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일 토요일

디파이언스(Defiance) - 선택과 결정



비엘스키 형제들의 실제 사건을 영화화 한 작품. 비엘스키 가문의 영웅담은 그것이 영웅담이기도 하면서 인간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적극적 행위(Defiance)를 해 수 많은 목숨을 지켜낸 또다른 쉰들러 리스트라고 할수 있을까.

투비아 비엘스키(Daniel Craig)의 이야기가 중심에 있긴 하지만 주스 비엘스키(Liev Schreiber)는 투비아보다 과격하기만 하고 호전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을까. 처음에 자신의 부모를 죽인 자를 찾아가 세 사람을 죽인 건 투비아였다. 투비아와 주스는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투비아가 얻게 된 '리더'의 위치는 그가 '장남'이었고 유약한 심성 때문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주스가 투비아를 이해하면서 투비아가 주스보다 더 옳은 결정을 내렸다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영화를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투비아와 주스는 단지 노선에 대한 '선택'의 문제였을 뿐 '누가 옳고 그른가'에 대한 문제는 결코 아니었다고 느꼈다.

투비야의 인간적인 규칙이 더 좋을지 몰라도 투비야가 생존할 수 있었던 건 주스와 같은 이들의 강력한 투쟁들이 함께 존재했기 때문이다. 어느 한 가지 방법'만'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무엇이 '옳다'고 말하는 건 '결과'를 중시하기 때문이고 누적되어 온 역사적 사실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과거나 미래에 존재하는 것 따위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저항'과 '협력'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고 '개인'과 '집단(커뮤니티)' 역시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누가 더 옳으냐를 따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없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택과 결정에 대해 보다 강력한 확신을 갖는 것, 그리고 그 확신에 대해 매 순간 반문하고 반문하며 더 나은 선택과 결정을 해 나가는 것. 현재를 미래에 대한 씨앗으로 만드는 과정이 아닐까.

'영웅'은 탄생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 시대상황과 대중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영웅인데 사실 그 영웅의 실체는 여러가지 이유로 가려지게 마련이다. 그건 대중들의 심리와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안과 공포가 저항력을 앗아가기도 하지만 자신들이 보고 싶은 영웅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닌가 싶다. 투비아가 현실적으로 느껴졌던 건 그가 본의 아니게 리더를 맡게 되면서 조금씩 권위적으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권위도 힘을 잃기 마련이고 좌절을 겪게 되지만 릴카 틱틴(Alexa Davalos)의 사랑으로 다시 마음을 다잡기도 하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동생인 아사엘 비엘스키(Jamie Bell)의 리더쉽과 주스의 등장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결국 다른 이들의 눈에는 영웅일지는 몰라도 영화를 지켜보던 나같은 3자나 투비스의 형제들은 영웅, 메시아 따위에 운운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불안하고 두려운, 때론 무능하고 어리석은 대중들이 만들어 낸 영웅, 그리고 그 영웅으로부터 스스로도 구원받길 원하며 그 영웅과 함께 어깨를 함께 하며 스스로의 힘을 찾아간다는 건 시대가 변하고 세월은 흐르지만 언제나 같은 게 아닌가 싶다.

이유야 어쨌든 비엘스키 형제들이 1200여 명의 목숨을 지켜낸 일은 그 무엇보다 값진 것이다. 그들이 '영웅'이 되거나 혹은 하느님이 보내 준 '구원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마땅한 일일 수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 저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영화 엔딩에 보면 비엘스키 형제들은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에 그 어떠한 보답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이 사람들을 지켜내려고 했던 건 '상황이 그랬을 뿐'이고 '어쩔 수 없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적극적이고 의협심이 강했겠지만 그들 스스로가 영웅이 되길 자처했던 게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의 현실이 오버랩되었다. 대한민국에서 70-80년대에 이루어졌던 '민주화'가 민주당, 열린우리당, 한나라당의 많은 의원들의 입과 386세대들의 입을 오르내리며 자신들의 훈장이 되고 특별한 업적이 되는 현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영웅이고 참여하지 못한 이들은 비겁한 자들이었을까. 독재정권의 압잡이 노릇을 하지 않았으면 모두들 상황은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시대가, 상황이 그들을 민주화 투사로 만들었지만 지금의 그들은 그 시대와 상황을 자신들만의 것으로 특수화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영화처럼 누군가가 총을 들었다면 누군가는 땔감을 구했어야 했고 누군가는 신발을 수선하고 누군가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주스처럼 총을 들고 전장에 나가야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요(要)는 끔찍하리만큼 교활한 정치인들, 정치적인 인간들이 당시 대중들과 함께 건너온 공동의 시간, 역사를 자신들만의 것으로 만들어 대중을 현혹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유태인과 러시아인을 대놓고 조롱(?)하는 장면이 있는데 특히 유태인들을 무능하고 싸울 줄도 모르며 죽어 마땅한 자들처럼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유태인들은 지금 전세계의 핵심을 쥐고 흔드는 모종의 권력이 되어버렸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는 걸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것일까.


영화 엔딩에 소개된 내용.

In their new camp they built a school, a hospital, and a nursery.

Always hunted, their number continued to grow.

By war's end, 1200 had survived.

Asael Bielski joined the Russian army and was killed in action six months later.

He never lived to see the child he fathered with Chaya.

Zus emigrated to New York City where he started a small trucking business.

Tuvia followed soon after. He and zus worked together for thiry years.

Tuvia and Lilka remained married for the rest of their lives.

The Bielskis never sought recognition for what they did.

The children and grandchildren of those they saved now number in the tens of thous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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