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글 최규석
애니메이션에서 나름 이름을 알린 친구가 있다. 연상호다. 작품도 좋지만 혼자서 40분에 달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내가 알기로는 이것저것 밥벌이해 가면서 6년쯤 걸렸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작업실에 파묻혀 창작의 고통과 싸우는 고독한 예술가를 상상하겠지만, 그건 예술적 재능보다는 끝없는 단순노동을 견디는 질긴 엉덩이를 더 필요로 하는 일이다.
당연히 “왜 그렇게 긴 시간을 혼자 작업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물어보는 사람은 예술가의 고집이니 창작의 순수성이니 하는 말을 기대하는 듯한데, 대답은 “돈이 없어서”다. 줄 돈이 없으니 혼자 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던 연상호가 국가의 은혜를 입어 팀을 꾸렸는데, 이 팀이 돌아가는 꼴이 좀 특이하다. 커피와 박카스와 라면과 부르스타와 라꾸라꾸 침대 등 온갖 야근과 생활의 흔적이 난무해야 할 애니메이션 작업실이 마치 급조된 유령회사 사무실처럼 휑하다.
오전 10시 출근, 저녁 7시 퇴근, 지각을 하더라도 무조건 칼퇴근, 감독은 야근해도 직원은 퇴근. 여름에는 유급휴가를 가라 하니 스태프들이 오히려 어색하다.
사실 이쪽 동네에선 그러지 않아도 된다. 밥값이나 주면서 밤낮으로 부려먹을 수 있는 세상 물정 모르고 열정이 넘치는, 예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가난과 과로를 버텨낼 기특한 청춘들이 깔린 동네다.
감독은 그들의 열정으로 제 명성을 쌓거나 배를 불리면 된다. 서로가 원하는 일이고
“예술(혹은 문화산업)을 위해서”이니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열정만으로 버틸 수 없게 된, 좋은 기술을 가진 직원들이 판을 떠나고 그들의 빈자리를 새로운 20대들이 채운다. 결국 작업의 노하우는 쌓이지 않고 감독만 북적대는 세상이 된다. 그리고 시장은 사라지고 영화제와 지원금만 남게 된다. 아니 그렇게 됐다.
편한 길을 두고 연상호는 자신을 규제 속에 옭아놓는다. 그게 세상의 상식이고, 애니를 위해서도 좋다고 믿기 때문이다.
직원들이 눈치 보여서 퇴근 못할까봐 더 일을 하고 싶어도(연상호는 일중독이다) 일부러 감독이 먼저 일어서곤 했는데, 초반에 칼퇴근을 낯설어하던 직원들도 요즘은 시간이 되면 알아서들 잘 간다.
“감독이나 사장이 너무 편한 세상이야. 직원들 고생하는 게 대부분 감독이 제 역할을 안 해서 그런 거거든. 직원들이 좀 권리를 챙겨야 하는데 나중에 감독이 될 때 되더라도, 직원일 땐 직원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행복한 스태프 없이는 지속적으로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어. 그럼 감독은 뭐 먹고사느냐고? 스태프들 열정에만 기대서 작품 할 거면 감독 안 해야지. 그 사람들 아니라도 감독 할 사람 많아. 왜 지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 고생시켜. 뭐? 그러면 애니메이션이 사라진다고? 애니가 뭐라고…. 아, 애니 없으면 어때? 상식이 우선이지 예술이 우선이야?
연감독, 안뇽~ 내일 봬요.
근데…나 빡세게 일하고 있는데 시간 되면 쓱 가버리는 스태프들 보면 마음이 참 뿌듯하면서도 억울하다. 하아~!
얼씨구, 돈은 국가가 대고 폼은 지가 다 잡는다.
출처: http://h21.hani.co.kr/section-021159000/2007/11/021159000200711150685001.html
** 지금 만들고 있는 애니메이션 <사랑은 단백질>의 원작자 최규석 작가가 친구인 연상호 감독에 대해 한겨레21에 올린 칼럼이다. 연상호 감독은 자신의 모습을 멋있게 그려주지 않았다고 불평을 하기도 하지만(최규석 작가는 연상호 감독을 꽃미남까지는 아니더라도 잘 그려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 거라... 추측을...) 한국 만화와 애니메이션 계에서 나름 인정받는 이들이 서로에 대해 비판하고 칭찬해주는(비판에 방점!) 관계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특히 이 두 젊은 예술가들은 동시대 젊은 이들에게서 보기 드문 바른 세계관, 인생관, 작품관을 가지고 있다. 이 내용이 혹여 어떤 이들에게는 연상호 감독에 대한 칭찬이 아닌 내용처럼 비추어질 수도 있겠지만 단연코 말하건데 최규석 작가가 말하고 있는 내용은 연상호 감독에 대한 칭찬과 애정임에 분명하다.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한국적 상황에서 칼 출근, 칼 퇴근을 지키는 데가 있을까? 이는 비단 출퇴근에 대한 개념, 시간준수에 대한 개념이 아니다. 모든 작업자들이 최소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데 하고 있는 일로 하여금 영향 받지 않게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복지에 대한 개념이다. 여기엔 분명 연상호 감독이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일에 대한 관(觀)이 드러나고 있다. 또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건 칼 출근과 칼 퇴근 사이, 즉 작업할 시간 동안 작업자들이 놀며, 수다떨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한 사람이 이상적인 시스템을 만들면 그 시스템을 악용하지 않고 제대로 시스템을 활용하는, 지금의 (나도 속해있는) 이 시스템은 정말이지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모 감독이 이끌고 있는 팀은 밤을 새는 게 애니메이션의 열정이라 주장하며 젊은 스태프의 연애조차 작업을 방해하는 불순한 것으로 생각하며 모든 게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믿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연상호 감독이 주장하는 시스템은 아주 상식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 감독의 시스템에 비하면 천국의 그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좋은 시스템, 이상적인 작업방식을 직접 실행한다는 건 사실 감독이나 스태프들이나 쉬운 일은 아니기에 연상호 감독의 저런 '고집'은 주목받아 마땅하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 관계가 얼마나 그리운 때인가. 모두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수행을 제대로 해낼 때 내 삶은 풍요로워지고 윤택해지며 너의 삶도 함께 행복해진다. 그건 조그만 작업집단에서부터 커다란 세계사회까지 널리널리 전염되어야 할 기분좋은 바이러스다. 여기에 하나 더 연상호 감독은 좋은 스태프, 좋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고민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모로 스스로를 학대한다. 물론 그게 좋은 세상 만들기 일환이든 스태프를 아끼는 마음이던, 혹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던 간에 결국 바람직한 행동은 나와 너, 모두를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밑거름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하나, 사실 연 감독이든 스태프든 7시간 되면 누구랄 것도 없이 이렇게 말한다. "퇴근 안 하세요?" 그러면 모두들 "아! 가야죠!"라고 말하며 주섬주섬 자신의 소지품을 챙긴다. 그리고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함께 버스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