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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편지>
김 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님께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트레일러(영화제 타이틀)를 제작한 감독 이 용배입니다.
국제적으로 자랑스러운 영화제 하나 있었으면 하던 한국인의 소망을 우뚝 일궈 온 헌신에 존경과 예의부터 차려야겠지만, 제가 이렇게 무례한 공개편지를 쓸 수 밖에 없는 심정 또한 깊이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이 흘러 전문성이 탄탄하게 쌓인 부산국제영화제야말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영화제 성공모델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아직 그것은 허세이며, 언뜻 화려하게 보였던 축제는 밖으로 내비친 것일 뿐 이미 영화제 내부는 싱싱한 생명을 잃어 주먹구구식이 아니면 어떤 일도 해결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번 영화제의 상징이자 얼굴이자 의미이며, 그래서 영화제의 피를 팔딱거리게 하는 심장이며, 영화의 바다로 들어서게 하는 대문이며, 전국 아니 전세계로부터 찾아온 영화제 손님과 관객을 맞이하는 인사 그 자체인 공식 트레일러가 어떻게 취급되었나를 분명히 밝히려는 것은 이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부디 국민 모두가 사랑하는, 세계 영화인의 자랑으로 부산국제영화제가 거듭나게 하기 위해 자성의 칼날 높이 세우고 실상을 드러내려는 제 호소에 귀기울여주십시오.
이번 트레일러가 엉망으로 훼손된 경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트레일러(총 시간분량 40초)는 9월29일 네가 필름과 사운드 작업을 완료하였습니다. 다음 날(9월30일) 우리 측 프로듀서는 초호 프린트를 시사하여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프린트 작업을 승인했습니다. 애초 계약(64벌)과는 달리 모두 92벌로 늘어난 프린트 작업은 영화진흥위원회 현상실에서 당일 내 마쳐져서 고속열차 택배 편으로 직접 부산(부산 도착은 10월1일)에 보내졌습니다. 이 사실은 영화제 조직위 사무국장과 트레일러 관련 연락업무 담당자에게 각각 메일과 전화로 통지된 바 있습니다.
‘2005 부산국제영화제 트레일러 사고에 대한 공식 사과문’(이하 ‘공식 사과문’, 10월8일 오후 3시51분 사무국장 최윤나 명의로 영화제 홈페이지 내 [피프 공지사항(PIFF News)]에 78호 소식으로 게시)에 따르면 이 프린트 필름들을 10월3일 부산 사무국에서 수령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이것이 사실이라면 10월6일 성대한 개막식을 앞둔 조직위는 10월1일과 2일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새로 나온 영화제 얼굴<트레일러>을 확인조차 안한 것일까요?). 또 ‘공식 사과문’에서는 극장 배포가 촉박하여 프린트에서 이상이 발견된 세 프레임을 임의로 잘라버렸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운드가 흐르고 있는 필름에서 한 프레임일망정 어떻게 영사기술팀 만의 결정으로 그것을 싹뚝 잘라버릴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감독(40초x24프레임=960프레임 밖에 안 되는 트레일러를 만든)을 맡은 저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우선 잘못은 트레일러의 제작을 책임진 저에게 있습니다. 초호 프린트로 기술 점검을 하는데 프로듀서만 보냈기 때문입니다. 우리 측 프로듀서는 유능하게 이번 일을 수행하였고 그가 초호 프린트를 시사하여 이상 유무를 점검하는 절차는 확실했다고 확신합니다. 상식적으로 누가 트레일러 영상이 시작되는 바로 코앞에 세 프레임의 다른 이미지(이 프레임들은 암전에서 보통 21 프레임 선행했던 사운드가 이곳에서 시작되는 이미지와 일치된다는 신호로 사용되는 작업용 표시, 소위 ‘펀치’ 구실을 하는 것으로 네가 필름에서 제거되어 프린트 작업을 하는 것이 보통임. 그래서 이렇게 프린트된 것은 현상실의 실수임.)가 들어갈 수 있다는 의심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하더라도 그 실수를 발견하고 수정작업을 지시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제 잘못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그 필름들과 부산에 같이 내려와 극장에서 상영 사전점검에 들어갔어야 했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도 제 잘못입니다.
조직위 또한 시간상으로 10월3일 아니 4일, 더 최후까지라도, 하물며 절대 마지노 선상에서도 잘못된 트레일러가 확인되었다면, 감독의 책임을 묻고 재작업을 끝까지 요구하여 제대로 된 트레일러를 확보하여 상영에 들어갔어야 했습니다. 이미 프린트 필름이 아닌 베타 테이프 등은 완벽하게 제작되어 영화제 사무국에 도착해 있었기 때문에 트레일러가 개막일에 맞춰 도착하지 못했으면 관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디지털 방식으로도 상영은 얼마든지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제 조직위 측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영사기술팀이 세 프레임을 잘라내었는지도 모른 채 영화제는 시작되었습니다. 더구나 그렇게 세 프레임을 소거한 트레일러가 배달된 극장에서는 영사기용 리더 필름을 이어붙이는 과정에서 소거된 상태가 시작 시점으로 알고 엉뚱한 작업을 했던 것입니다. 즉, 그나마 선행했어야 하는 암전상태의 사운드 신호가 담긴 프레임들마저 제거해 버리는 상식 이하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제 트레일러는 사운드 신호가 21 프레임씩 밀리는 누더기 상태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영화 전문가를 자처하는 조직위 관계자는 개막일 첫 야외상영에서 사운드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올바로 대처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도 화려한 야외상영에서 있을 수 있는 사운드 처리기술의 문제라 여기고 강력하게 항의하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다음날(10월7일) 오전 10시30분 첫 상영작을 보다말고 필름 상태를 확인하고자 영사기술팀에 달려갔습니다. 실무자는 제가 공연한 시비를 일으킨다는 듯이 짜증내면서 “세 프레임이니까 사운드에 큰 차이가 없는 것 아니냐”고 항변하는 데 저는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사무실에서는 출품된 작품을 살피며 자르고 이어 붙이는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아르바이트 실무자들이 독자적인 판단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세 프레임 정도를 잘라낸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아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래서는 10회를 축적한 전문적인 국제영화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변방의 작은 독립영화제에서는 있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여기서는 실제로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저는 목이 다 말랐습니다.
저는 고집스럽게 아직 극장으로 배달되지 않은 여벌의 트레일러 상태를 직접 확인했습니다. 바로 서울에 있던 프로듀서에게 네가 및 프린트 재작업을 지시하고 금일(10월7일) 중으로 새로운 프린트를 만들어 보낼 것을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대책을 상의하러 헐레벌떡 찾아간 영화제 사무국은 너무 안일했고 대처능력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저의 언성과 표정으로 읽고 나서야 긴장하는 듯 했습니다. 저는 재작업을 신속히 진행하여 제대로 된 트레일러가 상영되도록 할 터이니 이와 관련된 사과문을 영화제 데일리 뉴스에 내일 날짜(10월8일)로 게재할 것을 단호하게 요구하였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 현상실도 책임을 피해가려고만 했습니다. 마침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 중인 영화진흥위원회의 실무 고위 책임자들이 함께 전화에 매달리면서 재작업은 속력을 붙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조직위 사무국장에게 프린트 필름이 잘못되어 있으므로 저녁 7시 이후 상영 프로그램에서는 트레일러를 상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제안(부재중이라 전화 메시지로)도 했습니다. 밤에 우리 측 프로듀서가 직접 가지고 내려올 새 프린트로 다음날부터 정상적인 트레일러를 확실하게 상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10월7일 오후 6시 경에 이루어진 조직위 부위원장과의 통화에서 저는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트레일러를 안 틀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상징적 의미에서라도 오늘 7시 상영에서는 현재 엉망진창 상태인 트레일러를 상영하지 말아줄 수 없겠는가라고 애원했습니다. 이는 트레일러 감독의 명예 손상이기 이전에 국제영화제의 명실상부한 생명이자 얼굴을 망치는 행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단호하게 끊어진 전화 통화는 망가진 신뢰성을 다시 잇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정녕 잘못된 트레일러를 상영할 수 밖에 없었다면, 최소한 상영 전에 사과하는 코멘트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여야 10년이 경과한 국제영화제를 축하해주러 찾아 온 해외 손님들과 관객에게 가짜 트레일러를 진짜인 양 상영하는 사기행위는 멈출 수 있었습니다. 조직위의 태도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정 무렵 새로운 트레일러가 프로듀서와 함께 도착했지만 저는 신뢰를 저버린 영화제 조직위 측에 그것을 바로 넘길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10월8일) 영화제 데일리 뉴스에는 이미 예상되었던 대로 잘못된 트레일러 상영에 대한 사과문마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부산영화제가 정말로 사랑받는 국제영화제로 자격과 전문성을 갖추게 하기 위해서라도 저는 고집이 필요했습니다. 오후 2시까지 사과문을 실은 데일리 게재 약속이 없으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계속 상영하고 있으니 이제 소용이 업세 된 새 프린트 필름들은 모두 불태워버리겠다는 최후통첩이었습니다. 결국 2시 15분 전에 조직위 사무국장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내일(10월9일) 사과문을 게재하겠다는 말이었고, 영화제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올려놓겠다는 약속까지 보태졌습니다. 역시 든든한 국제영화제는 올바른 결정을 하고야 마는구나하며 안심했습니다. 저는 바로 새 프린트들을 직접 챙겨 들고 영사기술팀을 찾아가 95벌(전달 시간은 오후 2시30분경임)의 프린트를 넘겼습니다. 이번에는 표시를 분명하게 해서 가져 온 암전의 사운드 부분을 다치지 않게 영사기용 리더 필름을 연결할 것과 시급히 전체 상영 극장에 보내 새 트레일러로 교체해서 상영할 것 등을 충분하게 설명했고, 일부러 인수인계서에 서명도 하였습니다. 이제 오늘 저녁부터는 정상적인 트레일러가 상영되는 진짜 영화제가 시작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 역시 헛물이 되었습니다. 그날(10월8일) 저녁 7시 상영 역시 저와 우리 측 스텝들이 점검한 4개관 중 2개관에서는 여전히 문제가 있었습니다. 새 트레일러가 공급될 시간이 훨씬 넘었는데도 40초짜리 영화제 공식 트레일러는 제대로 상영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미숙한 영사 사고이기 이전에 트레일러에 대한 영화제 조직위의 안이한 취급이 문제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사과문 약속도 정상적인 트레일러를 확보하기 위한 거짓이었습니다. ‘공식 사과문’은 인터넷 홈 페이지에만 올려졌던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돌출식이 아니어서 많이 읽혀질 리 없는 소식란에 한 목록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과의 내용 역시 책임전가에만 급급했고, 단순히 세 프레임의 소거 사고인 양 위장된 채로. 아니나 다를까 10월9일자 데일리에는 약속한 사과문이 게재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관객들 손에 쥐어질 데일리 뉴스에 애초 사과문을 인쇄 상태로 게재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드러났던 것입니다.
10월9일 남포동 지역의 상영관을 돌아 본 저는 완전히 절망이었습니다. 트레일러가 왜 교체되어야하는 지를 알고 있는 기술 스텝은 전혀 없었습니다. 언제 새 트레일러가 도착했는지도 모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 상영관에서는 어제 트레일러로 그냥 틀었다는 답변까지 듣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영화제 조직위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까? 조직위까지 사전에 인지했으면서 잘못된 트레일러가 버젓이 상영되고 있었다는 말이 영화제 기간에 더 이상 퍼져나가지 않도록 최소한의 대응만 한 것인가요? 이런 주먹구구식 상영체계로는 10년을 넘긴 국제영화제다운 당당한 얼굴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인터넷일망정 ‘공식 사과문’을 띄운 것으로 40초짜리 트레일러 감독에 대한 충분한 배려와 공식적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잘못하는 경우입니다. 저는 그런 배려나 허위에 가득 찬 책임론을 거부합니다. 제가 트레일러 훼손 사고를 지적하고, 그 원인에 있어 제 책임도 공감하며 새 트레일러까지 급행으로 전달한 까닭이 최우선이어야 합니다. 지금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직은 애정을 가져보려는 그 까닭마저 실종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 더 이상 부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 모든 일정을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와 버렸습니다. 9일간의 축제가 40초의 짝사랑으로, 21프레임의 이별로, 아니 3프레임의 상실로만 이어지는 기억은 오래 갈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부산이 제 기억에서 0프레임으로 남는 절대 무관심이 되지 않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관객과 진정 편안하게 만나는 영화제로 이끌어주시길....
2005년 10월 10일
이 용배 올림
김 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님께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트레일러(영화제 타이틀)를 제작한 감독 이 용배입니다.
국제적으로 자랑스러운 영화제 하나 있었으면 하던 한국인의 소망을 우뚝 일궈 온 헌신에 존경과 예의부터 차려야겠지만, 제가 이렇게 무례한 공개편지를 쓸 수 밖에 없는 심정 또한 깊이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이 흘러 전문성이 탄탄하게 쌓인 부산국제영화제야말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영화제 성공모델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아직 그것은 허세이며, 언뜻 화려하게 보였던 축제는 밖으로 내비친 것일 뿐 이미 영화제 내부는 싱싱한 생명을 잃어 주먹구구식이 아니면 어떤 일도 해결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번 영화제의 상징이자 얼굴이자 의미이며, 그래서 영화제의 피를 팔딱거리게 하는 심장이며, 영화의 바다로 들어서게 하는 대문이며, 전국 아니 전세계로부터 찾아온 영화제 손님과 관객을 맞이하는 인사 그 자체인 공식 트레일러가 어떻게 취급되었나를 분명히 밝히려는 것은 이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부디 국민 모두가 사랑하는, 세계 영화인의 자랑으로 부산국제영화제가 거듭나게 하기 위해 자성의 칼날 높이 세우고 실상을 드러내려는 제 호소에 귀기울여주십시오.
이번 트레일러가 엉망으로 훼손된 경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트레일러(총 시간분량 40초)는 9월29일 네가 필름과 사운드 작업을 완료하였습니다. 다음 날(9월30일) 우리 측 프로듀서는 초호 프린트를 시사하여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프린트 작업을 승인했습니다. 애초 계약(64벌)과는 달리 모두 92벌로 늘어난 프린트 작업은 영화진흥위원회 현상실에서 당일 내 마쳐져서 고속열차 택배 편으로 직접 부산(부산 도착은 10월1일)에 보내졌습니다. 이 사실은 영화제 조직위 사무국장과 트레일러 관련 연락업무 담당자에게 각각 메일과 전화로 통지된 바 있습니다.
‘2005 부산국제영화제 트레일러 사고에 대한 공식 사과문’(이하 ‘공식 사과문’, 10월8일 오후 3시51분 사무국장 최윤나 명의로 영화제 홈페이지 내 [피프 공지사항(PIFF News)]에 78호 소식으로 게시)에 따르면 이 프린트 필름들을 10월3일 부산 사무국에서 수령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이것이 사실이라면 10월6일 성대한 개막식을 앞둔 조직위는 10월1일과 2일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새로 나온 영화제 얼굴<트레일러>을 확인조차 안한 것일까요?). 또 ‘공식 사과문’에서는 극장 배포가 촉박하여 프린트에서 이상이 발견된 세 프레임을 임의로 잘라버렸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운드가 흐르고 있는 필름에서 한 프레임일망정 어떻게 영사기술팀 만의 결정으로 그것을 싹뚝 잘라버릴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감독(40초x24프레임=960프레임 밖에 안 되는 트레일러를 만든)을 맡은 저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우선 잘못은 트레일러의 제작을 책임진 저에게 있습니다. 초호 프린트로 기술 점검을 하는데 프로듀서만 보냈기 때문입니다. 우리 측 프로듀서는 유능하게 이번 일을 수행하였고 그가 초호 프린트를 시사하여 이상 유무를 점검하는 절차는 확실했다고 확신합니다. 상식적으로 누가 트레일러 영상이 시작되는 바로 코앞에 세 프레임의 다른 이미지(이 프레임들은 암전에서 보통 21 프레임 선행했던 사운드가 이곳에서 시작되는 이미지와 일치된다는 신호로 사용되는 작업용 표시, 소위 ‘펀치’ 구실을 하는 것으로 네가 필름에서 제거되어 프린트 작업을 하는 것이 보통임. 그래서 이렇게 프린트된 것은 현상실의 실수임.)가 들어갈 수 있다는 의심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하더라도 그 실수를 발견하고 수정작업을 지시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제 잘못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그 필름들과 부산에 같이 내려와 극장에서 상영 사전점검에 들어갔어야 했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도 제 잘못입니다.
조직위 또한 시간상으로 10월3일 아니 4일, 더 최후까지라도, 하물며 절대 마지노 선상에서도 잘못된 트레일러가 확인되었다면, 감독의 책임을 묻고 재작업을 끝까지 요구하여 제대로 된 트레일러를 확보하여 상영에 들어갔어야 했습니다. 이미 프린트 필름이 아닌 베타 테이프 등은 완벽하게 제작되어 영화제 사무국에 도착해 있었기 때문에 트레일러가 개막일에 맞춰 도착하지 못했으면 관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디지털 방식으로도 상영은 얼마든지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제 조직위 측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영사기술팀이 세 프레임을 잘라내었는지도 모른 채 영화제는 시작되었습니다. 더구나 그렇게 세 프레임을 소거한 트레일러가 배달된 극장에서는 영사기용 리더 필름을 이어붙이는 과정에서 소거된 상태가 시작 시점으로 알고 엉뚱한 작업을 했던 것입니다. 즉, 그나마 선행했어야 하는 암전상태의 사운드 신호가 담긴 프레임들마저 제거해 버리는 상식 이하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제 트레일러는 사운드 신호가 21 프레임씩 밀리는 누더기 상태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영화 전문가를 자처하는 조직위 관계자는 개막일 첫 야외상영에서 사운드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올바로 대처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도 화려한 야외상영에서 있을 수 있는 사운드 처리기술의 문제라 여기고 강력하게 항의하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다음날(10월7일) 오전 10시30분 첫 상영작을 보다말고 필름 상태를 확인하고자 영사기술팀에 달려갔습니다. 실무자는 제가 공연한 시비를 일으킨다는 듯이 짜증내면서 “세 프레임이니까 사운드에 큰 차이가 없는 것 아니냐”고 항변하는 데 저는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사무실에서는 출품된 작품을 살피며 자르고 이어 붙이는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아르바이트 실무자들이 독자적인 판단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세 프레임 정도를 잘라낸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아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래서는 10회를 축적한 전문적인 국제영화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변방의 작은 독립영화제에서는 있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여기서는 실제로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저는 목이 다 말랐습니다.
저는 고집스럽게 아직 극장으로 배달되지 않은 여벌의 트레일러 상태를 직접 확인했습니다. 바로 서울에 있던 프로듀서에게 네가 및 프린트 재작업을 지시하고 금일(10월7일) 중으로 새로운 프린트를 만들어 보낼 것을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대책을 상의하러 헐레벌떡 찾아간 영화제 사무국은 너무 안일했고 대처능력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저의 언성과 표정으로 읽고 나서야 긴장하는 듯 했습니다. 저는 재작업을 신속히 진행하여 제대로 된 트레일러가 상영되도록 할 터이니 이와 관련된 사과문을 영화제 데일리 뉴스에 내일 날짜(10월8일)로 게재할 것을 단호하게 요구하였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 현상실도 책임을 피해가려고만 했습니다. 마침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 중인 영화진흥위원회의 실무 고위 책임자들이 함께 전화에 매달리면서 재작업은 속력을 붙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조직위 사무국장에게 프린트 필름이 잘못되어 있으므로 저녁 7시 이후 상영 프로그램에서는 트레일러를 상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제안(부재중이라 전화 메시지로)도 했습니다. 밤에 우리 측 프로듀서가 직접 가지고 내려올 새 프린트로 다음날부터 정상적인 트레일러를 확실하게 상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10월7일 오후 6시 경에 이루어진 조직위 부위원장과의 통화에서 저는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트레일러를 안 틀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상징적 의미에서라도 오늘 7시 상영에서는 현재 엉망진창 상태인 트레일러를 상영하지 말아줄 수 없겠는가라고 애원했습니다. 이는 트레일러 감독의 명예 손상이기 이전에 국제영화제의 명실상부한 생명이자 얼굴을 망치는 행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단호하게 끊어진 전화 통화는 망가진 신뢰성을 다시 잇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정녕 잘못된 트레일러를 상영할 수 밖에 없었다면, 최소한 상영 전에 사과하는 코멘트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여야 10년이 경과한 국제영화제를 축하해주러 찾아 온 해외 손님들과 관객에게 가짜 트레일러를 진짜인 양 상영하는 사기행위는 멈출 수 있었습니다. 조직위의 태도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정 무렵 새로운 트레일러가 프로듀서와 함께 도착했지만 저는 신뢰를 저버린 영화제 조직위 측에 그것을 바로 넘길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10월8일) 영화제 데일리 뉴스에는 이미 예상되었던 대로 잘못된 트레일러 상영에 대한 사과문마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부산영화제가 정말로 사랑받는 국제영화제로 자격과 전문성을 갖추게 하기 위해서라도 저는 고집이 필요했습니다. 오후 2시까지 사과문을 실은 데일리 게재 약속이 없으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계속 상영하고 있으니 이제 소용이 업세 된 새 프린트 필름들은 모두 불태워버리겠다는 최후통첩이었습니다. 결국 2시 15분 전에 조직위 사무국장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내일(10월9일) 사과문을 게재하겠다는 말이었고, 영화제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올려놓겠다는 약속까지 보태졌습니다. 역시 든든한 국제영화제는 올바른 결정을 하고야 마는구나하며 안심했습니다. 저는 바로 새 프린트들을 직접 챙겨 들고 영사기술팀을 찾아가 95벌(전달 시간은 오후 2시30분경임)의 프린트를 넘겼습니다. 이번에는 표시를 분명하게 해서 가져 온 암전의 사운드 부분을 다치지 않게 영사기용 리더 필름을 연결할 것과 시급히 전체 상영 극장에 보내 새 트레일러로 교체해서 상영할 것 등을 충분하게 설명했고, 일부러 인수인계서에 서명도 하였습니다. 이제 오늘 저녁부터는 정상적인 트레일러가 상영되는 진짜 영화제가 시작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 역시 헛물이 되었습니다. 그날(10월8일) 저녁 7시 상영 역시 저와 우리 측 스텝들이 점검한 4개관 중 2개관에서는 여전히 문제가 있었습니다. 새 트레일러가 공급될 시간이 훨씬 넘었는데도 40초짜리 영화제 공식 트레일러는 제대로 상영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미숙한 영사 사고이기 이전에 트레일러에 대한 영화제 조직위의 안이한 취급이 문제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사과문 약속도 정상적인 트레일러를 확보하기 위한 거짓이었습니다. ‘공식 사과문’은 인터넷 홈 페이지에만 올려졌던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돌출식이 아니어서 많이 읽혀질 리 없는 소식란에 한 목록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과의 내용 역시 책임전가에만 급급했고, 단순히 세 프레임의 소거 사고인 양 위장된 채로. 아니나 다를까 10월9일자 데일리에는 약속한 사과문이 게재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관객들 손에 쥐어질 데일리 뉴스에 애초 사과문을 인쇄 상태로 게재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드러났던 것입니다.
10월9일 남포동 지역의 상영관을 돌아 본 저는 완전히 절망이었습니다. 트레일러가 왜 교체되어야하는 지를 알고 있는 기술 스텝은 전혀 없었습니다. 언제 새 트레일러가 도착했는지도 모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 상영관에서는 어제 트레일러로 그냥 틀었다는 답변까지 듣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영화제 조직위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까? 조직위까지 사전에 인지했으면서 잘못된 트레일러가 버젓이 상영되고 있었다는 말이 영화제 기간에 더 이상 퍼져나가지 않도록 최소한의 대응만 한 것인가요? 이런 주먹구구식 상영체계로는 10년을 넘긴 국제영화제다운 당당한 얼굴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인터넷일망정 ‘공식 사과문’을 띄운 것으로 40초짜리 트레일러 감독에 대한 충분한 배려와 공식적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잘못하는 경우입니다. 저는 그런 배려나 허위에 가득 찬 책임론을 거부합니다. 제가 트레일러 훼손 사고를 지적하고, 그 원인에 있어 제 책임도 공감하며 새 트레일러까지 급행으로 전달한 까닭이 최우선이어야 합니다. 지금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직은 애정을 가져보려는 그 까닭마저 실종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 더 이상 부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 모든 일정을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와 버렸습니다. 9일간의 축제가 40초의 짝사랑으로, 21프레임의 이별로, 아니 3프레임의 상실로만 이어지는 기억은 오래 갈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부산이 제 기억에서 0프레임으로 남는 절대 무관심이 되지 않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관객과 진정 편안하게 만나는 영화제로 이끌어주시길....
2005년 10월 10일
이 용배 올림
부산에서 올린 소식을 접한 분들이라면 다 아는 내용. 부산국제영화제를 위한 트레일러가 훼손되었고 이를 시정하기 위한 노력이 관철되지 않음으로 인해 제작에 참여한 감독 및 피디, 스텝들은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일종의 배신감을 갖게 되었다. 보다 나은 영화제가 되도록 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닌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고 여전히 방만한 운영과 고자세를 유지하는 영화제에 자성의 기회를 주고자 이용배 감독님이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에게 공개편지를 띄웠다. 위의 내용은 그 편지의 전문이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테지만 이 편지가 나오기 전까지 소위 행사 주체의 의해 갈기갈기 찢겨진 트레일러를 봐야만 했던 감독의 심정은 어땠을 것이며, 손상된 트레일러를 보게 된 국내외 관객들에게는 어떤 말로 설명을 해야 한단 말인가. 공개편지는 10년 영화제에 싸움을 거는 도발이 아니라 문제 해결에 대한 조속한 시정을 원하는 영화인의 마음이자, 영화제가 명성에 걸맞는 모양새를 갖추게 되길 원하는 관객의 마음인 것이다.
이를 통해서도 아무런 답변이나 조치가 없다면 영화제 스스로가 자격없음을 시인하는 것과 다름없다. 여전히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고 있는 영화제 측이 답답하기만 하다. 행사는 이름 값으로만 굴러가는 게 아니다. 게다가 그 이름 값은 부산국제영화제를 위해 음으로 양으로 열의와 성의를 다한 영화제 스탭, 감독, 배우, 관객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한낱 '트레일러'가 아니라 영화제의 얼굴인 '트레일러'를 이렇게 다루는 정도라면 그들의 마음엔 국내외 감독, 관객들을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멘트조차도 다 거짓인 것이다. 머리와 가슴이 텅 빈, 몸집만 거대한 상징물로서의 영화제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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