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26일 일요일

한중간 국제SMS 주고 받자.

한국에서 가져온 안쓰는 핸드폰 2개와 중국에서 쓰고 있는 핸드폰 1개을 모두 팔고 난 돈으로 새 핸드폰을 장만할까!!!...라고 생각했다.-_-;;; 그래서 친구 하나를 대동하고 장춘에 있는 안화통신빌딩(安华通信商场)을 찾았다. 그곳은 새 것보다는 중고 핸드폰 매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친구는 다시 또다른 친구들 불러 내었다. 그 친구는 예전에 그곳에서 경비일을 보던 친구라 한다. 친구들이 소개시켜 준 상점에서는 한국에서 가지고 온 핸드폰이 유행을 지난 것이라 팔아도 얼마 받지 못할 것이고 차라리 그냥 새 것을 사는 게 나을 거라 한다. 그래서 그냥 한국에서 가져온 핸드폰을 중국에서 쓸 수 있도록 개조했다. 그러니 이젠 장춘에서 쓰는 핸드폰은 두 개가 되었다. 왜 하나를 더 만들었을까???!!!!!

이유는

한국에서 가져온 CDMA방식 핸드폰은 한국으로 국제SMS를 보낼 수도 있고 한국에서 보낸 국제SMS를 받을 수 있다. 물론!!! 한국어로!!!-0- ...이거 너무 늦게 알고 좋아하는 것 같은데...-_-;;;


중국 핸드폰은 GSM방식, 즉 SIM카드를 끼워야만 쓸 수 있는 핸드폰이고 신호방식도 다르다. 그래서 유럽쪽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낼 수는 있어도 한국으로는 보낼 수가 없었다. 물론 혹여 보내거나 받을 수 있어도 영어가 아니면 안되었다. 그런데 한국 핸드폰으로는 당연!!! 한국어로 문자메시지를 주고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국제SMS를 어떻게 보내는지 정확히 모르겠고 아직 시도해보지 않았지만 이전에 분명한 정보를 확보했기에 거금 200여원을 들여 전화비 100원 정도를 충전하고 중국에서 쓸 수 있게 조작하는 데 100원을 지출했다.

번호는?!!! 13394474832. 많고 많은 번호 중에 이 번호를 고른 이유는(물론 뒷 번호 네자리 밖에 고를 수 없다.) 48에 32니까. ? ? ? 4 X 8 = 32라는 뜻이다.-_-v 중국 상인에게도 이 번호를 왜 선택했는지 설명해주니 웃으면서 아주 잘 골랐다고 화답한다.-_-v

한중간 국제SMS를 보내는 방식은 잘 모르겠지만(각자 알아서 찾아보도록 하면 좋겠다...만) 아는데로 설명을 해보자면...

001-86-13394474832

즉, 001(혹은 002, 00700 - 다 되는지는 모르겠다)을 누르고 중국 국가번호 86을 누르고 전화번호를 누르면 된다. 바로 알아챘겠지만!!! 전화를 거는 방식대로 번호를 입력하고 문자메시지 send를 누르면 된다. 이 글을 보는 즉시 시험삼아 문자를 보내보도록 하자. 그럼, 나도 역시 답 메지시를 보내보도록 한다. 중국에서 국제SMS는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전화보다는 싸겠지. :)


중국 핸드폰 번호가 두 개지만 13654300313은 통화용으로 13394474832는 국제SMS용으로 사용을 하면 좋겠다. :)





그럼, 이상!!!

기본원리 발견하기.

몇 몇 선생님들은 상해에, 북경에 일이 있어 나중에 돌아오면 뵙기로 했다. 마침 다른 선생님과 연락이 되어서 만나게 되었는데 요즘 본인의 단편 작품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스토리보드릴과 간단한 이미지 컷을 봤는데 느낌이 참 좋다. 내용은 철학적으로 깊은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진 않지만 가벼우면서도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 맘에 든다. 몇 군데 이야기만 좀 더 보강하면 꽤 괜찮은 작품이 되지 않을까 짐짓 생각해 본다. 작품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스토리보드릴에 대한 내 의견도 이야기를 하고 제작기법이나 방식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ceng선생님은 기꺼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신다. 그러다가 내가 그 작품에 함께 참여해 작업을 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어 나도 조심스럽게 가능하겠냐고 물었더니 너무도 반갑게 허락을 하면서 같이 한 번 해보자고 하신다. 있는 동안 내 작품에 대한 고민도 해야겠지만 ceng선생님과 이 작품도 한 번 해 봄직하다.

자리를 옮겨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하게 되었다. ceng선생님도 애니메이션에 대한 생각, 작품에 대한 생각이 남다른 면이 있다. 사실, 어느 나라 어느 애니메이터를 만나도 작품을 하는 사람들의 심성은 기본적으로는 비슷한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작품만 생각하고 경제적인 부분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생활이 어려워지고 그건 또다시 작품을 못하게 되는 악순환으로 연결될 우려가 없지 않지만 그래도 작품에 열정을 보이는 사람을 만나는 건 늘 즐겁다. 그리고 함께 분투를 다짐하게 되고 끈끈해지지 않나 싶다. 이것저것 정리하고 있는 내용들 함께 즐겁게 교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작품이던 삶이던 대인관계든 기본적 원리는 비슷하지 싶다. 어떤 상황, 사물, 사람을 대할 때 갖는 마음가짐 또한 대동소이한 것 같다. 하지만 만약 전체 삶의 유사한 연결고리를 발견하지 못할 때는 힘겨워질 게 틀림없다. 모든 상황, 모든 것에 대해 각각의 마음과 에너지를 쏟아내야 할테니까.

한 인간의 한 에너지는 수 많은 각각의 일을 처리할 때 똑같은 크기와 성질로 나타나게 된다. 그 에너지의 흐름, 크기를 잘 조율할 수 있다면 참 좋지 않을까. 단 한 번의 삶, 영원한 삶 달리 보면 두 개의 삶이고 같이 보면 하나의 삶일텐데. 여전히 한 번의 삶이 가진 유한성에 두려워하고 조급해하진 않나 곰곰히 돌아보게 된다.

2006년 3월 24일 금요일

장춘, 마지막 잎새.

장춘에 도착한 날 친구를 만나러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라디오 방송에서 어떤 꼬마 소녀 아이에 관한 내용을 접하게 되었다. 정확히 알아듣지 못해 기사에게 물어보니 장춘에 살고 있는 한 여자 꼬마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암에 걸렸고 지금은 암 말기라 며칠 살지 못하고 죽을 거라는데 그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고 위해 사람들이 북경 천안문에 모여있다고 한다.(택시기사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던 듯) 정확한 내용을 알지 못해 궁금하던 차에 친구에게 물어보니 요즘 신문, 방송을 접하지 못해 모른다고 한다. 어랏, 장춘에서 일어난 일인데?

그러다 오늘 우연히 인터넷 한국판 기사에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중국판 마지막 잎새". 장춘에 살고 있는 8살 소녀 시아오신웨(小欣月)가 학교에서 돌연히 쓰러지고 난 후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뇌종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3개월 전에 실명을 해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소녀의 유일한 소원은 북경 천안문에 가서 국기 게양식을 보는 것. 직접 북경에 데리고 가서 보여주면 좋으련만 담당 의사는 북경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고(장춘에서 기차로만 12시간 정도 소요된다) 힘들어서 자칫 도중에 죽을 수도 있다며 만류했다. 그래서 소녀의 아버지와 주위 사람들이 생각해 낸 방법은 장춘의 한 곳을 천안문 광장처럼 꾸미고 국기 게양식을 하는 것처럼 준비하는 것이었다.


비록 천안문과 똑같지도 않고 국기 게양식도 어설펐겠지만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소녀에겐 중국 국가가를 듣는 순간 소원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집에서 가짜로 만들어 놓은 장소로 이동하는 순간에도 함께 이동하는 사람들은 모두 북경어를 사용하도록 했고 버스 안에서도 북경에서 있음직한 일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도록 연기를 했다. 그리고 버스에 내리면서 소녀의 아버지는 딸에게 "비로소 천안문에 도착했구나. 정말 크고 멋지다"라는 말로 소녀에게 거짓말을 했고 소녀는 국기 게양식이 거행되고 나서 "드디어 국기 게양식을 보게 되었네."라며 기쁨의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학교, 병원, 관공서, 일반 시민 등 많은 사람들이 이 크고 아름다운 거짓말에 기꺼이 동참을 했다.

소녀는 병마와 싸우는 게 무척이나 힘들텐데도 울지도 않고 견뎌낸다고 한다. 그저 아빠에게 "아빠, 나 아파"라는 말만 할 뿐이고 눈물도 흘리지 않고 병마와 싸우고 있다고 한다. 중국 기자가 방문했을 때 소녀의 부모는 소녀가 한 말을 전해 주었다. "엄마, 아빠, 나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지 마. 내 병은 이미 나을 수 없을거야. 돈이 있으면 동생에게 맛있는 거 많이 사주면 좋겠어." 8살(한국나이로 9살) 소녀지만 세상의 마지막을 앞둔 그에겐 세상의 모든 것을 알게 되버린 게 아닐까. 이 소녀의 소식은 장춘 뿐만이 아니라 중국 전역에 많은 감동과 슬픔을 안겨다 주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이 소녀를 위해 격려와 사랑을 보내고 있다.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소녀에겐 텔레비전이 유일한 친구라 한다. 아직 TV방송은 보지 못했지만 TV방송도 거짓으로 보도를 해줬음에 틀림없다. 며칠을 더 살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소망을 이뤘고 부모에게 위로의 말을 전해 준 소녀는 곧 편안히 눈을 감을 것이다.




소녀야, 이번 생엔 그렇게 황망히 떠나가지만 다음 생엔 건강한 몸으로 다시 오길 바란다. 잘 모르는 이방인이지만 진심으로 편한 길 떠나도록 마음 모으마.

장춘 도착.

장춘에 도착. 비행시간 1시간 40분. 다만 공항에서 보내는 시간을 모두 합치면 거의 반나절을 보냈다. 하늘은 너무도 맑고 화창했다. 장춘 롱지아(龙嘉)공항에 도착할 때 마파람이 심해 10분 정도 연착되었지만 순조롭게 도착했다.

시내로 진입하는 중에 본 “장춘동방헐리우드” 표지판. 작년부터 개방하고 있다는데 별 특별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었다. “장춘영화제작소”를 새롭게 단장하고 테마파크처럼 만들어 놨다는데 나중에 한 번 가봐야겠다. 처음 개장할 때 입장료가 턱없이 비싸 장사가 안되었던지 지금은 가격이 내렸다고 한다. 그래도 거의 200원 안팎이라 한다. 한 4-5년 전부터 말이 나왔던 “테마파크”라 관심이 가긴 한다.

변함없는 장춘. 반가워 해주는 많은 사람들. 앞으로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은 오히려 평정을 찾는다.

2006년 3월 23일 목요일

갑니다...

벌써 새벽이군요.
앞으로 대여섯 시간 정도 지나면 짐 챙겨 나섭니다.
오늘 아침 9시 40분 발 비행기로 장춘에 갑니다.
이번엔 가서 작업을 하려고 하기에
3년 전 갔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군요.

그래봐야 전화며, 메일이며, 메신저며
연락이 닿을 방법은 많기 때문에
그저 담담하네요.

중국 전화는 86-136-5430-0313을 사용하려 합니다.
만약 번호가 바뀌거나 새로운 번호가 생기면
왼쪽 상단에 있는 뉴스티커나 포스팅을 통해 알려드릴 겁니다.

주변에서는 늘 떠도는 삶을 사는 저를
나무라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하네요.

암튼, 또 "새로운 시작을 합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 같군요.
아니, 어쩌면 매 걸음, 매 하루가 새로운 시작인 셈이죠.
가슴 설레거나 두근거리지는 않지만 암튼, 그렇습니다.

자... 그럼, 갑니다. :)

'학위', 대체 무엇이길래.

석사, 박사 학위가 돈으로 산 가짜였다?

꽤 많은 이들이 자신들도 피해자라며 모르고 당했다고 하지만 그 말이 사실처럼 들린다면 그게 더 문제다. (러시아 음악원의) 석사, 박사 학위를 일주일 한 두 차례 수업으로 얻어낼 수 있었다면, 게다가 배우는 동안에도 전공과 같은 점이 없었다면 석박사 과정의 진위관계를 의심해 봤어야 했다. 최소한 학위증을 받았을 때 그 학위에 써 있는 문장만큼은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하지 않았나?

하긴 이들만의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그 뿌리가 너무도 깊다. 석박사가 도대체 뭐길래 그렇게 목숨을 걸고 따내려 하는 것일까. 하지만 석박사 학위가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지는 아주 명확하다. 교수라는 미래가 보장된 직업과 사회적 위치, 명예. 이 것들을 위해 많은 돈과 시간을 바치면서 학위를 따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이런 사람들이 가진 절박함과 필요 요구에 의해 이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는 사람들도 생겨나는 것이다.

나도 전에 대학원을 다니라는 권유를 받은 적이 있고 다니려고 생각도 해보았다. 그 때 괜찮은 대학원-깊이 있는 공부와 작업을 할 수 있는-을 수소문하고 다녔었는데 되돌아 온 대답은 “별로 없다”였다. 그리고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보통 학위를 받으러, 인맥을 넓히러 다니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는 인맥도 중요하고 학위도 중요하다. 하지만 석사, 박사 과정은 학사 이상의 깊이 있는 학문적 접근과 보다 정교한 작업을 위한 과정이 아니던가? 아주 단순하고 바보스럽게 이런 의문이 든다. 대학에서 대학원 이상 학위를 가진 자만 강사와 교수로 모집을 하는 이유는 뭘까.

요즘 농담으로 “남산에 올라 돌을 던져 맞는 사람은 대부분 대학원생이다.”라고 하더라. 예전엔 대학생이었는데 지금은 대학원생으로 바뀌었다.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석사, 박사 과정을 밟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다. 개개인의 실력을 검증할 마땅한 방법이 없어서인지 몰라도 학위를 가지고 개인의 실력을 평가한다. 만약 석사, 박사 학위가 100% 바른 과정을 통해 취득을 하게 되어있는 구조라면 반대할 리 만무하다. 그러한 구조에서는 석사, 박사 학위가 바로 그 사람의 학문탐구의 깊이, 실무에 대한 능력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구조에 무비판적으로 따르고만 있다.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이유는 이거다. “현실이 그렇잖아”

맞다.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교수사회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박사 레벨로 신분상승을 하고 싶은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과정을 밟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대학에서도 그러한 학위를 가진 이들을 선호하고 학위를 가져오도록 부추긴다. 이런 현실 속에서 “러시아 음악원 학위 파문”은 참으로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다. 학위(종이로 된 서류)만 있으면 실력 검증이든 뭐든 필요 없는 일이 된다. 여기에 “국외” 학위 수여자라면 대접이 더더욱 좋아진다.(국외 학위 취득자를 싸잡아 폄하하려는 뜻은 없다.) 현실 사회에서의 일단의 기득권 층이 만들어 놓은 중심을 잃은 제도를 일단은 먹고 살기 위해 따라야 하는 게 슬픈 것이고 그러면서 점차 그 기득권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간다는 게 슬픈 것이다.

학위가 있음에도 그에 걸맞지 않은 경우를 종종 봐와서 인지 학위가 있던 없던 꾸준한 노력과 자기 개발을 통해 진정한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강단에 서고 활동에 제약이 없는 사회가 되길 희망한다.

위와 같은 현실이 만들어낸 어쩌면 가장 큰 문제는 학위와 같은 “자격증”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오지 않는 <기회불평등>이 아닐까.

2006년 3월 17일 금요일

대추리 황새울, 그리고 국가

WBC에서 미국을 가볍게 이겨준 일은 비단 야구팬들만의 기쁨은 아닌 듯 하다. 스포츠 경기를 즐겨 찾아 보지 않는 나로서도 국가 대항전 만큼은 (축구든 야구든) 어느 정도 챙겨 보는 편이다. 민족주의자도 아니고 애국자도 아닌 나도 어쩌면 작은 나라 한국이 어떤 분야에서건 좋은 실력을 보여 주는 것이 뿌듯하게 느껴져서 일 것이다. 사실 이러한 단순한 마음(생각) 때문에 다른 일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비평들을 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테지만 아직까지는 그렇다.

스포츠를 단지 스포츠로 즐길 수 있고 문화를 단지 문화로서 즐길 수 있다면 그건 국가를 초월해 분명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긴 하지만 꼭 한국이 다른 나라를 이겨야 기분이 좋고 내 편이 남의 편을 짓밟아야 기분이 좋은 게 아님을 알면서도 국가 대항 경기에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는 한국의 선전으로 인해 외국에 나갔을 때 외국인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짐을 피부로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전히 '비자'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는 땅이 있고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만 둘러볼 수 있는 땅들이 많은 현실에 나름대로 적응하기 위해 한국의 위상이 세계속에 드높게 떨쳐지는 것을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처럼 느끼게 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국력이 좌지우지 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 세상에서 한국은 곧 나의 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난 이런 현실을 거부하거나 시선을 피하고 싶다. 피부색과 국가의 이름과 연령과 성별을 벗어나 삶을 공유하고 향유할 수 있는 세상이 오는 건 진정 요원한 일일까. 지향하는 세상이 꼭 그러하도록 스스로 주문하고 행동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일까. 정당한 비평에 귀기울이고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되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한국에서조차 국민이 국가의 부속품 쯤으로 취급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걸 피부로 느끼거나 접하게 되면 그런 꿈과 희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하곤 한다.

'대추리 황새울 미군 기지 확장'에 대한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 '영화 스크린 쿼터'에 대해서, 그보다 전에 '쌀개방 반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정책의 세세한 부분까지 알지 못하는 내 무지는 반성하고 있지만 찬성과 반대가 대립하는 수 많은 이슈 속에서도 나름 '바른' 자세를 견지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많은 영화배우가 광화문에 서서 시위를 하는 스크린 쿼터보다는 쌀개방 반대 시위가 쉽게 묻히기 마련이었고 그보다 황새울 사태는 더 쉽게 잊혀질 수 있다. 어느 것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소홀할 수 없는 일들이지만 일단 매체를 통해 확장되고 관심을 받게 되는 건 역시 '돈'과 '권력'의 '힘'의 우선 순위에 맞춰 드러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단지 돈의 가치 우선을 위해서 '미래'를 포기하고 희생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고 내게 행동하지 못하는 삶의 자세가 부끄러울 뿐이었다. 지금 당장 배 곯지 않으면 다행이고 지금 당장 거리에 쫓겨 앉지 않으면 다행인 것이다. 삶이 그렇게 단순하게 비겁해지더라도 국가의 위상이 드높아지면 내 배가 부르지 않아도 안도의 한숨을 쉬고 삶이 뜨거워질 수 있는 것일까.

최소한 내 나라 내 땅에서 쫓겨다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싸해질 수 밖에 없다. 함께 연대하지 못해도 생각조차 못하게 되는 처지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수 밖에 없다.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행동으로 나투어질 수 있도록.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길러낸 쌀을 먹고 자라고 이 땅의 흙과 함께 늙어갈 사람들. 국가의 힘 겨루기에 영문도 모르고 스러져 간다는 건 정말 비극이다.




관련기사 읽기

김규항 | http://gyuhang.net/archives/2006/03/15@11:44PM.html
민중의 소리 | http://www.voiceofpeople.org/new/news_view.html?serial=37732
한상욱 | http://blog.naver.com/hsworkr?Redirect=Log&logNo=10002297705
컬쳐뉴스 | 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101&title_down_code=005&article_num=5390
참세상 |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id=35587
썩은 돼지 | http://blog.jinbo.net/batblue/
한겨례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9012.html

그리고 이런 시각을 보여주는 집단도...-_-;
조선일보 | http://www.chosun.com/editorials/news/200603/200603120474.html
동아일보 | http://www.donga.com/fbin/output?sfrm=1&n=200603170069

2006년 3월 10일 금요일

[mov] 霍元甲 | Fearless | 무인 곽원갑

이연걸은 연기를 그만둔다고 몇 번씩 말했었다. 심지어는 연기를 그만두고 승려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보도가 나가기도 했다. 사실 승려가 되던지 말던지 그건 이연걸 개인의 몫이고 삶이지 남들이 왈가왈부 할 일은 아니다. 다만, 이연걸의 무술을 영화 속에서 계속 만나고 싶은 팬들의 입장에서는 이연걸의 그런 발표는 못내 아쉬울 수 있다.

아무튼 그런 이연걸의 마지막 영화라며 <곽원갑>이 등장했다. 많은 사람들은 영화가 재미있는지 여부를 떠나 이연걸의 ‘마지막 영화(라며?)’라는 사실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다. 영화는 순조롭게 개봉을 했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양분화되었다. 재미있다, 그리고 재미없다.(당연한 소리-_-;) 솔직히 나는 재미있었다. 한국에 개봉하기 전 중국에 있을 때 봤는데 <곽원갑>은 딱 이연걸‘식’ 영화였고 난 그게 좋았다.


중국 CCTV6 영화채널에서는 이연걸과 우인태 감독, 원화평 무술감독, 그리고 손려, 동용 등 감독 및 주연 배우들이 출연해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곽원갑>의 개봉을 1-2일 앞둔 시점에서 <곽원갑 상영 기념회>를 준비한 것이었다.

우인태 감독은 이미 이소룡의 아들 이국호(브랜드 리) 주연의 <용재강호>나 장국영, 임청하 주연의 <백발마녀전>, 장국영, 오천련의 <야반가성> 등으로 유명한 감독이다. 미국에서는 <프레디 vs 제이슨 / Freddy Vs. Jason>, <51번째주 / The 51st State>, <처키의 신부 / Bride of Chucky>등과 같은 영화의 감독을 맡기도 했었다.

중국 일부 비평가들은 우인태 감독이 B급(?) 영화로 쏠쏠한 재미를 보는 화교 감독으로 보면서 <곽원갑>을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 기억에는 미국에서 촬영한 영화를 제외하고(보지 않았다) <용재강호>나 <백발마녀전>같은 경우는 꽤 의미도 있고 촬영기법이나 진행에서도 당시 꽤 괜찮은 영화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나 싶다. 특히 내게 <백발마녀전> 1,2는 아주 인상적인 영화다. <곽원갑> 역시 그다지 세련된 맛은 없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나 전체적인 흐름에 있어서 우인태 감독 영화 중 베스트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이연걸은 이번 영화를 찍고 난 후 더 말이 많아진 듯 하다. 물론 그 전 인터뷰를 보더라도 꽤 말하기를 좋아하는 배우기는 했지만 이 영화가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역설하고 또 역설했다. 기자가 이번 영화가 정말로 마지막이냐고 물었다. 이연걸은 씨-익 웃으며 영화를 보면 알 거라고 대답했다. 무슨 뜻이었을까. 하지만 기자와의 문답 속에서 이연걸은 <곽원갑>이 자신의 마지막 영화라는 이야기를 끝까지 하지 않았다. 거듭 중요하게 한 이야기는 ‘때려 부수고 죽이는’ 그런 영화는 이제 자기에게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곽원갑>이 여태 자신의 찍은 영화들 중 ‘무술’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하고 있다고 피력했다. 그것은 바로 이연걸이 ‘무술’에 대해 갖는 의식의 변화를 뜻하기도 한다.


9살부터 무술을 시작한 이연걸은 12세 때 ‘전 중국 최고 무술대회’ 첫 우승을 거머쥔 이후 연이어 우승을 독식하며 5연패를 달성한다. 그 이듬해 1979년 이연걸은 영화 <소림사>를 시작으로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딛는다. 이연걸은 CCTV1 <예술인생>에 출연해 자신의 무술인생에 대해 회고한다. 무술신동이란 소리를 들으며 ‘중국 무술대회’ 5연패를 하는 동안 전 세계를 돌며 무술시범을 보이고 이후에 영화계에 진출하는데 이 때부터 이연걸은 무술계, 북경시민들의 관심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많은 부담을 안고 활동을 한다. 영화계 진출한 후 세계에 진출할 때도 역시 젊은 나이였을 텐데 그 때 역시 전 13억 중국인들의 명예를 위해 살았다고 할 만큼 부담을 느끼고 산 흔적이 역력했다. 이연걸은 정식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북경대학에서 강연회를 할 때도 자신은 똑똑하지 못하고 배운 게 없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했다. 자신이 살아 온 인생역정에 대해 말을 할 뿐이고 그 안에서 배울 게 있으면 배우고 받아들이기 싫으면 받아들이지 말라 한다.(이 점은 성룡과 비슷하다)

현재 무술황제라 칭해지고 95년 ‘중국 당대 무성 10걸’에도 속한 이연걸이 40여 년 동안 찍어온 영화들은 그저 무술일 뿐이거나 때리고 부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물론 <태극권>, <대도무문>, <영웅>, <황비홍> 등에서 간혹 삶에 대해 설파하거나 무술에 대해 언급을 한 적은 있었지만 그건 분명 이연걸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이연걸이 서장불교(밀교)를 믿으며 깨달음이 쌓여가는 동안, 그리고 무술수련을 계속 해가는 동안 그 자신 스스로 ‘무술’에 대해 혹은 '무술(과)인생'을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갖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에 <곽원갑>을 만나게 되었고 하고 싶은 얘기를 모두 쏟아내기 위해 애를 쓴다. 역시 영화 속에서 그런 교과서적(?)인 내용을 많이 접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관객은 바보가 아니라면서 그런 시시콜콜하고 구구절절 옳은 얘기는 길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비평하지만,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에서 <곽원갑>이 전해주는 얘기는 (적어도 내게) 그리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맹인으로 등장하는 여주인공 손려가 이연걸과 함께 모내기를 하며 하는 말이 있다.

‘모’도 생명이에요. 너무 가까이 붙으면 서로의 성장을 방해하죠. 최소한의 거리가 필요해요. 사람도 마찬가지죠. 서로 존중하고 도우며 살 때 진정한 행복과 평화가 찾아오죠.

이연걸은 <예술인생>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武)’는 ‘지(止)’와 ‘과(戈)’가 합쳐진 글자입니다. 선조들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죠. 전쟁과 분쟁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무(武)’라고 말입니다. 무술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외부적인 표현이나 기술에 있지 않습니다.

Sina.com과의 인터뷰에서는

무술은 자신 뿐만이 아니라 남을 해하지도 않습니다. 손에 있는 칼을 놓을 뿐만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칼조차도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가슴을 열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 그게 바로 무술의 최고 경지입니다. 그건 곧 ‘사랑(愛)’이죠. <곽원갑>은 제 42년 무술 인생의 종결점에 서서 무술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해 말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존했던 곽원갑의 삶을 통해 이연걸은 이번에 많은 깨달음을 얻은 듯 하다. 그 동안 꾸준히 추구해왔던 무술인으로서의 삶, 종교적인 삶의 굵은 매듭을 <곽원갑>에서 보여주고 있다. 중국인들 마음 속의 영웅이던 아니던,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던 말던 그는 그 나름대로 바른 길을 가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곽원갑>에서 이연걸의 얼굴 표정은 참 다양하다.(그래봐야 몇 개 되지도 않는다) 모든 영화에서 나온 표정들을 다 보여주는 듯 하다. 한 3시간 짜리로 만들어도 되었을 텐데…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얘기를 풀어내려고 한 점이 아쉽다.

아직 성룡보다 10년 정도 젊지만 이연걸도 참 많이 늙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귀여운 미소와 태산도 가라앉힐 만큼의 침묵은 여전하다. 어릴 때 돈과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꾸준히 무술인의 삶을 살아온 그에게, 현재 중국에서 前부인에 대한 여전한 애정과 우정의 과시로 칭송을 받는 그에게, 이제 남은 인생 불교와 무술로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되길 응원한다.


그런데 이연걸 말처럼 태극권 경지에 오르면 정말 신선(神仙)이 될 수 있는 걸까?



그 외,

이연걸이 영화를 그만둔다는 설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원화평과 이연걸은


우인태 감독은


곽원갑은 이소룡의 <정무문>이나 이연걸의 <정무영웅>에서





참고 사이트
http://ent.sina.com.cn/f/huoyuanjia/
http://www.jetli.com/
http://cineseoul.com
http://baidu.com

2006년 3월 7일 화요일


몸을 웅크려도 목덜미로 거칠게 내려앉아
소리없이 피부에 스며드는 눈 바람도
가끔은 속절없이 슬플 때가 있다.

2006년 3월 5일 일요일

새로운 '공간'이 생겼어요.

천재 동생(/' ')/의 도움을 받아 skin도 싸-악 갈고 새 메뉴도 만들었어요.
이름하야 photo gallery와 work gallery. -두둥-_-;

photo gallery에는 제가 찍은 사진들이 올라가겠죠?
지금 갤러리 안에는 분류항목은 몇 개 없지만
다른 사진들을 정리할 경우(!) 항목(나라)이 추가 될 예정입니다.
정리가 안되면? 음;;; 심플하게 가야죠.

work gallery에는 제가 작업한 이미지들이 올라갑니다.
애니메이션, 일러스트, 드로잉, 디자인 등등.
애니메이션의 경우엔 제가 직접 그린 그림은 거의-_-; 없죠.
다른 분류항목에도 아직 데이터가 많이 부족합니다만
차츰차츰 채워갈 수 있도록 해야죠. :)

두 갤러리 모두 회원가입을 해도 됩니다.
현재 코멘트를 다는 건 회원, 비회원 모두 가능하지만
나중에 상황봐서 비회원 코멘트는 못 달게 할까(?)...봐요.
(음;; 답글 잘 안 달리는 블로그에서 이런 소릴 하다니.-_-;)
회원이 되면 자신의 기본적인 정보를 제게 알려줄 수 있지요.
그리고 서로 쪽지 교환도 하구요.ㅋ
(사진이나 이미지나 많이 쌓이고 쌓이면 해야 할 말들인 듯;;;;)

블로그가 많이 든든해진 느낌이에요. :)
아, 새단장하면서 잘 바꾸지 않던 대문 치웠네요.ㅡ,.ㅡ

(...폐허가 안되도록 노력;;; 흠;)




써머즈고마워. :)

2006년 3월 3일 금요일

집에 다녀옵니다.

중국에도 나가야 하는데 집에 다녀와야겠다. 이번 설에도 집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집에 다녀오질 못했다. 가서 어머니도 뵙고 아버지도 뵙고 친구들도 보고 와야겠다. 어디론가 떠나는 일은 늘 있는 일이라 새삼스레 호들갑을 떨 일도 아니지만 가서 인사는 드리고 와야지.

다녀오면 방배동 짐을 정리해야겠다. 이젠 잠시 머물렀던 곳, 내게 많은 배려를 해줬던 이들과 잠시 떨어져야겠지.

방배동에 있는 짐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몇 점의 옷가지와 책들을 제외하면 내 삶 속 짐의 전부인 셈이다. 박스 몇 개로 정리될 수 있는 양의 짐이긴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고정적인 삶의 터가 없게 된 후론 여전히 부담스러운 양으로 느껴진다. 쉽게 옮기고 보관해두기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창 일을 해야 할 시기엔 내가 가진 짐도 많은 건 아니다. 여전히 많이 배워야 하고 견문을 넓혀야 해야 하는 내겐 정말 적은 짐들인 셈이다. 어쨌든 고정적인 거주 공간이 생기더라도 간결하고 간소한 짐만을 가지고 살고 싶다. 이런 삶의 태도는 늘 견지하고 되새긴다.

한국에 돌아온 후 포스팅을 할 몇 가지 얘기들이 있긴 했지만 여전히 정리되지 않고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 하지 못했다. 정리되지 않는 생각을 앞세워 궁시렁 거리긴 싫다. (옳고 그름을 떠나) 정신이 맑고 정리가 잘 되던 시절은 정말 오래 전 일이 되버렸다.




내 상태가 어쨌든 날씨는 참 좋다. 햇살이 참 좋다.



생뚱맞지만, 어렵게 찾아낸 음악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