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18일 월요일

다우트(Doubt) - 수구와 보수의 대결


영화 다우트(Doubt)는 수구(Meryl Streep 분)와 보수(Philip Seymour Hoffman 분)의 대결이라 생각했다.

수구(守舊): 옛 제도나 풍습을 그대로 지키고 따름.
예) 아직도 수구 사상은 완고하게 뿌리가 박혀서 학교 직원 중에도 머리를 깎자면 모두들 질색하였다. 출처 : 이기영, 봄

보수(保守): 보전하여 지킴,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반대하고 전통적인 것을 옹호하며 유지하려 함.
예) 그 나라 사람들은 매우 보수적이어서 여자는 반소매도 입을 수가 없다.

사실 수구와 보수의 사전적 의미만 따져본다면 크게 다른 점이 보이지 않는다. 둘 다 과거의 것을 지키고 유지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수구는 보다 이기적인 면이 강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측면이 강하고 보수는 과거의 좋은 점은 보전하고 지켜가되 틀 안에서의 개혁은 받아들이고 용납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겠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보수의 기본 틀이 무너지면 종교는 종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며 보다 철학 쪽으로 기울게 된다. 종교에서 과거와 전통을 부정한다면 그건 종교의 기원, 교조를 부정하는 꼴이 되며 종교가 보다 열린 자세를 취하고 늘 변화무쌍한,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면 철학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신앙-믿음'이란 개념이 개입하면서 철학적 논의는 의미가 없어지게 되고 정도가 지나치면 광기로 흐를테지만 어떤 게 옳다 그르다를 논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모든 건 자신의 '행복'과 '안식'을 위해 취사선택을 하기 마련인데 그 자신을 '나'로 제한하느냐 보다 큰 '우리'라는 개념으로 '나'를 대치하느냐에 따라 (종교적) 보수와 수구가 나뉠 법 하다. 알로이셔스 수녀는 자신의 '의혹'에 확신을 갖게 되면서 플린 신부를 적대시하게 되었지만 본질은 자기 자신의 안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플린 신부는 수녀의 그런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 싸움 직전까지 가지만 결국 자신의 안위보다 '우리'의 평온을 위해 물러선다.

이건 작지만 아주 큰 차이다. '개인'과 '집단', '단기(短期)'와 '장기(長期)'의 차이기도 하다. 수구는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과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이익을 쫓는 반면 보수는 전체를 생각하고 장기적인 비전을 갖는다. 보수라는 게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게 가족, 사회,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생각과 행위를 하기 마련이다. 학습과 교류, 연대를 통해 보수 뿐만이 아니라 진보적 사고를 하는 것이다.

"doubt can be a bond as powerful and sustaining as certainty"

영화 시작 즈음에 플린 신부가 설교를 할 때 등장하는 문구인데 이 영화의 핵심을 담고 있달까. 알로이셔스 수녀가 마지막에 의혹에 빠졌음을 시인하고 통곡을 하는데 의혹(의심)은 확신과도 같은 견고함을 주기 때문에 의혹에 빠지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종교인의 입장에서는 '의혹'은 바로 신을 부정하고 모든 교리를 부정하는 에덴동산의 사과와 같아서 의심을 하는 순간 천국은 지옥으로 변하고 거대한 우주는 먼지로 변해 그 무엇하나 믿음을 댈 곳이 없게 된다. 의심하고 있는 자신을 제외하고.

그 의심을 거두고 물리치기 위해 올곧은 신념, 신앙을 갖기 위해 '종교'가 탄생했다. 종교의 탄생 후에 믿음의 행위가 생겨난 게 아니다. 인간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 불안함,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 모종의 행위가 시작되었는데 그 행위가 구체화되고 시스템을 갖춰가면서 종교가 만들어진 것이다. 믿음의 궁극에 서는 게 두 종류 쯤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믿음이 진리와 가까워지면 큰 틀(우주, 자연) 안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맞물려 돌아가되 무한한 자유를 얻고 영성이 밝아지고 맑아지는 반면 믿음이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욕심과 집단의 이기심으로 형성되면(우매하고 무지한 믿음) 최면에 걸린 것과 같아서 오히려 더욱 미혹해지고 타인과 나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내기 마련이다. 후자의 경우가 '종교는 아편과 같다'는 말과 일맥상통할 수 있다.

의혹이 생기는 순간(믿음이 사라지는 순간) 종교와 신앙도 사라지는 게 맞지만 믿음이 편협하게 흐르고 신앙이 수구적 형태를 띄게 될 때도 역시 종교와 신앙은 사라지거나 변질된다. 그 사이(間)라는 게 손등과 손바닥의 차이같아서 늘 참회하고 수행하지 않으면 참 종교, 참 신앙을 하기 어렵다.

다우트(Doubt)의 시대배경을 함께 생각해보면 사실 알로이셔스 수녀의 행위도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시대와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걸 한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기엔 무리가 있다. 물론 개인의 잘잘못을 이야기하고 개션해가는 과정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지만...

플린 신부와 알로이셔스 수녀의 대립이 고조될 즈음 플린 신부가 한 설교 내용은 영화의 줄거리를 압축해 놓은 부분이라 생각된다. 게다가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잘못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최근에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던 '인터넷 악플' 논란이나 과거부터 지금까지 쉽게 사용되고 있는 '좌파=빨갱이=북한'과 같은 이야기, 그 외에 수 많은 관계 속에서 쉽게 자행되는 행위들을 떠올려보면 아래의 설교 내용은 곱씹어 볼 만 하다.

한 여인이 친구와 함께 잘 알지 못하는 남자에 대해 소문(험담)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날 밤 그녀는 꿈을 꾸었다.
하늘로부터 거대한 손이 나타나 그녀를 가르켰다.
그녀는 바로 온몸 가득 죄책감으로 가득찼다.
다음 날 그녀는 고해성사를 하러 갔다.
그녀는 교구목사 O' Rourke신부를 찾았다.
그녀는 신부에게 모든 이야기를 했다.

"소문을 이야기하는 것도 죄입니까?"

그녀는 목사에게 물었다.

"나를 가르켰던 손은 전능하신 주의 것입니까?
당신께 사면을 구할 수 있습니까?
신부님, 말씀해주세요. 제가  뭔가를 잘못했습니까?"

"그래요"

O' Rourke신부는 그녀에게 대답했다.

"맞아요. 당신은 우매하고 무지하군요.
교양없는 여성이에요!
당신은 잘못된 시선으로 당신의 이웃을 봐서는 안됩니다.
당신은 그의 명성을 우롱했습니다.
당신은 마땅히 마음 속으로부터 수치를 느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여인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후 용서를 구했다.

"지금은 아직 안됩니다!"

O' Rourke신부가 말했다.

"집에 돌아가 베개를 가지고 옥상으로 가세요.
칼로 베개를 찢은 후 다시 날 찾아오세요!"

그리하여 그 여인은 집으로 돌아갔다.

침대 위 베개와 서랍 속에서 꺼낸 작은 칼을 들고서
옥상으로 간 후 베개를 찢었다.
그런 후에 단정하고 예의바르게 교구 목사에게 갔다.

"당신은 베개와 칼을 가지고 갔나요?"

목사가 물었다.

"네, 신부님"

"결과는 어땠나요?"

"깃털들 뿐이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깃털요?"

목사가 다시 물었다.

"사방이 온통 깃털들이었습니다. 신부님!"

"당신은 지금 당장 돌아가 바람에 날려 간 모든 깃털들을 주우세요!"

"아....."

그녀는 말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는 모든 깃털들이 어디까지 날아갔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O' Rourke신부가 말했다.

"바로 그것이 소문(험담)이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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