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11일 수요일

자살(自殺)이란 이름의 타살(他殺)

연예인,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 기업인, 가정주부, 샐러리맨, 노인 등 남녀노소, 직업불문하고 한국에서는 많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 대학 등록금 때문에, 학업 성적 때문에, 빚 때문에, 악플 때문에, 우울증 때문에, 생활고 때문에, 병원 치료비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자살(自殺)'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죽을 용기로 살아야 한다'거나 '죽을 용기가 있었으면 살 용기도 있지 않느냐'며 안타까움을 호소하고 '망자'를 추모한다.

난 '자살'이란 행위에 대해 반대할 생각이 없다. 물론 찬성한다며 '자살'하려는 사람들을 부추기려는 생각은 더더욱 없다. 단지, 자신의 삶을 마감하려는 결단을 존중한다는 것이고 스스로를 파괴할 권리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궤변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스스로의 삶, 스스로의 신체에 대한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다. 생명은 부모님이 주셨으나 탄생 이후 스스로의 삶이 서게 된 이후부터는 스스로 결정할 권리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살'은 절대 불허할 뿐 아니라 자살로 위장된 '타살(他殺)'은 당사자의 책임인 '자살'로 내모는 경우가 많다.

내가 생각하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살'은 '안락사'와 같은 경우를 말한다. 안락사가 아니더라도 스스로가 삶을 포기하겠다고 판단한 경우라면 그 결정은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어떤 무리의 사람들은 스스로 '고귀하게 죽을 권리'를 주장하는 것 조차도 좋지 않은 파급효과를 낳을 것이라며 극구 반대한다. 때로는 '신(神)'의 이름을 빌어서까지 막아선다. 스스로 삶을 정리할 권리는 막무가내로 무시되어도 좋은 것이 아니다.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어떤 이들의 개인적 성취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

자살로 위장한 '타살'이란 건, 우리가 접하는 대다수의 자살 소식이란 죽음의 끝으로 내몰려 벌어진 '타살'의 흔적이란 것이다. 위에 거론한 자살의 이유들 중에 이 사회가 조장하지 않은 게 하나라도 있을까.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살을 접하면 일단 자살을 선택한 사람을 안타까워하고 애도한다. 그리고 그 원인에 대해서 몇 마디 거들고는 나 몰라라 한다. 자살로 몰아가는 원인을 바꾸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은 커녕 지속적인 방치를 통해 '타살'을 하고 있음에도 '자살'이란 표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면죄부를 얻게 된다.

자살을 선택한 이들의 선택(결정)을 존중해줘야 한다. 그리고 죽음의 원인을 사회에서 또는 공동으로 제공한 부분이 있다면 사회의 구성원들은 반드시 그 원인을 찾아내어 하나씩 해결해가야 한다. 스스로의 손에 책임을 쥐지 않는다면 대중은 사회의 '공업(公業)'으로 타살을 하게 되는 셈이다. 사실 이 사회는 원인해결보다는 더 나아가 죽음을 판매하고 죽음을 이용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악용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에 대중은 무감할 뿐이고 쉽게 이용당하고 있다. 스스로가 '공공의 타살'의 일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시선을 죽음의 뒷편으로 돌려야 한다.

스스로 결정한 죽음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존중할 수 있을 때 '안락사'던 '자살'이던 그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될 수 있으며 삶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sense datum] - ...두고 보도록 하자.

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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