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여 회까지 읽은 후 오랫동안
'도가니'를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때론 한 숨에, 때론 긴 호흡으로 겨우 읽어내려갔으나
대면하기조차 버거운, 대면하고서는 숨조차 쉬기 힘든 진실이
가슴을 조여오는 먹먹함으로 가득차 절정에 치닫고 있을 즈음엔
공지영 작가가 내 심장에 대고 속삭이는 듯한
'도가니'를 마주할 용기가 쉽게 나지 않았다.
어쩌다 인터넷에서 '도가니'라는 글자를 얼핏 봤을 때도 애써 외면했었다.
그러다 오늘 우연히 '마지막 회'라는 글자를 보고서야 심호흡 길게 하고
전에 읽다 만 회차를 찾았다.
시간이 좀 오래되어서 내용을 다시 복기라도 해야할까 싶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난 날 마지막으로 읽었던 회차를 보는 순간
90여 회가 되는 내용이 순식간에 하나로 꿰어지며 다시 손가락 무겁게 클릭해
읽어가기 시작했다.
'도가니'에 몰입할 수 있었던 건 단지,
'도가니'가 실제로 있었던 일을 소설로 엮어서가 아니다.
'도가니'에는 이 사회를 대하는 수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고
진실과 거짓, 희망과 절망, 용기와 비겁을 이야기하고 있어서다.
게다가 '도가니'는 정말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 어떤 것도 용서할 수 없되, 그 어떤 것도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희망이 무엇인지 다시 반문해 보는 것.
내가 원하는 가치가 무엇이고 그 가치를 위해 사는 것이 어떤 것임을 생각해 보는 것.
왜, 불행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찾아오는가.
돈은 불행을 잠식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인가.
이 세상에 나서 자라고 떠나기까지
왜 나서, 왜 자라고, 왜 떠나는지
무엇을 위해, 무엇때문에 고통스럽고 힘겨운 삶을 살아야하는지...
'꼬우면 성공해라', '억울하면 출세하라' 따위가 정답인 사회는 정상인가.
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도가니'는
어쩌면 아주 간단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인간다움', '인간답게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
인간은 원래 불평등한 존재였고 지배, 피지배는 어쩔 수 없었다면서
인류학, 인문학까지 들추며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인 후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면 어떨까.
'도가니'는 113회, 114회, 1115회(마지막 회)에 걸쳐
서유진과 강인호의 선택을 이야기한다.
서유진과 강인호는 다른 이유로 무진에 왔지만
같은 목적으로 함께 투쟁했고 서로 의지하며 버텨왔다.
결국 다른 이유로 헤어지게 되었지만 함께 나눴던 목적은 변함이 없었다.
서유진이 옳고 강인호가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둘 다 너무나도, 지극히도 인간적이었고
매 순간 아이들보다 고통받았고 괴로워했다.
두 사람이 각자 선택한 길은 결코 다른 길이라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누가 더 옳다고 누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누구의 선택이 더 현실적이거나 또는 비현실적이라고 구분지을 수도 없을 것 같다.
때론 서유진이, 때론 강인호가 내 모습이 아닐까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그들의 흔들림이, 그들의 나약함이, 그들의 강건함이, 그들의 끈질김이
그들의 눈물이, 그들의 분노가, 그들의 정의로움이, 그들의 절망이
사실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에 서유진이 강인호에게 쓴 편지는
공지영 작가가 나(독자)에게 쓰는 편지이기도 하지만
내가 나에게 쓰는 편지이기도 하고
서유진이 강인호가 아닌 나에게 쓰는 편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편지를 읽으며 마음이 아련했고 모니터가 흐려졌다.
아프지만 희망을, 괴롭지만 용기를, 먹먹하지만 이를 악물었다.
한 없이 슬펐지만 조금은 웃을 수 있었다.
서유진의 편지를 그대로 옮겨둔다.
(문제 시 삭제)
인호
잘 지냈어? 네가 떠나간 지도 벌써 6개월이 넘어가는구나. 아파트로 찾아가 보니까 앞집 아주머니가 네가 그날
아침 급하게 떠났다고 말해주시더라구. 그후로도 여러 번 전화를 했는데 연결이 안 되더니 어느날인가는 결번이라는 안내가 나오더라.
혹시 몰라 이메일을 쓰는 거야. 잘 지내지?
어제 연두 아빠의 장례식이 있었어. 연두 아빠는 연두와 그 엄마의 손을
잡고 평화롭게 돌아가셨어. 연두와 연두 엄마의 곁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걱정 없다고 오히려 우리를 달래주고 가셨어. 정말 좋은
분이었는데. 무진의 바다가 보이는 묘지에 오랜만에 참 많은 사람들이 모였단다. 장례식 끝나고 밥을 먹으면서 연두가 불현듯 네
얘길 꺼냈어. 유리는 아직도 네 이야기가 나오면 울어. 뭐 연두와 유리뿐 아니라도 실은 우리 모두 그 자리에 없는 유일한 사람,
그러니까 강선생, 네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우리는 네가 왜 그 아침 아무 말도 없이 무진을 떠났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네가 참
많이 힘들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어. 협박을 받아 그랬든 혹은 피치 못할 일이 있어 그렇게 떠나야 했든 너는 우리보다 훨씬 더
힘들었을 거라고 말이야. 네 성격에, 오겠다고 해놓고 약속을 어겨야 했으니 얼마나 더 힘들었겠니.
우리 이야기를 좀
할게. 네가 궁금해할 거 같아서 말이야. 나는 그날 도로교통법위반에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었어. 이번에는 보수꼴통이 아닌 좋은
판사를 만났지. 죄를 범했으나 그 뜻이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게 아니라며 벌금 150만원으로 봐주더라구. 받아야 할 벌로 보면
내가 이강석 형제보다 더 중한 벌을 받은 건가? 아무튼 우리 무진의 판사님들이 다 그렇게 너그러운 줄 알았는데 우리 아이들의
항소는 기각되었어. 합의서가 관건이었지. 그리고 윤자애가 아이들 30명을 고소한 사건은 아직도 지지부진 진행중이야. 절대로 용서
못한대. 절대로 말이야. 그러니 이 싸움은 기실 아직도 끝나지 않은지도 몰라.
아이들은…… 이제 그 학교에 다니지
않아. 이젠 박보현 선생까지 복직을 했거든. 학부모들과 최목사님 모두 함께 고민 끝에 연두의 집을 빌려서 연두 어머니께 아이들을
부탁드렸어. 아이들은 근처의 학교로 전학시켰고. 다행히 그 지긋지긋한 최수희가 다른 곳으로 발령받아 가고 나서 새로 온 장학관이
특수학급을 허락해주었단다. 연두네 집에 여자아이들 6명의 기숙사를 꾸몄고 우리는 그것을 홀더라고 부르기로 했어. 홀더. 영어가
아니야. ‘홀로 더불어’라는 우리말이야. 연두 아버지의 병으로 생계가 막막했던 연두 어머니는 딸도 키우고 불쌍한 아이들 밥도
먹이고 돈도 번다며 좋아하신단다. 그리고 남자아이들은, 그 통역사 기억나니? 그 사람이 맡았고. 독지가들이 집을 하나
얻어주었어. 거긴 그러니까 남자 홀더지. 집 때문에 걱정이 많았는데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거 같아. 거기에 민수랑
남자아이들 일곱명이 산단다. 유리는 많이 건강해졌어. 심리치료도 받고 있고. 건강해진 것은 비단 유리뿐은 아니야. 민수는……
놀라지 마. 육개월 동안 키가 15센티나 컸어. 다 이게 맛있는 저녁밥의 힘이란다. 그리고 아이들의 마음은 놀랍도록 컸어. 그
아이들은 이제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폭력을 거부할 줄 알게 된 거야. 가끔 아이들이 대견하게 변한 것을 보면 우리가 꼭 진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드는걸.
오늘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저녁 무진에 다시 안개가 내린다. 저 지긋지긋한 안개,
또다시 모든 빛들이 희미해지고 사람들은 서둘러 문을 닫고 커튼을 내리겠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막으며 들어서는 저 뿌연 안개
속에서 또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 안개를 통과하는 유일한 것, 소리…… 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최목사님은 언제나 아이들에게 말씀하신단다. 우리의 귀도 네 소식을 그리워하고 있어. 혹시라도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우리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네가 보여준 헌신과 사랑을 기억하고 있어. 너는 우리를 잊어도 우리는 네가 늘 그리울
거야. 건강하게 잘 지내길, 그리고 행복하길 빈다.
출처:
공지영의 '도가니'
'도가니'를 다 읽은 사람은 마지막 편지에 대한 느낌이 각별할 것 같다.
[record my mind] - 불편한 진실을 대면하는 힘 -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