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 23일 목요일

한국, 날씨 참 좋다.

오전 9시 50분 푸동공항(浦东机场) 출발
오후 1시 15분 인천공항(仁川机场) 도착


2개월이 조금 못되는 시간 동안 중국에 있다가 한국에 이런저런 일도 있고 해서 오늘 들어왔다. 떠날 때와는 다르게 화창한 날씨가 너무 좋다. 비행기 안에서 본 신문에서 한국에 벌써 봄기운이 완연하다고 하더니 정말이지 햇살이 너무 좋다. 추운 겨울, 참 많이 움추렸다.


내일부터 슬슬 움직여야지. 준비할 게 많다.

상해에서 며칠...

1>
상해에서 적지 않은 애니메이션 감독, 선생들을 알게 되었다. 전에 모두들 OEM에서 오랜 시절 고생했던 분들인데 중국의 창작 애니메이션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함께 고민하며 돌파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분들이다. 중국 내의 애니메이션에 대한 문제점을 스스로 인정하며 개선해갈 방법을 모색하는 모습들이 인상적이다. 함께 앉아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그 분들의 생각에 한 편으로 동의도 하고 새로운 걸 배우기도 했다. 중국 땅이 무척 크다고 해도 아는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건 참 묘하게도 쉽게 이루어진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함께 애니메이션에 대한 꿈을 나누며 노력해가는 거겠지.


2>
상해미술영화제작소에서 작업하고 있는 한국 감독님은 몇 개월 후면 26부작 TV시리즈가 끝난다고 한다. 2년 여만의 결실을 맺게 되는 셈이다. 한국어 더빙, 사운드 작업이 끝난 2편을 봤는데 그간의 노력과 고생이 프레임마다 보이는 듯 하다. 이 작업이 끝나면 그 다음 후속 창작 애니메이션도 순조롭게 잘 진행이 되면 좋겠다. 감독과 조감독 두 분이 해낸 역할은 정말 대단하고 밖에 할 말이 없다.


3>
지난 해 겨울 부천에서 알게 된 쉐이징스(水晶石)회사의 기술감독 량즈페이를 다시 만났다. 아주 기분 좋은 재회였다. 원래 다른 기술감독 안잉도 만나기로 했었는데 일본으로 출장을 가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다. 좋은 인연, 착한 동생들이다. 선정쥔, 황리팡도 반갑게 만나 지난 일들과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모두 서로 다른 위치에서 각자의 일을 하고 있어도 심심상련 이해의 폭은 늘 여전하다.


4>
상해는 춥다. 바깥보다 실내가 더 춥다. 공기가 차갑고 습기가 많기 때문이다. 느낌에는 동북, 북경보다 상해가 훨씬 춥다. 좋은 날씨가 적은 상해, 늘 흐린 날씨. 그럼에도 매력적인 도시.

2006년 2월 14일 화요일

상해행 비행기표.

엄청난 할인 덕분에
기차표 값과 비행기표 값이
얼마 차이가 나지 않아
상해는 비행기를 타기로 결정.
24시간 예약가능한 예매소에 연락,
순조롭게 티켓 한 장 예약하다.


15일 오전 7시 40분 이륙.


북경에 온 지 일주일 되는 날, 상해로.
시간 정말 빠르다.

북경전영학원 동화학원 ...

북경전영학원 동화학원에 가서 차오 교수와 쑨 원장을 만나고 왔다. 오랜만에 만난다고 반가워 해주니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다. 일 때문에 찾은 게 아니고 개인적으로 알기에 인사나 드리러 간 거라 점심 식사 후 잠시 이런저런 얘기 나누다 돌아왔다.


지금 학교는 학생들 모집 때문에 무척 바쁘다고 한다. 100여 명을 모집하는데 약 3500여 명이 응시를 했다고 하니 그 경쟁률은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영화과는 그보다 더 심한 경쟁률이라고 한다. 작년이 중국영화 100주년이기도 했고 요즘 중국영화가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고 몇 몇 감독들은 이미 세계 정상에 섰으며 배우들의 인지도와 지명도도 예전같지 않게 급부상을 하고 있어서인지 젊은 청년들의 영화에 대한 관심은 아주 지대하다. 그걸 반영이라도 하듯 영화과의 경쟁률은 신문에 보도될 만큼 치열하다. 그에 못지 않게 중국 애니메이션도 엄청난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는 터라 많은 이들이 애니메이션과에 몰리고 있다. 심지어 뒷 돈을 주고라도 들어오려고 할 정도라니 그 인기를 실감하겠다. 그런데 학생 모집에 대부분 학생들의 부모들이 동행한다. 자녀들이 대부분 한 명 뿐이라서 그런 걸까. 자식을 대학에 보내려는 열의는 한국 부모들 못지 않다. 오늘 북경전영학원 교정은 부모들과 학생들로 가득가득 붐비고 있다.


북경전영학원 동화학원에서는 매년 자체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을 개최하는데 작년이 5회 째였다고 한다. 4회에 비해 5회 때에는 약 1000여 편의 학생 단편이 출품되었고 그 중 우수한 작품 100여 편을 뽑아 DVD 10정도로 만들었다 한다. 애니메이션 수준의 고하를 막론하고 수량만으로도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어쩌면 그들 말대로 항주국제애니메이션-만화 페스티벌 외에 가장 공신력있는, 인기있는 페스티벌인지도 모르겠다. 단편의 힘은 전체 애니메이션 기반에 큰 힘이 되는 법인데 중국, 조만간에 따라오겠다.


쑨 원장이 직접 감독을 해 만든 장편 애니메이션 <小兵张嘎(xiao bing zhang ga)-The Little Soldier>이 작년 华表奖에서 정부에서 주는 우수상을 받았고 다시 후반작업을 하며 마지막 손질을 끝냈다고 한다. 보게 될 기회가 있을 듯 싶다. 하긴 올해 중순이나 후반 즈음에는 극장에서 상영을 할 예정이라고 하니 어떻게든 볼 수 있겠다. 이 작품의 내용은 중국에서 유명했던 한 영화의 스토리(일본군에 대항해 싸우는 소년 병사의 이야기)라 한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감동을 전해줬던 원작품에 힘 입어 애니메이션도 좋은 반응이 있으면 좋겠다.






버스 노선을 미리 체크해 두지 않은 터라 오늘 오가며 모두 택시를 탔는데 아, 역시 비싸다. 지하철은 노선이 아직 부족한 터라 이용에 불편이 많다. 생각해보니 어쩌면 부분부분 한국 물가를 초과하는 경우도 있을 듯 싶다.


뿌연 안개 낀 듯한 북경, 이게 역시 북경의 진면목. 북경에 도착한 첫 날에는 너무도 화창한 날씨 때문에 깜짝 놀랐다. 기분은 말할 것도 없이 좋았지만.

애니메이션의 스크린 쿼터는 언제나...

영화인들이 '스크린 쿼터' 때문에 분주해 보인다. 유명한 배우와 감독들이 한 명씩 시위 현장에 나타나니 일반인들에겐 좋은 기회고 기쁜 날일 것 같긴 하다. 국내에서 국외에서 모두 들고 일어나 단결된 힘을 보여주고 있으니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찬반논리가 춤을 춘다.


한국영화에 대한 '스크린 쿼터' 축소 찬성과 반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애니메이션이 무척 쓸쓸하게 느껴진다. 참 초라하다. 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몇 편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분위기를 썰렁하게 해 놓은 터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여전히 많은 애니메이터들은 분주히 작품을 만들기 위해 밤을 하얗게 새우고 있다. 그런데 '스크린 쿼터'가 없으니 극장에서 찬 밥 신세 되기 쉽상이고(요즘은 좀 나아졌으려나?) 방송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총량제'도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무리 해보려고 발버둥쳐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게이트웨이가 꽉 막힌 상황에서야 뭘 할 수 있을까. 결국 국내 시장이 작다는 이유아닌 이유로 외국으로 뛰쳐나가는 이들도 꽤 많고 외국 자본을 잡아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도 꽤 된다. 심지어는 외국 TV에서 먼저 방영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 TV 방송국의 애니메이션 파트는 빚좋은 개살구일 뿐이고 쉽사리 열리지 않는 철옹성이다.


못나도 좀 지켜주고 봐줘야 할 건 우리네 애니메이션이 아닌가 싶다. 단편 애니메이션이야 단편 영화도 사정은 매 한가지니 말하긴 그렇지만 가장 큰 소통의 창구, 기회의 창구인 TV와 극장에서는 역시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만 있을까?)로 애물단지 취급을 받기 일쑤다. 어쩌면 그래서 많은 인재들이 수입도 변변치 않는 차에 보람도 찾지 못하고 목표마저 보이지 않는 상황에 직면해 게임쪽으로 이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서로 공개된 장소에서 갑론을박 우위를 가리는 경기를 하지 못하니 어두운 그늘 아래서 눈 먼 돈을 찾아 사기(?)를 치는 사람들도 횡횡하고 스스로 자존자대하니 악순환의 고리는 점점 튼튼해져 가는 듯 하다.


물론 내가 아는 이들 중 많은 경우가 현재 외국에서 혹은 한국에서 방영 순서를 기다리고 있고 열심히 작품을 만들고 있으며 끊임없이 애니메이션에 보람과 의미를 심고 키우며 살고 있다. 그래서 전체적인 부분으로 보면 암담하지만......이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생각 더 해봐야 머리만 찌끈거릴테니 일단 여기서 끝!

2006년 2월 11일 토요일

쉼 없다.

역사에 해박하고 사회를 모르는 사람은 허망하다.
사회에 박식하고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경솔하다.


위에 쓴 글은 분명 정확한 글은 아니다. 언젠가 규항넷에서 읽었던 글이 하나 있는데 위와 비슷한 내용이다. 다시 그 내용을 찾으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찾을 수가 없다. 쓰여진 단어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역사와 현실 사회에 대한 앎의 차이가 가져오는 차이에 대해 말한 것만은 확실하다. 그 때 그 글을 읽으며 둘 다 부족한 나는 어쩌나 하며 무척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다.


요즘 계속 위의 글 내용이 떠오른다. 쉼 없다.


정확한 글을 찾아보려 들렸던 규항넷에서 또 잠시 머물려 지난 날의 글을 접했다. 강준만과 김규항의 차이를 조금 더 알 수 있게 되었고 또 몇 가지 관점과 의식들이 나를 건드렸다. 내가 서 있는 지점도 조금은 알 듯 하다. 머리와 가슴과 몸이 서 있는 자리가 다름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점 더 고민스럽다.

2006년 2월 9일 목요일

버스를 타고... (주절주절...)

북경의 지인들 핸드폰이 모두 꺼져있다. 낭패다. 그 중 한 사람은 급한 일로 장춘에 가야 한다며 나중에야 연락이 닿았다. 결국 중관촌(中关村) 대항과학기술빌딩(大恒科技大厦)에 있는 중국동화학회 북경사무소에 가서 몇 몇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돌아와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중국의 실리콘밸리라 불리우는 중관촌(中关村)에 위치한 전자상가 몇 군데를 둘러봤다. 서울의 용산 전자상가와 많이 닮았다.


오늘 왕징(望京)에서 중관촌까지 오가는데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버스요금은 10km이내는 1원, 10km이상은 2원이다. 버스비도 올랐다. 듣기로 북경시 지하에 습기가 많아 지하철 공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래도 북경 올림픽 전까지는 몇 개 노선은 증설 될 예정이다. 도시는 버스와 택시로 북적인다. 물론 자가용들도 많긴 하지만 서민들의 발이 되주는 버스는 정말 많다. 그리고 그 버스들은 도시 곳곳까지 모두 다닌다. 버스비는 앞으로 쉽게 오르지 않을 것 같다. 버스비가 오르면 인건비도 올라야 할텐데 그들의 삶에 기대어 무한발전을 하고 있는 이들은 분명 서민들이 먹고 자고 이동하는 비용을 그대로 둘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졸며 버스 차창에 머리를 종종 부딪히긴 했지만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있으니 나도 그들과 함께 있는 느낌이다. 하긴 요즘은 하도 중국 사람과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내가 한국인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부모와 딸이 다정히 버스를 탄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와 아이의 이모인 듯한 사람도, 중학생처럼 보이는 앳된 아이들도, 고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청년도 손에 1원, 2원을 들고 버스를 탄다. 1원, 2원에 버스에 몸을 싣고 고층 아파트 사이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모두들 집으로 돌아간다.


북경 저녁은 한국의 겨울처럼 새콤하게 춥다.

웃음만...

한 생각 오래 머물어 / 그 생각 내 것인가 흘겨보고 / 잠시 쫓아내어 등 돌려 / 다시 생각해도 내 것인가 / 쉽게 옳다 인정 못하는 건 / 내가 나이질 못해서 / 아니면 내가 여전히 나이기에 / 혹은 오래 맞닿지 못해 생기는 반작용인지 / 처음처럼 여전히 그러한 작용인지 / 한 생각 오래 머물러도 / 도무지 알 수 없어 / 계속 틀어잡고 생각 중 / 아직도 덜 무르익은 내가 보여 / 좀 더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 보길 / 그 생각에 그 사람 눌러 앉아 있으니 / 그 생각 내 것인가 여전한 의심 / 아직도 우스운 마음 작용에 웃음만 / 치우치지 않고 오롯이 대면할 수 있길 / 예나 지금이나 혹은 앞으로나 /

왜....?

그 당시에는 어떤 생각으로 취사 선택을 했던 것일까.
당대의 사람이 아니라면 심심상련할 수 없는 일일까?


스스로 곡해하고 왜곡하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이익에 맞게 사람은 변해가는 것일까.


어떤 일의 취사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무엇일까.
집단과 단체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의 간극은 얼마나 될까.
여러가지 방법 중에 가장 최선의 방법을 고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런데, 암튼,
왜 사는 것일까?

2006년 2월 8일 수요일

북경에 다시 오다.

이른 아침 영덕 형의 급한 전화를 받았다. 아주 운 좋게도 표가 구해졌다고 한다. 软卧(롼워)란다. 롼워는 가장 비싼 표다. 중국 기차표는 입석, 잉쭈워(硬座), 롼쭈워(软座), 잉워(硬卧), 롼워(软卧) 순으로 모두 다섯 종류가 있는데 롼워는 일종의 특등석이 되는 셈이다. 잉워와 롼워가 침대칸인데 잉워는 상, 중, 하로 나뉘어져 있다면 롼워는 상, 하로만 침대가 나뉘어져 있다. 게다가 밀폐형이라 문을 닫고 자물쇠를 걸어둘 수도 있어 도둑도 방지하고 좀 더 조용하고 편안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당연히 가장 비싸다. 연길에서 북경까지 평균 약 520여원 정도 한다.(상, 하 가격은 약 20여원 차이) 잉워가 약 300여원 정도 하니 거의 두 배 가까운 가격 차이다. 돈을 좀 더 보태면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가격이건만 비행기표는 이미 좌석이 없게 된지 오래다. 가격이 비싸더라도 어차피 가야했기에 아침부터 서둘러 짐을 정리했다. 몸은 아주 가뿐하다. 다만, 급작스럽게 떠나게 되서 마음이 약간 황망하다. 밤새 눈은 소복히 더 쌓였다. 기차를 타고 가게 되어 다행이다.


연길 기차 역 앞은 인산인해다. 용이에게 연길에서 빌려쓰던 핸드폰을 돌려주는데 녀석의 한 보따리 점심거리를 건네준다. 아침에 급작스럽게 떠나게 되어 이것저것 준비하지 못했을 나를 위한 배려다. 더욱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후일을 약속했다. 영중 형도 갑작스러운 이별에 서운해 보인다. 원래는 기차역 안까지 들어갈 수 있는 문표를 사면 되는데 춘절 연휴가 끝나는 시점이라 사람이 많아 통제가 심하다. 표도 팔지 않는다고 한다. 부득이 기차역 입구에서 작별을 고했다. 여름에 다시 오게 되면 백두산에 가기로 약속을 했다.


영덕형과 나는 특등석 대기실에 잠시 앉아있다가 승차하러 나섰다. 한보따리씩 짐을 든 사람들이 우글우글하다. 외지로 일나가는 부모와 작별하는 꼬마 아이는 목소리에 눈물이 묻어있고 남편과 헤어지는 여인네는 못내 아쉬운 듯 하다. 가족, 친지들과 헤어지는 이들은 다음 명절, 다음 춘절을 기약하고 각자의 삶터에서 열심히 살 것을 눈빛으로, 포옹으로, 악수로 약속한다. 그러면서도 한쪽에서는 기차에 어서 오르려 사람들이 서로 밀치며 북적인다. 승무원이 소리친다. '있는 건 시간 밖에 없으니 밀지말고 천천히 다 타세요. 다 타야 출발하니까 천천히 타세요'


롼워 방 한 칸에 침대가 네 개인데 윗 쪽 침대가 두 개, 아랫 쪽 침대가 두 개다. 우리 맞은 편엔 상해, 허난으로 일하러 가는 젊은 아가씨 둘이 차지하고 앉았다. 상해, 허난까지는 바로 가는 열차가 없어 이 두 사람은 북경에서 다시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 우리보다 먼 여정이다.


기차는 오전 11시 45분 발차, 북경 도착 시간은 다음 날 오전 11시 20분. 거의 24시간을 기차 안에서 보내야 한다. 추우니 창을 열어 바깥 풍경을 볼 수도 없고 잠을 자자니 24시간 동안은 질려서 잘 수도 없을 것 같다. 맞은 편 두 아가씨는 먹을 거리를 한 보따리씩 싸들고 와서 먹기 시작한다. 과일, 과자, 라면, 빵, 소세지 등등 없는 게 없다. 영덕 형과 나는 용이가 사 준 김밥과 음료로 점심과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질리도록 달리고 또 달리다.
.............잠을 자다 깨다 자다 깨다.
.............라디오 신호는 잡혔다가 잡히지 않았다가 한다.
.............시골을 지나는 듯 하다가 도시를 지나는 듯 하다가 한다.
.............열차 창 틀은 얼음이 얼어 붙었다.
.............가져온 읽을 거리도 다 읽어버렸다.
.............다시 잠을 청하고 뒤척이고 선잠에 들어다 깨었다 한다.


드디어 북경에 도착했다. 열차는 예전보다 엄청난 수준으로 좋아졌다고 하니 과거에 먼 길을 떠나는 이들은 얼마나 더 고생이 심했을까 미뤄 짐작이 된다. 북경의 날씨는 너무도 화창하고 맑다. 북경에 몇 번 와봤지만 이런 날씨는 처음이다. 너무 깨끗하다. 바람은 좀 차지만 동북보다는 역시 따뜻한 느낌이다.


열차에 내려 출구로 향하는 길. 사람들 머리 밖에 보이지 않는다. 통로가 온통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한국의 한 도시 정도의 인구가 나와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의 중국에서는 기차역에서 동행을 잃어버리면 영영 생이별이 되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 예를 다룬 드라마, 영화도 종종 있었으니 사실이겠지. 지금이야 핸드폰이 있으니 다행이지만. 하긴 여전히 핸드폰도 없이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에게는 과거와 현재가 똑같은 현실일 수 있겠다. 이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 체제 아래 자본의 계급으로 나뉘어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싸워가고 있는 것이다. 용정, 연길에 있다가 하루 만에 북경을 접하니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이 든다. 북경은 역시 북경이다. 4년 전 북경 역에 왔을 때가 생각이 난다. 4년 전을 제외하곤 늘 공항이었다.


영덕 형이 기거하고 있는 곳(교당에서 임대하고 있는 집)에 와서 짐을 풀고 빨래를 했다. 낮 햇살은 정말 끝내주게 좋다. 밖의 차가운 바람도 잠시 시간을 잊고 멈춘 듯 집 안은 온통 따뜻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더워서 옷을 벗어야 할 지경이다. 하긴 북경에서도 돈 있는 이들이 산다는 왕징(望京)에 있는 아파트(중국은 아파트 외에 개인주택은 없다.)니 방한도 잘 되겠고 난방도 잘 되겠지. 이 곳에 드는 햇살은 한창 개발 중인 북경 곳곳의 건설현장의 민공들에게 드는 그 것과 같은 것일테지만 누리는 느낌은 다를 것이다. 왜 자꾸 이런 생각들이 드는 것일까. 엘리베이터 안에서 하루 종일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들을 위해 대신 층 버튼을 눌러주며 일을 하는 젊은 여자 아이를 볼 때도 그러더니. 아직 뾰족한 수도 없으면서 알량한 감상을 갖는 건 아닌지 경계하고 또 경계한다. 부귀와 빈천을 느끼는 감각기관이 3류 드라마로 흐르지 않기를 경계하고 또 경계할 뿐이다.


앗, 그런데 만나기로 했던 사람들 핸드폰이 다 꺼져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쩝~ 오늘은 좀 쉬고 내일 다시...

2006년 2월 7일 화요일

흔적


눈이 내린 곳엔 언제나 흔적이 남기 마련.
흔적없는 곳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곳을 안다는 건 이미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증명.

하지만 어지럽건, 간결하던 흔적은 가끔
소통의 모습으로 나타나곤 한다.

2006년 2월 6일 월요일

잠시 아프다.

피곤함이 쌓이고 쌓였나보다.


전날 용정에서 다시 연길로 돌아와 용이를 만나려 했지만 친구들과의 약속 때문에 만나질 못했다. 기회를 틈타 전자상가에서 한글판 XP CD를 사서 영중 형 컴퓨터를 다시 세팅해 주었다. 속도가 아주 빨라지진 않았지만 전보다는 안정적으로 깔끔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컴퓨터 세팅을 하는 동안 영중 형과 형수, 나 셋이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주전부리를 좀 했다.


잘 못 먹은 것도 없었는데 추위에 떨지도 않았었는데, 저녁에 사우나 갔다 오는 사이 위장감기에 걸려버렸다. 피곤함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서 그랬나 보다. 설사에 몸살이 겹쳤다. 중국에는 이런 증상에 즉효인 약이 있어 병원에 가자는 것도 물리치고 약으로 치료할 생각을 하고 하루를 쉬며 보냈다. 하루종일 형수가 끓여주는 죽을 먹으며 약을 먹으며 몸을 추스렸더니 정상회복이 되었다.


계속 북경으로 가는 표가 구해지지 않아 영덕 형도 조바심이 나는 차에 몇 번 전화가 왔다. 만약 침대칸이 구해지지 않으면 일반 좌석표라도 끊어서 가자고 한다. 그런데 몸이 막 회복되는 터라 그다지 자신이 서질 않는다. 이젠 버스로도 못 가겠다. 눈도 내린 터지만 버스로 20여 시간을 타고 갈 자신이 없다. 결국 일단 하루 더 기다려 보기로 한다. 그 동안 몸을 더 추스린다. 두 형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게다가 영중 형 유치원 차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영중 형도 밖에서 한끼도 먹지 못하고 차 수리하는 곳에 가서 지켜보고 있었단다. 저녁에 겨우 들어와 나를 들여다 보는데 오히려 영중 형이 아플 것 같아 걱정이다. 워낙 조용조용한 성격이라 잘 티가 나지도 않는데. 그러고 보니 이렇게 쉬는 동안 용이를 만나기로 했던 약속도 그냥 무산되고 말았다. 앞으로 많은 기회가 있을 테니 미루기로 했다.


밖은 내린 눈으로 온통 하얗다. 하루는 아주 지루하게 지나가고 지루했던 시간만큼 휴식을 가졌던 탓인지 날이 저물수록 몸은 맑아져간다.


하루종일 켜 두었던 라디오는 신호가 제대로 잡혔다가 잡히지 않았다가를 반복하면서 그나마 적막한 방안에 소리를 가득 채워줬다. 간혹 중국어가 잘 들리지 않더라도 '소리' 자체만으로도 꽤 위안이 되는 경우가 있다. 중국어가 아닐지라도 마찬가지겠지.


그러면서 그 사람을 생각했다. 혼자만의 생각일지라도.

2006년 2월 3일 금요일

용정(롱징;龙井)에 오다.

1
어젠 리용과 그의 친구들과 함께 낮부터 밤까지 함께 얘기하고 먹고 마셨다. 그의 친구들은 모두 북경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애니메이션과 게임 쪽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같은(비슷한) 업종에 있는 사람을 만나다 보니 이래저래 많은 얘기를 하게 됐다. 좋은 인연이 되지 않겠나...


2
아침 일찍 일어나 영중 형의 일정에 함께 움직이다가 영덕 형이 있는 용정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몇 몇 택시 기사들이 용정에 갈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낮에 가면 10원/1인, 밤엔 15원/1인이라는 정보를 알고 간 터라 10원에 간단히 합의를 보고 택시에 앉아 다른 두 손님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날씨는 무척 춥다. 달리는 택시도 바로바로 얼어버릴 것만 같다. 택시 기사가 자리에 앉으며 그냥 출발을 하려고 한다. 손님이 나 밖에 없는데 출발하려고 하니 살짝 다른 생각이 든다. 혹 용정에 도착해서 더 돈을 내라고 요구하진 않을까? 그래서 손님도 다 안왔는데 출발하는 거냐고 물으니 원래 손님 채워서 다니는 택시가 아니라고 말한다. 카이산에서 오는 길인데 어떤 일 때문에 부득이하게 오게 되었고 다시 돌아가자니 중간 톨게이트 요금은 내야 하고 해서 손님을 끌게 되었다고 한다. 톨게이트 요금은 10원이다. 나 혼자 가게 되었으니 톨게이트 비용만 벌어 빈손으로 돌아가는 셈이 됐다.


3
영덕 형과 형수는 여전히 그대로고 형수가 너무 반갑게 맞아준다. 꽤 오래 전에 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을 해주셔서 반갑고 고맙다. 딸 옥결이는 7살 때 만나고 처음 만나는 지라 나를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아주 예쁘게 잘 자라고 있다. 내가 말을 거니 부끄러워하고 쑥스러워하긴 하지만 제 할 일 잘 챙겨서 하는 아주 건강한 소학교 3학년이다. 요즘 손풍금(아코디언)을 배우러 다닌다는데 언제 기회가 닿으면 옥결이가 연주하는 손풍금을 들어보고 싶다.


북경에 갈 기차표가 구해지지 않아 영덕 형과 난 걱정을 하고 있지만 뾰족한 방법은 없다. 운 좋게 표가 구해지길 바라는 수 밖에. 하루이틀 늦어지면서 일정도 하루이틀씩 뒤로 밀리겠지만 춘절이 중간에 끼는 바람에 부지런해도 특별한 방법은 없다.


갈 길은 아직 멀고 밖은 꽁꽁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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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윤동주가 다녔다는 대성중학교, 일송정이 있는 곳에 가봤냐고 묻는다. 물론 오늘 날씨가 무척 춥기 때문에 나가는 게 꺼려져 그리 적극적인 대화가 되지 않는다. 나 역시 (다행히) 4년 전에 왔을 때 가봤기 때문에 큰 흥미가 일지 않는다. 용정은 위에 말한 딱 그 두 곳을 제외하곤 가 볼만한 곳이 없다. 그래도 내일 날이 좀 풀리면 가볼까 싶다.


오늘 저녁은 집에서 후워구워(샤브샤브)를 먹기로 했다.


아, 영중 형이 건너온다고 전화가 왔다.

2006년 2월 1일 수요일

연길 도착, 그리고...

그러니까 1월 31일 저녁 9시 30분 기차를 타고 연길로 향했다. 연길은 조선족 연변 자치주에서 중심이 되는 도시다. 게다가 연길에는 같이 동문수학했던 조선족 형님 두 분(김영중, 김영덕)이 계시고 2-3년 전에 장춘에서 생활할 때 알았던 동생(이 용)이 한 명 있다. 형님들은 거의 10여 년, 혹은 몇 년씩 만나지 못했기에 이번 기회에 꼭 뵈려고 마음을 먹었다.


저녁 9시 30분에 정확히 장춘을 떠난 기차는 투먼(图们)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투먼에 도착하기 한 시간 전 즈음 연길에 도착할 것이다. 듣기로는 새벽 6시 즈음에 도착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기차 안에서 중국 애에게 물어봤을 때는 새벽 4시, 5시 즈음에 도착한다고 해서 약간 긴장을 했었다. 그 시간에 도착하면 여러 사람 불편할 게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중에 기차 승무원에게 재차 확인한 후 새벽 6시에 도착함을 확인한 후에야 근심을 덜긴 했다. 그러니까 장춘에서 연길까지는 총 8시간 반이 소요되는 셈이다.


장춘을 떠나기 전 저녁을 먹고 가자는 청을 다 뿌리친 이유는 기차 안에서 화장실을 가기 싫어서였다. 또 오랜만에 기차로 이동을 하는 지라 짐을 두고 화장실을 가는 것도 걱정이 되긴 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도 배는 고프지 않았고 오히려 속 편하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근 한 달간 장춘에 있었던 탓인지 장춘에 있던 동생들은 내가 연길로 가는 게 서운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다만 중국 친구들은 모두 설을 쇠러 고향에 가서 돌아오지 않은 터라 별 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어차피 중국에 와서 몇 군데를 돌아보기로 결심한 이상 더 이상 장춘에 지체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침대칸(중간 자리)에 누워 라디오를 듣는데 왠지 아쉬운 마음, 서운한 마음이 그들이 아닌 내 마음에 밀려드는 건 장춘이 내게 꽤 친숙한 도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잠을 청하고 새벽 세시 즈음에 깨서 잠시 앉아있다가 새벽 6시까지 뒤척이며 잠에 들었다 깨었다 시간을 보냈다. 기차는 아주 정확히 새벽 6시에 연길에 도착했다. 잠에서 깨어있는 동안 많은 승무원들이 분주하게 일을 하는 걸 봤었다. 기차가 오랜 시간 달리면서 차창이며 바퀴가 꽁꽁 얼어붙어 그걸 깨내는 작업을 했던 것이다. 동북의 겨울은 난방이 되는 곳을 제외하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춥긴 한가보다. 특히나 새벽과 같은 시간엔 달리는 기차에도 성에가 끼고 얼음이 얼고 고드름이 열리니 말이다.


새콤한 새벽 냄새를 맡으며 출구를 나서니 수많은 택시 기사들이 손님을 기다렸다는 듯 호객행위를 한다. 이미 택시 가격은 물어봤기 때문에 별 의심없이 한 택시를 잡아탔다. 원래는 5원이면 되지만 설 연휴라 무조건 10원을 받는다고 했다. 연길은 연변 자치주에서는 큰 도시에 속하지만 그래도 장춘이나 북경, 상해에 비할 수 없이 작은 도시라 10원 택시 요금이라면 연길 시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한다. 택시 기사가 내가 말해준 곳을 가보지 못한 터라 단번에 찾진 못했지만 그 새벽 시간에 잠에서 깨어 나를 기다려준 영중 형님과의 통화 덕택에 금새 찾을 수 있었다.


영중 형님과 함께 아주 큰 찜질방에 가서 목욕도 하고 때도 밀고 발 맛사지도 받으며 피로를 깔끔히 풀었다. 그리고 이 용과 영덕형님과 재회를 하고 정말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연길의 저녁을 함께 보냈다. 여전히 난 이곳에 오면 형님들이나 동생에게 손님이고 이방인이다. 택시비 한 번 내지 못하고 신세만 졌다. 나중에 꼭 복수(?)를 하리 다짐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접대를 받았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늦은 시간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쏟아지는 걸 보며 추위도 잠시 잊고 하늘만 한참 보고 있었다. 아- 좋다. 연길의 하늘은 맑고 맑아서 별들이 쪄들어(--;) 좋다. 정말 상쾌한 밤이다.


연길은 이번으로 세번째, 혹은 네번째(?) 오는 터지만 올 때마다 새롭다. 가난한 도시라서, 내가 가진 게 조금 더 있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냄새 때문에, 착하게 가난한 사람들 때문에, 그보다 더 늘 나를 반겨주는 사람들 때문에 새롭고 또 새롭다. 그 만큼 하늘도 공기도 추위도 맑고 착하고 따뜻하다.


하지만 이곳 연길도 예전과 다르게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많은 사람들이 외지에서 들어온다. 언제나 사람들은 머물지 않고 이동한다. 특히나 (한국처럼) 자본주의가 팽배하면서도 늘 불안정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