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10일 일요일

눈먼자들의 도시(Blindness),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줄리안 무어는 마지막에 생각한다. 혹시 내가 눈이 먼 게 아닐까.... 화려한 풍경이 보이며... (아니다)

서로 통성명을 하려하는데 이름은 알아서 무엇하냐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없는 영화 '눈먼자들의 도시(Blindness)' 시력을 가진 자들은 시력을 잃기 전까진 시력을 잃은 자들의 슬픔과 고통을 손톱만큼도 알기 어렵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의 눈을 다 멀게 해버렸다. 그런데 모두가 시력을 잃고 나니 시력이 없는 자들 속에서 시력을 가진 자가 더 괴롭다.

'본다는 행위'와 '보이지 않는 상황' 사이, 비현실 속에서 현실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볼 수 있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많은 세상'보다 과연 살만한 세상인가.
줄리안 무어만이 시력을 잃지 않은 세상은 줄리안 무어만이 시력을 잃은 세상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 남들이 모르는 걸 나 혼자만 알 수 있다는 것. 차별과 유일함.
문득 불교의 가르침이 생각난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영화를 보면서 가장 불쾌했고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씨퀀스는 음식을 얻기 위해 여자들이 자발적으로 '성(性)상납'을 하는 것이었다. 극단적인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서라고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줄리안 무어의 행동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나중에 제3동의 왕을 살해할 거면서 왜 처음엔 순순히 가서 '상납'을 했던 것일까. 나중에 불을 붙이러 갔던 여자도 마찬가지다. 줄리안 무어의 캐릭터가 심약하고 착하다는 건 알겠지만 '윤간'을 당하고 나서야 당사자를 죽일 수 있다는 건 설정이 너무 의도적이었다.

그보다 음식으로 여성들의 성을 착취하겠다는 것. 가장 기본적인 것을 무기로 가장 기본적인 것을 채우겠다는 저열한 의도가 가득 찬 화면을 보며 역겨움이 쏠렸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막장 짓. 현실이 꼭 그렇다. 먹고 사는 문제를 담보로 성을 사고 팔고, 직장을 담보로 직원을 노예로 만든다. 인간은 시스템을 많은 이들이 유용한 쪽으로 발전시키기보다 이기적인 부분을 강화하도록 발전시킨다. 그 상황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이들은 당연히 힘없고 빽없고 심약한 사람들이다. 화면 가득히 넘치는 인간의 더러운 욕망이 내 몸 위로 내 마음 속으로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것 같아 보는 내내 불편했다. 줄리안 무어가 왜 '행동'을 취하지 않는지에 대한 원망이 더해지면서.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다니지 않아 황폐해진 도시는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다시 다닌다 해도 다른 모습은 아닐 것이다. 비워진 것과 채워진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일 뿐, 그 용기자체가 달라지진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용기를 사용하는 방법, 그 용기를 채우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냐는 것이다.

줄리안 무어의 손을 꽉 쥐고 있는 사람들은 줄리안 무어가 희망일지 모르겠지만 그 희망은 유한한 것이다. 굶주림을 해결해주고 미망 속에서 헤매지 않게 해줄 뿐, 그들에게 진정한 희망이 되긴 어렵다. 줄리안 무어도 더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할 수가 없다. 끔찍한 현실을 보지 않아도 되고 극도의 공포에 몰린 타인들에게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작은 공간(집)을 찾아 들어간다. 그게 할 수 있는 전부다. 눈뜬 사람들 세상에서 눈감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결국 이 영화는 눈뜬 사람들에게 '역지사지'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뿐,
어떤 해답도 없다.
영화를 통해 지금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볼 수 있으니 행복하구나'라고 생각하던가,
'보여도 끔찍한 세상은 똑같구나'라고 생각하던가.
혹은 '눈을 뜨나 감으나 똑같이 끔찍한 세상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


...줄리안 무어를 보면서 피부가 정말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줄리안 무어가 한국에서 배우를 했으면 바로 박피수술을 받거나 성형을 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트랜스포터3에서 나오는 주근깨 투성이 여자배우도 그렇지만 피부가 좋지 않은 배우들이 배우생활을 할 수 있다는 건 여러 면에서 생각을 하게 한다. 역시 대한민국 배우들 피부가 세계 최고야!라고 말하는 건 좀 우습다.



댓글 1개:

  1. trackback from: [영화]눈먼 자들의 도시
    영화 맨 마지막에 첫번째 발병자가 다시 눈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같이 있던 모두가 기뻐했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방향이 희망적일 때 사람은 기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준 영화... 그리구 기무라 요시노... 별로 사전 지식 없이 영화관에 들어갔다가 아는 배우가 나와서 반가웠음. 해외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헐리우드에서도 어색함 없이 영어대사로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것 같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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