한다면 기준점을 정한 후에 발산되는 폭들에 대해 무의식을 꺼낼 수도 있을 듯 하고 습관적으로 행해지는 행위들에 대한 되돌아봄(성찰)도 가능할 것 같다.

 

물론 '음악'이라는, '음'이라는 특수한 매개/매체만이 할 수 있는 일종의 실험일 수도 있겠지만 Bobby Mcferrin이 전해준 울림은 비교적 중요한 '화두'로 남는다. 영상을 다시 볼 때마다 짜릿함이 느껴지는 걸 보면 확실히 그렇다. 특히 그의 자리바꿈에 의해 관중들이 내는 소리에 맞춰 Bobby Mcferrin의 허밍이 어우러지며 즉흥 잼 아카펠라가 이루어지는 대목에서는 더욱 그렇다. 다른 사람들은 재밌어하며 박장대소를 하지만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Bobby Mcferrin의 진지한 손짓과 몸짓, 표정은 Pentatonic Scale에 대한 일종의 실험이 단순한 것이 아님을 시사해주는 듯 하다.

 

 

모두가 정직했으면 좋겠다. 나만 빼고...?

참으로 이상한 기사를 봤다.

 

이건희 "모두가 정직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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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하.하.

 

 

그럴 수도 있겠다. 스스로는 정직하게 살아왔다고 믿을 수도 있겠다. 법이란 건 '자신만의 올곧은 길'을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 자신의 정직을 부정하는 시스템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사람들은 모두 '양심'이 있다고, 아니, 양심이 있어야 사람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MB의 '우리집 가훈은 정직'이란 말 이후에 다시금 등장하는 '정직'이란 말에서 비애를 느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GH의 허튼소리에 토악질을 하거나 삿대질을 하며 욕지거리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금새 잊을 것이고 '삼성의 일방통행'과 '삼성의 신화'를 오래토록 기억하고 찬양할 것이다. 삼성맨이 되는 것, GH신화를 이루도록 자신과 자신의 자녀를 독려하고 부추기는 것이 인생의 가장 원대한 꿈이며 애국애족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 역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정직'만큼 삶의 이정표가 되는 좌우명은 없었다고 자부할 것이다.

 

슬프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는 없기 때문이다.

 

GH일가가 법의 철퇴를 맞아 정신을 차리는 것과 대한민국의 삼성의 흥망성쇄와 궤를 같이 하는 건 분명히 다른 일이다. 급변하는 대한민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정신을 챙겨 살아남는다는 게 쉽지 않은 일임은 알지만 적어도 '정직'과 '양심'에 대해서 한국어를 쓰는 모든 이들이 공유하는 뜻이 제대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옳음'과 '그름'의 혼재 속에서 정말 정신차려야 한다.

 

그런데....

그냥, 한 번 태어난 인생인데 막 살아서 나 잘먹고 잘 살면 되지...라고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내게 권력과 돈이 삼성만큼 있으면 지 맘대로 살아도 되지...라고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가치관 따위 개에게나 던져주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한 번 해볼 수 있는 만큼 저지르며 살아도 되는 걸까.  

 

'정직'과 '양심'의 사전적 의미를 보니 GH나 MB의 가치판단 기준 내에서는 그들도 충분히 정직하고 양심있는 사람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가치혼란이 생긴다. 퉷!

 

 

정직[正直]
[명사] 마음에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바르고 곧음.

 

양심[良心]
[명사]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

2010년 1월 20일 수요일

대한민국 검찰이 무서운 이유

PD수첩의 무죄선고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한바탕 소동을 치루고서도 꽤 시간이 흐른 지금, 당시 PD수첩에 대한 고소/고발, 음해로 시끄러웠던 기억보다 무죄에 대한 기억을 갖게 될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문제는 이것이다.

 

언론에 대한 검찰의 무작위 고소/고발 폐해에 대한 좋은 선례가 남겨졌고 언론의 기능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마련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재판까지 가는 상황에서 한쪽은 이득을 얻고 한쪽은 손해를 입는 법이다.

 

법은 좋은 편, 나쁜 편이 없다는 점에서 양날의 칼과 같다. 그래서 힘이 있건 없건, 권력의 편에 섰건 등을 졌건, 빽이 있건 없건 법 앞에서는 평등할 수 있다. 하지만 법의 칼을 이용함에 있어 '사견'이 끼어들거나 '집단의 카르텔'이 작용하면 양날의 칼은 한쪽만 날이 선 반쪽짜리 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법을 안다는 자들, 집행하는 자들이 이 법의 칼을 사용할 때는 더더욱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신의 허물을 덮기 위한 용도로, 타인의 공적을 깍아내리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일반인들이라면 가능하지도 않은 일을 정부관계자와 검찰은 아무렇지도 않게 언론을, 시민단체를, 국민을 법으로 희롱하고 농락한다. 모든 일들이 사필귀정으로 끝을 맺으면 좋겠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법의 결과가 나오는 경우도 많고 혹여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후다. 타격은 입을 대로 다 입고 손해는 손해대로 다 입고 시간은 시간대로 흐르고 난 후다. 그렇게 일련의 소동들이 잠잠해지고 난 후 '해명'을 한다 해도 애초 사건이 벌어질 때와는 전혀 다르게 대다수의 매체들은 '몇 줄의 기사'로 보도할 뿐이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해명'은 존재하지도 않게 된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사건의 발단과 진행은 기억하되 결말은 기억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 많은 비리 정치인들이 4년이 지나고 나면 다시 국민의 손에 선출되곤 한다. 수 많은 비리 공직자들이 솜털보다 가벼운 징계를 먹고서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곤 한다.

 

대한민국에서 법과 가장 가까운,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자들은 과연 국민들과 함께 법 앞에 평등한지, 법 아래 고개를 숙이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의 뜻대로 사실은 은폐되고 왜곡될 것이며 그들의 의도대로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기소요건조차 성립되지 않을 일들이 기소가 되고 상식으로도 판단될 문제들이 재판정에 서야 하는 건 그들의 법을 엄중히 다뤄서가 아니라 법을 제 입맛대로 다루려고 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험한 자들은 '정부'도, '당'도, '재벌'도 아니다. 치외법권에서 살고 있는, 국민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제 맘대로 휘두르며 법을 업수이 여기는 '검찰'이다. 그들이 지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도 현재와 같이 언론을 대하고 국민들을 대했다면 그냥 '박쥐'와 같은 존재라며 헛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아니, 일말의 희망을 품었을 수도 있다. 정권이 바뀌면 그 편에 설테니까. 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소위 말하는 오른쪽, 수구의 편에 서서만 말하고 행동하고 기소하며 심판하려 든다. 변함없는 편향성, 그들은 변할 줄을 모른다. 무섭다.

 

PD수첩의 무죄 판결에 대해서 여전히 할 말이 많은 검찰이다. 하지만 그들의 반론을 읽어보면 그들이 대한민국 검찰인지 미국 검찰의 한국지사인지 궁금해질 수 밖에 없으며 그들의 억지는 또다시 법 위에 서서 물을 흐리려고 하는 수작으로 밖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대한민국 검찰이 부끄럽지만 무섭기도 하다.

 

양심있는 검찰들의 일대 반란, 혁명을 기대한다는 건 꿈일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