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30일 목요일

뉴스 후 '장자연'관련 내용을 보며 '답답'

뉴스 후 '장자연' 관련 내용을 보고 나니 답답함이 밀려든다. '뉴스 후'에서 말하는 게 절반만 진실이라 하더라도 프로그램에서 소개 된 경찰의 발표내용 및 인터뷰 내용을 보면 기가 찬다.

김 대표의 전화통화 리스트가 확보되었다는 제작진의 이야기에 전화통화 한 경찰 관계자는 "문자 메시지로 넣어달라"고 했다가 수천 건이 넘는다고 하니 깜짝 놀라면서 "전자메일로 보내달라"고 한다. 그게 경찰이냐.

수사가 끝나면 실명과 피의사실 모두 낱낱이 공개하겠다고 한 경찰 관계자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실명이라고 말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스스로가 흥분해서 그랬다"면서 "오해하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한다. 흥분하면 무슨 말인들 못해??

경찰 관계자가 고위 관계자들에 대한 성상납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 장자연씨 통장을 살펴봤는데 돈이 입금된 흔적이 없어서 혐의사실을 입증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예를 들어 미안하지만) 수 없이 많은 '안마시술소'나 '룸싸롱'에 가서 비용을 '아가씨'들에게 직접 주는 경우도 있더냐.

뭐, 경찰의 '안습수사'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 놀랄 일은 아니지만 답답한 건 답답한 거다.

그 와중에 과거 연예인 서세원 PR비 관련사건과 이수만 공금횡령 사건과 더불어 연예인 성상납 관련 내용까지의 수사를 지휘했었던-나중에 좌천되었지만- 김규헌 부장검사의 인터뷰 내용이 그나마 속을 풀어주더라. 김규헌 검사의 솔직함을 보며 그의 앞날이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 불안함이 원인이 이 나라 권력들의 지속되는 안하무인 때문에 생긴 어이없는 노파심이란 걸 생각하니 김 검사 보다 잠깐의 내 자신이 측은하더라.

'한통속'이란 말이 있다.

출처: 다음(DAUM) 국어사전 중


'권력'이 있는 자들과 '돈'이 있는 자들이 모여 '한통속'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남의 기분과 처지같은 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들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들과 같은 '힘'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과 그들의 '힘'을 부러워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세상에서 '장자연'의 억울함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프로그램 말미에 장자연씨가 '어머님의 제삿날에 조차도 불려나갔다'는 이야기는 고인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도 하지 않았던 '힘'들의 본색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라 생각한다. 끝까지 밝혀내야 한다.

정신과 치료가 미친 짓? 자살을 방치하는 사회.

'무간도' 중에서. (출처)

영화 '무간도'를 보면 양조위가 진혜림에게 정신상담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이중생활을 하는 경찰에게 정신적 스트레스를 덜어주고 조울증, 우울증 등을 치료하기 위해서 제공되는 일종의 강제적 서비스다. 물론 '무간도' 외에도 'CSI'나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 등 많은 영화에서 경찰, 또는 일반인들이 정신과 치료를 받는 장면들을 종종 보게 된다. 반면에 한국의 TV나 영화에서는 정신과 치료를 받는 건 '정신병원'에 들어가는(혹은 감금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거나 소위 '레드 썬!'으로 잘 알려진 최면치료가 자주 등장한다.

한국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고 부끄러운 일로 간주되는 측면이 강하다. 상대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라'고 말하는 건 '너 미쳤다'는 소리와 같다. 언덕 위의 하얀 집으로 대표되는 '정신병원'은 더 이상 인간이길 포기한 사람들만이 가는 곳으로 인식되곤 한다. 현실이 이럴진대 친구에게 '너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면 어떨까'라고 말을 꺼내면 한 대 얻어맞을 테고, 가족들에게 '나 정신과 치료를 좀 받아볼게'라고 말하면 '너 미쳤냐'는 소리를 듣게 되지 않을까.

최근의 우승연의 자살을 비롯해 최진실, 안재환, 유니, 정다빈, 이은주 등의 많은 연예인들의 자살과 학생들의 성적비관 자살, 학업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 젊은이들의 처지비관 자살, 적지 않은 가정의 생활고로 인한 동반자살, 군대 내 자살 들의 이면에 늘 등장하는 건 '우울증'이란 병명이다. 최근엔 자살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며 사회가 들썩인다. 특히 29일 현직 경찰관이 미용실 주인(여)을 살해하고 자신 역시 권총자살을 한 사건을 두고 '그 경찰관은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며 자살의 이유를 쉽게 내뱉는다.

자살을 선택한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끊기 전 제대로 된 정신치료를 받기나 했을까. 주변에서 '우울증'의 낌새를 눈치챘다면 어떻게 '처신'해야할지 알고는 있었을까. 대한민국 국가사회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만연한 상황에서 그들에게 '치료'와 '상담'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했을까. 현직 경찰관이 그렇게 밖에 삶을 정리할 수 없었던 게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었다면 동료들은 그에게 최소한 '정신과 치료'를 권하기라도 했었을까.

물론 자살만을 막기 위해 치료 운운하는 건 아니다. 대규모 사업장이던 중소규모의 사업장이던 업무 스트레스가 많은 직장이라면 '정신과 치료'를 위한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슨 일이든 사후(事後 또는 死後)에 판단하고 단정짓는 일은 쉬운 편이다. 예방이 쉽지 않은 일일지라도 일(들)이 벌어지기 전에 알아채고 예방하는 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적어도 '상담'의 기회는 최소한으로 보장되고 '치료'의 기회 역시 적극적으로 주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

그 누구도 스스로가 또는 가까운 주변인이 '정신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복잡해지고 다양해진 삶 속에서 한 개인이 모든 걸 감내하고 이겨내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로 인해 우울증도 걸리고 스트레스도 쌓여간다. 개인의 정신적 피로가 계속해서 쌓여간다. 삶을 보다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몸을 더 많이 움직이며 정신적 스트레스 등을 감소시켜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본인 스스로와 주변인들이 '정신치료'를 받는 것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개선해가면 어떨까. 적어도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심리적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이 '치료'의 기회를 얻도록 하는 데 편견의 시선보다는 애정과 응원의 시선을 보내면 어떨까.

힘든 세상을 살면서 삶의 무게를 모두 혼자서 짊어지려다 정신적, 심리적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이다보면 언젠가는 폭발하게 될 것이다. 결국 이 사회는 공동의 정신병에 걸려 광폭한 시대를 통과해야 할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일은 삶의 대부분에 영향을 끼치는 '정치적 행위'들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참된 교육'이 제대로 실현되는 것이겠지만 이미 거대해지고 다양해진 현대생활에서 '정신치료'와 '심리치료'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스스로의 삶을 끝낸 이들 중엔 단 한 마디지만 '사랑'과 '응원'의 메시지만 있었더라도 쉽게 목숨을 버리지 않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Snap out of it!"




[record my mind] - 자살(自殺)이란 이름의 타살(他殺)
[sense datum] - ...두고 보도록 하자.

2009년 4월 24일 금요일

바가지요금, 100분토론, 조희문, 김보라미, 진중권, 김승대, 박혜진 앵커, 패러디...

이 글은 자유인님의 2009년 4월 24일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2009년 4월 23일 목요일

가이리치, 진중권 담배송, 자유주의자, 박노자, 은/는, 이/가

2009년 4월 22일 수요일

기획서, 有法無法

  • 기획서 작성할 때 1.0 버전을 빨리 만들어서 공유하세요. (글쓰기 멘토링 중) , 기획서를 어느 정도 완성해서 보이려고 하는 과욕은 좋지 않다. 또한 One Page Proposal도 중요하다. 뭐든 준비하는 게 장땡.(기획안 1.0)2009-04-22 21:30:38

  • 寫蘭有法不可無法亦不可.2009-04-22 21:32:23

이 글은 자유인님의 2009년 4월 22일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2009년 4월 21일 화요일

성룡의 실언, 그리고 반대와 이해.

보아오 아시아 포럼에서 성룡의 실언-'중국인들은 통제가 필요하다(中国人是需要被管的)'로 인해 중국 네티즌들이 들썩인다. 사실 성룡의 발언 자체로 보면 문제가 있어 보인다.

성룡의 지인 중에 증지위(曾志伟)는 '성룡이 의견을 말하는 데 문제가 있고 의사를 표현하는데 서툴다'고 하면서 '과거 진자강(陈自强)이 있었을 때가 그립다. 그 때는 진자강이 성룡의 대변인 역할을 해주기도 하고 성룡이 발언을 할 원고를 미리 검토해줘서 실수가 별로 없었다'고 했다. 덧붙여 '성룡은 아마도 자신이 어릴 적 부모님이나 칠소복 시절 사부님에게 엄격한 교육을 받고 난 후 성공한 예를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너무 솔직한 발언을 하는 성룡이라서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성룡 스스로가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정치관련 발언을 자제하는 게 좋겠다는 증지위도 사회주의 국가에서(물론 홍콩은 일국양제(一国两制)로 자본주의 시스템이지만) 예술인의 지극히 일반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다. 아들 방조명(方祖名)은 '아버지가 무척 엄격하고 무서워서 말을 잘 못하겠지만 그런 뜻으로 한 건 아닐 것'이라며 '아버지는 말을 너무 직설적으로 하는 솔직한 분'이라고 했다.

사실, 성룡에 대한 이미지가 좋고 자선사업이나 기타 좋은 일도 많이 하는 편이라 이번 발언은 대만, 홍콩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음은 물론 일반 팬들에게도 적지 않은 실망을 가져온 것 같다. 난 성룡의 '변명' 또는 '해명'을 바라긴 하지만 설령 본인이 한 말에 대해 다른 언급이 없다고 하더라도 성룡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쉽게 바뀔 것 같진 않다. 물론 성룡의 발언은 여전히 문제가 있다. 중국 대륙에서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민주를 갈망하고 있으며 의식이 점차 선진화되고 있는 걸 고려해보면 성룡의 발언은 큰 문제가 된다.

다만, 성룡의 '중화(中华)적 사고'와 '보수적 사고'는 어쩌면 지극히 정상일 것이다. 그간의 성룡의 언행을 보면 분명한 보수주의자(착한 보수)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중화'를 무척 강조하는 성룡으로선 대만도 홍콩, 티벳도 결국 중국, 중화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시위건수가 부쩍 늘어난 대륙의 상황을 안다면 그는 '중국인은 통제가 필요하다'고 말한 게 애국심, 중화사상에 입각한 발언이지 않았나 싶다. 이에 대만, 홍콩은 발끈하고 나섰지만 대륙 본토에서는 성룡의 발언을 환영하고 있는 걸 보면 더욱 그 의미가 확실해 보인다. 이미 CCTV에서 나가려고 했던 성룡관련 기사는 삭제했는지 막아뒀는지 검색이 안된다.

성룡이 전재산 기부를 한다거나 1원(인민폐) 모으기로 학교설립을 한다거나 각종 재난/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구호의 손길을 내민다거나 생일선물 대신 기부를 하도록 한다거나 헌혈 홍보활동을 하는 등 크고 작은 일에서 좋은 일이라면 앞장서서 행동으로 보여줬다. 그는 정치적 발언을 즐겨하며 정치활동을 한 적도 없고 그걸 바래는 사람도 없다. 중국 대륙과 홍콩, 대만, 서울시 등등 그가 필요한 곳에서 그를 적재적소에 사용한 경우가 많은데 그건 그가 가진 영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그의 발언은 쉽게 용서가 되지 않을 듯 싶다. 그저 그가 그런 말을 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물론 이유를 듣지 않더라도 위에서 말한대로 그가 가진 '모종의 신념'이 발로가 된 말이라면 일부 이해가 되긴 한다. 아시아 경제관련 보아오 포럼에서 한 말이라면 중국에 발딛고 있는 기업인들에겐 성룡의 말이 고마웠을 것이다. 마치 MB가 촛불시위나 용산시위를 강력처벌하거나 인터넷에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 있을 때 한국의 기업들이나 외국의 기업들이 기뻐하는 것처럼.

유명한 사람들은 모두 진보주의자가 되었으면 좋겠고, 세계 평화에 이바지 하면 좋겠고, 모든 언행에 하나도 틀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들이 책임감 없는 보수, 악날한 보수가 아니라면 괜찮다(봐줄만은 하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서도 '통제가 필요하다'라고 줄창 외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성룡보다 기부도 덜 할 뿐더러 성룡보다 의미있는 일을 더 하지도 않는다. '인민'들을 더 생각해주지도 않는다. 성룡이 말하는 '통제'와 대한민국에서 운운하고 있는 '통제'가 과연 같은 것인지는 잘 생각해 볼 문제다.

워낙에 진보를 찾아보기 힘든 대한민국이라 정상적인 보수라도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실한 즈음에 성룡의 발언을 접하면서 몇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좀 더 궁글려봐야겠다.

2009년 4월 20일 월요일

'내조의 여왕' 속에 '아내의 유혹' 있다.

한동안 드라마를 보지 않다가 오늘은 전에 가끔씩 재밌게 지켜보던 '내조의 여왕'을 하길래 띄엄띄엄 보는데 재밌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드라마 보면서 어지간하면 잘 웃질 않는데 '푸학' 웃음이 터져나왔다.

장면은 이렇다.

천지애(김남주)가 온달수(오지호)와 은소현(선우선)이 바람핀다는 소문을 듣고 뭔가 찜찜해 퇴근해 돌아온 온달수에게 이것저것 질문하는 장면이었는데 온달수가 그런 것 아니라며 오해를 풀어준다. 물론 온달수는 이런저런 소소한 잘못들을 들킬까봐 조바심을 내고 있었지만 단순하고 지고지순한 천지애는 온달수의 변명을 그대로 믿어준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이렇다)
"당신! 바람피다가 걸리면 끝장이야! 만약 바람피면 (입술 위 점을 가리키며) 나 이 점 빼고 다시 돌아와 복수해줄 거야.", 고개를 갸우뚱하며 오지호가 말한다. "점을 뺀다는 말이 뭐야?" 천지애가 픽 웃으며 말한다. "배신당한 여자가 다시 점 붙이고 나타나 복수한다는 그 유명한 드라마도 몰라? 아내의 서릿발"

대놓고 '아내의 유혹'을 패러디하는 장면에서 참 재밌기도 했고 나름 신랄한 비판(?)같은 느낌(주관적인 생각이지만)도 들었다. 희극 안에서는 긍정적 패러디가 오히려 도움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김남주 입술 위 점은 성형 전/후 모두 그대로 있던 것 아니었나.

암튼, '내조의 여왕' 웃겼다.




'내조의 여왕'은 처음에 지켜볼 때는 조금 민망할 정도로 과장된 느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회가 거듭할 수록 현실의 반영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과장의 폭을 적절히 유지하는 드라마라 생각한다. 진지함과 코믹함의 균형도 잘 잡고, 불륜과 기업비리, 사모님비리도 지나치지지도 않고 너무 허술하지도 않게 적정선을 유지하는 것 같다. 갈수록 허태준(윤상현)과 천지애, 온달수와 은소현, 그리고 한준혁(최철호)와 양봉순(이혜영) 등의 애정관계가 많이 진행되는 것 같지만 볼 만 하다.

사실 처음 '내조의 여왕'이 시작될 때는 '시마과장'처럼 직장과 삶에 대한 이야기에 사모님들의 암투가 즐겁고 유쾌하게 풀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드라마가 끝나도 시즌2, 시즌3로 이어지면서 온달수가 대리, 과장으로 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 물론 그러려면 시나리오 판을 새롭게 짜야 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내조의 여왕'에서 개인적으로 좋았던 부분은 온달수가 퀸즈푸드로 설문조사를 벌이고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는 과정이 소개된 것이었다. 기업 내부의 일과 사랑을 제대로 그리기만 해도 재밌는 작품이 나올 것 같은데...

김남주, 윤상현, 오지호, 은소현, 이혜영, 최철호 연기들이 참 적절하다는 생각.



2009년 4월 6일 월요일

난징 대학살

난징 대학살(南京大屠杀)이란 중일 전쟁 도중,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중국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약 5만 내지 30만 명의 중국인들이 학살되었다. 1937년에서 1938년, 1941년에 발생하였다.

최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7만평 규모의 난징 대학살 역사관을 설립 일본의 만행을 국제적으로 홍보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하려고 하고 있다.

몇몇 중국인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학살했으며, 어린이는 물론 늙은 노인까지 잔인하게 강간한 뒤 잔인하게 살해했다.”라고 전해진다. 강간 직후 여성들은 즉시 살해됐는데, 주로 수족을 절단하는 방식으로 살해됐다. 또한 일본군은 누가 100명을 먼저 살해하는가를 놓고 경연대회를 열어 포상하기도 했는데, 당시 참수 경쟁 가담자는 1948년 중국 정부에 의해 총살당한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였다. 심지어는 중국인 포로를 총검 훈련에 이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일본의 만행은 사진 촬영이 취미였던 무라세 모리야쓰가 촬영하였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일부 양심적 지식인을 제외하고는, 극우 인사가 난징 대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거나 심지어는 교과서에서 난징대학살을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 중국 정부와 대립하고 있다.

또 한 사상자의 숫자가 매우 제각각이며, 서양의 서적 중에서도 4만2천 명 설을 언급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15만이나 20만 명 설까지 다양하다. 또 일본 내에서는 양심적인 사학자라고 불리는 사학자들도 중국 측의 30만이라는 숫자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대표자인 카사하라 토쿠시 츠루 문과대학 교수나 와세다 대학교 교수(지금은 고인)인 호라 도미오조차도 25만 명 이상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기타 20만 명설, 15만 명설, 1만 명설, 3천 명설, 심지어는 일본 우익 진영에서는 40~50명 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많아 봐야 1~2명 설, 아예 없었다는 설까지 있다.

일본에 난징 대학살의 존재는 학살이 진행중이던 1937년 12월 당시에도 이 사건에 대해 일본 국내에는 아예 보도되질 않고 있었으며, 오히려 당시 국민들은 전쟁에 찬동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일본에 알려지게 된 것은 패전 후의 일이며,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 서는 15만 명으로 사상자를 결론지었다. 전후에 언론에 보도되기는 했으나 신문 상에서 최대의 기사거리는 국제 사회에서 지원될 식량과 식량의 종류, 배급일자가 1면기사였고, 난징 학살의 기사는 2면이나 3면기사로 보도되면서 전후에 일본 국민들의 기억속에서 곧 잊혀졌다.

그러나 1971년에 일본의 아사히 신문의 혼다 카츠이치기자가 홍콩을 경유해 중국에 입국해서 당시 일본과 국교를 단절하고 있던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내를 여행하며 신문상에 연재한 '중국 여행'이라는 르포가 화재와 인기를 끌면서 다심금 일본에 난징 대학살 논쟁의 불씨를 당겼으며, 이 과정에서 100인 참수 경쟁의 이야기나 731 부대의 이야기도 연재되었다. 이 르포를 반박하는 일본의 극우 언론인 산케이 신문의 스즈키 아키라 기자가 1973년에 난징 대학살의 환상이라는 책을 출판하였고, 일본내에서도 다시금 논쟁이 격해졌다. 그리고 1981년에 '중국 여행'이 책으로 출판되면서 또 다시 화재를 일으켰다. 그리고 일본의 교과서에는 1965년에 당시 사토 에이사쿠 총리 하의 문부과학성검정 역사 교과서에서 난징 대학살이 삭제된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했는데, 이에 이의를 제기한 이에나가 사부로교수의 30년에 걸친 교과서 소송 재판이 1995년 마침내 최고재판소의 판결로 교과서에 의무적으로 실리게 되었으나, 1999년부터 다시 학살 부정론이 우익 진영을 중심으로 크게 일어났으며,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 아세아 대학교 교수 히가시나카노 슈도 등이 최선봉이 되어 다시금 부정론을 강하게 제기했다.

출처: http://ko.wikipedia.org/wiki/%EB%82%9C%EC%A7%95%EB%8C%80%ED%95%99%EC%82%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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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끔찍한 역사적 사실(출처: 위키피디아)

南京大屠杀

不容忘却的史实

  南京大屠杀指1937至1945年中国抗日战争期间,中华民国在南京保卫战中失利、首都南京于1937年12月13日沦陷后,日军于南京及附近地区进行长达数月的大规模屠杀。其中日军战争罪行包括抢掠、强奸、对大量平民及战俘进行屠杀等。屠杀的规模、死伤人数等没有世界共同认可的数字,但一般认为死亡人数超过30万。

  在中国,南京大屠杀往往是民族主义的重要关注点。而在日本,公众对南京大屠杀的认识存在着广泛不同的情绪及观点,尤其是日本部份极右份子,认为南京大屠杀是被夸大、甚至是凭空捏造的反日本外交工具,也有人认为否认南京大屠杀是历史修正主义、否认主义的表现。由于日本人对南京大屠杀的意见着广泛的分歧,因此视乎讲话者的观点,南京大屠杀可能被称为“南京大虐杀”、“南京虐杀”、及“南京事件”等。对南京大屠杀的认识,是中日外交及人民关系中存在的问题之一。

  而在欧美等西方国家,南京大屠杀一般英译为Nanjing Massacre(南京屠杀)或Rape of Nanjing(南京的洗劫、南京的强奸)等字眼,但总体上人民对其的认知往往远不如对纳粹的种族灭绝过程的认知。
  亲历和目睹“南京大屠杀”的中国人和日本人尚健在的已经不可多得了,能作见证的人亦即将与时俱逝。但是,这个中国历史上空前的惨案还悬而未决,让我们活着的,尤其是作为这段历史的见证人的一代,有责任把“南京大屠杀”这件在第二次中日战争中最突出的惨绝人寰的日军罪行,彻底澄清,以对祖先,以儆子孙,更为“南京大屠杀”中死难的34万同胞伸冤。

  日期与地点:在南京审判(1946年1月至1948年11月)时,亲历“南京大屠杀” ,曾任“南京安全区国际委员会委员”的梅奇牧师(返美后任耶鲁大学驻校牧师)、贝德士教授(金陵大学历史教授,后任该校副校长,返美后任纽约联合神学院教授)及南京红十字会副会长等出庭作证。贝德士说∶“南京失陷后在两礼拜半到三礼拜的期间恐怖达于极点,从第六礼拜到第七礼拜的期间恐怖是严重的。”另外南京安全区国际委员会司库和秘书金陵大学社会学教授史迈士也对南京审判法庭说∶“在最初的六个礼拜中,曾每天提出两次抗议。”于是远东国际军事法庭才有“在日军占领后最初六个星期内,南京及其附近被屠杀的平民和俘虏,总数20万人以上” 的裁定。据此,学者及一般人多沿用“南京大屠杀”只为期六个星期。“南京大屠杀”不只是六个星期,虽然这六个星期的屠杀最为严重。

  如果我们需要确切说明“南京大屠杀”的最严重阶段,那应该是从1937年12月13日 南京沦陷至1938年2月5日,新任日本南京守备司令官天谷直次郎到任。两天后,日本上海派遣军总司令松井石根曾下令恢复南京秩序。尽管有松井上将和天谷少将的允诺,日军在南京的屠杀、奸淫、掠夺、放火并没有显著的改善。当时纳粹德国驻华大使馆政务秘书乔治·罗森于1938年2月10日自南京发往柏林外交部的电报还说∶“日本人在南京的恐怖统治已达无以复加的程度。”他于3月4日的电报更清楚地分析日本人暴行的情形∶“二月份及本月近几天南京及其周围的形势已有些稳定……日本人的暴行在数量上已有减少,但在性质上没有变化。”罗森还提到直到他动笔写信那一天(3月4日),南京还看不到一家中国商店。史迈士教授在其1938年出版的《南京战祸写真》中说,南京市区在1938年3月份,有许多大门还是封着的。再有蒋介石的德国顾问团团长法尔肯豪森,当时留在南京在德国大使馆工作,其遗稿中记有“一个日本兵于三月十九日在美国教会院内强奸一女孩”。上述留在南京的西洋人所报道的南京二三月的恐怖情形完全符合很多留京的中 国人所作之记述。南京失陷后未及逃出的野战救护处处长金诵盘及其科长蒋公谷两位医生于1938年2月15日搭美侨李格斯的汽车作南京陷后对市区的首次巡示,蒋氏于其《陷京三月记》有如下之记载∶“出新街口,经太平路,夫子庙,转中山路,沿途房舍,百不存一,……行人除敌兵外,绝对看不到另外的人,一片荒凉凄惨的景象,令我们不忍再看。”

  蒋介石的卫队中央军官学校教导总队的郭岐营长于南京沦陷后三个月逃出,著有《陷都血泪录》,连载于1938年8月之《西京平报》。战后,郭在中国审判战犯军事法庭出庭作证,对质日军第六师团长谷寿夫为 “南京大屠杀”的疯狂刽子手。郭写到∶“有人说兽兵刚进来头三天总是放枪奸淫烧杀的……结果过了一礼拜不见停止,过了三个月仍不见停止!”另一位教导总队的士兵营长钮先铭,系日本士官学校毕业,抗战开始时,正肄业法国军校,当即遄返报国。南京陷敌后,钮落发为僧,潜居八个月始逃出南京,现仍健在并息影于美国洛杉矶。在其所著之《还俗记》中,描述他化装和尚搭京沪火车脱险,在车厢内的情景∶“当时京沪沦陷已半载有余了,日军为了确保他们的统治权,宪兵当然已不便在公共场所明目张胆地杀人,……在鬼子宪兵监视下,我不敢过分地东张西望;因此我又收回了我的视线,闭上眼帘,一只手搓着颈项上所挂的佛珠子,以作念佛状。”一位文化人李克痕于南京城西乡村躲避两个多月后,于1938年3月初入南京城,6月3日逃离南京,著有《沦京五月记》,连载于1938年7月的汉口《大公报》。李描述其在南京所见∶“近来日兵奸淫妇女的事,在白天虽少有见到,但在晚间仍多得很。我女同胞行大街上,日兵见之即趋前阻拦,籍检查为名,遍摸全身,百般调戏,任意玩弄,但也只好忍辱含羞,听其胡为,否则,刺刀举起,立刻戳死,故在白天,大街上没有一个妇女的影子。”

  南京的恐怖局面一直持续到1938年的夏天,虽然明显的在3月中旬以后,屠杀和奸淫的程度逐渐减少。可以说三月中旬到5月底是“小屠杀”时期。最有力的证明就是两个慈善机关(世界红十字会南京分会及中国红十字会南京分会)于1938年5月份埋葬 806人的记载。林娜在其《血泪话金陵》中道出其缘由∶“从日本兵进城起,到我离开止——五月二十日——掩埋尸骸的工作从未停止,其实埋也埋不了,一批被埋掉,马上又有一批新的来补充。”南京虽早在1938年元月一日即有汉奸自治委员会的成立,以陶宝庆及孙淑荣为正副会长,但未能使日军的烧、杀、奸、掠稍搁,以致“小屠杀”继续到1938年的夏天。南京的秩序直到1938年11月梁鸿志的“维新政府”(3月成立于上海)还都南京时,始得恢复。客观地判断,“南京大屠杀”的期限应该说是“半年”,或者说三个月的“大屠杀”和三个月的“小屠杀”,才与事实符合。“东京审判” 的判决说∶“在日军占领后最初六个星期内,南京及其附近被屠杀的平民和俘虏,总数达20万以上。”又说∶“在城外的人比在城内的人稍稍好一点。在南京四周 200华里(66英里)以内的所有村庄,大体上都处于同样的状态。”“南京四周200华里”应即为上述之“南京及其附近”。这正好是东起于南京城东北,长江南岸之乌龙山,经尧化门、仙鹤门、麒麟门、马群、苍波门、高桥门、上方镇越秦淮河而西向花神庙、吉家凹,再越江南(即京赣)铁路,再东北上直趋江心洲对面之上河镇。实际上,这也就是保卫南京的防线,主要是南京之东南两方,也是人烟稠密的区域。同时,这一区域是南京防御的战场,村民多在日军未到前远走逃避。或入南京城避难,所留者多为老弱和妇孺。日军所至,未及逃避者,几乎极少幸免。

日军一路屠城杀向南京

  日军20万分六路逼向南京,一路屠城奸淫,屋舍城墟,人烟绝迹。日军第六师团于11月5日在杭州湾之金山卫登陆后直接北上破松江城。据英国“曼彻斯特卫报”著名记者田伯烈报道一位英国记者于1938年1月14日亲赴松江考察后所发的电报∶“松江全城本来可以容纳10万人左右的居民,我却只看见五个年老的中国人,躲在法国教会的一幢宅子里,流着眼泪,他们已经断食,恳求我带到上 海。” 有中国威尼斯之称的苏州为日军第三师团于11月19日攻陷。据1938年 上海《密勒氏评论》一篇文章报导∶“美丽古雅的苏州城原有35万居民,日军占领该城后,只剩500人了。”但最痛心的事情还如下述∶“就是日军侮辱各种阶层的妇女。兽欲勃发的日本兵到底奸污了多少妇女,恐怕没有人能够估计。”稣实在其最近所著之《中国妇女作日军慰安妇》一文中说∶“苏州城陷后有二千多妇女 被掳。”蒋介石夫人宋美龄女士在其1939年1月15日重庆《中央日报》所发 表的《抗战建国与妇女问题》一文中证实,日军不仅将被掳妇女编号供奸淫,甚至当众将被掳妇女“剥掉衣裳,在肩上刺了号码。一面让我们女同胞羞耻,不能逃跑 ,一面又充当他们的兽欲的工具。” 素有“小上海”之称的无锡,为一工业中心,平时人口达90万人,1937 年10月下旬以来几乎每日均遭日机轰炸。据上述《密勒氏评论》文章所载,11月10日日军于一日之内竟投炸弹160余颗,全城工厂与商业区尽成瓦砾,军民死伤无算。恶名昭彰的日军第十六师团所属之第二十联队(相当于中国的团单位)于11月26日陷城后,大施屠杀,纵火焚城达十余日。据该联队第三大队上等兵北山于1987年公布之《北山阵中日记》所载,日军入城后不分军民一律屠杀。上述稣实的文章里报导日军在无锡掳夺中国妇女3000人,其中为军官所占有,随军押向南京者为数不少。日军于11月29日陷常州(武进)。按《北山阵中日 记》所载,日军接上级命令,所掳居民皆杀,结果四千余人被屠。镇江为南京之屏蔽,运河中枢,且系江苏省会,日军于12月9日破城后,数 千未能离境之难民皆遭屠杀,妇女被轮奸致死者极多。后来红十字会收尸共3000具。当时年仅7岁的尹正美,全家五口居镇江城内,其祖母、母亲、大爷和哥哥皆死于日军屠刀之下,本人之后背被日兵刺了3刀,后被救活,现居北京,其背後3刀伤痕仍清晰可见。尹女士已撰文报导其受害经过,在《日本侵华研究》第十六 期发表。田伯烈在其书中提到∶“中立的外国观察家曾赴日军占领下扬子江下游三角地 带旅行视察。据他们的报告,破坏毁灭的情形,决非局限于上海及其附近。……生产和生存工具的全部绝灭比较几千几万人牺牲于奸淫屠杀之下,其影响实在更为可怕啊!”田氏估计上海附近三个月的战事,造成中国官兵伤亡至少30万人,平民 的死伤数目也不相上下。但是,最可怕的“南京大屠杀”继踵而至。

  日军近八个师团约20万人,此外还有飞机助战,海军游弋长江(因其武器精良,火力优于中国军队的三倍),分六路围攻南京。守军约12万人(除教导总队 及宪兵两团外,有十三个师)。日军第十三师团之一部连同第十一师团之一部编成之天谷支队于镇江北渡长江,先取扬州,再西向迂回南京对岸之浦口。第十三师团的六十五联队组成山田支队沿长江南岸直趋下关。第十六师团于12月5日进据句容后,其第三十八及三十三联队绕汤水镇经紫金山(针山)北麓奔向下关之东煤炭港江边,以其第九及二十联队攻麒麟门经马群由紫金山南麓直逼中山门。第九师团第七、三十五、三十六,及十九各联队在第十六师团之南并进,奔向光华门及通济门。第十军所属之第一一四、第十八及第六师团自杭州湾登陆后即西向,经太湖之南,其中第一一四师团绕太湖南岸北上取宜兴,经溧水而攻南京城西之花神庙、雨花台、而中华门。第六及第十八两师团西进,于11月30日陷广德后,第十八师团及伪满于芷山旅继续西进,于12月8日陷江南重镇芜湖。第六师团之第十三、四十七、二十三联队即北上为第一一四师团之左翼进攻中华门;其第四十五联队由最左翼直奔下关。另有第五师团之第四十一联队,由国崎登旅团长率领之国崎支队未参加广德战事即北上,经固城湖及石臼湖之南,于马鞍山之北渡长江而东向浦口 ,对南京形成包围之势。12月9日南京外围要地龙潭汤山、淳化镇、秣陵关尽失,于是环城防卫战开 始。12日晨日军攻陷城西南之中华门。当日下午五时,自告奋勇保卫南京之投机军阀唐生智长官召集师长以上人员开会宣布撤退,部队由下关渡江北上与正面突围南下;唐迅即渡江北逃。入夜后,南京彻夜枪声不停,各奔生路,无路可走的官兵多化装到老百姓家,特别是国际安全区藏匿。日军于13日晨9时许始由中华门及 中山门涌入市区,三个月的“南京大屠杀”随即开始。

三十四万同胞惨遭日军屠杀

  1937年12月13日,日军进占南京城,在华中方面军司令官松井石根和第6师团师团长谷寿夫等法西斯分子的指挥下,对我手无寸铁的同胞进行了长达6周惨绝人寰的大规模屠杀。

  日军占领上海后,直逼南京。国民党军队在南京外围与日军多次进行激战,但未能阻挡日军的多路攻击。1937年12月13日,南京在一片混乱中被日军占领。日军在华中方面军司令官松井石根指挥下,在南京地区烧杀淫掠无所不为。
  12月15日,日军将中国军警人员2000余名,解赴汉中门外,用机枪扫射,焚尸灭迹。同日夜,又有市民和士兵9000余人,被日军押往海军鱼雷营,除9人逃出外,其余全部被杀害。
  16日傍晚,中国士兵和难民5000余人,被日军押往中山码头江边,先用机枪射死,抛尸江中,只有数人幸免。
  17日,日军将从各处搜捕来的军民和南京电厂工人3000余人,在煤岸港至上元门江边用机枪射毙,一部分用木柴烧死。
  18日,日军将从南京逃出被拘囚于幕府山下的难民和被俘军人5.7万余人,以铅丝捆绑,驱至下关草鞋峡,先用机枪扫射,复用刺刀乱戳,最后浇以煤油,纵火焚烧,残余骸骨投入长江。令人发指者,是日军少尉向井和野田在紫金山下进行“杀人比赛”。他们分别杀了106和105名中国人后,“比赛又在进行”。
  在日军进入南京后的一个月中,全城发生2万起强奸、轮奸事件,无论少女或老妇,都难以幸免。许多妇女在被强奸之后又遭枪杀、毁尸,惨不忍睹。与此同时,日军遇屋即烧,从中华门到内桥,从太平路到新街口以及夫子庙一带繁华区域,大火连天,几天不息。全市约有三分之一的建筑物和财产化为灰烬。无数住宅、商店、机关、仓库被抢劫一空。“劫后的南京,满目荒凉”。
  后来发表的《远东国际法庭判决书》中写道:“日本兵完全像一群被放纵的野蛮人似的来污辱这个城市”,他们“单独的或者二、三人为一小集团在全市游荡,实行杀人、强奸、抢劫、放火”,终至在大街小巷都横陈被害者的尸体。“江边流水尽为之赤,城内外所有河渠、沟壑无不填满尸体”。
  据1946年2月中国南京军事法庭查证:日军集体大屠杀28案,19万人,零散屠杀858案,15万人。日军在南京进行了长达6个星期的大屠杀,中国军民被枪杀和活埋者达30多万人。
  中华民族在经历这场血泪劫难的同时,中国文化珍品也遭到了大掠夺。据查,日本侵略者占领南京以后,派出特工人员330人、士兵367人、苦工830人,从1938年3月起,花费一个月的时间,每天搬走图书文献十几卡车,共抢去图书文献88万册,超过当时日本最大的图书馆东京上野帝国图书馆85万册的藏书量。 南京大屠杀惨绝千古人寰!
  关于“南京大屠杀”的证据与资料,为了中国审判战犯和远东国际法庭的审理,南京市议会自1945年8月即开始收集资料,历时两载。首先中国军事法庭于1947年2月初审判“南京大屠杀”首要战犯第六师团长谷寿夫。亲历其境之证人如美籍贝德士及史迈士教授等1250余人出庭或具结作证,连同物证资料提作 审判依据。3月10日宣布判决∶ “计我被俘军民,在中华门花神庙、石观音、小心桥、扫帚巷、正觉寺、方家 山、宝塔桥、下关草鞋峡等处,惨遭集体杀戮及焚尸灭迹者达19万人以上;在中华门下码头、东岳庙、堆草巷、斩龙桥等处,被零星残杀,尸骸经慈善团体掩埋者 ,达15万人以上,被害总数共30余万人。” 判决书所定之集体屠杀19万人及零星屠杀15万人,系根据身历其境之12 50余人,及当时主持掩埋尸体之许传音、周一渔、刘德才、盛世徵等具结证明;具有红十字会掩埋尸体43071具,崇善堂收埋尸体112266具之统计表;灵谷寺无主孤魂3000余具之碑文;及谷寿夫在法庭上犹洋洋自得叙述其以丛葬方式集中掩埋之“万人坑”五处所起出之头颅数千具;并有众多的出版物和照片为 物证。其实,中国政府检察官陈光虞根据十四个团体的调查,于1946年5月向远东国际军事法庭提出的“南京大屠杀”确定的被屠杀者294911人,未确定的 被屠杀者20万人。同年九月,陈氏根据继续收到的确实资料,又增列被屠杀者96260人,故确定被屠者应为391171人。东京审判对“南京大屠杀”颇为重视,听取来自中国亲历目睹的中外证人十余人(包括贝德士、梅奇、威尔逊医生、许传音、伍长德、粱延芳、秦德纯等)的口头证言并接受了百余件书面证词,最 后作出慎重的保守的判决∶ “在日军占领后最初六个星期内,南京及其附近被屠杀的平民和俘虏,总数达 20万以上。这种估计并不夸张,这由掩埋队及其他团体所埋尸体达15.5万人的事实就可以证明了。……这个数字还没有将被日军所烧弃了的尸体,投入到长江 ,或以其他方法处理的尸体在内。”
  1981年以来,在日本军国主义复活声中,日本文部省猖獗地窜改历史教科书,否认对华侵略和“南京大屠杀”。南京各文化学术团体,尤其是南京大学及中国第二历史档案馆,组织“侵华日军南京大屠杀史料编辑委员会”,重新调查研究并编写“南京大屠杀”的史料与著述。据1984年的调查,南京全市尚有仍健在 的受害者、目睹者1700余人,他们接受采访的证言都收藏在1985年建立的 “侵华日军南京大屠杀遇难同胞纪念馆” 内。这番重新调查和研究的结果对于19 47年中国军事法庭对“南京大屠杀”的判决作了一些补充,但重新肯定“南京大屠杀”的数目为34万人,即集体屠杀19万人,零星屠杀15万人。 “南京大屠杀”的消息首先传到外界是由《纽约时报》驻南京记者窦奠安所发的电稿《纽约时报》1937年12月18日封面大标题为“南京强奸事件”;其小标题为“日军陷南京,屠杀两万人”,世界舆论为之大哗。以后东京审判亦沿用 “南京强奸事件”一词。事实上,南京沦陷后,我女同胞所遭遇的是再悲惨没有了。日军随时随地不分昼夜强奸我国妇女。东京审判十一名法官之一的中国法官梅汝敖说∶“强奸和杀人是分不开的,因为日军在强奸之后,通常是把被奸的妇女,甚至连同他们的家属子女,一齐杀掉的。”曾出席“东京审判”法庭作证的许传音举 一实例∶ “水西门外某寡妇,有女三人,长女十八岁,次女十三岁,幼女九岁,均被轮奸,幼女当场死去,长女次女亦不省人事。” 金陵大学校园内,一个十一岁的幼女,被日军轮奸致死。另珠江路口,有一个 七十九岁的老妇,被强奸,其子向日军拼命,亦被杀死。两年前受日本记者访问之 李秀英,当时怀孕七月被刺三十余刀而未死之奇迹亦为世人所周知。奸后必杀几乎 成了日军的一条规律。在国际检查处向东京审判庭提出的证据里,有一件是日本军部发给战区司令长官的秘密命令,禁止日军士兵归国后谈论他们在华的暴行,并引用某中队长关于强奸给士兵的指示∶“为了避免引起太多的问题,或者是给以金钱,或者于事后杀掉。”该命令中又说∶“如果将参加过战争的军人一一加以调查,大概全都是杀人、抢劫、强奸的犯人。”正如日本《读卖新闻》随军记者小俣行男在其《中国战线随军记者的证言》中所说∶“不强奸的士兵几乎没有,(被奸妇女 )大部分在事后杀掉。” 东京审判确定“日军入城后的一个月内,强奸中国妇女达2万名”。国际安全区主席拉贝亦向德国政府报告南京被日军占领一月之内发生不只2万起强奸事件。 麦加伦牧师送东京审判庭的证词有“强奸——强奸——又是强奸,我们计算一夜至少有一千起”之语。东京审判判决书说∶“全城中,无论是幼年的少女或老年的妇人,多数都被强奸了。”贝德士在作证时说过,从1938年2月6、7日直到那年夏天,很多严重的暴行还在发生。因此,据“安全区”的国际人士的统计与估计 ,“南京遭受强奸的妇女至少8万人之多。” 日军四出强奸妇女而奸杀并施,日以千起,我南京全城妇女,人人自危。日军 蹂躏我妇女之方式离奇惨虐,古今史册前所未闻。我妇女坚贞不肯受辱或受奸含羞而投井和悬梁自尽者何止万千。

  日军入南京后大肆抢劫放火,不仅把南京商业区抢劫一空,而且纵火焚烧。日军入城后,见人就杀,遇屋即烧,烈火不停七周之久,夜晚照成白昼。大火延至白下路、朱雀路、中华路太平路、中山东路,繁华商业区不数日而化为灰烬。日军总司令松井石根于12月17日抵南京举行入城仪式,在南京逗留一周。12月20日后复作有计划的纵火烧城,市民有敢营救者,尽杀无赦。是日费吴生博士同史迈 士教授驾车外出所见∶ “城内最重要的商业区太平路一带,烈焰冲天。向南行,我们看见日兵在店铺 内放火。更向南行,我们看见日本兵忙着把东西装入军用卡车。青年会已起火,尚未波及附近的房屋,起火的时间显然不久。我们无心细看,匆匆前进,夜间我从窗 口眺望,十四处的火舌向天空飞腾。” 日军放火是在军官指挥下,先由他们在认为可烧的门上划一记号,士兵们再使 用汽油和化学药品纵火。国际安全区委员会曾收集了日军放火用的几种化学引火物的样品。 费吴生在给他在上海的友人信里说∶ “今天是一月十一日。……我昨夜驾车外出时,还看到四处火警,并目睹日本兵正在另一家店铺动手放火。从十二月十九日迄今,日本兵几乎没有一天不放火。前天,克鲁治君曾设法溜出东门,回来告诉我们,他所经过约二十哩的区域内,庐 舍均已焚毁,阒无人迹,连家畜也看不见。” 罗森于1938年1月15日给外交部的报告说∶日本军队放的大火,在日军 占领一个多月之后至今还在燃烧;全城三分之一被烧毁。日军在南京的抢劫也是破天荒的。梅奇牧师在其12月19日信中说∶“整个 过去的一星期,日军已把南京城抢夺一空,任何东西都要;他们甚至抢走德国领事馆的汽车。”费吴生在其给上海友人的信中也说∶“全城所有私人住宅,不论是被占领的或未占领的,大的或小的,中国人的或外侨的,都蒙日军光顾,劫掠一空。 ”美大使馆职员晋钦,女传教士苞尔,及德人雷伯、巴赤德、波濮罗、蒸姆生等之住宅均遭多次搜劫,损失严重。德国六十幢房屋,有四十幢遭受不同程度抢劫。 日军在南京的抢劫是有计划的,上自师团长下至士兵无不从事抢掠,很多发了横财。于1937年12月21日自第六师团长谷寿夫手中接管南京城防的第十六师团长中岛今朝吾就是满载而归回日本的;他偷去了蒋介石的文房四宝。社会学家史迈士率领国际安全区委员会新培训之工作人员作三个月(1938年3月8日至6月15日)的南京附近六县(即长江北的江浦、六合两县,江南的江宁、句容、溧水、高淳四县)的农村调查及南京市的家庭调查,而完成《南京战祸写真》由该会于1938年在南京出版。调查结果南京市内房屋遭破坏者为百分之八十九;其中因交战因素毁坏的有百分之二,毁于纵火焚烧的有百分之二十四;另外的百分之六十三是由于掠夺和抢劫。城外地区房屋及房内财产损失估计为二亿四千六百万元(当时国币三点五元兑换一美元)。1946年南京市临时参议会公布的“南京抗战损失调查表”,估计“南京大屠杀”期间公私财物之损失约为国币两千三百亿元 (当时二十元兑换一美元)。

证言
  幸存者证言

  在我们家住的附近有个崇善堂,是个慈善团体,满清时就有这个堂,日本兵进城以后,崇善堂找人收尸埋尸,我去的时候大约三四月光景。头一天是到水西门外二道埂子金华酱油厂,在这个厂酱油缸打捞尸首,都是日本兵把中国人扔进去的,还有别处收来的尸首。埋尸时,每人发一个背心,前后都有字,白底黑字,写的崇善堂,不然日本兵会乱抓乱杀的。埋尸就在附近挖坑埋,或拉到原来的壕沟扔下去,填些土;埋的尸首没有多少是整体的,工具就是铁钩子。埋尸的时候崇善堂有人跟着专门计数。 崔金贵

  我1937年往在上海路革新巷1号,那年12月6号上午11时左右,被日本兵抓住。我们两人一组被绑起来,带往长江边上的下关,那里已抓了1000以上的男人,我们的面前,四、五十码远的地方,对着我们架起了10几挺机枪。 4点左右,一个日本军官来了,下令日本兵对我们进行机枪扫射。我在压得晕了过去。不久,我从堆积如山的尸体中爬了出来,这才能够逃回去。 尚德义

  日军进城前,我全家搬至难民区上海路新华巷4号住。日本鬼子进城后,家里老人就把大哥、二哥藏在后屋。有一天,6个日本兵扛着枪、拿着刀、提着绳子来抓人。我听到有喊声,连忙躲到厕所里。在厕所里,我看见7个小伙子反绑着被鬼子用绳子连在一起押出去,其中有我的大哥、二哥。约半小时后,听到阴阳营处有机关枪响声。过后,父亲带领我到山上去找大哥、二哥,只见满山都是尸体,你有几百具,血肉模糊,辨认不出自己的亲人。大哥、二哥就惨死在鬼子枪下,真是惨不忍睹。 马鸿有

  南京大屠杀时, 我们一家有父亲、母亲、两个姐姐、三个弟弟和我共8口人。当时,因为母亲没有奶水,小弟弟哭着要吃奶。有十来个日军从堤上经过,顺着哭声找来 , 发现了我母亲 , 欲拉出去强奸 . 母亲抱着弟弟 反抗 , 日本人从母亲怀中夺过小弟弟 , 用力摔在地上 . 母亲哭着扑倒在地 , 日本人向母亲背后开了2枪 , 打死了母亲。第三天 , 日军将我父亲抓走 , 从此一去杳无音信。又过了2天 , 日军看到我11岁的二姐 , 竟要强奸她 , 由于二姐极力反抗 , 一个日军抽出军刀 , 将二姐从头劈为两半!就这样 , 在几天之内 , 日军枪杀了我母亲 , 摔死了我弟弟 , 刀劈了我姐姐 , 又抓走了我父亲 , 使我家破人亡,成为孤儿。 姜根福

  日军进南京前,我是白天剃头,晚上拉人力车。日军进城的第2天,他们闯进我家,把我抓走,到第3 天下午2点多钟,用绳子把我捆起来,和300多个人一起,押到下关煤炭港。大约快到下午4时,到了煤炭港,他们把人集中起来,用机枪扫射。我眼冒金花,突然昏过去了。后来,死尸把我压在底下,直到晚上九、十点钟时,我才醒悟过来。抬头一看,还有几个人坐着,有的被绳子捆着,有的没有捆。我们互相解开绳子以后,就各奔东西。我顺着铁路,走到火车渡江的地方,到江边把身上的血洗掉,到附近人家要了一件衣服穿起来。第2天晚上才逃回姑妈家 潘开明

  加害者证言
  泽田小次郎
  1915年9月出生
  南京战时 第16师团步兵第33联队
  第1大队某中队指挥班
  2000年7月采访
  昭和12年(1937年)7月,支那事变爆发,我们接到动员令,就在9月5日或是6日又一次去了那边。当时我是个上等兵。沿长江到南京,一路上抗日情绪高涨,特别是在常熟和无锡一带。
  我所在的中队发出了“男女老幼格杀勿论”的命令。这也就是屠杀了。在残暴的进攻战中,那种残暴性一进入南京城马上就表现出来了。
  下关逃命的中国人的情形很壮观,有好几万人,都跳到了江里,雪崩似地随着江水漂流。
  也不知道是几师团,就等在江对岸,一有中国人漂到对岸,就马上把他杀掉。这就是作战。不过,江很宽,到达对岸的人很少。但是漂到下游的人多,这些人我们就动用军舰来处理。军舰有两三艘,我曾经亲眼见到他们开枪。
  追赶的时候,士兵拿步枪射击,杀人杀红了眼。当时的中国兵手里已经没枪了,他们也没有反击,总之是只想尽量保命的样子,场面混乱至极,总之就是在撤退。
  中国兵撤退的时候,好像是把马跟其他所有东西都拴在车上渡过江去的。上头说我们一直保卫着南京,需要保存体力,而敌方不逃就会抵抗,所以就给他们开好了一个逃跑的出口。从那里套掉的家伙,根据我们的战略部署,由实现守在那里的师团把他们统统杀光。
  沿江漂流的家伙,无论什么,哪怕是拐杖也好,抓起来就跳进去漂走了。这些人群是从下游上来的军舰杀的。所以,中国士兵基本上都是在对岸被杀的。
  我们从最靠近长江的城门进城,然后对残留的士兵进行了扫荡。城里早已经戒备森严,沙袋堵住了城门,所以刚快餐我们进不了城。
  对方抵抗到了最后。记得是13日的早上,胁坂部队从光华门进了城,33联队则越过挹紫金山江门进去了。
  扫荡战一直在进行。扫荡战也殃及到了普通百姓,这就是问题所在了。
  那时候有俘虏收容所,我们抓了人就往收容所里送。地点在长江岸边,外面有士兵监视着。那是在长江岸边。对岸有重机枪守着,一有东京,马上就能“嗒嗒嗒”,也就是马上就能射击。这是各大队都做过的事。

  出水荣二
  1914年3月生
  南京战时 第3师团步兵第68联队第2机枪中队
  2001年5月采访
  我是昭和10年(1935年)的兵。8月20日从名古屋乘海军的巡洋舰出港,23日抵达扬子江支流黄埔江,从那儿登陆。1937年12月进入南京。
  (俘虏也)同样是人,很可怜。毫无疑问,对方的士兵也珍惜生命。对方也是服从命令。杀俘虏时,也有人说“赶快杀吧”。
  [问了有关海牙条约的问题]那样的教育,日本的军队没有,只说“当俘虏就是死”。抓了俘虏,是杀还是怎样都没有办法。我没干过,但看到过砍中国俘虏的头。中国人有的在砍头的人面前伸出脖子的,有的怕死央求的,还有被活埋的。日军进去的地方,哪儿都有砍头、刺死的事。
  [出示了遭屠杀的尸体群的照片]平民、女人都有,各种各样,因为是战争,所以没有办法。不杀的话就被杀,当然是什么都干。即使攻陷了南京,南京的周围还有敌人。必须把他们都杀了。要不我们就将被杀。
  所谓征发就是去偷。自己没有吃的,就去偷中国人的东西。那时,觉得是理所当然的。谁反抗就杀。想要的东西都去偷。强奸女人的家伙也有。对方的女人脸上涂了锅底的炭。即使是满脸漆黑,但年轻的马上就能看出,强奸的人也有。我们部队是不管男的女的,抓来了就让他们拿行李。人数不确定,都老实地跟着。
  青春时代被战争剥夺了,因为是天皇的命令,毫无办法。那场战争不是圣战。进入了中国的领土,那是侵略战争。没有想转告给年轻人的东西。不想说这场战争的事。我认为是侵略战争不能有第二次,杀人的事不愿跟儿孙们说。那个时代,天皇的命令是绝对的,所以没有办法。现在天皇是装饰品,不是什么伟人。

  德田一太郎
  1914年6月生
  南京战时 第16师团步兵第33联队第2大队
  1999年8月采访
  我于昭和9年(1934年)接受召集合格,在入伍的同时马上出发去满洲,接受了现役训练。最初到的是泰安镇,在那儿待了半年左右。不方便的地方是没有电和暖气。还要时常去讨伐土匪。
  初夏时节我们乘公务船回来,以后暂时在久居的联队,12月以上等兵退役。
  昭和12年(1937年)7月7日“支那事变”后的8月25、26日前后,天气非常热,我接受了第二次大动员的召集。那时我26岁,还没有结婚,征兵的红纸就到了。
  我亲眼看到过南京大屠杀。不仅仅是在太平门看到屠杀,我自己也直接参与了。在到南京之前我就看到过一个军官让3个支那人面朝江坐下,从后面用军刀将他们的脖子砍了,然后将头“嗵”地扔进前面的江中。支那人不懂日本语,但那时大概也明白“不行了”吧。
  忘了是在往南京途中的哪个地方的战斗,有个村庄好象有共产党的兵在,上面来命令说:“不管是否负伤,将共产党的兵全都杀了。”所以就把那村庄点火烧了,从身后冒起了浓烟,里面传来婴儿“哇哇”的哭声。
  回国以后的一段时间了,当年的事情常常在梦中浮现,回想起南京的事就怎么也睡不着。妻子听到了我的呻吟就问我:“他爸,你怎么了?”梦的内容是大群的中国人向我袭来的场面。我明白,因为自己杀了中国人,所以他们在梦中袭来了。现在回想起来自己是干了非常残酷的事。想去看看现在的南京,但很害怕,实在去不了。
  到现在,东京都的石原慎太郎知事还在说没有过南京大屠杀。我认为,石原慎太郎是在“胡说八道 ”。南京大屠杀是根据日军和政治家的命令发生的,我们直接参加了,所以不是谎言。我不相信政治家,他们害怕把南京的事实公开出来,说给学校、历史研究者和老师们听。我到了这样的年纪,如果说这样的话,也许有什么人听到,所以害怕,说不出口。我有儿子、孙子,更加不能说。
  回顾一下自己参加的战争,战争是不应该有的。但当时是没有办法,在天皇的命令下,为了国家去干,以为是当然的事。现在想来,现在孙子生活的时代是最好的时代。当然,日本把满洲、韩国当做殖民地的事都可以说成是侵略战争。德国把这些事都如实地告诉了年轻人,而日本却什么都不说。

  鬼头久二
  1916年8月生
  南京战时 第16师团步兵第33联队第1大队
  1999年10月、2000年9月采访
  昭和11年(1936年)1月10日,我进入了久居的33联队,开始了现役生活。昭和12年(1937年)战争开始了。我们作为现役军人在9月份直接去了中国。到句容后,经过汤水镇来到了南京。
  扫荡的时候是挨家挨户进行搜查,如发现女孩子,当场就给强奸了。女孩子们大概都躲在床下或窗帘后边。被发现的时候,不知是害怕还是什么原因,反正没有反抗。因为没有受到宪兵队的组织,所以可以随便干,没有限制。女人们脸上都涂着墨水之类。想不起来自己强奸了多少女人,只有一件事有印象,那是抓到逃跑的母女俩时,母亲说女儿还小,所以求我们只对自己来,我说了句“笨蛋”,把母亲推开了。干的时候是两三个人一起干。干的时候当然觉得不好,也想过,如果日本被占领,自己的女儿或者是女人被强奸该怎么办。但是,当时是自己也不知道自己什么时候死,所以趁还活着的时候干自己想干的事情,这跟天皇的命令什么的没有关系。这成了理所当然的事,我在南京当然有过强奸的经历,并且是不分场所,有很多空房子,就在空房子里的床上干。平时也拿着米去向母亲要女儿。还有,有的女人是自己从难民区走出来,用自己的身子换大米。米是我们自己吃的大米,一回给装满一只袜子的量 (相当于五合[日本的计量单位,一合约0.18升。])。不是在南京城,而是在南京郊外,如果被宪兵队抓住的话比较麻烦,所以就杀死了女人。我是只在扫荡时进城的,也杀过人。从这些事情来看,我认为南京大屠杀是有过的,我认为是干了坏事。

  小竹严一
  1915年12月生
  南京战时 第16师团辎重兵第16联队第1大队
  2000年11月采访
  我在昭和12年(1937年)初接受召集,加入了京都的辎重16师团。半个月后在信田山成立了小队,接着成立中队,然后编成大队乘上了船。我们最初去哪儿都不知道,没人告诉我们。那条船乘了有好几天。支那事变开始时在上海附近登陆,是个热天,大概是8月。下船时敌人的炮弹像下雨一样落下来伙伴中有人中弹了。因为是战争,只有往前进。那是一场激战。我的运气特别好,没中一颗子弹。在占地要是听班长、分队长、中队长等上司的话就没命了。他们说他们的,我们士兵想我们的,自己的命自己来保。在国内我是号手,所以与中队长一起行动。在那儿把敌人消灭,占领以后退到后面,休养一个月。如果没有发现敌人,那就一个月两个月连续战斗,在占领以前得没白天没黑夜地战斗。休养的时候有露宿的,也有在老百姓家睡觉的,老百姓家里有人的话也害怕得逃跑了。中国人很老实。
  去过南京、徐州、杭州。以中队为单位前进,但分队各自行动。战斗时以分队为单位。
  征发的时候看到女人被士兵追着到处乱跑。士兵中有一班人都干过。干的时候不分例外,不管是路上还是哪儿。在南京是先往普通人家里“砰砰”地打枪,往里窥视。中国人有的在家中畏缩地躲着,有的躲在草堆中,有的躲在墙后。只要看到动的东西就“砰”地一枪。中国人一逃就开枪。叫声“喂”,“砰”地一枪,对方就扑通倒下了。路上尸体重叠着躺在一起,不踩着尸体就无法前进。看到过处置俘虏,他们成群结队地在一起。扬子江上到处是尸体。从上海到南京粮食很紧张,家里人寄来很多东西,但送不到第一线,找吃的东西很辛苦。所谓战争就是争夺国家,争夺生命。糊里糊涂就没有了命。因为是在敌区,今天有命不能保证明天也有,所以当然就乱来了。从上海到南京时进攻速度很快,有时就光嚼萝卜,没吃没喝。饿得要死。这些都不想跟年轻人说了。
谁负“南京大屠杀”的责任?
  34万中国无辜的男女老少死于日军的屠刀之下,几十亿美元的财产遭到日军的破坏和掠夺,这样滔天罪行和暴行当然每个直接犯罪者都负有法律和道德的责任。首先,日军士兵和军官在南京大屠杀期间普遍地杀人和强奸。我们前已提到随军记者小俣行男的报导∶“不强奸的士兵几乎没有。”另有《每日新闻》社的记者铃 木二郎出席“东京审判”为“南京百人斩竞赛”作证明时说∶ “在城内扫荡残留的中国军人。如果捉到军官,就绑在杨柳树上,教新兵射击 及劈刺的方法当活靶;士兵被捉了,就让他坐在坑前砍头。我是二等兵,只用刺刀刺中国兵。” 世人多熟知的两位“杀人竞赛”日军向井敏及野田岩两少尉在入句容县城(距南京20公里)时即分别杀死我无辜平民78和89人,当两位抵达南京城外紫金山时,已分别杀至105和106人之数,但两人相约杀至150人为止。这两位 “杀人魔鬼”的竞赛为东京报纸所赞扬,称之为勇士。但“杀人竞赛”之主凶为田中军吉大尉,以其“宝刀”砍死中国人300余人,惜尚未为世人所周知。事实上,所有来侵略的日本军官都是“杀人犯”,极少例外。田中、向井、野 田三位日军官仅是比较特殊的例子。曾来纽约参加北美廿世纪中华史学会主办的七七事变五十周年纪念会的前日军第十二军军曹冢越正男在会场上痛哭流涕地说∶“ 当上了下士官,变成了拥有二十六名部下的骑兵分队长,而且被允许佩带日本刀。佩有日本刀具有什么意义呢?变得想杀人,有一个叫试新刀的斩首项目。”冢越说 他在中国四年多,共杀死106个中国人。凡是被派到中国战场的排长必须当众,通常是团长营长和连长的面前,以其战刀砍杀中国俘虏,否则便无资格作排长。请见最近在美出版颇引起读者重视的库克夫妇所著之《战争中的日本——口述历史》。最惊人的莫过于中岛今朝吾以中将师团长之尊,在南京当众以中国俘虏试刀,砍下战俘两人的头颅,其怂恿部下之任意屠杀我无辜百姓当可想见一斑。派到中国战场的新兵需再经三个月的训练始能成为 一个合格的士兵,最后一个训练节目就是以刺刀刺死一活人。
  由此可见,“南京大屠杀”不是孤立现象,日军在华暴行,屠杀和奸淫并未因“南京大屠杀”使举世震 惊抗议而终止,或真正收敛。其次,残暴为日本军事训练之核心。日军以严格纪律、打骂、生活干扰、个人 尊严之摧残,呆板的阶级制度造成无条件的服从,使下级或士兵接受任何命令,不仅来自上级或直接发号施令者,更认为所有命令皆来自大帝国的最高峰,最高统帅天皇本人。日本之残酷和轻生与其地理环境、文化、及封建制度也是不可分的。“ 大和魂”(日本民族精神)的思想灌输了每个士兵,培养其使命感及为“大和民族 ”的自负感。中国受帝国主义数十年之凌辱,尤其是甲午战争,使日本人对中国人普遍轻视。30年代,日本以纳粹希特勒为师,增强大和民族的优越感。在“南京大屠杀”中,很多日军官兵称中国人为“清国奴”,任意杀戮。正如宫崎县的一位士兵记录所说∶“杀一个支那人,在我们就如杀一只猫或狗一样”;梅奇牧师所说 ∶“日军像猎取兔子一样在街上射杀中国平民”;郭岐营长所说∶“敌人视我同胞 之生命简直不如一虫蚁了!” 复次,掠夺与征收也与“南京大屠杀”有关。日本对华的七十年侵略就是抢掠 。在战时国家有计划的侵略掠夺与个人犯罪的抢劫就混而为一了。日军20万自上海和杭州湾向南京进攻,交通破坏,部队分散,粮食无法补给,乃实行“就地征收 ”。如日军一排长曾根一夫所述,他们的部队自距上海三十公里的太仓开始即“就地征收”维持生命。征收成为各部队的主要活动,经常进行,迅即演变成为抢劫、强奸、焚烧及屠杀。曾根并说∶那时已有一部分部队采取“三光作战”,“即对敌人不分军民全部的杀光,将财物资源全部抢光,将人民居住的市街、村庄全部烧光 。” 最后,“南京大屠杀”的直接责任问题,马吉与田伯烈在东京审判作证时,都 认定大屠杀系在南京战地指挥官与东京统师帅部完全知悉与同意下进行的。贝德士在作证时更说∶“在这秩序混乱的七个星期中,我们一次也没有看到或听到过惩办这些士兵犯罪行为的情况,更谈不上有人受到处分了。”按着上述东京审判所获的日军命令所说∶“如果将参加过战争的军人一一加以调查,大概全部是杀人、抢劫、强奸的犯人”,则20万进入南京的日本官兵从上到下几乎全是犯人,应对“南京大屠杀”负责。但是,日军是层层节制,阶级服从,迄止日本战败,维持不变。
  中外学者对于“南京大屠杀”的命令来源多追溯至1932年上海事变祸首之一,后任日本陆军部军务局长田中隆吉少将,在其1948年东京新风社出版之《被割断的历史∶战败秘话》中所作的回忆。于1938年4月曾在朝香宫指挥下的“上海派遣军”任情报主任参谋的长勇中佐(后调任第七十四联队长晋升大佐),对田 中夸口说,是他擅用军司令官的名义下令屠杀俘虏∶ “由于在杭州湾登陆的柳川兵团推进神速,大约有三十万中国兵被切断了退路 ,他们丢下武器,向我投降。要处理这么多俘虏,粮食方面是个最大的问题。我立即擅自向所属各部队发出命令∶应全部杀掉这些俘虏。我利用军司令官的名义,通过无线电讯传达了这项命令。命令的全文,当即烧毁。由于这一命令,大屠杀开始 了。” 我们对田中和长勇的话实在难以相信。以区区中校竟敢擅自代上海派遣军司令 官发令,而且是口头命令,恐在任何有组织有纪律的军队都不可能,何况可谓当时世界上最讲阶级服从的日军。另据第十六师团一位炮兵观察班长泽田正久的证言∶ “俘虏数目一万左右,遂报告军司令官,司令部命令立刻予以枪决。” 这个命令显然来自上海派遣军参谋长饭沼守,因为泽田还批评他说∶在五个月 前在东京听饭沼演讲时,他还讲应该善待俘虏,今却说∶“应立即予以枪决”。参谋长是幕僚,为主官出谋划策,处理日常工作,如此关系成千上万的俘虏的生命问题,他既无权也不敢擅自处理。参谋长当然可以代主官下达命令,可是处理这样重大问题绝不能作主。军司令官朝香宫鸠彦王为日皇裕仁的叔父,于1937年12月2日始被日皇任命继松井(晋升为华中方面军总司令官)为上海派遣军司令官,而于12月5日赶至前线就职,他势必与各师团长经常以电话电报联络,就近指挥。另据第十六师团第三十八联队副官儿玉义雄的回忆(连同泽田正久之回忆,均载于亩本正己所著《证言∶南京战史》(5)1984年8月份《偕行》杂志)∶ “当联队的第一线接近南京城一、二公里,彼此正在混战时,师团副官以电话说是师团命令∶‘不能接受支那兵的投降,并予以处置。’……师团长中岛今朝吾这个命令我实在无法接受,我曾对参谋长及其他参谋建议过几次,但未能获得其同 意,所以我也有责任。” 第三十八联队长助川静二大佐在证言中说,屠杀俘虏的命令是师团长所下的。 中岛师团长在其1937年12月13日的日记(《增刊历史与人物》,中央公论社,1984年12月)说∶“因采取大体不留俘虏的方针,故决定全部处理(屠杀)之,……据知,仅佐佐木部队就处理掉约15000人,守备太平门的一中队长处理掉1300人,现集中在仙鹤门附近的,约有七千到八千人,而且俘虏还在 不断来降。” 上海派遣军的第十三师团属下之山田支队(即第六十五联队)于12月14日 在南京东北幕府山附近获得中国俘虏14000余名。经山田少将支队长上报请示处理办法,军部三次向东京大本营军部请示,第三次复电为“按照军司令部的责任去干”,遂有朝香宫司令官及师团长所下达的一连串“处理掉”的命令,该批俘虏 延至19日上午始动员予以全部杀掉。
  “南京大屠杀”中杀我军民最多的是第十六师团。其次是第六师团。第六师团是属于自杭州登陆的第十军。其军司令官是日军皇道派,支持1936年“二二六 ”政变的三将领之一的柳川平助中将(1879——1945年)。他在杭州湾登陆的演说中曾说∶“山川草木都是敌人。”该军“军参谋长的注意”有“对支那老 百姓的注意”一项∶ “在华北尤其是上海方面的战场,一般支那老百姓,纵令是老人、女人或者小 孩,很多干敌人的间谍,或告知敌人以日军的位置,或加害于日军的单独兵等等,有这样的实例,故不能粗心胆大,需要特别注意,尤以后方部队为然。如果发现这些行为,不得宽恕,应采取断然处置。”(见藤原彰∶《新版南京大虐杀》,东京 岩波书店,1988年)。柳川第十军的随军记者乃说∶柳川兵团的进攻之所以如此迅速,是因为在官兵 之间有“可以任意掠夺、强奸的暗默谅解。” 柳川麾下的第六师团,其师团长谷寿夫中将为中国军事法庭因“南京大屠杀” 而判处死刑的最高将领。他本人就是罪魁。如同第十六师团长中岛,谷也亲自用军刀杀人,他本人强奸中国妇女十余人。第六师团的随军摄影记者河野公辉曾在该师团司令部看到一份上级传达的命令∶“不容许共产主义的暴虐,为粉碎共匪的猖獗活动,农民、工人自不待言,直至妇女儿童皆应杀戮之。”难怪该师团进入南京后 ,立即屠城。 “南京大屠杀”时期的侵华日军最高统帅松井石根大将,于战后经东京审判以 “南京大屠杀”罪行责任,与东条英机等七人被处绞刑。松井于1937年12月 7日发出“南京城攻略要领”之作战命令∶即使守军和平开城,日军入城后也要分别“扫荡”。对战俘问题未提只字。在“扫荡”的名义下,不仅可屠杀战俘和散兵(日军称之为“败残兵”或“便衣兵”),亦可屠杀平民。南京沦陷第三日(12月15日),松井再发出作战命令∶“两军(上海派遣军和第十军)在各自警备地区内,应扫荡败残兵,收集隐匿之武器与军需器材,扫除战场。”所谓“扫荡败残兵”,意即屠杀战俘与散兵(见李恩涵∶《日军南京大屠杀的屠杀责任问题》,载 于1990年5月《日本侵华研究》第二期)。松井和各师团长的“不要接受俘虏”,“枪毙俘虏”,甚至“难民”的命令已 昭然若接。事实上,松井入城后(17日)山田支队在幕府山所获之14000余名俘虏于19日上午才动员杀掉。上海派遣军司令官朝香宫即进驻南京,一直留到翌年1月。同时,12月21日第十六师团接替第六师团担任南京城防,不但杀人放火、强奸、抢劫未能如日驻南京副领事田中及梅奇牧师所期望的减少,而且更行 加剧,第十六师团成为在“南京大屠杀”中屠杀我军民最多的部队。日本上海总领事馆获悉日军在南京的暴行,并报告东京外交部。该部东亚局长 石射猪太郎在其1938年1月6日的日记中写着∶ “上海来信,它详报日军在南京的暴行、掠夺、强奸,惨不忍睹。呜呼!这就 是皇军?”“这就是‘圣战’和‘皇军’的真面目!”(见陈鹏仁译∶《石射猪太郎回忆录》,台北水牛图书出版公司1987年。) 石射自那时起便称之谓“南京大屠杀”,并提出于三省(陆、海省及外务省)事务局长会议,警告陆相和外相予以制止。“南京大屠杀”当然不可避免地在1937年11月20日设立的“大本营”会议上讨论。大本营的联席会议,首相、陆相、法相、外相、参谋总长等及各部门次长和局长都出席的,会议内容由首相亲奏天皇,同时陆相及参谋总长经常不通过首相、直接上奏天皇。日本重大问题之最后决策均操于天皇之手。裕仁对进攻南京极为重视,支持军部及内阁之主战派,扩大对华侵略战争,密切注意南京战事之进展,何况十天前他才派他的叔父朝香宫接任上海派遣军司令官。翌年2月26日,裕仁亲自召见松井石根、朝香宫及柳川平助,对于他们之攻克南京,予以嘉勉,并各赠一对镶皇家菊花的银瓶为奖。毋庸置疑 的,裕仁对南京大屠杀的责任远超过这三位受奖的现行战犯。
结语
  裕仁天皇是富有现代知识的人,在未继位前,曾漫游欧洲,特别向往英国社会 及皇族,应该了解近代英国标榜的人道主义和国际公法的存在;也无须重温日本为签字国之一的1899年海牙第二公约和1929年的日内瓦陆战公约。裕仁天皇和普通日本人都会明了对放下武器的俘虏和非战斗人员是应该予以保护,绝对不可杀戮的。否则,日本政府及军部为什么一直对日本人民隐瞒“南京大屠杀”呢?
  可以看出,日本人在没有相应的实力的时候他们是采取一种迷惑的手段来学习和改进自己,一旦觉得自己的实力足以挑战任何一个他们野心的对象就会揭下他们的伪装,暴露出真实的兽性,所以对我们来说,时刻保持对日本的警惕和战备,时刻将他们设置为我们的假想敌。时刻牢记他们是我们的仇敌,时刻牢记这些人处心积虑要推翻历史的兽行。
  中国要想不被别人欺负,首先就要牢记历史,牢记用武力来保卫自己,不要去搞那些噱头了!

扩展阅读:
1.新度网 南京大屠杀 http://www.cindoo.com/s?name=%C4%CF%BE%A9%B4%F3%CD%C0%C9%B1
2.http://www.china-hero.org/njdts.htm
3.http://www.wjmhxx.com/shaoxiandui/Article_Show.asp?ArticleID=170
4.中国近现代史纲要
5.中国近代史(第四版)
6.南京大屠杀(新华网):http://news.xinhuanet.com/ziliao/2003-09/12/content_1076902.htm
7.http://njdts.china1840-1949.net.cn/
8.http://neverforget.sina.com.cn/datum/murderer/index.html

南京大屠杀遇难同胞纪念馆: http://njdts.china1840-1949.net.cn/
永不忘却——南京大屠杀史实: http://www.neverforget.com.cn/

南京! 南京! (Nanking Nanking) Trailer


南京! 南京! (Nanking Nanking) Trailer

영화 '난징! 난징!'은 '난징 대학살(南京大屠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는 두 갈래의 실마리를 제공하는데 하나는 보통의 일본사병, 다른 하나는 보통의 중국사병의 난징 대학살 기간동안 경험을 통해 1937년 난징에서 벌어졌던 광란의 살육과 강간, 약탈의 배후를 파헤치며 인간성에 대한 전쟁의 심각성을 고발하는 영화다.

영화는 1937년 12월 난징에서부터 시작한다. 다수의 국민당사병이 뿔뿔히 흩어져 난징을 빠져나감과 동시에 다수의 투항을 거부한 병사들이 남아 희망없는 처참한 저항을 전개한다. 하지만 마지막 저항이 실패한 후 수십만 중국인의 선혈이 장강을 물들이게 된다. 난징은 그야말로 사지(死地)로 변하고 만다.

이 영화는 기존의 역사 서적 및 문예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중국인의 존재에 대한 말살 및 무능한 중국인에 대한 잘못된 묘사 등을 깨고 세계 관객들이 난징의 역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난징 대학살 속의 중국인의 민족상을 새롭게 쓰고 있다. 새로운 경지에서 중국 역사상 새로운 역사적 사고를 제공하고 있다.

루촨 감독은 '난징! 난징!'이 사실상 하나의 군사구령이었다고 한다. 중국을 침략할 때 일본국 작전지휘부에서 난징 진공명령을 하달할 때 쓰던 지령이라는 것. 이것을 영화제목으로 사용한 이유는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의 강도를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한국에서 5.18을 소재로 만든 영화 '화려한 휴가'와 같은 맥락같다)

루촨 감독은 "진정으로 중국 전쟁 재난 영화를 찍길 원했다. 모든 복장, 도구들을 실제와 같이 준비했고 모든 물건은 반드시 출처가 분명해야 했다."고 말한다. 영화는 난징, 톈진, 쓰촨 등지에서 촬영을 했는데 1937년의 난징을 재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쓰촨에 당시의 난징성, 성벽, 강, 총통부, 거리 등을 새롭게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는 시각적인 부분에서 엄청난 사실성을 보여주리라 생각된다. (이상 인터넷에서 소개된 내용 축약)


출처: 南京!南京!

감독은 루촨(陆川)인데 '총을 찾아서(寻枪)'(2002)과 '커커시리(可可西里)'(2004) 등을 연출한 감독이며 이번이 세 번째 작품이다. '총을 찾아서'는 '귀신이 온다'의 감독 겸 주연으로 유명한 '지앙원'이 주연을 한 영화인데 내용이 독특하기도 하지만 공권력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으면서도 사람들 간의 관계를 밀도있게 묘사하고 있는 영화다. '커커시리'는 서장(西藏) 쪽 커커시리의 장링양(藏羚羊)의 보호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무장 산악 순찰대(민간수비대)'의 활약상을 그리고 있는 영화인데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어 실제 사건을 영화화했다. 이 영화를 위해 수 년의 준비기간을 거쳤고 영화화를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고 한다.

단 두 편의 영화였지만 강한 인상을 줬던 감독이었고 특히 '커커시리'에서 사실을 전하는 묘사방법이나 영화적 언어가 무척 강렬했기 때문에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 '남경, 남경' 역시 기다려진다. 중국인들에겐 '남경'이 가진 상흔이 너무나 깊고 크기 때문에 영화가 상영되면 상당히 많은 수가 영화를 관람할 것이라 생각된다.

나 역시 단 두 편만을 봤을 뿐인 '루촨' 감독의 '남경, 남경'이 기다려진다. 유태인 대학살을 공론화 했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66회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이상의 영화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쉰들러 리스트'보다는 좀 더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선이 견지될 것이라 추측이 되기도 하고 '쉰들러 리스트'보다 더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영화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출연진 ::




2009년 4월 5일 일요일

전기를 되돌려 준다는 발상


The Inlet-Outlet: Harnessing Energy from Everyday life을 보게 되었는데 참 재밌고 신나는 발상이 아닌가 싶다. 가장 간단한 예로 헬스클럽에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는데 이 자전거라는 게 러닝머신과는 달라서 전기를 연결하지 않아도 되는 운동기구다. 그럼 열심히 자전거를 타는 동안 발생하는 에너지를 활용할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해보면 어떤 에너지가 다른 에너지로 변환될 때는 소비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적게 나마 에너지를 비축할 수도 있지 않나라는 발상인 것 같다. 설비비가 적지 않게 들 것 같긴 하지만 조금씩 확대시켜 나간다면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까 싶다.

각 가정에서 소비되는 에너지 말고 발생되는 에너지는 아주 적은 양일지 몰라도 아파트 한 동, 한 동네, 한 지역의 에너지가 모여지면 꽤 많아질 것 같다. 오히려 Outlet할 수 있는 콘센트만 만들어진다면 집에서 윗몸 일으키기를 하던, 훌라우프를 하던, 제자리 걷기를 하던 운동을 하며 에너지를 비축할 수 있지 않을까.

'재밌고' '유용한' '친환경 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불편한 진실을 대면하는 힘 -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

진실이 가지는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 몹시 게으르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자신만이 진실이라는 교만 때문에 날것 그대로의 몸뚱이를 내놓고 어떤 치장도 설득도 하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자주 불편하다. 진실 아닌 것들이 부단히 노력하며 모순된 점을 고치고 분을 바르며 부지런을 떠는 동안 진실은 그저 누워서 감이 입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 도처에서 진실이라는 것이 외면당하는 데도 실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면 있는 것이다. - 공지영의 '도가니'


처음엔 최규석 작가가 일러스트를 담당하는 소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나중에 작가가 공지영이라는 사실을 알고 관심이 갔지만 소설을 띄엄띄엄 끊어서 읽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쉽게 접근하질 못했다. 그러다 80 여회가 넘어가는 순간 첫 회부터 읽기 시작했다. 처음 읽던 날 새벽은 '도가니'를 읽으며 보냈다. 가끔은 분노하며 가끔한 안도의 숨을 쉬며, 때론 눈물을 훔치며, 심박수가 빨라졌다 느려졌다 요동을 치며 새벽을 보냈다.

'도가니'는 지금으로부터 약 4년 전 2005년 6월 22일 성폭력 관련 제보로 시작된 '광주 인화학교' 실제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실제 인화학교 사건은 잘 해결이 되는가 싶더니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다시 학교로 복귀하게 되는 비극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별다른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한다.

'도가니'는 읽기 불편한 소설이다. '도가니'는 사실과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는 소설인데 그 사실과 현실이 너무 불편하고 가슴이 아파서 읽는 내내 마음이 천근만근 무겁다. 공지영 작가 역시 가끔씩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그의 마음도 무거워 보이지만 불편한 진실을 보다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고자 애를 쓰는 모습이 아름답다.

현실의 결말은 비극이지만 소설 '도가니'의 결말은 어떨까. 결말이 현실과 같이 비극으로 끝나더라도 혹은 현실과 달리 긍정적 결말이 되더라도 변하지 않는 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끔찍한 현실을 반드시 바라봐야만 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공지영 작가가 말하는 대로 진실은 몹시 게이르고 치장도 하지 않으며 생뚱맞고 비논리적이며 불편하다. 그렇다고 해서 진실이 아닌 거짓을 향해 구애(求愛)를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힘들지만 견뎌야 하고 불편하지만 참아야 한다. 진실이 내 곁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 진실이 세상에 가득 차게 하기 위해서 진실을 똑바로 쳐다봐야 한다.

세상이 너무 말초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으로 가득 차 더디고 교만한, 게다가 불편한 진실은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지만 '진실을 찾는 사람들'이 있는 한 세상은 결코 거짓으로 뒤덮이진 않을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무진의 자애학원'이나 '광주의 인화학교' 뿐만이 아닌 세상의 모든 불편한 진실과 힘있게 대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진실의 속성처럼 더디지만 꾸밈없이 날것을 드러내고 교만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진실을 이야기하면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의 관계가 무너지는 걸 두려워하고 싶진 않다.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두려워 진실을 묻어버리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고 싶다. 이런 선문답이 있었다. '만인이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네 갈 길을 가겠느냐' 물론 현실 속에서 잃을 게 많아진 지금은 선뜻 대답이 나오진 못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여전히 '네!'라고 대답을 하고 있다. 진실을 대면하고 진실을 드러낼 수록 잃게 되는 건 잠시지만 얻게 되는 건 오히려 더 크고 영원할 것이라는 걸 알고 새겨야겠다.



[record my mind] - 도가니 마지막 회, 강인호와 서유진의 선택



더 레슬러(The Wrestler), 그 어깨 너머로 들리던 환호와 야유

어릴 적 당시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에 김일을 비롯해 여권부, 그리고 신인으로 보였던 이왕표 등(그 외는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이 거대한 외국인들이 와서 '레슬링'을 했었고 어린 마음에 그들의 모습은 무척 충격적이었다. 어렸기 때문에 그들의 '레슬링'은 사실처럼 받아들였었다. 외국 레슬러가 팬츠에서 무기를 꺼내면 목청이 터지도록 '안돼'를 외쳤고 김일의 머리에서 피가 난 상태로 외국 레슬러를 박치기로 쓰러뜨릴 때면 함성을 질러댔었다. 특히 여권부의 꿀밤공격은 너무너무 통쾌했고 이왕표의 몸을 던지는 드롭킥은 표범처럼 재빨랐다.

흑백TV에서 보던 사람들이 현실로 걸어나와 육중한 몸을 움직이며, 선명한 피를 흘려가며 (쓰러질 때마다 큰 소리가 나던) 합판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링 안에서 링 밖에까지 들리도록 거친 숨을 몰아쉬며 '레슬링'하던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던 난 적어도 김일, 여권부, 이왕표라는 이름은 잊을 수 없게 되었다. 어릴 적 두 눈으로 본 시합만이 진정한 레슬링이라고, 트릭은 전혀 없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어린 나는 나이가 들며 접하게 된 미국의 레슬링에 대해선 '쇼'가 난무한 가짜라고 생각해 관심도 두지 않았었다.

후에 그들의 '쇼'는 생각 이상으로 정교하며 링 안에서의 레슬링은 오랜 훈련과 자기와의 싸움을 통해 실제로 몸을 부딪히고 합을 짜 최대한 화려한 '리얼한 쇼'를 연출하며 때론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는 레슬러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들의 '쇼'를 다시 보게 되었고 그들의 삶에 경외심이 생기게 되었다. 게다가 링 밖의 생활도 그들만의 캐릭터로 살아가길 노력해 팬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다는 걸 알게 되고서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프로페셔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레슬링'은 내게 있어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쉽게 잊혀지지 않는 기억의 한 조각, 흑백과 칼라가 오가는 뚜렷한 장면들을 남겨줬다. 그러니 '반칙왕'같은 영화에서 나오는 '타이거마스크'는 얼마나 많은 감정을 달고 오는 상징이 되었겠나. 그리고 얼마 전 내겐 '나인하프위크'의 섹시하고 '엔젤하트'의 퇴폐적인 이미지로 강하게 남아있던 미키 루크(Mickey Rourke)가 주연한 "The Wrestler"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The Wrestler"는 레슬러를 소재로 하긴 했지만 레슬러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한 '인간', 혹은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게다가 미키 루크의 굴곡많은 삶과 영화 속 랜디의 삶이 오버랩 되면서 이미 많이 알려진 것과 같이 영화 "The Wrestler"는 미키 루크의 '자전적' 영화로 비춰지기도 한다.

영화 속 랜디의 모든 비극은 스스로가 자초한 부분이 많다. 랜디의 과거가 자세하게 등장하진 않지만 딸 스테파니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 그리고 그가 사랑하게 된 캐시디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특히 한 번도 딸을 찾아나서지 않은 레슬러 아버지는 자신의 꿈을 위한 인생을 산 후 더 이상 삶의 에너지를 쏟아낼 수 없을 때에야 겨우 딸을 찾아 고해성사를 한다. 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랜디의 착각이다. 사실 랜디가 스테파니에게 '고백'하면서 우는 장면을 보며 마음은 아프지만 냉정한 시선을 둘 수 있었던 이유는 다 큰 어른의 눈물만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아버지에게 버려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스테파니의 아픔이 함께 느껴져서다. 역시 마찬가지로 캐시디도 나름대로 노력은 하지만 고집스럽고 마초스러운 랜디는 캐시디를 제대로 이해할 리 만무한 것이다. 랜디에게 있어 가정과 사랑은 자신의 삶과 이상에 비하면 그닥 중요한 게 아닌 것이다.

가정(가족)을 지키는 것과 남자(마초)가 자신의 이상을 좇는 것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경우다. 가정을 지키려면 자신의 이상을 낮추던가 일정부분 포기해야 하고 이상을 좇으려면 가족의 아픔 역시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랜디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가 아니라 랜디가 고독해하고 슬퍼하는 모습이 꿈을 잃은 한 남자의 그것이었기 때문에 보는 내내 가슴이 아팠고 내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보게 되었다. 그건 이상과 현실의 틈만큼 짊어져야 할 고통과 힘겨움이며 그로인한 갈등은 '타인'과의 갈등이 아니라 바로 '자신'과의 갈등인 것이다. 그 갈등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죽음에서도 외로움에서도 슬픔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링 위에서 저 멀리 링 아래로 몸을 날릴 수 있는 랜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보며 랜디와 미키루크가 분리되지 않았던 건 미키루크의 삶 역시 영화 속 랜디와 비슷하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내겐 영화 속 랜디가 레슬러가 아닌 우리들의 삶과도 너무나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랜디가 '미키루크'로 투영이 되던 '나'로 투영이 되던 혹은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로 투영이 되던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가 되더라는 것. 미워하지만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레슬러는 언제나 환호와 야유를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자신이 흘린 땀의 양만큼 환호를 받지만 그와 비례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바로 야유를 받으며 링에서 내려와야만 한다. 삶이 그렇다. 결코 자신이 흘린 땀은 스스로를 배신하지도 않을 뿐더러 노력을 멈추는 순간 인생의 링에서 퇴출되는 것이다. 그 어느 순간순간이 아름답지 않고 위태롭지 않을 수가 있을까. 스스로 '파이팅'을 해도 어느 순간 한계를 체감했을 때 느껴지는 공허함과 절망은 늘 주변에 고개 숙여 잠복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상을 좇는다면, 그럴 용기가 남아있다면 링 위로, 아래로 몸을 날릴 각오정도는 하고 있어야 한다.

랜디와 함께 동료 레슬러들이 쇼를 구상하고 연습을 하며 서로의 몸을 때리고 부딪힘에 있어 최선을 다하면서도 서로 존중하고 존경하는 그들의 관계와 삶은 현실에서 보기 드물정도로 이상적이고 아름다웠다. 삶이 아무리 남루하더라도 저들의 삶과 같다면 살 맛 나겠다 싶었다.

영화는 랜디가 몸을 날리면서 끝났지만 우리의 삶은 몸을 날리는 순간부터 비로소 시작이다. 언제나 삶은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지금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부터 다시 현재와 과거를 지나 미래를 열수 있기 때문이다. 참다운 삶을 찾는다는 건 그렇다. '이제야 알겠다'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유효한 것이다.

애니메이션관련 정부 지원제도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연상호 감독의 '지원제도 건의'라는 포스팅을 보고 몇 가지 적어본다.

연상호 감독이 말하는 '지원제도의 설계 개선'은 지원받는 대상자를 기획자, 사장, 회사에서 스태프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이를 '국립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개념으로도 생각하고 있다. 전반적인 의견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또한 발상의 전환이란 측면에서도 무척 신선하다.

연상호 감독의 개인적인 성향이 잘 드러나는 제안으로 보인다. 그가 작품을 만들며 고민하던 중심에는 자신의 작품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스태프들에 대한 처우 및 중요성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기에 지원제도 개선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두 가지 고민을 함께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연상호 감독이 쓴 글의 내용 중에 '크리에이터나 기획 회사에게 돌아가는 것은 작업이 완성된 후 판권에 대한 부분을 적절한 비율로 국립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 나누도록 하는 것'은 좋고 지원제도가 '자신이 전에 투자한 부분을 지원금을 받아 메꾸려고 하는 행위'로 악용될 수 있다는 지적은 옳다.

다만, 몇 가지 노파심과 우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데 그건 지원금을 스태프들의 임금으로 돌리게 된다면 그 어떤 기획사, 크리에이터도 지원제도에 신청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을 뿐더러 신청을 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스태프들과 모종의 계약을 통해 지원금이 역시 스태프들의 통장보다는 기획사나 크리에이터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이건 연상호 감독이 답글에서 말했듯이 '사람의 문제'일 수 있다.)

이는 다양한 편법으로 인해 스태프들의 불안한 처우가 조성될 우려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건데 반복되는 말이긴 하지만 스태프들에게 지원금을 지급한다고 할 때 기획사나 크리에이터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스태프들에게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지원금을 빼돌릴 가능성이 많다. 게다가 스태프들이 기획단계에서 자신의 임금조정에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고 대부분 기획하는 측에서 조정하기 때문에 오히려 저임금으로 기획안을 올릴 가능성이 많다. 결국 '돈'이 어디로 흘러 들어가느냐는 운영의 측면에서 약간의 긍정적 효과가 발생할지언정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란 뜻이다.

NFBC와 같은 '국립애니메이션스튜디오'가 생긴다면 여러가지 시도와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수 있겠지만 현재 상암동에 있는 컨텐츠진흥원이 설립된다는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당시에도 그곳이 마치 '국립애니메이션스튜디오'와 같은 곳이 될 거라는 예측이 무성했었는데 컨텐츠진흥원 또는 그에 배정된 예산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대해 특혜를 선점하려고 하는 몇 개 단체들의 충돌, 의견불일치 등으로 인해 결국 과거를 답습하는 정도의 '선'에서 정리가 된 걸 생각해보면 '설립'보다는 '해법'에 더 고민이 들어가야 하지 않나 싶다. 페어플레이를 할 수 있는, 공신력이 있는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새로운 제도는 또다시 문제점을 양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현재 지원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이 있다면 그건 '지원제도 운영'에 대한 것이다.

지원제도의 운영 핵심에 심사위원들이 있다. 문제는 현재 대다수의 심사위원들이 '글로벌', 'OSMU', '흥행', '다양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신뢰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심사위원 개별의 능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말하는 각 사항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된 데이터 혹은 경험치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심사위원의 구성원을 보면 대체적으로 애니메이션 회사 대표, 애니메이션 PD, 방송국 PD, 대학교수, 각종 행사 기획담당자, 기관 정책담당자 등으로 구성된다. 그들이 말하는 '글로벌', 'OSMU' 등등은 현장에 있는 감독, PD, 스태프들도 이야기하고 판단할 수 있을 정도다. 그들이 말하는 시장에 대한, 혹은 데이터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물론 이는 그들'만'의 문제라고 보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성공한 케이스라는 게 전무한데 어떤 데이터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반드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심사위원이 되어야 한다.(다들 전문가라고 말하고 있으니 할 말이 없다.)

또한 지원제도를 통해 지원금을 지급한 후에 제작되는 과정 등을 제대로 관리하느냐다. 물론 정책담당자들(실무자) 역시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한 적이 있거나 그쪽 분야 종사자일 경우도 많지만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가장 편한 관리는 지원금을 받은 쪽에서 알아서 해오게 하는 방법이다. 어떤 꼼수를 쓰던 간에 서류만, 결과물만 있으면 되는 관리방식이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매니징한다면 프로젝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여러가지 방법들을 함께 고민해줘야 한다. 어려운 관리방식이다. 쉬운 관리방식을 택하면 관리도 쉬울 뿐더라 자신의 위치가 바로 '권력'이 된다. 스태프들에게 직접 돈을 주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프로젝트 관리만 제대로 하면 지원금의 용처를 제대로 관리할 수 있으며 스태프들도 제대로 임금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원제도는 지원제도로만 끝나서는 안된다. 사후처리를 해줘야 한다. 정부지원금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더 많은 곳에서 상영되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영화제에서 본선에 올라가거나 수상을 하는 것만으로 '실적'을 이야기한다. 지원제도가 '영화제 수상작품 만들기 지원제도'가 아닐텐데 사후관리를 너무하지 않는다. 그게 지원금을 받은 회사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그건 현실상황을 정말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큰 회사에서도 TV방송국과 이야기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고 극장 하나 잡아 상영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 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영화 쪽에서는 잘 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더더욱 할 말이 없다. 영화 쪽은 기획사, 투자사가 애니메이션 쪽에 비해 월등히 많다. 아니, 애니메이션 쪽에서는 전문투자사도 없을 뿐더러 전문으로 마케팅을 하는 회사도 드물다. 애니메이션 종사자들은 그 스스로가 모든 걸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다양한 작품들이 만들어지고 다양한 상업적 시도가 이루어지고 그 중에 성공하는 모델이 몇 개라도 등장하도록 지원제도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사위원의 선정부터, 제도의 운영 및 지원제도로 만들어진 작품의 사후관리까지 운영관리제도가 보다 촘촘하게 마련되어야 한다. 만약 '대박'나는 작품으로 '돈'을 벌고 싶은 게 목적이라면 지원제도의 방향성을 좀 더 명확하게 설정해야 한다. 겉으로는 공공의 이익을 위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주식투자자의 심정으로 지원제도를 운영하면 안되는 것이다.

사실, 지원제도는 제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일회성' 역시 한계가 있지 않나 싶다. 자금력이 어느 정도 되는 회사는 가끔 '보충하기 위해' 지원제도를 활용하기도 하고 상황이 좋지 않으니 '지원금'이라도 받아 운영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개인, 소규모 팀, 작은 회사들은 '지원제도'가 아니면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차저차해서 지원금을 받아도 덩치가 작은 쪽은 '지원금의 유효기간'이 끝나면 다시 처음부터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원제도가 단발성인 경우가 많다보니 '한 번 타 먹으면 그만!'이란 심정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스태프들의 안정은 '고용안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다.

반복되는 '일회성'은 '안정적인 미래'를 담보하기가 어렵다. 물론 그 일회성 역시 필요한 곳이 있으니 계속 유지가 되는 것이겠지만 관리할 능력과 의지만 있다면 오히려 '일회성'을 '지속성'으로 전환할 방법은 많다. 지원제도의 성격을 수정보완할 수도 있지만 지원제도에 들어가는 비용을 합리적으로 사용할 방법들도 많다는 뜻이다. 정부시책은 '실적위주'에서 벗어나 애니메이션이 소비되는 시장을 형성하는데 비용을 사용해야 한다.

문득 이런 고민이 생긴다. '지원제도'는 필요악인가. 또는 '지원제도'는 만능(萬能)인가. 이건 분명해 보인다. 현재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을 하는 사람치고 자신의 처지가 불안하지 않은 사람없고 갈수록 미래는 암울하게 보이는데 시장은 형성조차 되어있지 않고 자신의 꿈과 미래를 위해 바쳐야 할 목적이 점점 빛을 잃어간다는 것. 그런 상황에서 '지원제도'는 때론 한줄기 희망이 되기도 하고 절망이 되기도 한다는 것.

국가차원의 어떤 '지원제도'나 애니메이션계의 '시스템', 교육에 대한 '방법과 문제'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지만 아직까지는 자잘한 편린들이라 스스로도 쉽게 정리가 되지 않을 뿐더러 여러가지를 고려하다 보니 글을 쉽게 쓰기가 힘들다. 여기엔 일정부분 '자포자기'라는 심정도 작용하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