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9일 수요일

사실대로 증언 할 내부고발자는 100명 중 단 26명 뿐.

어렸을 때 종종 듣던 이야기 중에 하나.

 

돈 많고 권세 있는 집안의 청년이 늘 수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지만 유독 허름한 옷을 입은 친구와는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청년에게 말한다.

"저 많은 사람들 중에 진정한 친구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청년은 대부분이 자신을 위하는 진정한 친구라고 대답한다. 아버지는 청년에게 제안한다.

"네가 친구들을 찾아가 살인을 했다고 하면서 숨겨달라고 해 보거라. 만약 숨겨주는 친구가 있다면 너의 진정한 친구라고 할 만하다."

아버지는 단 한 명도 청년을 숨겨줄 리 없다고 단언했고 청년은 콧웃음을 치며 그럴 리 없다고 부정했다. 결과는? 모든 친구들은 청년을 문전박대했다. 청년이 늘 허름하다고 무시했던 친구 한 명만이 그 친구에게 손을 내밀며 집안으로 들인다. 청년은 깨닫는다.

"아, 그 많던 친구들은 나의 돈과 권세만을 보고 가까워진 것이구나. 진정한 친구는 정말 어려움에 처한 나에게 손을 내민 이 친구 밖엔 없구나"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진정한 친구를 가려내는 법(?)' 정도가 되겠다. 물론 진정한 친구를 사귀는 법도 중요하고 자신의 화려한 겉모습만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같은 이들을 가려내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 살인을 하고 왔더라도 나의 진정한 친구라면 숨겨줘야 한다. 만약 관아에 가서 고발을 한다면? 그건 친구도 뭣도 아닌 그냥 '개XX'다. 친구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좋을 때나 어려울 때 함께 해야 한다. 동고동락(同苦同樂)해야 한다. 좀 더 이야기를 확대해서 친구의 우정과 의리 따위를 신고와 고발로 바꿀 X은 그 바닥에서 매장당해야 한다.
 
진정한 친구, 동료라는 개념이 아주 친밀하게 발전함과 동시에 그 개념의 깊은 곳에 '가족'이란 단어를 함께 박아두고 사용하기 시작한다. 대한민국은 거대한 가족(한민족)이며 그 안에 수 많은 직장과 단체, 집단들은 소가족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가족과 같은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촘촘히 얽혀있는 대한민국에선 내가 어렵다고 등 돌리는 X은,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신고와 고발'따위로 소금 뿌리는 X은 매장당해야 할 존재고 그냥 그 바닥에서 죽음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내부고발자(휘슬 블로어;whistle-blower) 혹은 공익제보자들의 행위는 다른 말로 배신행위며 배신은 곧 죽음이란 무시무시한 결과를 도출해낸다. 그 배신행위는 가족을, 친구를, 동료를, 후배를, 하늘같은 선배를, 윗 사람을 팔아먹는 행위에 다름없은 일이며 개인의 이익과 영달을 위해 조직에 등을 돌린 파렴치한 행위정도로 간주된다.  

한 실험에서 밝혀진,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친구가 운전을 하던 중에 과속을 해서 사람을 치어 사망에 이르게 한 사실을 옆에서 지켜 본 사람이 변호사의 제안(-거짓을 진술하면 친구는 형량이 감해진다.)을 뿌리치고 사실대로 진술할 확률은 100명 중에 26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PD수첩 841회 내용 참고-Did the Pedestrian die? 폰스 트롬페나즈 교수의 '개인의 의리와 공익과의 딜레마 실험') 일본 67, 중국 48 보다도 낮은 수치다. 캐나다 96, 미국/스위스 94, 스웨덴 93 이었다. 즉 대한민국에서는 74명이 '사실대로 증언하지 않겠다'라는 것이다.
 
가족같은 회사, 형제같은 동료, 평생을 함께 해야 할 동반자라는 말처럼 공과 사가 뒤섞여 올바른 판단과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혹여 올바른 판단과 선택을 했다고 하더라도 행동으로까지 옮기는 데는 얼마나 힘이 들던가. 겨우겨우 행동을 취하고 나면 돌아오는 건 '배신자'라는 타이틀 뿐이다. 몸 담고 있던 사회로부터 격리조치 되고 아예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정도의 댓가가 뒤따른다. 스스로가 내부고발자(whistle-blower)가 되지 못한다면 적어도 내부고발자를 지지하고 지켜줄 수는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부고발자를 지지하는 사람까지 묶여서 배신자가 되어버리고 마는 사회에서는 지지를 하거나 지켜주는 작은 행위조차도 어려울 뿐이다. 오히려 대다수는 고발을 당한 단체, 기업, 기관, 사람을 앞장서서 변호하고 이해해주려 노력하며 고발을 한 사람을 비난한다.
 
내부고발자가 법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사회안전망이 가장 절실히 필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들을 지켜보는 시선이라도 달라지면 좋겠다. 스스로 내부고발자가 될 자세를 갖추면 좋겠다는 것은 너무 큰 바람일 테니까.
 
공(公)을 사적으로 취하고 사(私)를 마치 공적 영역인 것처럼 착각하고 오도하는 사회에선 개인의 이익은 점점 멀어질 뿐이고 사회 전체의 발전도 이루어질 수가 없다. 길고 넓은 안목으로 보면 지금 개인의 의리보다는 공익을 위해 솔직해지는 것이 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며 그로 인해 개인의 의리 역시 올바른 자리를 찾게 됨을 알아야 한다.
 
(종종 느끼는 거지만 대한민국은 내부고발자는 말할 것도 없고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행위조차도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만 하는 이상한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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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1. 돈있고 권력있는 집안의 청년이 살인혐의를 뒤집어 썼을때

    (1) 돈있고 권력있는 배경의 청년과 비슷한 환경의 친구들은 그를 외면한다

    (2) 허름하고 가난한 배경의 친구가 그를 환영한다



    왜 그런가?

    (1) 비슷한 배경의 친구들은 그들중의 멤버 하나를 잃어도 별 문제가 안된다

    (2) 가난뱅이 친구에게는 이것이 좋은 기회가 된다. 어차피 돈있는 놈은 다 빠져나가는 것이 법망이므로, 충분한 보석금을 내고 빠져나갈 부자녀석에게 지금 잘 보여두는것이 유익히다. 가난뱅이 친구는 '후계자'님의 은혜 아래에서 영원한 그의 집 기사나 심부름꾼으로 영광되게 살게 될것이다.



    씨니컬한 현실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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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RedFox - 2009/12/22 01:48
    심하게 공감합니다. 그럼 저도 시니컬한 건가요?



    아마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삼성공화국이나 mb제국에서 사는 걸 불편해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권력들끼리의 카르텔에도 분노하기보단 그들의 머슴살이라도 하고 싶을테니까요.



    참 우울한 현실들이에요. 마치 그네들의 세상에 세들어 사는 듯한 찜찜함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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