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3일 화요일

잊혀진 김용철 변호사, 잊혀지지 않는 삼성



많은 이들은 유명하거나(그것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면 더더욱), 힘 있거나, 다수에 속하는 사람(집단)이 하는 얘기는 별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그들이 주장하는 게 다소 억지라 할지라도 또는 그들의 행실에 구린내가 풍기더라도 그들의 영향력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가진 유명세에 기대어 대부분 받아들이거나 어떻게든 받아들여주려고 알아서들 노력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명해지거나 힘을 갖게 되거나 공적인 자리에 얼굴을 자주 들이밀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아서 떠받들어 준다. 크고 작은 비리, 불법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회에 미칠 파장까지 계산기를 두드려가며 계산해 주고 변호해 주고 보호해 준다.

반면에 소수자, 힘없는 자, 알려지지 않은 자가 하는 이야기는 왠지 꺼림직하고 믿음이 안 가고 논리만 풍성해서 머리만 아플 뿐이다. 확실한 증거를 보여줘도, 직접 겪은 일이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은 별로 믿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들을 동조하는 순간 자신도 유명하지 않고 힘없는 자들과 도매급으로 함께 취급될까 두려워서인지 애써 외면하고 싶어한다. 제아무리 완벽한 논리와 명백한 증거를 들이댄들 유명하지도 않은데다 소수자고 힘도 없는 자라면 오리려 그에게 상황논리로 역공을 취하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다시는 힘있고 유명한 자에게 대들지 말라고 훈계한다.

물론 예를 들기 위해 '유명 vs. 무명', '힘있음 vs. 힘없음' 등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너그러이 바라보면 그다지 과장된 내용도 아니다.


김용철 변호사가 양심선언을 한지도 1년이 훌쩍 넘었다. 삼성은 무혐의 처리를 받았지만 목숨을 걸고 양심을 좇아 삼성의 비리를 고발한 김용철 변호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거나, 키워준 은혜를 배신한 사람쯤으로 기억되거나 또는 받아먹을 거 다 받아먹고 또 무언가를 원하는 파렴치한 정도로 기억되는 게 전부인 것 같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삼성은 대한민국의 동량이고 대한민국의 원동력이며 대한민국의 미래다.

김용철 변호사는 언론의 주목을 받은지 몇 개월 후에 그가 예측한대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으며 그런 후에 (용감하게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그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희망없는 대한민국에서 분투하는 외로운 사람의 쳐진 어깨를 보는듯해서 마음이 편치가 않다. 물론 '삼성재판' 이외에도 이땅에서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끊임없이 일어났기 때문에 '삼성'에만 집중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잊혀질 줄이야. 법원에서 '무혐의 판결'을 내리는 순간 삼성은 아무런 죄가 없는, 아무런 혐의가 없는 깨끗한 기업으로 거듭나고 김용철 변호사는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렸다. 검찰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건 '음모론'을 이야기하는 것 정도로 치부되고 삼성에 대해 비판의 화살을 거두지 않는 건 '대한민국이 망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치환되고 있으니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었거나 너무 이른 발언이지 않았나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다.

언제쯤 변화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며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될까. 한 사람의 양심선언(또는 폭로)만으로도 대기업의 비리, 정치인과 정당의 부정부패가 철저히 조사받고 처벌받을 수 있게 될까. 이젠 후안무치한 일도 양지에서 드러내놓고 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으니 그런 희망을 품는 것 자체가 무의해져버린 것일까. 박노자씨의 말마따나 지금 현 상황에서의 변화라는 건 기껏해야 '보수'에서 '또다른 보수'로의 자리바꿈 정도니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진보가 힘을 더 갖지 않는 한, 의식이 좀 더 깨어나지 않는 한은 말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마련되는 건 대부분 '한 개인'으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지만 변화의 완성을 위해서는 그 '개인'을 지지하고 힘을 함께 해주는 '수 많은 개인'들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20090612 추가 :
[한겨레21 인터뷰 링크] “있는 놈, 잘난 놈에게는 법도 굴복한다는 것”
[VS] 빵장수로 변신한 김용철 전 삼성 법무팀장 “대법원의 에버랜드 무죄판결은 주류사회 견고함 보여준 선고”

댓글 3개:

  1. trackback from: 김용철 변호사와 제프리 와이건
    다음 글은 촬영감독 김병권님 블로그에서 퍼왔으며 글 쓴 사람은 SBS 남상석님입니다. 어쩌면 삼성 비리와 김용철님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양식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무척 잘 표현해 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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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분 어떻게 되셨는지 궁금했는데 삼성이 무죄판결 받았으니 상황이 또 달라지셨겠죠?

    한국인은 참 빨리 잊는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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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leona - 2009/06/08 09:45
    삼성 무죄판결 받았다는 사실이 참 웃기고 씁쓸할 뿐입니다. 세상은 변할 수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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