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가 없는 것이 도리어 크게 쓰여진다는 말
초(楚)의 은사(隱士) 광접여(狂接輿)가 공자(孔子)에 대해 평(評)하면서,
"산 속의 나무는 유용(有用)하기에 벌채(伐採)되어 자신의 원수가 되고,
기름은 밝은 빛을 내기에 태워져 자신을 태우며,
육계(肉桂)는
사료가 되고 옻은 도료(塗料)가 되기에 베어진다.
유용(有用)의 용(用)만 알고, 무용(無用)의 용(用)은 알려고 하지 않으니
서글픈 일이다고 하였다."
이 말은 공자(孔子)가 인의(仁義)로써
난세를 다스리려는 것을 풍자(諷刺)한 것으로,
조그만 유용(有用)은 오히려 자신을 망친다는
것이다.
無 없을
무, 用 쓸 용, 之 어조사 지
[출전] 莊子 人間世篇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우화가 있다.
"산에 있는 나무는 사람들에게 쓰이기 때문에 잘리어 제 몸에 화를 미치고, 등불은 밝기 때문에 불타는 목숨이 된다.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베어지고, 옻나무는 그 칠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잘리고 찍힌다. 사람들은 모두 유용(有用)의 용(用)만을 알고 무용(無用)의 용(用)을 알려 들지 않으니 한심한 일이다."
이렇듯 인간에게 유용하게 되면 오히려 명대로 살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런 나무들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쓸모가 있는 것이 못된다. 즉 그들이 자신을 망치는 것은 모두 다 유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외물편(外物篇)>에는 이런 말이 있다.
혜자(惠子)가 장자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말은 쓸모가 없소." 라고 하자, 장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쓸모가 없을 알고 나서 비로소 쓸모 있는 것을 말할 수 있소. 저 땅은 턱없이 넓고 크지만 사람이 이용하여 걸을 때 소용되는 곳이란 발이 닿는 지면뿐이오. 그렇다고 발이 닿은 부분만 재어놓고 그 둘레를 파 내려가 황천(黃泉)에까지 이른다면 과연 사람들에게 그래도 쓸모가 있겠소?"
그러자 혜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쓸모가 없소."
이에 장자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쓸모 없는 것이 실은 쓸모 있는 것임이 분명하지 않소!"
유용(有用)의 용(用)과 무용(無用)의 용(用)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에 대한 장자이 입장은 <산목편(山木篇)>의 다음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장자가 산 속을 가다가 잎과 가지가 무성한 거목을 보았다. 그런데 나무꾼이 그 곁에 머문 채 나무를 베려 하지 않았으므로 그 까닭을 물으니,
"쓸모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장자가 말했다.
"이 나무는 재목감이 안 되므로 천수를 다할 수 있구나."
장자가 산을 나와 친구 집에 머물렀다. 친구는 매우 반기며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거위를 잡아 대접하라고 일렀다.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한 마리는 잘 울고 또 한 마리는 울지 못합니다. 어느쪽을 잡을까요?"
주인이 대답했다.
"울지 못하는 쪽을 잡아라."
다음날 제자에게 장자가 물었다.
"어제 산 속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그 천수를 다할 수가 있었는데, 지금 이 집 주인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었습니다. 선생님은 대체 어느 입장에 머물겠습니까?"
장자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쓸모 있음과 없음의 중간에 머물고 싶다. 그러나 쓸모 있음과 없음의 중간이란 도와 비슷하면서도 실은 참된 도가 아니므로 화를 아주 면하지는 못한다. 만약 이런 자연의 도에 의거하여 유유히 노닌다면 그렇지 않게 된다. 영예와 비방도 없고 용이 되었다가 뱀이 되듯이 마음대로 늘였다 줄였다 하듯이 함께 변화하여 한 군데에 집착되지 않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남과 화합됨을 자기의 도량으로 삼는다. 마음을 만물의 근원인 도에 노닐게 하여 만물을 뜻대로 부리되 그 만물에 사로잡히지 않으니 어찌 화를 입을 수 있겠는가!"
출처: http://hanja365.com.ne.kr/story/story_14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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